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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과 믿음 (요 2:23-25)

혹시. 여러분들은 안도현 시인이라고 하는 분을 알고 계십니까? 안도현 시인이라고 하는 분이 쓴 시들은 아주 재미가 있고 재치가 있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깊이 생각하게 만드는 그런 힘이 있어서, 많은 사람이 좋아하는 시인 것 같습니다. 그가 쓴 시 가운데 <너에게 묻는다>라고 하는 시가 있는데요. 그 시 구절 가운데 한 표현이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어쩌면 열정을 잃어버린 이 시대에, 정신이 바짝 들게 할 만한 그런 명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열정이 있는 사람을 보면 참 감동이 됩니다. 열정이 있는 사람을 보면, 많은 사람을 흥분하게 만들고, 뿐만 아니라 생기를 불어넣어 주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우리 사회에 문제가 있다고 한다면, 그러한 뜨거운 열정을 불러일으킬 지도자가 참 없다고 하는 데 있는 것이고요. ‘한번 해보자’고 하는 그런 열정이 있어야 하는데, 안타깝게도 그런 열정이 없이 그냥 되는 대로 아무렇게나 인생을 살아가는 것 같아서 너무나도 아쉬운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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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도쿄 올림픽 때였는데요. 저는 도쿄 올림픽을 보면서 많은 감동을 받곤 했습니다. 특별히 배구 경기를 보면서 많은 감동이 있었는데요. 지난 7월 29일 날 있었던 도미니카 공화국과의 여자 배구 경기는 정말 흥미진진한 경기였습니다. 혹시 보셨습니까? 보셨을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세계 7위의 도미니카공화국을 세계 14위인 우리 한국팀이 싸우는 것은 힘의 겨운 상대였습니다. 5세트 가운데서 3세트를 했는데요. 2대 1로 우리 한국팀이 앞서고 있는 가운데, 네 번째 세트에서는 자꾸만 몰리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9대 15로 점수가 몰리고 있는 그런 상황 가운데 감독이 선수들을 불러 모아서 작전을 지시했습니다. 감독이 작전을 지시하고 난 다음에, 그다음에, 김연경 선수가 그 선수들을 향해서 했던 그 말이 굉장히 유명해졌습니다. 뭐라고 했습니까? 김현경 선수가 이런 말을 했어요. “해보자. 해보자. 해보자. 해보자. 후회 없이 해보자.” 그 말을 듣는 mbc의 황현주 해설가는 울컥하면서 해설을 제대로 이어가지 못했는데요. 왜냐하면 오랫동안 김현경 선수와 선수 생활을 같이 했던 동료로서 그 간절함 그것을 충분히 이해하는 해설가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김현경 선수의 그 열정이, 지는 것 같으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한 번 해보자고 하는 그 말 한마디 한마디가 선수들에게 용기를 주었고, 그리고 그 경기는 극적인 역전승을 이루어 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열정이 없는 것도 문제이지만, 열정이 있기만 하면 다 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열정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게 있습니다. 열정도 중요하지만, 열정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게 있는데 그게 무엇일까요? 열정보다 훨씬 더 귀중한 것, 더 중요한 것. 흔히 하는 말로 “속도보다는 방향”이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빨리 달린다고 하더라도, 달리는 방향이 잘못되었다고 한다면 헛수고뿐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죠. 그런 방향이 잘못되면 아무리 열심히 뛰어가고 있다고 할지라도, 사실은 수고하지 않은 것보다도 더 못한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열정도 정말 중요한 것이지만, 열정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한다면 방향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몇 년 전에 우리 나라에서 있었던 어떤 한 이야기인데요. 지방에서 살던 어떤 학생이 대학 입시를 위해서 서울에 있는 한양대학교를 지원한 적이 있습니다. 그 학생은 지방에서 살면서 한양대학교에 지원하였고, 그리고 아마 면접 고사인지 무슨 고사인지 그 학교에 직접 가서 면접이든 무슨 고시를 봐야만 했던 그런 상황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학생은 아침 일찍 일어나서 KTX를 타고 서울역에 내려서, 이제는 한양대를 가기 위해서 지하철로 갈아타기 위해서 지하철로 내려갔습니다. 근데 마침 4호선 기차가 들어오는 것을 봤습니다. 빨리 물어보니까 그 기차가 <한대앞>으로 간다고 하는 것을 알게 되었고, 놓치지 않고 그 기차를 빨리 얻어 탔습니다. 그래서 이제 이 기차를 타면 한양대를 가겠지 하고, 그래 가만히 있는데, 가는 방향이 이상한 겁니다. 건너가지 않아야 될 한강다리를 건너가는 겁니다. 자꾸만 이상한 방향으로 가더니, 결국 알고 보니까 자기가 가서 시험을 쳐야될, 면접을 봐야 될 서울 캠퍼스 한양대학교로 가는 것이 아니라, 저 안산에 있는 안산 캠퍼스의 한양대학교로 가는 그 한 대앞, 여기 안산 캠퍼스의 앞에 있는 한대역이었던 것이죠. 다행스러운 것은 그 학생이 그 한대역 앞에 내려서 경찰의 도움을 받아 다시 정확하게 시험장으로 들어갔다고 하는 훈훈한 기사를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무리 속도를 빨리 빨리 한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가는 방향이 잘못되었다고 한다면 다 소용이 없는 것이죠. 열정을 가지고 나아가고 있는데, 정말 빨리 달려가고 있는데, 그 열정의 방향이 잘못되었다고 한다면, 차라리 열정을 내지 않았던 것이 훨씬 더 나을 뻔 한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열정이 없는 사회이기 때문에 열정만 있으면 좋겠다고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요. 그런데 열정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방향인데, 열정만 있어서 괜찮지 않았던 예를, 우리는 역사상 많이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파멸로 이끈 열정의 예를 어디서 찾아볼 수 있을까요? 그것은 그 옛날 전 세계를 파멸로 이끌었던 제2차 세계대전의 히틀러에게서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히틀러는 대단한 그런 웅변가였습니다. 히틀러는 수많은 사람 앞에서 Mein Kampf를 이야기하며, 그러면서 사람들에게 열정을 이끌어 내고, 수많은 사람을 다 열광하게 만드는 그런 엄청난 웅변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이 히틀러를 따라가며, 열정을 다했는데 그가 이끈 길이 바른 길이 아니라, 전 세계를 파멸로 이끄는 그런 악한 결과로 가져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차라리 그런 열정이 없었더라면, 더 나을 뻔한 열정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요한복음의 말씀을 읽었는데요.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유월절날 예루살렘에 가셨다가, 거기서 수많은 기적을 베푼 것에 대해서 아주 간략하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엄청난 기적들을 많이 행하게 되었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주변으로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당연하죠. 기적이 일어나니까, 그 기적을 보고 많은 사람이 놀랐고, 그래서 예수님 주변으로 몰려들면서, 예수님을 믿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모두가 다 달려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겠다고 결심한 것만 보면, 이것은 그런 대로 좋은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기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함에도 불구하고,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고 전혀 들어보려고 하지 않는 그런 악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심지어 죽이려고 하는 관리들도 있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 사람들과 비교한다면, 이 예수님을 믿겠다고 달려든 사람들은 그나마 좋은 사람들이고, 그 사람들은 정말 좋은 반응을 보였다고 이야기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이상한 내용이 하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 주 면으로 몰려드는 그 사람들을 보시면서, 보여준 예수님의 반응입니다. 그 반응이 요한복음 2장 24절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는데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의탁이라고 하는 말이 무슨 말인가요? 의탁이라고 하는 말은 ‘의지한다’ 또는 ‘기대다’ 혹은 ‘의뢰하고 부탁한다’라고 하는 그런 의미가 들어 있는 단어가 의탁한다고 하는 말인데요. 예수님께서 자신의 몸을 그들에게 즉 예수님을 믿으려고 오는 사람들에게 맡기지 않으셨다는 겁니다. 의탁하지 않으셨다고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헬라어 원문을 보니까, 의탁한다고 하는 말로 번역이 되어 있는데, 그렇게 번역한 원문의 의미 헬러의 의미를 살펴보니까, 그 단어는 놀랍게도 ‘믿는다’라고 하는 단어였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의미냐면, 모든 사람들이 지금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예수님을 믿으려고 막 몰려들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들을 믿지 않으셨다라고 설명하고 있는 겁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예수님 믿고 싶습니다. 예수님을 믿겠다고 몰려드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정작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너희들 못 믿는다’라는 반응을 보여주신 겁니다. 어쩌면 영화 속의 한 대사로 말하자면, ‘너희들 날 믿어? 난 널 못 믿겠어’라고 하는 반응을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것이죠.

이러한 반응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믿겠다고 몰려든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이런 반응이 아니라 ‘그래 고맙다.’ ‘잘 와라. 나에게로 와라.’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해 주셔야 그게 가장 자연스러운 반응 같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에 오는 성도님들을 보면서 너무나도 감사해요. 너무나도 너무나도 좋아요. 왜냐하면 말씀을 듣겠다고 오는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지 몰라요. 새로운 교인이 오면, 그렇게 고맙고 감사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듣겠다고 오는 것이니까, 너무나도 감사한 것이고 기쁜 것인데, 그러한 반응을 예수님께서 보여주셔야 하는데, 놀랍게도 예수님은. 예수님의 반응은 그들이 믿겠다고 몰려들고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마치 한 걸음 뒤로 물러서시면서, ‘나는 너희들을 믿을 수 없다’라고 말씀해 주시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런 식의 반응을 보여주시는 걸까요? 그것은 24절의 말씀 가운데 분명하게 그 이유를 설명해 주고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마음을 꽤 뚫어 보고 익히 마셨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나아오고는 있는데, 왜 그들이 예수님에게로 나아오는가? 그들의 마음을 간파하고 계세요. 그들의 생각을 알고 계셔요. ‘저 사람들이 왜 나에게 오는가’를 주님께서 정확하게 알고 계셨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나오고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믿지도 않으셨고, 그들에게 자신을 의탁하지도 않으셨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반응이 이것이 처음이 아닌, 한 번만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일관적으로 보여주신 모습입니다. 예를 들어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풀었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그 자리에서, 그 사람들이 모두 다 배를 골고 있는 사실을 너무나도 안타깝게 생각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을 무엇인가를 먹여야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먹일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수소문 했더니 보리떡 5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것을 가져다가 주님께서 하나님께 축사하고, 그리고 이것을 나누어주기 시작했는데, 거기서부터 놀라운 기적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떡을 떼면 떡이 또 생기고 또 생기고 하면서, 생선을 떼면 생선이 더 생기고 해서, 그저 한 사람이 먹을 분량의 도시락으로 5천 명이 넘는 수많은 사람들을 한꺼번에 먹이는 엄청난 기적의 역사가 일어나게 된 겁니다.

그런 일을 바라보고 있는 유대인들의 마음 가운데는 흥분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에게서 다른 모습을 보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자기들은 어떤 상황 가운데서 살았습니까? 로마 정부가 앞제하는 상황 가운데서 살았습니다. 그들의 지도자, 그들의 통치자는 그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과도한 세금을 매겨서 그 세금을 약탈해 가는 그런 포악한 군주와 같은, 그 군주 밑에서 억압을 당하면서 살아왔는데,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뺏어가는 예수님이 아니라, 빵을 먹여주시는 예수님,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먹을 것을 베풀어주시는 그 예수님을 보면서 이들의 눈이 뒤집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예수님이 우리의 왕이라고 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저 로마 총독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들의 왕이라고 한다면, 우리들에게 사랑을 베풀어주지 않겠는가? 우리들을 잘 먹여주지 않겠는가? 새로운 지도자로서 이 예수님을 생각하게 된 겁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주변으로 모여들면서 혁명을 꿈꾸었습니다. ‘주님, 말씀만 하시옵소서. 우리가 주님과 함께 혁명을 일으키고 싶습니다. 이 정권을 뒤집어 엎어버리고, 민중들을 억압하는 이 정권을 엎어버리고, 주님 주님께서 다스리는 나라를 만들어보고 싶습니다.’ 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들을 바라보시면서 고마워하거나 ‘그래, 함께 좋은 세상 만들어보자’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놀랍게도 예수님께서는 차가운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6장 26절에 예수님의 대답이 기록돼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지금 유대인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열광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예수님을 보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그런 영적인 모습을 생각하면서 열광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왕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잘 살 수 있겠구나’ ‘돈을 많이 벌겠구나’ ‘권력을 누릴 수가 있겠구나’ ‘이 세상에 문제가 해결될 수 있겠구나.’ 이 세상 현세적인 것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어서 예수님을 따르고 있다고 하는 것이죠.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바라보시면서 ‘너희가 저 표적을 보지 못했다.’ 예수님께서 이 떡을 통해서 보여주시고자 하는 하늘의 표적이 있는 것인데, 그 하늘의 표적은 보지 못하고, 이 선물에만 눈이 가려져 있는 이스라엘 민족을 보면서, 이런 말씀을 해 주신 것입니다.

요즘 대통령 선거가 한창입니다. 아직 대통령 선거는 아니고 대통령 선거를 위한 후보 선출의 과정을 한창 진행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전라북도에서 예비선거를 해서 발표한다고 하는데 ,오늘 저녁 때는 어떻게 결과가 나올지 굉장히 궁금합니다. 그런데 그런 대통령 후보들로 나서게 되면, 수많은 지지자들이 대통령 후보자들 주변으로 몰려들기 시작합니다. 왜 몰려들까요? 그들은 어떤 마음을 가지고 대통령 후보자들에게로 그렇게 열정적으로 몰려드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그 가운데 많은 사람들의 생각 가운데 이런 마음이 있었을 겁니다. 만일 내가 지지하는 저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그 정권 아래서 내가 많은 이득을 얻을 수 있을 거라고 하는 관심 때문입니다. 아마도 대통령 후보로 나서는 사람은 선한 목적을 가지고 있을런지도 모릅니다. 내가 대통령이 되어서 좋은 나라를 만들어보고 싶고, 내가 대통령이 되어서 좀 더 살기 좋은 세상, 사람이 대접받는 세상, 공평한 세상, 정의로운 세상, 불로소득이 없는 그런 세상을 만들어보고자 하는 정의로운 개념을 가지고 대통령 선거에 나갈 겁니다. 하지만 그 대통령 후보자 앞으로 몰려들어 사람들은 누가 몰려드냐 하면, 탐욕으로 가득한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이죠.

저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저 사람을 도와주면, 내가 한 자리 할 수 있겠다고 하는 꿈을 가지고 내가 그 정권 밑에서 무엇인가 얻을 게 있다고 하는 탐욕으로 몰려드는 것이기 때문에, 어쩌면 우리 사회에서 자꾸만 반복되는 악순환은 바로 거기에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보수 정권이든 진보 정권이든, 어떤 대통령이 당선이 돼도, 늘 실패로 귀결되는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좋은 대통령인 줄 알고 뽑았는데, 늘 실패하는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그 주변에 몰려드는 자들은 표를 이용하여 권력을 잡고, 권력을 잡으면 그걸 통해서 얻어 먹을 떡고물에 관심 있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후보들은 표를 얻기 위해서 그런 사람들의 도움도 절실하게 필요해서 잡는 거죠. 조폭들이 도와준다고 해도, 범죄 집단들이 좋은 모습을 하고 도와준다고 해도, 표를 준다고 한다면, 거기에 끌릴 수밖에 없는 것이 후보자들의 약점들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한 표가 아까운 정치인들처럼 그들이 몰려드니까 그들이 무조건 좋다고 받아들이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믿지 않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목적이 주님을 진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주님에게서 받아 먹을 수 있는 떡고물에 더 관심이 있는 것이고, 그걸 통해서 내가 행복해지고 그걸 통해서 내가 무엇인가를 얻으려고 하는 선물에만 관심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우리들의 영원한 최악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 버려서 그래서 우리들의 삶이 고통 가운데 있는데, 그러한 그 끊어진 관계를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해 주님께서 오셨고, 그렇게 하나님과의 생생한 관계를 회복시키는 결과로, 병이 낫기도 하고 또한 배고픔이 해결되기도 하고, 갈증이 해결되기도 하는데, 사람들은 주님과의 관계 회복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고, 그저 병이 낫는 것, 이 세상에서 배부른 것, 이 세상에 썩어질 것들이 우상이 되어 그것을 해결하는 데, 유용한 하나님만 바라보고 열정을 내고 있는 것이죠. 이들이 믿는 것은, 예수님들에게 몰려든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예수님을 정말로 제대로 바라보았기 때문에, 예수님께로 몰려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생각하는 우상으로 예수님을 생각하고, 그 주위로 몰려드는 겁니다.

예수님이 누군가? 예수님이 나의 배를 배불리해 줄 그런 사람이다. 예수님이 누군가? 나에게 권력을 줄 수 있는 사람이다. 이 세상의 것들을 얻게 해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하는, 그러한 내 나름대로의 생각을 가지고, 예수님에게 씌우고, 그런 예수님이 되어줄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열광을 하다가, 예수님께서 그런 요구에 응답해 주지 않는 것 같으면 이내 실망해버리고 돌아서는 것이죠. 주님께서 내 문제를 해결해 줄 줄 알았는데, 해결해 주지 않는 것 같으니까, 주님께 배반하고 돌아서 버린 것이죠.

이런 현상이 모든 사람들에게서 나타나고 있는데요. 세레 요한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가 잘하는 것처럼,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소개한 사람이었습니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 나보다 더 능력이 많으시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향해서 소개했는데, 그 세례 요한이 감옥 속에 있는 동안에 의심의 마음이 마음속에 솟아오르는 겁니다. 예수님이 왔다고 한다면, 메시아라고 한다면, 이 로마 정부를 끝장 내야 되지 않는가? 저 악의 무리들을 다 물리쳐야 되지 않는가? 이스라엘 민족을 독립시키고, 억울하게 이 감옥에 갇혀 있는 나는 끄집어 내주어야 그게 진짜 메시아일 텐데? 그런데 예수님이 와도 세례 요한은 여전히 감옥 속에 있는 겁니다. 로마 정부는 그대로 힘을 발휘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 문제들을 도무지 해결하지 않는 그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세례 요한은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제자들을 보내서 물어봅니다. ‘예수님, 우리가 기다리던 메시아가 당신 맞습니까? 아니면 다른 이를을 기다려야 합니까?’ 지금 당장 무찔러 줘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가져올 것을 기대하는데, 자신의 기대와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이고, 그리고 고난의 길을 가고 있는, 그 예수님을 보면서 도대체 예수님이 내가 기다리던 예수님이 맞는지 의심을 하게 되는 상황에 이르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이건 베드로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제는 고난을 당하고, 죽임을 당할 것이며, 그리고 3일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시니까, 베드로가 그 말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겁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꾸짖었습니다. 우리 성경 말씀에 잘 그런 꾸짖었다고 하는 내용이 제대로 잘 번역이 된 것 같지 않은데요. 그 예수님을, 이 베드로는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꾸짖는 겁니다. ‘그리하지 마십시오. 결단코 그런 일이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는 건, 전혀 생각하지 못하는 거예요. 내 만족을 위한, 내 문제를 해결해 줄, 그런 능력의 주님을 기대하고 있는데, 주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가시겠다고 하니까 이해를 하지 못하는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단순히 우리들의 질병만을 고치기 위해서, 우리들에게 잘 먹고 잘 살게 만들기 위해서만,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만일 우리가 황달에 걸린다고 한다면, 황달이 걸리게 되면 ,얼굴이 노래지게 되는데요. 그런 노래지는 얼굴을 바라보면서,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사람들이 찾는 것은 무엇입니까? 화장품 가게에 가는 것이죠. 그리고 좋은 화장품 구해서 화장하면, 내 얼굴이 괜찮아지겠지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러한 나에게 더 좋은 화장품을 주어서 내 얼굴을 깨끗하게 만들어줄 그럴 메시아를 기대하고 있는 것인데, 예수님께서 그런 화장품을 안 주시는 겁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너희들의 간이 문제다’ ‘너희들의 췌장이 문제다’ 그리고 ‘그것을 고쳐야 된다’라고 하시면서, 수슬 칼을 우리들을 향해서 들이미시는 겁니다.

우리의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근본적인 고통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돈이 없는 게 문제가 아니에요. 그것은 우리가 다른 잘못된 사람을 만나서가 아니에요. 이 세상에 우리가 권력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모든 문제의 근원이 우리의 깊은 죄의 문제인 것이고, 하나님과의 거리가 멀어진 것이고, 하나님에게서부터 단절된 것이 문제인 것인데, 주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에게로 회복시켜주시고,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셔서, 그래서 우리가 다시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 가운데, 천국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인데요. 안타깝게도 우리들은 주님에게 나아가서 ‘주님, 다른 거 필요 없어요. 그냥 돈만 주고 가세요. 주님, 다른 거 필요 없어요. 그냥 병만 낫게 해주고 그냥 내 삶에서는 손 떼세요.’ 마치 무엇과 같으냐면, 의사 선생님에게 찾아가서, 지금 내가 황다인데 의사 선생님에게 찾아가서, ‘선생님, 수술 같은 거 필요 없고, 그냥 좋은 화장품이나 하나 소개해 주세요.’라고 말하는 어리석음과 같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은 하나님에게서부터 몇 가지 좋은 이득만을 받아내는 것이, 그게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그러한 것을 바라보면서 열광하는 것이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 속으로 들어가게 될 때, 힘들고 어려운 고통의 상황 가운데서도, 기쁨을 누리고, 힘과 용기를 받는 것이죠.

마치 결혼의 관계와 같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데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서 결혼하는 것은, 그것은 단순히 결혼해서 편안히 잘 살고, 그리고 재정적인 안정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두 사람이 살아가면서 아주 힘들고 어려운 상태를 만나게 될 겁니다. 재정적으로 정말 힘든 상황을 만나게 될 겁니다. 그런 상황 가운데서 남편과 아내가 서로가 힘을 모으고, 서로 위로하면서 다른 것 다 없어져도 괜찮고, 당신만이 있기 때문에 너무나도 행복하다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이 참된 사랑의 관계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사랑의 관계를 생각지 않고, 그저 상대 배우자가 괜찮은 집안인지, 상대 배우자가 그런 데로 돈 많은 집안인지, 그런 것만 따진다고 해 한다면, 그것은 제대로 된 결혼일 수가 없는 것처럼, 믿음은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정말 하나님을 사랑해서 하나님과의 깊은 교재의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하나님과 동행해 나갈 때는, 그 길이 항상 좋고 행복한 일들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가는 한이 있더라도,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신다고 하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힘과 용기를 얻는 것이고, 주님께서 나의 목자가 되어 주시기 때문에, 새 힘과 용기를 얻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수많은 크리스찬이라고 하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열광하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데, 그런데 과연 그 신앙의 대상이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다시 한 번 반성해봐야 합니다. 때로는 기독교 신앙이라고 하는 것이, 어떤 정치적인 권력을 얻는 것이 목적이 되어버린, 그런 잘못된 신앙이 진짜 신앙인 줄 알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고, 잘못된 방향, 잘못된 목적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 그게 진짜 기독교 신앙인양 우리를 속이고 있는 경우들이 너무나도 많이 있는데, 오늘 우리가 이 본문의 말씀을 보면서, 주님께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을 때, 그들을 다 믿었던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시고 믿지 아니하셨을 뿐만 아니라,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던 그 말씀들을, 우리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 새기면서, 주님과의 참된 믿음의 교제 속으로, 나를 위하여 피를 흘려주시고 십자가를 지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와 함께하시는 그 주님과의 깊은 교제의 관계 속으로 들어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