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눅 23:32-38)

제2언: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눅 23:3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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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주일이면 고난 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못 박혀 죽으신 것을 기념하는 주일이고 그 주간이 고난 주간이 되겠습니다. 그다음 주일은 부활주일인데요. 예수님께서 돌아가셨으나, 3일 만에 죽음에서부터 부활하신 것을 기념하는 부활 주일이 됩니다. 그래서 이번 고난 주간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하셨다고 알려진 7개의 말씀, 다시 말하자면 가상칠언이라고 알려진 말씀들을 하나씩 하나씩 살펴보면서 은혜를 나누려고 하는데요. 오늘 하나 살펴보고, 다음 주일에 또 하나 살펴보고, 또 5일간의 새벽 기도 때 5개의 나머지를 살펴보아서 총 7개의 말씀을 살펴볼 계획 가운데 있습니다.

오늘은 그 가운데서 가장 먼저 하셨을 거라고 알려져 있는 말씀을 살펴보려고 하는데요.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라고 하는 기도를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3장 34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아마도 많은 말씀을 하셨을 수도 있겠지만, 그 가운데 특별히 7개의 말씀만이 기록되어 있는데요. 그 가운데서 제일 먼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무엇이냐면, 아버지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는 기도의 제목을 예수님께서 가장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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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사실이 아주 놀라운데요. 왜냐하면 십자가라고 하는 극심한 고통 가운데서 나올 수 있는 가장 자연스러운 반응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극심한 고통 가운데서, 만일 우리가 십자가에 메어 달렸다고 한다면, 우리는 무슨 말부터 먼저 하게 될까요? 우리랑 똑같은 몸을 가지신 예수님, 100% 인간이신 예수님께서 그 엄청난 고통을 당하면서 내뱉을 수 있는 가장 원초적인 반응이 있다고 한다면, 아마 비명을 질러야 정상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이고 죽겠다”고 이야기하고, 살려달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반응일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예수님께서는 무슨 말씀을 제일 먼저 하셨냐면, “주여,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는 말씀을 가장 먼저 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하신 것은 주님께서 사랑하셨기 때문에 나온 말씀이라고 생각을 해요. 마치 부모님과 자녀들이 함께 있는 상황 가운데서, 자녀들이 잘못을 해가지고 엄청난 해를 당하게 되고 위험에 빠져서 정말 어려운 일을 겪게 되었을 때, 부모의 마음, 어머니의 마음은 “왜 이 잘못을 했느냐?”보다도 가장 먼저 관심이 가는 게 자식의 안전이죠. 우리 새끼가 살아있는가? 우리 아이가 괜찮은가를 먼저 바라보는 게 부모의 마음인 것처럼, 우리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 달리셨을 때, 가장 먼저 가장 먼저 예수님의 마음 가운데 있었던 내용이 무엇이냐면,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하는 것이 우리 주님의 가장 먼저 보여준 반응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바라보게 될 때, 우리가 먼저 발견할 것이 있다고 한다면, 지금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있는 사람들이 저지르고 있는 그 일이 엄청난 죄라고 하는 사실을 알 수가 있겠습니다. 지금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은 단순히 로마 병정들만이 아니라, 그렇게 예수님을 재판정에 넘겨주었던 유대인들, 제사장들, 서기관인들, 그리고 군중들, 그리고 예수님을 심문했던 그런 본디오 빌라도와 모든 사람들이 다 함께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있는 가운데 있는데요. 그 일을 해 하는 그 사람들의 그 행위가 예수님께서는 그것이 죄라고 하는 사실을 먼저 전제하고서, 이 말씀을 해 주시고 계시는 겁니다.

용서해달라고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간청하고 있는데, 용서는 누구에게 필요한 것이죠? 용서는 뛰어난 업적을 남긴 사람한테 필요한 것인가요? 용서는 금메달을 딴 우수한 선수에게 필요한 것인가요? 선한 일을 하고, 정당한 일을 한 사람에게 필요한 것인가요? 아니잖아요. 용서는 누구에게 필요한 것인가? 죄 지은 사람에게 필요한 거예요. 예수님께서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할 때 그 전제가 무엇이냐 하면, 예수님을 지금 십자가에 못 박고 있는 사람들이 엄청난 죄악을 저지르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전제하고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죄를 짓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이 일을 하고 있었을까요?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자기 자신들은 정당한 일을 한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나는 공무를 수행한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넘겼던 사람들은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서 이 일을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우리는 정당한 일을 하는 것이고, 신성 모독을 한 예수님을 십자가에 넘기는 거야말로 그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주신 사명감을 가지고 이 일을 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죄라고 하는 것은 짓기 쉬운 게 아닙니다. 죄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그냥 마음대로 지을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왜냐하면 우리 사람들에게는 양심이라고 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서 사람을 만드셨고, 따라서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는 하나님을 닮은 게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닮아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닮고, 양심이라고 하는 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죄악을 저지른다든지, 나쁜 짓을 하게 된다든지 하게 되면, 우리들의 양심이 허락하지 않고, 두려운 마음이 들어서, 죄를 지을 수가 없게 되어 있는 겁니다.

이것이 죄라고 생각하면, 그 죄를 지을 수가 없어요. 마음에 두려운 마음이 생기기 때문에 그렇죠. 우리들의 마음에 경찰관이 들어가 있기 때문에, 양심의 법이 살아 있기 때문에, 죄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마음껏 마음대로 지을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런데 어떻게 사람들은 죄를 짓는가? 그 자기 자신의 양심을 향해서 속이는 것이죠. 최면을 거는 겁니다. 아니야! 이건 죄가 아니야! 이건 나쁜 일이 아니야! 이건 괜찮은 일이야! 아니, 이것은 의로운 일이야! 이것은 아주 정당한 일이야라고 이야기해 주는 것입니다.

도둑질 할 수 있나요? 도둑질 하는 게 쉬운가요? 쉽지 않아요. 왜냐하면 도둑질 하려고 하면 두려운 마음이 드는 겁니다. 내가 이런 짓을 하면 안 되는데, 양심이 내 자신에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도둑질 하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에요. 그런데 어떻게 도둑질을 하게 되는 겁니까? 그것은 우리 자신의 양심을 향해서 설득을 하는 거죠. “지금 네가 하고 있는 일은 나쁜 일이 아니라, 나쁜 방법을 통해서 엄청난 부를 모은 저 탐욕적인 인간들을 응징하는 일을 니가 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스스로 자기 자신을 설득시켜야 하는 겁니다. 지금 네가 하고 있는 일은 나쁜 일이 아니라, 저 사람이 한 그 나쁜 일에 대해서 네가 가서 심판하는 것이다. 정의를 이루는 것이라고 내 자신을 속여야 그래야 죄를 짓는 것이죠.

회사에서 일을 하면서 회사의 물건을 착복하고, 여러 가지 잘못들을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맨 정신으로는 그렇게 못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들의 마음을 설득시키는 겁니다. 네가 열심히 수고하고 땀을 흘렸지만, 네가 받은 보상이 뭐냐?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사장은 많은 것을 가져가는데, 너는 그렇게 열심히 수고하고 애썼지만, 가지고 가는 것이 얼마 없지 않느냐? 너는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착취당하고 있는 것이고, 그러니 “그런 보상을 받지 못한 것을 보상받기 위해서 회사의 물건을 훔쳐가라” 이야기하는, 잘못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나는 정의를 구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갑질을 왜 합니까? 내가 마땅히 받아야 될 권리가 있는데, 그 권리를 침해당했기 때문에, 지금 내가 화를 내는 것은 정당하고, 갑질을 하는 것은 내 권리를 되찾아오는 것이라고 우리 자신을 향해서 자꾸만 설득하기 때문에 우리가 죄를 짓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일도 역시 마찬가지였다고 생각이 되는데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 사람들은 아무 죄가 없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앞에 놓여져 있는 저 죄인은 하나님을 모독한 신성 모독의 죄인이오. 이 죄인을 심판하는 거야말로 하나님을 위하는 길이고, 이것이 말로 이것이야말로 정말 정당한 일이라고 하는 그런 정당감 속에서, 사명감 속에서, 모든 사람들이 일어나서 예수님을 죽이고 있는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수많은 사람들을 향해서, 예수님께서는 그게, 그게 죄라고 말씀하는 거예요. 그것이 아주 충격적인 것인데, 이것이 정당하다고 괜찮은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게 죄라고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짓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우리는 죄를 많이 짓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우리 교우들과의 관계 속에서도 엄청난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는 일들을 많이 하고 있는데, 그것은 우리들이 몰랐다고 말하기도 하고, 정당하다고 말하면서 죄를 짓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죄인 줄 몰랐다고 하는 것이 결코 변명이 되지는 못합니다. 내가 장난으로 던진 돌이 저 사람에게 날아가서 저 사람을 죽일 줄 몰랐다고, 그래서 죄가 안 되는 것이 아닌 것이죠. 사실 모든 사람들이 죄를 짓는 이유는 몰라서 죄를 짓는 겁니다. 죄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죄를 짓는 것이고, 정당하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이죠.

낙태를 하면서도 내가 한 생명을 죽인다고 생각하지 않는 겁니다. 이것은 내 자신의 권리를 보존하는 것이고, 이것은 내 자유를 확보하는 것이고, 이것은 죄인 줄 몰랐다고 생각하면서 태아들을 죽여버리는 것이죠. 동성애를 하면서도, 그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는 악한 일이라고 하는 사실을 몰랐고, 그것은 사랑이요, 내 권리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친구들을 왕따시키면서, 그런 사람들을 모욕을 주고, 그래서 결국 그 사람이 심각한 극단적 선택을 하게 만들어 놓고도, 그 사람이 그렇게 극단적 선택을 할 줄은 몰랐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게, 바로 우리들의 모습인 것이고요. 장애인들이나 이주민들이나 사회적 약자들을 향해서 마음속에 대못을 박아놓고도, 이것이 우리의 권리라고 떳떳하게 주장하는 그런 일들이 우리 사회에서 얼마나 자주 일어나는지, 그런데 그게 우리 크리스인들 사이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요.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쌀쌀한 눈빛 눈길을 주면서, 성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면서도 교만한 마음을 가지기도 하고, 왕따를 시키기도 하고 무시하는 눈길을 주면서도 이것은 괜찮은 거라고 인간이니까 그렇게 할 수 있는 거라고 그냥 그렇게 자위하면서 사는 거예요. 사랑의 손길을 내밀지 않으면서도, 이것은 내가 정당한 삶을 사는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지 않으면서도, 이것은 내 자연스러운 삶이라고 말하면서, 나는 괜찮은 일을 하고 있다고, 그저 나는 교회를 열심히 다니고, 예배 잘 드리고, 헌금 잘 드리니까, 그러니까 나는 괜찮은 것이라고 착각하며 지내고 있는데요. 오늘 주님께서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저와 여러분들을 향해서, 그게 죄다 말씀, 그게 죄다 말씀하시는 거예요.

마음속에 용서하지 못하는 거, 마음속에 미운 마음으로 사람들을 바라보는, 차별하고 미워하는 거, 그 모든 것이 괜찮은 것이 아니라, 용서받아야 될 죄라고 말씀해 주고 계시는 것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 우리가 기도해야 될 기도의 제목이 있다고 한다면, “주님, 영적인 눈을 뜨게 하여 주시옵소서.” 기도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하시고 온전하시고 기뻐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할 수 있는 영적인 눈을 주시옵소서.” 기도해야 되는 거에요. 로마서 12장 2절 말씀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세상 사람들이 가는 그 모든 길들을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다른 사람들이 가는 그 길이니까 괜찮은 길이겠지. 이렇게 다른 사람들처럼 똑같이 행동하면 아무 문제가 없겠지 생각하면서 그렇게 살아가지 말고,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분별할 수 있는 영적인 눈을 주시옵소서” 기도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죄를 짓는 그들을 바라보시면서 분노하지 않으셨습니다. 누군가 너의 오른편 뺨을 때리면 왼편 뺨까지도 돌려대라고 주님께서 말씀해 주셨는데, 정확하게 그렇게 하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고 체포당하실 때, 주님께서는 저항하면서 그들을 공격한 것이 아니라 온유하게 대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자기의 칼을 빼들어 제사장 종의 귀를 잘라 버렸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 귀를 다시 회복시켜 주시며, “칼을 도로 네 칼집에 꽂으라.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하느니라.” 말씀하시며 온유한 모습으로 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온유하게 대하신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힘이 없어서 그랬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사람들은 조롱했습니다. 누가복음 23장 35절의 말씀에, “백성은 서서 구경하는데, 관리들은 비웃어 이르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하고” 하면서 예수님을 조롱했는데, 그 순간에 예수님께서 그 십자가 위에서 내려올 능력이 없어서, 내려올 방법이 없어서, 그 위에 매달려 계셨던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12 영이나 더 되는 천사들을 동원하여, 충분히 뒤엎을 수 있는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온유하게 대하신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만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은 자라고 한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들의 삶 가운데서도 온유한 모습의 그러한 모습이 나타나야 될 줄로 믿습니다. 혹시라도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미워하는 마음, 시기하는 마음, 질투하는 마음, 여러 가지 악한 마음들이 우리의 마음 가운데 있거들랑, 꼴 보기 싫은 마음이 내 마음 가운데 있다고 한다면, 그게 죄라고 하는 것을 알고, 회개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간구해 주셨습니다.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셨는데요. 그런데 이 말씀은 종종 우리 크리스천들 사이에서 많은 오해를 불러 일으킨 말씀입니다. 그 악을 행하는 자들을 향해서, 예수님께서는 저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셨는데, 그러니까 이 말은 이들이 계속 죄를 지어도, 회개하지 않고 끝까지 악한 일을 계속해도, “하나님, 그냥 없던 일로 해주세요. 그냥 못 본 척 해주세요. 하나님, 그냥 무조건 용서해 주세요.”라고 하는 그런 의미의 기도의 제목은 아닙니다.

용서에는 무엇이 전제되냐면, 회개가 전제되는 거에요. 용서의 전제가 무엇이냐면, 회개예요. 회개하지 않는 자에게는 용서가 의미가 없어요. 그 용사가 회개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용서가 나타나는 게 아니에요. 저들을 용서해달라고 하는 기도는 저들이 회개하든 회개하지 않든 아무런 상관없이 “하나님, 그냥 그냥 내버려 두세요. 그냥 놔두세요.”라고 하는 그런 기도의 제목이 아니라,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는 그 기도의 제목은 하나님 저들의 마음을 변화시켜 주셔서, 지금 악을 행하고 있던 그 악행을 중단하게 해 주시고, 그래서 마음의 변화가 일어나 회개케하시고, 그래서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그래서 이제는 하나님에게로 돌아오는 그런 변화의 역사가 일어나게 하셔서, 그래서 용서해달라고 하는 기도의 제목입니다.

종종 우리 크리스천들은 이러한 용서에 대한 성경적인 관점을 망각하는 바람에, 용서가 악용이 되거나, 오용될 때가 많이 있고, 결과적으로 복음이 조롱당하는 그런 결과를 가져올 때가 많이 있습니다. 특별히 어떤 가해자와 피해자가 있을 때, 안타깝게도 우리 크리스찬들은 피해자에게 찾아가서 그 피해자에게 한다는 말이, “가해자를 용서하라”고 하는 그런 정말 뜬금없는 소리를 할 때가 너무나도 많아요. 가해자가 있고 피해자가 있으면, 정의를 바로잡는 것이 그게 하나님의 법칙일 텐데, 가해자는 그냥 가만 내버려 두고, 피해자를 찾아가서 한다는 이야기가 가해자를 용서하라고 하는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것이 얼마나 이 피해자의 마음을 더 아프게 하고, 분노하게 만들 것이라고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채, 그리고 성경적인 용서의 개념이 무엇인지에 대한 제대로 인식이 없는 채, 그냥 가서 피해자에게 용서하라고 말함으로써, 오히려 분노를 유발시켜 버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지난주 설교에서도 한번 언급을 해드렸는데요. 고통을 당하는 자가 있다고 한다면, 찾아가서 기뻐하라고 말하든지, 감사하라고 말하는 그런 서툰 일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것은 아주 어리석은 일일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는 사악한 일이 될 수도 있는 것이고요 우리가 가져야 될 태도가 있다고 한다면 고난을 받는 사람 고통을 받는 사람들과 함께 울어주고 함께 공감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렇게 함께 울고 함께 공감하는 모습을 보여준다고 한다면, 그런 피해자들을 향해 찾아가서 쉽게 용서하라고 하는 말을 함부로 할 것도 아닌 것이죠.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러니까 용서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하는 것이 나 자신을 그 감옥에서부터 해방시키는 일이 될 겁니다. 하지만 이 용서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냥 아무런 회개도 없는데, 뻔뻔하게 살아가고 있는데, “그냥, 그냥 용서해 줄게”라고 하는 것이 용서가 아니고, 예수님께서 지금 이렇게 기도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면,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저들의 마음을 변화시켜 주셔서, 그래서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하시고, 그리고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하나님께 돌아와 회개하고, 자복하게 하셔서, 그래서 용서해달라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인 거예요.

그걸 주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신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되는 것이고, 우리도 복음을 오해하지 않아야 되는 것인데,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셨다고 하는 이야기는, 그러니까 내가 계속 죄를 지으면서 마음대로 악하게 살면서, “나, 용서받았어” “나, 괜찮은 사람이야”라고 그렇게 뻔뻔스럽게 살아가도 된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이 전혀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이 말씀을 읽으면서 무엇을 바라보아야 하는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이 사실은 나라고 하는 사실을 발견해야 합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면서,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고 있는 저들을 용서해 달라고 예수님께서 기도해 주셨는데, 예수님을 지금 십자가에 못 박고 있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로마 병정들입니까? 본디오 빌라도입니까?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못을 박고 있는 겁니까? 아니요. 사실은 우리가 예수님을 못 박을 거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이유가 무엇이냐면, 나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힌 거에요. 예수님을 못 박은 건, 그렇기 때문에 바로 우리들이 예수님을 못 박은 것이고, 예수님의 기도는 그렇게 예수님을 못 박은 우리를 위한 기도인 것이죠.

우리가 종종 오해하지 말아야 될 것이 있는데, 그것은 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는가? 우리는 사도 신경을 고백하면서 고백하기를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라고 하는 그런 신앙 고백을 하는데, 역사적으로 맞는 얘기지만, 그것이 내가 못 박은 게 아니라, 저 나쁜 놈이 못 박았다고 하는 그런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복음 성가에 보면 “그때 그 무리들이 예수님 못 박았네”라고 하는 복음 성가가 있는데, 그 찬송을 부르면서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때 그 무리들이 예수님을 못 박은 것이 아니라, 내가 지금 바로 그 죄, 오늘도 내 옆 사람을 외면하고 있는 바로 그 죄, 우리가 악하게 살아가고 있는 바로 그 죄가, 내가 주님의 뜻대로 선하신 말씀대로 살지 못했던 바로 그 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고, 바로 그 죄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다고 하는 사실을 바라보면서, 우리의 죄가 용서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하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가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은 그냥 우리를 그냥 없던 일로 치자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그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내가 그렇게 큰 죄를 지었구나”라고 하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고, 지금까지는 나는 괜찮아. 나는 그렇게 나쁜 짓을 한 게 아니야. 나는 정당한 일을 한 것이고, 나는 옳은 일을 했다고 스스로를 그렇게 자꾸만 정당화하고, 그렇게 살아왔는데,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서 “내가 주님을 죽였구나.” “내 그 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하는 사실을 발견하면서, 이제는 믿음으로 그 십자가의 사건을 받아들이고, 내 죄를 회개하며, 자백하고, 이제는 새로운 삶의 결단으로 나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이번 고난 주간을 앞에 두면서, 나 자신의 모습을 회개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진정으로 받아들이는 귀하고 복된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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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으면

크든 작든 사람들은 죄를 짓습니다.
그래도 죽기 전에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는 자에겐
소망이 있습니다 .
죽으면 회개할 기회도 없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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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행

때로는 성직자가 죄인이 회개하도록 돕기보다는
뻔뻔하게 살아도 괜찮은 줄 착각하게 만들어
지옥 행을 방조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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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의 회개(삼상 24:16-22)

16 다윗이 사울에게 이같이 말하기를 마치매 사울이 이르되 내 아들 다윗아 이것이 네 목소리냐 하고 소리를 높여 울며 17 다윗에게 이르되 나는 너를 학대하되 너는 나를 선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 18 네가 나 선대한 것을 오늘 나타냈나니 여호와께서 나를 네 손에 넘기셨으나 네가 나를 죽이지 아니하였도다 19 사람이 그의 원수를 만나면 그를 평안히 가게 하겠느냐 네가 오늘 내게 행한 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서 네게 선으로 갚으시기를 원하노라 20 보라 나는 네가 반드시 왕이 될 것을 알고 이스라엘 나라가 네 손에 견고히 설 것을 아노니 21 그런즉 너는 내 후손을 끊지 아니하며 내 아버지의 집에서 내 이름을 멸하지 아니할 것을 이제 여호와의 이름으로 내게 맹세하라 하니라 22 다윗이 사울에게 맹세하매 사울은 집으로 돌아가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요새로 올라가니라

사울은 다윗의 말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자신은 다윗을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데, 자신을 향해서 전혀 해를 가하지 않은 다윗의 모습에 엄청난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사울은 울면서 다윗을 불렀습니다. ”내 아들 다윗아, 이것이 네 목소리냐?“ 이 장면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이 세상은 우리를 향해서 속삭입니다, ”네 힘을 보여줘“ ”네 본때를 보여줘“ ”네가 힘이 있고 능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지 않으면, 너는 무시를 당하게 될 거야. 너를 깔보게 될 거야.“ 이러한 세상의 속삭임에 너무 많이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큰소리부터 치기 시작합니다. 목소리가 큰 사람이 이긴다는 속설이 우리를 조종하기 때문입니다. 조금이라도 얕잡아 보였다간 죽을 수 있다는 위기감에, 잔뜩 허세를 부리면서 이 세상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쉽게 칼을 빼 듭니다. 예수님께서 잡혀가실 때 칼을 빼 들었던 베드로처럼, 위협이 있을 때마다 무력으로 대응하려고 합니다. 우리의 무기를 빼 들고 공격 자세를 취합니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 싸움을 해서 이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상대방이 제압되는 것이 아닙니다. 피차 멸망하기만 할 뿐입니다. 내가 칼을 빼 들면, 상대방이 순순히 항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같이 칼을 빼 들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주 놀라운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저항의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마 5:38-39). 다윗이 행한 것은 바로 예수님의 말씀대로 행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효과가 있었습니다. 사울은 다윗에게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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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칼이 강하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칼보다 강한 것은 펜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펜보다 더 강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것을 품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손양원 목사님을 사랑의 원자탄이라고 부릅니다.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범인을 손양원 목사님은 품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악했던 사람이 사랑의 원자탄 앞에서 굴복한 것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항복하는 이유는 우리가 한 손에 성경을 들고 또 한 손에 칼을 들고 있으면서,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위협해서가 아닙니다. 종종 신앙생활을 하지 않으면, 결혼을 허락하지 못한다고 위협하고, 취직을 할 수 없다고 위협하고(오직 신자만이 취업 가능한 방식을 통해서), 거래를 끊겠다고 위협하고, 진급에 지장이 있을 것이라고 은근히 압력을 가하곤 합니다. 이러한 방법이 최고의 전도 방법이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하지만 칼이나 무력으로 복음을 전할 때, 사람들이 굴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굴복하는 것처럼 보일 수는 있지만 말입니다. 오히려 사랑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무력을 사용하고 완력을 사용해서 우리를 굴복시키려면 굴복시킬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우리들의 마음의 문 앞에서 문을 두드리시며 기다리셨습니다. 사랑을 간청하셨습니다.

우리가 죄악을 범하여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을 때, 하나님은 당장 심판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우리를 죽이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의 옷깃조차 자르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대신하여 목숨을 내어주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6-8)

사울은 충격 가운데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너를 학대하되 너는 나를 선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17절) ”보라 나는 네가 반드시 왕이 될 것을 알고 이스라엘 나라가 네 손에 견고히 설 것을 아노니 그런즉 너는 내 후손을 끊지 아니하며 내 아버지의 집에서 내 이름을 멸하지 아니할 것을 이제 여호와의 이름으로 내게 맹세하라“(20-21절). 아주 놀라운 고백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으로 모든 게 해결된 것이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사울의 충격과 회개는 아주 극적인 것이었지만, 이것이 오래가지는 않았습니다. 나중에 보면, 사울은 다시 다윗을 죽이기 위해 나섭니다. 그렇다고 하면, 이렇게 눈물을 흘리면서 다윗 앞에서 참회했던 것은 순 거짓말이었던 것일까요? 전혀 진정성이 없이 거짓으로 뉘우치는 척 연기했던 것일까요?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내용만으로는 지금 이때 했던 회개와 참회, 그리고 약속이 진정성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전혀 알 수 없습니다.

아마도 진정성이 없었던 쇼였다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정반대로 이 순간만큼은 진정으로 회개했었을 것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사울은 다윗의 행동에 크게 충격을 받았고, 그래서 크게 뉘우치면서 울었을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그렇게 한번 회개한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풀리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사탄은 자신이 포로로 잡고 있던 사울을 그냥 순순히 놓아주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사울의 마음을 충동질해서 다시 원상태로 돌려놓습니다. 이러한 예가 참 많습니다.

애굽 왕 바로의 경우가 그랬습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 재앙을 내릴 때마다, 이스라엘 민족을 보내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러다가 얼마 뒤에 번복해버립니다. 그때 애굽 왕이 거짓으로 보내겠다고 약속한 것이었을까요? 그럴 수도 있지만,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진정성이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그 마음이 바뀌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이런 사람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부흥회를 통해서 또는 수양회를 통해서 큰 은혜를 체험합니다. 정말 주님의 뜻대로 살겠다고 각오를 다짐합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닌 겁니다. 흔히들 말하는 대로, 성령 충만의 체험을 하기만 하면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단번에 끝내는 경기가 아니라 기나긴 마라톤과 같습니다. 마치 아기가 태어나면 그 순간부터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고 대소변도 가릴 수 있는 게 아니라,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성장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울의 경우 다윗을 통해 충격을 받고 회개했다면, 그 이후로도 계속해서 믿음의 길을 가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면서 성결한 삶을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존하는 훈련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 과정이 생략되면, 다시 원상태로 돌아가 버립니다. 마치 더러운 귀신이 어떤 사람에게서 떠나갔지만 결국 다시 돌아와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는 것과 같습니다(눅 11:24-26). 그러면 처음 형편보다 나중이 더 심하게 됩니다.

전과자들이 어느 날 은혜를 체험했다고 해서 함부로 성직자로 세워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한때 좋은 의미이든 나쁜 의미이든, 유명했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예수님을 믿고 목사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코미디언, 살인자, 도둑이 변화되어 목사가 됩니다. 하지만 결국 그들이 복음을 우습게 만들고 주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일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성경의 교훈을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감독의 자격을 언급하면서 새로 입교한 자를 세우면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딤후 3:6). 신앙은 한 방이 아닙니다. 믿음의 길은 오랫동안 성숙해져야 하는 길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 3:12-14)

선 줄로 생각하면 망합니다. 한번 은혜받은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면,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끊임없이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흘리신 보혈의 은혜를 기억하며 믿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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