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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다 신드롬 (눅 10:38-42)

사람들이 나이를 먹어가면서 제일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이 있다고 한다면, 건강의 문제일 거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렇죠? 예전에는 건강했는데, 예전에는 팔팔했었는데, 시간이 흘러가면서 우리들의 신체 일부분들이 예전 같지 않은 거죠. 망가지기도 하고, 고장이 나면서 예전 같지 않다고 하는 것을 조금씩 조금씩 느껴지고 있기 때문에, 어쩌면 우리들이 늘 관심을 가지는 것이 “어떻게 하면 건강하게 될까? 어떻게 하면 건강한 삶을 살 수 있을게 될까?”라고 하는 것을 관심을 많이 가지는 것 같습니다. 그렇죠?

제 아내도 늘 관심을 가지는 게 무엇이냐 하면, 건강에 대한 관심이 정말 많아요. 그래서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면, 건강에 관한 무슨 얘기가 나오면, 얼마나 그렇게 열심히 잘 보는지 모릅니다. 저는 별로 재미가 없다고 생각이 드는데, 정말 그 건강에 대한 프로그램을 보면서 “맞아. 저게 내 증상인데. 저게 내 얘기인데.” 하면서, “아, 저랬구나” 그래서 “어떻게 고치면 되겠구나” 많은 관심을 가지고 보게 되는 것 같습니다. 요즘 보니까 맨발로 걸으면 좋다 그래가지고, 맨발로 걸을까? 막 그러고 있는데, 참 우리들의 문제가 “건강, 어떻게 하면 참 행복하게 건강하게 살 수 있을까?” 하는 그런 문제들을 늘 우리가 신경 쓰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질병 가운데서 가장 무서운 질병은 어떤 것이라고 생각을 하십니까? 여러 가지 병들이 무섭고 심각하지 않은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마는, 저 개인적으로는 어떤 생각을 하게 되냐면, 심장마비가 좀 저는 약간 무섭게 느껴졌습니다. 제가 유학을 가서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는데요. 그러니까 한 20여 년 전 이야기죠. 그때 같이 공부하던 한 신학생 젊은 후배 전도사님이 한 분 계셨는데, 건장한 전도사님인데, 어느 날 잠을 자는 가운데, 그냥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분은 연약한 분이 아니었어요. 건강한 분이었어요. 유도 선수 출신이었어요. 그래서 늘 건강하고 정말 건강이라고 하면, 아무 문제가 없던 분이었는데, 갑자기 어느 날 잠을 자다가 심장마비로 인해서 사망했다고 하는 그런 충격적인 그런 소식을 듣게 된 적이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떤 젊은 목사님이 그분도 한 35살 전후되셨던 분이었는데, 그분도 어느 날 갑자기 잠자리에 들겠다고, 좀 피곤하다고 하면서, 잠자리에 들었는데, 조금 뒤에 사모님께서 들어가 보니까, 사망을 한 이야기를 듣게 되어서, 그때 제가 굉장히 충격을 많이 받았습니다. “아무리 건강해도 이렇게 갑자기 갈 수가 있겠구나”라고 하는 것을 생각하면서, 그때 제가 기도하던 것이 있었는데, 그게 무엇이었냐면, 잠자리에 들 때마다 “하나님, 오늘 밤에 하나님께서 저를 불러다 주신다고 해도, 하나님, 내 영혼을 받아주옵소서” 그렇게 기도하면서, 잠자리에 들기도 했고, 아침에 일어나면서 “내가 오늘 하루도 다시 살 수 있구나” 생각하며,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면서, 하루를 시작하던 때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에게는 어떤 것이 가장 무섭게 느껴집니까? 사람마다 경험에 따라서, 다 다를 거라고 생각이 드는데요.

그런데 육신의 질병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의 영혼도 질병에 걸릴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육신의 질병에 대해서는 경각심을 가지고 늘 조심합니다. 질병에 걸리지 않기 위해서 부단한 노력을 하고, 건강해지기 위한 엄청난 열정을 보이고 있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영적인 질병에 대해서는 대부분 무관심할 뿐만 아니라, 무방비 상태에 있다가 심각한 영적인 질병에 걸리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는 것이죠. 그래서 오늘 우리가 오늘 함께 읽은 이 누가복음의 말씀에 근거해서, 마르다 신드롬이라고 하는 영적인 질병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있는 말이 아니고요. 그냥 제가 만들어낸 말인데요. 마르다가 걸렸던 영적인 질병, 우리의 영혼을 갈아먹고 우리의 영혼을 병들게 만드는, 그런 이 질병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고 싶은데요.

이 마르다 신드롬이라고 하는 영적인 질병은 누가 걸리는 질병일까요? 어떤 사람이 이런 질병에 걸리겠습니까? 누구나 다 걸리는 거죠. 아무나 다 걸리는 겁니다. 그 어떤 사람도 면역이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이런 영적인 질병에 걸릴 수가 있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아주 믿음이 좋고 열정적인 사람들도 걸릴 수 있다고 하는 점에서 어쩌면 심장마비와 비슷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건장한 사람도 어느 날 갑자기 심장마비에 걸릴 수 있는 것처럼, 이 마르다 신드롬이라고 하는 질병도 정말 믿음이 있고 열정이 있고, 정말 주님을 열심히 섬기려고 하는 사람에게도 갑작스럽게 찾아올 수 있는 질병이 되는 것이죠.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마리아와 마르다가 등장하게 되는데요. 마르다라고 하는 이 여인은 어떤 여인이었을까요? 이 여인은 믿음이 없는 여인이 아니었습니다. 이 여인은 그냥 평범한 여인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마르다, 마리아 이야기하면서, 마르다는 별볼 일 없는 사람처럼 생각이 들고, 마리아는 좋은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많이 있지만 아니에요. 마르다도 정말 좋은 믿음의 사람이었고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신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이 마르다는 그냥 가만히 있지 않았어요.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오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거부했습니다.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배척한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오든 말든 아무런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정말 많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마르다라고 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는가? 예수님이 오신다고 하니까, 예수님을 대접하기를 원했던 것이죠. 주님께 가장 좋은 것을 드리기를 원했던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이 마르다는 정말 좋은 믿음의 사람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고, 정말 헌신적인 여인이라고 말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마르다의 마음 가운데 영적인 질병이 찾아오게 된 것이죠.

언제 이런 증상이 나타나게 되는 것일까요? 언제 이런 질병에 걸리게 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사람을 바라볼 때입니다. 이 마르다가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에게 대접하기를 원했을 때만큼은, 정말 기쁨으로 음식을 준비할 수 있었습니다. 기쁨으로 주님을 섬길 수가 있었던 것이죠. 그 마음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오셔서 그리고 나에게 말씀도 해주시고, 또 내가 그 예수님을 위해서 가장 좋은 것을 대접하겠다고 생각했을 때, 마르다의 마음 가운데 기쁨이 넘치고 정말 좋았을 것 같아요. 그런데 그 기쁨이 한순간에 불평과 불만으로 바뀌게 된 것은 이 마르다의 눈에 마리아가 보이기 시작할 때였습니다. 음식을 준비하다가 이 마르다가 마리아를 바라보게 된 것이죠. 그런데 그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서 예수님의 말씀을 가만히 듣고 있는 그 모습을 보면서, 화가 나기 시작한 거예요. 나를 위해서 나와 함께 같이 준비하지 아니하고, 저렇게 가만히 있는 그 모습을 보면서 화가 난 거죠. 여러분은 그런 생각 안 드십니까? 그런 생각 들 거예요. 나는 주님을 위해서 분주하게, 정말 정신없이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전혀 나를 도와주지 않는 그 마리아를 보면서, 이 마르다의 마음 가운데 불만이 생기기 시작하게 된 것이죠.

안타깝게도 오늘날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도 이런 마음들이 종종 생기게 됩니다. 특별히 믿음으로 주를 섬긴다고 하는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 하나님을 보면서 섬기면 기쁨이 넘치고 감사가 넘치고 행복이 넘쳐요. 그런데 사역을 하다가 누구를 보냐 하면, 내 옆에 있는 사람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죠. 종종 교역자실에서 그런 문제들이 나타납니다. 교역자들이 사역을 하다가, 정말 주를 위해서 기쁨으로 사역하다가, 같은 동료 교역자를 바라보면서 시험에 드는 거예요. 같은 우리 교우들끼리 같이 열심히 일하다가, 같은 교우를 보고 시험에 드는 거죠. 마음이 상하는 것입니다. 내가 정말 이렇게 열심히 사역하고 있다고 한다면, 다른 사람도 똑같이 나처럼 해야 될 텐데, 안타깝게도 나처럼 같이 해주는 사람이 없는 겁니다. 가만히 보면 내가 제일 먼저 교회에 나오는 것 같고, 가만히 보면 교회 청소는 내가 혼자 다 하는 것 같고, 아무도 해주지 않고, 가만히 보면 나 혼자 봉사하는 것 같고, 나 혼자 기도하는 것 같고, 나 혼자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 같고, 아무도 나와 함께 같이 신앙생활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을 때,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화가 나기 시작하는 것이죠. 목사라고 하면 당연히 이래야 되는 것이 아닐까? 사역자라고 한다면 이 정도는 해야 되지 않을까? 장로나 집사나 권사라면 이 정도는 해야 되지 않을까? 나는 이만큼 수고하는데, 왜 저 사람은 가만히 있는가? 그런 마음들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들게 되는 것입니다.

마르다가 원래 예수님을 위해서 대접하려고 했을 때만큼은 기쁨이 정말 많이 넘쳤을 것 같아요. 왜냐하면 사랑을 베풀 때 사람은 행복하거든요. 부모가 자녀들을 사랑해 주면서 행복하지 않습니까? 정말 행복해요. 사랑은 받는 것도 물론 행복하지만, 사랑은 베풀어주면 베풀어줄수록 더 행복하고 기쁨이 넘칩니다. 제가 지난 이번에 미국에 가서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 조그마한 것을 했는데요 저와 제 아내가 정말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 그 짧은 시간에 무엇이라도 좀 해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그게 마음속에 너무나도 좋아요. 우리 둘째 딸아이 집에 갔더니 싱크대가 막 물이 새는 거예요. 물이 새서 그래서 그 밑이 막 고여 있는 겁니다. 그것을 보고 제가 다 고쳐줘서 실력이 없지만, 엉터리 아마 지금 다시 또 고장 났을지도 몰라요. 그래도 그 실란트(sealant)를 갖다 붙이고, 뭐 해가지고, 막 만들어주는데, 그게 너무나도 행복한 거죠. 제 아내도 싱크대를 막 정리하면서 우리 아이를 위해서 해준다고 하는 게 너무 행복한 거죠. 마르다의 마음도 그렇게 기쁘지 않겠습니까?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기쁘다고 하신, 더 복되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처럼 얼마나 기쁘고 행복했겠습니까?

그런데 마리아가 도와주지 않고 예수님 앞에 가만히 있는 그 모습을 보면서 화가 난 거예요. 이것은 그냥 우리가 생각하는 정도의 분노가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가 생각할 때 저 사람이 나를 안 도와주니까, 기분이 나쁘다 정도가 아니라,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 유대 사회는 어떤 분위기였는가? 여성들은 배움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없었어요. 여성은 배울 게 아니다. 남자들만 배워야 된다라고 하는 그런 분위기 속에서 살아왔던 사람들이 여성이 예수님 앞에서 무엇인가를 배우기 위해서 앉아 있는 것 자체가 사회적으로 용납이 안 되는 그런 사회에서 바라보았을 때, “왜 저기에 앉아 있는가? 저기에 앉아 있을 것이 아니라, 나를 도와주어야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하는 그런 불만이 폭발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40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마르다가 반응을 합니다.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 마르다가 언니입니까? 마리다가 언니라고 생각하기 쉽겠지만, 누가 언니인지 누가 동생인지 모릅니다. 그냥 헬라어에서는 그냥 sister 그냥 자매로 되어 있는데, 우리나라 말로 번역할 때 언니, 동생을 구분해야 되기 때문에, 그냥 편의상 마리아를 동생이라고 번역한 것뿐이지, 마리아가 진짜 동생인지는 모릅니다. 내 누이가 나를 도와주지 않는다. 내 자매가, 내 친자매가 나를 도와주지 않고 있는 그 모습을 주님 이거 그냥 가만히 내버려 둘 겁니까? 주님께 항의한 것이죠.

이 본문의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들의 모습을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를 비춰주는 거울과 같은 것이거든요. 영적인 거울과 같은 것인데, 그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김 집사를 발견하지 말고 박 집사를 발견하지 말고, 내 모습을 발견해야 되는 것이죠. 나도 이런 마르다와 같은 모습이 없지 않겠는가? 신앙생활을 시작하면서 정말 감격으로 시작하고, 정말 주님의 은혜를 사랑 생각하면서, 늘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데 우리들의 신앙생활 가운데 기쁨이 사라지고, 감사가 사라지고 그리고 메말라 있는 상태가 되었다고 한다면, 그게 그 원인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것은 우리의 시각이 주님을 바라본 게 아니고,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바라보기 시작할 때,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서 기쁨이 사라지게 되는 것이죠.

비유에 보면 첫째 아들의 경우가 그랬지 않습니까? 첫째 아들은 둘째 아들이 집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성실하게 일했어요. “내가 맡은 사명이 이거구나. 내가 이 일을 해야 되는구나.” 하면서 성실하게, 지금까지 별문제 없이 잘 일해 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첫째 아들의 마음이 폭발하기 시작했어요. 언제입니까? 둘째 아들이 돌아왔을 때,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그 아들을 향해서 부모님이 사랑을 베풀어줄 때, 그걸 보고 화가 나기 시작한 것이죠. 전에는 기쁨과 감사로 일을 했던 그 아들이 자기 동생을 바라보면서 분노하기 시작하게 된 것이죠. 이게 오늘 우리들이 조심해야 될 거라고 믿습니다. 우리가 과연 누구를 바라보는가? 우리가 주님을 바라보아야 되는데,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게 될 때, 내 마음은 시험에 들고 결국 이런 마르다 신드롬과 같은 그런 질병에 걸릴 수밖에 없는 것이죠.

예수님께서는 이 마르다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 마르다의 분노한 마음을 억제시키기 위해서, 그래서 마리아를 주방으로 가라고 말씀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지금 불만을 표시하고 불평을 말하고 있는 이 마르다의 마음을 안정시키고 차분하게 돌리게 만들기 위한 가장 쉬운 방법이 있다고 하면 무엇이겠습니까? 마리아에게 이야기해서, 가서 도와주라고 이야기하면 될 거 아닙니까? 어쩌면 마리아가 다 잘한 것이 아닐 겁니다. 그렇죠?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마르아가 잘했고, 마르다가 잘못했다가 아닙니다. 마리아나 마르다나 다 장점이 있고 다 부족한 점이 있고 모두가 다 똑같은 사람이에요. 장점만 있는 사람이 없고 단점만 있는 사람이 없고, 모두가 다 같은 정도의 장점도 있고 단점이 있는 겁니다. 마리아가 잘한 점이 있는가 하면 마리아가 못한 것도 있어요. 마리아가 다 100% 완벽한 여인이 아닌 겁니다. 그러니까 이 마리아에게서 단점을 찾아내고, “네가 그 단점을 보완해야 되니까, 말씀을 듣는 것까지는 좋았지만, 네 자매를 도와줘라.”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셔서, 마리아로 하여금 일하게 만드는 걸 통해서, 이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라, 마르다의 그 마음의 영적인 질병을 만져주기 시작한 것이죠. 마르다야, 내가 많은 일로 근심하고 걱정하지만, 네가 다른 사람을 보고 다른 사람을 보면서 관여할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은 그냥 내버려 두고, 너는 정말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설 것을 말씀해 주신 것이죠. 우리의 신앙은 어디에서 찾을 수가 있는가? 우리의 시각을 사람들에게서 돌려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데서 우리의 참된 믿음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을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르다는 어쩌면 바리새인들과 비슷해요. 바리새인들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바리새인도 늘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거죠. 사람들 때문에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신앙생활을 했기 때문에, 그것이 온전한 신앙이 되지 못한 것이죠. 마르다도 지금 사람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되고, 은혜를 바라봐야 되고, 주님께 우리의 시각을 고정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예수님께서 이 순간에 마르다의 말이 일리가 전혀 없는 게 아니고, 사실 일리가 있어요. 일리가 있는데 그런데 이 마르다의 말에 따르지 않았다고 하는 점을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종종 우리 교회 내에는 수많은 말들이 있는데요. 그런데 그 말들은 대부분 마르다와 같은 방식으로 말하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교회에서 말을 하는데 왜 말을 하는가? 이야기하는데 그 말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내가 나 자신을 기준으로 해서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말을 하는 것이죠. 이것이 문제고 저것이 문제라고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믿음의 눈을 가지고 잘 분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별하셨어요. 이게 마리아를 고쳐서 될 문제가 아니라, 마르다가 시각을 바꿔야 된다고 하는 것을 알았죠. 우리가 교회 내에서도 수많은 말들이 있을 터인데, 이게 과연 믿음에서부터 나오는 말인지, 아니면 마르다와 같이 믿음이 없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우리가 정말 세심하게 분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수많은 교회가 마르다와 같은 말에 의해서 휘둘리는 교회들이 많이 있습니다. 특별히 교회의 역사가 오래되면 오래될수록, 전통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마르다와 같은 이야기를 하고, 그 마르다와 같은 말에 의해서 교회가 운영이 되고, 그래서 일할 수 있는 사람을 일하지 못하게 끌어내리고,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그 장점이 아니라 장점이 아닌 단점을 보게 만들고, 그래서 결국 공동체가 망가지게 되는 그런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정말 진지하게 이것이 믿음에서부터 나온 말인지, 그래서 사람을 세워주고, 그래서 용기를 갖게 만들고 모두가 함께 사역할 수 있는 그런 좋은 교회를 만들어갈 말인지, 아니면 잘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을 깎아내려서 일하지 못하게 만들고, 말씀을 듣지 못하게 만들고 용기를 잃어버리게 만들고, 그래서 하지 못하게 만든 제어하는 일들인지 분별하면서 이 사역들을 잘해 나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처방하신 그 처방의 결과 어떠한 일이 일어났을까요? 놀랍게도 마리아는 그냥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서 말씀만 들었던 사람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마리아는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 자신의 삶 전체 가운데서 주님을 위해서 헌신한 여인이었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성경 전체를 통해서 알 수가 있습니다. 주님을 향한 참된 사랑과 주님에 대한 참된 헌신의 모습이 마리아에게서 나오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그 마리아를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자리에서 끌어내려서 억지로 주방으로 집어넣어 버리면, 그러면 일을 잘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것은 바른 해결책이라고 말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자가 진단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육신의 질병이 걸렸을 때 우리는 진단을 하고 그 질병에 대한 대처를 하게 되는데요. 영적인 질병도 우리가 자가 진단을 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떻게 진단을 할 수가 있을까요? 마리아 마르다 신드롬에 걸린 것은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것은 우리의 눈을 한번 이쪽도 가렸다가 이쪽도 가렸다가 하면서 무엇이 보이는가를 한번 보시기를 바랍니다. 한번 보세요. 누가 보이나? 다른 사람이 잘못하고 있는 게 보입니까? 뭔가 마음에 안 드는 게 눈에 보입니까? 우리 교회를 망치는 것 같은 사람들이 보입니까? 그렇다고 한다면 내가 마르다 신드롬에 걸릴 위험이 상당히 높다고 하는 사실을 인지하고, 그 순간에 우리가 주님 사람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바라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기도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보이고, 그래서 예수님이 보이기 때문에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께 순종하며 나아가는 그런 믿음의 길을 걸어가야 할 것입니다.

만일 신앙적이지 못한 사람, 무엇인가 부족한 사람이 보인다고 한다면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그 사람을 끌어서 억지로 일을 시킬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단점을 끌어내려서, 그래서 빨리 하라고 불평하고 원망하고 그리고 분노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님처럼 그가 가진 장점을 인정해 주고 칭찬해 주는 그런 우리 모든 성도님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리아가 완벽한 사람이었나요 부족한 사람이었나요? 완벽한 게 아니에요. 우리 교회는 우리 인간은 누군가 우리 교회는 누가 모여 있는가? 교회는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들이 모여 있는 곳이 아니고 교회는 영적으로 질병을 가지고 있고 연약한 자들이 모여 있는 병원과 같은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이 가운데 있는 사람들 가운데 정말 완벽한 사람이 있는가라고 찾아본다면, 아니에요. 다 문제가 있어요. 다 이런 영적인 질병, 저런 영적인 질병들이 다 있어요. 저는 완벽한가요? 아니요 저도 부족해요. 늘 말실수가 있고 그리고 행동에 문제가 있고, 늘 넘어지고 여러 가지 문제가 있기 때문에, 우리 모두에게 예수님의 은혜의 치료가 필요한 것이죠. 참된 의사이신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들의 문제를 해결해 줄 필요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이 자리에 모여서 주님의 은총을 체험하고 우리가 바뀌어 나가는 그런 그 변화의 공동체가 되어야 되는 것이죠. 그런데 이 가운데 우리의 장점도 있고 단점들이 있는데, 그 단점들을 바라보면서 지적하고 비난하고 욕하고 분노할 것이 아니라, 장점들을 칭찬해 주고 일할 수 있도록 서로가 서로를 격려하는 그런 귀하고 복된 우리 예수비전교회 성도님들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만일 우리가 어떤 사람을 책망하고 비난해서 그 사람이 바른 길로 돌아오게 만든다고 한다면 그 사람이 좋은 길로 가게 될까요? 가는 것처럼 보여요. 예를 들어서 마리아를 억지로 주방으로 쫓아냈다고 한다면, 마리아가 열심히 주방에서 일하는 것처럼 보이니까, 문제가 해결된 것처럼 보일까요? 아니요. 사람들이 비난하는 것 때문에 행동이 바뀐 것 같고, 사람들이 책망하는 것 때문에 그 사람의 삶이 바뀐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바뀐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비난이 무서워서, 내가 인정받고자 하는 그런 우상 때문에, 그의 태도가 조금 바뀐 것뿐이지, 그가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바뀌는 것은 아닌 것이죠. 우리의 신앙생활을 보면서 우리가 모든 사람들이 주님을 사랑하는 길로 갈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것은 비난과 책망과 그리고 지적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으로 감싸주고 그래서 장점들을 발휘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나아가는 그 길로 갈 수 있도록 우리가 함께 도와주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누구를 바라봐야 됩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될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피 흘려주셨어요. 그것만 바라보면 우리의 문제들이 해결이 돼요. 분노하고 마음속에 화가 났어도 주님께서 나와 같은 자를 사랑해 주셨다고 하는 사실을 생각하면 다시 한번 용기를 얻게 되는 것이죠. 제가 사역을 해오는 가운데 늘 좋은 일들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때로는 정말 힘들고 어려운 때도 있었습니다. 정말 제가 성심껏 사랑하고 돌봐주었는데, 오히려 배신을 당하고 오히려 비난하는 소리를 당하게 될 때 제 기분이 좋았을까요? 아니요 엄청난 아픔이 있는 겁니다. 배신감을 느끼게 될 때, 뒤에서 욕하는 소리를 듣게 될 때, 그럴 때 마음이 너무나도 아프고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그런데 그때 저를 살린 것이 무엇이냐? 그 사람이 바뀌는 모습을 보고서, 그 사람이 변화된 모습을 보고서 제가 살아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미안했다고 말을 해주고, 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더 좋게 대해주어서 그래서 제가 치유가 되고 회복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회복이 되는 것이죠. 가만히 생각해 보니 저 사람이 나를 배신했지만, 제가 예수님을 배신한 거예요. 제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고 배신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런 나를 사랑하사, 하나밖에 없는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해 주신 그 놀라운 사랑을 베풀어주셨다고 하는 그 은혜를 바라보게 될 때, 다시 한번 새 힘과 용기를 가지고 믿음으로 승리하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들의 심령 가운데 우리의 주변의 사람들의 단점들이 보이고 잘못된 것들이 보여서 우리들의 마음이 병들어 갈 것이 아니라, 그 순간순간마다 우리의 시선을 주님께 고정하며 주께서 주시는 놀라운 치유의 은혜들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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