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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욕으로 구하는 기도 (약 4:1-3)

오늘은 정욕으로 구하는 기도에 대해서 함께 같이 살펴보려고 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시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들인데,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들인데, 기도하면 해결이 되고, 기도하는 가운데 기적이 일어나고,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 기도의 능력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래서 히스기아 왕은 이제 내 수명이 연한이 다 찼고, 이제는 하나님께서 내 목숨을 거두어 가실 거라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히스기아 왕은 하나님 앞에 간절히 울부짖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에 응답하셔서, 히스기아 왕의 수명을 15년간 연장해 주셨다고 하는 이야기가 이사야서 38장의 말씀 가운데 기록돼 있습니다.

엘리아 선지자는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가운데, 이스라엘의 3년 반 동안 비가 오지 않고 가뭄에 시달렸었는데, 하늘에서부터 비가 쏟아지는 그런 엄청난 일들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애굽 땅에서 종살이하고 있을 때, 너무나도 힘들고 괴로워서 하나님 앞에 울부짖었는데요. 하나님께서는 그 울부짖음을 들으시고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해내는 그런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기도의 역사 이야기가, 기도의 응답의 이야기가 성경에 보면 많이 기록돼 있는데요. 문제는 과연 우리가 기도할 때는 왜 그런 응답이 주어지지 않는 것처럼 보이느냐 하는 것이죠. 제가 예전에 어떤 성경 공부 그룹에서 성경 공부를 인도하면서, 하나님께서는 기도하면 응답해 주신다고 믿느냐고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랬더니 성경 공부에 참여하신 모든 분들이 “아멘. 믿습니다.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십니다.”라고 그렇게 대답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저 한쪽 끝에 앉아 계셨던 연세가 많으신 어떤 남자 집사님께서 이런 말을 불쑥했습니다. “목사님, 그런데 기도에 응답이 없는 것 같아요.” “성경에는 응답의 이야기가 기록돼 있고, 또 수많은 사람들이 기도 응답을 받았다고 하는데, 내 기도는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지 않는 것 같아요.”라고 그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성경에는 주님께서 기도하면 응답해 주시겠다고, “기도하라. 내 이름으로 기도하면” 다 들어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셨는데, 그런데 실제 우리들의 삶 가운데서, 그런 기도 응답의 체험을 하는 것이 쉽지 않다고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성경에는 분명하게 기록돼 있고, 또 교인들 가운데는 정말 이 문제를 놓고 기도했는데,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셨어요”라고 하는 그런 기도의 간증들의 이야기를 자주 듣는데, 왜 나의 기도만큼은 하나님께서 안 들어주시는가? 이게 우리들의 문제인 것이죠.

정말 필요한 순간에 하나님께서 기도를 응답해 주신다고 하면, 정말 좋겠는데,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시지 않는 것 같아서, 그래서 우리들의 믿음이 흔들리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왜 기도에 응답이 없는 걸까요? 하나님께서는 기도에 응답해 주시겠다고 말씀하시고 약속하셨는데, 그런데 왜 실제로 우리들의 삶 가운데서는 기도에 응답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성경에는 그 이유를 몇 가지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대답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을 하시는데, 우리의 그 기도의 내용과는 다른 방법으로 응답해 주시기 때문에, 마치 기도에 응답이 없는 것처럼 들릴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구했지만,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이것이 아니라, 더 좋은 것으로, 내가 생각하기에 좋은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방식으로 대답해 주시기 때문에, 기도하는 내 입장에서 본다고 한다면, 기도에 응답이 되지 않은 것처럼, 그렇게 느껴질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첫 번째 대답입니다.

뿐만 아니라 두 번째 대답을 생각해 볼 수가 있겠는데요. 그것은 우리에게 죄가 있다고 한다면, 응답이 없다고 성경은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요한복음 15장 7절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원하는 대로 구하면 이루리라고 말씀해 주실 때, 그 앞에 있는 전제 조건이 하나 붙어 있는 겁니다. 그 전제조건이 무엇이죠? 내 안에 있어야 된다는 거, 내 말 안에 거해야 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가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어야 되고, 우리가 주님 안에 있을 때,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을 때, 그 기도에 응답해 주시는 것이지, 하나님의 뜻에서부터 멀리 떠나버린 인생 죄악을 저지르면서, 악을 행하면서, 하나님과는 상관없는 삶을 살면서, 기도하면서, 기도가 응답될 거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고 하는 것이죠.

이사야서 1장 15절의 말씀을 보면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이스라엘 민족이 죄악을 저지르면서, 살인을 저지르고, 남들을 착취하고, 온갖 나쁜 짓을 다 하면서, 하나님 앞에 번제를 드리고,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무엇이냐 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의 눈을 감아버리겠다. 내가 너희들의 기도의 귀를 막아버리겠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신 겁니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의 뜻에서부터 거역하는 삶을 살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아니하면서 기도하는 그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아니하시겠다고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세 번째 이유도 생각해볼 수가 있겠는데요. 믿음이 없이 드리는 기도에는 응답하지 않는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야고보서 1장 6절에서부터 8절 말씀에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다시 말하자면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해야 하는데, 믿음이 부족하다고 한다면, 믿음이 없다고 한다면, 신뢰하지 못한다고 한다면, “그런 사람은 응답받을 생각을 하지 말라.” 말씀해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믿음이 없다고 한다면, 불신하는 가운데,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는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네 번째로 그 이유를 찾아본다고 한다면, 오늘 우리가 읽은 야고보서 4장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는다고 오늘 읽은 야고보서 4장 3절에서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응답되지 않는 케이스들을 열거하고 있는 이 모습을 보면서, 여러분들은 어떤 느낌을 받으십니까? 저는 이게 참 뭐라고 할까요? 뭔가 좀 허탈하게 느껴집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기도하라. 기도하면 들어주시겠다고 말씀하시고, 무엇이든지 구하면 내가 그대로 이루어주겠다고 말씀해 놓으시고서는, 그런데 단서 조항이 달려 있는 거예요. 그런데 안 된다. 이런 경우에 안 되는데, 믿음이 없으면 안 되고, 죄를 짓고 있어도 안 되고, 또 우리가 정욕으로 구하면 안 되고, 여러 단서 조건들을 다 달아놓은 거죠. 마치 어떤 느낌을 드냐면 우리가 보험을 들 때는 “보험으로 다 보상됩니다. 보험만 들면 걱정 없습니다” 해서, 보험을 들어놨는데, 막상 보험을 타려고 신청을 했더니, 이래서 안 돼요. 저래서 안 돼요. 그런 난처한 경험을 해보신 적이 계십니까? 그런 것처럼 느껴져서, 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 뭔가 좀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마치 어떤 사장님과 같은 못된 사장님 같은 느낌이 들어서, 좀 허탈하게 느껴집니다. 어떤 사장님이 하루는, “오늘 내가 기분이 좋으니까, 우리 회식 한번 합시다. 다 같이 우리 중국집 가서 우리 맛있게 먹읍시다. 여러분, 그동안 수고 많이 하셨는데, 마음대로 시키세요. 마음대로. 난 짜장.” 그 앞에서 탕수육을 시키기 힘든 거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기도하면 다 들어주겠다고 말씀해 놓으시고서는, 그런데 믿음이 없어서 못 들어주겠다. 죄가 있어서 못 들어주겠다. 너희가 정욕으로 구하니까, 못 들어주겠다고 말씀하시면, 도대체 무엇을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시겠다고 하는 것인지, 좀 난처하고 허탈하게 느껴지게 될 것입니다.

죄의 문제만 해도 그렇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죄 가운데 있는 사람들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한다면, 도대체 누가 응답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 가운데 그 누구가 죄가 없는 사람이 있어서, “내가 죄가 없으니, 하나님, 이제 기도 좀 들어주세요.”라고 “들어주세요”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하루에도 수차례에 걸쳐서 악한 생각이 떠오르고, 이기적인 생각이 떠오르고, 미워하는 마음이 떠오르며, 정말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그런 연약한 우리들의 모습을 가지고, 우리들의 모습을 살펴보면, 죄로 가득 차 있는 우리 인생들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나가서 기도의 응답을 기대할 수가 있겠습니까?

믿음의 문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있는 자들만이 응답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면, 누가 정말 완벽한 믿음을 가지고 있어서, 하나님께 응답을 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들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이 내 거라고 할지라도, 우리가 우리들의 마음을 컨트롤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는 무서운 것을 보면 두려워 떨게 되어 있고, 슬픈 일을 만나면 슬프게 되어 있고, 고통 가운데서 힘들고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 우리의 믿음은 흔들릴 수밖에 없는 것이죠. 기도에 응답이 안 된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이거 안 들어주면 어떡하나? 불안한 마음이 생길 수밖에 없는데, 하나님께서 그런 우리들의 마음을 보시고, “너 의심했지?” “안 들어줘” 해버린다면, 그것처럼 허망한 게 어디에 있겠습니까?

정욕으로 쓰는 것도 응답해 주시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러면 도대체 무엇을 기도하라고 하는 말입니까? 우리의 기도라고 하는 것은 사실상 우리들의 욕심과 우리들의 소망과 관련이 없는 기도의 제목이 아무것도 없을 겁니다. 다 내 삶을 위한 것이고, 우리들의 가족을 위한 것이고, 우리들의 이익을 위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그런 소망과 그런 욕망 욕심이 들어 있기 때문에 기도하는 것인데, 우리들의 욕심을 다 내어놓아야 한다고 한다면, 욕심이 없다고 한다면, 뭐 하려고 기도하겠어요? 내가 바라는 게 없으면, 기도할 이유도 없을 것 같은데, 그런 것들, 내가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너 그거 정욕으로 쓰는 거다. 욕심으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못 들어주시겠다고 한다면, 도대체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해 주신다고 하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 말씀을 볼 때마다 좀 혼란스럽고, 불편하고, 때로는 허망하게 느껴지기까지 하게 되는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가만히 곰곰이 생각해 본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다 들어주시고, 우리가 기도하기만 하면 그대로 다 완벽하게 다 응답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믿음이 있는가 살펴보시기도 하고, 우리의 죄악을 살펴보시기도 하고, 우리의 욕심을 살펴보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참되신 하나님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거짓 종교에서 말하는 메커니즘은 무엇입니까? 무당 종교에서, 샤머니즘에서,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거짓 종교에서 말하는 기도의 공식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 세상 거짓 종교의 기도의 공식은 그냥 정성만 다하면 돼요. 응답의 비결이 무엇이냐? 그것은 정성이에요. 다시 말하자면 부적을 붙이려고 할 때, 비싼 부적을 붙이면 그대로 이루어진다고 말을 하는 겁니다. 굿을 하는데 싼 굿이 아니라, 비싼 굿을 하면, 그 이 굿을 한 대로 이루어진다고 하는 것이 이 세상 종교의 이 세상 거짓 종교의 메커니즘입니다. 무덤도 좋은 곳에, 비싼 곳에 명당자리에 쓰게 되면, 후손이 잘 된다고 하는 것이 민속 신앙의 메커니즘입니다. 뱃사람들이 항해를 하는데, 용왕님을 좀 달래고, 풍랑이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쓰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아리따운 처녀를 물색해서, 인당수에 빠뜨리기만 하면, 그러면 그 인당수에 빠뜨린 그 처녀가 어떤 처녀인지를 보고, 그리고 잠잠케 해주는 것이 이 세상 거짓 종교의 메커니즘인 것이죠.

그 이 세상 거짓 종교의 신들은 어떤 신들인가? 그 신의 마음을 달래주기만 하면, 정성을 다해서 그 신의 마음을 달래줄 수만 있다고 한다면, 복을 자동적으로 주고, 화를 없애주고,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 주는 시스템이 바로 이 세상 거짓 종교의 시스템입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기계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죠. 우리가 잘 못하면 안 들어주고, 정성이 약하면 안 들어주고, 정성을 많이 하게 되면, 지성을 하게 되면 감천한다고 하는 것이 이 세상 거짓 종교의 메커니즘입니다. 종교개혁 503주년인데 사실 천주교가 중세 시대 때 했던 그 시스템이 바로 그런 시스템으로 바뀌어 버렸던 것이죠.

그런데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 하나님은 기계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인격적인 하나님이세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 우리가 어떤 공식만 잘 대입하게 되면, 그대로 다 응답해 주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 다시 말하자면 우리가 비밀번호만 잘 누르면, 그냥 우리가 그 돈을 어디에 쓰는지 목적도 모르고, 그 결과도 모른 채, 그냥 돈을 자동적으로 내어주는 현금 인출기와 같은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 하나님은 기도하는 자가 무슨 목적을 가지고 있는지, 이것으로 어떤 방식으로 사용하기를 원하시는지, 우리의 요구에 따라서 그냥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 하나님은 인격적인 하나님으로, 이 기도에 응답하게 되는 것의 그 결과와 이유와 목적을 하나씩 따져보면서, 그 기도에 응답하실 수도 있고, 하시지 않을 수도 있는, 인격적인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을 종으로 생각하시면 안 되는 데요. 종은 누굽니까? 종은 주인이 시키는 일이라고 한다면, 아무런 이의제기를 하지 않고, 무조건 시행하게 되어 있습니다. 주인이 시키기만 하면, “주인님, 이걸 왜 시킵니까?” 묻지 않는 것이 종입니다. 그냥 해야 합니다. 주인의 나쁜 결정이라고 할지라도, 주인의 명령이기 때문에 그냥 해야만 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종종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우리의 종처럼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 기도했잖아요? 그러니까 무조건 내 뜻대로 이루어주세요.”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하나님은 장사꾼과 같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장사꾼은 누구입니까? 장사꾼은 우리가 물건을 살 때, 그 물건을 왜 사는지, 무슨 목적을 위해서 이 물건을 구매하는지에 대해서 물어볼 책임도 없고, 그 결과에 대한 책임도 없는 것이 장사꾼입니다. 어느 날 어떤 사람이 와서 슈퍼마켓에 와서 연탄을 하나 삽니다. “연탄 하나 주세요.” 그 연탄을 가지고 무엇을 하려고 그러는지, 그 연탄을 이용하여 이용해서 연탄 불고기를 해 먹으려고 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 연탄을 이용하여 오늘 생애를 마감할 자살을 꿈꾸고 연탄을 사는 건지, 그 장사꾼은 물어볼 이유도 없고, 책임도 없고, 결과에 대한 아무런 의무도 책임도, 아무런 결과도 그에게는 상관이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세요. 우리의 복지를 생각하시고, 우리가 어떻게 되는가가 가장 중요한 관심사이신 그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할 때, 그 우리의 마음이 무엇인가를 살펴보시고, 죄악을 살펴보시기도 하고, 믿음을 살펴보시기도 하고, 우리의 동기를 살펴보시면서, 우리에게 정말 가장 좋은 것을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안 되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시기에, 참으로 우리가 믿고 신뢰할 만한 우리의 영적인 아버지이신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기도를 가르치시면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우리가 기도하는 그 기도의 대상은 장사치에게 가서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대상은 그냥 지나가는 사람에게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대상은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하신, 그 사랑의 아버지 앞에 나가서 간구하는 것이고, 그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보시며, 우리의 목적이 무엇인지, 우리가 왜 기도하는지, 그것을 통해서 어떤 것을 이루기를 원하시고, 그리고 그 결과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고려하시며, 때로는 응답하시기도 하고, 때로는 안된다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아무런 의지적인 판단이 없이, 무조건 들어주시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시고, 때로는 기다리라고 말씀하시고, 때로는 더 좋은 것으로,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크고 놀라운 것으로 응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주님께서는 “내게 나아와 기도하면, 다 들어주시겠다”라고 하신 그 말씀은 거짓말로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닙니다. 들어줄 생각도 없으면서, 비싼 음식은 사 줄 생각도 없으면서, 마음대로 시키라고 말하고, 짜장면 이상 시키면 찍혀버리는, 그런 사장님처럼, 우리들에게 마음대로 시키라고, 마음도 없이 해주시는 그런 주님이 아니라, 우리의 상황을 보시면서, 너 혼자 고민하지 말고, “내게 나와라. 나와서 말해”라고 말씀해 주시는 하나님이세요.

힘들고 고통스러운 인생의 길을 걸어가면서, 내가 내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그런 힘들고 고통스러운 문제를 만났을 때, 그것 때문에 내가 괴롭고 정말 아파서 죽겠는데, 그럴 때 “너 혼자 그렇게 고민하지 말고, 내게 나와 말해라. 아빠가 들어줄게.”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내가 들어줄게”라고 말씀하시는 분이 바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혼자 고민하지 말라고 하는 것인데요. 어리석은 부모는 자녀가 요청하면 요청하는 대로 다 들어줘 버립니다. 하지만 지혜로운 부모님이라고 한다면, 사랑하기는 하지만, 지혜가 없는 부모는 무조건 다 들어주겠지만, 사랑하면서도 지혜로우신 부모라고 한다면, 자녀가 요청하는 대로 다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눈물을 머금고, 들어주지 않는 부모의 마음처럼 하나님께서는 이런저런 상황 가운데서 안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는 정욕으로 우리가 구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는다고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질문을 던져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과연 정욕으로 구한다고 하는 것이 무슨 의미이고, 우리가 정욕으로 구하지 않는 기도를 해야 될 텐데, 도대체 정욕으로 구하는 기도는 무엇이고, 정욕으로 구하지 구하는 기도가 아닌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서 우리가 고민을 좀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여러분 정욕으로 구하는 기도는 뭐고, 정욕으로 구하는 기도가 아닌 것은 무엇일까요? 종종 우리 교회 안에는 잘못된 생각이 많이 퍼져 있는데요. 어떤 생각이 많이 있냐면, 우리가 목적을 하나님을 위한 것, 교회를 위한 것, 선교를 위한 것, 거룩한 사명을 위한 것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정욕으로 구하는 기도가 아닐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는 경향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하나님, 나 돈 많이 벌게 해 주세요”하는 것은 정욕적인 기도가 될 수가 있겠지만, “하나님, 십일조 많이 하게 해 주세요.” 하면, 그러면 그건 정욕적인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기도일 거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 우리 자녀가 잘 되게 해 주세요.” 하는 것은 정욕적인 기도가 될 수가 있겠지만, “우리 자녀가 잘 되어서, 주님을 위해서 일을 하고, 주님을 위해서 엄청난 일을 할 수 있는, 그런 위대한 인물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정욕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그것은 거룩한 기도일 수 있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경향들이 많이 있고, 그렇게 가르치기도 합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만일 여러분들의 자녀가 와서 떼를 쓰면서, “아빠, 엄마, 나 장난감 하나 사주세요. 게임기 하나 사주세요.” 하면서 내가 게임기를 사주면, 내가 놀겠다는 게 아니고, 이 게임기를 사주면, 내가 친구들한테 빌려주려고 그러는데, 내가 이 게임기 가지고 전도하려고 그러는데, 게임기 좀 사주세요. 그러면 여러분들 네가 이렇게 거룩한 목적을 가졌구나 생각하시겠습니까? 이놈이 수를 쓰는구나 하겠습니까? 뻔히 보이는 그런 거짓말을 하면서, 하나님이 우리들의 말 바꾸기에 그냥 속아 넘어갈 거라고 생각하는 그런 어리석은 생각들이 우리 주변에 많이 있습니다.

사실 불신자들은 그걸 너무나도 잘 알아요. 성도들이 하는 말들을 보면 늘 말들 가운데, 주님을 위해서 산다고 말하고, 내가 거룩한 목적을 가지고 선교를 위해서 한다고 말하고, 그래서 주님의 일을 하겠다고 말하는데, 불신자들은 그 말을 하는 사람들의 이기적인 목적을 꿰뚫어 보면서, 그래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겁니다. 하나님은 얼마나 더 잘 아시겠습니다. 우리들의 표현을 바꾼다고 해서, 기도하면서 “하나님, 돈 많이 벌게 해 주세요”라고 하는 그 표현을 “하나님, 내가 성공해서 십일조 많이 하고, 교회 일 많이 할 수 있게” 해달라고 하는 표현으로 바꾼다고 해서, 그것이 정욕적인 기도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우리가 우리의 필요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가능한 일일 겁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가르쳐주신 기도문 가운데 보면,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그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셨는데, 그 이야기는 그냥 단순히 먹을 것만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사실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위해서,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다고 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필요 가운데, 입시에 합격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한다면, 직장에 취직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한다면, 자녀들을 아기를 낳는 것이 필요하다고 한다면, 그러한 필요들도 기도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사실 우리의 모든 삶의 문제들을 놓고서 기도해야 할 것은 당연합니다. 우리들의 소원을 기도하는 것이 당연한 것인데요.

그런데 정욕으로 하는 기도가 그러면 무엇입니까? 정욕으로 하는 기도와 정욕으로 하지 않는 기도의 차이점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무엇입니까? 저는 두 가지로 이야기를 할 수가 있겠는데요. 첫 번째는 우리가 기도하는 그 구하는 것이 우리의 우상이 되어 버리게 된다고 한다면, 그것은 정욕으로 구하는 기도가 될 겁니다. 예를 들어서 물질 명예 성공 어떤 권력, 우리가 추구하는 그 모든 것이 사실은 우리의 우상이 되어 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실 우리가 우리에게 유익한 그 모든 것들이 다 우리들의 우상이 될 수 있는 가능성들이 많은데요. 그러한 우리의 물질이 우상이 되어 버리고, 성공이 우상이 되어 버리게 된다고 한다면, 그리고 그것이 우상이 되어 버리게 되면, 결국 하나님은 수단이 되어 버리는 것이죠. 하나님은 왜 찾습니까? 내가 정말 갈망하는 것, 내가 정말 최고로 생각하는 그것을 얻기 위한 수단과 방법으로 하나님을 수단화시켜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죠.

그런데 그러한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만일 응답이 되었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포기하신 사람들에게는 응답을 하시겠지만, 하나님께서 그런 기도에 응답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냐면, 결국 우리가 만든 그 우상들은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파멸로 이끌어 버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재물을 얻고자 기도했는데, 그 재물이 우리들의 우상이 되어 버렸다고 한다면, 그러면 결국 그 재물 때문에 우리는 망하는 길로 가게 될 겁니다. 결국은 우리의 기도의 제목이 사실상 누가 하나님인가를 결정해야 하는 그런, 하나님 앞에서의 신앙을 결정하는 일이 될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길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하나님께 기도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하나님은 내가 필요할 때 찾는 수단일 뿐이고, 내가 아쉬우니까 찾아가는 그런 대상일 뿐이고, 정말 내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물질이 하나님에게 필요한 것이고, 그것이 나의 영원한 우상이고, 그것이 나를 먹여 살릴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나아가는 그런 기도의 제목은 하나님께서 응답지 아니하실 것인데, 왜냐하면 결국 그 우상들은 우리를 망하게 할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두 번째로 정욕으로 구하는 기도가 어떤 기도가 될까요? 그것은 내가 헌신하고 희생하고, 나의 노력이 없이 하는 기도가 정욕으로 하는 기도가 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시험공부는 하나도 하지 아니하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를 “하나님, 합격하게 해 주세요.” 하는 기도를 한다거나, 자녀들을 위해서, 내가 그 아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위해서, 아이들에게 인내하고 참고 견디면서, 그 아이들과 대화하는 시간을 가지려고 하지도 않고, 그들의 마음을 알아주려고 하는 그런 시간을 가지려고 하지도 않고, 그들의 아픔과 절규에 대해서 내가 귀 기울이려고 하는 그런 마음을 가지지 않은 채, 그냥 하나님 앞에 나와서 “하나님, 저 아이 좀 제대로 좀 만들어 주세요” 기도만 하고 있는 것은 그야말로 정욕으로 구하는 기도가 될 것입니다.

우리 아이가 믿음으로 바로 서게 만들기를 원한다고 한다면, 그냥 기도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에요. 그 아이와 이야기를 해야 되고, 대화를 해야 되고, 마음을 어루만져야 줘야 되고, 그들의 마음을 얻어야 하고, 귀를 기울이는 노력이 없이 그냥 “하나님 바꾸어 주세요”라고 기도하는 것은 옳은 것이 아닌 것이, 우리 남편이 바뀌기만을 위해서 기도한다고 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나의 희생과 나의 헌신과 나의 노력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교회의 부흥과 발전을 위해서 기도하는 기도는 하지만, 새 교우가 와도 아는 척도 하지 않고, 정말 전도하려고 하는 마음도 없고,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은 채, 그냥 우리 교회는 사랑이 넘치는 교회가 되게 해 주어서, 나와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 이해하려고 하는 노력도 없는 채, 내가 늘 애용하던 바로 그 자리를 다른 사람들에게 양보하려고 하는 마음도 없는 채, 그냥 우리 교회만 잘 되게 해달라고 하는 그런 기도들은 다 정욕으로 구하는 것이지, 하나님 앞에서 참된 기도의 제목은 아닐 겁니다.

오늘 설교 말씀이, 그러니까 기도를 중단해야 된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은 아닙니다. 기도의 제목을 보면, 늘 아쉽고 늘 부족한 기도의 제목일 수밖에 없어요. 믿음이 부족한 기도의 제목이고, 죄악 가운데 드리는 기도일 수밖에 없고, 정욕 가운데 드리는 기도일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이 옳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하나님은 그냥 물품 검역관처럼, 이것이 믿음에 합당한 기도인지, 또 죄악 가운데 혹은 정욕으로 드리는 기도인지를 엄격하게 따져서, “이건 불합격” “이건 합격”을 외쳐버리는 그런 무심한 하나님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기 때문에,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하신, 그리고 우리와 대화하기를 원하시고 듣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어떠한 하나님이십니까?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하나밖에 없는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로마서 8장 32절의 말씀에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부족하여도 주님 앞에 나아가 엎드려 기도하는 모습을 가져야 되겠고, 기도하는 가운데 우리의 기도의 제목들이 혹시 우상이 되고 있는지는 아닌지, 살펴보면서 주님 앞에 나아가는 그럼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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