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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버지의 집 (눅 15:11-24)

아버지의 집은 무엇일까요? 아버지의 집은 감옥일까요? 풍성한 사랑이 있는 곳일까요? 그렇죠. 풍성한 사랑이 있는 곳이 아버지의 집입니다. 하지만 종종 아버지의 집에 사는 사람들 중에는 아버지의 사랑을 풍성한 사랑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억압으로, 족쇄로, 그리고 감옥으로 생각하는 그런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어쩌면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에서 이 탕자의 생각이 그러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버지 집에서 사는 것보다는, 먼 나라에 가서 내가 자유롭게 살고 싶다고 하는 그런 욕망이 이 둘째 아들로 하여금 아버지의 집을 떠나 멀리 살아가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너무나도 분명하게, 그리고 아주 빨리 나타나게 되었는데요. 아버지의 집을 떠나면 자유인 줄 알았으나, 오히려 고통이었고, 자유가 아니라, 더 큰 억압과 속박이었다고 하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 겁니다.

마치 물고기와 같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물고기가 물속에서 살아가고 있는데요. 물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물고기로 하여금 아무 곳에도 가지 못하게 만드는 감옥일까요? 아니면 물고기로 하여금 물고기가 되게 만들고, 물고기로 하여금 그 자신의 역량을 충분히 발휘하고, 모든 것을 누릴 수 있게 만드는 그런 풍성한 자리가 될까요? 물고기가 그 물 밖으로 튀어 나간다면, “나는 이 물에서부터 자유하고 싶다”라고 생각해서 튀어나가면, 자유로울 것 같지만, 그러나 이내 그 물고기는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다다르게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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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자는 아버지의 집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탕자는 자신이 처한 그곳이, 자기가 결론으로 맞이하게 된 마지막으로 맞이하게 된 그것이 아버지의 집과 비해서는 너무나도 형편이 없다고 하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게 된 것입니다. 아버지의 집은 어떤 집인가? 아버지의 집은 먹을 것이 풍성한 집안입니다. 17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탕자가 생각합니다.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아버지의 집은 풍성한 곳이라는 겁니다. 아버지의 집은 부족한 것이 없는 곳이라는 겁니다. 그 아버지의 집은, 심지어 노예들도 풍성하게 먹을 수 있는 만족함을 누릴 수 있는 곳이 바로 아버지의 집인 것이죠. 하지만 이 아들이 그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아버지에게서부터 멀리 떠나게 되었을 때 만난 곳은 어딘가? 바로 주려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도달하게 된 겁니다.

16절 말씀은 그 아들이 처한 아주 힘들고 어려운 처지를 표현해주고 있는데요. 누가복음 15장 16절 말씀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를 먹으려고 했다고 하는 이 표현에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쥐엄 열매가 도대체 무슨 열매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 문맥상 보면, 이 쥐엄 열매라고 하는 거는 사람이 먹는 게 아니고, 돼지나 먹는 것이에요. 돼지나 먹는 걸 사람이 먹겠다고 해도, 먹을 수 없는 그런 아주 비참한 상태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 개 돼지라고 하는 것은 아주 경멸의 대상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돼지고기를 잘 즐겨 해서 먹지만, 유대인들은 아예 먹지도 못하는 그런 음식이 바로 돼지였던 것입니다. 이방인들이나 먹는 아주 불결한 음식이 돼지인 겁니다. 그런데 그 돼지들이 먹는 그 음식을 먹으려고 해도 그것조차 먹을 수 없는 아주 심각한 상태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결국 이 둘째 아들은 자기가 아버지의 집에서부터 떠나온 것을 후회하게 되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는 결단을 보여주고 있는데요.

이 누가복음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는 우리 기독교의 복음을 아주 생생하게 아주 정확하게 명확하게 드러내는 비유라고 할 수 있고,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가에 대해서 잘 설명해 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인생이 과연 어떠한 인생인가 하는 것을 잘 설명해 주는 비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당하고 있는 모든 불행의 근원적인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지금 우리 가운데 아픔이 있다고 한다면, 지금 우리 가운데 불만이 있다고 한다면, 지금 우리 가운데 슬픔이 있다고 한다면, 그 근원적인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우리들은 그 이유를 피상적인 이유를 찾습니다. 돈이 없어서 불행한 거야. 키가 크지 않아서 불행한 거야. 내가 못생겨서 불행한 거야. 내가 살이 쪄서 불행한 거야. 내가, 내가 어떤 권력을 가지지 못해서,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해서 문제야. 남편이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아내가 나를 존중해주지 못해서 문제이고, 우리 부모님이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우리 자녀들은 부모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해서 문제라고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겪게 되는 모든 문제의 근원적인 문제는 추적해보면 더 깊은데 근원적인 문제가 있는데요. 그것은 바로 우리가 아버지의 집을 떠나가서, 하나님에게서부터 멀리 떠나 있다고 하는 것이 우리들의 근원적인 문제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아무리 예쁜 꽃도 줄기에서부터 꺾여버리면 살아 있는 것 같으나 곧 말라비틀어져 버립니다. 가지가 줄기에 붙어 있어야 꽃도 피고 열매도 맺는 것인데, 물을 빨아들이는 그 뿌리, 그 줄기에서부터 잘려 나가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것이죠.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5장 5절 말씀에서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라.” 우리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고 한다면, 바로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에게서부터 떠나 있는 것이고, 행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에게서부터 멀리 떠나 있는 것이고, 기쁨의 근원이신 하나님에게서부터 멀리 떠나 있을 때, 우리 인생의 문제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탕자는 아버지의 집을 떠났을 때, 그런 대로 괜찮은 것 같았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집에서 재산을 가지고 나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재산은 얼마 가지 않아서 다 떨어져 버리고, 이제는 더 이상 먹을 것이 없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자유를 누릴 수가 없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쾌락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남의 집에 들어가 돼지를 치기도 하고, 돼지가 먹는 열매로 배를 채우려고 하지만, 채울 수도 없는, 그런 상황에 이르게 되었을 때, 비로소 깨닫습니다. 아버지의 집이 좋았다.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죠.

하지만 이 탕자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가 돌아가고 싶지만, 자기가 돌아가는데 장애물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아버지에게 너무나도 큰 죄를 지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에게 “아빠, 저에게 줄 유산을 지금 주세요”라고 요청하는 것은 어쩌면 우리나라에서는 그런대로 괜찮은, 그럴 수도 있는, 그렇게 큰 문제가 되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하지만 유대사회에서 이런 일은 결단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유대 사회에서 이 말은 “아빠, 빨리 죽어버리세요.” “아빠, 빨리 죽어요”라고 하는 말과 똑같은 말이었고, 만일 유대 사회에서 누군가 그런 이야기를 아들이 아버지를 향해서 했다고 한다면, 그 아들은 정말, 정말 악한 자식으로서, 그 마을에서 징계를 받고, 아주 엄청나게 혼을 내야만 하는 그런 충격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의 말씀을 해 주셨을 때, 이 비유를 듣던 수많은 청중들은 아마 마음속으로 깜짝 놀랐을 겁니다. “세상에, 우리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아빠에게 그런 주장을 하는, 아빠의 유산을 달라고 말하는, 그런 싸가지 없는 인생이 있다니”라고 하면서, 너무나도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오늘날로 비교하자면, 아버지를 죽이고, 엄마를 죽이고 돈을 뺏어간 것과 똑같은 그런 느낌을 받았을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당시 유대 사회에서 이스라엘 사람이 유대인이 이방인들 사이에 가서 가지고 있는 재산을 다 흥청망청 써버리고 알거지가 되었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도 수치스러운 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런 수치를 저지른 사람은 그 마을에서 받아주질 않습니다. 돌아온다고 한다면 그 사람을 내쫓아버릴 겁니다. 그러니까 이 탕자가 아버지에게 돌아가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이죠.

여러분이 잘못했을 때 부모님 앞에 나가기가 쉽던가요? 쉽지 않아요. 제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 선생님한테 뭔가 잘못을 한 일이 있었습니다. 무슨 잘못을 했는지는 모르겠는데, 제가 아주 큰 잘못을 했어요. 그러니까 선생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시냐면, “너, 내일 부모님 모시고 와.” 그랬어요. 그 말을 듣고 집에를 가야 되는데 집에를 못 가겠는 거예요. 아버지 어머니에게 가서 선생님의 말을 전하기가 너무나도 무서운 거예요. 잘못했다고 하는 것이 드러날까 봐, 너무나도 걱정이 돼서 그날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빙빙 밖으로 돌다가, 멀리 돌다가 저녁 늦게 서나 집에 돌아갔던 기억이 있는데요. 탕자가 자기 아버지에게 돌아가고 싶어도, 자기가 한 잘못 때문에 아버지에게 돌아갈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런데 이 아들이 생각해낸 것이 무엇이냐면, “아버지, 나를 아들로 받아주세요”가 아니라, 저를 아들로 받아주는 게 아니고, “그냥 노예의 한 사람으로 써주세요.” “저를 아르바이트생으로 받아주세요. 그래서 먹고살게만 해주세요.” 그렇게 품꾼으로 써달라고 부탁하겠노라고 하면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무엇입니까? 그 아버지는 아들이 오는 그 모습을 보고 뛰어 달려가, 그 아들을 환영해 주는 것이, 아버지의 집은 무엇입니까? 아버지의 집은 바로 사랑이 풍성한 아버지가 계시는 곳이에요. 그 아버지는 어떤 아버지인가? 기다리고 계신 아버지에요. 아들이 집을 나갔을 때 마음에서부터, 그 아들은 지워버리고 “그는 더 이상 내 아들이 아니다”라고 마음에서 깨끗이 지워버린 것이 아니라, 그 아들이 돌아오기까지 계속해서 기다리며, 오늘 돌아올까 혹은 내일 돌아올까 밤새도록 기다리며, 그 아들을 기다리는,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가 기다리고 있는 곳이 바로 아버지의 집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아버지의 집은 사랑이 많은 아버지가 있는 곳인데, 그 아버지는 자신이 했던 모든 과거의 잘못들을 다 용서해 버리시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아들이 단 한 번도 잘못을 한 것이 없는 것처럼 대우해 주시는 아버지가 계신 것입니다. 아들이 돌아왔을 때, 아들을 받아준 다음에, 조금만 잘못하는 일이 있으면,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너는 저리 가서 앉아.” “너, 집에서 나갔었지? 저 끝에 앉아.” 그렇게 말하는 아버지가 아니라, 마치 예전에 아들이 아무 잘못도 하지 않은 것처럼, 다 잊어버리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우리가 지은 죄를 기억도 하지 아니하신다고 하셨어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며, 전지 하신 하나님,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신 그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들의 죄를 다 잊어버리십니까? 다 잊어버리시고 기억하지 않는다고 하는 말의 의미는 우리가 행한 것을 치매 환자처럼 잊어버리신다고 하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물론 다 알고 계셔요. 하지만 우리가 지은 잘못이 현재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는 그대로 사랑해 주신다고 하는 것이, 하나님께선 우리들의 죄를 기억하지 아니한다고 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아버지는 어떤 아버지인가? 그 아버지가 기다리고 있는 그 집에 있는 그 아버지는 어떤 아버지인가? 그 탕자를 온전히 회복시켜 주시는 아버지입니다. 아이를 데려다가 깨끗이 씻기고, 좋은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신기고, 가락지를 끼우고, 신발을 신겨주셨는데, 이것은 그냥 더러운 몸을 가지고 왔으니까, 깨끗하게 씻기고 새 옷을 입혔다고 하는 그런 의미가 아니에요. 옷을 입혔다고 하는 것은 유산을 상속받을 당당한 상속자로 받아준다는 이야기고, 가락지를 끼었다고 하는 것은 우리 집안의 살림을 도맡아서 할 수 있는 그런 아버지의 권한을 가지고 있는 아들이라고 하는 의미이고, 신발을 신겼다고 하는 것은 네가 노예가 아니라 주인으로서 이 집의 주인으로서 살라고 하는 그런 의미의 제스처의 말씀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을 위하여 송아지를 잡고 잔치를 버리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성경에서 가르쳐주시는 하나님이 바로 이런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생각할 때, 하나님을 어떤 하나님으로 바라보고 계십니까?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아버지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세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기도를 가르쳐주실 때 뭐라고 가르쳐 주셨냐면,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기도해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부르면서 기도해라.” 아버지께 기도하듯 너희가 하나님을 부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바로 이 점이 이 세상의 모든 잘못된 종교와 성경적인 기독교와의 차이점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이 세상의 종교에서 바라보고 있는 신, 그 신은 어떤 신입니까? 그 신은, 이 세상 종교의 신은 무심한 신입니다. 우리의 아버지가 아닌 신입니다. 그냥 옥황상제일 뿐이고, 천지신명일 뿐입니다. 천지신명일뿐이고, 옥황상제일 뿐인 그 신에게서 우리가 무엇인가 기도하고 간구할 때, 우리가 내놓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면, “우리가 얼마나 정성을 다했느냐”입니다. 옥황상제에게 천지신명에게 무엇인가를 받기 위해서는 정말 정성을 다해야 되는 거죠. 정화수를 떼어놓고, 1,000일씩, 100일씩 기도를 해야 된다든지, 인당수에 몸을 던져야 된다든지, 공양미 3천 석을 바쳐야 되든지, 내 힘으로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것까지, 다 감당해서 바쳐야, 겨우 들어주는 것이 이 세상 거짓 종교의 신들입니다.

이 세상 모든 다른 종교를 보면 모두가 그런 관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죠. 예를 들자면 불교 같은 경우는 누가 해탈할 수 있습니까? 아무나 해탈 못해요. 가족을 버리고 출가해야만 하고, 거기서 도를 닫고, 마음을 비우고, 모든 것을 다 해서, 정말 최고의 높은 단계에 올라가야, 그래야 해탈할까? 말까? 열반할까? 말까? 그렇게 되는 거에요, 미신에서는 어떻게 우리가 원하는 걸 얻을 수 있습니까? 부적을 붙이면, 조그마한 부적 가지고는 안 돼요. 큰 부적, 돈을 많이 주고 산 부적이라야 효과가 있는 것이지, 돈을 조금만 주면, 효과가 없는 부족이 되는 것이고, 굿을 해도 조그마한 돈을 들이면 효과가 없고, 큰돈을 들이면 효과가 있는 그러한 거짓된 종교가 미신의 종교인 것이죠.

성공이라고 하는 종교는 어떻습니까? 성공이라고 하는 종교는 우리의 모든 것을 다 바쳐야만 성공하는 거예요. 먹을 것을 먹지 않고 다이어트해 가면서, 그래야 다이어트에 성공할 수 있는 것이고, 직장에서 어떻게 성공합니까? 이 사업에서 어떻게 성공해야 됩니까? 가정도 다 내 팽개치고, 정말 내가 all-in 하면서 모든 것을 다 해야만, 겨우 성공할까? 마는가? 하는 것이 성공이라고 하는 종교가 가지고 있는 우리들에게 요구하는 것이죠. 극단 이슬람교에서는 자살 폭탄 테러를 해야만, 그래야 극락에 갈 수 있는 그런 요구들이 있는 것이죠.

이 세상 종교에서 말하고 있는 신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가 무엇입니까? 첫 번째 문제는 그 신이 살아있는 신이 아니라 가짜 신이라고 하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고,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고, 다리가 있어도 걷지 못하는, 가짜 신이라고 하는 데 문제가 있는 것인데, 또 하나의 문제가 무엇이냐 하면, 그런 신들에게 감동시키기 위해서는 우리가 정말 최선을 다해야 되는데, 아무리 우리가 최선을 다해도 그들이 높은 세워놓은 그 기준에 도달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 우리들의 문제예요.

하지만 우리는 참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이 세상의 우상들은 우리들을 만족시켜줄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그러나 우리를 만족시켜주는 것이 아니라, 결국 파멸로 이끌어 버립니다. 탕자가 집을 나갈 때는 이런 결과를 얻기 위해서 나간 것이 아니라, 어쩌면 자유를 얻기 위해서 어쩌면 쾌락을 위해서 나아갔을 겁니다. 집을 나가기만 하면, 아버지를 떠나서 이 세상의 우상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자유를 주겠다고, 쾌락을 주겠다고, 즐거움을 주겠다고 약속을 했지만, 그래서 정말 아버지의 집을 떠났을 때는 자유가 있는 것 같고 즐거움이 있는 것 같고, 쾌락이 있는 것 같았지만, 이내 내 모든 재산을 다 가져간 이후에는 나를 종속시켜버리는 겁니다. 자유를 빼앗아버리고, 즐거움을 빼앗아 버리고, 고통 가운데 집어넣는 그런 것이 이 세상의 우상인 것이죠.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고 있지만, 우리는 신앙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안타깝게도 수많은 사람들이 사실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나 헛된 우상에게로 떠나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교회 안에 들어와 있지만, 참되신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집 앞에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에게서 더 멀리 떠나 헛된 우상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아닌 모든 것들이 하나님보다 더 소중하게 생각되는 모든 것들이 다 우상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요. 때로는 돈이 우리들의 우상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정치가 우리들의 우상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쾌락이 우리들의 우상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사람들이 나를 인정해 주는 것이 나의 우상이 되어 버리는 것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만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나를 인정해 주는 것을 우상으로 섬기고, 그 우상을 향해서 달려가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우상을 향해서 나아간 결과는 무엇인가? 오늘 누가복음 15장에서 탕자의 비유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고통과 절망 가운데로 빠져들게 되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만일 지금 우리가 힘들고 어렵고 고통 가운데 있다고 한다면, 그 원인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것은 남편이 부족해서가 아니고, 사람들이 나를 인정해주지 않아서가 아니고, 우리의 마음 가운데 하나님이 아니라 이 세상에 헛된 것들을 갈망하고 헛된 우상들을 쫓아가며, 우리를 만족하게 해줄 수 없는 가짜 신을 향해서 나아가게 될 때, 우리들의 삶이 고통 가운데 빠져들게 되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런데 우리 하나님이 계십니다. 아버지와 같은 그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을 부르시고 계시고, 기다리고 계시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믿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너무나도 사랑하시기 때문에, 하나밖에 없는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해 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을 늘 감사하며 찬송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하나님 안에 있는 그런 삶을 살아가게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오늘은 추수 감사 주일인데요.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감사해야 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왜 우리는 하나님을 고마워하고 하나님을 찬양해야 되고, 왜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해야 되고 우리는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될까요? 그것은 우리가 감사하게 되면 감사하게 되면, 우리가 더 많은 축복을 받고, 감사하게 되면 우리가 더 많은 것을 누리게 되고, 감사할 때 많은 유익을 얻게 되기 때문이 아닙니다. 종종 감사에 대한 설교를 듣다 보면, 감사가 마치 무슨 수단인 것처럼 생각될 때가 많습니다. “여러분, 감사하면서 사십시오. 감사하는 사람이 성공합니다. 감사하는 사람이 감사하게 됩니다. 감사하는 사람이 기쁨이 넘치게 됩니다. 감사하게 되면 행복하게 됩니다.”라고 하는 설교를 듣게 될 때, 맞는 말인데, 그런데 종종 물론 설교가 그런 의도로 설교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감사가 하나의 수단이 되어 버릴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다시 말하자면 감사하는 것은, 수단이고, 하나님도 우리의 수단이 되어서, 나의 진짜 하나님, 즉 돈을 얻기 위해서 명예를 얻고 권력을 얻고 성공을 얻기 위한 그것이 우리들의 우상인데, 그것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려고 하는 그런 경향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감사해야 될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잘못해도, 아무리 우리가 넘어지고 쓰러져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 아들을 내어주시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가장 좋으신 것을 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 하나님으로 인하여 감사할 수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들의 자녀들을 위해서 무엇을 주셨습니까? 내가 제일 맛있는 거 먹고, 찌꺼기 주셨나요? 내가 제일 좋은 옷 입고, 우리 자녀들은 그냥 남는 거 주셨나요? 아니요. 우리 부모들은 내가 못 먹어도, 자식 먼저 주고, 내가 못 입어도, 자식 먼저 주고,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은 것이 부모의 마음인데, 바로 그게 하나님의 마음이에요.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은 무엇을 주시는가? 시원치 않은 걸 주는 게 아니에요. 별 볼 일 없는 걸 주는 거 아니에여요. 우리가 달라고 하면, 마지못해 주는 게 아니라, 가장 좋은 것으로 주셔요. 그런데 그 가장 좋은 것으로 주시는 것이 때로는 우리의 생각과 달라서, 우리는 이것을 원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이것이 아니라 고통을 주실 때도 있고, 건강을 원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질병을 주실 때도 있고, 편안한 길을 원했지만, 하나님께서는 힘들고 어려운 과정을 걷게 하실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무엇을 우리들에게 허락하시든지 간에, 전능하신 하나님 모든 것을 꿰뚫어 보시고, 한 치도 없으신 그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인생에 가장 좋은 것을 주신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 되신 하나님이시기에, 우리는 늘 감사하며 찬송하며 나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저는 지난주에 수능을 앞에 둔 아이들과 부모님들을 제 방에 불러서 격려하고, 또 기도해 주면서 다른 말이 아니라 이 말을 했어요. 앞으로 우리들에게 닥치는 모든 일들이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인도되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겠지만,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고, 그 하나님은 우리에게 시원치 않은 것이 아니라, 가장 좋은 것을 주시길 원하시는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이라고 하는 것을 믿고 담대하게 나아가라고 권면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하여 하나밖에 없는 그 아들을 십자가 위에 내어 주셨는데, 그 놀라운 사랑을 받은 우리가, 우리들의 삶 가운데서 다른 어떤 것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 때문에 늘 감사하고 찬송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둘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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