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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로마서 3:23-26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1.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아주 뛰어난 피아니스트가 있었습니다. 각종 콩쿠르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었고 실력이 인정받는 그런 음악가였습니다. 국내에 돌아와 대학에서 후학들을 가르치고 싶었습니다. 마침 어느 대학에서 피아노 교수를 채용한다는 공고를 알게 되었고, 지원하였습니다. 한 명을 선발하게 되는데, 마지막 2명 안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 사람에 비하여 월등하게 실력이 있었던 그 사람은 최종적으로 선발되는 데 문제가 없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두 명의 후보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채용될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까지는 들었지만, 최종발표는 차일피일 미루어졌습니다. 인사권자와 인터뷰도 잘했지만, 계속 미루어졌습니다. 결국 아무도 그 학교에서는 채용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들린 이야기는 학교에 기여금 명목으로 돈을 냈었어야 한다는 말이었습니다. 씁쓸하게 그는 돌아서야 했습니다.

지금 들은 이야기와 같이 황당한 것처럼 들리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의 이야기입니다. 2,000년 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사형을 당했습니다. 그렇게 십자가에 힘없이 죽은 예수님을 믿어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이야기는 불신자들에게는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아니 크리스천 중에서도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착하게 산 사람도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가야 하는가? 반대로 아무리 죄를 많이 지었어도 예수님만 믿으면 천국에 갈 수 있는가? 이 두 질문에 대해서 모두 “예”라고 대답하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하지만 불신자들은 그것을 도무지 이해하고 납득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면 지옥에 갈 것이고, 아무리 악한 죄를 저질렀다고 해도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천국에 간다는 이야기는 결국 대학교수를 채용하는데,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뇌물을 가져다 바치지 않으면 채용될 수 없고, 아무리 실력이 없어도 뇌물을 가져다 바치거나 어떤 유력한 인사가 뒤를 봐주면 채용되는 것과 같은 불합리한 일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선택하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고, 아무리 악하게 살아도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선택하셨다면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말로 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하나님의 정의(justice)는 무엇이란 말입니까? 하나님은 불공평하단 말입니까? 공의로운 하나님이 아니란 말입니까? 이런 질문들이 떠오르게 될 것입니다.

실력이 충분해도 뇌물이라는 것이 추가적으로 더해져야 채용할 수 있듯, 예수님도 아무리 착하게 산 사람이라 할지라도 추가적으로 요구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필요한 것은 이 세상에 그 누구도 착하게 살 수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도토리 키재기를 하면서, 좀 더 깨끗한 사람, 좀 더 양심적인 사람, 법 없이도 살 사람을 말합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 그 누구도 구원을 얻을 만큼 완벽하게 인생을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 점을 성경은 분명하게 밝힙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그게 바로 인간의 진짜 모습입니다. 이 세상에 그 누구도 완벽한 인생을 살 수 없기에 주님의 도움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마치 대서양 한가운데 난파되어 바다에 빠져버린 타이타닉 호에 탔던 사람들과 같습니다. 빙산에 부딪혀 난파된 타이타닉 호에 탔던 2,223명 중에서 살아난 사람은 단 706명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구조를 받은 사람들은 어떻게 살 수 있었을까요? 그들은 수영을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잘할 줄 아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그때부터라도 수영을 배우기 시작해서 영국이나 미국까지 도달했던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살아난 사람들은 구조선의 도움을 받았던 사람들일 뿐입니다. 구조선이 와서 구해주었기에 살아난 것이지, 자신들의 수영 실력으로 헤엄쳐서 육지까지 갈 수 있었던 사람들이 아닙니다. 물론 수영 실력이 좋다면 다른 사람들보다는 조금 더 생명을 연장할 수는 있었겠지만, 저체온증으로 죽게 되는 것은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얼마 가지 못하고 기력이 다해 죽게 되는 것은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살아난 것은 구조선이 왔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저기서 절망적인 소식을 듣습니다.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유명한 목사님의 성적인 타락의 소식을 듣습니다. 한국 교회가 몰락하는 현상을 목도합니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소식은 21세기 대한민국에서만 들리는 소식이 아닙니다. 이미 예수님의 12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가룟 유다는 은전 30냥이 예수님을 팔아버린 배신을 한 바 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처음부터 예수님을 팔 목적으로 제자가 된 것이 아닐 것입니다. 어쩌면 베드로처럼 눈물을 쏟으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겠다고 결단했던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돈 앞에서 무너져버렸습니다. 가룟 유다뿐만이 아닙니다. 다른 제자들도 서로 싸우면서 누가 크냐고 하였습니다. 아니 그 이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윗이란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의 죄를 저질렀고, 그의 남편을 최전방으로 보내 죽이는 교살의 죄를 저질렀습니다. 가장 파렴치한 죄를 지은 것입니다. 모세도 마찬가지입니다. 온유함이 그보다 더 뛰어난 사람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분노하였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뛰어난 사람들조차 쉽게 타락할 수 있었다면, 우리와 같은 범생들은 얼마나 더 쉽게 타락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들 자신에게는 소망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이를 수 있을 만큼 아무런 죄를 짓지 않은 사람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에게 예수님이 필요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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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그런 우리들에게 소망이 주어졌습니다. 만일 우리가 영적으로 건강하다면, 즉 영적으로 건강해서 스스로의 힘과 노력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가능성이 0.0001%라도 있다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야 할 이유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해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다 죄를 범하여 단 한 사람도 하나님께 스스로 나아갈 수 없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에 대한 처벌을 대신 받으셨습니다. 우리가 당연히 받아야 할 형벌을 주님께서 대신 받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아무런 죄가 없으신 분입니다(히 4:15). 빌라도의 재판은 예수님에게 아무 죄가 없음을 보여주었으면서도 죽임을 당한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죽음을 로마서 3장에서 속량(ἀπολύτρωσις)이라고 표현합니다. 이 “속량”이란 표현은 우리가 실생활에서는 거의 안 쓰는 말이어서, 성경을 읽으면서도 대체로 무슨 뜻인지 모르고 읽습니다. 그래서 좀 더 쉬운 표현으로 바꾸어 번역하면 좋은데, 이 단어의 의미는 “몸값”입니다. 소말리아의 해적들이 한국 선원들을 인질을 잡고 그 인질을 풀어주는 조건으로 요구하는 것이 몸값입니다. 어떤 여성이 포주에게 창녀로 팔려서 매춘부로 일하고 있는데, 그 포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지불해야 하는 것이 몸값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사탄에게 사로잡힌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이제 우리는 영락없이 다 죽임을 당해야만 하는 처지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그 죽음으로부터 살려내기 위해 몸값을 지불해야 했습니다. 아무런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가 치러야 할 죽음을 대신 치러주셔서 우리를 살려내셨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몸값을 지불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다시 한번 분명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인질로 잡히지 않았더라면 몸값을 지불할 필요가 없습니다. 복음에 대한 모든 오해는 우리가 어떠한 상태인가에 대한 오해에서부터 비롯됩니다. 우리가 자유의 몸이라고 생각한다면,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몸값을 지불해주셨다는 것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노력해서 하나님께 충분히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주님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마 9:12). 우리에게 참된 영적인 의사이신 예수님이 필요한 것은 우리 모두가 영적인 환자이기 때문입니다. 그 누구도 건강한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내가 건강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어야만 구원을 얻는다는 말이 이해되지 않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하나님은 무심한 재판관이 아닙니다. 의로운 자에게는 상을 주고 악을 행한 자에게는 벌을 주고 끝내버리는 염라대왕과 같은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와 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시는 나머지 우리가 죄로 인하여 영원히 멸망을 당하는 것을 그냥 옆에서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었습니다. 바다에 빠져 죽어가는 우리를 TV 화면으로 지켜보면서 “왜 구조를 못하는 거지요?” 질문만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저 하늘에서부터 이 땅으로 내려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친히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에서 아무것도 남김없이 다 쏟으셨습니다. 물 한 방울, 피 한 방울까지 다 쏟으셨습니다.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충격을 먹고 마음이 먹먹해지는 겁니다. 더러운 죄를 지어서 아무런 소망이 없는 나를 위하여 희생을 당하신 주님 앞에 감격 가운데 서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즉 나의 공로가 하나도 들어가지 않고 전적으로 주님의 은혜로만 구원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황송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으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이제는 주님의 뜻대로 순종하며 살겠다는 결단을 하게 됩니다.

종종 사람들은 비아냥거립니다. “하나님이 다 용서해주신다며? 죄를 아무리 많이 지어도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며?” 죄를 마음대로 지으면서도 자신은 예수님을 믿으니까 구원을 얻는다고 거짓된 확신에 차기도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을 안다면 그런 태도가 나올 수 없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놀라워” 고백하면서 감사의 삶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자신이 죄인인 줄 모르는 사람에게는 복음은 돼지에게 던진 진주와 같습니다. 자신이 건강하다고 생각하는데, 약을 먹으라고 한다면 무시하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암을 치료할 수 있는 아주 효과적인 약이 개발되었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이 소식은 암에 걸린 환자들에게는 아주 기쁜 소식일 겁니다. 하지만 암에 걸리지 않은 사람들은 그런 소식을 들어도 아무런 감흥도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사람들은 모두 단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쇠렌 키르케고르가 말한 것처럼 죽음에 이르는 병을 가지고 있습니다. 암보다도 더 무서운 병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치료 약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라는 명약입니다. 내가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고 그 은혜의 처방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면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4. 가짜 약 전성시대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시대는 가짜 약 전성시대입니다. 우리를 치료하지 못할 가짜 약들만 판치고 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가짜 약 열풍이 분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펜벤다졸이라는 개구충약입니다. 어떤 미국인 폐암 말기 환자가 개 구충제인 펜벤다졸을 먹고 완치되었다는 동영상이 화제가 되면서, 암 환자들 사이에 펜벤다졸 열풍이 불었습니다. 어쩌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폐암 말기의 어떤 개그맨도 이 대열에 동참하면서 펜벤다졸을 복용하고 좋아지고 있다는 영상을 계속 올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은 실패를 인정하고 펜벤다졸 복용 8개월 만에 중단을 선언하였습니다. 그게 자신을 암에서부터 구해줄 것으로 생각했는데, 전혀 그런 효과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죽음에 이르는 병인 우리들의 영적인 질병에도 가짜 약들이 판치고 있습니다. 대체로 두 가지 종류의 가짜 약이 널리 유행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비움”의 약입니다. 우리의 모든 문제의 근원이 욕심과 집착에 있다고 진단하면서, 그런 욕심과 집착을 버리고 마음을 비우고 또 비우면 결국 우리가 고통에서부터 생로병사의 굴레로부터 해방될 것이라는 논리가 그 가짜 약의 원리입니다. 하지만 이런 비움의 방법은 결코 우리를 해방시켜주지 못합니다. 첫째로, 그렇게 우리가 마음을 비울 수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아무리 마음을 비우고 또 비워도 결코 비워지지 않는 것이 우리의 마음입니다. 죽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둘째로, 그렇게 비우는 것이 결코 바람직하지도 않습니다. 내가 마음이 편하자고 가족들과의 인연을 끊어버리고 마음을 비우는 것이 옳은 것일까요? 남들이야 어떻게 되든 말든, 나만 산속에서 참선하면서 마음을 비우면 되는 것일까요? 그런데 놀랍게도 수많은 사람들이 비움의 방법에 열광합니다. 펜벤다졸에 열광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또 하나의 가짜 약은 정반대로 “채움”의 약입니다. 정반대의 처방이지만, 진단은 똑같습니다. 우리의 모든 문제의 근원은 우리의 마음을 채울 수 있을 만큼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진단입니다. 비움의 방법은 그래서 마음을 비워보려고 하지만, 채움의 방법은 정반대로 채워서 마음의 그 빈공간을 없애보려는 것입니다. 이 방법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열광합니다. 그래서 서점에 가면 비움을 가르치는 책들이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올라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채움의 방법을 가르치는 책들도 인기리에 팔리고 있습니다. 주식 투자해서 돈을 버는 법, 땅에 투자하는 법, 영어를 단기간에 마스터하는 법 등등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데 비움의 약처럼 채움의 약도 가짜입니다.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합니다. 채움의 방법에도 두 가지 근원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는, 아무리 채우고 또 채워도 결코 채워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과 욕심이라는 것은 너무나도 커서 이 세상의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습니다. 둘째는 그것보다 더 큰 문제인데, 우리가 채우려고 하면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많은 손해를 본다는 점입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 애썼는데, 알고 보면 건강을 잃으면서 돈을 번 것이었고, 가족이 해체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돈으로 채워도, 명예와 권력으로 채워도 우리를 치유하는 게 아니라 결국 망하게 만드는 가짜 약들 뿐입니다.

우리에게 놀라운 소식이 있습니다. 성공률 100%의 명약이 있다는 소식입니다. 그것도 공짜로 준다는 소식입니다. 백신은 부작용도 있고, 효과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사랑은 단 한 사람의 영혼도 놓치지 않습니다. 그 십자가의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받은 은혜를 나누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5.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이 복음의 이야기는 로마서 3장만 읽고 끝날 것이 아닙니다. 바울 사도는 복음을 설명하다가, 12장에서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1-2)

흔히 이것을 명령법(imperative)으로 이끄는 직설법(indicative)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는 자가 되었으니(직설법), 이제는 하나님의 은혜에 합당하게 살아야 한다(명령법)는 것으로 귀결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다면(imperative), 구원을 받는 백성이 되는 것(indicative)이 아닌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종교는 후자를 말합니다. 비움의 방법이든 채움의 방법이든 어떤 방법으로든 최고의 경지에 올라가게 되면, 구원이 있을 것처럼 말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목표일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 우리를 먼저 구원해주셨습니다(indicative). 그러므로 이제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은 그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imperative). 특히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면서 늘 감사하며 믿음으로 살아가는 결단이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