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롬 1:16-17)

영적인 선물 (롬 1:8-15) +++ 하나님의 진노 (롬 1:18-23)

로마서 강해 세 번째 시간이 되었는데요.

지난 시간에 우리는, 바울 사도가 로마에까지 건너가서 거기서도 복음을 전하기를 소원한다고 하는, 그 내용을 살펴본 적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바울이 전하고자 하는 그 복음이 무엇인가? 그 복음에 대해서 설명하는, 아주 간단한 두 개의 절을 함께 읽었습니다. 먼저 16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16절 말씀에서, 바울 사도는 말하기를,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말했는데요. 바울 사도가 왜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나는 왜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않는다? 이런 말을 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지금 로마 교회에 성도들이 당하고 있는 그 현실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당하고, 조롱을 당하고, 멸시를 당하고, 비방을 받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너, 예수 믿어? 저런 바보 같은 놈!’ ‘너, 교회 다녀? 머저리 같은 놈!’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살고 있는 상황인 겁니다. ‘저 예수 믿는 놈들, 저 더러운 놈들’ 하는 그런 비난을 당하는 상황 가운데서, 로마의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에. 바울 사도가 그런 로마의 성도들을 향해서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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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박수 쳐주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런 말을 하지 않겠죠.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사람이 ‘나는 금메달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말하겠습니까? 학교에서 전교 1등한 사람이, ‘나는 전교 1등 한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하겠습니까? 그렇지 않죠. 우리 부모님들을 보면 자식들을 굉장히 자랑스러워하고 있는데요. ‘우리 자식이 이런 애예요. 저런 애예요’를 이야기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이냐 하면, 그만큼 너무나도 자랑스럽고 대견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모두가 다 부러워하고, 모두가 다 인정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내가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하는 말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하는 말을 해야 될 때가 언제이냐면,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당하고 조롱을 당하고 멸실을 당하고 있을 때, 여러분들은 그렇게 무시하고 비난하지만, 그러나 나는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당시 로마에 살고 있던 크리스천들은 엄청난 박해를 받으면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하는 것, 내가 크리스찬이라고 하는 것, 내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을 당당하게 밝히기가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당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교회를 다닌다고 한다면, 조롱을 당하게 되는 것이고, 내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한다면 사람들로부터 핍박을 당하게 되기 때문에, 내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실을 당당하게 드러내기가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바로 로마 교회의 성도들이었습니다.

요즘 우리 중고등부 아이들의 상황이 그렇다고 해요. 학교에 가면 교회 다니는 아이들이 얼마 되지 않습니다. 3% 이하라고 하는 말이 있을 정도니까, 학교에 가면 전부 다 다 불신자들이고, 교회를 비방하고 조롱하는 아이들이 대다수인 그 학교 내에서, 아이들이 말하기를, ‘너, 아직도 교회 다녀?’라고 질문을 했을 때, ‘그래, 나, 교회 다녀’라고 말했다가는 왕따를 당하기 쉽고, 그리고 그 반 아이들로부터 조롱을 당하고 무시를 당할 것 같아서, 그래서 ‘내가 교회에 다닌다’고 하는 말을 말하기가 어려운 상황에서 우리 중고등부 아이들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요즘 한참 핫한 것이 넷플릭스에서 나온 오징어 게임이라고 하는 드라마입니다. 보신 분도 있었을 것이고, 아직 못 보신 분도 있을 것이겠지만, 뉴스로서는 아마 많이 들었을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이번에 미국에 갔더니, 커다란 미국 백화점 안에 오징어 게임 상품을 파는 그런 것을 보면서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을 했는데요. 그 오징어 게임이라고 하는 드라마를 보면, 그 드라마에서 나오는 기독교인의 모습은 너무나도 한심합니다. 오징어 게임 속에 그려져 있는 기독교인들이란 어떤 모습인가? 뻔뻔하고 위선적인 그런 사람으로 나타납니다. 공감 능력이 없는 사람들로 묘사되고 있고, 그 상황 가운데서도 아주 이기적인 모습의 사람으로, 정말 싫은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는, 그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 드라마에서 이렇게 기독교인들을 그렇게 아주 나쁜 모습으로 그려주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작가가 안티 크리스천이기 때문일까요? 그럴 수 있겠죠. 하지만 영화나 드라마 같은 것은 거울과 같은 거예요. 거울과 같은 것이어서, 우리의 모습이 세상 사람들에게 어떻게 비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겁니다. 지금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그렇게 보고 있구나. ‘저 더러운 놈들, 저, 위선자들, 저 나쁜 놈들, 저 더러운 더럽고 뻔뻔한 사람들’이라고 하는 그런 시각이 이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관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 중고등부 아이들이 신앙생활하는 것이 굉장히 힘들고 어려운 상황인데, 그런데 우리 아이들이 교회에 나와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보면 정말 사랑스러워요. 이런 상황 가운데서도 믿음을 잃지 않고 교회에 나오는 아이들을 보면 너무나도 사랑스럽고 대견하고 감사할 정도인데요. 부모님들이, 우리 어른들이, 우리 아이들을 보면 혼내기보다는 따뜻한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지금 바울 사도가 편지를 쓰고 있는 로마 교회 상황이 어쩌면 우리 한국의 지금의 상황과 비슷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 박해를 당하며, 사회적으로 조롱과 멸시의 대상이 되고 있는 가운데서도, 믿음을 지키고 있는 로마 교회 성도들을 향해서 바울 사도는 말하기를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라고 말하고 있는데요. 이 말씀을 읽은 로마 교회 성도들은 아마 적지 않은 위로를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무시하고 멸시하고 있는데, 너희들은 그렇게 나쁜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부끄러워할, 부끄러워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비난받을 사람들이 아니라, ‘여러분들은 바른 길을 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제대로 된 길을 가고 있습니다’라고 하는 이 메시지가 로마 교회의 성도들에게 아주 큰 위로의 메세지였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말할 때에는 왜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지 그 이유를 분명하게 말해주어야 합니다. 아무 이유 없이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의미가 없는 것이죠. 그래서 바울 사도를 16절 말씀에서 그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믿기만 하면,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에,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자랑스러워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다시 살아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도 놀라운 소식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살아나게 되었기 때문에, 이것은 정말 감사한 일이고, 이것은 정말 흥분되는 일이고, 너무나도 자랑스러워해야 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죠.

이 세상에 그 어느 것도 우리를 살릴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돈이 우리를 살릴 수가 없는 것이죠. 돈이 있으면 물론 편리합니다. 돈이 많이 있으면, 할 수 없는 것들이 점점점 줄어들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돈이 많다고 할지라도, 우리를 죽음에서부터 건져낼 수는 없는 것이고, 아무리 돈이 많다고 할지라도 영원한 형벌 가운데서 우리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어리석은 부자를 향해서 주님께서 해주셨던 말씀이 누가복음 12장 20절의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는데요. 많은 곡식을 쌓아놓은 그 부자를 향해서 주셨던 예수님의 말씀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내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라고 말씀해 주셔요. 돈을 아무리 모은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자신의 생명을 살릴 수 없고, 하나님께서 부르신다고 한다면, 오늘 밤에라도 그냥 모든 것 다 놓고 갈 수밖에 없는 인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돈이 우리를 살릴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권력이 우리를 살릴 수가 없습니다. 물론 권력이 있다고 한다면 좋은 면이 많이 있습니다. 편리한 것이고, 그동안 잘 안 되었던 것들도 맡겼던 것들도 다 해결할 수가 있는 것이죠. 하지만 아무리 세계 최고의 권력을 지녔다고 할지라도, 우리를 영원한 죽음에서부터 살려낼 방법은 없습니다. 아무리 우리들에게 뛰어난 정치인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 정치인이 우리를 살릴 수 있는 구세주는 아닙니다.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사람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 모든 것들을 얻고자 하다가, 오히려 망해버리고 마는데요.

오히려 우리들에게 놀라운 소식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영생을 얻게 된다고 하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고, 복음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고, 오히려 자랑 스러운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주 고전적인 예화이기 때문에, 아마 신앙생활하면서 수도 없이 많이 들은 예화일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어떤 꼬마 아이가 엄마가 있는데, 그 엄마의 얼굴이 화상으로 인해서 일그러져 있었습니다. 흉칙한 모습을 하고 있는 그 엄마가 이 꼬마 아이에게는 너무나도 큰 상처가 되었습니다. 학교를 다니고 있는데, 학교에서 학부모님들을 오라고, 학부모 면담을 하라고 해서 오라고 하면 다른 아이들의 어머니는 너무나도 예쁜 모습을 하고 있고, 그리고 멋진 모습을 하고 있어서, 그래서 자기 엄마라고 자신 있게 소개를 하는데, 자기의 엄마는 얼굴이 일그러져 있는 그 모습이 너무나도 부끄러워서 엄마를 학교에, 엄마가 학교에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하는 거죠. 우리 엄마는 학교에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그 아이에게, 어느 날 자기 어머니가 왜 그런 상처를 화상을 입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네가 어렸을 때, 그때 갓난아기였을 때 우리 집에 불이 났을 그 상황 가운데서 내가 너를 살리기 위해서, 너를 그 화마에서부터 살려내기 위해서, 그 아이를 안고 나오다가 너는 가슴에 꼭 안아서 아무 흠집 없이 내가 살려냈지만, 그러나 내가 그 불로 인해서 얼굴이 다 화상을 입어버리고, 내 몸이 망가져 버려서 화상을 입게 되었다고 하는 그 이야기를 들은 이후로, 그 아이는 어머니를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였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복음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인데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위해서 죽으셨어요. 나 같은 죄인을, 내 생각하는 것이 악하고, 늘 행동하는 것이 악하고, 하나님의 말씀에서부터 멀리 떠난 우리를, 영원한 죽음의 형벌 가운데서부터 건져내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 높은 곳에서부터, 낮은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 위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건져내신 그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사랑이 있기에, 저와 여러분들이 구원을 받게 된 것이고, 그것이 우리들에게는 부끄러움이 아니라,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우리를 조롱하고 멸시한다고 할지라도, 이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는 부끄러워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사해야 될 것이고, 사랑해야 될 복음이라고 하는 사실을 다시 한번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즘에 우리 기독교는 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참된 지폐가 있다고 한다면, 그 지폐를 오용하기 위한 위조 지폐들이 많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고, 그 위조지폐 때문에, 그래서 비난을 받게 되듯이, 기독교가 개독교가 되어 버렸고, 목사는 먹사가 되어 버렸고, 오징어 게임을 보면 기독교인이라고 하는 것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부끄러운 모습의 기독교인들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우리들의 치욕을 지고 십자가를 지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다고 하는 사실을 다시 한번 기억하면서, 부끄러워 할 것이 아니라 감사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러니까 불신자들 앞에 가서 막 윽박지르면서, ‘나는 복음을 안 부끄러워해’ 하면서 윽박지르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막무가내식 행동을 하라고 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고난 핍박을 당하면, 오히려 겸손하고, 핍박받는 것으로 인해서 주님께서 주신 말씀 “너희가 내 이름 때문에 고난을 받고, 너희가 내 이름 때문에 핍박을 받는다면, 오히려 기뻐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겸손하게, 온유하게, 이 세상 앞에서 믿음을 드러내야 한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 17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표현하고 있는데요. 여러분. 하나님의 “의”라고 하면 여러분은 무엇을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의 “의”가 무엇일까요? 우리는 “의”라고 하는 한자를 생각하며. 그것은 공의, 정의 이런 말들을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공의가 나타났나? 하나님의 정의가 나타났나? 도대체 정의가 나타났다고 하는 말이 무슨 뜻일까?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고 있는 “의”라고 하는 것은 유대인들의 관점으로 본다고 한다면, 그것은 약속을 잘 지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유대인들 사이에서 서로 약속을 하게 되고 그런데, 그 약속을 잘 지키지 않으면, 그 사람은 의가 없는 사람이라고, 의롭지 못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이고,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이 있으면, ‘아, 이 사람은 참 의로운 사람이다’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 유대인들의 개념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하는 이야기는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약속을 잘 지키시는 분이라고 하는 사실이 드러났다고 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의로운 하나님이다”라고 하는 그 말씀은 여러 가지로 이해가 가능하겠지만, 그러나 오늘 17절의 말씀을 이해할 때에, 그 “의”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면, ‘하나님은 약속을 잘 지키시는 하나님이다’라고 하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냐? ‘약속을 잘 지키시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이 나타났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잘 지킨다고 하는 것, 잘 지키셨다고 하는 것을 이해하려고 하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약속이 체결되어 있다고 하는 사실을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어디에서 하나님과 우리 인간들 사이에 약속이 체결되어 있는 것이 나타나냐면, 출애굽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애굽에서부터 출발한, 해방된 이스라엘 민족이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약속을 맺습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약속을 맺게 될 때, 그 약속이 무엇이냐 하면, ‘이스라엘 민족아, 너희는 오로지 하나님만을 섬겨라.’ ‘다른 신을 섬길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만 섬겨라’고 하는 그 명령이고, 만일 너희가 그렇게 나를 나만을 섬긴다고 한다면, 내가 너희의 하나님이 되어서, 그래서 너희를 보호하시겠다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이스라엘 민족 사이의 약속이 체결되어 있는데요.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만 섬기기로 약속한 것, 하나님께서는 그 이스라엘 민족을 보호해 주시고 하나님께서 친히 이스라엘 민족의 하나님이 되어 주시겠다고 하는 그런 약속의 관계가 시내산에서 맺어지게 된 것입니다.

마치 결혼 약속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서 결혼할 때 어떻게 결혼합니까? 결혼에 서약을 하는 것이죠. 약속을 하는 것이죠. 오로지 당신만을 사랑하겠습니다. 오로지 당신만을 사랑하겠다고 하는 그런 약속을 서로 하면서 결혼을 하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이스라엘 민족 사이에는 ‘오로지 하나님만을 섬기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의 하나님이 되어주겠다’고 하는 그런 약속을 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이스라엘 민족 사이의 약속이 체결된 것입니다. 그 계약을 맺게 되면 계약서를 작성하게 되는데요. 그 계약서가 무엇이죠? 바로 10계명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10계명을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는데, ‘내가 너희의 하나님이 되어 주겠다’고 말을 말씀하시면서 그렇기 위해서는 너희가 이 10계명의 말씀을 지키라고, 옛 계명의 약속을 주시는 것인데, 계약서를 쓸 때 몇 장을 쓰죠? 2부 작성하기 때문에, 두 개의 돌판에 계약서를 써서 10계명을 써서, 그렇게 하나님과 이스라엘 민족 사이에 약속이 맺어지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이스라엘 민족은 그 약속을 잘 지켰냐면, 지키지 못했습니다. 사사기에서 보는 것처럼,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만을 섬긴 것이 아니라, 이방 신상을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약속을 맺었지만, 그 약속이 깨어져 버린 것입니다. 약속을 맺었는데, 계약 당사자 가운데 한쪽이 그 계약을 파기해 버리면, 그 계약이 어떻게 되는 것이죠? 계속 계약이 성립이 됩니까? 계약이 파기가 되는 겁니까? 파기가 되는 것이죠. ‘이제는 계약 끝났다.’ ‘계약이 이제 완전 파기됐다’라고 선언해도 되는 상황이 발생한 겁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 편에서는 계약을 파기했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그 계약을 파괴하지 않으셨다고 하는 것이죠. ‘너희들이 약속을 못 지켰으니까, 이 계약은 끝난 거야’ 하면서 그 계약을 찢어버리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그래도 내가 너희의 하나님이 되어주겠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고, 그리고 그 계약을 다 지키도록 너희가 지키지 못하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주셔서, 하나님께서 친히 사람이 되어 주시고, 그 대표 되신, 그 두 번째 아담이신 예수님께서 사람 대신에 모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시고, 우리 대신에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하게 복종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복종을, 그 순종을 다 하셔서, 결국 우리를, 하나님의, 그 구원의 길로 인도해 주신 것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하는 이야기는 복음이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깨버리지 않고 끝까지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지키셨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그것을 아주 생생하게 나타내주는 이야기가 호세아의 이야기입니다. 구약 성경 호세아서의 말씀에 보면, 호세아라고 하는 선지자를 향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저 고멜이라고 하는 여인과 결혼을 해라.’ 그래서 그 고멜이라고 하는 여인과 결혼을 하게 되는데요. 그 고멜이라고 하는 여인은 남편인 호세아와 사랑을 하면서 사는 것이 아니라, 금세 바람이 나버리고 외도를 해 버립니다. 결혼 관계가 깨어져버리고, 파괴되어 버리고, 그 고멜이라고 하는 여인은 남의 자식을 낳습니다. 그러면 결혼 관계가 깨지는 것이 정상이죠. 하지만 하나님께서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호세아야, 너는 그 고멜을 버리지 말고, 다시 데리고 와라.’ 고멜을 다시 데려오라고 말씀하시 시는 겁니다. 그래서 이 호세아가 그 고멜이라고 하는 여인을 다시 데려와서 다시 아내를 삼습니다. 또 집을 나갑니다. 그런데 그 집을 나간 고멜이 어디에 가 있는가? 사창가에 가 있는 거예요. 사창가에 가 있는 그 여인에게, 여인을 되찾기 위해서 돈을 싸들고 가서, 그 여인을 사서 데리고 오는 거예요. 결국 그 호세아 선지자는 아내를 버리지 않고, 결국 그 아내를 끝까지 자신의 아내로 맞아들이게 되는데, 우리도 그렇게 하라고 하는 말씀이 아니라, 그러한 행동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스라엘 민족을 사랑해 주셨고, 하나님께서 그 어떻게 그 서약을 깨지 아니하셨는가를 생생하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우리 인간 편에서 죄악을 저지르며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우상을 섬기며 탐욕의 길로 나가서, 하나님과의 그 약속을 깨어버렸을 때, 하나님께서 ‘이제 계약 끝났다’ ‘더 이상 너는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하면서 계약을 박차버리고 도망가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그 약속을 버리지 않고 우리를 하나님의 신부로, 하나님의 자녀로, 계속해서 맞이해 주셨다고 하는 것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하나님께서 약속을 깨지 아니하시고 끝까지 지키시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 복음은 아주 놀라운 소식입니다. 자격이 안 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놀라운 은총인데요. 이 은총을 어떻게 우리가 누릴 수 있겠는가? 그것은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입니다. 아무리 좋은 선물이 주어진다고 할지라도, 내가 믿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하면, 그 선물이 우리의 것이 될 수가 없는 것이죠. 따라서 이 하나님의 복음이라고 하는 이 선물은 어떻게 우리가 받을 수 있는가? 우리가 믿음으로 그 선물을 받아들일 때, 우리에게 구원이 되는 것이고, 우리가 감사함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인다고 한다면, 누구든지 구원을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에, 그러므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시대는 참으로 믿기가 어려운 시대입니다. 우리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을 발견하기 보다는 믿을 수 없는 사람들에 둘러 싸여 있습니다. 오히려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히는 시대가 바로 이 시대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오징의 게임의 드라마를 보면, 거기엔 아주 감동적인 장면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상우라고 하는 사람과 그리고 알리라고 하는 외국인 노동자가 등장하게 되는데요. 이 상우라고 하는 사람은 알리라고 하는 외국인 노동자에게 선을 베풀어 주었습니다. 차비가 없을 때 상우는 자신의 돈을 꺼내서 알리에게 돈을 줍니다. 그리고 그 알리의 가족을 걱정해 줍니다. 한국에서 만나기 어려운 정말 친절한 사람을 알리는 만나게 된 것이죠. 그래서 이 알리는 상우를 형이라고 부르면서 잘 따르게 됩니다.

그런데 오징어 게임의 한 에피소드 가운데 구슬 따먹기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두 사람이 짝이 되어서 서로 구슬을 따내면 승리한 사람은 살아남는 것이고, 구슬을 다 빼앗긴 사람은 죽게 되는 사느냐 죽느냐 그 게임에서 상우와 알리가 한 편 한 편이 되어서 서로 경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상우가 구슬 따먹기를 하는데, 다 지는 거예요. 다 빼앗기는 거예요. 그런 상황에서 다 빼앗기면, 자기가 죽을 것 같으니까 알리에게 제안을 합니다. 우리 서로 이렇게 하지 말고, 한 사람은 살고, 한 사람은 죽는 방법 쓰지 말고, ‘우리가 같이 사는 방법을 연구해 보자’ 제안을 하면서 네가 가지고 있는 그 구슬을 함부로 갖고 다니다가 빼앗길 수 있으니까, ‘내가 안전하게 보관해 줄게’ 제안을 하는데, 알리는 그 상우를 믿어요. 나에게, 내가 힘들었을 때, 나에게 지폐를 건네준 사람, 내 가족을 걱정해 준 그 상우를 믿으면서, ‘그래, 형, 내 구슬을 보관해 달라’고, 안전하게 지키는 방법을 해달라고 이야기하면서, 그 구슬을 맡겼는데, 상우는 그 구슬을 돌과 바꿔치기 해버리고, 가짜 구슬을 알리에게 주고, 그 알리의 구슬을 다 차지해 버립니다. 그리고 그 관리자에게 가서 말하는 거죠. ‘봐요. 내가 저 친구의 구슬을 다 차지해서 가지고 왔습니다.’ 결국 알리는 자기가 믿었던 상우 때문에 죽임을 당하게 되는 것이죠. 오징어 게임이 센세에이션을 일으키는 이유는 그 일이 영화 속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우리가 늘 만나는 현실인 거에요. 믿었던 사람들에게서 배신당하고, 믿었는데 나에게 등을 돌리는 사람들을 만나는 그 현실이 너무나도 생생하게 그려져 있는 그 모습을 보는 상황 가운데서, 늘 배신당하는 이 세상에서 우리는 누구를 믿고 살아야 합니까? 정 주었지만, 배신당하고, 표를 주었지만 정치인들로부터 배신을 당하는 이런 세상에서, 우리는 누굴 믿고 살아야 하는가?

그런데 그 오징어 게임에 보면 또 다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지영이라고 하는 사람과 새벽이라고 하는 사람이 구슬을 서로 두 사람이 서로 경쟁을 해야 하는데, 지영이가 구슬을 따는 게임을 설계합니다. 설계하는데, 어떻게 하냐면 우리 구슬을 그렇게 쩨쩨하게 하나씩 둘씩 따먹지 말고, ‘한 번에 끝내버리자.’ 누가 저 벽에 제일 가까이 던지는가? 구슬을 던져서 제일 가까이 던지는 사람이 구슬을 다 빼앗는 것으로 하자 약속하고 이야기를 나눕니다. 새벽은 구슬을 던져서 어느 정도 가까이 붙였습니다. 근데 그 지영은 그 구슬을 어떻게 이길까를 설계했던, 그 구슬을, 지영은 구슬을 잘 던져서 벽에 가까이 붙이는 것이 아니라, 그냥 땅에 떨어뜨립니다. “내 구슬 네가 다 가져.” “너는 살아. 나는 살 이유가 없지만, 너는 살아. 그래서 엄마도 만나.” 이 오징어 게임에서 보여주고 있는 이야기가 바로 그 얘기예요. 그런 엉터리 같은 크리스천들 말고, 정말 참된 복음이 어디에 있는가?

그런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십니까? 바로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구슬을 다 내어준 분이 계십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의 말씀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말씀하신 그 주님께서 우리들의 모든 고통과 우리들의 모든 슬픔을 다 지시고, 십자가 위에서 못 박혀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인 것이고, 그러기에 우리가 복음을 부끄러워할 것이 아니라, 늘 감사하고 자랑하며 복음을 전하며 믿음으로 승리하며 살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 세상에서 살면서 크리스천이라고 하는 사실 때문에 부끄러워지는 세상으로 진입하고 있습니다. 아니 벌써 그렇게 되어가고 있습니다. 직장에서 ‘너, 교회 갔다 왔느냐?’라고 하는 말이 우리로 하여금 대답하기 힘든 말이 되는 시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나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이다’라고 하는 그런 믿음의 고백들이 나타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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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데스다 게임

1. 베데스다로의 초대장

넷플릭스 한류 드라마 <오징어 게임>이 요즘 전 세계적으로 뜨겁다. 사람이 죽어 나가는 이야기이고, 그리고 경쟁자들을 죽여야만 내가 살 수 있는 내용으로, 때로는 잔혹하기도 하고 사이코패스적 경향마저 보이는 이 드라마가 인기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여러 가지 이유가 잘 맞아떨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코로나 시대에 영화관보다는 방에서 즐길거리를 찾아야 하는 상황도 맞물렸을 것이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이 드라마가 성공한 비결은 그 <오징어 게임>이 우리들의 삶의 모습을 아주 생생하게 반영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어느 정도의 차이가 있기는 하겠지만, <오징어 게임>과 같은 삶을 살아간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바둥거리고 있고, 그러면서 남을 제껴 내야만 내가 살아남는다. 한순간의 방심으로 탈락해버릴 수도 있는 아슬아슬한 인생을 살아간다. 우리는 매일을 <오징어 게임> 속에서 산다.

그런데 2천 년 전 베데스다라는 작은 연못에서도 일종의 <오징어 게임>이 있었다. 그 베데스다 연못으로 모여든 참가자들은 모두 자발적으로 참가하였다. 모두가 질병을 앓는 사람들이었다. 어떤 사람은 맹인, 어떤 사람은 다리 저는 사람, 어떤 사람은 혈기 마른 사람이었다. 이들은 자신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 부단히 애썼을 것이다. 하지만 모두 실패했다. 용하다는 의사들을 찾아가 보았지만, 결국 그 의사에게 가진 돈을 강탈당하기만 했을 뿐, 아무런 차도가 없었다. 일도 할 수 없었고, 가족들에게도 짐이 되는 인생은 아무도 환영해주지 않는 삶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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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들에게 어느 날 초대장이 날아들었다. “선생님, 저와 함께 게임 한번 하시겠습니까?”라는 말과 함께 시작된 <오징어 게임>으로의 초대장처럼, 그들에게 <베데스다 게임>으로의 초대장이 발부되었다. 베데스다라는 연못에 가면, 가끔 천사가 내려와 물이 움직이는 경우가 있는데, 그때 누구든지 그 물속으로 제일 먼저 들어가면 어떤 병에 걸렸든지 다 낫게 될 것이라는 소문을 들은 것이다. 이 세상에서 채무에 시달려 신체 포기각서까지 써야 했던 사람들에게 <오징어 게임>이 유일한 소망이었듯이, 2천 년 전 환자들에게 베데스다로의 초대장은 유일한 탈출구였다.

그런데 베데스다에서의 게임의 룰은 <오징어 게임>의 규칙만큼이나 잔인했다. 어떻게 하면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베데스다 연못 속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 목적이 정해지면, 사람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법이다. 속임수를 써서 외국인 노동자 알리의 구슬을 훔쳐버린 서울대 출신 조상우처럼, 베데스다에도 그런 사람들로 넘쳤을 것이 분명하다.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물속에 먼저 들어가려는 것이야 아무 문제가 없다. 하지만 그중에는 다른 사람들이 연못에 들어가는 것을 방해하려고 했을 것이다. 아쉽지만 네가 들어가지 않아야, 내가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달려가려는 길 앞에 웅덩이를 파서 넘어지게 만들거나, 장애물을 슬며시 가져다 놓을 것이다. 친구들이 달려가는 사람의 발을 걸어 넘어지게 만드는 것이 예사였을 것이다. 그곳은 공평과 사랑이 있는 곳이 아니라, 음모와 술수가 넘치는 곳이었다.

천사가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만든다는 말은 사실이었을까? 그럴 리가 없다. 그것은 그냥 뜬 소문일 뿐이다. 아니 누군가 벼룩의 간을 빼먹기 위해 악의적으로 만들어낸 소문일 수도 있다. <베데스다 게임>의 설계자는 하나님이 아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병이 나을 수 있는지 아닌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미 그들은 아무런 소망을 다른 곳에서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소문이 사실이어야만 했다. 그래야만 소망을 가질 수 있고, 그래야만 살 수 있는 이유가 있기에, 그들은 그 소문을 사실로 믿고 싶었다. 그리고 거기에 몰려들었다. 사람들은 사실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소망하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2. 베데스다 게임의 함정

사람들이 베데스다로 모여드는 이유는 거기에서 소망을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가 주인공이 아니라는 점이다. 주인공이 분명히 있고, 그 주인공이 456억을 받게 된다는 데, 나는 주인공이 아니다. 그게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오징어 게임>의 함정이다. 내가 주인공이라면, 그게 <오징어 게임>이든 <베데스다 게임>이든 무슨 상관인가? 하지만 나는 주인공이 아니다. 우리는 희생만 당하고 들러리만 서게 될 뿐, 행운의 주인공이 되지 못한다.

그곳에 38년 된 병자가 있었다. 그 사람은 베데스다 연못에 모인 환자들 중에서 1등으로 연못에 들어갈 가능성이 전혀 없는 사람이었다. 자신의 힘으로는 그 연못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데, 자신을 도와줄 사람도 없었다. 그게 우리 모두의 모습이다. 수억 년을 그 자리에 있어도, 38년 된 병자가 1등으로 연못 안에 들어갈 수는 없다. 그런데 왜 그 사람은 그 자리에 있는가? 무엇 때문에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가?

그것은 소망 때문이다. 소망은 누구든지 1등으로 들어가면 병이 나을 것이라는 소문이다. 그런데 전혀 그 사람은 1등으로 들어갈 수 없음에도, 그 소문을 의지한다. 그런 소망마저 없어진다면, 그의 삶 자체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이룰 수 없어도, 그 소문이 진실일 것이라고 강하게 믿는다. 마치 사법고시에 합격할 실력이 되지 않지만, 사법고시를 없앤다고 하면 불만이 폭발해버리는 고시족과 비슷하다. 우리 사회가 부동산 불로소득에 대해서 불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런 불로소득의 기회를 없애버리자는 정강 정책을 사실은 지지하지 않는 데, 그런 이유와 비슷하다. 나 자신이 그런 횡재할 가능성이 전혀 없지만, 그런 횡재의 가능성마저 없애버린다면 더 절망적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런 과정에서 더 힘들고 고통스러워진다는 것이다. 베데스다 연못에 제일 먼저 들어가지 못하는 자신을 보면서 절망하고, 다른 사람들이 성공했다는 확인되지 않은 소식에 불평하고, 아무런 기쁨이 없이 살아간다. 하나님께서 왜 나를 이런 모습으로 보내셨는지, 내게는 어떠한 사명이 있는지에 대한 고민은 하지 않은 채 말이다.

드라마 <오징어 게임>에서는 456번이 결국 456억을 얻는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라는 <오징어 게임>에서는 우리는 늘 실패자일 수밖에 없다는 게 문제다. 나도 제일 먼저 베데스다 연못 안으로 뛰어 들어가고 싶지만,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고, 나는 놈 위에 붙어가는 놈이 있다. 재수만 하면 일류 대학에 합격할 줄 알았는데, 성적은 오히려 더 초라하다.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열심히 일하면, 삶이 좀 나아질 줄 알았는데, 오히려 병만 얻는다. 누군가는 7년만 일하고도 50억을 받는다는데, 나는 열심히 일해도 늘 손해다.

심지어 종교도 마찬가지이다. 누가 부처가 될 수 있는가? 누가 열반할 수 있는가? 누가 득도할 수 있는가? 출가해서 모든 것을 버리고 마음을 비우는 데 성공해야만 한다. 그런데 아무리 도를 닦아도 10년 수행 도로아미타불이다. 그런데도 정진을 열심히 하면 당신도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소리에, 사람들은 절간으로 모여든다. 정작 자신의 소유를 버리고 싶지 않으면서도, 법정 스님의 <무소유>라는 책은 열정적으로 읽는다. 가족과의 인연도 끊어버리고, 모든 미련을 버리고, 수행하는 길로 들어서건만 정작 부처가 된 사람은 없다. 그냥 옆에서 추앙하는 일들은 있지만 말이다. 대부분 종교의 길도 어쩌면 또 다른 <오징어 게임>이다. “조금만 욕심을 품으면 탈락입니다.” 그런 룰 속에서 고통스럽게 수행하지만, 늘 탈락자들만 양산될 뿐이다.

3. 왜곡된 신앙

<오징어 게임>에는 “기독교”를 희화화 하면서 조롱하는 장면들이 여러 군데 등장한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한국 기독교인들”의 모습을 조롱하는 내용이다. 첫째, 기도 아저씨는 자신이 살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죽여야 하는 상황에서 중얼거리며 기도한다. 그리고 줄다리기 게임에서 이겼다는 이겼다고 하나님께 감사한다. 상대를 죽였다는 죄책감은 없다. 지극히 이기적인 모습의 삶을 사는 한국 기독교인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것이다.

둘째, 지영이라는 인물을 통해 묘사되는 목사는 위선자이며 인간 말종이다. 자신을 성폭행해 놓고도 매번 회개 기도했다는 아버지 목사의 이야기는 왜 거기서 그런 과거사를 말해야 했는지 극에서의 적절성을 이해하기 힘들지만, 그게 일반사람들이 기독교인들에 대해서 느끼는 감정의 표출일 것이다. 잘못을 저지르면서도 회개했으니 다 용서받았다고 하는 그 철면피적 뻔번함에 질색한다.

마지막으로, 456번이 결박당한 채 거리에 버렸을 때, 피켓을 들고 전도하는 전도자가 등장한다. 그런데 그 사람은 결박을 풀어주자 마자 뜬금없이 “예수 믿으세요”라고 말한다. 지금 그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무시하고, 당면한 삶의 문제에 대해서는 외면한 채, 그저 피안의 세계에 대해서만 말하는 한국 기독교에 대한 비판이 깔려 있다.

사실 <오징어 게임>에 등장하는 기독교는 가짜 기독교이다. 복음에서부터 멀리 벗어나 있는 왜곡된 신앙일 뿐이다. 기독교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사실은 돈이나 성공이라는 우상을 섬기는 우상종교인일 뿐이다. 기도 아저씨에게 하나님은 그저 자신의 안위를 위해 필요한 하나님일 뿐이다. 지영의 아버지 목사는 종교를 이용하여 자신의 죄악을 합리화하는 거짓 종교인일 뿐이다. 거리 전도자는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무지하고 그저 같은 편을 많이 확대시키고자 노력하는 사람일 뿐이다.

그런 모습은 사실 2천 년 전에도 있었다. 그들은 38년 된 병자가 얼마나 고통을 당하고 있었는지, 그리고 그런 사람을 어떻게 도울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는 오직 안식일날 왜 침상을 들고 걸어가는가가 문제였다. 낙타는 걸러내고 하루살이만을 삼키는 바리새인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외면한 채, 문자주의의 함정에 빠진 사람들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원하시는데, 그러한 요소들은 다 생략한 채 형식주의에 빠진 사람들은 늘 있어왔고, 그런 종교인들에 대한 비판이 <오징어 게임>에 나온다.

<오징어 게임>에서의 한국 기독교인들에 대한 비판은 참된 메시야 좀 보여달라는 절규이다. 자신의 구슬을 떨어뜨리고 “너는 꼭 살아서 나가. 그래서 엄마도 만나고”라고 말한 지영과 같은 메시야가 있으면 보여달라는 절규이다. 안타깝게도 2천 년 전 베데스다에서도 참된 메시야는 보이지 않았다. 38년 된 병자를 향해서 율법의 잣대로 비난만 하는 가짜 종교인들만 넘쳐났을 뿐이다.

4. 예수님의 색다른 초대

그런데 그렇게 아무런 소망이 없는 38년 된 병자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그에게 다가오신 것이다. 그리고 그를 고쳐 주셨다. 그가 병에서 나은 것은 가장 먼저 물속으로 뛰어들었기 때문이 아니다. 은혜가 그에게로 임했기 때문이다. 그가 찾지도 않았고 부르지도 않았는데, 어느 날 예수님께서 그에게로 다가오셨다. 그리고 불쌍히 여기셨고 그를 고쳐주셨다. 우리의 소망은 여기에 있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 말이다.

38년 된 병자에게 다가오셨던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로 다가오신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초대하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 11:28-30) 참된 ○△□(예수님) 초대장은 <오징어 게임>의 초대장과는 다르다. <오징어 게임>의 초대장은 남이 죽어야만 내가 성공하는 것이다. 그런데 알고 보면, 내가 죽게 되어 있는 죽음의 초대장일 뿐이다. 모두가 다 456억을 바라보고 참가하지만, 모두가 다 죽는다. 내건 것은 행운인데, 실제 결과는 죽임뿐인 초대장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초대장은 우리 대신 예수님이 죽어주신 초대장이다. 그리고 참된 깐부(니꺼 내꺼 할 것 없이 같이 공유하는 단짝 친구) 되신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의 생명을 주셨다. 마치 일남 할아버지가 456번에게 자신의 구슬을 넘겨준 것처럼 말이다. 마치 지영이가 자신의 구슬을 포기하고 강새벽에게 다 내어준 것처럼 말이다. 오일남이나 지영과 같은 모습은 우리의 실제 삶 속에선 찾기 어렵다. 종교인이라는 게 위선적이고, 이기적이기만 할 뿐이다. 그래서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나 그런 사람들을 등장시킨다. 제발 우리들의 삶에서도 그런 메시야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에서 말이다. 어디 구슬을 양보한 지영과 같은 사람 없나요? 어디 구슬을 넘겨준 오일남과 같은 사람 없나요? 절규하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양보하셨다. 십자가 위에서 생명까지 내어주셨다. 그러기에 우리가 산다. <오징어 게임>을 보면서, 사람들은 지영이나 깐부 오일남처럼 나를 위해 희생해줄 메시야를 간절히 갈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기독교에 대해서 악의적인 묘사를 한 것 같지만, 사실은 진짜 메시야가 있으면 좀 나와달라고 애원하는 셈이다. 삶이 더 절망적일수록 우리는 메시야가 더욱 필요하다. 그런데 그런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런데 사람들은 거짓 그리스도만을 추종한다. 때로는 돈이 우리를 살릴 수 있는 메시야일 것이라고 희망을 건다. 하지만 돈은 우리의 진짜 메시야가 아니다. 그것은 거짓 그리스도일 뿐이다. 그리고 그 돈을 추종하며 따라가면,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돈의 노예로 전락해버릴 뿐이다. 돈이 우리를 해방시켜 주고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고, 오히려 우리를 착취해버리는 피해를 당하기도 한다.

때로는 정치 지도자가 우리의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할 메시야일 것이라고 희망을 건다. 그래서 기꺼이 정치 지도자의 노예가 되길 자처한다. 카톡 뉴스를 퍼나르고, 만나는 사람들마다 정치 지도자를 드높인다. 지금까지 수없이 그런 정치 지도자들에 의해서 속아왔으면서도, 이번에는 다를 것이라고 확신한다. 놀랍게도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야 할 목회자들이 정치 지도자를 전하는 데 열정적인 경우도 많다. 하지만 이 세상의 그 어떤 정치지도자도 우리의 참된 메시야일 수 없다. 그들은 거짓 그리스도일 뿐이다. 정치인들은 교회를 이용해먹기 좋은 수단으로 생각하고 접근하는데, 그러한 그들의 전략에 말려들어가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뿐이다.

우리는 참된 메시야이신 예수님만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리고 주님만을 전해야 한다. 그리고 주님의 은혜 때문에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감사하며 살아야 하고, 희생과 봉사와 섬김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렇게 살아야만 천국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이미 구원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에 감사함으로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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