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트민스터 성경연구소

가장 슬펐던 부활절

관리자 2017.07.12 17:06 조회 수 : 9

필라델피아에서 목회를 할 때였다. 우리 교회는 미국 교회당을 빌려서 주일 오후에 예배를 드리는 작은 규모의 교회였다. 그렇게 작은 교회에 부임하여 목회를 한 지 3년 만에 우리는 교회당을 마련하게 되었다. 새 예배당은 원래 있었던 지역에서 30분이나 멀리 떨어진 곳으로 운전해서 와야 하는 교회당이었지만, 온 교우들은 기쁨으로 가득했었다. 그 기쁨은 한국에 있는 교회가 교회당을 마련했을 때 느끼는 기쁨 그 이상이었다. 왜냐하면 그 동안 미국 교회당을 빌려서 예배를 드리면서 많은 셋방살이의 설움을 경험했기 때문이었다. 미국 교회당을 빌려 쓰는 동안 교회당의 시설들이 망가지면 그 모든 책임이 우리에게 돌려지기도 했었고, 김치와 같은 냄새나는 음식을 먹을 때에는 눈치를 보면서 먹어야 했었는데, 자체 교회당을 마련하게 되었으니 이제부터는 마음껏 모든 일을 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자체 교회당이 생긴 후에 맞이한 첫 번째 부활절은 우리 교회의 축제의 날이었다. 당시 필라델피아 지역에 있던 교회들은 부활절이 되면 새벽에 연합예배를 드리는 것이 하나의 전통이었고, 또한 저녁에는 함께 모여 연합 찬양예배를 드리는 것도 또 하나의 전통이었다. 그런데 우리 교회가 새로운 교회당을 얻게 되었으니 우리 교회에서 부활절 연합 찬양예배를 드리기로 한 것이다. 필라델피아 지역에 있는 모든 교회의 성도들이 우리 교회에 모여서 찬양을 부르고 부활을 기념하는 축제 중의 축제가 될 것으로 기대하였다.

 

우리 교인들은 이 행사를 위해서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교회를 청소하기도 하고, 화단을 가꾸고, 성가대는 나름대로 최선의 노력을 다해서 멋진 찬양을 준비했고, 여전도회는 그날 오신 외부 손님들에게 대접할 음식을 만드느라고 분주했다. 모두가 수고하면서도 그 얼굴에는 행복이 가득했고, 그 어느 한 사람도 힘들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없었다. 새벽부터 이어지는 행사에 피곤함도 있었지만 모든 사람들이 기쁨으로 그날 저녁을 준비했었던 것 같다.

 

이제 약속된 시간이 다가오게 되자 필라델피아의 각 지역에서 사람들이 우리 교회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하나씩 준비 상황을 점검해가면서 교회당 이곳저곳을 다니고 있을 때였다. 어떤 집사님이 내게 헐레벌떡 달려와 다급한 목소리로 말을 했다. “목사님, 이애자 권사님이...” 그 집사님은 말을 차마 잇지 못하고 울었다. “무슨 일이에요?” “권사님이 쓰러지셨어요. 도로 한 가운데에서...” 그 소리를 듣고 나는 달려갔다. 필라델피아 각 지역에서 우리 교회로 몰려오는 성도님들이 보는 눈앞에서 도로 한 복판에 권사님이 피를 흘리고 쓰러져 있었다. 음식을 준비하던 권사님이 김치가 모자란다면서, 김치를 가지러 가야겠다고 서두르며 길을 건너다 그 자리에서 교통사고를 당한 것이었다.

 

나는 당황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주님, 이게 웬 일입니까? 주님, 어떻게 좀 해주세요.” 쓰러진 권사님 옆에서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께 울부짖었다. 그날 나는 부활절 행사의 모든 진행을 다른 분들에게 맡기고 앰뷸런스를 따라 병원으로 달려갔다. 그 날 우리 교회 성가대는 눈물 때문에 제대로 찬양도 부르지 못하고 말았다고 한다. 나는 두려움 속에서 벌벌 떨면서 병원으로 달려갔다. 그곳에서 권사님은 의식이 없이 온 머리가 부은 채 누워계셨다. 온 교회는 그 날로부터 매일 저녁 긴급 기도회를 열면서 권사님을 살려달라고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제발 의식을 찾게 해주세요.” 정말 눈물로 기도했다.

 

그러다가 며칠 뒤에 남편 되시는 장로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목사님, 예전에 우리는 생명연장을 위한 의술은 받지 말자고 이야기했었습니다. 그래서 이애자 권사를 이제 그만 하나님의 품 안으로 보내고 장기들은 기증하려고 합니다.” 나는 그 전화를 받고 외쳤다. “안 돼요. 장로님. 그러면 안 돼요. 제발 그러지 마세요.” 펑펑 울면서 말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꼼짝도 할 수 없었고, 그냥 울기만 했었다. 나중에 어떤 후배 목사가 나에게 위로한다고 전화를 했을 때, 나는 몇 마디 말도 못하고 그 후배 앞에서 한참 울었다.

 

권사님의 죽음은 꼭 내 책임 같았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나의 교만함을 뉘우치면서 가슴을 쳤고, 내 죄를 용서해달라고 부르짖었다. 나의 죄 때문에 권사님이 희생된 것 같아 너무 힘든 기간을 보냈다.

 

그때 나는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오래 전에 소천하신 아버지를 기억해내었다. 중고등부 수양회를 하러 양평으로 가던 길에, 교회의 한 학생이 기차에서 떨어져 죽었을 때, 담임목사였던 우리 아버지는 어떻게 그것을 감당해낼 수 있었을까? 과부에게 있었던 단 하나의 아들이었는데, 어떻게 담임목사로서의 그 책임의 중압감을 견디며 지낼 수 있었을까? 아버지는 그 여자 집사님에게 어떤 위로의 말을 할 수 있었을까? 그런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한 채, 철이 없었던 나는 과자를 사주지 않는다고 불평했었겠지?

 

처음으로 나는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면서 흘렸던 피땀의 의미를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다. 이 세상의 모든 죄에 대한 책임을 홀로 져야 했던 그 책임의 중압감이 아니었을까? 도무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심령을 짓누르는 그 죄의 책임 말이다.
 
그때 그 부활절은 그야말로 가장 슬픈 부활절이었다. 하지만 그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더욱 소망을 둘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 15:20) 만일 권사님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이라면, 우리는 정말 슬픔을 이길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정말 부활하셨다. 그리고 그 부활은 우리도 부활할 것이라는 증표가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해 그 부활절은 더욱 부활을 소망하는 날이 되었다. 가장 슬펐지만, 가장 부활을 생생하게 기다리게 되는 날이 되었다. 

 

어떤 사람을 악을 행하다가 죽음을 맞이하고, 또 어떤 사람은 주의 일에 힘을 쓰다가 죽음을 맞이하기도 한다. 만일 부활이 없고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면 현재의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부활이 있다면 지금 우리가 어떻게 사는가가 정말 의미가 있다. 경건한 자들의 죽음은 악한 자들의 죽음과는 다르다. 그 죽음은 하나님께서 귀하게 보시기 때문이다(시 116:17). 권사님은 주님을 위해 살다가 그렇게 늘 그리던 주님의 품으로 가셨다. 

 

지금도 나는 부활절만 되면 권사님을 생각한다. 그분은 유독 사랑이 많으셨던 권사님이었다. 시(詩)를 사랑하고 지혜가 있는 현숙한 여인이었던 권사님이었다. 목회자로서 자질이 부족했던 나를 이해해주고 도와주어 좀 더 영적으로 성숙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던 분이었다. 권사님의 장례식은 지금까지 내가 집례하거나 함께 했던 그 어느 장례식보다도 아름다운 장례식이었다. 권사님의 사랑을 받았던 커티스 음대의 학생들이 모두 와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음악으로 연주하면서 권사님의 천국행을 환송해주었었다. 그리고 교회당에는 필라델피아의 수많은 사람들이 사랑으로 보내준 조화로 가득 채운 채 정말 많은 사람들이 부활을 소망하면서 드렸던 장례식이었다. 권사님은 자신의 장기를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남겨서 그들에게 소망을 전달하고 천국으로 가셨다. 그들은 권사님 가족들의 슬픔을 배경으로 장기를 받은 기쁨이 넘쳤었을까? 권사님의 가족들은 슬펐지만, 다른 사람들이 장기를 얻게 되어 생명을 연장하고 육체의 기능을 회복하게 된 것에 대해 감사했었다.

 

그 사건 이후로 시험에 빠져 교회를 떠난 이들도 있었다. 30분씩이나 더 떨어진 교회당으로 운전하여 와서 예배를 드리던 분들이 이제는 운전하는 것이 겁이 난다며 교회에서 떠나가기도 하였다. 한 동안 성장하던 교회는 이 일로 인하여 큰 어려움과 시련을 겪게 되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성도들은 오히려 이 일로 인하여 믿음이 더욱 담대해졌다. 부활의 의미를 더욱 생생하게 알게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능력이 더욱 나타나게 되었다. 그리고 교회는 다시 힘을 얻게 되었다. 시험과 고통은 사람들을 믿음에서 떨어지게 하기도 하지만, 오히려 더욱 담대한 믿음을 갖게 하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개인적인 종말이든 우주적인 종말이든 그 날은 마치 도둑이 오는 것처럼 급작스럽게 우리들에게 닥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두려워할 것도 아니고 무서워할 것도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죄짐을 지시고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주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덤에 장사지낸바 되었다가 다시 살아나셔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시 만날 것이다. 그리고 저 하늘나라에서는 우리의 아버지 되신 하나님께서 우리들과 함께 하셔서 우리들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않는 바로 그 천국에서 말이다(계 21:3-4). 

 

 

원글링크: http://www.christianfocus.kr/news/view.html?section=1&category=4&item=&no=4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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