뭣이 중헌디? (롬 2:17-29)

하나님의 법과 본성 (롬 2:12-16) +++ 성도 됨의 유익 (롬 3:1-8)

한동안 성탄절이나 12월을 맞이해서 절기와 관련된 메시지들을 우리가 살펴보았었는데요. 이제 다시 로마서의 말씀을 다시 살펴보게 됐습니다. 오늘 래오가 아주 예쁜 목소리로 귀여운 모습으로 성경 말씀을 읽어줬는데요. 로마서 2장 17절부터 29절까지의 말씀을 오늘 살펴볼 차례입니다.

항상 모든 것이 그렇지만 우리가 성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말씀 하나만 뚝 떼어가지고 보는 것은 별로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물론 전혀 안 보는 것보다야 낫지만, 성경 말씀을 어느 한 구절만 뽑아내서, 그 말씀만 문맥과 상관없이 어느 한 구절만 뽑아내게 되면, 그 말씀을 오해할 가능성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의 대화에서도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대화를 하다 보면 대화를 하는 그 과정 가운데 어떠한 마음으로 어떠한 의도를 가지고 이야기하고 있는지 전체적인 맥락을 이해하면서 들어야 할 텐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어떤 표현 하나, 어떠한 단어 하나에 열을 받기도 하고 화를 내게 될 때도 있습니다. 따라서 대화를 할 때라도, 이 말을 한다고 하면, 왜 이 말을 하고 있는지 전체적인 맥락을 살펴야 하는 것이죠. 만일 우리들의 부모님이 자녀들에게 이야기를 한다고 하면, 우리 부모님이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이 말을 해주는구나! 그 맥락 안에서 그 말을 이해해야 하는 겁니다. 그렇게 그 전체적인 그 맥락 속에서 한 표현 한 글자 하나하나를 이해하게 된다고 한다면, 어쩌면 불필요한 갈등들을 많이 줄여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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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우리들의 인생을 이해하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죠.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일들을 만납니다. 때로는 어려운 일도 만나고, 때로는 고통스러운 일도 만나고, 때로는 실패하는 일들도 만나게 될 겁니다. 그렇지만 우리들의 인생을 우리가 묵상하게 될 때, 우리들의 인생을 생각하게 될 때,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그 하나님,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그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그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러한 일을 베풀어주셨다고 하는, 이러한 일을 허락하셨다고 하는 그 전체적인 맥락 속에서, 그 하나를 바라보게 되면, 우리가 이해할 수도 있고, 힘들고 어려운 고난의 순간들도 헤쳐나갈 수가 있는 것이죠.

그런데 그 큰 그림을 보지 않고, 지금 고난당하고 있는 것만, 지금 어려움 당하고 있는 것만, 지금 실패 한 번만 바라보게 되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지 못하게 될 때가 많습니다. 따라서 항상 우리는 큰 그림이 무엇인가를 봐야 되는 것이죠.

성경을 읽을 때도 역시 마찬가지인데요. 전체적인 맥락이 무엇인가? 그 맥락을 놓치게 된다고 한다면, 그러면 그 부분의 말씀들을 오해할 가능성들이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오래간만에 로마서 2장 17절에서부터 29절의 말씀을 읽었는데,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말씀이 로마서라고 하는 전체의 큰 서신 가운데서, 어떠한 이야기를 하는 가운데 이 말이 나온 것인지를 먼저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제가 한번 요약을 해봤습니다.

도표를 한번 봤으면 좋겠는데요. 로마서 1장과 2장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이렇게 요약할 수가 있습니다. 1장 1절에서부터 7절까지는 바울 사도가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편지를 쓴다고 하는 인사말이 기록돼 있습니다. 내가 복음의 사도가 된 이 바울 사도가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인사를 건네면서, 내가 편지를 쓴다라고 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죠. 그다음에 바울 사도는 본론으로 들어갑니다. 8절에서부터 17절의 말씀에서, 바울 사도는 내가 로마를 방문하여 여러분들에게 은사를 나누어주고 싶다. 복음을 함께 나누고 싶다고 하는 그런 소망을 피력하고 있습니다. 내가 여러분들에게 복음을 나누어 주고 싶은데, 그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나는 그 복음에 대해서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이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시는 하나님의 그 신실하심이 나타난 것이라고 설명하는 내용이 8절에서부터 17절까지에 있습니다.

18절에서부터는 내가 복음을 나누고 싶은데, 이 복음이 왜 우리들에게 필요한가에 대해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 세상에 오셨는가? 왜 우리는 복음이 필요한가? 왜 우리에게 예수님이 오셔야만 했는가라고 하는 그 질문에 대해서, 답은 그것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기 때문에 복음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만일 우리가 진노 가운데 있지 않다고 한다면, 만일 우리가 실패한 인생이 아니라고 한다면, 만일 우리가 열심히 노력해서 스스로 하나님에게로 갈 수 있다고 한다면, 예수님께서 굳이 이 세상에 오실 이유가 없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있기 때문에, 복음이 필요한 것이고, 예수님이 오셔야만 했다고 하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18절에서부터 2장 마지막절까지의 말씀인데요.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의 진노에 있다고 하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법을 몰랐던 사람들도 진노 아래에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법을 몰랐다고 핑계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도 진노 아래에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18절에서부터 23절까지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악을 행하는 자들을 그냥 내버려 두셔서, 그들이 악을 행하도록 그냥 내버려 두셨다고 하는 내용이 24절에서부터 32절까지의 말씀이고요. 그런데 하나님은 어떠한 하나님인가? 우리가 행한 대로 갚으시는 하나님, 선을 행하면 상을 주시고, 악을 행하면 벌을 내려주시는 그 하나님이신데, 그런데 우리 모두가 다 선을 행한 것이 아니라, 악을 행해서 다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다고 말하면서, 율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든 율법이 없는 사람이든, 모두가 다 심판을 받게 되었다고 하는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는 그런 내용입니다.

율법이 없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에게는 심판할 기준이 없는 것이 아니라, 이미 양심이라고 하는 기준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법을 이미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 심어놓았기 때문에, 그 양심의 법에 따라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고, 진노를 당하게 될 거라고 하는 것이 12절에서부터 16절까지의 말씀이고요. 오늘 우리가 읽은 17절서부터 29절까지의 말씀은 유대인들은 율법을 가지고 있지만, 그런데 그 율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율법대로 살지 않고 악을 행했기 때문에 결국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든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을 이야기하는 과정 가운데서 오늘 본문의 말씀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전체적인 흐름이 이해가 되십니까? 네 고개를 끄덕이시네요. 감사합니다. 반응해 주셔서.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모든 사람들이 놓여져 있기 때문에, 그 어느 누구도 완벽한 사람이 없고 다 실패자들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오셔야만 했다고 하는 이 사실을 설명하는 과정 가운데서, 오늘 본문의 말씀을 해주고 계시는 겁니다.

오늘 본문의 메시지를 한마디로 요약하자고 한다면, 아무리 이스라엘 민족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할지라도,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언약의 백성이요. 할례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요. 율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것 가지고 구원을 보장받는 게 아니라고 하는 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빌립보서 3장 13절에서부터 14절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표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 가노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목적을 이루었다는 얘기입니까? 아직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고 하는 이야기입니까? 아직 달성하지 못했다고 하는 이야기죠. 그런데 이 말을 한 사람이 누구죠? 사도 바울입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에 있는 교인들을 향해서 하는 말이, 여러분 나는 완성 단계에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나는 아직도 부족합니다. 나는 아직 잡은 것도 아니고, 아직 이룬 것도 아니고, 아직 부족한 사람이고, 나는 저 표대를 향해서 목적을 향해서 지금도 달려가고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한 사람이 누구냐면, 다른 사람이 아니라 사도 바울이라고 하는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하는 것이 아주 놀랍습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야말로 정말 뛰어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구약 성경 가운데서 가장 위대한 사람을 찾아내라고 한다면, 여러분은 누구를 꼽을 수 있겠습니까? 아마 모세를 꼽을 수 있을 겁니다. 아마 다윗을 꼽을 수 있을 겁니다. 어쩌면 아브라함도 그 안에 집어넣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신약에서 위대한 사람을 꼽으라고 한다면, 여러분 누구를 꼽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 빼고, 당연히 사도 바울이죠. 사도 바울이 어쩌면 신약 성경 가운데서 가장 두각을 드러낸 사람이, 바로 사도바울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그 사도 바울의 고백이 뭐냐면 나는 완성된 사람이 아니다. 나는 아직 이루지 못했다. 나는 아직 달려가고 있는 중이다라고 고백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 정말 놀라운 모습입니다.

사도 바울의 이 고백은 우리들이 흔히 가지고 있는 생각과는 정반대의 생각입니다. 우리들은 어떤 생각을 하냐면, 우리는 우리가 어떤 직책을 얻는다든가, 우리가 어떤 직분을 얻게 되면, 그것이 우리들의 얻어야 할 최종적인 목표일 거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신앙적인 단계에 있어서 우리의 목표는 어디일까요? 처음 교회에 나왔습니다. 처음 교회에 나와가지고, 예수님을 믿기 시작해서 어느 정도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세례를 받게 됩니다. 세례를 받고 어느 정도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서리 집사로 임명을 받게 됩니다. 또 서리 집사로서 어느 정도 사역하다 보면, 몇 년이 지나면, 그러면 권사가 되기도 하고 안수 집사가 되기도 하고 또 더 지나게 되면 장로님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 그렇게 되면, 아 내가 이룰 수 있는 것은 다 이루었구나. 내가 이제 권사가 됐고, 내가 장로가 됐으니까, 내가 올라갈 수 있는 만큼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갔을 거라고 생각하는 그런 경향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떤 분은 장로가 된 것으로도 만족하지 못 해가지고, 은퇴하신 이후에 목사가 되려고 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어쩌면 목사라고 하는 거, 이게 어쩌면 가장 최고의 신앙의 단계라고 생각하는 경향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전에 부흥회를 했을 때는, 요즘은 잘 모르겠습니다마는, 예전에는 부흥회를 하거나 수련회를 하거나, 여러 가지 중고등부 수양회를 간다든지 집회를 간다든지 하게 되면, 강사 목사님께서 오셔가지고, 막 집회를 한 다음에 마지막 날이 되면 헌신 기도를 막 시켰습니다. 강사 목사님께서 헌신 기도를 막 시키면서, 그때 강사 목사님이 했던 말이 뭐냐면,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 하나님이 종의 종이 되겠다고 선언하는 사람 손 드십시오. 그랬어요. 기억나십니까? 그랬어요. 여러분 가운데 하나님의 종이 되겠다고 하는 사람 일어서세요. 선교사가 되겠다고 하는 사람 일어서세요. 여자분들 가운데 사모가 되겠다고 하는 사람 일어서세요. 우리 제 아내는 사모가 되겠다고 하는 거야 안 일어섰어요.

제가 고등학생 때 그때 ccc라고 하는 단체에서 했던 아주 큰 집회가 있었습니다. <나는 찾았네?라고 하는 그런 집회가 있었는데요. 전국에서 수많은 학생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장충체육관에 몰려 들어가지고, 그 장충체육관 정말 큰 곳에서,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중고등부 학생들이 다 그 자리에 앉아서 집회를 하고 있는데, 그때 강사 목사님이 누구셨냐면 김준곤 목사님이셨습니다. 그 김준곤 목사님께서 그때 무슨 설교를 했는지 정확하게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아마도 이사야서의 말씀을 했던 것 같아요.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주신다고 하는 그 메시지를 전한 다음에 김중곤 목사님께서 외쳤습니다.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 목사가 되기를 소망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선교사가 되실 분이 계십니까? 그 자리에 일어서십시오. 그래 가지고 제가 벌떡 일어났어요. 그러면서 제 마음이 뜨거웠어요. 내가 주의 종이 돼야 되겠다라고 하는 그런 뜨거운 마음을 가지고 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겠다고 헌신했는데, 그때 제 어렸을 때 나이에, 그때 생각했던 것이 무엇이냐 하면, 목사가 되는 것, 선교사가 되는 것, 주의 종이 되는 것이야말로 가장 고상한 그런 목적이라고 그렇게 생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신학 공부를 하고 나중에 목사 안수를 받았는데요. 제가 26세, 만 26세 아주 새파란 나이에 목사를 목사 안수를 받게 됐습니다. 군대에 들어가야 했기 때문에, 저는 좀 일찍 받았는데요. 아직 새파란 그 나이에 목사 안수를 받게 되자, 우리 교회에서 계셨던 아주 나이가 지긋하신 장로님께서 제게 다가와서 고개를 숙이며, 목사님 목사님 하면서, 제게 존댓말을 할 때, 제가 엄청나게 황송한 느낌을 받았는데, 그때 생각이 무엇이냐면 목사라고 하는 것이 가장 높은 신앙의 단계인가라고 하는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근데 정말 그런가요? 내가 목사만 되면, 내가 권사가 되고, 내가 장로가 되면, 우리가 올라갈 수 있는 가장 높은 신앙의 단계로 올라간 것일까요?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말씀 가운데서 빌립보서 3장의 말씀 가운데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게 아니다. 나는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않는다. 바울 사도는 이미 사도라고 하는 반열에 올라갔습니다. 그러니까 어쩌면 가장 높은 위치에, 신앙의 단계 가운데 올라간 것처럼 생각이 됐는데, 그 사도 바울이 생각하기를, 나는 사도다. 내가 이래봬도 사도라고, 그렇게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나는 아직 이루지 못했다. 나는 아직 잡지 못했다. 나는 아직 부족하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왜냐하면 사도가 되어도, 만일 그 사도가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도 역시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수많은 사람들을 가르쳤을 때, 예수님 주변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들 가운데서 예수님께서 특별하게 선택한 사람들이, 어쩌면 70인의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70인의 제자들보다도 더 이너 서클(inner circle)에 누가 있었냐면 열두 제자가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열두 제자로 뽑히게 된다고 하면, 얼마나 영광스러운 직분이겠습니까?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갔을 거라고 생각이 되는데요. 그런데 그 열두 제자 가운데 누가 있었죠? 가롯 유다가 있는 거에요. 열두 제자면 뭐해요? 예수님을 돈 받고 팔아버린 배신자가 12 제자 가운데 있었던 겁니다.

베드로는 어땠습니까? 베드로는 12 제자들 중에서도 특별하게 더 이너서클(inner circle) 안에 들어간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특별히 세 명을 더 사랑하시고 더 붙들어주셨는데요.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늘 더 안에서 활동하게끔 그렇게 만들어주신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베드로라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어쩌면 제자들 중에서 수장이라고 할 수도 있는 그런 사람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그런 베드로를 향해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무엇이냐면,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그랬어요.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고 말씀하시고, 예수님의 가장 이너서클(inner circle) 그 안에 들어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예를 우리가 성경에서 얼마든지 많이 찾아볼 수가 있겠는데요. 제사장이 되는 건 얼마나 거룩한 일입니까? 그런데 그 제사장이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겨주는 일을 했다고 한다면, 제사장이라고 하는 그 의미가 없는 것이죠. 오늘날에도 그런 예를 얼마나 많이 경험합니까? 저 사람은 차라리 장로가 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뻔했다라고 하는 그런 비난을 듣는 경우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무엇이 중요한가요? 뭣이 중한디? 뭐가 중요해요? 장로가 되고, 목사가 되는 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뭐가 중요해요?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게 중요한 거에요.

너무나도 안타까운 것은 우리가 임직 선거를 하면서 피택 장로가 되고, 피 집사가 되고 피택 권사로 선정이 되는 그런 일들이 있는데, 그때 선택받지 못한 사람들은 너무나도 괴로워합니다. 나를 선택해 주지 않았다고 하는 사실 때문에 너무나도 힘들어하고 고통스러워합니다. 충분히 고통스러워할 만한 일일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아무튼 선택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그렇게 기분 좋은 일은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정작 괴로워해야 될 일이 뭐예요? 내가 선택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을 괴로워하는 것보다 더 괴로워해야 될 일이 있다고 한다면, 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것, 하나님의 뜻에서부터 벗어나고 있는 거 하나님의 말씀과 전혀 상관없이 길을 가고 있는 것에 대해서 더 가슴 아파하고 더 슬퍼해야 되는 거 아니에요? 그것을 애통해야 하는 것이죠.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떠한 직분을 가지느냐? 내가 어떠한 신분을 갖는가? 내가 어떤 위치에 올라가느냐?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정말 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이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로마서 2장 17절에서부터 29절의 말씀은 바로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유대인들은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선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수많은 민족 가운데서 특별히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선택하셨습니다. 다른 민족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을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그 하나님의 선택된 민족이 바로 이스라엘 민족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을 생각하기를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이라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받은 자다라고 하는 그런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이기 때문에 우리는 할례를 받은 자들인데, 저 블레셋 사람들 저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 저 이방인들, 저 할례를 받지 못한, 저 이방인들 하면서 비난하고, 나는 할례를 받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생각을 한 것이죠. 뿐만 아니라 모세가 준 그 모세의 율법을 우리가 받았는데, 저 이방인들은 모세의 율법도 모르는 저런 야만인들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 이스라엘 민족을 향해서 했던 파울 사도의 메시지가 무엇이냐 하면, 로마서 2장 21절에서부터 24절까지의 말씀입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은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둑질하지 말라 선포하는 네가 도둑질 하느냐?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전 물건을 도둑질하느냐?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유대인이라고 하는 그 사실이 자동으로 구원받을 수 있는 표가 아닌 것이고, 보장이 되지 않는다는 이 바울 사도의 이 말씀은 그 옛날 세레 요한이 했던 메시지와 아주 똑같습니다.

세례 요한이 와서 외쳤던 내용이 마태복음 3장 7절에서부터 9절 말씀에 기록되어 있는데요.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계의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리라”고 말씀 했습니다. 우리가 할례를 받아서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었다고 하는 게 자랑거리가 아닌 거죠. 율법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이 자랑거리가 아닌 겁니다.

만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라고 하는 그런 자부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게 된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했기 때문에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말씀을 해주고 계시는 겁니다.

왜 우리는 예수님이 필요합니까? 왜 우리는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까? 그것은 율법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양심의 법에 따라 볼 때, 그들이 악한 일을 행했기 때문이고, 이스라엘 민족은 율법을 알았고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할례를 받고 율법을 가르치고 있으면서도,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했기 때문에 모두가 다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것이고,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한 줄로 믿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비아냥 당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웃 사람들에게 가서 예수 믿으세요라고 말하면, 고맙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너나 잘하세요 하는 그런 비아냥 소리를 듣습니다. 그런데 그게 우리들의 진짜 모습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았다고 하면서도, 그러나 늘 넘어지고 늘 쓰러지고 늘 이율배반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이기 때문에, 오늘 우리도 하나님의 은총이 필요한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날마다 주님 도와주옵소서. 믿음의 길을 가는 가운데, 저희들이 시험에 들지 않도록 악에 빠지지 않도록 도와주옵소서. 분노하고 싶을 때 저희들의 마음을 만져주시고, 탐욕스러운 마음이 들 때 저희들의 마음을 제거해 주시고, 여러 가지 악한 생각들이 들 때 주님께서 우리들의 마음의 왕좌에 오셔서, 우리들의 생각을 바꾸시고 인도해 주옵소서. 이제는 주님의 뜻대로 살기를 소원합니다. 날마다 날마다 기도하면서 주님의 그 존재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2022년 한 해 우리가 완벽하게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바울 사도의 고백처럼 나는 아직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푯대를 향하여 달려간다고 했는데, 오늘 저와 여러분들의 삶 가운데서 그러한 푯대를 향해서 달려갈 수 있는, 그리고 넘어질 때마다 주의 십자가 바라보며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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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의로운 심판 (롬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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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버려두사 (롬 1:24-32) +++ 하나님의 법과 본성 (롬 2: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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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는 로마서의 말씀을 살펴보고 있는 가운데 있는데요. 지난 시간에는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모두가 다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 살펴본 적이 있습니다. 혹시 기억이 나십니까? 기억이 나실 거라고 생각이 드는데요.

그러한 지난주에 살펴본 말씀에 이어서, 오늘 읽은 말씀은 다시 한번 우리 사람들은 그 누구도 죄가 없는 사람이 없고, “다 죄인들이다”라고 하는 사실을 반복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죄를 지적하면서, “저런 나쁜 사람, 저 아주 몹쓸 사람” 하면서 비난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게 비난하는 사람도 똑같은 죄를 짓고 있는, 너무나도 모순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 우리 인생인 것이고, 그러한 인생은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그런 존재라고 하는 것을 오늘 본문에서 다시 한번 이야기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번 우리가 질문을 던져봤으면 좋겠어요.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 있을 것이고, 죄를 지은 모든 인생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성경에서 표현하고 있는데요. 정말일까요? 정말 모든 인류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고 하는 것이 정말 맞는 이야기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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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말씀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는 계시고, 그리고 그 공의의 하나님께서는 선을 베푼 자에게는 상을 내리시고, 악을 행한 자에게는 심판하신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정말 맞는 이야기인가?” 하는 그런 질문을 던져 던져보고 싶습니다.

최근에 넷플릭스라고 하는 곳에서 한국 드라마가 또다시 출시가 되었는데요. 연상호 감독이 만든 <지옥>이라고 하는 영화가 출시되어서, 지난번에 나왔던 <오징어 게임>에 이어서 또다시 1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고 하는 뉴스를 아마 혹시 들어보셨을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저도 궁금해서 한번 도대체 어떤 드라마인가 하고 살펴봤습니다. 어떤 드라마이냐면, 천사가 나타나서 어떤 사람에게, “당신은 몇 년 몇 월 며칫날 몇 시에 죽는다”라고 예고를 미리 합니다. 그러면 정말 그 시간이 되면, 지금 화면에 나오는 것처럼 죽음의 사자가 셋이 나와서, 그 사람을 죽여버린다고 하는 그런 이야기로 진행되는 것이 <지옥>이라고 하는 드라마입니다. 이제 화면을 치워져도 괜찮겠습니다. 제가 봤는데, 재미는 좀 없어요. <오징어 게임>보다는 재미가 좀 없는데, 그런데 그 드라마 통해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종교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지옥이라고 하는 주제, 심판이라고 하는 주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참아가면서 끝까지 다 봤습니다.

그런데 그 드라마를 통해서 말하려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면, 무슨 얘기를 하냐면, “하나님의 심판 같은 거, 없다”가 드라마의 결론입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고통스러운 일들, 어떤 사람은 병을 얻게 되고, 어떤 사람은 교통사고를 당하기도 하고, 정말 끔찍한 일들이 벌어지는,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는데, 이렇게 일어나고 있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에 의해서 통제되어서 악한 자들에게 심판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그냥 살다 보면 일어나는 일이다. 우리의 죄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은 없는 것이고, 공의로운 심판 같은 것은 없는 것이다”라고 하는 것을 강하게 말하고 있는,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좀 반기독교적인 그런 메시지를 담고 있는 드라마가 바로 지옥이라고 하는 드라마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 드라마에 열광하는 것을 봤습니다. 연상호 감독은 이 드라마를 통해서 무슨 이야기를 하냐면, “여러분, 쫄지 마세요. 하나님이 없는 겁니다. 하나님이 심판하는 거 아닙니다. 그냥 재수 없어서 그런 일 당하는 겁니다. 괜히 쫄지 마시고, 그냥 자유롭게 살라”고 하는 것이 이 드라마에서 말하고 있는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하나님이 계시는가? 심판하시는 하나님, 공의로운 하나님이 계시는가? 계시지 않는가?”라고 하는 그 질문에 대해서, 우리 크리스찬들이야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것을 믿지만,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계시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왜 불신자들은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하는 것은 그런 건 없다고 주장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이 세상을 바라볼 때, 이 세상이 엉망진창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만일 선하신 하나님, 그리고 공의로우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이 계시다고 한다면, 그러면 악한 사람에게는 심판을 내리시고, 그리고 선한 사람들에게는 보상을 해주는, 그래서 정말 이 세상이 참 공의롭게 돌아가고, 하나님이 계신 것처럼, 통치자가 있어서, 그 통치자의 뜻대로 정말 잘 돌아가면, “하나님이 계시는구나”라고 하는 것을 알 텐데, 이 세상이 돌아가는 것이 엉망진창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하나님이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하는 것은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하는 그런 추측을 하게 만드는 겁니다.

우리나라 같은 경우는 안전한 나라입니다. 길거리를 걸어 다녀도 안전하고, 우리가 생활하는 데 전혀 두려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에는 공권력이 살아 있어서, 경찰력이 뻗치고 있어서, 악한 사람들이 마음껏 활개를 치지 못하는 것이죠. 하지만 저 개발도상국에 가면, 정말 낙후된 나라에 가면, 마치 정부가 없는 것 같아요. 깡패가 온갖 나쁜 짓을 하고 있어도, 마약 단체가 그렇게 나쁜 짓을 하고 있어도, 전혀 공권력이 미치지 못하는, 그래서 마치 무정부 상태와 같은 그런 나라들이 있는데, 그런 나라에 가면, “이런 나라에는 정부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고 있구나”라고 사람들이 느끼게 되는 것처럼, 어쩌면 이 세상이 온 세상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하나님께서 그 하나님의 공권력을 발휘해서, 정의를 바로잡고, 악한 자는 심판하고, 선을 행한 자에게는 상을 내리시는, 그런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진다면, “하나님이 계시겠구나”라고 생각하겠는데, 근데 우리의 현실을 바라보면, 그렇지 않은 경우가 너무나도 많다는 겁니다. 악을 행한 사람 정말 파렴치한 사람은 아무런 고통을 당하지 않고 떵떵거리며 살다가 천수를 누리고 죽어요. 그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어요. 그런데 선을 행하는 사람, 의를 위해서 수고한 사람들, 정말 착하게 살려고 했던 사람들은 아무런 것도 누리지 못하고, 고난 속에서 힘들게 살다가, 그리고 정말 억울하게 죽어가는 그런 모습들을 우리가 목도하게 되면서, “과연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 맞습니까? 하나님께서 공의롭게 심판하시는 게 맞습니까?”라고 질문을 던지게 되는 것이죠.

그런 질문들에 대해서 이 <지옥>이라고 하는 드라마는 우리를 향해서 외치는 겁니다. “속지 마! 하나님은 없어! 하나님의 심판 같은 건 없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죠. 이런 문제에 대해서, 오늘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성경은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습니까? 성경의 이야기는 아주 일관적인 대답을 우리들에게 주고 있습니다. 성경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시고, 하나님께서는 악을 행한 자에게는 심판하시고, 선을 행한 자에게는 상을 내리신다고 하는 것이 성경에서 가르쳐주고 있는 일관적인 메시지입니다.

오늘 읽은 로마서 2장 4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돼 있습니다. “혹 내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라고 쓰고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이 말은 지금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당장 심판하지 않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사람들이 죄를 짓고, 악을 행하고, 정말 심판을 받아 마땅한 사람들이 널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마치 계시지 않는 것처럼, 아무런 심판을 하고 있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이 아무런 감정이 없는 재판관, 심판관이 아니라,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회개할 것을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또 기다리신다는 거예요. 그냥 잘못했으니까, “넌 불합격” 처리해버리는 것이 아니라, “넌 잘못했으니까, 지옥”하고 끝내버리는 것이 아니라, “너, 그러다가 망한다. 셋 할 동안에, 잘 들어. 하나! 둘! 하고 셋 하지 않고, ‘둘 반’ 그러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당장 심판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성경의 가르침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이 참고 기다리시면서, 회개할 것을 기다리면서, 우리들에게 기회를 더 주시고, 또 주시고, 또 주시는 것인데, 그러한 것을 보면서, 하나님이 없는 줄 알고 착각하면서 뻔뻔하게 살아서는 안 된다고 하는 말씀이, 오늘 4절에서 우리들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그런 하나님을 보면서 오해하는 것이죠. 착각하는 것이죠. “내가 죄를 지어도, 아무 문제 없구나! 내가 죄를 지어도, 하나님께서 심판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이 안 계시기 때문이겠구나”라고 생각하는 것이고, 더 나아가서, 내가 이렇게 악한 일을 행해도, 하나님께서는 보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이고, 그래서 계속해서 죄를 짓는 일을 계속하는 겁니다. 왜냐? 심판이 없는 것 같으니까요.

대표적인 예가 어디에 나오냐면, 창세기에 나옵니다. 창세기 4장에 보면, 라멕이라고 하는 사람이 등장하는데, 라멕은 자기 두 부인을 향해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창세기 4장 23절에서부터 24절 말씀입니다.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 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라멕이 가인을 본 겁니다. 그런데 그 가인이 자기 동생을 쳐 죽인 살인자인데, 하나님께서 그 살인자 가인을 심판하지 않고 보호하시는 그 모습을 보면서, “마음대로 죄를 지어도 괜찮구나!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하는 것은 없구나! 내가 사람을 죽이고, 다른 사람이 나를 때렸다고, 내가 저 사람을 죽여도 아무 문제없다! 하나님은 나를 심판하지 않는다!”면서 뻔뻔하게 살아가고 있는 모습 대표적인 예가 라멕이라고 하는 사람이 등장하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그렇게 뻔뻔한 사람이 정말 사악한 라멕과 같은 사람이 성경에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 라멕과 같은 사람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내 옆에 있는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이 있어요. 미워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인데, 미워하면서도 죄책감이 없어요. 하나님께서 지금 당장 심판하지 않으니까, 괜찮은가 보다. 미워해도 괜찮은가 보다 하면서, 계속 미워하며 살아가고 있는 거죠. 신실하게 삶을 살고 있지 않으면서, 마음에 두려움이 전혀 없는 거예요. 왜? 지금 당장 하나님께서 심판하지 않으니까, 주님께서는 형제를 용서하라고 하셨고, 원수를 용서하라고 하셨지만, 우리가 용서하지 않고, 마음속에 옹졸한 마음을 가지고 살고 있으면서도, 하나님 두려운 줄 모르고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이냐면, 지금 당장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심판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니까, 그냥 뻔뻔하게 계속 미워하면서, 계속 미워하고, 살인을 마음속에 살인을 하면서, 용서하지 않으면서도 괜찮은 줄 착각하며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슬쩍슬쩍 거짓말하고, 슬쩍슬쩍 속이고, 슬쩍슬쩍 내 것이 아닌 것을 내가 마음껏 편취하면서도, 거리낌 없이 살아가면서, 사람들 앞에서는 거룩한 척, 가장 신실한 척, 위선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이 바로 저와 여러분들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들을 향해서 드라마 <지옥>에서는 한 술 더 떠서 우리들에게 말합니다. “괜찮아. 하나님, 없어! 괜찮아. 하나님이 심판 안 해. 지금 우리가 이 세상에서 만나는 것은 그냥 어쩌다 보니까 만나는 거야. 교통사고 당했다고 어떤 어려움이 있다고, 그때마다 마음속에 좀 쫄리지? 내가 혹시 죄를 지어서 이런 것은 아닐까? 내가 오늘 신앙생활 잘 못해서 이런 건 아닐까? 그런 두려운 마음이 들 때, 그것은 순 가짜야! 저 사이비 종교가 너희들을 착취하기 위해서 만든 거짓 프레임이니까, 그 말에 속지 말고,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것, 그냥 믿고 나가라”라고 하는 것이 어쩌면 이 드라마에서 말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물론 사이비 종교 단체가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해서 우리를 편취할 수 있기 때문에, 사실 이 드라마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우리들에게 어떤 교훈을 주는 면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당장 우리들에게 심판이 없다고 해서, “하나님이 안 계시다”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을까요? 정말 그럴 수 있을까요? 지금 이 세상에 심판이 없다.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 정말 살인마가 같은 사람이 정말 파렴치한 같은 사람이 떵떵거리면서 잘 살다가 아무 문제 없이 천수를 누리고 죽는 그 모습을 보면서,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결론이 하나님은 전혀 심판하지 않는 그런 하나님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 그런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을까요?

두 가지 가능성이 존재하는 겁니다. 첫 번째 가능성은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아무 일 안 일어난다고 하는 가능성입니다. 거짓말이야! 하나님이 있다고 하는 거, 거짓말이고, 하나님이 심판한다고 하는 거, 거짓말이고, “그냥 이 세상은 저절로 돌아가는 거야”라고 하는 가능성이 하나입니다.

근데 그 가능성만 있는 것이 아니라, 또 하나의 가능성이 있는 것이죠. 그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계시지만, 우리로 하여금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면서, 또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또 참고, 또 참고 계시기 때문에, 그렇게 된다고 하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있는데, 우리가 이 두 가지 가능성 중에서 어떤 것이 옳다고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들은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것을 믿는데요. 그 이유는 성경이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증거가 온 세상에 널려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마치 어머니가 우리 집에 다녀가면, 자취하고 있는 그 청년의, 자취하고 있는 어떤 학생의 집에 어머니가 다녀가게 되면, 다녀갔다고 하는 말을 하지 않아도, 그 증거가 방 안 구석구석에 다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다고 하는 증거가 온 세상에 곳곳에 넘쳐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믿을 수 있는 것이고, 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양심에 그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하나님의 법이 새겨져 있기 때문에, 등등, 여러 가지 이유를 보면, 하나님께서 살아계신 것을 알 수 있을 겁니다.

성경의 가르침은 일관적이죠. 로마서 2장 6절에서부터 8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 여러분 믿으십니까? 이것을 믿을 수도 있고, 믿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계시고 심판하신다고 하는 사실을 믿을 수도 있고, 안 믿을 수도 있는데요. 안 믿으면 마음은 편합니다.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생각하지 아니하면, 겁낼 것이 없습니다. 죄책감을 가질 필요도 없고, 마음 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안 계시다고 믿으면, 하나님이 사라져버리죠? 어떻게 되나요? 우리가 하나님이 안 계시다고 믿으면, 하나님이 없어져 버리나요? 그게 아닌 거죠. 우리가 눈을 감고 보지 않으면, 없어지나요? 이 세상에 고통과 슬픔이 있어서, 그걸 놔두고 멀리 떠나면, 그 문제가 없어지나요? 아니요. 우리가 동굴 속으로 숨어 들어가면, 문제가 없어지는 게 아니에요. 있어요. 그대로 있어요.

제가 아주 어렸을 때 들었던 이야기인데, 이게 사실인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꿩이라고 하는 새를 잡으려고 하면, 그렇게 별로 어렵지 않다고 해요. 꿩을 잡으러 막 쫓아가면, 그 꿩이 막 도망가다가 조그마한 구멍을 발견하면, 머리를 팍 쳐박고, 가만히 있는답니다. 자기의 머리를 구멍 속에다 집어넣으면, 더 이상 사람이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까, 안전하다 하고, 안심한다는 거예요. 그러면 쫓아가서 그냥 잡기만 하면 된대요. 사실인지 아닌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우리 인간들이 어떤 생각을 하냐면,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면, 마음 편해, 하나님이 없어진 줄 알아요. 심판하신 하나님이 안 계신 줄 알아요.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가르쳐주고 있지 않는 거죠. 저는 건강검진을 잘 안 받아왔었는데요. 미국에 살면서 거의 병원에 가본 적이 없고, 그래서 사람들이 저에게 묻습니다. “목사님, 목사님은 건강상에 문제가 있나요? 없나요?” 그러면 제가 자신 있게 대답합니다. “저, 아무것도 없는데요. 당뇨도 없고, 콜레스테롤도 없고, 혈압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요.” 왜? 검사를 안 했으니까, 몰라요. 그런데 검사를 안 해서 모르면, 없는 게 아니고, 검사를 안 해서 없는 줄 알았는데, 어느 날 가보면 암이에요. 괜찮은 줄 알았는데, 어느 날 가보면 당뇨예요. 검사 안 하면, 마음은 편할 수 있겠지만, 우리의 질병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듯, 우리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면, 마음이 편할지 모르겠지만, 그러나 성경은 분명하게 우리를 향해서 말씀하고 계시는 줄로 믿습니다.

결국 우리의 문제가 무엇인가요? 지난 시간에도 살펴보고, 오늘 말씀 가운데서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다고 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거룩한 척 하는 사람일지라도, 사실은 그 사람이 비난하고 욕하는 그런 행위를 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이에요. 거룩해 보이는 저 사람은 죄가 없을까요? 착해 보이는 저 사람은 죄가 없을까요? 이 강단 위에서 설교하는 목사는 죄가 없을까요? 그게 우리들의 문제이고, 그래서 결국 하나님의 진노가 우리들에게 있을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이 우리들의 문제인데, 해결책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해결책이 없는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얼마 있지 아니하면, 성탄절이 다가오는데요. 예수님께서 저 높고 높은 곳에서부터 낮고 천한 말 구유에 내려 오셔야만 했던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이 세상에 그 누구도 단 한 사람도 거룩한 사람이 없고, 모두가 다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기 때문에,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우리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드라마 <지옥>을 보면, 연상호 감독의 지옥의 마지막 장면을 보면, 반기독교적인 그런 메시지를 전하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오히려 복음을 더 잘 드러내 주는 장면이 하나 등장합니다. 그것은 천사가 나타나서 이 사람에게 죽음을 예고하고, 저 사람에게 죽음을 예고하고 그래서 죽음의 사자들이 와서 그 사람을 죽이는 일들이 계속 벌어지고 있는 가운데, 그런데 한 아기에게 천사가 나타나 삼일 뒤에 죽을 거라고 하는 예고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그 모습을 산모가 자기 아기를 카메라로 찍으러 갔다가 보게 된 거예요. 그리고 거기서 충격을 받습니다. 아니, 도대체 우리 아기가 무슨 잘못이 있어서 죽는단 말인가? 거기서 혼란을 느끼고 당황스러운 겁니다. 그런데 아무리 항변해 보았자, 지금까지 경험했던 것처럼 그렇게 죽음의 예고를 받은 사람은 반드시 죽게 돼 있는 거예요. 아니나 다를까, 그 예고한 갓난아기가 죽을 수밖에 없는 바로 그날, 예고한 날이 됐습니다. 그래서 죽음의 사자가, 셋이 아주 시커먼 괴물들이 나타나 가지고, 죽음의 사자가 그 아기를 죽이려고 하는 그 장면 가운데서, 엄마와 아빠가 그 아이를 꼭 막 껴안고 지키는 거예요. 우리 아기 데려가지 말라고, 우리 아기 죽이지 말라고, 꽉 껴안았는데, 그런데 어떻게 되느냐면, 그 죽음의 사자가 결국 누구를 죽이냐면, 엄마 아빠를 죽이고 불에 태워 죽여버리고, 그 엄마 아빠의 품속에 있는 아기는 살아납니다. 저는 그 광경을 보면서, 무슨 죽음의 사자가 이렇게 실수를 해? “엉터리 드라마다”라고 생각을 했는데, 근데 그게 바로 우리가 갈망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 아기를 죽일 수 없어서, 그 부모가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으면서까지 살리는 그 장면을 보면서, 저게 부모의 사랑이구나! 그런데 우리는 부모가 사랑을 해도, 살리기보다는 죽일 때가 더 많아요. 나는 사랑으로 한 일인데, 아이들은 그것 때문에 더 고통스러워하는 일들이 더 많아요. 결국 우리들에게 소망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영화를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게 무엇이냐면, “어디 우리를 살릴 수 있는,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면서까지 우리를 살려줄 구세주가 어디에 있느냐?”라고 하는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인데요.

우리는 정답을 압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저와 여러분들을 안으시고, 우리의 죄로 인하여 망할 수밖에 없는 우리들을 그냥 지옥불에 떨어지도록 방치해 두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우리가 당해야 될 그 십자가를 우리 주님께서 대신 지시고 돌아가심으로 말미암아 저와 여러분들이 구원을 얻게 된 줄로 믿습니다.

지난 11월 13일 미국 미시간주에서는 경비행기가 추락하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5명이 탑승을 했는데, 비행기가 추락하면서 다 죽고 한 사람이 기적적으로 살아났습니다. 11살 여자 아이가 살아났는데요. 어떻게 살아났는가? 뉴스는 말하기를 그 비행기가 추락하는 순간에, 아버지가 그 아이를 꼭 껴안고 놓지 않고, 죽는 그 상황까지 껴안고 있다가, 아빠는 죽고 아이는 살렸다는 거에요.

오늘 우리들의 삶은 마치 죽음의 예고를 받은 아기처럼, 우리는 우리의 죄로 인하여 영원히 심판받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에게 소망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값없이 은혜로 저와 여러분들을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성찬 예식을 거행하게 되었습니다. 이 성찬 예식은 바로 그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서 흘리신 피가 얼마나 고마운 것인지, 주님께서 나를 위해 내어 주신 목숨이 얼마나 감사한 것인지를 다시 깨닫는 은혜의 방편이 될 것입니다. 이 성찬 예식에 참여하는 가운데, 주님의 은혜를 다시 한번 기억하고, 또 그 은혜를 받았으니, 이제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소망한다고 하는 다짐을 하면서, 이 귀한 예식에 참여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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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인의 길, 악인의 길 (잠 4:10-19)

정말 의인의 길을 돋는 햇빛과 같아서 광명에 이르게 되는 걸까? 정말 그럴까? 그런데 왜 지금 이 세상에서는 그런 것 같지 않은가?

지혜와 명철을 얻으라 (잠 4:1-9) +++ 네 마음을 지키라(잠 4:20-27)

오늘 읽은 잠언서 4장 18절 19절 말씀에 보면 “의인의 길은 돋는 햇살 같아서 크게 빛나 한낮에 광명에 이르거니와, 악인의 길은 어둠 같아서 그가 걸려 넘어져도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느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너무나도 당연한 말씀이죠. 의인이라면 하나님께서 보상하실 것이고 영화롭게 될 것이며, 악인이라고 한다면 결국은 넘어지게 될 것이고 결국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거라고 하는 것이 성경적인 가르침입니다.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이 말씀인데 이 말씀을 잠언서의 말씀 가운데서 이렇게 다시 한번 기록하고 다시 한번 강조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이 말씀을 솔로몬이 솔로몬의 자녀들에게 그리고 우리들에게까지 이 말씀을 강조해서 또 가르치고 또 가르치고 있는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는 정반대의 현상이 자주 나타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의인이 상을 받고 보상을 받지 못하고, 악인이 오히려 더 잘 되는 일들이 우리 주변에 많이 나타나는 겁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다시 한번 또 들려주고 또 들려줄 필요가 있는 것이죠. 왜냐하면 지금 이 세상의 가르침은, 우리를 세뇌하는 가르침이 있는데, 우리는 교회에서만 세뇌를 당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을 통해서 계속해서 세뇌당하고 있는 소리가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냐 하면, ‘거룩하게 살아봤자 소용없다’ ‘의롭게 살아봤자 아무 소용없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봤자 헛것이다’ ‘의인이라고 해봤자 오히려 고난만 당할 거’라고 하는 그 사상을 우리들의 머릿속에 계속해서 이 세상이 주입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한 사상이 주입받고 있는 우리들에게 성경은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라, ‘의인은 돋는 햇살과 같다. 결국은 큰 광명에 이르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이고, ‘악인이 지금 잘 되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에는 넘어지게 될 것이고, 패망의 길로 가게 될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다시 한번 강조해서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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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는 지금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까? 악인은 오히려 더 잘 사는 것만 같아요. 친일파들은 그 당시에도 떵떵거리며 살았지만, 그 후손들은 지금도 각 분야에서 자리를 잡고 있으며, 그 부가 후손 만대에 잘 물려주고 떵떵거리면서 잘 살고 있는데 독립운동했던 사람들은 정말 힘들고 고통스러운 상황 가운데서 독립운동을 했고 그리고 그 후손들은 지금도 고통스럽게 살아가고 있는 그 모습을 보면서 ‘쓸데없는 짓을 한 것은 아닌가?’ ‘오히려 우리가 친일을 하면서 살았다고 한다면 훨씬 더 낫지 않았겠는가?’라고 하는 그런 생각들이 자꾸만 우리 마음 가운데 들려주게 되는 겁니다. 쿠데타를 일으키고 수많은 양민들을 학살한 사람은 아직도 떵떵거리면서 잘 먹고 잘 살아가고 있는데, 약자를 위해서 정의의 편에 섰던 사람들은 지금도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 그런 현상들을 목격하면서 사람들은 마음이 변절하게 되는 겁니다. 독립운동하던 사람들이 열심히 독립운동하다가 나중에 다 친일파로 변절하게 되었는데 그렇게 변절하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정의의 하나님이 살아 있다고 하는 것을 믿지 못하고 오히려 친일을 해야만 먹고살 수 있다고 생각되는 그런 생각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와 비슷하게 영적인 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고 하면 잘 되면 좋겠고 정말 하나님께서 복 내려주시면 좋겠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잘 되면 좋겠는데, 정말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니까, 참 궁상맞은 꼬락서니를 하고 있는 것이고, 하나님을 모른다고 하면서 악을 행하고 죄악을 범하면서 정말 이기적으로 살고 있는 그런 사람들은 여전히 수많은 부를 누리며 수많은 사람들을 다스리고 있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과연 믿음으로 산다고 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라고 하는 질문들이 자꾸만 마음속에 떠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세상을 누가 다스리고 있는가?’라고 하는 그 믿음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결정합니다 ‘이 세상을 누가 다스리고 있는가’ ‘지금 이 세상이 누구의 뜻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는가’라고 하는 것에 대한 믿음이 ‘지금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그 모습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는데요. 만일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고 선하시고 공평하실 뿐만 아니라 정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살아계신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믿는다고 한다면 우리는 정말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이 된다면 하나님은 공의롭지도 않고 정의롭지도 않고 아니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아예 없다고 생각이 되고 오히려 이 세상은 사악한 마귀가 지배하고 있는 것이고 주먹이 정의고, 권력이 힘이고, 돈이 우리의 정의라고 생각되는 그런 세상 가운데 살아가게 된다면 결국은 우리의 삶은 완전히 달라지게 될 겁니다. 그래서 현재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는가는 우리 이 세상을 누가 다스리고 있는가에 대한 믿음과 아주 밀접하게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정의로우신 하나님 선하신 하나님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살아계신다고 한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가게 될 겁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이 없다고 한다면, 이 세상이 어떻게 움직이는가? 그런 하나님의 뜻에 위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그냥 될 대로 이 세상이 마음대로 움직이고 아무런 통제 없이 그렇게 이 세상이 돌아가는 거라고 생각이 된다고 한다면, 그때부터는 우리가 순종하며 살기보다는 악을 행하면서 살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에 누구 누가 다스리고 있는가’라고 하는 것이 우리가 지금 현재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방식을 결정한다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 세상은 누가 다스리고 계십니까? 누가 다스리고 계십니까? 보셨어요? 하나님을 보신 분이 계십니까? 제가 여기 서 있는 것은 보이십니까? 저를 볼 수는 있지만,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것을 어떻게 볼 수가 있어요? 보이지 않는 하나님, 영적인 하나님, 영이신 하나님, 그 하나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우리가 어떻게 계시다고 확신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비록 하나님을 눈으로 볼 수 없고 우리의 손으로 만져볼 수 없는,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는, 그래서 우리가 느낄 수 없는 그 하나님인데, 그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것을 어떻게 알 수가 있겠습니까? 마치 벌거벗은 임금님처럼, 벌거벗은 임금님이 옷을 입었다고 하는데, 그 모습이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고 느껴지지도 않는 그 옷을 입고 있는데, 과연 그 옷을 입었는지 안 입었는지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와 마찬가지로 보이지 않는 그 하나님이 정말 계시는지? 계시지 않는지? 우리가 무슨 방법으로 알 수가 있겠습니까?

보이지 않아서 알 수 없지만, 그러나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 알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흔적을 통해서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농사짓는 사람들이 열심히 농사를 짓고 있는데 마을에 사슴이 있고 멧돼지가 있다고 하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가 있겠습니까? 잠을 자는 동안에 사슴이 왔다 가고 멧돼지가 왔다 가는데 그래서 단 한 번도 사슴을 본 적도 없고 멧돼지를 본 적도 없는데, 그 농부는 ‘멧돼지가 있구나’ ‘사슴이 있구나’라고 하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흔적을 보고서 아는 거죠.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 봤더니 밭이 망가져 있는 거예요. 그리고 거기에 멧돼지의 발자국이 찍혀 있고, 사슴의 발자국이 찍혀 있고, 그리고 짐승들이 와서 곡물들을 그 식물들을 다 먹어치운 흔적들이 보이고, 배설물이 그 자리에 있는 그 모습을 보면서 ‘아하, 우리 농장 주변에 멧돼지가 있구나.’ ‘우리 농장 주변에 사슴이 있구나’라고 하는 사실을 알고, 그것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해 놓아야, 울타리를 세우고 들어오지 못하도록 방어책을 세워야 농사를 잘 짓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하나님을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하나님의 흔적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있다고도 말씀하고 있지만, 성경을 떠나서 성경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알 수가 있는데, 그 사실 어떻게 알 수 있냐면, 하나님의 흔적을 가지고 알 수가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흔적이 어디에 있습니까? 온 세상에 엄청나게 있어요. 엄청나게.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은 그 천지 만물을 볼 때, ‘하나님이 계시는구나’라고 하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겁니다. 믿습니까? 이 천지 만물이 어떻게 생기는가? 전혀 아무것도 없는 그 무에서 시간이 오랫동안 지나니까, 수억 년이 지나고, 수십억 년이 지나고, 수천 억 년이 지나니까, 아무것도 없는 그 빈 공간에서 어느 날 갑자기 지구가 만들어지고, 어느 날 갑자기 그 지구의 생명체가 탄생이 되고 저절로 태어났다고 믿는 것이 그게 더 논리적이고 이론적이고 합리적인 생각입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만드셨기에 이 지구가 있는 것이고, 모든 생명체가 있는 것이고, 이러한 것들이 누가 만들었기에 존재한다고 믿는 것이 그게 더 합리적이고 더 논리적입니까? 당연하죠.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어떻게 이 지구가 만들어지고 생명체가 만들어지고 어떻게 만들어질 수가 있어요? 못하는 거죠. 그러니까 이 세상이 만들어진 이 지구를 보면서 우리 자연 만물을 보면서, 천지 만물을 보면서, ‘아하, 천지 만물이 있는 것이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조물주가 계시기에 만드셨구나’라고 하는 그 하나님이 만드신 그 흔적을 보면서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그 창조주 하나님께서 과연 지금도 이 세상을 다스리고 있는가’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지금 만들어진 이 세상을 보니까 창조주 하나님이 계셨다고 하는 것은 알겠어요. 옛날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만드셨다고 하는 것까지는 알겠는데, 그런데 그 창조주 하나님께서 지금도 온 세상을 다스리고 있는 통치자 하나님, 온 우주를 다스리고 계시는 그 하나님이 지금도 살아계셔서 지금도 온 세상을 통치하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그것도 역시 흔적을 통해서 알아야죠. 그 흔적이 뭡니까? 이 세상이 돌아가는 모습을 보니까 아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계시기 때문에 이 세상이 아주 자연스럽게 움직이고 있는 겁니다. 지구와 태양이 아주 적당한 거리를 떨어져서 그 지구가 태양 주변을 단 일초도 조금도 차이 없이 계속해서 그 태양 주위를 돌고 있는데, 왜 돌고 있어요? 왜 안 멈추죠? 왜 그 지구가 태양계를 벗어나지 않고 그냥 그대로 있죠? 왜 그걸 돌고 있죠? 왜 지구가 자전을 하죠? 이 모든 것들이 지금도 계속해서 그대로 움직이고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움직이고 아침과 저녁이 있고, 그리고 일상이 유지되는 것 지금 우리가 이렇게 살아갈 수 있는 것 생명체가 태어나고 일상이 유지되고 있다고 하는 그 사실은,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이런 일상이 유지된다고 하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 다스리시고 통치하시기 때문에 일상이 일상처럼 유지가 되는 거예요.

1 더하기 1은 왜 2입니까? 왜 1 더하기 1이 2가 되죠? 하나님께서 그 법칙을 그대로 유지시켜주기 때문에, 1 더하기 1이 2가 되는 거예요. 만일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한다면, 엉망진창, 그다음에 또 뭐죠? 뭐라고 해야 되죠? 아무튼 완전히 망가져 버리는 거예요. 이 세상이 질서 정연하게 움직이고 있다고 하는 것, 일상을 우리가 예측할 수 있고, ‘아, 봄이니까 우리가 씨앗을 뿌려야 되겠구나’라고 하는 것을 알고 씨를 뿌렸을 때 가을에 추수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다스리고 있다고 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게 가능한 거예요. 만일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한다면, 통치하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한다면 씨를 뿌렸을 때 그것이 씨앗이 열매를 맺을 거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어요? 어떻게 이 지구가 이대로 움직일 수 있다고 하는 걸 그 어떤 방법으로 확신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 일상이 돌아가고 있다고 하는 것들을 보면서 아 하나님이 지금도 역사하고 계시고, 하나님께서 지금도 이 세상을 유지시키고 maintain 하고 계시고 sustain 하고 계시고 유지하고 계시고 관리하고 계시고, 주님께서 이 세상을 다스리고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보면서 하나님이 지금도 계시다고 하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그 하나님께서는 정의로우신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악인을 심판하시고, 의인에게 보상하시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계시는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는 겁니다. 의인은 칭찬을 받고 악인은 심판을 받는 그 모습을 보면서 ‘공의로우신 하나님, 공평하신 하나님, 정의로운 하나님이 살아계시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점은 약간 애매합니다. 왜 애매하죠? 왜 애매하냐면 어떻게 보면 하나님께서는 선한 자에게 삭을 베푸시고 악한 자에게 벌을 내리시는 것 같기도 한데, 어떤 때는 안 그런 것처럼 보일 때도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계신 것 같다고 생각이 드는 그 흔적들은 무엇입니까? 수고하고 애쓴 자에게 보상이 있는 것이죠. 열심히 노력한 자에게 주님께서 상을 주시는 겁니다. 눈물로 씨를 뿌린 자에게는 풍성한 곡식을 주는 겁니다. 풍성한 수확을 주는 겁니다. 학생들이 열심히 공부하면 좋은 성적이 나오고, 좋은 성적이 나와서 좋은 대학에 가고, 그다음에 모든 길들이 척척 척척 열리는 그 모든 것들이 열심히 수고한 자에게 보상하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가능한 일인 거죠. 우리가 열심히 장사를 했는데, 열심히 장사를 했더니 돈을 많이 벌게 되고, 그래서 내가 열심히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수고하며 애쓴 것에 대한 보상을 받을 수 있는 것은 공의로우신 하나님 정의로우신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한 것이죠.

이번에 올림픽이 지금 한창 진행되고 있는데요. 올림픽에서 상을 타는 선수들이, 누가 상을 탑니까? 정말 최선을 다해서 열정을 다해 가지고 훈련을 했던 그 사람들이 금메달을 따는 거예요. 왜? 수고의 대가를 받는 거죠. 수고하고 애쓴 사람들이 열심히 뛴 사람들이 금메달을 받고 은메달 동메달을 받도록 그렇게 만들어 주시는 것, 공의로우신 하나님. 정의로우신 하나님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 가운데 게으른 자가 있어서 자신의 생활에 책임도 지지 않고 열심히 인생을 살지 않고 그저 게으르게 인생을 산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결국 그런 사람들은 가난하게 되고 그리고 정말 빈곤하게 될 수밖에 없는 그런 모습들이 나타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게으른 자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고, 그런 것들을 보면서 수고한 자에게는 보상이 있고 수고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보상이 없는 그런 것들을 통해서 보면서 ‘아 지금도 공의로우신 하나님, 정의로우신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역사하시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공평하신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나타나는 흔적들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런데 종종 종종 어떤 일들이 발생하냐면 그런 법칙이 깨질 때가 종종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악하게 살고 정말 잘못된 일을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그를 심판하시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벌을 내리셔야 할 텐데, 우리가 지금 이 현상에서 겪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렇게 벌을 받지 않으면서 떵떵거리면서 사는 사람들이 실제로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의인들은 고난을 당하고 있는데 악인들은 떵떵거리며 살고 있고 그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게 되면서, 그것을 바라보면 ‘정말 하나님 살아계신 것 맞습니까?’ ‘하나님이 선하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온 세상을 다스리는 하나님이 계시다고 한다면, 왜 이런 엄청 정말 황망한 일이 일어나는 겁니까?’라고 질문을 던지게 되는 것이죠. ‘도대체 하나님이 어디에 계십니까?’라고 질문을 던지게 되는 겁니다. 그런 일들이 우리 주변에서 많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고요.

시편 73편 1절에서부터 9절 말씀에 보면, 이는 <아삽의 시>라고 할 수가 있는데요. 아삽은 이렇게 하나님을 향해서 울부짖었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정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들에게는 없고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없나니, 그러므로 교만이 그들의 목걸이요. 강포가 그들의 옷이며, 살찜으로 그들의 눈이 솟아나며, 그들의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많으며, 그들은 능욕하며 악하게 말하며 높은 데서 거만하게 말하며, 그들의 입은 하늘에 두고 그들의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 아삽이라고 하는 사람이 자기가 살던 시대에 사람들을 봤는데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겁니다. 정말 하나님의 말씀대로 신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고난을 당하고 있고 가난하고 고통스럽게 살아가고 있는데, 악을 범하면서 정말 나쁜 짓을 하는 그런 사람들은 돈을 많이 벌고, 그리고 떵떵거리면서 살면서 건강하고 죽을 때에도 편안하게 죽고 아무 문제없이 죽는 그 모습 보면서 아삽이 하나님 앞에 질문을 던지고, ‘하나님 도대체 이게 무슨 일입니까? 하나님이 선하신 하나님이 살아계신다고 한다면, 이런 일을 방치해 두면 안 되는 거 아닙니까?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냐?’고 따지고 있는 것이죠. 그게 우리들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에 악이 존재한다고 하는 것이 정말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선하신 하나님이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이고, 정의로우신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그리고 그 후 하나님이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이 땅에서 악을 행하는 자들을 그냥 이렇게 방치해 둘 수가 없는 거예요. 방치해둘 수가 없는 거. ‘왜 하나님이 꼭 온두라스의 모습과 같냐 이 말이에요?’ 예전에 제가 온두라스에 갔더니 국가 경찰이 있어요. 공권력이 있어요. 그런데 힘을 하나도 못 써요. 밤중만 되면 갱단이 온 도시를 장악해서 자기 마음대로 하고 총을 쏘고 마약을 거래하고 온갖 나쁜 짓을 하는데도 전혀 힘을 못 쓰는 그런 후진국가를 가보았는데, 하나님이. 이 세상을 다스리는 이 세상이 왜 그런 온두라스처럼 하나님의 정의가 이루어지지 않고 악이 판치고 그러고 있는데도 하나님께서는 전혀 손도 못 쓰고 있느냐? ‘과연 하나님이 살아 계시느냐?’라고 하는 그런 질문을 던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악이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정말 큰 수수께끼 중에 수수께끼고, 그리고 그 문제에 대해서 답변을 하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악이 존재하는 것에 대한 몇 가지 대답을 해주고 있습니다. 몇 가지 대답, 몇 가지 대답을 해주고 있는데, 한 가지 대답이 모든 걸 다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저런 방법으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설명을 해 주고 있는데요.

첫 번째 대답은 잠언서 16장 4절의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악인이 그냥 제멋대로 날뛰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계획을 가지시고, 목적을 가지시고 그 소용이 있어서 그 악인을 그렇게 두셨다는 거예요. 지금 당장은 악인이 아무런 제재 없이 활개 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런데 그것이 그냥 미시적인 관점으로 보면 그렇게 보이지만 하나님의 큰 그림으로 본다고 한다면, 그 악인들도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서 하나님의 선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사용하고 계시다고 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그 예를 우리가 어디에서 발견하게 되냐면, 바벨론이라고 하는 나라에서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바벨론 나라는 어떤 나라입니까? 우상 숭배하는 나라죠. 바벨론은 그야말로 악한 민족입니다. 그런데 그 악한 민족 바벨론을 가리켜서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표현하냐면 ‘바벨론은 나의 종’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그 바벨론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유대의 민족을 치셨고, 이스라엘 민족의 죄를 다스리기 위한 이스라엘 민족의 죄를 다스리고 그들에게 교훈을 주시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이 바벨론을 사용하시게 된 것이죠.

그러니까 우리는 잘 이해는 하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큰 그림으로 보면, 악인이 그냥 제멋대로 날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과 계획 안에서 그렇게 움직인다고 성경은 대답해 주고 있는 겁니다.

또 하나의 대답이 있는데요. 그것은 바로 베드로후서 3장 8절과 9절의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베드로는 교회 교인들이 울부짖는 소리에 이런 답변을 하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저 로마 제국을 멸망시키지 않는 겁니까?’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 교회를 핍박하는 자들을 왜 그냥 내버려 두십니까?’하는 그런 질문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대답을 해 주고 있냐면, 하나님은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고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한 아버지로서, 그들도 회개하기를 기다리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우리가 쭉 살펴보면 이 외에도 악이 왜 이 세상에 존재하는가에 대한 다양한 대답들이 들어 있습니다.

아무튼 여러 가지 대답들이 있는데요. 이 대답들을 보면서 우리가 발견해야 될 것이 있다고 한다면, 뭐냐면 악이 승승장구한다고 해서 변절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지금 친일파, 지금 일본 제국이 우리나라를 압제하고 그래서 우리나라의 독립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고 이제 8월 15일이면 우리 독립 광복절이지 않습니까? 독립은 올 것 같지도 않고, 이런 상황 가운데서 독립운동하다가 ‘아, 우리나라의 독립은 영영 오지 않는구나’ 생각하면서 변절하듯이 우리가 지금 이 세상에 살면서 악이 판치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은 안 계신가 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독립시킬 때가 오지 않는가 보다’ 하면서 우리가 변절해서 악에게 굴복할 것이 아니라, 우리 이 말씀 가운데서 주시는 말씀이 무엇이냐 하면, 아무리 이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 것처럼 보인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변절할 것이 아니라, 오늘 이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는 겁니다. 잠서 4장 18절 19절의 말씀 “의인의 길은 돋는 햇살 같아서 크게 빛나 한낮에 광명에 이르거니와 악인의 길은 어둠 같아서 그가 걸려 넘어져도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느니라.” 그걸 믿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게 진짜 믿음이에요. 보이지 않지만, 지금은 정반대의 증거들이 많은 것 같아요. 지금은 악이 승리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 그걸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이지 않아도, 그 하나님이 살아계신다고 하는 사실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게, 그게 보지 않고도 믿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생생하게 보여준 사건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그게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예수님께서 빌라도의 법정에서 법 없는 자들의 손에 의하여 처참하게 사형 언도를 받습니다. 이것처럼 황당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죄수인 바라바는 무죄 방면하고 아무 죄 없는 예수님은 극형에 처하는 이런 엉터리 재판이 이 세상에 또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그 순간에 우리 주님께서 그 빌라도의 법정을 보면서 항거하신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는 그 순간에도 잠잠하셨어요. 왜? 하나님이 살아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알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바로잡으실 것을 믿었기 때문인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이 살아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온전하게 증명한 것이 부활입니다. “거기 못 가두네. 예수 내 구주. 우리를 살리네. 예수 내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서, 이제는 끝장난 것처럼 생각이 되었지만, 다시 살아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증명해 주고, 우리의 삶이 이런 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결국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 vindicate 해주고, 신원해주시고, 우리를 다 품어주시는 그날을 바라보면서, 지금 이 순간에 견뎌 나가야 하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예배를 언제 드립니까? 안식일인 토요일 예배를 하기 위해서 모이는 게 아니고, 구약 성경에는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고 명령하고 있지만, 우리가 토요일 안식일 날 모여서 예배드리는 것이 아니고, 다음 날인 주님의 날에 모여서 예배를 합니다. 주님의 날에 모여서 예배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부활의 생생한 의미를 매주 매주 재확인하기 위해서 그래요. 일주일 내내 우리가 살아가는 삶은 어떤 삶입니까? 그야말로 황당한 일을 당하면서 사는 거죠. 양보했더니 오히려 더 손해 보고, 용서해 주었더니 무시당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했더니 오히려 깔보고, 이런 식으로 살다가는 완전히 망할 것 같 같은 그런 삶을 이 일주일 내내 살다가, 그런데 이제 우리는 완전히 망한 것처럼 생각되는 그 순간에, 주일 아침이 되면 다시 한번 기억하는 겁니다. ‘맞아.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지!’ ‘하나님께서 일으켜 세워주셨지!’ 그날이 주일 아침인 거예요. 그래서 주일 아침에 우리가 일어나면 무엇을 생각합니까? ‘아이고, 피곤한데 또 교회를 가야 되냐?’가 아니라, 찔리는 분이 계신가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구나!’ ‘우리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구나’ 다시 한번 기억하면서 예배의 자리에 나와서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며 새로운 힘과 용기를 맞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를 향해서 자꾸만 세뇌하는 이 세상의 그 세뇌에 속아 넘어가지 마시고, 하나님의 말씀 “의인은 의인의 길은 돋는 햇살 같아서 크게 빛나 한낮에 광명에 이른다”라고 하시는 그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속에 깊이 새기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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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강좌 27

아들의 권한(5:19-30)1

5:19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2: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신성모독 행위로 죽이려고 들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들은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고서 그 일을 하는 것이지, 스스로(자의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순종하며 일을 하는 것이다. 즉 안식일에 병자를 고친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이다. “내가 진실로(아멘) 진실로(아멘) 네게 이른다”라는 표현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참되고 진실한 말씀이며 하나도 오류가 있는 것이 아님을 밝히시는 말씀으로 예수님께서 자주 사용하신 표현이다.

율법주의는 율법의 문자적 적용을 고집한다. 하지만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셨고, 그것을 그대로 행하셨다. 안식일법이 있다고 하여서 병자를 치료하는 것을 멈출 수 없고, 안식일법 때문에 병이 나은 그를 그 자리에 있게 할 이유도 없었다. 더 나은 삶을 위해 나아가는 것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이었다. 마치 제사장만 먹을 수 있는 진설병을 다윗과 그 일행에게 준 아히멜렉의 마음과 같았다. 문자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과연 주님께서 무엇을 진정으로 원하시는지를 살펴야 한다.3.

5:20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가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놀랍게 여기게 하시리라4: 38년 된 병자를 고친 일 외에도,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님 사이의 관계는 더 드러나게 될 것이다.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하셨고,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것을 다 보이셨다. 또한 앞으로 더 큰 일도 보여주실 것이다. 사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 에수님에게 제한을 두실 것은 없다. 이러한 일들이 펼쳐지게 될 때, 사람들은 놀랄 것이다.

5:21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5: 20절에서 말한 더 큰 일이란, 다름 아닌 죽은 자들을 살리는 것이다. 살리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일이다(cf. 왕하 5:76). 생명을 주고 빼앗는 것은 오직 하나님에게 달려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들도 생명을 살린다. 아들도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5:22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7: 심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8:508). 최후에 심판하시는 이도 하나님이시다(cf. 롬 2:59; 엡 5:610; 골 3:611; 롬 3:5-612; 고전 5:1313; 히 12:2314; 히 13:415; 벧전 1:1716; 벧전 2:2317; 계 18:818). 그런데 그 권한을 아들에게 주셨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심판하실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그 심판은 하나님의 심판이다. 제자들도 주님의 대리인으로 심판하게 될 것이라고도 말씀하신 바 있다(마 19:2819). 하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심판이다.

5:23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아니하느니라20: 아들로 하여금 심판하도록 하신 목적은 아들을 공경하게 하기 위함이다. 아들도 똑같은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아들도 하나님이다. 따라서 아들을 공경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공경한다고 할 수 없다. 유대인들 앞에 서 있는 그분은 무시해도 되는 분이 아니라, 심판 주 하나님이시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공경한다고 하였지만, 정작 보이는 하나님을 거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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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21: 예수님께서는 다시 엄숙하고 진지하게 말씀하신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예수님의 말을 듣는 것은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을 믿는 것이며, 그렇게 믿음으로 반응하는 자는 영생을 얻었다. 따라서 심판에 이르지 않는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이미 옮겼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는 것이 생명의 길이다.

5: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22: 다시 엄숙하게 진지하게 말씀하셨다.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음성을 듣게 될 때가 온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살아나는 때가 올 것이다. 이것까지는 주님께서 하신 말씀인데, “곧 이 때라”는 요한복음의 저자가 요한복음의 독자들을 향해서 예수님의 약속이 지금 현실이 되고 있음을 알리는 표현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23 또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볼 수도 있다. 예수님과 더불어 하나님의 나라가 왔고, 그래서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다는 뜻이다. 영적으로 본다면, 사람들은 이미 죽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고 믿음으로 받아들인다면, 영생(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즉 살아날 것이다.

5:26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24: 아들에게는 하나님 아버지에게 있는 생명이 똑같이 있다. 그래서 에수님은 하나님과 같이 생명을 살릴 수 있다.

5:27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25: 예수님은 다니엘 7장에 예언된 바로 그 “사람의 아들”(인자)이므로, 온 천하를 심파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다.

5:28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26: 결국 모든 죽은 자들이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될 것이다.

5: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27: 선한 일을 행한 사람은 생명의 부활로, 악을 행한 사람은 심판의 부활을 하게 될 것이다.

5:30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28: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대로 행할 것이다. 자의적으로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심판이기에 공의로운 심판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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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가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놀랍게 여기게 하시리라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아니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2. Ἀπεκρίνατο οὖν ὁ Ἰησοῦς καὶ ἔλεγεν αὐτοῖς Ἀμὴν ἀμὴν λέγω ὑμῖν οὐ δύναται ὁ υἱὸς ποιεῖν ἀφ’ ἑαυτοῦ οὐδὲν ἐὰν μή τι βλέπῃ τὸν πατέρα ποιοῦντα ἃ γὰρ ἂν ἐκεῖνος ποιῇ, ταῦτα καὶ ὁ υἱὸς ὁμοίως ποιεῖ.[]
  3. cf. 이국진, “4. 바른 성경 해석과 문자주의의 위험,” http://iwbs.org/?p=3628[]
  4. ὁ γὰρ πατὴρ φιλεῖ τὸν υἱὸν καὶ πάντα δείκνυσιν αὐτῷ ἃ αὐτὸς ποιεῖ καὶ μείζονα τούτων δείξει αὐτῷ ἔργα ἵνα ὑμεῖς θαυμάζητε[]
  5. ὥσπερ γὰρ ὁ πατὴρ ἐγείρει τοὺς νεκροὺς καὶ ζῳοποιεῖ οὕτως καὶ ὁ υἱὸς οὓς θέλει ζῳοποιεῖ[]
  6. 이스라엘 왕이 그 글을 읽고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내가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하나님이냐 그가 어찌하여 사람을 내게로 보내 그의 나병을 고치라 하느냐 너희는 깊이 생각하고 저 왕이 틈을 타서 나와 더불어 시비하려 함인줄 알라 하니라[]
  7. οὐδὲ γὰρ ὁ πατὴρ κρίνει οὐδένα ἀλλὰ τὴν κρίσιν πᾶσαν δέδωκεν τῷ υἱῷ[]
  8. 나는 내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나 구하고 판단하시는 이가 계시니라[]
  9.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10.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
  11.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12. 그러나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 하리요 [내가 사람의 말하는 대로 말하노니]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결코 그렇지 아니하니라 만일 그러하면 하나님께서 어찌 세상을 심판하시리요[]
  13. 밖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심판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쫓으라[]
  14.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과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
  15. 모든 사람은 결혼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
  16.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17.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18. 그러므로 하루 동안에 그 재앙들이 이르리니 곧 사망과 애통함과 흉년이라 그가 또한 불에 살라지리니 그를 심판하시는 주 하나님은 강하신 자이심이라[]
  19.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20. ἵνα πάντες τιμῶσι τὸν υἱὸν καθὼς τιμῶσι τὸν πατέρα ὁ μὴ τιμῶν τὸν υἱὸν οὐ τιμᾷ τὸν πατέρα τὸν πέμψαντα αὐτόν[]
  21. Ἀμὴν ἀμὴν λέγω ὑμῖν ὅτι ὁ τὸν λόγον μου ἀκούων καὶ πιστεύων τῷ πέμψαντί με ἔχει ζωὴν αἰώνιον καὶ εἰς κρίσιν οὐκ ἔρχεται ἀλλὰ μεταβέβηκεν ἐκ τοῦ θανάτου εἰς τὴν ζωήν[]
  22. Ἀμὴν ἀμὴν λέγω ὑμῖν ὅτι ἔρχεται ὥρα καὶ νῦν ἐστιν ὅτε οἱ νεκροὶ ἀκούσουσιν τῆς φωνῆς τοῦ υἱοῦ τοῦ θεοῦ καὶ οἱ ἀκούσαντες ζήσουσιν[]
  23. (Michaels, J. Ramsey. The Gospel of John (Kindle Locations 6141-6143). Wm. B. Eerdmans Publishing Co.. Kindle Edition.[]
  24. ὥσπερ γὰρ ὁ πατὴρ ἔχει ζωὴν ἐν ἑαυτῷ οὕτως καὶ τῷ υἱῷ ἔδωκεν ζωὴν ἔχειν ἐν ἑαυτῷ[]
  25. καὶ ἐξουσίαν ἔδωκεν αὐτῷ κρίσιν ποιεῖν ὅτι υἱὸς ἀνθρώπου ἐστίν[]
  26. μὴ θαυμάζετε τοῦτο ὅτι ἔρχεται ὥρα ἐν ᾗ πάντες οἱ ἐν τοῖς μνημείοις ἀκούσουσιν τῆς φωνῆς αὐτοῦ[]
  27. καὶ ἐκπορεύσονται οἱ τὰ ἀγαθὰ ποιήσαντες εἰς ἀνάστασιν ζωῆς οἱ δὲ τὰ φαῦλα πράξαντες εἰς ἀνάστασιν κρίσεως[]
  28. Οὐ δύναμαι ἐγὼ ποιεῖν ἀπ’ ἐμαυτοῦ οὐδέν καθὼς ἀκούω κρίνω καὶ ἡ κρίσις ἡ ἐμὴ δικαία ἐστίν ὅτι οὐ ζητῶ τὸ θέλημα τὸ ἐμὸν ἀλλὰ τὸ θέλημα τοῦ πέμψαντός μ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