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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도니야의 계획 (왕상 1:5-10)

다윗에게는 19명의 아들들이 있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이름들만 해도 그렇습니다. 그 외에도 소실들의 아들들까지 치면, 한 2-30명 족히 넘었을 것이고, 아니면 그 이상 수많은 아들들 자녀들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이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다윗의 아들들의 이름은, 몇몇 두각을 드러내고 있는 사람 몇 명뿐이죠. 한번 제가 표로 한번 정리해 봤는데요. 다윗에게 어떤 아들들이 있었는가? 한번 정리를 해보니까, 노란 글씨로 쓰여 있는 것은 어머니들의 이름입니다. 아히노암에게서 암논이 나왔고, 아비가일에게서 다니엘 혹은 길르압이라고 하는 자녀가 나왔고, 마아가라고 하는 아내에게서 압살롬이 탄생했고, 학깃이라고 하는 부인을 통해서 아도니야가 태어났고, 아비달이라고 하는 여인을 통해서 스바댜가 태어났고, 에글라라고 하는 여인을 통해서 이드르암이라고 하는 아들이 태어났는데, 이상 위의 6명은 다윗이 헤브론에 있을 때 낳은 아들들이었습니다.

그 줄 밑에 있는 아들들은 이제 예루살렘으로 와서 거기서 낳은 아들들인데요. 밧세바를 통해서는 시무아, 소밥, 나단, 솔로몬이라고 하는 아들이 나왔고, 어머니의 이름들이 밝혀지지 않았지만 입할, 엘리사마, 엘리벨렛, 노가, 네백, 야비아, 엘리사마, 엘랴다, 엘리벨렛이라고 하는 아들들이 나왔고, 그다음에 다말이라고 하는 사람은 딸인데, 누구의 딸인가요? 암논의 누이인가요? 서로 연결 그렇게 시킬 수가 있겠는데, 이 외에도 소실들의 자녀들이 굉장히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암논도 죽고, 길르압도 아마 일찍이 죽은 것 같고,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켰다가 죽임을 당했으니까, 다음 순서는 누구겠습니까? 아도니야죠. 많은 사람들이 이제 아도니야가 다윗의 뒤를 이어서 왕이 될 거라고 예상했었을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바로 그 아도니야라고 하는 사람이 왕이 되기 위해서 작전을 꾸미고, 그리고 왕을 이어가려고 하는 이야기가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열왕기상 1장 5절에서부터 10절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아도니야는 무엇을 준비했는가? (이걸 좀 치워주시죠.) 아도니야는 왕이 되기 위해서 무엇을 준비했는가? 오늘 말씀의 가운데 보면, 병거를 준비했고, 기병을 준비했고, 호위병 50명을 준비했다고 기록되어 있고, 누구와 모의했는가? 수루야의 아들 요압 장군을 불러들이고, 제사장 아비아달을 불러들여서, 그래서 이제는 다윗의 뒤를 이은 왕이 되기 위한 계획들을 하나씩 하나씩 실천해 나가는 내용이 오늘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아도니야가 왕이 되기 위해서 준비하고 모의한 것은 아마도 압살롬의 반역을 보면서 벤치마킹을 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압살롬이 왕이 되기 위해서 반역을 일으켰지만, 그래서 왕이 된 것 같았지만, 그 기간은 얼마 가지 못했습니다. 금방 끝나버렸고, 결국 압살롬은 죽임을 당하게 되는 그런 끔찍한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이죠. 압살롬의 반역이 실패로 돌아가는 그 모습을 이 아도니야가 옆에서 지켜보았을 겁니다. 왜 압살롬의 반역은 실패했습니까? 당시 다윗은 아주 건장한 용맹한 장군이었습니다. 아직 힘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다윗의 용사들도, 아주 대단한 용사들이 다윗을 따르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쉽게 그 다윗을 물리치기가 어려웠었던 것이고요. 결국 그 압살롬은 반역에 성공한 듯했으나, 결국 실패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던 것이죠.

하지만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 아도니야는 반역이 아니라, 승계를 꿈꾸는 겁니다. 이제는 다윗이 힘이 없는 노인이 되어 버렸고, 이제는 왕으로서의 역할을 하기가 어려워진 겁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반역의 형식이 아니라, 승계의 형식을 빌어서, 이제는 아무런 힘도 없고 능력이 없는 그 다윗 대신에, 내가 왕이 되겠다고 수많은 사람들을 설득하고, 세를 규합하고 해서, 이제는 제사장들도, 그리고 장군들도 다 모아들이고 해서, 많은 세력을 규합해서 왕이 되는 과정들을 밟아가고 있는 게 기록돼 있는 것인데요. 왕자들을 부르고, 신하들을 불러서, 이제 세 번째 왕의 역할을 하겠다고 했지만, 잘 아시는 것처럼 이 계획이 성공했습니까? 실패로 돌아갔습니까? 실패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솔로몬이 다윗의 뒤를 이어서 정식 왕으로 등극하게 되었고, 아도니야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가버리고 말았습니다. 오늘은 그 실패로 돌아간 것에 대해서는 읽지 않았지만, 아무튼 이 아도니야는 왕이 되겠다고 하는 그런 갈망을 가지고, 그리고 꽤 세밀하게 준비를 했어요. 실패를 반면교사로 삼아서, 실패하지 않겠다고 하는 작전을 세워가지고, 하나씩 하나씩 자신이 왕이 되기 위한 과정을 밟아나가고 있는 게, 오늘 본문의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는 것인데요.

아도니야가 이렇게 왕이 되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왜 왕이 되려고 하는 걸까요?

우리는 한번 이런 질문을 먼저 보아야 하는 것인데요. 사람들은 대체로 “왜?”라고 하는 질문을 잘 던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그냥 살아갑니다. 남들이 하니까, 따라가면서 하는 것이고, 남들이 하는 방식대로,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대로, 그대로 우리는 따라가고 있는 것인데, 아도니야도 지금 왕이 되고자 하는 생각을 가지고, 이 일을 만들어가고 있는데, 왜 아도니야는 왕이 되려고 하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요? 오늘 성경 말씀에는 그 동기, 왜 왕이 되려고 하는지에 대해서, 그 이유에 대해서는 전혀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추측해 본다고 한다면, 누구나 다 왕이 되고 싶어 할 것 같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야망이 있는 것이고, 꿈이 있는 것이고, 더 큰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더 큰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그래서 최선의 노력을 한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아도니야뿐만이 아니라 우리도 마찬가지죠. 우리도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습니까? 우리는 성공하기 위한 삶을 살아왔습니다. 우리 자녀들을 기르면서 우리 자녀들이 다른 아이들보다 더 뛰어났으면 좋겠고, 더 좋은 대학에 갔으면 좋겠고, 성공했으면 좋겠고, 떵떵거리며 사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소망을 가지고, 우리 아이들을 길러 왔던 것이고요. 또 사람들은 내가 가지고 있는 그런 꿈을 향해서 목표를 향해서 당연히 달려가고 있는 것인데요. 어쩌면 이 아도니야도 왕자였기 때문에, 다윗의 혈통을 받은 왕자로서, 이제 수많은 그 왕자들 가운데, 19명이라고 했는데, 밝혀진 것이 19명이고, 소실들의 아들들까지 한다고 하면, 20명 30명 혹은 40명 50명도 될 수 있는 그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왕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하는 그 욕심, 어쩌면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욕심이오, 꿈이라고 말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왕이 되려고 하는 그 꿈이 과연 정당한 꿈이었는가? 과연 이것이 옳은 것인가라고 하는 질문을 한번 던져보아야 할 것입니다. 아도니야에게 있어서 왕이라고 하는 자리는 충분히 매력적인 자리입니다. 최고의 자리에 올라가는 것이고, 기왕이면 가장 높은 위치에 올라가서 세상을 호령하고, 그래서 왕이 되고 싶다 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그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고 한다면, 왕의 자리는 특권의 자리, 성취의 자리가 아니라, 사실은 섬김의 자리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왕이 되는 것은 그것은 당연히 가질 수 있는 꿈이고, 당연히 그 길로 가는 것은 옳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왕의 자리는 그렇게 아무나 꿈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니라, 사실은 왕은 섬김의 자리라고 하는 것이죠.

왕의 역할이 무엇입니까? 왕이라고 하는 것은 왜 세웁니까? 왕을 세우는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적의 침략으로부터 우리 백성들을 보호하고, 그리고 우리 백성들로 하여금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모든 나라의 질서와 제도를 제대로 하면서, 그래서 여러 사람들의 이익이 충돌하면, 그 이익들을 중재하면서, 그래서 정말 행복한 나라, 모든 사람들이 골고루 잘 사는 나라로 만드는데, 왕이라고 하는 하는 사람이 필요하게 된 것이죠. 아도니야가 지금 왕이 되려고 할 때, 그런 마음으로 왕이 되려고 했을까요? 성경에는 아무 말도 기록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알 수는 없고, 사람의 그 마음 한 길 속은 알 수 없는 것이 우리들의 마음, 우리들의 상황이니까, 과연 아도니야가 어떤 꿈을 가지고, 왕이 되려고 했었는지는 우리는 모릅니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가 이 말씀을 통해서 추측해 볼 수 있는 것은 아도니야가 그런 욕심 때문에, 내가 어떻게 하면 이 힘든 사람들을 잘 살게 만들까? 정말 어려운 상황에 있는 이스라엘 민족들을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만들어줄 수 있을까? 저 블레셋에 침입이 있는데, 그 침입을 어떻게 하면 내가 막아서, 우리나라 백성들을 행복하게 해 줄까라고 하는 그런 욕심 때문에 내가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되겠구나. 내가 나가서 해야 되겠다. 내가 왕이 돼서, 이 모든 일들을 해야 되겠다고 하는 그런 마음으로 왕의 자리를 욕심낸 것이 아닌 것 같아요.

아도니야의 마음이 무슨 마음이 있냐면, 왕은 굉장히 매력적인 자리인 겁니다. 왕의 명령 하나의 모든 것들이 다 좌지우지되고, 왕은 모든 사람의 경배를 받고, 왕은 모든 것을 통치하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그런 엄청난 특권의 자리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욕심이 난 것이죠. 그래서 내가 왕의 위치에 올라가서, 한번 떵떵거리면서, 이 세상을 호령하고 싶은 욕심 때문에 왕이 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들의 모습도 아도니야의 모습과 비슷할 것 같습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물어보면, 좋은 대학을 가고 싶다고 합니다. 공부 좀 잘하는 아이들에게 물어보면, 의대에 가서 의사가 되고 싶다고 하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너 왜 의대에 가려고 하냐? 너는 왜 그 목표를 세웠느냐고 물어보면, 안타깝게도 “예, 목사님. 나는 아픈 사람들이 너무 불쌍해요. 그래서 치료해주고 싶어요. 암에 걸린 사람들에게 내가 도움을 주고 싶어요. 병든 사람에게 내가 좋은 것을 해주고 싶어요.” 그렇게 대답하는 사람을 한 명도 만나보지 못했어요.

“너는 왜 법대에 가려고 하니?” 물어보면, “너는 왜 연예인이 되려고 하니?” “너는 왜 축구선수가 되려고 하니?” 물어보면, “예, 저는 법대에 가서, 정말 억울한 사람 도와주고 싶어요. 정말 억울하게 힘든 사람들, 내가 그 사람들, 정말 정의를 세워주고 싶고, 억울하게 고통당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도움을 주고 싶어서, 그래서 내가 법을 공부하고 싶어요.”라고 말하는 사람을 발견하지 못했어요.

“너는 왜 기자가 되고 싶니?” 물어보면, “내가 정말 이 세상이 온갖 가짜 뉴스로 퍼져 있는데, 그런데 내가 정말로 참된 진리를 전파하고, 참된 소식을 전해 주어서, 사람들의 삶이 정말 가짜 뉴스에 의해서 흔들리지 아니하도록, 바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바른 정보를 제공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렇게 대답해 보는 사람을 발견해보지 못했어요. “네가 왜 연예인이 되고 싶니?” “네가 왜 축구 선수가 되고 싶니?” 했을 때, 그런 대답을 들어본 것이 아니라, 많은 우리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꿈이 무엇이냐 하면, 그 자리에 올라가면 멋있어 보이니까, 근사해 보이니까, 거기에 가면 내가 돈을 만질 수 있고, 그 자리에 올라가면 많은 사람들의 부러움을 받을 수 있고, 사람들이 나에게 박수 쳐줄 수 있으니까, 내가 그 자리에 올라가고 싶다고 하는 그런 이야기들을 하고 있는 겁니다. “너는 왜 그 길로 가려고 하지?” 그러니까 “목사님, 돈을 버는 가장 좋은 방법인 것 같아요.”라고 대답을 솔직하게 해 줘서 고맙더라고요. 그런데 그게 너무 아쉬워요.

제가 미국에 있을 때, 미국 얘기를 자꾸 해서 죄송합니다마는, 미국에 대학 입시할 때, 중요하게 보는 것 중에 하나는, “왜 이 학과에 지원하려고 하는가?”라고 하는 동기입니다. 성적도 중요하지만, 성적보다 더 중요하게 보는 것이 있는데, 글을 써서 내야 합니다. 글을 써서 내는데, 저는 우리 어머니가 너무나도 아픈 분이어서, 그래서 그 어머니를 돕고 싶고, 이 세상에 아픈 사람들을 내가 도와주고 싶어서, 의대에 진학하고 싶다고 그렇게 동기를 써서 내면, 성적이 좀 모자라도 그 사람을 뽑아요. 너는 왜 간호사가 되고 싶니? 너는 왜 교사가 되고 싶니? 그 질문을 던졌을 때, 내가 그 일을 함으로써 어린아이들에게 바른 길을 가르쳐주고 싶어요. 그 목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뽑으려고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물론 거짓말로 동기를 그럴듯하게 꾸며내서, 그래서 합격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기를 중요하게 보는 것은 어쩌면 중요한 것이고, 그러한 것을 보면서, 적지 않은 감동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아도니야가 왕이 되려고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왕의 자리는 최고 권력자이기 때문에 올라가는 거예요. 많은 사람들이 박수 쳐주고, 많은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자리이기 때문에 올라가려고 한 것이죠.

하지만 다윗의 경우는 달랐습니다. 어느 날 다윗에게는, 양을 치고 있던 그 다윗에게 하나님의 선지자 사무엘이 찾아왔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름을 부으라고 하셔서 사무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은 것이죠. 그래서 다윗은 그때 소명을 가지게 되었는데요. 다윗에게 있어서 그 소명이 무엇입니까? 사명이 무엇입니까? 나는 사울과 같이 높은 자리에 올라가서, 나도 한번 떵떵거리면서, 내가 정말 세상 사람들에게 내 이름을 알리고, 내가 이렇게 높은 자리에 올라갔다고 하는 것을 드러내고 싶기 위한 마음으로, 다윗이 그 왕좌에 올라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주신 사명이 있다고 한다면, 내게 기름을 부은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내가 왕이 되어서 가난한 자들을 도와주고, 억울한 사람들을 도와주고, 정말 외적의 침입을 받아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그 왜적으로부터 보호해 주고, 우리 민족을 섬기기 위한, 그 자리에 왕이 되어서, 그 일들을 하려고 했던 것이고, 그 과정 가운데서 다윗은 바로 왕이 될 수 있었는가? 아니에요.

다윗은 제일 처음에 한 것이 무엇이냐면, 궁정에 들어가서 사울 왕을 위해서 악기를 연주하는 신하의 모습으로 들어간 것이죠. 그때 다윗은 괴로워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이게 뭡니까?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왕을 만들어주신다고 하더니, 사울 왕의 신하가 뭡니까? “수금 타는 이 광대 노릇이나 하는 이게 뭡니까?”하고, 불평하고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악기를 타면서, 내가 타는 그 악기로 사울의 마음이 평안해질 수만 있다고 한다면, 이 사울이 정말 마음이 편안해지고, 그래서 이 이 나라를 잘 다스릴 수만 있다고 한다면, 그것이 너무나도 좋아서, 그 자리에서 성실하게 악기를 타는 것이죠.

도망자의 삶을 살았지만, 다윗은 그 아둘람 굴속에 피해 들어온 억울한 자, 정말 고통을 당하는 자,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고, 그들의 아픔을 들어주고, 그들을 위해서 외적의 침입을 막아주고 하면서, 그곳에서 일하고 도망가고 있는, 그 다윗이 사실은 왕의 역할들을 실제로 해나가면서, 그 일들을 충분히 감당했던 것이죠. 왕의 자리, 왕의 면류관을 쓴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다윗은 어느 곳에 있든지 왕의 역할들을 수행하면서, 왕이 했으면 좋았을 뻔한 그 일들을 하면서 삶을 살았던 것이죠.

요셉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셉 어느 날 하나님께서 꿈을 주셨어요. 꿈을 주시는데, 해와 달과 별들이 자기 자신에게 절하는 꿈을 보았습니다. 형제들의 볏단이 자신에게 절하는 꿈을 봤습니다. 높은 자리에 올라갈 거라고 하는 그런 꿈을 꾸게 되었는데, 그런데 그 요셉이 맞닥뜨리게 된 현실은 무엇이냐면, 보디발의 집에 들어가서 노예로 사는 거예요. 거기서 하나님을 향해서 원망했습니까? 하나님 나로 하여금 높은 자리로 올려준다고 하더니, 이게 뭡니까? 노예가 뭡니까?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보디발의 집에 들어가서, 보디발을 하나님처럼 섬기는 거예요. 남이 보지 않아도 최선을 다해서 섬기는 거예요. 그 가정의 모든 것을 economy, 바로 경제를 바로 잡아서, 그래서 그를 섬길 수 있도록, 열심히 최선을 다할 때, 사람들이 인정하게 되는 것이고, 감옥에 가서도, 내가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다가 억울하게 감옥에 들어왔으니까, 힘들어 죽겠다고 좌절하고 우울증에 걸리고 하면서, 거기서 한탄하며 지낸 것이 아니라, 감옥에서도 최선을 다해서 섬기는 거예요. 감옥에 들어온 술 맡은 관원장의 이야기를 귀담아듣고, 떡 맡은 관원장의 이야기를 귀담아듣고 상담해 주면서, 그들의 마음을 위로해 주고, 그리고 다시 그들로 하여금 힘을 갖게 하고, 그래서 섬기는 그 일, 사실은 그때부터 이미 요셉은 총리의 역할들을, 보디발의 집 안에서든지, 감옥에서든지 하다가, 결국 총리의 자리에까지 올라가게 된 것이죠.

솔로몬도 마찬가지입니다. 솔로몬이, 아도니야의 계획과는 달리,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을 왕으로 세워주셨습니다. 근데 그 솔로몬이 왕이 됐을 때, “까불지 마라” “이제는 내가 누구인 줄 아느냐? 내가 왕이다. 내가 최고의 권력자다.” 으스대면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엎드린 거예요. 자기 자신의 연약함을 알고,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물어봅니다. 솔로몬아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열왕기상 3장 7절에서부터 9절 말씀에, 솔로몬은 하나님 앞에 강구합니다.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종으로 종의 아버지 다윗을 대신하여 왕이 되게 하셨사오나, 종은 작은 아이라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하고, 주께서 택하신 백성 가운데 있나이다. 그들은 큰 백성이라. 수효가 많아서 셀 수도 없고 기록할 수도 없사오니,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이 왕의 자리에 올라가서, 이 왕의 자리가 빼앗기지 않고, 떵떵거리면서, 세계 최고의 왕이 되겠다고 하는 그런 꿈을 하나님 앞에 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저는 이 백성들에게 잘 재판해주고 싶어요. 이 백성들을 잘 돌보아주어서, 이 백성들이 행복한 삶을 살게 만들고 싶어요. 이 백성들을 위해서 내가 최선을 다하고 싶은데, 저에게 지혜가 없어요. 지혜가 어린아이와 같아요. 부족해요. 하나님 도와주세요.” 내가 이 백성들을 잘 섬길 수 있도록, 섬김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섬길 수 있는 힘과 능력과 지혜를 달라고 기도하게 될 때, 하나님께서 그 솔로몬의 마음을 보시고 기뻐하시고, 하나님께서 많은 것들로, 구하지 않은 것까지라도, 다 채워주게 되는 놀라운 역사를 바라보게 될 수가 있었습니다.

아도니야는 왕이 되려고 했지만, 섬기려고 하는 마음은 그 어느 한 구절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고, 아도니야가 왕이 되려고 했던 그 갈망은 “누구라도 꿈을 꿀 만한 것이다”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것은 정당한 갈망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압살롬의 실패를 보면서, 어쩌면 압살롬보다는 더 잘 준비했을는지는 모르지만, 압살롬과 다를 게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압살롬도 그저 왕의 자리가 탐이 나고, 높은 자리가 탐이 나서, 왕의 자리로 올라갔지만, 결국은 실패했던 것이고요. 아도니야도 그가 왕이 되려고 철저하게 잘 준비해서, 그래서 성공한 것 같았지만, 일단은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따랐기 때문에, 그래서 자기가 다윗의 뒤를 이은 이스라엘의 세 번째 왕이 되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 꿈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가치가 없는 꿈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무엇을 갈망하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는 무엇을 바라고 있습니까? 우리는 놀랍게도 아도니야와 같은 꿈을 꿉니다. 부자가 됐으면 좋겠어요. 사업에서 성공했으면 좋겠어요.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았으면 좋겠어요. 우리 자녀들이 높은 위치에 올라갔으면 좋겠고, 좋은 대학에 갔으면 좋겠고, 성공하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고 하는 그런 꿈을 꾸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헛된 꿈이에요. 그건 우상이에요. 우리를 결코 행복하게 해 줄 수 없는 헛된 갈망들입니다. 그들은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업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갈망해야 되는가? 우리는 사명을 감당해야 갈망해야 합니다. 우리는 섬김의 자리를 추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20장 25절에서부터 28절의 말씀에,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왜 우리는 섬김의 자리를 갈망해야 합니까? 첫 번째는 왕의 자리는 결국 우리를 파멸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왕의 자리는 누구나 다 욕심낼 만한 부러운 자리이고, 모든 사람들이 갈망하는 자리이지만, 사실은 그 자리가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아니고, 사실은 우리를 파멸로 이끌 수 있는 위험한 자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두 번째 우리는 왜 섬김의 자리를 갈망해야 합니까? 섬김의 자리 가운데는 온전한 기쁨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행복하지 않은 것은 섬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섬김을 받으려고 갈망하면 갈망할수록, 우리는 불만으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도움의 손길을 내밀고, 사랑의 손길을 내밀고 낮은 자리로 들어가서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의 손길을 내밀어줄 때, 오히려 기쁨이 우리들의 삶 가운데 넘쳐나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우리는 왜 섬김의 자리를 갈망해야 합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들을 섬기기 위해서 종의 자리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 2장 5절에서부터 8절 말씀에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우리 주님께서 왕 노릇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낮고 천한 자리로 오셔서,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희생 재물로 드리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섬김의 자리를 갈망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1여전도회 헌신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요. 우리 1여전도회 회원들뿐만 아니라, 이 자리에 앉은 모든 성도님들 모두가 헌신과 섬김을 다짐하는 귀하고 복된 시간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의 기도 제목은 단순히 우두머리가 되게 해 주옵소서. 그렇게 기도하기보다는, 연약한 자들을 도울 수 있는 힘을 주시옵소서. 연약한 우리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지혜를 주시옵소서. 용기를 허락하여 주옵소서. 사랑의 마음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기도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녀들을 그렇게 섬겨왔습니다. 그리고 그 섬김에서 엄청난 행복과 기쁨을 경험해 본 적이 있습니다. 이것을 더 넓혀서, 하나님께서는 과연 왜 나를 이곳까지 인도해 주셨는지 우리는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내가 차지할 수 있는 그 자리가 무엇인가? 높은 위치가 무엇인가? 사람들로부터 내가 영광을 받을 것이 무엇인가를 물을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달란트가 무엇이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사가 무엇이고, 어떤 것이 내게 주어졌든지, 하나님께서 이것으로 나로 하여금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는가? 기도하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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