메뉴 닫기

롯을 구한 아브라함(창 14:1-16)

교회에서 상처받고 쓰라린 고통을 당하는 경우가 많은 데, 왜 굳이 우리는 교회 공동체 안에 있어야 하는가?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려도 충분하고 오히려 더 말씀에 집중할 수도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가능하면 모이는 것을 추구해야 할까?

.

.

<동물의 왕국>이라고 하는 프로그램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런 프로그램에 보면, 저 아프리카에 있는 여러 동물들이 어떻게 살아가는가? 어떻게 지내는가? 하는 것들을 종종 볼 수가 있는데요. 아프리카 초원의 그 넓은 곳에 사자들이 있고, 그리고 그 옆에 얼룩말들이 있는 장면들을 본 적이 있습니다. 사자가 있다고 해서 얼룩말들이 다 도망가 버리는 것이 아니죠. 왜냐하면 거기에 물이 있고, 거기에 먹을 것이 있기 때문에, 그곳에 있어야만 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런 초식동물들이 있는 곳에는, 그 초식 동물들을 잡아먹기 위한 맹수들이 그 주변에 어슬렁거리면서 그 초식 동물들을 잡아먹으려고 호시탐탐 노리는 장면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맹수라고 할지라도, 아무리 사자라 할지라도, 초식 동물들을 함부로 공격하지는 못합니다. 그 초식동물들은 연약하지만, 얼룩말이나 영양이나 이런 것들은 다 공격적인 능력은 없지만, 그래도 함께 둘러 모아 있으면서 사자나 이런 맹수들이 다가오게 되면 함께 모여서 물리치는 것을 통해서 서바이벌하는 모습을 종종 볼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상황 가운데서 사자가 기회를 보아서 동물들을 잡아먹는 경우가 있는데요. 주로 어떤 동물들이 희생양이 되냐면, 혼자 그 무리에서부터 뛰쳐나온, 따로 떨어져 나온 짐승이 있으면, 쉽게 사자의 밥이 되는 경우를 볼 수가 있습니다. 저는 그런 장면을 보면서 영적인 교훈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을 하는데요. 어쩌면 우리들은 사탄의 공격에 취약한, 마치 얼룩말과 같은, 영양과 같이, 참 나약한 존재가 우리 인생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표현하셨냐면, 얼룩말이라고 표현한 건 아니고, 양으로 우리를 비유해 주신 적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0장 16절 말씀에 보면,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내는 것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양처럼 굉장히 취약한 존재라고 하는 사실을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공격하려고 하는 그런 사단 마귀는 무엇에 비유했냐면, 사자에 비유하곤 합니다. 베드로전서 5장 8절 말씀에 보면, “근신하라. 깨어라. 너의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라고 그렇게 비유해 주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런 영적인 공격 앞에서, 마귀의 그런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그 공격 앞에서, 우리가 우리를 보호해야 되는데요. 이런 동물의 왕국에서 볼 수 있는 그런 걸 통해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지혜가 있다고 한다면, 우리가 함께 모여서 함께, 공동체를 이루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고 하는 그런 교훈을 얻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를 이루어서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데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면서, 우리들로 하여금 함께 서로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가면서 신앙생활을 하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 말씀하시면서,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를 창설하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개인이 혼자 있다고 한다면, 쉽게 영적인 공격을 당할 수가 있겠고, 쉽게 넘어질 수 있지만, 우리가 함께 공동체를 이루게 된다고 하면, 서로가 영적인 도움을 주고받아서 그런 사탄의 공격으로부터 이겨낼 수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종종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교회를 다니면서 상처를 받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주방에서 사역을 하다가 상처를 받기도 하고요. 또한 직분자 선거를 하면서 내가 떨어지면 또 상처를 받기도 하고요. 또 사람들이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 그리고 무심코 행했던 그런 행동 하나 때문에 상처를 받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어서, 그때마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내가 교회에 다니는 것보다는 혼자서 조용히 신앙생활을 하는 게 더 낫겠다고 하는 그런 생각을 하시는 분들이 종종 있습니다. 왜 내가 교회에 가서 상처를 받고, 왜 내가 교회에 가서 이런 어려움을 당하는가? 그냥 나 혼자 성경 말씀 읽고, 나 혼자 기도하고, 나 혼자 하나님과의 관계를 잘 가지면서, 신앙생활을 하면 되지, 내가 왜 이 교회에 나와서 이런 어려움을 당하는가라고 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에서부터 물러나려고 하는 그런 경향들이 종종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공동체를 떠나서 혼자 신앙생활 하는 것은 아주 영적으로 위험하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해야만 합니다. 혼자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아주 위험하고, 더 나아가서 믿음을 잃어버리기가 쉽다고 하는 점을 우리가 인식해야 됩니다.

요즘 코로나 상황이 되다. 보니까 벌써 1년이 넘었잖아요? 1년이 넘으면서,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리면서,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려도 되는구나.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리니까, 다른 사람 신경 쓰지도 않고, 오히려 더 은혜받는 경험을 하게 되면서, 정말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다른 어떤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온라인 예배가 보편화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함께 모여서 예배하는 것의 중요성을 결코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전염에 전혀 대비하지 않은 채, 무조건 많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다가 전염병에 걸리는 어리석음을 그렇게 취해도 안 되겠지만, 우리가 전염병에 걸리는 것에 대해서 철저하게 방비를 하면서 대비를 하면서, 함께 모여 예배할 수 있는 그런 방법을 찾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루이 14세가 했던 말이라고도 하고요. 마키아벨리라고 하는 사람이 군주론이라고 하는 책에서 했던 말이 하나 있는데요. 아주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무슨 말이 있냐면, divide et impera라고 하는 말입니다. “나누어서 통치하라”라고 하는 그런 말이죠. 어떻게 군주가 다수인 백성들을 어떻게 다스릴 수 있는가? 그 다수의 저항을 어떻게 군주인 소수가 다스릴 수 있겠는가? 그 방법이 무엇이냐면 백성들을 나누어 버려서, 하나가 되지 못하게 하고, 자꾸만 나누어 버려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가 되지 못하게 해서 통치해야, 그들을 장악하고 그들을 통치할 수 있다고 하는 그런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상대방을 쓰러뜨릴 수 있겠는가? 함께 모이면 힘이 커지기 때문에, 공격하지 못하기 때문에, 저 상대를 쓰러뜨리기 위해서는, 서로 이간질해 버리고, 서로 나누어지게 만들어 버리고 흩어지게 만들어서, 그래서 공격해야 승리한다고 하는 것이 divide et impera라고 하는 그런 전략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사탄도 우리를 그런 식으로 공격을 하게 되는데요. 그러한 공격에 대항하여 우리가 수비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이냐면, 함께 모으는 겁니다. 함께 하는 것이죠. 사자가, 아무리 맹수가, 얼룩말이나 영양들을 함부로 공격하지 못하는 이유는 함께 모여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모여 있던 그 가운데서, 어떤 어린 새끼 하나가 떨어져 나오면, 쉽게 공격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가 함께 신앙생활을 하지 않고 혼자 그 공동체를 벗어나게 되면, 결국 우리가 영적으로 위험하다고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기억할 필요가 있을 줄로 믿습니다.

오늘은 창세기 14장의 말씀을 읽었는데요. 이 말씀을 보면, 정말 우리가 지금 이야기한 이 말이 진리이구나라고 하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당시의 고대 시대의 전투 이야기가 오늘 본문에 기록되어 있는데요. 당시에 여러 부족들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그돌라오멜을 중심으로 한 4개의 부족이 소돔과 고모라를 중심으로 한 5개 부족과 싸워서 전쟁을 하는 가운데, 그돌라오멜을 중심으로 한 4개 부족이 이긴 이야기가 기록돼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공격해서, 거기에 있는 사람들을 잡아가고 재물을 탈취해서 그렇게 끌고 가게 되었는데요.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소돔과 고모라라고 하는 곳에는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살고 있었고, 결국 롯은 전투 가운데서 끌려가게 되고, 모든 재산이 빼앗겨버리는 그런 어려운 일을 당하게 된 겁니다.

그 소식이 아브라함에게까지 들려졌고, 아브라함은 그때 자기 집에서 기른 군인들 318명의 용사들을 데리고 뒤쫓아가서, 조카 롯을 구해내고 재산을 되찾아왔다고 하는 이야기가 오늘 성경에서 기술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먼저 이 본문을 우리가 살펴보면서 아브라함과 롯이 서로 떨어져 살아야 했던 그 일로 인해서 빚어진 그 불행에 우리가 먼저 주목해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아브라함과 롯은 갈등이 생겨서, 결국 두 사람이 헤어지게 되는 그런 안타까운 일을 경험한 바가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롯이 가난했을 때는 별 문제가 없었는데요. 그들이 부자가 되어서 수많은 양들을 가지게 되었을 때, 아브라함의 목자들과 롯의 목자들 사이에 서로 싸움이 일어난 겁니다. 그래서 두 집안이 함께 살 수가 없어서, 하는 수 없이 롯이 아브라함의 곁을 떠나게 되었는데 다행히 평화적으로 떠났습니다.

서로 갈라지는 그 상황 가운데서 우리가 배워야 될 점이 있는데요. 이 아브라함과 롯은 서로 문제가 생겼을 때, 서로 치고받고 싸우면서 그래서 상대방이 죽을 때까지 서로 싸운 것이 아니라, 평화적으로 신사적으로 대화를 해서 평화적으로 갈라서는 그런 결정을 했다고 하는 점은 우리가 배워야 할 점입니다. 왜냐하면 갈라디아서 5장 14절에서 15절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어떻게 멸망할까?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그랬습니다.

싸우면 어떤 한 사람은 이기고, 한 사람은 지는 것이 아니라, 싸우게 되면 함께 망하게 되어 있는 것인데, 함께 싸우려고 하는 그 순간에 아브라함과 롯이 싸우지 않고, 평화적으로 헤어질 수 있었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어쩌면 배워야 할 그런 모습입니다. 물론 가장 좋은 것은 아니죠. 가장 좋은 것은 무엇입니까? 최선은 무엇입니까? 최선은 서로 협력하고 서로 사랑하고 함께 협력하는 것이 가장 좋은 길일 겁니다. 그것이 함께 서로 사랑하고 협력하는 것이 가장 좋은 길인데, 그런데 종종 문제가 생겨서 함께할 수 없다고 한다면, 평화로운 방법을 선택하면서 헤어지는 방법밖에 없는 것이죠.

물론 그때 물질을 포기하고 사람을 선택할 수 있다면 제일 좋지만, 사람들은 물질을 포기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결국 헤어지게 되는 것인데요. 차선책으로 갈라지면서 이렇게 평화적으로 갈라선 것은 그나마 다행한 일이었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갈라진 것으로 말미암아 얻은 치명적인 결과가 무엇이냐면, 위험에 처해 있을 때 도움을 줄 수가 없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쪽에 있고 롯이 이쪽에 있었기 때문에, 서로 헤어져 있었기 때문에, 지금 그돌라오멜을 중심으로 한 그 4개 부족 연합군들이 소동과 고모라를 쳐들어왔을 때, 그 롯 옆에 아브라함이 없는 겁니다. 아브라함과 318명의 군인들이 함께 있었다고 한다면, 함께 대응을 하고, 함께 싸워서 물리칠 수가 있었는데, 바로 그 순간에, 전쟁의 순간 가운데, 아브라함은 롯 옆에 없었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롯은 잡혀가게 되었고, 모든 재물들은 다 빼앗겨 버리는 그런 안타까운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이죠.

영적인 면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가 있겠는데요. 우리가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를 만들어서 함께 신앙생활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왜냐하면 영적인 측면에서도 늘 사탄의 공격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 사탄의 공격이 있을 때, 우리가 함께 신앙생활을 하고 함께 영적으로 도와주고 힘을 북돋아주면서, 함께 일어설 수 있도록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관계로 신앙생활을 해 나가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아마 여기에 계신 분들은 질문을 던질 겁니다. 목사님 내가 교회에 다니면서 내가 영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받는 것 같은 느낌을 잘 못 받아요.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들도 많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영적인 도움을 못 받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사실은 받고 있는 거예요. 마치 가정과 마찬가지입니다. 가정에 가면 누가 있습니까? 아버지, 어머니가 있고 자녀들이 있습니다. 어머니, 아버지가 있고 자녀들이 있어서 한 가정이라고 하는 그 울타리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데, 자녀들의 느낌에는 어떤 느낌이 드나요? 나는 이 가정에 있으면서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이 가정을 이루며 살고 있다고 하는 것이 무슨 이득이 있고, 무슨 유익이 있을 것이냐고 그렇게 느낄 겁니다.

하지만 우리가 분명하게 잘 아는 것은 그런 가정이라고 하는 울타리가 있기 때문에, 그 가정 안에서 우리 자녀들이 안전하게 자라는 거예요. 우리 부모님들이 자녀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 무엇이냐 하면, 함께 있는 거예요. 함께 있는 함께 있는 것 그 자체가 엄청난 유익을 주는 것이고, 영적인 안정감을 주는 것이고 정말 큰 도움을 주는 것이죠. 그런데 그것을 잘 느끼지 못해요. 그런데 언제 느끼느냐? 그 가정을 떠나보면, 내가 외롭구나. 내가 정말 힘들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도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도대체 내가 교회를 다니면서 상처만 받고, 교회 다니면서 여러 가지 아픔만 경험하고 무슨 유익이 있을 것인가라고 아무도 교회의 유익에 대해서 생각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지만, 사실은 이런 공동체 안에 있다고 하는 것이 엄청난 영적인 유익이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할 수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다윗이 언제 넘어졌나요? 다윗이 넘어진 것은 다윗과 함께 있던 모든 사람들이 전쟁터에 나가고 혼자 왕궁에 남아 있었을 때였습니다. 함께 있었던 그 자리에서 많은 사람들이 떠나가 버리고 혼자 왕궁에 있을 때, 그는 범죄의 길로 나아가게 됩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것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하와가 혼자 있을 때, 사탄이 그를 유혹하게 된 겁니다. 만일 그 자리에 아담이 함께 있어서, 함께 이야기를 하고, 함께 대응했다고 한다면, 거기서 이겨낼 수가 있는 것이죠.

그런데 혼자 있음으로 말미암아, 어쩌면 그런 유혹에 넘어갈 수가 있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의 권면은 무엇인가? 히브리서 10장 23절에서부터 25절의 말씀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우면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이것이 성경의 권면입니다. 어쩌면 혼자 있고 싶은 그런 마음들이 많이 들 때, 함께 모여서 예배하고 함께 신앙생활을 해나가는 그것이 중요하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아브라함은 조카 롯이 끌려갔다고 하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냥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318명의 용사들을 데리고 가서 구해왔다고 성경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순간에 아브라함이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었다고 하는 사실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요? 아브라함은 이 순간에 그동안 조카 롯이 나에 대해서 좋지 않게 했던 일들을 떠올리면서, “그거 참 쌤통이다. 잘 됐다. 시원하다.” 하면서 도와주러 가지 않았을 그런 가능성도 있습니다.

사실 우리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죄성이 너무나도 많아서, 좋은 것을 기억하기보다는 늘 나쁜 것을 더 많이 기억합니다. 이게 우리들의 문제죠 사실 따지고 보면 장점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그동안 나에게 사랑을 베풀었던 것이 훨씬 더 많습니다. 아브라함과 롯의 관계도 마찬가지죠. 아브라함이 저 갈 데야 우르 지방에서 나올 때 누가 함께 했습니까? 조카 롯이 함께 한 거예요. 힘들 때 도와주고 같이 울어주고 같이 도와주면서, 그 힘들고 어려운 타양 살이에 함께 동반자가 되어 주었던 사람이 롯입니다. 롯과 함께 어려운 일들을 이겨냈고, 어려운 것들을 다 처리해내고, 그런 엄청난 일들을 같이 했었을 겁니다.

수많은 인생을 롯과 함께 같이 살면서, 수많은 유익과 그런 도움을 많이 받았을 것인데, 그런데 그 롯과 아브라함 사이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이 무엇이냐면, 양을 먹이는 문제를 가지고 제 목동들 사이에 서로 싸움이 일어날 때였습니다. 그때 굉장히 기분이 나빴겠죠. 왜 양보하지 않고 이러나? 그래서 아브라함이 기억한다고 한다면, 롯이 나에게 잘해주었던 것을 기억하기보다는 롯이 나에게 나쁘게 했던 것만을 기억하기가 쉽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잘해준 것은 95%에요. 잘못해준 것은 5%밖에 안 돼요. 그런데 그 잘못한 준 것만 생각나는 것이 우리들의 마음이에요.

그래서 아브라함도 롯이 잘못했던 것을 생각하면서, 이런 이 순간에 롯을 향해서 도움을 주지 않고 도와주지 않고 그냥 모른 척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이 순간에 아브라함은 롯이 자기에게 잘못했던 것을 기억한 것이 아니라, 롯이 자신의 혈육이라고 하는 것과, 그리고 그가 내가 사랑해야 될 사람이라고 하는 것을 깨닫고 가서 도와준 것이죠.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은 이 순간에 돕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고 할지라도 상대가 너무나도 크기 때문에 이길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하는 그런 생각 때문에 피해서 도와주지 않을 결정을 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4개 부족이 연합을 하고 있기 때문에, 318명의 용사들을 데리고 가서 싸운다고 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어서, 그랬다가는 괜히 나도 큰 손해만 입을 수 있겠다고 하는 생각을 하게 되면 아브라함도 도와줄 수가 없었을 겁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등장하는 제사장이나 레윈들이 왜 강도 만난 자를 보고서도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었습니까? 성경은 그 이유를 정확하게 대고 있지는 않지만, 아마도 그런 마음 아니겠어요? 괜히 건드렸다가 내가 손해 보는 건 아니겠는가? 그런 마음이 왜 없겠습니까? 근데 놀랍게도 아브라함은 그런 걸 생각하지 않고 롯을 향해서 달려갔어요. 왜 달려갔을까요? 사랑 때문이죠. 로스에 대한 사랑. 비록 그가 나를 버리고 소돔과 고모라로 가버렸다고 할지라도, 그를 향한 사랑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 아브라함은 그 롯을 버릴 수가 없는 겁니다.

나중에 창세기 18장에 가면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겠다고 하실 때도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는 겁니다. “하나님, 제발 그 소돔과 고모라 성을 좀 살려주십시오”. 우리 조카 옷이 있는 그곳, 그곳을 위해서 기도하면서 하나님 앞에 엎드린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그 사랑 때문에 이런 결정을 하는 것이죠.

결국 이 아브라함은 자신의 집에서 기른 용사들을 데리고 가는데 318명이라고 구체적인 숫자를 기록한 이유가 뭐겠습니까? 많아서 기록했을까요? 적어서 기록했을까요? 아마도 적어서 기록했을 것 같아요. 318명, 아무리 많이 해봤자 318명밖에 안 되는 그 숫자들을 데리고, 4개 부족 연합군과 더불어 싸우려고 목숨을 걸고 달려가서 아브라함이 건져왔다는 이야기를 기록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런데 알고 계십니까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사랑하셨어요. 하나님께서도 저와 여러분들을 사랑해 주셨습니다. 어쩌면 우리들의 모습이 롯의 모습과 비슷할 겁니다. 롯은 아브라함과의 관계가 틀어지자 저 좋은 땅을 향해서 나아가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갔다가 멸망을 당할 위기에 처하게 됐습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들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너무나도 완악한 것뿐이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보다는 내 욕심대로 살아가고, 탐욕 가운데 살아가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보다는 하나님의 뜻과 정반대의 길로 걸어가고 있는, 우리들 하나님의 이름에 먹칠을 하며 살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을 본다고 한다면, 심판하셔도 마땅한 그 우리들을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셔서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고 우리를 위하여 피 흘려주심으로 말미암아 구원해 주신 놀라운 은혜의 하나님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있음을 기억하며, 주님의 은혜 앞에 겸손하게 감사함으로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나라 감독 리 아이작 정(Lee Isaac Chung)이라고 하는 사람이 만든 <미나리>라고 하는 영화가 아주 인기입니다. 오래전부터 선댄스 영화제를 비롯해서 골든글로브 등 여러 상을 받았다고 하는 소문이 많이 있어서, 나오면 봐야지 나오면 봐야지 했는데 봤습니다. 혹시 보셨습니까? 그런데 대단한 영화는 아니더라고요. 근데 이제 그 장면 가운데 마지막 장면을 보니까 참 인상적인 장면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스토리가 무엇이냐 하면, 뭔가 해보려고 하는데 안 되는 스토리예요. 아이를 돌보기 위해서 한국에서 할머니가 오게 됐는데, 할머니가 도움을 주러 왔는데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짐만 되는 겁니다. 뇌졸증에 걸려서 중풍에 걸려서, 한쪽 몸을 쓰지 못하는 자기 자녀들에게 짐만 되는 그런 상황이 돼 버렸어요. 그래도 그 할머니가 가족을 돕겠다고 싶어서, 쓰레기를 태우다가, 몸을 잘 쓰지 못하니까, 불이 번져버리고, 자녀들이 1년 내내 농사해서 지어놓은 그 수확한 그 창고를 다 불로 태워버린 거예요. 도와주려고 하는데, 오히려 태워먹은 그 할머니. 너무나도 허탈하고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나 같은 쓸모없는 인간 있어서 뭐 하나? 하는 그런 마음으로 어디론가 투덜투덜 걸어가는 거예요. 아마 그 마음은 내가 이 집 안에 소용이 없으니, 그냥 어딘가 사라지고 싶다고 하는 그런 마음으로 길을 걸어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완전히 혼이 빠져가지고, 불은 지금 저기서 붙어 있는데, 혼자 걸어가는 장면이 나와 그런데, 그때 꼬마 아이들이 할머니를 찾아 나가는 거예요. 데이빗이라고 하는 꼬마 아이가, “할머니, 어디 가요? 할머니, 어디 갑니까?” 하면서 막 달려서 할머니 앞을 가로막아요. “할머니, 가지 마요.” 하고 바로 근데 그 데이빗이라고 하는 아이는 어떤 아이냐면, 심장에 문제가 있는 아이예요. 뛰면 안 되는 아이예요. 그런데 뛰면 무리가 나서 죽을 수도 있는데, 그 아이가 할머니를 찾겠다고 뛰는 겁니다. “할머니, 가지 마요.” 왜? 사랑하기 때문에.

그 모습이 바로 어쩌면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보시는 모습이에요. 어쩌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는 아무런 소용도 없고, 늘 죄를 짓고 늘 실망만 안겨드리는 인생이 우리들의 모습인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살리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그 아들을 보내주시고, 사랑해 주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놀라운 은혜를 우리가 받았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오늘 또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 올리며 살아드리는 그런 결단들이 우리들의 삶 가운데 있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 사랑을 또한 우리가 받았으니, 우리가 만나는 사람 한 사람 한 사람 나에게 사랑을 베푸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나의 원수가 된 사람들까지라도 사랑하며, 하나님의 사랑으로 품으며 하나님의 사랑의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Loading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