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께서 사랑하시는 자 (히 12:5-13)

+

불교의 창시자라고 알려져 있는 고타마 시타르타라고 하는 사람은 고대 인도의 카필라 국의 왕자였다고 합니다.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던 삶을 살던 이 시타르타는 하나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있었습니다. 그가 고민했던 수수께끼가 무엇이냐면, 바로 생로병사의 문제였습니다. 왜 인간은 태어나는 것이고, 또 늙으며, 병들고 죽게 되는 것일까? 아무 문제가 없는 삶을 살고 있던 사람이었는데, 그 문제에 고민하고 고민하다가, 29의 나이에 왕궁을 빠져나와 출가하고, 35세 때 보리수나무 밑에서 드디어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불가에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는 그렇게 깨달았다고 하지만, 이 문제가 여전히 우리 모두에게 고민거리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수수께끼로 남아 있습니다. 왜 사람들에게는 고통이 있는 것일까? 왜 고통이 우리의 삶 가운데 있는가라고 하는 문제는 영원히 풀기 어려운 수수께끼와 같은 문제입니다.

특별히 이 질문이 생생하게 다가오는 때는 언제일까요? 그것은 바로 내가 고통을 당할 때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고통이 다가올 때는 물론, 우리가 함께 공감하며 함께 아파해하는 것이, 그것이 아마 옳을 것이고, 그렇게 다른 사람들이 고통 가운데 있을 때, 함께 아파하고 함께 공감해 주는 것이 있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나라의 현재 모습을 살펴보면, 다른 사람들이 아픔을 가지고 있거나, 슬픔을 당하고 고통을 당하면, 거기에 대해서 전혀 공감하지 못한 채, 오히려 더 비난하기도 하고, 비아냥거리는, 그런 참 안 좋은 일들이 우리 사회에 만연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슬픔일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

+

특별히 정치 문제가 되면 더욱더 그런데요. 참 정치라고 하는 것이 사악한 것이, 슬픔과 아픔과 고통을 당하게 되면, 함께 위로하고 같이 아파해하는 것이 정상일 텐데, 일단 정치 문제로 비화되기 시작되면, 그 모든 것들이 정치 투쟁의 도구가 되어 버리고, 그래서 오히려 고난당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비난하고, 그리고 피해자를 향해서 오히려 2차 3차 가해를 하는 안타까운 현상들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은 그런 아이들로 기르면 안 되겠다고 생각이 듭니다. 우리 아이들은 만일 누군가 어려움을 당한다면, 아픔을 당한다면, 함께 아파해하면서 그들을 어떻게 하면 도와줄 수 있을는지에 대하여서 고민하는, 정말 사랑이 많은 아이들로 길러야 되지 않을까 생각이 되는데요. 왜냐하면 그게 바로 우리 주님께서 가지고 계셨던 마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병자들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셨어요. 병자들을 보면 고쳐주셨고, 배고픈 사람들이 있으면 먹여주셨고, 힘들고 고통스러워하는 자들에게는 주님의 사랑을 보여주신 것이 예수님이라고 한다면, 그러면 우리 성도들은 당연히 수많은 사람들이 어려움을 당할 때, 그냥 외면해 버리는 것이 아니라,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다가가서 사랑을 전해주는, 그런 사람들이 돼야 되는 것이고, 우리 아이들도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보며 공감하며, 참 긍휼을 베풀 수 있는 아이들로 길렀으면 좋겠다고 하는 간절한 소망이 있습니다.

어떻게 우리 아이들을 그렇게 기를 수 있겠는가? 말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 부모님들이 먼저 행동으로 보여줘야 되는 것이죠. 그런데 아무리 다른 사람들의 고통과 아픔에 대해서 우리가 공감할 수 있다고 할지라도, 다른 사람들의 고통은 여전히 다른 사람들의 고통일 뿐입니다. 내 고통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고통이기 때문에, 그 고통을 아무리 공감하려고 해도, 충분히 공감이 되지 않는 것이죠.

하지만 그 고통이 생생하게 내게 다가오는 때가 있습니다. 그게 언제죠? 그게 바로 내가 고통을 당할 때, 내가 고통을 당하면, 그렇게 힘들어요. 나에게 어려운 문제가 생겼을 때는 그것을 견디기가 너무나도 어렵고, 그때 우리는 질문을 던지게 되는 겁니다. 왜 이런 고통이 나에게 일어나게 되었을까?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해서 대답하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왜 이런 문제가 일어나는 것일까에 대한 답변을 찾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히브리서 12장의 말씀에 보면, 우리가 겪는 고통의 문제에 대해서 한 가지 답변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제가 지금 한 가지 답변이라고 표현했는데요. 그렇게 말씀드리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이 답이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고통이 왜 일어나는가?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이 있는가?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이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종류의 답변이 가능하기 때문에, 지금 이 히브리서 12장에서 해 주는 말씀이 바로 그 대답이 아니라, 바로 그 정답이 아니라, 하나의 대답이라고 제가 설명드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을 읽으면서, “아, 그렇구나. 고통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고통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징계구나”라고 결론을 내리시면 안 됩니다.

오늘 성경 말씀은 가르쳐주기를, 왜 우리에게 어려운 일이 당하는가? 아픔이 생기는가? 고통을 당하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징계하시기 때문이라고, 하나님께서 사랑하셔서 징계하시는 거라고 설명해 주고 있지만, 그게 모든 고통에 대한 대답은 아닌 겁니다. 사실 삶이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아요. 삶은 너무나도 복잡해서 한 가지 대답만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닌 겁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종종 어떻게 생각을 하냐면, 모든 것을 단순화시켜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에서 발견하는 한 진리가 있으면, 오늘 성경 말씀의 고통은 하나님의 징계라고 말씀해 주시면, 이 말씀을 읽으면서 그러니까 모든 고통이 다 하나님의 징계라고, 그렇게 단순화시켜서 생각하는 그런 위험성이 우리들에게 있는데요. 이렇게 단순화시키는 것은 정말 위험한 일입니다.

흔히 하는 말로 누가 제일 무서운 사람이라고 하죠? 이 세상에 제일 무서운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은 책을 딱 한 권만 읽은 사람이 제일 무섭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책에서 말하고 있는 내용에 동의하고, 그 책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 설득력이 있어서, 내가 동의하게 되는 그 순간, 우리가 어떤 착각에 빠지냐면, 모든 문제가 다 거기에 달려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오류에 빠지게 되는 것이죠. 소위 말해서 교조주의에 빠지게 되는 겁니다. 도그마에 빠져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른 정답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내가 알고 있는 그것만이 정답이고, 그것만이 모든 것을 설명해 주는 것이라고 착각해서, 그래서 독단에 빠지게 되는 그런 경우가 너무나도 많이 있는데, 안타깝게도 우리 크리스천들이 그런 독단의 교조주의에 빠지기가 쉽습니다.

만일 우리들의 믿음이 교조주의에 빠지게 되면, 그것은 우리들에게 복이 아니라 독이 되는데요. 그 독이 나만 죽이는 것이 아니라, 내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들을 실족하게 하고, 아프게 만드는, 심지어 죽이게 만드는 엄청난 독이 될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이고, 따라서 우리는 그런 교조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정말 알량한 지식으로 모든 것들을 단순화시켜서 평가해 버리는, 그런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세심하게 조심을 해야 합니다.

성경도 마찬가지인데요. 성경은 우리들에게 한 가지 대답만 주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한 구절에서 해놓았던 그 대답이 전부인 줄로 착각하시면 안 되는 것이죠. 큰 문제가 되는 겁니다. 성경은 이곳에서는 이런 말씀을 주시기도 하고, 저런 곳에서는 다른 의미의 말씀을 주시기도 하시기 때문에, 성경 전체의 교훈을 다양하게 듣고 다양하게 고민하면서 과연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아주 넓게 살펴보지 아니하면, 우리가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이고, 내가 이해한 것보다도 다른 사람들이 이해한 것들에 대해서 겸손하게 귀를 기울이고, 내가 틀렸을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다른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면, 우리의 믿음은 자칫 독약이 될 수가 있는 것이죠.

오늘 본문에서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당하는 고통이 하나님의 징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말씀은 모든 고통이 다 하나님의 징계라고 하는 그런 뜻은 아닙니다. 어떤 고통은 하나님의 징계일 수 있겠지만, 어떤 고통은 하나님의 징계와는 상관이 없는 것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따라서 누군가 고난을 당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고 한다면, 우리가 어떻게 반응을 보여야 하냐면, 그 사람에게 다가가서 말하기를 “이거 다 하나님의 징계야. 네가 지금 무슨 잘못된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징계를 당하는 거니까, 회개해야 돼”라고 말하면 될까요? 물론 하나님의 징계일 수 있어요. 하나님께서 치실 수 있어요. 징계의 목적으로 그 사람에게 고통을 주실 수도 있지만, 그러나 실제로 고난을 당하는 사람에게 가서 함부로 단정 짓고, 함부로 이야기하는 것은 아주 몰상식한 일이며, 그것은 아픈 상처 위에 후춧가루를 뿌리는 정말 사악한 일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하는 겁니다.

그 일을 누가 했냐면 욥의 세 친구들이 했어요. 욥이 엄청난 고난 가운데 있을 때, 욥의 세 친구들이 찾아가서 했던 말이 뭐냐 하면, “네가 지은 죄를 생각해 봐라. 하나님께서 널 징계하고 계시는 거니까, 죄를 생각하고 회개하라”라고 이야기를 했는데, 그 세 친구들의 이야기를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책망하셨어요. 책망.

그런데 안타깝게도 눈치 없는 크리스천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공감 능력이 떨어지는 크리스천들이 너무나도 많아서, 그래서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으면, 기껏 한다는 소리가 “그거 하나님의 징계다”라고 이야기하거나, 하나님께서는 감당할 만한 시험만 주는 거니까 별거 아니라고 이야기하거나, 정말 생각을 하고 말하는 건지, 바보인지 모를 정도의 그런 말들을 함부로 지껄이는 크리스천들이 너무나도 많은데, 제발 그러지 말아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고통을 겪었던 어떤 성도님이 자신이 고통을 겪었던 때를 회상하면서 저에게 해준 말이 있습니다. “목사님, 그때 사람들이 내게 와서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해줬는데, 제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되었던 것이 아니라, 그 말하는 사람 입을 찢어주고 싶었어요.” 너무나도 화가 나고, 너무나도 고통스럽고 분해서, 그 사람의 입을 찢어놓고 싶을 정도의 생각이 들었다고 하는 그런 고백을 하는 이야기들을 들어보았습니다. 우리는 공감을 하고, 아파해야 되는 겁니다. 그게 남의 고통이 아니라, 그게 마치 내가 당한 고난인 것처럼 함께 울어주고, 함께 아파하는 것이 그것이 당연한 것인데요.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보여주셨던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가 죄악으로 인해서 영원히 멸망하게 되었을 때, 저 높고 높은 보좌 위에서 우리를 향해서 하시는 말씀이, 저기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아, 불났나 보구나”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아, 거참 안됐네”라고 말씀만 하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길래 잘못하지 말라고 그랬지. 그러니까 좀 조심하지.” 그런 이야기만 하고 계셨던 것이 아니라,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어요. 그리고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우리의 죄를 자신에게로 다 짊어지시고, 그 죄를 씻기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피 흘려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믿고 따르게 되었다고 한다면, 예수님처럼 함께 아파하고 함께 공감하고 사랑을 베푸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어야 하는 것이지, 아무 의미가 없는 말들을, 오히려 고난당하는 자들을 향해서 함부로 정죄하고 함부로 답변을 내놓는, 그런 어리석은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 말씀을 기억하면서, 그러한 사실을 우리가 기억하면서 히브리서 12장의 말씀을 우리가 살펴보고 싶은데요. 오늘 본문의 말씀은 우리들에게 일어나는 여러 가지 고통들이 어떠한 일들이 있는가? 왜 일어나게 되었는가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그것이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녀들을 아버지가 징계하듯이, 하나님께서 징계하시는 것일 수 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모든 고통이 다 하나님의 징계일 수는 없겠지만, 어떤 고난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징계하시기 위해서, 다시 말하자면 잘못하고 있는 그 인생들을 돌이키게 만들기 위한 목적으로 하나님께서 어려움을 주시는 경우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러한 일들을 경험하게 된다고 한다면, 우리가 우리의 죄가 무엇인지를 발견하고 회개하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돌아와야 되는 그런 결단을 할 필요가 있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만나는 이 고통이 하나님의 징계라고 하는 사실을 인정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전제가 있습니다. 그 전제가 무엇이냐 하면, 첫 번째는 이 세상에서 발생하는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의 주권 하에 있다고 하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발생하는 일들이 우연히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어쩌다 보니까 재수 없어서 생기는 일들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으며,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있으며, 하나님께서 특별한 그 계획 가운데 완벽하게 그 계획을 이루어 나가신다고 하는 사실을 인정할 때, 이 세상에서 당하는 우리의 고난이 하나님의 징계일 수 있다고 하는 결론이 가능한 겁니다.

두 번째로는 우리가 인정해 두 번째로 인정해야 될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런데 그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가? 하나님은 우리들처럼 이랬다 저랬다 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들처럼 실수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모든 것을 하나님의 통치 가운데 바라보시고, 계획하시고 수행하시는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인정해야 되는 것이죠. 하나님의 그 사전에는 실수가 없고, 모든 것 하나가 완벽하게 모든 것 하나하나를 다 섭리하셔서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인다고 하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모든 고통이 하나님의 징계일 수 있다고 하는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겁니다.

세 번째로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그 모든 것에는 선한 목적이 있다고 하는 것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하나님은 전능하실 뿐만 아니라, 동시에 선하시고 좋으신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인정할 때, 징계일 수 있다고 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가 있는 것이죠. 만일 하나님이 선하시고 좋으신 하나님이 아니라, 사악한 존재라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이 전능하시기는 하지만, 그러나 좋으시고 선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사악한 분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러면 징계가 아니라 이것은 우리를 파멸시키려고 하는 행동이 되겠죠. 어떤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사악한 사람이면 어떤 결과가 빚어집니까? 정말 재앙이 일어나는 거죠. 선택적 정의가 되는 것이고, 선택적 공정이 되는 것이, 별 죄를 짓지 않은 사람도 탈탈 털어서 죄인으로 만들어버리고, 죄가 뻔히 드러나고 있고 모든 사람들이 죄라고 인정하고 있는데도 아무 문제가 없는 것처럼 그렇게 해버리는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 게, 사악한 사람이 권력을 가지고 있으면 그런 일들이 벌어지는 거죠.

심판이 만일 사악한 심판이라고 하면 어떻습니까? 여러분 올림픽 경기를 지금 보고 계십니까? 어제도 다는 보지 못했지만 재밌게 봤는데요. 7월 27일 날 우리 대한민국 여자 배구 선수단이 케냐와 열심히 경기를 해서 승리하는 아주 쾌거를 이뤘습니다. 그런데 경기 도중에 석연치 않은 심판 판정이 있었던 거예요. 심판이 누구였냐면 일본 여자 심판이 심판을 보는 겁니다. 김연경 선수의 손에 맞지 않고 떨어졌는데, 우리의 실책이라고 하면서 저쪽 상대방에게 점수를 주는 거예요. 아무리 항의하고 텔레비전에서는 전혀 맞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 보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맞지 않았던 그 우리의 실책이라고 하면서 상대방에게 점수를 주는 그런 의도적이었나요? 실수한 건가요? 전 모르겠어요. 사람 마음을 알 수가 없으니까. 근데 그 심판의 얼굴을 보니까, 뭔가 께름칙한 얼굴이에요.

그런데 만일 하나님이 그렇게 사악한 심판주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징계일 수가 없고, 우리를 파멸로 이끄는 것이 될 것이죠. 그런데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하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하나님께서 장악하고 계시고, 주권 하에서 다스리고 계실 뿐만 아니라, 중간에 실수하고 이랬다 저랬다 잘못된 방식으로 일을 처리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그 하나님이 사악한 하나님이 아니라 선하시고 좋으신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 고통이 징계일 수 있다고 하는 것이죠.

더 나아가서 오늘 본문에서 해주시는 말씀이 무엇이냐면, 하나님은 단순히 선하고 좋으신 하나님이 아니라, 그 정도만이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시라고 말씀하고 계세요.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씀하고, 아버지가 자녀를 보면 사랑으로 가장 좋은 것을 해주고 싶듯이, 아버지가 자녀를 짓밟아버리고 죽여버리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는 정말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어서 가장 좋은 것을 해주고 싶은 아버지처럼,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기 원하시는 그 하나님이신데,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하시는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이 우리를 파멸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주시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그것이 우리를 징계하시기 위한 목적으로 우리로 하여금 돌이키게 만들고,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시기 위한 선하신 목적으로 주시는 것일 수 있다고 오늘 본문에서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일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들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지금 당장 우리들에게는 좋지 않아 보이고,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당시에는 슬퍼 보이고, 당시에는 정말 견디기 어려운 일들이지만,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의와 평강을 이룰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담대하게 믿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금 당장은 비록 고통스럽고 힘들어서 견딜 수 없겠지만, 우리가 전혀 의심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고통을 주시는 이유가 연단을 위해서 주시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욥의 경우처럼 무슨 죄를 지어서가 아니라, 징계의 목적이 아니라, 우리들의 믿음을 연단하고 훈련시켜서 하나님을 더욱더 사랑하게 만드는 목적으로, 또한 우리의 믿음에 성숙이 일어나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그리고 하나님과의 깊은 교재의 관계로 들어가고 더욱더 기도하게 만드시기 위하여, 연단하시는 경우가 있다고 말씀하고 계시고, 뿐만 아니라 때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시기 위해서 고통을 주실 때도 있는데요. 요한복음 9장의 말씀을 보면 나면서부터 맹인 된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게 하기 위해서 주시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오늘 히브리서 12장의 말씀에서는 우리의 징계를 위해서도 고난을 주실 수가 있다는 것이죠. 만일 우리들의 자녀들이 잘못된 일을 한다면 징계를 하게 됩니다. 왜일까요? 부모가 자식을 징계하는 것이 재밌어서, 부모가 자녀를 징계하는 것이 신나고 내 존재를 드러내는 일이기 때문에 그게 아니라, 그냥 방치해 두면 잘못될까 봐. 그냥 이대로 내버려 두면 망할까 봐. 그냥 이대로 내버려 두면 죽을 줄 모르니까. 그러니까 지금 조금 아픔을 통해서 더 큰 곤란한 일을 겪지 않게 만들기 위한 방법으로 징계를 하시는 것이라는 것이죠.

당뇨에 걸리게 되면 언젠가는 아주 심할 경우에는 발을 절단해야 되는 일들이 있습니다. 병원에서 의사 선생님이 발을 절단하자고 하면, 그것은 왜 절단하자고 하겠습니까? 절단해야 목숨을 살리니까. 하나님의 징계도 마찬가지인데요. 우리가 영원히 멸망을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고통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경고하시고, 우리들에게 말씀해 주시는 것인데, 그럴 때 우리가 그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돌이킬 수 있다고 한다면 고난도 우리들에게 은혜가 되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며 묵상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마음을 두드리는 것을 느끼게 된다고 한다면, 우리는 그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되돌아와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냐 하면 우리와 말씀하고 싶어 하시는 하나님이세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원하시는데, 하나님께서는 침묵하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지금도 말씀하시기를 원하고, 우리와 우리에게 뜻을 전해 주시기를 원하시는데, 그 방법이 무엇입니까? 때로는 우리가 성경 말씀을 읽을 때,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기도 하고, 설교를 들을 때 그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되기도 하고, 기도하는 가운데 듣게 되기도 하고, 때로는 우리들의 양심을 향해서 들려주시는 그 소리를 통해서, 때로는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소원을 주셔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도록 우리들의 마음에 소원을 주실 때가 있는데, 이런 착한 일을 해야지, 이런 선한 일을 해야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말씀을 들려주시면, 우리가 그때 우리의 귀를 막아버리고, 우리의 눈을 막아버릴 것이 아니라, 못 들은 척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에 세밀하게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어리석은 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시편 14편 1편 1절에 말하기를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 도다 했는데, 실제적으로 어리석은 사람이 누구냐면,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중 무엇이냐면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사는 것이 어리석은 것이에요. 하나님께서 지금도 말씀하고 계세요. 우리를 향해서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세요. “네가 먼저 손 내밀라”라고 말씀하고 계셔요. “그렇게 살면 안 된다”라고 말씀하고 계셔요. “하나님의 뜻대로 살라”고 말씀하고 계셔요. 그런데 그 순간에 우리가 귀를 막아버리면서, 마치 하나님이 말씀하지 않는 것처럼 귀를 막아버리면, 하나님께서 때로는 징계를 통해서라도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만드시는데, 어리석은 사람은 그때에도 귀를 막아버린다고 하는, 우리가 고난을 당하는 그 순간이 된다고 한다면, 그 고난이 모두가 다 징계는 아니지만, 그리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을 향해서는 징계라고 함부로 이야기해서는 안 될 것이지만, 우리는 항상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무엇을 원하시고 계시는가? 하나님께서는 지금 나로 하여금 어떠한 삶의 방향을 바꾸라고 하시는가? 내가 지금 하나님에게서 떠나 있는 것이 무엇인가? 내가 지금 하나님과의 하나님의 마음과는 다른 방향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 자신의 마음을 향해서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세밀하게 귀를 기울이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음성에 순종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66 total views,  1 views today

Add a Comment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항목은 *(으)로 표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