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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앞에서의 기다림(삼상 22:3-5)

3 다윗이 거기서 모압 미스베로 가서 모압 왕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어떻게 하실지를 내가 알기까지 나의 부모가 나와서 당신들과 함께 있게 하기를 청하나이다 하고 4 부모를 인도하여 모압 왕 앞에 나아갔더니 그들은 다윗이 요새에 있을 동안에 모압 왕과 함께 있었더라 5 선지자 갓이 다윗에게 이르되 너는 이 요새에 있지 말고 떠나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 다윗이 떠나 헤렛 수풀에 이르니라

아둘람 굴로 피신한 다윗은 산적 두목과 같은 생활을 했습니다. 그 기간이 얼마나 오랫동안이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 기간이 힘들고 어려웠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절망적이고 괴로운 기간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시편 133:1)라는 말처럼, 그 안에서 서로 위로가 되고 큰 힘이 되었을 것이 때문입니다.

아둘람 굴에서 일단의 추종 세력들을 모은 다윗은 모압 땅 미스베로 갔습니다. 그리고 모압 왕에게 자신의 부모를 부탁하였습니다. 이렇게 부탁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다윗에게는 모압 민족의 피가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다윗의 증조할머니는 모압 여인으로 나오미의 며느리가 되었다가 나중에 보아스의 아내가 된 룻이었습니다. 다윗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모압 왕에게 맡기고 이제는 자신을 따르는 추종자들과 함께 고난의 길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이 길은 아무 의미가 없는 길이 아니었습니다. 어쩌다 보니까 맞이하는 길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살려고 애쓰는 가운데 만나는 고통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 고난은 하나님이 다윗을 향해 어떤 뜻을 가지고 계시는가를 추구해나가는 구도의 고난이었습니다. 다윗은 모압 왕에게 부탁하면서,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어떻게 하실지를 내가 알기까지 나의 부모가 나와서 당신들과 함께 있게 하기를 청하나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기 위한 순례의 행진을 시작한 것입니다. 우리가 다윗의 영성에서 본받아야 할 것이 있다면, 바로 이점입니다.

다윗은 고난을 당할 때 고난만 바라보지 않고, 그 고난을 있게 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고난을 주시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무엇인지 발견하기 위하여 순례의 길을 떠난 것입니다. 아프면, 아픈 것만 바라본 것이 아닙니다. 슬프면, 슬픈 것만 바라보며 신세를 한탄하지 않았습니다. 괴로우면 괴로운 것만 생각하며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다윗은 하나님에 대해 질문을 던졌습니다. 도대체 하나님께서 어떤 생각으로, 어떤 계획으로 나에게 이런 고난을 주시는가? 이런 일들이 일어나게 하시는가? 이런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사울의 모습과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사무엘상 28장을 보면, 사울의 군대와 블레셋의 군대가 전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울 왕은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선지자로도, 꿈으로도, 우림이나 둠밈으로도 답이 없었습니다. 그런 상황에 이르게 되자, 사울은 신접한 여인에게 찾아가 죽은 사무엘의 영을 불러내었습니다. 표면적으로만 보면 사울이나 다윗 모두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어 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사울은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목적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경배의 대상이 아니라, 그저 이용의 대상이었을 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적절하게 이용하여 자신의 뜻을 이루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울은 전쟁을 앞두고 사무엘이 오지 않자 그냥 자신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가 아니라, 제사를 이용해서 전쟁에서 승리하고 싶은 마음이 급했을 뿐입니다.

반면 다윗은 고난에서부터 빨리 벗어나야겠다는 것보다도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신 뜻이 무엇인지를 알고 싶어 했습니다. 다윗은 사울처럼 신접한 여인을 찾아가지 않았습니다. 다윗이 한 것은 기다리는 것뿐이었습니다. 아버지를 모압 사람들에게 맡기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다렸습니다. 그 기다림은 하나님이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행위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갓 선지자를 보내셔서 말씀해주셨습니다. 이 요새에 있지 말고 떠나서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는 말씀이었습니다(삼상 22:5). 그래서 다윗은 그곳을 떠나 유대 땅 헤렛 수풀로 갔습니다. 갓 선지자는 우리에게 그렇게 익숙한 이름은 아닙니다. 사무엘 선지자에 비하면 무명의 선지자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무명의 선지자를 통해서 다윗의 길을 인도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며, 우리의 경배를 받아야 할 대상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목적에 따라 춤추어야 할 분이 아닙니다. 만일 우리들에게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다면, 그런 고난이 지나가게 해달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고난이란 결코 즐거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들으시고 그 고난을 우리에게서 옮기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라고 고난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고난만 없애 달라고 하는 것은 옳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고난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묻지도 않은 채, 고난만 없애 달라고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계획이 무엇인지 물어야 합니다.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몸에 가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없애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세 번씩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도 바울을 통해서 수많은 기적이 일어났지만, 정작 자신의 병을 고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결국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발견했습니다. “그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네가 약한 데서 강하여 짐이니라.”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기도 가운데 얻은 결론은 십자가의 쓴잔을 마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시는 것은 모두 선물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주시는 것이고, 우리의 영적인 유익을 위해서 주시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것이 고난일지라도 그렇습니다. 욥에게 주신 고난, 요셉에게 주신 고난, 다윗에게 주신 고난, 성도들에게 주신 고난 등등.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저 온실 속의 화초로만 놔두시지 않습니다. 진정으로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라면, 정말 지혜로운 부모라면, 자녀를 온실 속에만 두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가 되신 주님께서 왜 우리를 이런 상황 속으로 몰아넣고 계시는가에 대하여 깊이 묵상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이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떻게 행하기를 원하시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대체로 하나님의 뜻은 그런 상황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오히려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18) 또한, 그런 상황 속에서도 오히려 사랑을 베풀고 원수를 용서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1-2) 또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절망 가운데 좌절해버리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찬송을 받으실 하나님께 찬양을 올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 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욥 1:20-22) 또한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내 원수가 종일 나를 삼키려 하며 나를 교만하게 치는 자들이 많사오니,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내가 주를 의지하리이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을 찬송하올지라.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혈육을 가진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시 56:2-4)

결정론적으로 모든 것을 그저 운명에 맡긴 채 살아가라는 말이 아닙니다. 결정론(determinism)이란 과거의 원인이 미래의 결과가 되며, 이 세상의 모든 사건은 이미 정해진 곳에서 정해진 때에 이루어지게 되어 있었다는 이론으로 이슬람교 신자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삶의 태도입니다. 그들은 인쉬알라(이게 다 하나님의 뜻이다)를 외칩니다. 가장 극단적인 결정론적 삶의 태도입니다. 내가 늦게 온 것도 다 하나님의 뜻이고, 이런 운명에 사는 것도 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면서, 아무런 개선의 의지가 없이 그저 운명에 맡긴 채 사는 삶의 태도인데, 거지로 살면서도 나아지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세계관입니다. 우리가 그런 삶의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는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우리들의 자유의지가 서로 상충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100% 우리들의 노력으로 모든 것을 이루었다고 말해도 될 만큼, 우리는 우리의 노력에 따라 결과가 나오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100%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로 이루어졌다고 고백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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