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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하는 교회 (사 43:21)

지난번에 영국의 토트넘 축구 선수단이 우리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우리 한국의 대표 선수들과 친선 경기를 하기 위해서 왔던 것인데요. 여러 가지 행사를 하는 가운데 그 가운데, 선수 2명을 초대해서 한국의 물건이 어떤 용도에 사용되는지를 맞추는 맞추기 게임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해리 케인이라고 하는 공격수와 맷 도허티라고 하는 그런 수비수를 두 명 초대해서, 하나씩 하나씩 한국의 물건을 보여주고, 이것이 어떤 물건이냐 하고 물어봤는데, 외국인들이 한 번도 사용하지 못했던 그런 처음 보는 물건들이라, 그것의 용도를 알아맞히는 데, 굉장히 어려움을 겪는 것을 봤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 무엇이 나왔냐면, 죽부인이 나왔습니다. 예 죽부인. 이게 뭐 하는 거죠? 더운데 여름에 시원하라고 끼고, 이렇게 누워 있는 것이죠. 하지만 이 외국 사람들은 이게 무엇인지 몰라서, 그 안에 촛불을 켜는 겁니까? 그 안에 꽃을 넣어두는 겁니까? 이렇게 물어봤습니다. 이번에는 밥상 덮개를 보여주었습니다. 밥상 덮개, 파리나 이런 것들이 들어가지 않게 덮어두는 것인데요. 외국인들은 이것을 보고 뭐라고 추측했을까요? 아 이거 신부에게 씌워주는 겁니까? 씌워주면 좋을 것 같아요. 이번에는 모기향을 보여주었습니다. 모기향을 보여주면서, 이것이 무엇이냐고 물어봤더니, 외국 사람들이 뭐라고 대답했을까요? 이거 음식 그릇 받침입니까라고 물어봤습니다.

한 번도 사용하지 못했던 처음 보는 물건이라, 그것의 용도를 아는 것이 어려웠던 것이죠. 예전에 저희들이 어렸을 때에, 흔히 일본 사람들을 비하하면서 했던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일본 사람들이 머리에 쓰는 그런 모자 같은 게 있는데, 그 모자의 유래가 어떻게 되었는가? 조선통신사를 따라가던 사무라이가 모자를 하나 달라고 하니까, 선비가 자신의 갓을 줄 수는 없어서, 가지고 있던 버선을 줬더니, 그 버선을 써서 그게 일본 모자가 됐다. 아마 그냥 진짜 유래는 아닐 것이고, 아마 일본 사람들 우리나라 사람들이 너무 비하하고 깔보는 경향이 있는데, 그런 차원에서 만들어낸 그런 이야기일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물건 같은 경우는 원래 용도가 아니어도 큰 문제가 없습니다. 원래 사용한 목적은 그 물건을 만든 그 목적이 따로 있지만, 그 목적대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다른 목적을 위해서 충분히 쓸 수 있는 것이죠. 내가 창의적으로 그 물건을 마음대로 써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람의 경우는 좀 다릅니다. 어떤 회사에서 사장님이 직원을 뽑았다고 한다면, 그 직원에게 월급을 준다고 하면, 그 직원이 이 회사 내에서 무슨 일을 해야 하는가라고 하는 기대가 있기 때문에 뽑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그 회사에 들어가서, 아니면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서 공무원이 되었을 때, 자기에게 주어진 그 사명, 자기에게 주어진 그 역할을 잘 감당하지 못한다고 하면 아마 큰 문제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얼마 전에 보았던 뉴스인데요. 인터넷을 아주 뜨겁게 달구었던 어떤 식당 사장님의 하소연이 있었습니다. 저희가 식당을 운영하면서 알바생들을 모집해서, 그래서 알바를 시켰는데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 알바생이 음식 주문이 들어오면, 음식 주문을 취소시킨 거예요. 1시간에 9건의 음식 주문을 취소시켰는데, 왜 취소시켰을까요? 주문이 많으면 바쁘니까, 힘드니까, 힘들지 않게 하기 위해서, 주인 몰래 음식 주문을 다 취소시켜버린 겁니다. 나중에 알고 봤더니, 9건만 취소한 것이 아니라, 그동안 25건을 취소해서 60만 원어치의 주문을 다 취소시켜 버린, 그런 정말 그 이야기가 인터넷상에 올라와서 한참 논란이 된 적이 있는 것이죠. 주인은 그 알바생을 뽑을 때, 우리 식당을 위해서 잘 섬겨주기를 위해서, 봉사해 주기를 위해서 정말 힘든 가운데서도 그래도 급여를 주면서 채용했을 텐데, 안타깝게도 그 채용한 사람이 사장님이 원하던 방향과는 잘못된 그런 일을 했던 것이죠.

오늘 우리가 함께 생각해보고 싶은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어떻게 바라보고 계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를 만드셨고,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어 주셨는가? 우리의 목적을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바라보고 계시는가 하는 점을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오늘 읽은 말씀은 이사야서 43장 21절 말씀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께서 이 백성을 지은 목적이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이 있다는 겁니다. 그것은 이 백성으로 하여금, 이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찬송하는 일을 하게 만들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지으신 목적이 있는데, 아마 여러 가지 목적이 있을 겁니다. 성경에 다른 곳을 찾아보면 다른 목적들도 많이 나와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 많은 목적들 중에서 아주 중요한 목적 또 하나가 있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을 찬송하게 만들기 위해서, 저와 여러분들을 창조하셨다고 하는 것이 이사야 43장 21절에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신 그 목적이, 우리를 지으신 목적이 무엇인가? 하나님을 찬송하고 하나님을 예배하게 만들기 위해서, 다시 말하자면 우리가 하나님을 찬송하는 삶을 살고, 예배하는 삶을 산다고 한다면, 그것이 우리가 존재하는 그 존재의 목적을 이루게 되는 것이고, 만일 그렇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어쩌면 음식 주문을 취소해버린 그런 알바와 같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지 아니한, 하나님의 원래 계획에 합하지 아니한 그런 인생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비전교회가 첫 예배를 드린 지 9주년이 되는 그런 뜻깊은 날이 되었는데요. 이런 날을 맞이해서 오늘 우리가 묵상해보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면, 왜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만들어 주셨을까? 우리가 계획하지도 않았고 우리가 생각지도 않았던 그런 상황 가운데서, 어떻게 이 교회가 출발하게 되었는데, 우리가 그 당시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던 그런 상황 가운데서 우리가 첫 예배를 드리고,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데,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이 교회로 만들어 주셨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우리가 가진 여러 가지 꿈과 비전을 우리 교회의 8가지 꿈과 비전으로 정리한 적이 있는데요. 그 가운데 첫 번째가 무엇이냐면, “전심으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교회”가 되겠다고 하는 꿈과 비전입니다. 교회란 무엇인가? 교회라고 하는 것은 건물이 아닙니다. 우리는 흔히 교회당 건물을 보면서, 무슨 교회, 무슨 교회, 그렇게 이야기를 많이 하지만, 성경적인 관점으로 본다고 한다면,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사람들이 교회입니다. 건물이 없어도 사람들만 있으면, 그게 교회가 되는 것이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성도들의 모임이 그게 바로 교회라고 하는 게, 성경적인 관점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성도들의 모임인 이 교회가, 다시 말하자면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을 살게 된다면, 그것이 바로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을 이루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따라서 오늘 이 시간을 지나면서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우리의 존재의 목적이 무엇인가?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는 게 우리의 삶의 목표라고 하는 사실,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게 우리들의 삶의 그 목표라고 하는 사실을 마음속에 기억하며 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단순히 한 시간 예배드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삶 자체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우리의 삶 자체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그런 삶이 되어야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찬송하고 예배한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본성과는 반대되는 일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찬양하고 경배하는 것은 우리의 본성을 거스르는 일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은 누구를 찬양하고, 경배하기보다는, 내 자신이 (자유롭기를 원하고) 칭찬받기를 원하고, 우리 자신이 박수받기를 원하는 게 우리들의 본성입니다. 다른 사람을 높이고 다른 대상을 높이기보다는, 나를 높이고 내가 높아지려고 하는 게 우리들의 본성 가운데 들어 있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가 존재하는 목적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게 목적이다. 하나님께 영광 올려드리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게 우리들의 삶의 목적이라고 이야기하면, 그러면 많은 사람들이 불편할 수 있습니다.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시는 분들은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기 때문에, “아, 그렇구나.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해야 되는구나.”라고 인정하시겠지만, 그러나 불신자들이라든지, 성경을 제대로 모르는 분들이라든지, 이런 분들은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되면, 굉장히 불쾌해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마치 북한의 기쁨조처럼, 그렇게 하나님을 찬양하는 기계냐?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광 올려드리는 그런 노예로 우리가 존재하는 것인가? 우리는 그렇게 낮아지고, 하나님을 높여드리는 그런 노예와 같은 신분인가라고 하는 그런 의문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한다고 하는 것,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린다고 하는 것은, 그렇게 우리가 억지로 하나님께 찬양하거나, 억지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들의 마음속에 기쁨이 가득 차야 찬양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찬양이라고 하는 것은 언제 나오는가? 찬양이라고 하는 것은 언제 나오냐면, 누가 찬양해라. 영광 올려드려라. 이렇게 강요할 때 나오는 게 아니라,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기쁨이 차고 넘치면, 자연스럽게 발산될 수 있는 게 찬양인 겁니다. 억지로 강압에 못 이겨서, 하고 싫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해야 하니까 하는 게, 그게 진짜 천양이 아니라, 찬양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면, 우리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기쁨이 넘쳐나고, 감사가 넘쳐나고, 하나님 앞에 정말 영광을 올려드리고 싶은 그 마음들이 나타날 때, 그게 비로소 찬양이 되는 것이죠.

예를 들자면 이런 예를 들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어떤 맛있는 음식을 먹게 되면, 여러분들은 그 음식을 먹으면서, 어떻게 드십니까? 음식을 먹으면서,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그냥 조용히 먹습니까? 아니죠. 먹으면서 맛있으면, 어떻게 하죠? “아, 맛있네.” 표현을 하게 돼 있어요. “아, 이거 정말 맛있는데요. 어, 이거 정말 맛있는데.” 하면서 자기의 그 만족과 기쁨을 밖으로 발산하게 되어 있는 것이죠.

몇 년 전에 제가 전어구이를 한 번 먹은 적이 있습니다. 요즘 전어철이기도 하고, 꽃게철이기도 하고, 맛있는 것들이 많이 나오는데, 몇 년 전에 우연히 전어구이를 먹게 된 적이 있었는데, 아마 그날 제가 특히 배고팠다가 먹었던 것 같아요. 그것을 처음 먹고 나서, “이야, 이래서 전어구나.” 하면서, 너무나도 맛있어 가지고, 그래서 먹고 나서 제가 침묵하고 있었냐면, 침묵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교역자들하고 이야기하면서 얘기를 했어요. 정말 맛있었다고, 정말 이렇게 맛있는 줄 몰랐는데, 정말 맛있었다고, 그렇게 막 이야기를 하니까, 제 기쁨이 완성이 되는 거예요. 먹고 입 딱 다물고 있으면 완성이 안 되는데, 교역자들한테 맛있었다고 이야기를 하고, 막 그러니까, “목사님, 우리도 좀 데리고 가요.” 그러면서 그런 반응이 나오는 걸 보니까, 그 기쁨이 완전히 충만해지는 것이죠.

정말 우리가 맛있는 것을 먹게 된다고 한다면, 조용히 먹을 수는 없는 겁니다. 정말 맛있다고 이야기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칭찬을 하고, 정말 맛있다고 하는 그 경험을 sns에 올리기도 하고, 그래야 그런 표현이 나와야, 그 기쁨이 충만해지는 것이죠.

이건 누군가 만들어낸 이야기일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어떤 미국의 목사님이 있었는데, 그 목사님이 한 번은 좀 지쳤어요. 지쳐가지고, 매주일 예배를 인도하고 그래야 되는데, 어느 한 주일에는 정말 교회 가기가 싫은 겁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양해를 구했습니다. 내가 지금 아파서, 그래서 오늘은 이번 주일은 예배에 참석할 수 없으니, 다른 분에게 부탁하고 교회를 빠졌습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이 교회에만 가지 않은 것이 아니라, 기분 전환을 하고 싶은데, 어디를 갈까 하다가, 주일날 골프장을 갔습니다. 골프장에 가서 거기서 골프를 치기 시작하는데,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하늘에서는 난리가 났습니다. 천사들이 그 목사님을 보면서 화가 난 거죠. “하나님, 이럴 수 있습니까? 저 목사라는 자가 거짓말하고, 아프다고 핑계를 대고, 교회도 안 가고, 그리고 골프장에 갔습니다. 하나님, 저걸 그냥 가만 놔두면 안 됩니다. 번개를 내려서 박살을 내든 지, 혼을 내주셔야 됩니다. 그 천사들이 이야기를 하는데, 하나님께서 ”내버려 둬라“ 하면서, 어떻게 하셨냐면은 그 목사님이 골프를 딱 쳤는데 홀인원(hole-in-one)을 해버린 거예요. 평상시 OB하고 평상시 더블 보기하고 실력이 없는 그분인데, 그날따라 쳤는데 골프가 너무 잘 되는 거예요. 되는 족속 버디도 하고 하면서, 한 번을 치니까 홀인원을 하는데, 홀인원을 보통 합니까? 못 하잖아요? 그런데 너무나도 기쁜데, 말할 사람이 없는 거예요. 그게 고통이 되었다고 하는 그런 누가 웃자고 만들어낸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무리 기뻐도 그 기쁨을 표현할 수 없으면, 기쁨이 아니라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데요.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하는 이야기는 그냥 억지로 찬송가 부르고 억지로 예배드리고, 하기 싫은데 억지로 한다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기쁨을 충만하게 해 주셔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즐길 수 있도록 해주셔서, 그것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너무나도 폭발하고 차고 넘쳐서, 하나님을 찬양하지 아니할 수 없도록, 하나님을 예배하고 경배할 수 있도록, 그렇게 우리들을 충만하고 기쁘게 만들어 준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인 것입니다.

군대에 가면 훈련을 받을 때, 아주 조교가 윽박지르면서 훈련을 시킵니다. 유격 훈련을 받던가 하면, 조교들이 ”목소리 봐라“ 하면서 ”소리 안 지르지?“ 하면서, 소리를 더 크게 외치라고, 그렇게 강요합니다. 그러면 그 훈련병들이 어떻게 하냐 하면 소리를 꽉꽉 지르면서, 훈련을 받아요. 군가도 소리를 더 크게 외치고 구호도 더 크게 외치는데, 왜 그럴까요? 그렇게 안 하면 조교의 마음에 차지 아니하면, 벌이 두배 세배 네 배로 늘어나는 겁니다. 4회 반복이 8회 반복이 되고, 8회 반복이 16회 반복이 되고, 16회 반복이 32회 반복이 되고, 64회 반복이 되고 그래요. 군대 가면. 그러니까 혼나지 않기 위해서 힘들어도, 이걸 중단시키기 위해서 더 크게 소리 지르고 더 크게 해야만 하는 그런 게 훈련병의 모습이죠.

하지만 누가 강요하지 않아도, 너무나도 기뻐서 소리 지르는 그 현장이 있습니다. 어디가 그러죠? 축구장에 가니까, 그래요. 야구장에 가니까, 그래요. 축구장에 가면, 많은 응원하는 팬들이 지켜보고 있다가, 손흥민 선수가 골을 쫙 집어넣으면, 아, 누가 소리 지르라고 얘기 안 해도, 모두가 다 ”와“ 소리를 지르면서 하는데, 아나운서들은 ”골~~~“ 하면서 너무나도 흥분돼서, 소리를 지르는데, 왜 소리를 질러요? 소리를 질러야, 기쁨이 완성이 되는 거예요. 골이 들어가는 그 모습을 보고 침묵하고 있으면, 기쁨이 완성되지 않아요.

우리 아이들이 학교에 가서 100점짜리 답안지를 가져오게 된다고 한다면, 내가 학교에서 시험을 봤는데 만점을 맞으면, 그걸 가지고 그냥 집어넣고 아무 얘기 안 하면, 기쁨이 없어요. 그런데 그걸 가지고 누구한테 가지고 옵니까? 엄마 아빠한테 가지고 오는 거예요. ”엄마, 아빠, 나 100점이야“ 그러면, ”아이고 우리 새끼 잘했다.“ 그러면 그때 기쁨이 완성이 되는 거죠. 그 기쁨 때문에 성장하는 것이고, 그 기쁨 때문에, 그래서 그렇게 표현하는 것 때문에 그 기쁨이 배가 되는 것이고, 완성되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찬양하는 자로, 예배하는 자로 만드시겠다고 하는 것은, 우리를 훈련병처럼 그렇게 소리 안 지르면 죽이겠다. 우리를 말살시키겠다고 하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우리들에게 채워주셔서,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답고 선한, 하나님이 얼마나 좋으신가를 깨닫게 만들고, 그것이 너무나도 기쁘고 감격스러워서, 자연스럽게 우리가 하나님을 찬송하고 영광을 올리게 될 것이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맨 마지막에 우리의 삶이 끝나고, 천국에 가면, 천국에서는 무엇만 남아 있다고 얘기를 하나요? 천국에 대해서 우리가 함부로 상상할 수 없지만, 천국에서는 무엇이 있느냐고 하면, 찬송만이 있을 거라고 그래요. 천국에 가면 찬송만이 있을 거라고 하는데, 그 말은 우리가 지겹게 찬송가를 계속 불러야 되는, 지금 오늘 우리가 예배 시간에, 예배 전에 막 찬송하라고 그러면, 또 지겨워서, ”아이고, 힘들어“ 하는 그 찬송을 나중에 천국에 영원토록 찬송만 주구장창 불러야 된다고 한다면, ”아이고, 천국에 가서 괴로울 것 같다.“라고 생각하게 되겠지만, 사실은 그런 의미가 아니라, 우리는 천국에 가게 되는 그 순간에 날마다 날마다 새로운 거예요.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너무나도 기쁘고 즐거워서, 그래서 찬송하고, 그래서 기뻐하고 영광 돌리는 것이 그걸로 한 번 해버리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다음 날 더 기쁘고, 그다음 날 더 기쁘고, 천국에 있는 내내, 너무나도 기뻐서 영광과 찬송을 항상 불러도 다함이 없고, 찬송을 늘 불러도 그것이 다함이 없는 그런 엄청난 기쁨의 자리로 또 우리가 갈 거라고 하는 것을 말씀해주고 있는 것이죠.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께서 그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맛보고 찬양하도록 만들어 주었는데, 안타깝게도 우리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망각해 버렸다고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마치 그 옛날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 40년 동안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은혜는 없다고 생각하며, 늘 불평과 원망 가운데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 하나님의 은혜의 만나가 내렸고, 그 은혜의 만나를 먹었어요.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버리신 것이 아니라, 불기둥과 구름 기둥으로 함께해 주셨어요. 하나님이 안 계셨던 것이 아니라, 반석에서 물을 내시며, 그들과 동행하시며 승리하게 해 주셨어요. 그런데 일상이 되어버린, 하나님의 은혜는 은혜가 아닌 것처럼, 마치 우리 자녀들 매일매일 사랑해주는 부모님의 은혜는 은혜가 아닌 것처럼 착각하듯이,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해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찬양과 경배하기보다는 원망과 불평의 삶을 살 때가 많은 것이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없는 것이 아니라, 있어요. 우리가 매일매일 태양이 비추는 그 태양 때문에 살아가고 있고, 내리는 그 비 때문에 우리가 소득을 얻을 수 있으며, 공기가 있기 때문에 숨을 쉬는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우리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고,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 때문에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것이고,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 때문에, 우리와 같은 죄인도 살아서 살 수 있는 것이 되는 것이죠. 그런데 눈을 감아버리고 귀를 감아버리면,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 수 없는 겁니다.

아무리 좋은 음식이 있어도 내 입맛이 떨어져 버리고, 내가 그 음식을 맛볼 수 없는 그런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 어떤 황제의 음식을 내놓아도, 감사보다는 불평과 원망이 나오게 되어 있는 것이죠. 음식 가운데는 호불호가 갈리는 음식들이 있습니다. 홍어 삼합이라든가 두리안이라든가 고수라고 하는 것들이 있는데요. 한번 드셔 보셨습니까? 저는 모든 게 맛있어요. 그래서 다 잘 먹습니다. 그런데 제 아내는 홍어삼합을 못 먹어요. 어느 날 음식을 같이 먹었는데, 한 번 홍어삼합을 입에 넣었다가 그날 식사는 완전히 망쳐버렸습니다. 그 홍어삼합의 냄새가 입안에, 아무리 물로 씻어내도 남아 있어서, 그날 식사를 망쳐버린 것이죠.

그런데 하나님의 그 사랑과 은총도 어떤 사람에게는, 아무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겁니다. 그런데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음미해 보아야 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일까?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사랑해 주셨는가?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인도해 주시고, 우리들을 어떻게 사랑해 주시는가를 맛보아 알아가야 하는 겁니다. 처음에는 이 맛을 보면, 아무 맛이 안 나는 것 같아요. 맛을 보면 몸이 건조한 것처럼 느껴질 수 있고, 어떤 때는 아마 싫은 느낌이 들 수도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우리가 묵상하고 기도하고 또 하나님의 그 선하심을 맛보아 알기 위해서, 자꾸만 하나님이 누군가를 알아가게 된다고 하면, 우리들의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 차게 되고, 그리고 결국은 하나님을 하나님께 영광 올려드리게 되는 삶으로 변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 가족은 동남아 음식을 굉장히 좋아합니다. 베트남 음식 태국 음식 등등 그런 음식들을 좋아하는데요. 처음에 우리 아이들을 베트남 음식점으로 데려갔더니, 우리 아이들이 엄청나게 불만을 터뜨렸습니다. 왜냐하면 그 베트남 음식점 음식 안에 들어 있는 고수라고 하는 그 식물이 있는데, 그 맛이 정말 이상해요. 화장품 맛이 나는 것 같기도 하고, 막 역한 느낌이 나기도 하고, 그래서 우리 아이들이 처음 베트남 국수를 주었더니, 월남 국수를 줬더니, 이런 데 데리고 왔다고 얼마나 짜증을 내는지 몰라요. 그런데 아마 어떻게 몇 번 더 익숙하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얼마 지나고 나서 우리 아이들이 태도가 완전히 바뀌어 버렸습니다. 처음에 그렇게 불평과 원망하던 아이들이 지금은 국수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몰라요. 고수를 찾아요. 모든 음식에 고수를 넣어서 먹는 것으로 바뀌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한 번 이렇게 family reunion을 하게 되면, 어디에서 만나냐면 베트남 동네에 가서 만납니다. 거기서 월남 국수를 먹으며, 얼마나 좋아하는지요.

하나님을 맛보고 아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 하나님이 나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고, 도대체 하나님과 나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라고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음식들보다 훨씬 더 좋으신 분이에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 하나님을 날마다 날마다 알아가는 가운데, 우리들의 삶 가운데 하나님을 향한 찬양과 영광이 나타나는 그런 삶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하나님은 군대 조교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지 아니하면 우리들에게 벌을 내리시겠다고 윽박지르면서 우리를 죽여버리겠다고 그렇게 협박하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은 손흥민 선수 김민재 선수처럼 골을 넣어서 그 모습을 본 모든 팬들이 정말 기뻐서 환호성 지르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가장 큰 선물을 주신 하나님, 하나밖에 없는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셔서, 우리들의 죄를 씻기시고, 그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그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받았기 때문에, 그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그 하나님의 선물이 얼마나 큰가? ”하나님께서 내 인생 가운데 얼마나 크신 하나님이신가?“라고 하는 사실을 날마다 날마다 발견해 나가는 가운데, 그래서 우리들의 삶 가운데 그 감사가 기쁨이 되고, 기쁨이 흘러넘쳐서 늘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삶, 단순히 한두 시간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순간의 걸음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그리고 기뻐하고 영광 올리는 그런 삶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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