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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을 살리는 신호(삼상 20:17-23)

17 다윗에 대한 요나단의 사랑이 그를 다시 맹세하게 하였으니 이는 자기 생명을 사랑함 같이 그를 사랑함이었더라 18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내일은 초하루인즉 네 자리가 비므로 네가 없음을 자세히 물으실 것이라 19 너는 사흘 동안 있다가 빨리 내려가서 그 일이 있던 날에 숨었던 곳에 이르러 에셀 바위 곁에 있으라 20 내가 과녁을 쏘려 함 같이 화살 셋을 그 바위 곁에 쏘고 21 아이를 보내어 가서 화살을 찾으라 하며 내가 짐짓 아이에게 이르기를 보라 화살이 네 이쪽에 있으니 가져오라 하거든 너는 돌아올지니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네가 평안 무사할 것이요 22 만일 아이에게 이르기를 보라 화살이 네 앞쪽에 있다 하거든 네 길을 가라 여호와께서 너를 보내셨음이니라 23 너와 내가 말한 일에 대하여는 여호와께서 너와 나 사이에 영원토록 계시느니라 하니라

요나단은 다윗에게 맹세하였습니다.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려 한다면,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혼인예식에서 신랑과 신부가 서로에게 맹세하는 이유는 서로가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죽을 때까지 그 사랑을 변하지 않고 사랑하겠다는 맹세를 하는 이유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요나단과 다윗이 동성애를 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하지만 요나단은 진정으로 다윗을 사랑하였습니다. 그에게 다윗은 그저 지나가는 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마음을 다해 아끼고 위해주는 대상이었습니다. 요나단은 진정으로 다윗을 위했고, 진정으로 사랑하였습니다. 요나단의 다윗에 대한 사랑은 마치 자신을 사랑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에게 일어나는 일을 그저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서로 신호를 주고받았습니다. 마치 군대에서 암구호를 하듯이 신호를 정했습니다. 요나단이 활을 쏘면서 시종에게 “보라 화살이 네 이쪽에 있으니 가져오라”라고 말하면 무사한 것으로 알고 다윗은 복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보라 화살이 네 앞쪽에 있다”라고 말하면, 다윗은 도망가야 합니다. 그 신호는 아무나 알아 차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이 아닌 사람이 들으면 그 말은 단지 화살을 찾기 위한 지시사항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다윗에게 그 말은 생명을 살리는 말입니다.

요나단이 다윗에게 마샬(신호, 비유)을 말하기로 했던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마샬(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비유는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쉽게 들려주기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외인들에게는 그 비밀을 감추기 위한 것이기도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그 비유를 듣기는 들었지만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들에게는 감추어진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똑같은 말씀인데, 어떤 사람에게는 생명을 살리는 생명에 이르는 냄새가 되기도 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사망에 이르게 하는 냄새가 됩니다(cf. 고후 2:16). 예수님도 우리들을 그저 바라만 볼 수 없었습니다. 우리를 파멸시키려는 사탄의 손아귀에서 예수님은 우리를 건지시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셨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주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하십니다. 그 옛날 요나단은 다윗이 자신이 일러준 말을 듣고 생명을 건지기를 원했던 것처럼, 예수님도 우리들에게 생명의 말씀을 해주십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 10:2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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