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단의 위로(삼상 23:15-18)

15 다윗이 사울이 자기의 생명을 빼앗으려고 나온 것을 보았으므로 그가 십 광야 수풀에 있었더니 16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일어나 수풀에 들어가서 다윗에게 이르러 그에게 하나님을 힘 있게 의지하게 하였는데 17 곧 요나단이 그에게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 아버지 사울의 손이 네게 미치지 못할 것이요 너는 이스라엘 왕이 되고 나는 네 다음이 될 것을 내 아버지 사울도 안다 하니라 18 두 사람이 여호와 앞에서 언약하고 다윗은 수풀에 머물고 요나단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요나단은 다윗을 찾아가 위로하고 격려하였습니다. 사울 왕은 다윗을 죽이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찾았지만 찾을 수 없었던 반면, 요나단은 아주 쉽게 다윗을 찾아갈 수 있었습니다. 아마도 사울의 군사들이 오면 다윗이 몸을 숨겨 피했을 것이지만, 요나단이 나타나면 부하들을 시켜서 잘 모셔오게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쨌든 요나단이 쉽게 다윗을 만날 수 있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사울은 다윗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사울의 손에 붙이지 아니하셨기 때문입니다(삼상 23:14).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시면 그 누구도 우리를 대적할 수 없다는 말씀(롬 8:31)은 진리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안에 있다면 그 어느 것도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요나단은 다윗에게 말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 아버지 사울의 손이 네게 미치지 못할 것이요. 너는 이스라엘 왕이 되고 나는 네 다음이 될 것을 내 아버지 사울도 안다.” 사실상 사울의 뒤를 이어서 왕이 되어야 할 사람은 요나단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요나단의 입에서 놀라운 말이 나왔습니다. 다윗은 요나단의 말을 듣고 적지 않게 위로를 받았을 것입니다.

사실 친구는 이런 때를 위하여 있는 것입니다. 신앙의 공동체가 존재하는 이유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길을 가는 것은 쉬운 길이 아닙니다. 적지 않게 위험한 일을 만나고, 무서운 일들을 경험하면서 무너지기 쉽습니다. 그때 믿음의 친구들이 필요합니다. 옆에서 따뜻한 말을 해주고 용기를 북돋우어주면서 믿음의 길을 가게 만들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이미 요나단과 다윗은 구약 시대의 작은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다시 일어서게 만드는 것은 믿음의 동역자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다윗과 요나단은 다시 만나서 언약을 맺습니다. 이들은 하나님 앞에서 언약을 맺었습니다(삼상 23:18). 그들이 맺은 구체적인 언약의 내용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아마도 사무엘상 20:14-15의 내용을 다시 확인하는 것이었을 것이라고 추정됩니다. “너는 내가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내게 베풀어서 나를 죽지 않게 할 뿐 아니라 여호와께서 너 다윗의 대적들을 지면에서 다 끊어 버리신 때에도 너는 네 인자함을 내 집에서 영원히 끊어 버리지 말라.”

이미 맺었던 언약인데,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이 시점에 다시 언약을 맺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예전에 맺었던 언약이 잘못되었거나 미비해서가 아닙니다. 시효가 지나버려서도 아니고, 잊었기 때문도 아닙니다. 다만 다시 그때 맺었던 언약을 기억하면서 재확인하고 감사하고 즐기고 확신을 얻기 위한 것입니다. 마치 부부가 결혼 서약을 하고 결혼을 했지만, 살면서 틈틈이 장미꽃이라도 사들고 가서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랑의 약속을 한번 하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계속해서 재확인해야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요나단과 다윗은 이미 예전에 언약을 맺었지만, 다시 언약을 맺으면서 적지 않은 힘과 위로를 받았을 것입니다.

예전에 다윗과 요나단이 언약을 맺었었는데, 다윗의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마음속에 질문이 떠오르게 됩니다. 과연 요나단은 나의 편일까? 이런 질문이 솟아오를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요나단이 와서 다시 언약을 갱신하면서 위로를 받습니다. 요나단은 이 순간에 아버지를 선택하지 않고 다윗을 선택하였습니다. 요나단의 언약은 여전히 유효했던 것입니다. 이런 요나단과 같은 친구를 둔 다윗은 정말 행운아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에게도 그런 친구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향해서 약속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구원의 약속입니다. 하지만 그 약속을 받기에 너무나도 부족한 모습을 사람들이 보여주었습니다. 인간 편에서 자꾸만 약속은 파기되어버렸습니다. 그렇다고 하면 이제 하나님의 약속은 사라져버린 것일까요? 그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다시 재확인시켜주셨습니다. 끝까지 그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이렇게 끝까지 언약의 약속을 지키는 것을 가리켜 의롭다고 표현합니다. 그래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 것이라고 표현합니다(롬 1:17). 그 하나님의 의 때문에 우리가 살 수 있습니다.

기독교 이단 중에는 한 번 회개하면 더 이상 회개할 필요가 없으며, 또다시 회개하는 것은 구원받지 못한 증거라고 우기는 자들이 있습니다. 성경의 가르침은 정반대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해서 더 이상 회개할 필요가 없는 완벽한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기 전까지는 또 넘어지고 죄를 짓습니다. 그래서 또 다시 신실하신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그 옛날 다윗과 요나단이 언약을 다시 맺으면서 우정을 재확인했듯이, 우리는 십자가 앞에 다시 나가서 하나님의 은혜를 재확인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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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의 이별(삼상 20:35-42)

35 아침에 요나단이 작은 아이를 데리고 다윗과 정한 시간에 들로 나가서 36 아이에게 이르되 달려가서 내가 쏘는 화살을 찾으라 하고 아이가 달려갈 때에 요나단이 화살을 그의 위로 지나치게 쏘니라 37 아이가 요나단이 쏜 화살 있는 곳에 이를 즈음에 요나단이 아이 뒤에서 외쳐 이르되 화살이 네 앞쪽에 있지 아니하냐 하고 38 요나단이 아이 뒤에서 또 외치되 지체 말고 빨리 달음질하라 하매 요나단의 아이가 화살을 주워 가지고 주인에게로 돌아왔으나 39 그 아이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요나단과 다윗만 그 일을 알았더라 40 요나단이 그의 무기를 아이에게 주며 이르되 이것을 가지고 성읍으로 가라 하니 41 아이가 가매 다윗이 곧 바위 남쪽에서 일어나서 땅에 엎드려 세 번 절한 후에 서로 입 맞추고 같이 울되 다윗이 더욱 심하더니 42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우리 두 사람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영원히 나와 너 사이에 계시고 내 자손과 네 자손 사이에 계시리라 하였느니라 하니 다윗은 일어나 떠나고 요나단은 성읍으로 들어가니라

요나단은 이제 확실하게 사울 왕의 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실 이미 요나단은 사울 왕의 마음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마음속에서 제발 그러지 않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그게 사실이 아니기를 소망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모든 것이 밝혀졌습니다. 그래서 요나단은 약속대로 화살을 쏘아 보내며 외쳤습니다. “화살이 네 앞쪽에 있지 아니하냐? 지체 말고 빨리 달음질하라.” 결국, 요나단과 다윗은 눈물의 이별을 합니다.

요나단은 다윗을 보호해주었지만, 요나단이 얻을 수 있는 보상이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이후로는 다시 요나단을 볼 수도 없었을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요나단은 다윗과의 약속을 지켰습니다. 요나단이 사울 왕과 함께 살아가면서 다윗과의 언약을 지키는 것이 어려웠을 것입니다.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사울 왕과 함께 살면서, 국가의 모든 정책이 다윗을 죽이는 일에 혈안이 되어 있는 그 상황 속에서, 다윗의 보호자로 살아가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요나단이 처한 궁정에서의 삶은 다윗과의 우정을 버릴 것을 강요당하는 상황입니다. 아버지에 의해서 다윗과 맺은 언약을 파기하라는 압력이 들어오는 것처럼,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결국 참된 믿음이 승리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장면은 신약의 한 장면과 대비됩니다. 가룟 유다가 군사들과 함께 신호를 짜서 예수님을 넘겨주는 장면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에게 다가와 입을 맞춥니다. 샬롬의 인사를 건넵니다. 그런데 그 신호는 “이 사람이 예수이니 이 자를 체포하라”는 신호였습니다. 요나단은 다윗과 신호를 짜서 다윗을 살려주었는데,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넘겨주어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이 세상의 물질적 욕심 때문에 팔아버렸습니다. 그런데 요나단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다윗에 대한 우정과 다윗과 맺은 하나님 앞에서의 언약 때문에, 이 세상의 보상을 버렸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정치적 권력을 포기하였습니다.

다윗은 얼마나 행복한 사람일까요? 누군가가 이렇게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면서까지 사랑하고 도와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정말 행복한 일입니다. 안타깝게도 이 세상에서 다시는 이런 류의 우정을 발견하기 힘듭니다. 백 년을 같이 해로하자고 약속해놓고도 금세 그 약속을 뒤집어 버리는 세상입니다. 친구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뒤통수치는 일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도 요나단과 같은 친구가 있습니다. 그분은 바로 예수님입니다(요 15:15). 우리가 영원한 죽음의 위험 앞에 있을 때, 주님께서는 강 건너 불구경하듯 있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이 세상에 오셨고,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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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삼상 19:1-7)

1 사울이 그의 아들 요나단과 그의 모든 신하에게 다윗을 죽이라 말하였더니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다윗을 심히 좋아하므로 2 그가 다윗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 사울이 너를 죽이기를 꾀하시느니라 그러므로 이제 청하노니 아침에 조심하여 은밀한 곳에 숨어 있으라 3 내가 나가서 네가 있는 들에서 내 아버지 곁에 서서 네 일을 내 아버지와 말하다가 무엇을 보면 네게 알려 주리라 하고 4 요나단이 그의 아버지 사울에게 다윗을 칭찬하여 이르되 원하건대 왕은 신하 다윗에게 범죄하지 마옵소서 그는 왕께 득죄하지 아니하였고 그가 왕께 행한 일은 심히 선함이니이다 5 그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을 죽였고 여호와께서는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큰 구원을 이루셨으므로 왕이 이를 보고 기뻐하셨거늘 어찌 까닭 없이 다윗을 죽여 무죄한 피를 흘려 범죄하려 하시나이까 6 사울이 요나단의 말을 듣고 맹세하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거니와 그가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7 요나단이 다윗을 불러 그 모든 일을 그에게 알리고 요나단이 그를 사울에게로 인도하니 그가 사울 앞에 전과 같이 있었더라

사울이 다윗을 죽이라고 요나단과 신하들에게 명령하였습니다. 이렇게 다윗을 죽이라고 공개적으로 명하는 것은 한 단계 더 진전된 것입니다. 그래도 전에는 다윗을 은밀하게 죽이려고 했었습니다. 전쟁터로 보내어 어쩌다 보니까 전사한 것처럼 위장하려 했고, 왕의 사위로 삼으려고 하는 것으로 위장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공개적으로 다윗을 죽이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그래도 이전 단계에서는 양심의 가책이 있었습니다. 다윗을 죽이는 것은 비난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은밀하게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 없애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한 단계 더 나아가 공개적으로 다윗을 죽이는 일을 명령합니다. 사울의 양심이 화인을 맞은 것 같습니다.

그때 사울 왕을 만류한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사울 왕의 아들 요나단이었습니다. “원하건대 왕은 신하 다윗에게 범죄하지 마옵소서”라고 말했습니다. 사울 왕이 하는 일이 범죄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 범죄를 공개적으로 명령하는 모습이 양심에 화인 맞은 상태였습니다. 죄는 반복하면 무디어집니다. 죄뿐만이 아닙니다. 모든 반복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무디어지게 만듭니다. 그래서 반복은 무서울 수 있습니다. 사랑도 반복되면 사랑처럼 느껴지지 않고, 은혜도 반복되면 은혜처럼 느껴지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먹었던 만나와 메추라기는 놀라운 기적이며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런데 그게 일상이 되어버릴 때, 사람들은 고마움을 잊었습니다. 부모의 고마움도 마찬가지입니다. 반복되면 오히려 권리처럼 생각됩니다. 그런데 죄도 마찬가지입니다. 폭력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즘에는 안 그러겠지만, 예전에 군대에 들어가면 고참들로부터 폭행을 당했습니다. 그게 처음에는 너무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하는 말이 그게 반복되니까 오히려 맞아야 잠을 더 잘 잘 수 있다고 합니다. 이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반복될 경우 그럴 수 있습니다. 반복되어 무감각해지는 것이 사실은 가장 무서운 일입니다.

처음 죄를 지을 때는 무섭습니다. 두렵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에 양심을 심어놓으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신을 죄에 자주 노출하다 보면, 죄가 죄처럼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윗과 같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시 51:10-11)

사울 왕의 명령 앞에서 다윗을 변호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요나단이었습니다. 그는 다윗이 잘못한 것이 없는데, 왜 죽이려 하느냐고 사울 왕의 양심에 호소하였습니다. 요나단은 사울 왕의 심기를 거스른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사울 왕은 다윗을 죽이지 않겠다고 약속합니다. 이 대답이 진정성이 있는 대답인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적어도 이 순간에 다윗을 죽이려고 한 사울의 계획은 주춤하게 되었습니다. 만일, 이 순간에 요나단이 침묵했더라면, 사울 왕의 명령은 그대로 시행되었을 것입니다. 만일 그 누군가가 다윗에 대해서 비난하면서 사울 왕을 동조했더라면, 사울 왕의 명령은 그대로 시행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나단 때문에 사울 왕은 주춤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향해서 선한 일을 권고해야 합니다. 우리가 교회로 모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돌아보아 선한 일을 격려하고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함께 영적으로 성숙해질 수 있습니다. 남편이 잘못된 생각을 키워나갈 때, 아내는 그렇게 하지 못 하게 말려야 합니다. 지혜롭게 그러지 말자고 권고해야 합니다. 어떤 성도가 분노에 가득 찰 때, 그 분노를 강화하는 발언을 할 게 아니라 분노를 누그러뜨리고 선한 마음을 품는 것을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함께 동조하고 함께 죄를 짓는다면 함께 망하게 될 것입니다.

요나단은 사울 왕의 미움을 받아 위험에 처할 수도 있었습니다. 한 나라의 왕에게 반기를 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요나단은 담대하게 말했습니다. 다윗을 위해 목숨을 내어놓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도 요나단처럼 우리를 변호해줄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다윗은 아무런 잘못이 없었지만, 우리는 많은 죄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의 잘못을 변호하시면서 우리가 맞아야 할 채찍을 대신 맞았고, 우리가 당해야 할 수난을 대신 당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아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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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단은 범인이 아니다(삼상 14:43-46)

43 사울이 요나단에게 이르되 네가 행한 것을 내게 말하라 요나단이 말하여 이르되 내가 다만 내 손에 가진 지팡이 끝으로 꿀을 조금 맛보았을 뿐이오나 내가 죽을 수밖에 없나이다 44 사울이 이르되 요나단아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내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하니 45 백성이 사울에게 말하되 이스라엘에 이 큰 구원을 이룬 요나단이 죽겠나이까 결단코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옵나니 그의 머리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할 것은 그가 오늘 하나님과 동역하였음이니이다 하여 백성이 요나단을 구원하여 죽지 않게 하니라 46 사울이 블레셋 사람들 추격하기를 그치고 올라가매 블레셋 사람들이 자기 곳으로 돌아가니라

누구의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는가를 알기 위한 제비뽑기에서 요나단이 뽑혔습니다. 이런 식으로 제비뽑기를 사용하는 것은 아주 잘못된 행위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종종 제비뽑기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신 적이 있지만, 제비뽑기를 하기만 하면 무조건 하나님의 뜻이 자동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죄가 누구에게 있는가를 따지기 전에 자신의 죄악을 먼저 살펴보는 것이 바른 태도일 것입니다. 하지만, 사울 왕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희생양을 찾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요나단이 뽑히게 되었을 때, 사울은 적지 않게 놀랐을 것입니다. 자신의 아들 요나단이 제비뽑기에서 뽑혔고, 자신이 한 말 때문에 죽여야 할 위기에 몰린 것입니다.

제비는 사람이 뽑으나 모든 일을 작정하기는 하나님께 있다는 말씀(잠 16:33)은 제비뽑기가 천편일률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아주 신비한 방법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제비뽑기라는 방식에 매여있는 분이 아닙니다. 제비뽑기만 하면 자동으로 하나님의 뜻이 나타난다고 생각하게 되면, 하나님이 제비뽑기에 종속된 분처럼 생각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제비뽑기를 사용하는 것은 미신적인 행위입니다. 물론 요나단이 제비뽑기에 뽑힌 것은 크게 보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일어난 일입니다. 하지만 요나단이 범인은 아니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제비뽑기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드러내지는 못한 것입니다.

요나단은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게 된 원인이 아니었습니다. 요나단은 죄인이 아니라, 오히려 이스라엘 민족을 블레셋의 손에서 구원해낸 영웅이었습니다. 그런데 잘못된 제비뽑기는 영웅을 죄인으로 만들어버렸고, 진짜 죄인은 그 잘못 속에 숨어버리게 만들어버렸습니다. 사울은 요나단에게 추궁했습니다. “도대체 네가 무슨 잘못을 하였느냐?” 그러자 요나단이 대답했습니다. “지팡이 끝으로 꿀을 조금 맛보았을 뿐입니다”(삼상 14:43). 형식적으로 보면 요나단에게는 사울의 맹세를 어긴 죄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금식하겠다고 하나님께 서원했는데, 꿀을 먹었으니까 말입니다.

하지만 요나단은 사울이 백성들에게 맹세하라고 할 때,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맹세를 한 사람이 아니었기에 죄가 성립되지도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요나단과 함께하셔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백성들이 아주 잘 알고 있었습니다(삼상 14:45). 요나단에게 죄가 있었다면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는 역할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요나단을 죽여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사울은 자신의 맹세와는 정반대로 요나단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죽이지 않았다고 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아무런 징계도 받지 않았습니다. 요나단은 책임을 져야 할 범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사울 왕 자신에게 있었습니다. 사울 왕은 금식의 서원을 했지만, 그것은 신앙의 동기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잘못된 동기에서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전쟁을 앞두고 군사들이 흩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허겁지겁 제사를 드렸던 것과 같은 행위였습니다. 또한, 문제는 백성들에게 있었습니다. 그들은 너무 배고픈 나머지 고기를 피째 먹었습니다(삼상 14:32-34). 그런데 엉뚱하게도 요나단을 범인으로 몰고 죽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희생양을 찾는 것은 우리들의 고질적인 질병입니다. 가정에 문제가 생기면, 내가 잘못한 부분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배우자 탓을 합니다. 교회 내에서 문제가 생기면,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지 반성하는 것이 아니라,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가를 찾으며 서로를 비난하려고 합니다. 모든 잘못은 나를 제외한 그 어느 누구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잘못을 먼저 보아야 합니다.

백성들은 요나단을 살리기 위해서 요나단을 변호했습니다. 사울은 정말 자기 자식도 죽이려고 달려들었습니다. 설마 정말로 자기 자식을 죽이려고 했을까요? 그런데 사사기에서 입다가 자신이 했던 서원 때문에 딸을 죽였던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보면, 사울도 옆에서 말리지 않았다면 요나단을 죽였을는지도 모릅니다. 결국, 사울의 칼에 맞아 죽을 수밖에 없었던 절체절명의 순간에, 백성들이 나서서 요나단을 구해냈습니다.

입다의 경우에는 말리는 사람들이 없었다는 것이 아쉽습니다. 입다의 서원은 섣부르고 잘못된 서원이었고, 신중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서원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던 영적인 암흑기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했던 것입니다. 그때에도 요나단을 위해 백성들이 일어났던 것처럼, 입다의 딸을 위해 일어났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죄로 인하여 영원히 멸망하게 되었을 때, 예수님께서 우리를 변호해주셨습니다(요일 2:1-2). 요나단은 백성들이 일어나서 변호할 만했습니다. 요나단은 영웅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겐 그런 장점이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들은 마땅히 죄로 인하여 죽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아무것도 내어놓을 것이 없는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셨고, 우리를 변호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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