쉐마 (신 6:4-9)

교회 안에 아주 널리 알려진 것이지만, 사실은 잘못 알려졌거나, 과장됐거나, 혹은 잘못된 내용들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과연 이것이 맞는지, 잘못된 것인지, 늘 영적으로 분별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바람직할 거라고 생각이 드는데요. 오늘 어린이 주일을 맞이해서, 우리가 교회 안에서 아주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지만, 잘못된 정보를 한번 말씀을 드려보고 싶습니다.

그것은 바로 유대인들에 대한 과장된 평가입니다. 제가 얼마 전에 동영상을 하나 보았는데요. 이 동영상은 유태인들이 어떻게 신앙 교육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설명하는 동영상이었습니다. 그 동영상에서 하는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냐면, 유태인들은 세계적으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으며, 그들은 온 세상을 이 세상을 리드하고 있는 그런 민족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유태인들이 이렇게 두각을 나타내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유대인들의 신앙 교육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하는 내용의 동영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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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정말 사실이라고 한다면, 참 여러 가지로 우리들에게 많은 도전을 줄 수 있는 영상일 텐데요. 그런데 가만히 내용을 들어보니까, 사실과는 거리가 멀고, 조그마한 내용을 확대 과장했고, 그리고 부정확한 내용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는 동영상이었습니다. 그 동영상에서는 오늘 우리가 읽은 신명기 6장 4절에서부터 9절 말씀, 이것을 “쉐마”라고 부르는데, 유대인들은 이 쉐마라고 불리는 이 구절의 말씀들을 늘 암송하고 묵상할 뿐만 아니라, 어렸을 때부터 철저하게 신앙 교육을 잘 받고 있으며, 그래서 유태인들은 성인식을 치르기 전에, 12살이나 13살 정도의 성인식을 치르게 될 텐데요. 그렇게 성인식을 치르기 전에 유태인들 어린이들은 모세 오경을 다 암송하게 된다고 그렇게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의 내용을 다 암송할 뿐만 아니라, 철저하게 잘 지키고 있고, 유대인들은 아침 저녁으로 쉐마라고 하는 이 신명기의 말씀을 암송할 뿐만 아니라, 어머니의 뱃속에 있을 때부터 쉐마를 들으면서 태어나고, 그리고 죽을 때에도 이 구절을 암송하면서 죽는다고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은 이마에 성구함을 매달고 팔목에 성구함을 매달고, 집에는 “메주자”(mezuzah)를 붙이면서 정말 신앙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서, 이들이 전 세계를 지배하는, 세계에 우뚝 서 있는 그런 위대한 민족이 되었다고 하는 그런 영상이었습니다.

하지만 대체로 이런 내용은 거짓 정보이거나, 조그마한 것을 확대 과장한 내용이어서, 별로 믿을 만한 내용은 아닙니다. 먼저 유대인들이 세계적인 두각을 많이 나타내고 있는 것은 사실이고, 그런 사람들 가운데 유태인들이 많이 들어 있기는 하지만, 그 사람들이 모두가 다 신앙적인 교육을 잘 받아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유대인들이 무신론자들도 많이 있고, 신앙이 없는 사람들, 그리고 별 볼 일 없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이 있기 때문에, 신앙이 그들의 성공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 중에는 늘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 중에서도 극히 일부분 극히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그런 위치에 달성했을 뿐이고,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우리와 똑같이 평범하게 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리고 유대인들 중에서도 아주 힘들고 어려운 극빈자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아주 많이 있어서, 유태인들이나 우리나라 사람들이나 별반 다를 게 없는 것이 사실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세계적으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사람들은, 유태인들만 세계적인 두각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의 모든 민족들이 다 두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영국인들도 프랑스인들도 독일인들도 미국인들도 그리고 중국인들도 인도인들도 일본인들도 전 세계 방방 곡곡에서 여러 분야에서 엄청난 두각을 드러내고 있는 것인데, 마치 유대인들만 두각을 나타내는 것이냥 말하고, 그리고 그것이 신앙 교육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과도한 단순화(oversimplification)의 오류에 해당하는 것이고 뿐만 아니라, 일반화(generalization)의 오류에 빠지는 것이어서, 그렇게 말을 하는 것은 별로 우리가 믿을 만한 그런 정보가 될 수가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더 나아가서 유대인들의 신앙 교육이 있다고 하더라도, “유대인들의 신앙 교육이 제대로 된 신 교육인가?”라고 질문을 던진다면,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이 구약 성경을 가지고 있고, 구약성경을 배우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니까, 그래서 우리 크리스천들 사이에는 유태인들에 대한 막연한 호감, 막연한 같은 편 같은 의식들이 우리들 사이에 종종 일어나고 있지만, 그러나 유태인들의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제대로 된 신앙이 아니라, 순 엉터리 신앙입니다.

유대인들이 물론 종교적인 면에서, 열정적인 종교인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아주 극히 일부분의 열정적인 신앙인들이 있는 것이고요. 그리고 아주 철저한 신앙인들이 있기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열정적이고, 그리고 철저한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는 것이 그들이 제대로 된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바리새인들도 얼마나 열정적으로 신앙생활을 했는지 몰라요. 성경 말씀을 철저히 지키려고, 노력을 했지만, 그런 바리새인들의 신앙이 괜찮은 것이었느냐면, 하나님 앞에서 빵점짜리 신앙생활이었던 것뿐이고, 유대인들이 이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이 바른 신앙을 가지고 있느냐 하면 바른 신앙이 아니에요.

구약 성경을 가지고 있지만, 그들이 구약성경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고 있는 거에요. 구약 성경에서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는다고 한다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고, 피를 흘려주셨고, 우리의 소망이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고 하는 사실을 성경에서 발견하지 못한다고 한다면, 그런 구약 성경을 읽는 것은 엉터리일 뿐인 것이고, 이단들도 그런 식으로 열정적으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했던 그야말로 성경의 핵심을 놓쳐버린 그런 불쌍한 영혼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크리스찬들 가운데 종종 유태인들에 대해서 자꾸만 좋은 소리를 하는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들의 신앙을 정말 본받고 싶어서라기보다는, 사실 그 근저에 깔려 있는 동기가 “성공하고 싶다.” “우리도 좀 잘 살아보고 싶다.” “우리도 좀 부자가 되었으면 좋겠고 우리도 좀 재물을 많이 얻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이 세상적인 탐욕이 동기가 되어서, 그러한 유태인들을 바라보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들이 성공했는데, 왜 성공했는가? 신앙을 통해서 성공했다고 한다면, 우리도 한번 그런 식으로 신앙을 이용해서 성공해 볼 수 있지 않을까라고 하는, 그런 동기가 지극히 세속적이고, 지극히 탐욕적인,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닌, 돈을 우상으로 섬기고, 성공을 우상으로 섬기는, 그런 잘못된 동기에서 나온 것일 가능성이 많이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교육을 가리켜서 흔히 쉐마 교육이라고 말하고, 그래서 쉐마 교육을 본받아야 된다고 하는 그런 운동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 한국에서 쉐마 교육을 이야기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쉐마 교육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어요. 쉐마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자신들만의 교육 체계를 가지고서, 이것이 유태인들의 교육이고, 이것이 쉐마 교육이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사실 오늘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쉐마하고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다른 것을 내놓고, 쉐마 교육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을 뿐입니다.

물론 그러한 교육적인 방법들이 잘못됐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배울 점이 있고, 거기에는 우리가 받아들여야 될 수 있는 훌륭한 교육 철학 같은 것들도 들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성경적인 교육이다. 쉐마 교육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목적 자체가 성경적인 가르침과 멀 뿐만 아니라, 유태인들이 신앙 교육을 잘해서 성공한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확인되지 아니한 일반화의 오류, 단순하게 과도한 단순화의 오류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이 어떤 본문이냐면 쉐마라고 알려진 본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본문을 살펴볼 때, 그러한 우리들의 탐욕적인 관점에서 이 성경 말씀을 살펴볼 것이 아니라, 복음적인 관점에서 이 성경 말씀을 살펴보고 배워야 할 것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신명기 6장 4절 말씀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오른쪽에서부터 왼쪽으로 읽어 나가는 글이 히브리어인데요. “쉐마 이스라엘 아도나이 엘로헤이누 아도나이 에하드”라고 하는 말이 신명기 6장 4절입니다. 번역을 하자면, “들으라. 이스라엘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뿐인 하나님이시다.” “하나뿐인 여호와시다”라고 하는 말이 신명기 6장 4절의 말씀입니다.

이 신명기 6장 4절에서부터 9절까지의 말씀이 “들으라” “쉐마”라고 하는 히브리어로 시작한다고 해서, 이 구절을 “쉐마”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오늘 이 본문의 말씀을 우리가 한마디로 요약한다고 하면, 이 본문의 말씀에서 우리를 향해서 알려주시고 있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은 몇 분이시다? 한 분이시다.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다.”라고 하는 것이 쉐마 구절이 가지고 있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이 한 분밖에 없으니, 바로 그 한 분이신 하나님을 우리가 사랑하고, 그 한 분이신 하나님을 예배해야 된다고 하는 내용이 오늘 쉐마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이 세상에 그 어느 것도 우리의 하나님이 아니라고 하는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몇 분이라고요? 한 분이에요. 그렇다고 한다면, 여호와 하나님 외에 다른 그 모든 것들은 하나님입니까? 하나님이 아닙니까? 하나님이 아닌 거죠.

돈이 우리의 하나님이 아니에요. 우리의 자녀가 하나님이 아니에요. 우리들의 목회자가 하나님이 아니에요. 성공이 하나님이 아니고, 정치인이 하나님이 아니고, 사랑이 하나님이 아니고, 행복이 하나님이 아니고, 대학에 들어가는 것이 하나님이 아닌 거예요. 이 세상의 그 모든 것들 이 세상에 좋아 보이는, 그 모든 것들이 우리의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은 한 분뿐이신데, 누구시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우리의 진짜 하나님 참되신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오늘 우리가 반드시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배해야 하는데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한 분뿐이시니까, 그 하나님만을 예배하고 사랑해야 되는 것이고, 그 외의 모든 것들은 우리의 예배의 대상이 될 수가 없고, 우리의 진정한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하는 사실을 이 말씀을 보면서 깨달아야 합니다. 왜 우리는 하나님 한 분만을 예배해야 됩니까? 그것은 참되신 하나님을 예배할 때, 진짜 하나님을 예배할 때 우리의 삶이 복된 삶이 되기 때문입니다. 참되신 하나님이 아닌, 가짜 하나님을 따르게 되면, 결국 우리는 엄청난 피해를 입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러니까, 하나님을 섬기면 부자가 될 수 있고, 성공할 수 있고, 하나님을 섬기면 이 세상에서 떵떵거리며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라고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식으로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복되다고 하는 이야기는 관계적인 의미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우리가 거할 때 만족감을 누리고, 하나님 안에 거할 때 우리가 복된 삶이 될 수 있다고 하는 그런 의미인데요. 그걸 어디에 비유할 수 있냐면, 우리 부모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 자녀들이, 어린 아이들이 부모님의 사랑 안에 머물면 안전하고 행복하고 보호받고, 정말 행복할 수가 있는 거죠. 부모가 모든 것을 다 해주지는 못한다고 할지라도, 그 어느 곳에 있는 것보다 부모님과 함께 하는 것이 행복인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부모님이 아닌 유괴범을 따라가게 되면 어떤 일이 발생합니까? 엄청난 험한 꼴을 당하게 되는 것이죠. 부모님이 아닌 조폭을 따라가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가난한 부모님은 나에게 많은 것을 해줄 수 없지만, 조폭은 많은 것을 해줄 수 있는 것 같아서, 따라가면 괜찮은 것이 아니라, 정말 불행의 길로 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우리에게 엄청난 약속들을 합니다. 돈을 많이 모으면 행복할 것처럼 이야기하고, 성공하면 우리의 인생이 아무 문제가 없을 것처럼 이야기하고, 이 세상의 모든 좋은 것들을 우리가 획득하기만 하면, 그러면 괜찮을 것처럼 우리들을 유혹하면서, 그 탐욕의 길로 가라고 우리을 유혹하고 있는데, 결국은 그 길로 나아가는 것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결국 망하게 되고, 비패하게 되고, 우리가 완전히 털리게 되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고 하는 것이고요. 참된 하나님을 예배할 때, 우리를 정말로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사랑할 때, 그 인생이야말로 복된 인생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것이 신명기 6장 4절에서부터 9절까지 우리를 향해서 가르쳐주시는 말씀 첫 번째 말씀입니다. 참되신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니까, 하나뿐인 하나님이니까, 그 하나님만 사랑하라. 이게 첫 번째 메시지고요. 두 번째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 두 번째 메시지가 뭐냐면, 바로 그 메시지를 1번의 메시지를 자녀들에게 하는 것이 오늘 말씀의 두 번째 메시지입니다. “자녀들에게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라”라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인데요. 왜 우리들은 자녀들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야 할까요?

그것은 똑같은 의미죠. 우리 자녀들도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복된 인생이 될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 부모님은 자녀들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기를 원하는데요. 이 가운데 자녀들에게, 나쁜 거 주기 원하시는 부모님 계십니까? 없잖아요. 가장 좋은 걸 해주고 싶잖아요? 그런데 가장 좋은 게 뭐예요? 돈이 가장 좋은 게 아니고, 좋은 대학 가는 게 가장 좋은 게 아니고, 이 세상에 그 어떤 것을 취득하는 게 가장 좋은 게 아니고, 믿음을 심어주는 게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는 사실을 믿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그런 마음들이 있습니다. 제가 우리 교우들을 심방하면서 기도 제목을 물어보면, 꼭 빠지지 않고 나오는 기도의 제목이 있습니다. “목사님, 우리 자녀들이 예수님을 잘 믿었으면 좋겠어요.” “우리 자녀들이 신앙을 제대로 가졌으면 좋겠어요.”라고 하는 기도의 제목을 이야기하는 것을 보았는데요. 왜냐하면 가장 좋은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복된 것이기 때문에, 그 믿음을 우리 자녀들에게 주고 싶은 마음이 우리 부모님들에게 다 있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들은 자녀들에게 가르칠 수 있을까요? 오늘 성경 말씀은 몇 가지 지혜를 우리들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 방법, 어떻게 하면 우리 자녀들에게 신앙을 물려줄 수 있겠는가? 어떻게 하면 우리 자녀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들 수 있겠는가? 첫 번째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내 자신이 하나님을 믿어야. 신명기 6장 6절 말씀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오늘 내가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어디에 새기고? “마음에 새기고.”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먼저 가르쳐주는 게 뭐냐 하면, 너희 자녀들에게 가르치기 전에, 무엇을 먼저 하라고요? 우리들의 마음에 먼저 새겨라. 이렇게 가르쳐주고 있어요.

우리가 자녀들에게 신앙을 이야기하기 전에, 우리가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알려주기 전에, 우리가 먼저 해야 될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내 마음에 새겨야만 하는 것입니다. 부모가 먼저 하나님을 정말로 사랑하지 않으면서, 자녀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하면, 자녀들이 그 부모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우리 자녀들에게 믿음을 심어주는 것이 왜 실패하곤 합니까? 그것은 부모님들이 말로는 신앙생활을 잘 하라고 이야기를 해요. 하나님을 믿어야 된다고 이야기를 해요.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이야기를 해요. 그런데 그것이, 말로만 그래요. 우리들의 행동에서는 우리 자녀들을 향해서 “하나님이 아니라, 돈이 최고야” “좋은 대학 가는 게, 최고야.” “이 세상에서 다른 사람을 짓밟아버리고, 최고가 되는 게, 그게 너를 행복하게 만들 거야.” 우리의 모든 행동과 우리들의 모든 바디 랭기지(body language)를 통해서, 우리 자녀들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냐면, 하나님은 쓸 데가 없고,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건, “대학 가는 게 중요한 거야.”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돈이 최고야.”라고 하는 이야기들을 우리들의 행동으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우리 자녀들은 눈치가 아주 빨라요. 우리 부모가 무엇을 제일 좋아하는지, 우리 부모가 무엇을 제일 중요하게 여기는지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부모가 이야기를 하면, 부모가 말하기를 “너 교회 가야지.”라고 이야기를 하고, “신앙생활 해야지.”라고 이야기하면, 그것이 나를 향해서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귀한 말씀으로 정말 말해주는 거라고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행동을 유심히 바라보면서, 실제로는 그게 아닌데, “지금 입으로 딴 얘기하고 있구나.”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에요, “너, 교회 가야지.”라고 윽박지르면, 우리 자녀들이 그 부모를 보면서 교회를 가는 게 중요하다고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엄마 아빠에게 제일 소중한 것은, “체면이 제일 중요하구나.” 사람들로부터 창피 안 당하는 것을 제일 소중하게 여기는구나. 아빠가 목사인데, 그래서 목사 자녀가 안 나온다고 하면, 목사 체면이 말이 안 되니까, 그래서 나오라고 하는구나. 아이들이 그것을 보고 있는 거예요.

우리 부모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보고 있는 거에요. 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성공해야 인정받는구나.” “내가 돈을 많이 벌어야 인정받는구나.”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 부모님들이 자녀들에게 알려주고 있기 때문에, 늘 실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 말씀은 무슨 이야기를 하냐면, “너는 하나님의 말씀을 네 마음에 새겨라.” 하나님의 사랑하는 것을 먼저 “우리가 먼저 해라.”라고 말씀하고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들의 마음에 새겨야 되는데, 우리들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돌이 아니고 바위가 아니고 나무가 아니어서, 바위라고 한다면 정을 찍어서 새길 수 있을 것이고, 나무라고 한다면 목각을 해서 새길 수 있겠지만, 우리들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또 잊혀지고, 또 망각해 버리고, 망각의 병을 앓고 있는 것이 우리들의 마음이기 때문에, 어떻게 우리들의 마음에 새길 수가 있겠습니까?

그 순간순간마다 다시 한 번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회개하고, 또 묵상하고 또 묵상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 자신들이 매 순간순간마다 다시 한 번 확인하고, 또 한 번 확인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어떤 방법을 해야 됩니까? 우리 자녀들에게 부지런히 가르쳐야 합니다. 신명기 6장 7절에서부터 9절까지의 말씀에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메어, 기호를 삼으며, 내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내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 유대인들은 이 말씀을 읽으면서 이 말씀대로 하려고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물론 항상 그러는 것이 아니라, 예배드릴 때, 기도할 때 하는 것인데요.

한번 그림을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손목에 메어 기호를 삼고 내 미간에 붙여 표로 삼으라고 하는 그 말씀에 따라서, 유태인들은 테필린(tefillin)이라고 하는 성구함을, 우리 개정 개혁 성경에서는 “경문”이라고 번역을 했는데요. “경문”이라고 번역하면 무슨 뜻인지 아무도 모를 텐데, 아무튼 성구함을 가죽으로 만든, 네모난 성구함에 오늘 읽은 이 신명기의 말씀을 넣어두어서, 그래서 이마에 붙였습니다. 성경 말씀에 그렇게 하라고 하니까.

뿐만 아니라, 팔뚝에도 그렇게 테필린(tefillin)을 메어 달아서, 이 말씀대로 지키려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집 문설주에도 메주자(mezuzah)를 달았습니다. 그림 한번 다시 한 번 보여주면 좋겠는데요. 메주자(mezuzah)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하냐면, 히브리어로 “문설주”라고 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정확한 표현이 아닌데요. 메주자(mezuzah)라고 하는 저 조그마한 나무통 속에, 성경 구절을 적어서 그 안에 넣어놓고 그것을 문에 붙여둔 겁니다. 신명기 6장 9절의 말씀에서, 네 집 문설주에 기록하라고 했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붙여 놓은 것이죠.

제가 미국에 살 때 보면 유태인들이 많이 있었는데요. 그래서 유태인들의 집 앞에 가보면 문에 이런 메주자(mezuzah)들이 많이 붙여져 있는 것을 볼 수가 있고요. 이사 갈 때는 띠어가지 않고 그냥 놔두고 가기 때문에, 그런 것들이 많이 붙여져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유태인들은 이 신명기의 말씀을 아주 잘 지킨 것일까요? 어떤 것일까요? 잘 지켰나요? 잘 지켰다고 생각이 들어서, “유대인들은 이렇게 신앙생활을 잘한다”라고 설명하는 경우가 많이 있지만, 사실은 이거 잘 지킨 거 아닙니다. 성경을 이런 식으로 해석하면 안 되는 겁니다. 신명기 6장 7절에서부터 9절까지에서 우리를 향해서 들려주시는 메시지가 뭐예요? 너는 이마에, 그리고 손목에 문설주에 이런 걸 달고 매달으라고 했으면 그렇게 하면 되는 건가요? 그건 어리석은 성경 읽기죠. 바보 같은 성경 읽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 말씀을 하셨는가를 봐야죠. 무슨 의도로 이 말씀을 하셨는가를 우리가 읽어야죠.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언제 어디서든지, 어떤 상황에 있든지,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지키라고 하는 의미에서 이 말씀을 해주시는 겁니다. 문설주에 달으랬으니까, 문설주에 달면 되는 건가요? 아니요. 이마에 붙이라고 했으니까, 이마에 붙이기만 하면 되는 건가요? 아니요. 그런 식으로 성경을 읽으면 망해요. 엉터리예요.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거예요. 이것은, 유대인들의 행동 방식은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잘 지키는 예로 제시될 것이 아니라, 잘못 지키는 대표적인 방법, 바리새인들처럼 그렇게 엉터리로 신앙생활하는 대표적인 케이스로 제시돼야 될 모습인 것이죠. 마치 군대에서 병사들에게 “식판 가지고 집합”했더니, 식판만 가지고 왔어요. 숟가락은 안 가져오고. 왜 안 가져왔냐 하면 “식판 들고 집합이라고 하셨지 않습니까?” “식판하고 숟가락하고 가지고 집합”이라고 말하지 않았으니까, “식판만 가지고 왔습니다”라고 말하는, 그런 어리석은 모습이, 이런 식의 성경읽기에요.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해주시는 것은 무엇이냐면, 앉았을 때든지, 일어섰을 때든지, 그 어느 곳에든지, 어떠한 상황에 있든지, 모든 케이스에 다 하나님이 우리의 진짜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사실을 가르쳐야 되고, 그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을 우리 자녀들에게 매 순간순간마다 가르쳐야 된다고 하는 것을 가르쳐주시기 위해서 이 말씀을 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들의 삶의 영역 가운데 단 어느 한 점도 우리의 신앙과 연관이 없는 부분이 없습니다. 우리의 삶의 영역 가운데 반경 가운데 1제곱센티미터도 하나님과 관련이 없는 부분이 전혀 없습니다. 우리가 밥을 먹는 것, 잠을 자는 것, 학교를 가는 것, 직장생활을 하는 것, 우리가 친구 관계를 맺고, 부모와의 관계를 맺고, 이웃과의 관계를 맺고, 우리가 행동하는 그 모든 것들이 다 신앙과 관련이 있는 것이고, 그런 모든 분야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을 우리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되는 것이죠.

안타까운 것은 우리 부모님들이 자녀들을 교회 학교에 데려다 놓기만 하면, “전도사님이 알아서 신앙 교육을 해주겠지”라고 오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지 아니하면, 우리는 늘 반성경적이고, 반 신앙적인 세뇌에 시달리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아닌, 이 세상의 것을 사랑하며 살라.” “이 세상의 힘과 권력을 의지하며 살라.” “다른 사람을 짓밟아버리고, 눌러버리고, 내가 성공해야, 그래야 내가 성공할 수 있다.” “내가 행복할 수 있다.”라고 하는 이 세상의 거짓 가르침에 우리가 완전히 노출되어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매 순간순간마다 모든 경우에, 하나님이 사랑이라고 하는, 하나님을 사랑해야 된다고 하는 것을 가르쳐야 하는 것이죠.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잘 따랐느냐? 잘 믿었느냐? 아니오. 그들은 돈의 우상을 섬기고 있는 거에요. 자신들의 이득이라고 하는 탐욕의 우상을 섬기고 있는 거에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해야 되고, 너희들이 나그네 되었던 적을 기억하면서, 내 주변의 이방인들에게 사랑을 베풀라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있는 것이고, 성공과 그리고 이 세상에 그 파워(power)를 위해서, 그런 것들을 추구하며 살아가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그러나 그것은 참된 믿음의 길이 아닌, 죄악의 길을 따라가고 있는 것이고, 참되신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닌, 물질을 우상으로 섬기며, 이 세상의 탐욕을 우상으로 섬기고 있는 잘못된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은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그런 믿음의 결단들이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왜 하나님만을 사랑해야 됩니까? 왜 하나님만을 사랑해야 됩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참되신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그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들을 지극히 사랑하셔서 하나밖에 없는 아들까지도 우리 위해 내어주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하나님에게로 갈 때, 우리는 그 안에서 만족을 누리고 행복을 누리고 복된 인생이 될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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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과 믿음 (요 2:23-25)

혹시 여러분들은 안도현 시인이라고 하는 분을 알고 계십니까? 안도현 시인이라고 하는 분이 쓴 시들은 아주 재미가 있고 재치가 있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깊이 생각하게 만드는 그런 힘이 있어서, 많은 사람이 좋아하는 시인 것 같습니다. 그가 쓴 시 가운데 <너에게 묻는다>라고 하는 시가 있는데요. 그 시 구절 가운데 한 표현이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어쩌면 열정을 잃어버린 이 시대에, 정신이 바짝 들게 할 만한 그런 명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열정이 있는 사람을 보면 참 감동이 됩니다. 열정이 있는 사람을 보면, 많은 사람을 흥분하게 만들고, 뿐만 아니라 생기를 불어넣어 주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우리 사회에 문제가 있다고 한다면, 그러한 뜨거운 열정을 불러일으킬 지도자가 참 없다고 하는 데 있는 것이고요. ‘한번 해보자’고 하는 그런 열정이 있어야 하는데, 안타깝게도 그런 열정이 없이 그냥 되는 대로 아무렇게나 인생을 살아가는 것 같아서 너무나도 아쉬운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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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도쿄 올림픽 때였는데요. 저는 도쿄 올림픽을 보면서 많은 감동을 받곤 했습니다. 특별히 배구 경기를 보면서 많은 감동이 있었는데요. 지난 7월 29일 날 있었던 도미니카 공화국과의 여자 배구 경기는 정말 흥미진진한 경기였습니다. 혹시 보셨습니까? 보셨을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세계 7위의 도미니카공화국을 세계 14위인 우리 한국팀이 싸우는 것은 힘의 겨운 상대였습니다. 5세트 가운데서 3세트를 했는데요. 2대 1로 우리 한국팀이 앞서고 있는 가운데, 네 번째 세트에서는 자꾸만 몰리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9대 15로 점수가 몰리고 있는 그런 상황 가운데 감독이 선수들을 불러 모아서 작전을 지시했습니다. 감독이 작전을 지시하고 난 다음에, 그다음에, 김연경 선수가 그 선수들을 향해서 했던 그 말이 굉장히 유명해졌습니다. 뭐라고 했습니까? 김현경 선수가 이런 말을 했어요. “해보자. 해보자. 해보자. 해보자. 후회 없이 해보자.” 그 말을 듣는 mbc의 황현주 해설가는 울컥하면서 해설을 제대로 이어가지 못했는데요. 왜냐하면 오랫동안 김현경 선수와 선수 생활을 같이 했던 동료로서 그 간절함 그것을 충분히 이해하는 해설가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김현경 선수의 그 열정이, 지는 것 같으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한 번 해보자고 하는 그 말 한마디 한마디가 선수들에게 용기를 주었고, 그리고 그 경기는 극적인 역전승을 이루어 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열정이 없는 것도 문제이지만, 열정이 있기만 하면 다 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열정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게 있습니다. 열정도 중요하지만, 열정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게 있는데 그게 무엇일까요? 열정보다 훨씬 더 귀중한 것, 더 중요한 것. 흔히 하는 말로 “속도보다는 방향”이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빨리 달린다고 하더라도, 달리는 방향이 잘못되었다고 한다면 헛수고뿐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죠. 그런 방향이 잘못되면 아무리 열심히 뛰어가고 있다고 할지라도, 사실은 수고하지 않은 것보다도 더 못한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열정도 정말 중요한 것이지만, 열정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한다면 방향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몇 년 전에 우리나라에서 있었던 어떤 한 이야기인데요. 지방에서 살던 어떤 학생이 대학 입시를 위해서 서울에 있는 한양대학교를 지원한 적이 있습니다. 그 학생은 지방에서 살면서 한양대학교에 지원하였고, 그리고 아마 면접 고사인지 무슨 고사인지 그 학교에 직접 가서 면접이든 무슨 고시를 봐야만 했던 그런 상황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학생은 아침 일찍 일어나서 KTX를 타고 서울역에 내려서, 이제는 한양대를 가기 위해서 지하철로 갈아타기 위해서 지하철로 내려갔습니다. 근데 마침 4호선 기차가 들어오는 것을 봤습니다. 빨리 물어보니까 그 기차가 <한대앞>으로 간다고 하는 것을 알게 되었고, 놓치지 않고 그 기차를 빨리 얻어 탔습니다. 그래서 이제 이 기차를 타면 한양대를 가겠지 하고, 그래 가만히 있는데, 가는 방향이 이상한 겁니다. 건너가지 않아야 될 한강 다리를 건너가는 겁니다. 자꾸만 이상한 방향으로 가더니, 결국 알고 보니까 자기가 가서 시험을 쳐야 될, 면접을 봐야 될 서울 캠퍼스 한양대학교로 가는 것이 아니라, 저 안산에 있는 안산 캠퍼스의 한양대학교로 가는 그 한대앞, 여기 안산 캠퍼스의 앞에 있는 한대역이었던 것이죠. 다행스러운 것은 그 학생이 그 한대역 앞에 내려서 경찰의 도움을 받아 다시 정확하게 시험장으로 들어갔다고 하는 훈훈한 기사를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무리 속도를 빨리빨리 한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가는 방향이 잘못되었다고 한다면 다 소용이 없는 것이죠. 열정을 가지고 나아가고 있는데, 정말 빨리 달려가고 있는데, 그 열정의 방향이 잘못되었다고 한다면, 차라리 열정을 내지 않았던 것이 훨씬 더 나을 뻔한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열정이 없는 사회이기 때문에 열정만 있으면 좋겠다고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요. 그런데 열정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방향인데, 열정만 있어서 괜찮지 않았던 예를, 우리는 역사상 많이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파멸로 이끈 열정의 예를 어디서 찾아볼 수 있을까요? 그것은 그 옛날 전 세계를 파멸로 이끌었던 제2차 세계대전의 히틀러에게서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히틀러는 대단한 그런 웅변가였습니다. 히틀러는 수많은 사람 앞에서 Mein Kampf를 이야기하며, 그러면서 사람들에게 열정을 이끌어 내고, 수많은 사람을 다 열광하게 만드는 그런 엄청난 웅변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이 히틀러를 따라가며, 열정을 다했는데 그가 이끈 길이 바른 길이 아니라, 전 세계를 파멸로 이끄는 그런 악한 결과로 가져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차라리 그런 열정이 없었더라면, 더 나을 뻔한 열정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요한복음의 말씀을 읽었는데요.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유월절 날 예루살렘에 가셨다가, 거기서 수많은 기적을 베푼 것에 대해서 아주 간략하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엄청난 기적들을 많이 행하게 되었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주변으로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당연하죠. 기적이 일어나니까, 그 기적을 보고 많은 사람이 놀랐고, 그래서 예수님 주변으로 몰려들면서, 예수님을 믿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모두가 다 달려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겠다고 결심한 것만 보면, 이것은 그런대로 좋은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기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함에도 불구하고,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고 전혀 들어보려고 하지 않는 그런 악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심지어 죽이려고 하는 관리들도 있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 사람들과 비교한다면, 이 예수님을 믿겠다고 달려든 사람들은 그나마 좋은 사람들이고, 그 사람들은 정말 좋은 반응을 보였다고 이야기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이상한 내용이 하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 주 면으로 몰려드는 그 사람들을 보시면서, 보여준 예수님의 반응입니다. 그 반응이 요한복음 2장 24절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는데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의탁이라고 하는 말이 무슨 말인가요? 의탁이라고 하는 말은 ‘의지한다’ 또는 ‘기대다’ 혹은 ‘의뢰하고 부탁한다’라고 하는 그런 의미가 들어 있는 단어가 의탁한다고 하는 말인데요. 예수님께서 자신의 몸을 그들에게 즉 예수님을 믿으려고 오는 사람들에게 맡기지 않으셨다는 겁니다. 의탁하지 않으셨다고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헬라어 원문을 보니까, 의탁한다고 하는 말로 번역이 되어 있는데, 그렇게 번역한 원문의 의미 헬러의 의미를 살펴보니까, 그 단어는 놀랍게도 ‘믿는다’라고 하는 단어였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의미냐면, 모든 사람들이 지금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예수님을 믿으려고 막 몰려들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들을 믿지 않으셨다고 설명하고 있는 겁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예수님 믿고 싶습니다. 예수님을 믿겠다고 몰려드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정작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너희들 못 믿는다’라는 반응을 보여주신 겁니다. 어쩌면 영화 속의 한 대사로 말하자면, ‘너희들 날 믿어? 난 널 못 믿겠어’라고 하는 반응을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것이죠.

이러한 반응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믿겠다고 몰려든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이런 반응이 아니라 ‘그래 고맙다.’ ‘잘 와라. 나에게로 와라.’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해 주셔야 그게 가장 자연스러운 반응 같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에 오는 성도님들을 보면서 너무나도 감사해요. 너무나도 너무나도 좋아요. 왜냐하면 말씀을 듣겠다고 오는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지 몰라요. 새로운 교인이 오면, 그렇게 고맙고 감사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듣겠다고 오는 것이니까, 너무나도 감사한 것이고 기쁜 것인데, 그러한 반응을 예수님께서 보여주셔야 하는데, 놀랍게도 예수님은. 예수님의 반응은 그들이 믿겠다고 몰려들고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마치 한 걸음 뒤로 물러서시면서, ‘나는 너희들을 믿을 수 없다’라고 말씀해 주시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런 식의 반응을 보여주시는 걸까요? 그것은 24절의 말씀 가운데 분명하게 그 이유를 설명해 주고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마음을 꽤 뚫어 보고 익히 마셨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나아오고는 있는데, 왜 그들이 예수님에게로 나아오는가? 그들의 마음을 간파하고 계세요. 그들의 생각을 알고 계셔요. ‘저 사람들이 왜 나에게 오는가’를 주님께서 정확하게 알고 계셨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나오고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믿지도 않으셨고, 그들에게 자신을 의탁하지도 않으셨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반응이 이것이 처음이 아닌, 한 번만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일관적으로 보여주신 모습입니다. 예를 들어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풀었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그 자리에서, 그 사람들이 모두 다 배를 골고 있는 사실을 너무나도 안타깝게 생각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을 무엇인가를 먹여야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먹일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수소문했더니 보리떡 5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것을 가져다가 주님께서 하나님께 축사하고, 그리고 이것을 나누어주기 시작했는데, 거기서부터 놀라운 기적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떡을 떼면 떡이 또 생기고 또 생기고 하면서, 생선을 떼면 생선이 더 생기고 해서, 그저 한 사람이 먹을 분량의 도시락으로 5천 명이 넘는 수많은 사람들을 한꺼번에 먹이는 엄청난 기적의 역사가 일어나게 된 겁니다.

그런 일을 바라보고 있는 유대인들의 마음 가운데는 흥분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에게서 다른 모습을 보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자기들은 어떤 상황 가운데서 살았습니까? 로마 정부가 압제하는 상황 가운데서 살았습니다. 그들의 지도자, 그들의 통치자는 그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과도한 세금을 매겨서 그 세금을 약탈해 가는 그런 포악한 군주와 같은, 그 군주 밑에서 억압을 당하면서 살아왔는데,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뺏어가는 예수님이 아니라, 빵을 먹여주시는 예수님,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먹을 것을 베풀어주시는 그 예수님을 보면서 이들의 눈이 뒤집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예수님이 우리의 왕이라고 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저 로마 총독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들의 왕이라고 한다면, 우리들에게 사랑을 베풀어주지 않겠는가? 우리들을 잘 먹여주지 않겠는가? 새로운 지도자로서 이 예수님을 생각하게 된 겁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주변으로 모여들면서 혁명을 꿈꾸었습니다. ‘주님, 말씀만 하시옵소서. 우리가 주님과 함께 혁명을 일으키고 싶습니다. 이 정권을 뒤집어엎어버리고, 민중들을 억압하는 이 정권을 엎어버리고, 주님 주님께서 다스리는 나라를 만들어보고 싶습니다.’ 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들을 바라보시면서 고마워하거나 ‘그래, 함께 좋은 세상 만들어보자’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놀랍게도 예수님께서는 차가운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6장 26절에 예수님의 대답이 기록돼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지금 유대인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열광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예수님을 보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그런 영적인 모습을 생각하면서 열광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왕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잘 살 수 있겠구나’ ‘돈을 많이 벌겠구나’ ‘권력을 누릴 수가 있겠구나’ ‘이 세상에 문제가 해결될 수 있겠구나.’ 이 세상 현세적인 것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어서 예수님을 따르고 있다고 하는 것이죠.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바라보시면서 ‘너희가 저 표적을 보지 못했다.’ 예수님께서 이 떡을 통해서 보여주시고자 하는 하늘의 표적이 있는 것인데, 그 하늘의 표적은 보지 못하고, 이 선물에만 눈이 가려져 있는 이스라엘 민족을 보면서, 이런 말씀을 해 주신 것입니다.

요즘 대통령 선거가 한창입니다. 아직 대통령 선거는 아니고 대통령 선거를 위한 후보 선출의 과정을 한창 진행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전라북도에서 예비선거를 해서 발표한다고 하는데, 오늘 저녁 때는 어떻게 결과가 나올지 굉장히 궁금합니다. 그런데 그런 대통령 후보들로 나서게 되면, 수많은 지지자들이 대통령 후보자들 주변으로 몰려들기 시작합니다. 왜 몰려들까요? 그들은 어떤 마음을 가지고 대통령 후보자들에게로 그렇게 열정적으로 몰려드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그 가운데 많은 사람들의 생각 가운데 이런 마음이 있었을 겁니다. 만일 내가 지지하는 저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그 정권 아래서 내가 많은 이득을 얻을 수 있을 거라고 하는 관심 때문입니다. 아마도 대통령 후보로 나서는 사람은 선한 목적을 가지고 있을는지도 모릅니다. 내가 대통령이 되어서 좋은 나라를 만들어보고 싶고, 내가 대통령이 되어서 좀 더 살기 좋은 세상, 사람이 대접받는 세상, 공평한 세상, 정의로운 세상, 불로소득이 없는 그런 세상을 만들어보고자 하는 정의로운 개념을 가지고 대통령 선거에 나갈 겁니다. 하지만 그 대통령 후보자 앞으로 몰려들어 사람들은 누가 몰려드냐 하면, 탐욕으로 가득한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이죠.

저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저 사람을 도와주면, 내가 한 자리를 할 수 있겠다고 하는 꿈을 가지고 내가 그 정권 밑에서 무엇인가 얻을 게 있다고 하는 탐욕으로 몰려드는 것이기 때문에, 어쩌면 우리 사회에서 자꾸만 반복되는 악순환은 바로 거기에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보수 정권이든 진보 정권이든, 어떤 대통령이 당선이 돼도, 늘 실패로 귀결되는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좋은 대통령인 줄 알고 뽑았는데, 늘 실패하는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그 주변에 몰려드는 자들은 표를 이용하여 권력을 잡고, 권력을 잡으면 그걸 통해서 얻어먹을 떡고물에 관심 있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후보들은 표를 얻기 위해서 그런 사람들의 도움도 절실하게 필요해서 잡는 거죠. 조폭들이 도와준다고 해도, 범죄 집단들이 좋은 모습을 하고 도와준다고 해도, 표를 준다고 한다면, 거기에 끌릴 수밖에 없는 것이 후보자들의 약점들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한 표가 아까운 정치인들처럼 그들이 몰려드니까 그들이 무조건 좋다고 받아들이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믿지 않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목적이 주님을 진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주님에게서 받아먹을 수 있는 떡고물에 더 관심이 있는 것이고, 그걸 통해서 내가 행복해지고 그걸 통해서 내가 무엇인가를 얻으려고 하는 선물에만 관심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우리들의 영원한 최악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 버려서 그래서 우리들의 삶이 고통 가운데 있는데, 그러한 그 끊어진 관계를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해 주님께서 오셨고, 그렇게 하나님과의 생생한 관계를 회복시키는 결과로, 병이 낫기도 하고 또한 배고픔이 해결되기도 하고, 갈증이 해결되기도 하는데, 사람들은 주님과의 관계 회복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고, 그저 병이 낫는 것, 이 세상에서 배부른 것, 이 세상에 썩어질 것들이 우상이 되어 그것을 해결하는 데, 유용한 하나님만 바라보고 열정을 내고 있는 것이죠. 이들이 믿는 것은, 예수님들에게 몰려든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예수님을 정말로 제대로 바라보았기 때문에, 예수님께로 몰려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생각하는 우상으로 예수님을 생각하고, 그 주위로 몰려드는 겁니다.

예수님이 누군가? 예수님이 나의 배를 배불리 해 줄 그런 사람이다. 예수님이 누군가? 나에게 권력을 줄 수 있는 사람이다. 이 세상의 것들을 얻게 해 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하는, 그러한 내 나름대로의 생각을 가지고, 예수님에게 씌우고, 그런 예수님이 되어줄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열광을 하다가, 예수님께서 그런 요구에 응답해 주지 않는 것 같으면 이내 실망해버리고 돌아서는 것이죠. 주님께서 내 문제를 해결해 줄 줄 알았는데, 해결해 주지 않는 것 같으니까, 주님께 배반하고 돌아서 버린 것이죠.

이런 현상이 모든 사람들에게서 나타나고 있는데요. 세례 요한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가 잘하는 것처럼,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소개한 사람이었습니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 나보다 더 능력이 많으시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향해서 소개했는데, 그 세례 요한이 감옥 속에 있는 동안에 의심의 마음이 마음속에 솟아오르는 겁니다. 예수님이 왔다고 한다면, 메시아라고 한다면, 이 로마 정부를 끝장 내야 되지 않는가? 저 악의 무리들을 다 물리쳐야 되지 않는가? 이스라엘 민족을 독립시키고, 억울하게 이 감옥에 갇혀 있는 나는 끄집어 내주어야 그게 진짜 메시아일 텐데? 그런데 예수님이 와도 세례 요한은 여전히 감옥 속에 있는 겁니다. 로마 정부는 그대로 힘을 발휘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 문제들을 도무지 해결하지 않는 그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세례 요한은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제자들을 보내서 물어봅니다. ‘예수님, 우리가 기다리던 메시아가 당신 맞습니까? 아니면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합니까?’ 지금 당장 무찔러 줘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가져올 것을 기대하는데, 자신의 기대와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이고, 그리고 고난의 길을 가고 있는, 그 예수님을 보면서 도대체 예수님이 내가 기다리던 예수님이 맞는지 의심을 하게 되는 상황에 이르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이건 베드로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제는 고난을 당하고, 죽임을 당할 것이며, 그리고 3일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시니까, 베드로가 그 말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겁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꾸짖었습니다. 우리 성경 말씀에 잘 그런 꾸짖었다고 하는 내용이 제대로 잘 번역이 된 것 같지 않은데요. 그 예수님을, 이 베드로는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꾸짖는 겁니다. ‘그리하지 마십시오. 결단코 그런 일이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는 건, 전혀 생각하지 못하는 거예요. 내 만족을 위한, 내 문제를 해결해 줄, 그런 능력의 주님을 기대하고 있는데, 주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가시겠다고 하니까 이해를 하지 못하는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단순히 우리들의 질병만을 고치기 위해서, 우리들에게 잘 먹고 잘 살게 만들기 위해서만,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만일 우리가 황달에 걸린다고 한다면, 황달이 걸리게 되면, 얼굴이 노래지게 되는데요. 그런 노래지는 얼굴을 바라보면서,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사람들이 찾는 것은 무엇입니까? 화장품 가게에 가는 것이죠. 그리고 좋은 화장품 구해서 화장하면, 내 얼굴이 괜찮아지겠지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러한 나에게 더 좋은 화장품을 주어서 내 얼굴을 깨끗하게 만들어줄 그럴 메시아를 기대하고 있는 것인데, 예수님께서 그런 화장품을 안 주시는 겁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너희들의 간이 문제다’ ‘너희들의 췌장이 문제다’ 그리고 ‘그것을 고쳐야 된다’라고 하시면서, 수슬 칼을 우리들을 향해서 들이미시는 겁니다.

우리의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근본적인 고통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돈이 없는 게 문제가 아니에요. 그것은 우리가 다른 잘못된 사람을 만나서가 아니에요. 이 세상에 우리가 권력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모든 문제의 근원이 우리의 깊은 죄의 문제인 것이고, 하나님과의 거리가 멀어진 것이고, 하나님에게서부터 단절된 것이 문제인 것인데, 주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에게로 회복시켜주시고,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셔서, 그래서 우리가 다시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 가운데, 천국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인데요. 안타깝게도 우리들은 주님에게 나아가서 ‘주님, 다른 거 필요 없어요. 그냥 돈만 주고 가세요. 주님, 다른 거 필요 없어요. 그냥 병만 낫게 해 주고 그냥 내 삶에서는 손 떼세요.’ 마치 무엇과 같으냐 하면, 의사 선생님에게 찾아가서, 지금 내가 황달인데 의사 선생님에게 찾아가서, ‘선생님, 수술 같은 거 필요 없고, 그냥 좋은 화장품이나 하나 소개해 주세요.’라고 말하는 어리석음과 같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은 하나님에게서부터 몇 가지 좋은 이득만을 받아내는 것이, 그게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그러한 것을 바라보면서 열광하는 것이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 속으로 들어가게 될 때, 힘들고 어려운 고통의 상황 가운데서도, 기쁨을 누리고, 힘과 용기를 받는 것이죠.

마치 결혼의 관계와 같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데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서 결혼하는 것은, 그것은 단순히 결혼해서 편안히 잘 살고, 그리고 재정적인 안정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두 사람이 살아가면서 아주 힘들고 어려운 상태를 만나게 될 겁니다. 재정적으로 정말 힘든 상황을 만나게 될 겁니다. 그런 상황 가운데서 남편과 아내가 서로가 힘을 모으고, 서로 위로하면서 다른 것 다 없어져도 괜찮고, 당신만이 있기 때문에 너무나도 행복하다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이 참된 사랑의 관계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사랑의 관계를 생각지 않고, 그저 상대 배우자가 괜찮은 집안인지, 상대 배우자가 그런 데로 돈 많은 집안인지, 그런 것만 따진다고 해 한다면, 그것은 제대로 된 결혼일 수가 없는 것처럼, 믿음은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정말 하나님을 사랑해서 하나님과의 깊은 교재의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하나님과 동행해 나갈 때는, 그 길이 항상 좋고 행복한 일들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가는 한이 있더라도,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신다고 하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힘과 용기를 얻는 것이고, 주님께서 나의 목자가 되어 주시기 때문에, 새 힘과 용기를 얻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수많은 크리스천이라고 하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열광하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데, 그런데 과연 그 신앙의 대상이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다시 한번 반성해봐야 합니다. 때로는 기독교 신앙이라고 하는 것이, 어떤 정치적인 권력을 얻는 것이 목적이 되어버린, 그런 잘못된 신앙이 진짜 신앙인 줄 알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고, 잘못된 방향, 잘못된 목적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 그게 진짜 기독교 신앙인 양 우리를 속이고 있는 경우들이 너무나도 많이 있는데, 오늘 우리가 이 본문의 말씀을 보면서, 주님께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을 때, 그들을 다 믿었던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시고 믿지 아니하셨을 뿐만 아니라,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던 그 말씀들을, 우리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 새기면서, 주님과의 참된 믿음의 교제 속으로, 나를 위하여 피를 흘려주시고 십자가를 지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와 함께하시는 그 주님과의 깊은 교제의 관계 속으로 들어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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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를 경외하는 것 (잠 1:1-19)

잠 1:20-33 지혜의 외침

할렐루야!

지혜의 책이라고 하는 잠언서의 말씀을 수요일 날마다 살펴볼 수 있게 돼서 너무나도 기쁘고 감사합니다. 이 잠언이라고 하는 이 책은 솔로몬의 잠언이라고 밝히고 있는데요. 다윗의 아들인 솔로몬이 지은 잠언이라고 밝히고 있는데, 잠언서에 기록된 모든 내용이 솔로몬의 독특한 창작물일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여러 가지 훌륭한 잠언들, 지혜의 말씀들 모으기도 하고, 또한 창작하기도 하고 해서 잠언 지혜의 말씀들을 한꺼번에 모아놓은 책이 바로 이 잠언의 말씀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솔로몬이 이 잠언서를 집대성하여서 기록하였는데, 솔로몬이 이렇게 잠언서를 기록한 목적이 2절에서부터 4절 말씀까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지혜와 훈계를 알게 하며 명철의 말씀을 깨닫게 하며 지혜롭게 공의롭게 정의롭게 정직하게 행할 일에 대하여 훈계를 받게 하며 어리석은 자로 슬기롭게 하며 젊은 자에게 지식과 근신을 주기 위한 것이니라”고 잠언서를 기록하고 있는 목적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그 목적을 요약한다고 하면 어떤 목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지혜를 깨닫게 해 주기 위한 목적으로 잠언서를 기록했다’ 이 말입니다. 지금 여러 가지 말들을 하고 있지만 2, 3, 4절의 목적을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지만, 그 장황한 설명을 한마디로 아주 간단하게 요약하라고 하면, ‘읽는 이로 하여금 지혜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이 잠언서를 기록했다’고 이렇게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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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렇게 잠언서를 기록한 목적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 그 표현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아주 특이합니다. 왜냐하면 그냥 단순히 지혜라고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지혜라고 하는 말, 무엇이 지혜인가, 지혜를 깨닫게 할 것인데, 과연 무엇이 지혜인가에 대해서 여러 가지 단어를 사용해서 다양한 각도에서 설명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좀 번역이 매끄럽지 않아서 제가 좀 원문에 가깝게 다시 한 번 설명해 보았습니다.

“이는 지혜와 훈계를 알게 하며, 통찰력 있는 말씀을 깨닫게 하며, 지혜로이 다루는 법을, 공의, 의롭게 행하는 법을, 정의롭게 행하는 법, 공정하게 행하는 법, 행하는 일에 대해서 훈계를 받게 하며, 단순한 자로 하여금 신중하게 하며, 젊은 자에게 지식과 분별력을 주기 위한 것이니, 지혜 있는 자는 듣고 지식이 더할 것이오. 깨닫는 자는 배움이 증가할 것이니라.”라고 보는 것이 좋습니다. 글씨를 한번 보시고 성경책 속에다가 좀 적어놓으실 수 있으면, 적어놓으시면 좋을 것 같아요. 특별히 4절 말씀에 ‘젊은 자에게 지식과 근신을 주기 위한 것’이라고 번역을 해 놓았는데 근신이라고 하는 말보다는 ‘분별력을 주기 위한 것이다’라고 하는 것이 원문의 더 가까운 것 같고요. ‘어리석은 자를 슬기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하게 생각하는 자들에게 신중하게 생각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기 위한’ 그런 말씀이고 또 ‘정직하게 행하라’고 그렇게 표현 2절에서 표현하고 있는데, 사실은 이 원문의 의미가 정직하게의 의미보다는 공정함, 공정하게 일을 다루는 그 법에 대해서 훈계를 받게 하려고 하는 그런 목적이 있다고 설명해 주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이 지혜가 무엇인가? 이 통찰의 말씀, 지혜롭게 다루는 법, 의롭고, 정의롭고, 그리고 공정하게 행하도록 하는 것, 그리고 신중하게 행하고, 분별력 있게 행하는 것, 이런 것들이 전부 지혜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지혜가 무엇인가? 지혜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약삭 빠른 것을 가리켜서 지혜라고 하지 않습니다. 성경에 보면 아주 약삭 빠른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특별히 예수님의 비유에 보면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가 나오는데요. 이 불의한 청지기는 자신이 해고를 당한다고 하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약삭 빠르게 행동을 해서 그래서 자기가 해고된 이후의 삶을 준비하는 정말 그 약삭 빠름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래서 그 주인이 감탄하게 되었는데 그렇게 청지기가 약삭 빠르게 행동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일까요? 물론 지혜로운 모습일 수는 있겠지만, 그러나 잠언에서 보여주고 있는 말씀이 무엇이냐면, 그게 지혜가 아니라는 거예요. 지혜가 무엇인가? 그냥 약삭 빠른 것, 그것이 지혜가 아니라, 정의롭게 행하는 게 지혜고, 공정하게 행하는 게 지혜고, 정의롭게 행하는 게 지혜인 것이지, 이익만을 위해서 약삭 빠르게, 내 얄팍한 그 이득을 위해서 움직이는 것이 그게 지혜가 아니라고 처음부터 가르쳐주고 고 있다고 하는 점에 우리가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참된 지혜는 무엇인가? 정의롭게 행하는 것, 의롭게 행하는 것, 공정하게 행하는 그 모든 것들이 지혜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이러한 점이 바로 이 세상의 지혜와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지혜는 무엇인가요? 이 세상에서의 지혜, 이 세상에서의 지혜는 빨리 빨리 잘 민첩하게 행동해서 그래서 손해를 전혀 안 보는 게 지혜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걸 참 잘한다고 그래요. 그 어느 한 글을 보았는데 비행기 승무원들이 제일 선호하는 노선이 있다고 합니다. 그 비행기 승무원들이 전 세계 노선 중에서 어느 노선을 제일 좋아하냐면, 한국으로 가는 노선을 제일 좋아한대요. 왜? 식사 시간이 되면 안내 방송을 하지도 않았는데 벌써 한국 사람들은 다 의자 똑바로 해놓고, 테이블 펴놓고, 다 미리 다 준비하고 있는 거에요. 승무원이 와서 ‘지금 식사할 시간이 됐으니까 준비하십시오.’ 이렇게 안내를 안 해도 이미 다 펼쳐놓고 딱 자리에 가만히 있고, 그리고 와서 ‘오늘 메뉴는 이것도 있고 a 메뉴 가 있고 b 메뉴가 있고 c 메뉴가 있는데 어느 것을 선택하겠습니까?’ 이렇게 물어봐서 대답을 들어야 될 텐데, 우리 한국 사람들은 벌써 메뉴를 다 마음속에 결정하고 있어 가지고, (승무원이) 오면 무슨 메뉴 달라고 다 얘기하고, 아주 빨리 빨리, 우리나라 해외 그 저기 전화번호가 그 국가 식별 번호가 82거든요. 미국에서 한국에 전화 걸려면, +82-10 뭐 이렇게 해서 전화를 걸어야, 우리한테 전화가 되어요. 국가 식별 번호로 82라고 하는 그 번호를 가진 우리나라, 민족은 빨리빨리, 시키지도 않아도 미리미리 줄 다 서 있고, 비행기에 탑승하기 위해서 줄을, 이제 체크인하고 이렇게 들어가야 되는데, 뭐 이야기도 하기 전에 벌써 줄 쫙 서 있는 겁니다. 줄 쫙 서 있고, 이미 여권 다 꺼내놓고, 다 꺼내놓고 다 정확하게 준비를 다 해가지고, 순식간에 입장 완료. 아주 간단하게. 왜 이렇게 그렇게 빨리하는 인생이 됐는가? 늦으면 못 먹거든요. 우리의 인생에 우리의 삶 가운데 조금만 늦어버리면 내가 찾아먹을 것을 찾아먹을 수 없고, 군대에서 휴가를 조금만 늦게 가면, 내가 찾아 먹을 군대 휴가 못 찾아먹고, 그러기 때문에 빨리빨리 해서, 내 것을 손해 보지 않기 위한 거기에 너무나도 익숙해져 있는 모습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생각 가운데 누가 지혜로운 사람인가? 빨리빨리, 눈치 빠르게, 자신의 취할 것을 재빠르게 취해서, 손해 보지 않고 약삭 빠르게 행동하는 것이 그게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하는 그런 생각들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있습니다.

이 세상의 관점은 무엇인가? 꿩 잡는 게 매라고 하는 말이 있듯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공할 수만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이 정의가 되는 것입니다. 도대체 그 사람이 돈을 버는 과정 가운데서 어떤 방법으로 돈을 벌었는지, 저 사람이 성공하는데 무슨 방법을 사용해서 성공하게 되었는지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스포츠 선수가 어떤 일을 하는 데 있어서 경기를 하는데 있어, 그 사람이 정말 페어플레이를 했느냐? 하지 않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결과로서 이야기하는 시대가 되어 버린 것이죠. 그래서 우리들에게 있어서 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하게 느껴지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방법은 어떤 방법을 쓰든지 간에 돈 많이 벌고 성공하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인정하는 그런 삶을 살 수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이 지혜로운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는 경향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세상의 길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들에게 잠시 잠깐의 성공을 향해서 가게 만들고 우리로 하여금 잠시 잠깐의 만족을 주는 것이지만 결국 이 세상의 길은 우리로 하여금 망하는 길이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참된 지혜가 무엇인가? 오늘 말씀은, 그게 아니라 가장 빨리 가장 잘 성공하는 그것이 지혜로운 것이 아니라, 의를 행하고 정의롭게 행하고 공정하게 행하는 것이, 그것이 지혜로운 것이라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오늘 7절 말씀에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데요. 다시 말하자면 어떤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인가? 어떤 사람이 지식이 있는 사람인가라고 하는 것을 물어봤을 때, 오늘 본문의 말씀은 무슨 이야기를 하냐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가 그 사람이 바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오. 지식이 거기서부터 시작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질문을 던져봐야 될 텐데요. 도대체 경외한다고 하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경외한다.’ 경외가 뭐죠? 우리가 평상시 생활하면서 경외라고 하는 말을 써본 적이 있습니까? 별로 안 써보는 단어예요. 그래서 경외라고 하는 말을 알지도 못하고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고, 그냥 교회 내에서 이해도 못한 채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경외라고 하는 말의 뜻이 무엇이냐면,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두려워하는 것, 그러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주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지식의 시작이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영어에서는 아주 간단한 아주 누구나 초등학생도 이해할 수 있는 단어인 fear를 써서 번역을 했어요. 한국말 성경은 어른들도 잘 이해 못하는 경외라고 하는 말을 써서 번역을 해놨어요. 그러니까 성경을 읽어도 이게 무슨 뜻인지 모르고 도대체 경외하는 게 뭔가 하고 오해합니다. ‘이게 뭐지? 경외가 뭐지? 그냥 경외하자고 하자.’ 그러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데, 여호와를 경외한다고 하는 말이 무엇이냐하면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좀 성경을 좀 쉽게 번역했으면 좋겠다고 하는 것이 참 소망인데요.

무엇이 지식의 시작인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지식의 시작이라는 겁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것을 알고, 그리고 그 하나님이 무서운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을 아는 것이 그게 지식의 시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참된 지식이 시작된다고 하는 것인데, 하나님이 두렵기 때문에 우리는 행동을 어떻게 하게 됩니까? 하나님의 뜻을 어기면서 악을 행하면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두렵기 때문에 무서운 그 마음 가운데 죄악을 저지르지 않는 것이죠. 지금 잠깐 동안 악을 행하면 쾌락이 있을 수가 있겠고, 지금 잠깐 동안 눈 깜짝하고 속이면 그러면 행복이 있을 것처럼 보이고 내가 많은 물질을 얻을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우리들에게 허용이 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무서운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런 일들을 할 수가 없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무섭기 때문에 두렵기 때문에, 그 진노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해 본다고 하는 한다면 악한 일을 행할 수가 없는 것이고, 나쁜 길로 갈 수가 없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이 무서운 줄 아느냐? 하나님이 두려운 존재라고 하는 것을 아느냐 모르느냐가 사람의 그 길을 완전히 바꾸어 는 겁니다.

하나님이 두려운 줄 알면 죄악을 행하다가도 못 하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이 두려운 줄 모르면 계속해서 악을 저지르는 거죠. 우리가 주의 일을 하면서도 악을 행할 때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나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내 마음까지 사람들이 나를 보지 않기 때문에, 내가 악을 행하는 그런 일들을 하고 있는데, 그 악을 행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면 하나님이 나를 보지 않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이 안 계시구나.’ 하나님이 나에 대해서 전혀 쳐다보지도 아니하시고 그냥 이 세상에는 사람들만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악을 계속 행하게 되는 것이죠. 하지만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안다면 그리고 그 하나님이 무서운 하나님이요. 두려운 존재라고 하는 사실을 안다고 한다면 내가 악을 행하다가도. 어떻게 해야 돼요? 멈춰야죠! 내가 어떤 사람을 미워하다가도, 어떻게 해야 돼요? 멈춰야죠! 하나님이 무서우니까. 내가, 나 혼자만을 위에서, 나만을 위해서 살다가도 그것을 중단해야죠. 사랑을 베풀며 살아야죠. 왜 하나님이 무섭기 때문에, 두렵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두려운 것을 안다고 한다면 우리는 죄악의 길로 갈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기도 하고 하나님을 전하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리고 신앙생활을 하는 그런 성도라고 할지라도, 안타깝게도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항상 잊어버리고 삽니다. 하나님이 불꽃 같은 눈으로 바라보고 계시고 이 모든 것들을 심판하신다고 하는 그 사실을 다 망각해 버리고, 그냥 내가 편한 대로 악을 행하면서 살아갈 때가 많이 있는데, 지식의 근본이 무엇인가? 지식의 시작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두려운 줄을 아는 것이 그것이 참된 지식의 시작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말의 반대말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지식의 시작이라고 한다면 그 반대말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어리석음의 극지겠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가, 왜 두려워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계시다고 생각하면 두려워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죠. 그런데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유일한 이유가 있다고 하면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안 계시다고 생각하게 되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시편 14편 1절 말씀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14편 1편은 시편 53편 1절과 내용이 거의 비슷한데요. 가로 친 것은 53편의 표현이고 가로 밖에 있는 것은 10편 14편의 표현이에요.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악을 행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고, 하나님이 두렵지 않기 때문에 악을 행한다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욥기 28장 28절 말씀에서 이렇게 기록합니다. “또 사람에게 말씀하셨도다. 보라 주를 경외함이 주를 두려워함이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리니라.” 다시 말하자면 악을 떠남이 지혜고 명철이니까, 악으로 악을 행하는 것이 어리석음이고, 하나님에게서부터 떠나는 것이 어리석음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여기 앉아 계신 분들은 모두가 다 지혜로우신 분들인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계시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심판하시는 그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 떨 수 있는 그런 성도들이라고 하는 사실을 알고 감사드립니다.

물론 하나님은 두려움만의 대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두려워만 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은 또 사랑과 은혜와 인자하시고,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이에요. 누구에게?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의를 행하는 자들에게, 주의 길 가운데 걸어가는 자들에게는 사랑을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인 거죠.

그런데 그 사랑의 하나님이 언제 무서움의 대상이 됩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길에서부터 벗어나서 죄악의 길을 가게 될 때 두렵고 무서운 분이 되는 것이고, 우리가 순종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주님의 뜻대로 살게 되면 하나님이 두려운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고 아버지와 같은 하나님이 되신다고 하는 것인데요. 원하기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으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순종하는 가운데 아버지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으로 느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8절 9절 말씀에서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내 아들아, 내 아버지의 훈계를 들으며, 내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 이는 내 머리에 아름다운 관이오. 내 목에 금 사 이니라.” 지금 잠언서 1장 8절에서부터 9절까지는 아버지의 명령, 아버지의 훈계, 어머니의 법을 떠나지 말라고 그렇게 가르쳐주고 있는데요. 이건 자녀들에게 주는 교훈인데 아버지의 말씀, 어머니의 말씀을 떠나지만 말고 그 말을 반드시 지키라고 하는 이 말씀을 해 주실 때, 우리는 이 성경 말씀을 어떤 식으로 이해하냐면 유교식으로 이해할 때가 많습니다. 유교적인 관점에서는 어떤 관점이 있죠. 부모님은 무엇과 같다? 하늘과 같아서 부모님은 하늘과 같아서 그 하늘과 같은 부모님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순종해야 된다고 하는 것이 유교적인 관점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 말씀을 읽으면, 이 성경을 읽으면서 어떤 개념으로 이해를 하냐면 유교적인 개념으로 이해를 해서, ‘부모님의 말씀은 무조건 자녀가 다 들어야 돼’라고 하는 그런 의미로 받아들일 때가 많습니다. 성경이 그것을 가르치느냐면 그렇지 않아요.

성경의 가르침은 그 전제가 있는데요. 지금 8절 9절에서 아버지의 명령을 따르고 어머니의 법을 반드시 따르라고 말씀하고 있을 때, 그 전제가 무엇이냐 하면 부모님의 가르침이 하나님의 말씀과 부합하다고 하는 것이 전제예요. 지금 솔로몬이 자기 자녀들을 가르치면서 솔로몬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기 자녀들을 가르치고 있으니까, ‘자녀들아 내 말을 들어라.’ ‘부모의 말씀을 들어라.’ ‘자녀들아, 너희가 어머니의 말, 그 법을 떠나 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아버지와 어머니가 지금 무엇으로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에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부모님의 그 말씀을 떠나지 말라고 하는 것이 오늘 이 잠언서 1장 8절 9절에서 말씀해 주고 있는 겁니다.

만일 부모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지 않고 잘못된 것을 가르치게 되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따를 수 있나요? 따를 수가 없는 거예요. 그냥 우리나라에서 생각하고 있는 관점은 무엇이냐 하면, ‘그냥 상관이 시키면 무조건 해.’ ‘내 주인이 시키면 무조건 해.’ ‘부모가 시키면 무조건 해야 돼.’ ‘군대에서 고참이 시키면 무조건 해.’ ‘그게 법이야’라고 하는 그런 개념으로 이 말씀을 이해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부모님들도 이 말씀을 읽으면서 ‘아, 나는 우리 자녀들에게 내 마음대로 해도 아무런 상관이 없고, 내가 말하면 우리 자녀들은 무조건 들어야 되는구나’라고 오해하시면 안 돼요. 이 말씀을 하시는 이유가 무엇이냐면 부모님이 하나님의 뜻대로 자녀들을 양육하기 때문에, 부모님이 하나님의 뜻대로 자녀들에게 가르쳐주기 때문에, 너희 자녀들은 부모님이 가르쳐주는 그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 벗어나지 말고, 그 하나님의 법칙에서 떠나지 말고, 그 말씀을 순종하라고 하는 의미이지, ‘아버지의 말씀은 무조건 절대 진리야.’ ‘어머니의 말씀은 무조건 절대 진리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나중에 우리 자녀들이 이제 결혼할 대상자를 데리고 와 가지고 ‘아버지, 어머니, 결혼하고 싶어요.’ 그런데 아버지 어머니가 그 배우자가 될 사람을 바라보는데 마음에 안 들어요. 좀 집안이 좀 괜찮은 집안 처자였으면 좋겠는데, 직장이 좀 좋은 직장을 잘 다니는 정말 삐까번쩍한 그런 직장을 다니는 그런 사위감이었으면 좋겠는데, 뭔가 좀 키가 큰 번듯한 그런 배우자 감이었으면 좋겠는데, 데리고 왔는데 보니까, 별 볼품이도 없고, 돈도 없고, 그 집안은 아주 뭐 별로 내놓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빈약한 그런 집안에 처자를 데리고 왔다든가, 직장도 없는 그런 아무것도 없는 아이를 데리고 와서 결혼하겠다고 이야기할 때, ‘절대 안 돼.’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까진 안 돼.’ ‘너는 내 말 무조건 믿어야 돼.’ 왜? ‘성경에 내 아들아,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내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고 했으니까. ‘넌 반드시 들어야 돼’라고 말해서는 안 되는 거죠.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부모의 뜻대로 무조건 자녀들이 해야 된다고 하는 그런 의미에서 이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아이를 양육하니, 그 하나님의 말씀에서부터 떠나지 말라고 하는 그런 의미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 10절에서부터 17절까지의 말씀은, 16절까지의 말씀은, 17절까지의 말씀은, 첫 번째 교훈이 나와 있습니다. 10절서부터 한번 보겠습니다. “내 아들아, 악한 자가 너를 깰지라도 따르지 말라. 그들이 내게 말하기를 우리와 함께 가자. 우리가 가만히 엎드렸다가 사람의 피를 흘리자. 죄 없는 자를 까닭없이 숨어 기다리다가 스올같이 그들을 산채로 삼키며 무덤에 내려가는 자들 같이 통으로 삼키자. 우리가 온갖 보화를 얻으며, 빼앗은 것으로 우리 집을 채우리니, 너는 우리와 함께 제비를 뽑고, 우리가 함께 전대 하나만 두자 할지라도, 내 아들아, 그들과 함께 길에 다니지 말라. 네 발을 금하여 그 길을 밟지 말라.”

16절 “대저, 그 발은 악으로 달려가며 피를 흘리는 데 빠름이니라.” 16절까지는 여기서 지금 잠언서를 기록하면서 이제 첫 번째 교훈을 하는 겁니다. 실제적인 첫 번째 교훈입니다. 처음에는 서론격인 내용이 나왔고, 그다음에 잘 들으라고 하는 그런 내용이 나왔는데, 그런데 이제 그 수많은 교훈들 중에서 정말 실제적인 교훈을 제일 먼저 준 교훈이 있었는데, 그게 뭐냐 하면, 한마디로 요약하면 뭡니까? 땀을 흘리지 않은 채 남의 것을 강제로 탈취하여 편취하는 일에 동참하지 말라는 교훈입니다. 잠언에 있는 수많은 교훈들 가운데 이 교훈을 제일 먼저 기록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우리들이 가장 잘 넘어지는 부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물론 사람들이 전부 강도짓을 하는 것은 아니죠. 숨어 있다가 강도처럼 빼앗아 남의 것을 우리가 탈취하자라고 하는 그런 친구들의 유혹에 넘어가지 말고 그런 악한 일을 하지 말라고 권면하고 있는데 사실은 강도짓을 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살아가면서 정당한 방법으로 이득을 얻기보다는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죄물을 얻으려고 하는 그런 갈망들이, 그런 죄에 우리가 쉽게 빠지기 때문에, 이 교훈의 말씀을 해주는 겁니다. 쉽게 버는 것, 쉽게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고 도둑질하고, 빼앗고 하는 그런 나쁜 짓을 통해서 재물을 얻는 것이, 사실 우리들에게 있어서 너무나도 자주 발생하는 그런 죄악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정당하게 땀을 흘리고, 내가 정당하게 일을 하고, 그래서 내가 수고한 만큼 얻는 것이 하나님의 법칙인데, 사탄의 법치 은 무엇입니까? 사탄이 우리를 어떤 식으로 유혹합니까? 내가 수고한 것 이상으로 손쉽게 남의 것을 빼앗고 탈취하고 속이기도 하고, 그리고 내 것이 아닌 것을 내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그런 마음들이 우리들에게, 모든 사람들에게 다 들어가 있습니다. 그래서 첫 번째 교훈을 그것으로 하는 것인데 이 교훈을 하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내 아들아” 우리 자녀들을 향해서 주신 첫 번째 교훈, ‘절대로 남의 것을 내가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탈취하고 빼앗아서 내 것을 만드는 그런 악한 일을 하는데 동참하지 말라’고 교훈을 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17절 말씀부터 이렇게 그 이유를 이야기합니다. “새가 보는 데서 그물을 치면 한 일이겠거늘, 그들이 가만히 엎드리면 자기의 피를 흘릴 뿐이오. 숨어 기다림은 자기의 생명을 해할 뿐이니, 이익을 탐하는 자의 길은 다 이러하여 자기의 생명을 잃게 하느니라.” 새가 그물을 치는 걸 보면 그 그물에 걸려듭니까? 어리석은 새는 걸려들겠지만 걸려들지 않는 겁니다. 새가 그걸 보고 피해다니는 거죠. 그런데 이 말씀을 해 주는 이유가 뭡니까? 우리가 숨어서 남의 것을 탈취하는 그런 모습을 누가 바라보고 계시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보고 계시다. 우리가 지금 숨어 있는 그 모습을, 그것을 하나님께서 보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성공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겠고, 우리가 그래서 재물을 손에 얻을 수도 있겠지만, 결국은 우리의 영혼이 망하는 길이라고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상황에 적용한다고 하면 우리가 재물을 얻으려고 하는 노력 자체가 잘못됐다고 하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가 열심히 수고하고, 수고한 만큼 더 많이 얻고, 그리고 그것을 누리기도 하고, 또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기도 하는 것은 우리 클리스천들이 할 수가 있는 겁니다. 하지만 그러한 수고의 대가가 아니라 우리가 잘못된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우리가 재물을 취하는 것은 잘못인 것인데요. 이것은 바로 우상숭배와 같은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수고하고 애써서 얻는 것은 정당한 것인데, 수고하지 않은 것을 통해서 얻으려고 하는 것은 그것은 이미 재물이 우리들의 우상이 되어 버린 결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유익한 그 모든 것들이 다 우상이 될 수가 있겠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잘못된 방법을 사용하게 되는 그 순간에, 그것이 우상이 되어버리는 거죠. 그래서 골로새서 3장 5절 말씀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정한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무엇이라? “우상 승배이니라.”

재물을 우리가 얻는 것은 정당한 것이지만, 그것을 탐욕적인 마음으로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방법을 사용해서 얻는 것은 그것은 탐욕에서부터 나온 것이고, 우상숭배의 제물을 우상처럼 섬기는 데서부터 나온 행동이라고 하는 것입니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이 살아가는 가운데 욕심들이 늘 생겨납니다. 예쁜 것을 보면 좋은 것을 보면 그리고 편리한 것을 보면 가지고 싶은 마음들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자꾸만 생기는 것이죠. 그러면. 열심히 노력하면 되는데, 내가 노력해서 안 된다고 생각될 경우에, 그것을 손쉬운 방법으로 탈취하려고 하는 그런 경향들이 많은데, 그렇게 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겸손하게, 하나님의 그 은혜 가운데 머물러야 될 줄로 믿습니다. 특별히 우리가 늘 넘어지는 이유는 다른 사람과 우리를 비교할 때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더 많이 가진 것을 보면서, 우리들이 죄악의 길로 갈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으로 자족하는 마음이 있어야 될 텐데, 자꾸만 비교해서, 나보다 더 나은 사람과 비교해보고, 더 많이 가진 사람과 비교하면서, 그래서 내가 그런 사람처럼 되고 싶은 욕심 때문에, 그런데 내가 노력해도 안 되니까, 결국은 나쁜 방법을 써서 더 높아지려고 하고, 더 높은 곳에 올라가려고 하는 그런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그것은 다 어리석은 일이고 결국은 망하는 길이고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는 길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 앞에 날마다 날마다 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들의 마음속에 악한 생각이 떠오를 때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는 그것을 다 어거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의 십자가 앞에 나가서, 주님께서 저희들의 마음을 씻어주시고, 변화시켜 주시고 이제는 지혜롭게 행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하면서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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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험생을 위한 기도, 잘못인가요?

질문: 수능이 다가옵니다. 우리 자녀가 좋은 성적을 받고 좋은 대학에 입학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그래서 다른 어떤 때보다도 더욱 절실하게 기도하게 됩니다. 그런데 어떤 목사님이 그렇게 기도하는 것은 잘못이며, 정욕으로 구하는 것이고, 이기적인 것이라고 하는데요. 이런 기도는 잘못된 기도인가요?

질문을 보내주십시오. http://bit.ly/이국진TV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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