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소망은 어디에? (삼상 8:1-22)

몇 주 전에 이어서 두 번째 여러분들을 뵙고, 하나님의 말씀 함께 나누게 돼 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영광 올려드립니다. 옆 사람하고 한번 인사를 했으면 좋겠는데, 따뜻하게 환영해주면서 인사 한번 합시다. 잘 오셨습니다. 은혜 많이 받읍시다 손도 잡아주시고, 네 감사합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굉장한 혼란 가운데 있는 것 같습니다. 매주 토요일마다 대통령이 하야해야 된다. 혹은 탄핵시켜야 한다고 하는 그런 뜨거운 주장들이 전국 여기저기에서 그리고 숫자를 갱신해가면서, 많은 사람들의 분노가 지금 들끓고 있는 그런 시기입니다. 지난 몇 년간 어떤 일이 있어도, 그 지지층이 30%가 넘는 그런 콘크리트 지지층을 자랑했던 박근혜 대통령의 인기가 하루아침에 5%도 채 안 되는 그런 인기 없는 대통령이 되었다고 하는 것이 너무나도 놀랍게 느껴집니다.

저는 지난 4년간 대구에서 목회를 했었는데요. 거기에 살면서 대구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사랑의 열기가 얼마나 뜨거운지 제가 몸소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많이 냉담해졌고, 심지어 분노하는 사람들까지 있다고 하는 그 사실이 참 격세지감을 느끼게 합니다. 아마 여러분들은 지금 이 현 시국에 어떠한 생각들을 가지고 있고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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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 시간에 정치적인 이야기를 하려고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모든 문제가 좀 잘 해결되고 순리대로 진행이 돼서 이 땅에 정의가 짓밟히고 있다고 하는 그런 느낌을 받기보다는, 그래도 정의가 살아있구나 라고 하는 그런 느낌을 받을 수 있겠다고 하는 그런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가 무엇이냐면, 오늘 본문의 이야기가 어쩌면 현재의 시국을 그대로 드러내주는 것만 같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읽은 사무엘상 8장의 말씀을 보면 사무엘의 뒤를 이어서 사사가 되었던 사무엘의 두 아들 요엘과 아비야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 사람들이 사무엘과는 달리, 자신의 이익을 따라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하는 그런 상황에 이르르자,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들을 탄핵하고, 그리고 새로운 왕을 뽑아달라고 하는 요구가 빗발치는 그런 상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이제 지금까지는 사사들이 다스리는 시대를 살고 있었는데, 이제는 우리도 다른 나라들처럼 왕이 있어야 되겠다고 요구하기 시작한 겁니다. 우리 민족도 왕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사사가 아니라. 사사는 당시에 그저 평상시에는 그냥 생활하다가 전쟁이 일어나면 이스라엘 민족을 데리고 나가서 싸우기도 하고. 아니면 때에 따라서 재판도 하는 그런 일들을 했는데, 그런 좀 시시한 사사 말고, 번듯한 왕이 있고, 총리가 있고 군대가 있고 제대로 된 국가 시스템으로 움직이는, 저 선진국 주변의 강대국들처럼, 우리나라도 왕이 다스리는 그런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뜨거운 분출이 지금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서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사실 이스라엘 민족들에게는 주변의 민족들을 바라보면서 부러웠을 겁니다. 왜냐하면 주변 민족들은 강대국으로서 전쟁이 일어나면 왕의 명령에 따라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전쟁을 이겨나가는 그런 모습들을 보면서, 이스라엘 민족들은 내심 부러웠을 것 같아요. 우리는 왕이 없는데 저들은 왕이 있고, 우리는 군대가 없이 그냥 우왕좌왕하다가, 남의 지배를 받다가 나중에 군인들을 모으니라고 힘이 드는데, 저 민족들은 왕 밑에 군대 장관이 있고, 그리고 군대가 있어서 강력한 파워를 자랑하는 주변 민족들을 바라보면서, 이스라엘 민족들은 그 민족들이 너무나도 부러웠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 민족들은 애굽 땅에서 바로 왕의 그 압제 아래서 종살이 하다가, 이제는 해방되어서 하나님이 왕이 되는 그런 나라가 되었고,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는 신정 국가로서 살아왔는데, 신정국가 왕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는 그 나라는 왕이 없었고, 때에 따라서 사사나 선지자나 제사장을 통해서 다스림을 받는 그런 삶을 살았는데, 그게 싫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들은 왕을 요구하게 됐는데,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왕을 세우게 되면 어떤 문제가 있을 것인지 왕의 제도에 대해서 자세하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왕의 제도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무엘 상 오늘 읽은 말씀 8장 11절부터 18절 말씀까지 보면, 왕을 세울 때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가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내용을 요약하면 어떤 내용이 나오냐면, 왕이 그렇게 좋은 게 아니라는 겁니다. 왕을 세우면 나라가 좀 튼튼해지고 군대도 제대로 잘 갖추고 있어서 그래서 좀 체계적인 나라가 되기를 원하고, 그래서 우리도 강대국에 진입하고 싶다고 하는 그런 소망이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해주시는 말씀은 무엇이냐면, 왕이 되면 그런 장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부작용도 있다는 거예요. 단점도 있다는 겁니다.

어떤 단점입니까? 왕은 너희의 아들 딸들을 데려다가 시녀 시종으로 삼을 거다. 너희들의 물건들을 빼앗아 나가 10분의 1씩 빼앗아서 세금으로 빼앗아가게 될 것이다. 왕이 되면 다 좋은 것이 아니라, 왕이 자기의 밭을 갈게 하는데, 너희들의 아들 딸들을 데려갈 것이고, 왕의 그 궁정을 유지하기 위해서 당신들의 재산을 가져가게 될 것이라고 하는 그 경고의 말씀을 하나님께서 해주고 계시는 모습이 오늘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을 읽다 보면 어쩌면 오늘날 우리들이 맞닥뜨리고 있는 현실을 바라보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대통령을 뽑을 때면 언제나 커다란 소망을 가지고 뽑습니다. 몇 년 전에 대통령 선거가 있었는데요. 그때 대통령 선거에 나선 후보들은 각각 자신들만의 공약을 내세웠습니다. 내가 대통령이 되면 이렇게 하겠습니다. 내가 대통령이 되면 저렇게 하겠습니다. 그 공약들을 보면 얼마나 멋있는지 몰라요. 공약들만 보면 정말 좋은 공약들이 정말 많이 들어있었어서, 그래서 그 공약들만 보고 저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기만 하면 우리나라가 다 잘 될 것 같고, 우리나라가 곧 선진국으로 들어가게 될 것 같고, 곧 복지국가가 되게 될 것이고, 어린아이들 교육하는 데 아무런 문제도 없을 것 같고, 내가 늙어도 전혀 진료 때문에 의료 때문에 문제 겪고 있지 않는, 그런 선진국에 살게 될 것이라고 하는 그런 장밋빛 소망을 갖게 만들었던 것이 그때 대통령 선거를 하면서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었던 생각이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그 당시에 대구에 있으면서 한 번은 택시를 탔는데 택시 운전사가 뭐라고 이야기를 하냐면, 자연스럽게 대통령 선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택시 운전사가 했던 말이 기억이 아주 생생하고 재미있게 기억이 납니다. 경상도 그 택시 운전사가 하는 말씀이 뭐라고 얘기하냐면, 다 대통령 시켰으면 좋겠대요. 박근혜 문재인 이정희 할 것 없이 세 명 다 대통령 시켰으면 좋겠다. 공약들을 보니까 너무나 다 좋기 때문에 다 시켰으면 좋겠다. 누가 나와도 우리나라는 잘 살 것 같다고 하는 그런 이야기를 하는데, 그 말속에 뼈가 들어 있었어요. 아니나 다를까, 몇 년이 지난 지금 놀랍게도 우리 대한민국 대부분의 사람들이 실망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려오라고 아우성을 지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게 오늘날의 문제만이 아니라, 지금까지 우리가 겪어온 지금까지 우리의 경험이 그게 아닌가 싶습니다. 저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우리를 잘 살게 해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면 4대강이니 자원외교니 하면서 나라를 망쳐 먹고, 국고를 고갈시켜 버리고, 박근혜 대통령이 되면 무엇인가 좋을 줄 알았는데, 결국은 모든 사람들이 실망에 빠져버리는 그런 현재의 모습을 보면서, 이것이 바로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가 아닌가? 이스라엘 민족은 지금 왕을 세워달라고 요구하면서, 왕만 세워주면 우리나라도 다른 민족처럼 그렇게 강대국이 될 수 있는, 있을 것이고, 우리나라도 좀 괜찮아질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제발 왕을 좀 우리에게 세워달라고 요구하고 있는데, 그럼 왕을 세워달라고 하는 이스라엘 민족을 향해서 하나님께서 해 주시는 말씀이 무엇이냐면, 왕을 세우게 되면 좋은 결과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 왕이 너희들의 아들 딸들을 종으로 삼을 그 왕이 너희들의 물건을 10분의 1씩 세금으로 걷어갈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죠.

어쩌면 이게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라고 말할 수 있겠는데요. 우리가 이 세상에 소망을 두면, 그 소망이 우리를 만족시켜주는 것이 아니라, 항상 우리로 하여금 절망하게 만듭니다.

아담과 하와가 그랬잖아요. 하와는 선악과를 바라보면서 사탄의 유혹을 받습니다. 사탄의 유혹이 무엇입니까? 네가 만일 저 선악과를 먹으면 그러면 내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처럼 될 것이다. 그 이야기에 솔깃해 선악과를 먹으면 정말 좋을 것 같다. 저것만 먹으면 내 문제가 다 해결이 되고, 저 선악과만 먹으면 내가 하나님과 같은 높은 위치로 올라갈 거라고 생각을 했어요. 근데 선악과를 먹고 나니 결국 하나님과 같이 된 것이 아니라, 그 결과는 비참해졌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의 단절 죽음 에덴동산으로부터 축출당하는 그런 비참한 결과, 장미빛 선악과(공약)를 바라보면서 그걸 먹으면 살 줄 알았는데, 결국에는 멸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 우리 조상들이 선택했던 그 문제였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오늘날 우리들의 문제는 돈에 소망을 겁니다. 돈이라고 하는 것이 너무나도 좋아요. 돈이 있으면 문제들이 해결될 것 같고, 돈이 있으면 떵떵거리며 살 수 있을 것이고, 돈만 내 손에 집어넣으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돈만 있으면 좋겠다고 소망을 그 돈에 두는데, 그런데 그 돈을 얻기 위해서 결국 우리가 지불했던 대가가 무엇입니까? 돈을 얻기 위해서 결국 비참한 삶을 살게 된 것이고, 내 건강 다 잃어버리게 된 것이고, 돈을 얻기 위해서 가정이 깨어지고, 가족이 해체되고,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멸망의 길로 가고 있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왕이 없었던 민족인데, 그 왕만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정말로 좋았는가 하나님께서는 미리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날에 너희는 너희가 택한 왕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되, 그날에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응답하지 아니하리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소망을 어디에 둘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이 세상의 것들에 우리의 소망을 둘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 소망을 두어야 합니까?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시편 146편 3절 말씀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인생을 의지하지 말지니.” 사람을 믿으면 어떻게 될 것인가? 100프로 실망할 것이에요. 사람을 믿으면, 저 사람이 나의 구세준가? 저 사람이 나에게 희망을 줄 것인가? 하고 그 사람을 믿으면, 괜찮을 줄 알았는데, 성경의 가르침은 무엇이냐면,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이것은 단순히 대통령에 대한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에 대한 이야기이고, 그래서 우리 교인들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목사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는 항상 좋은 사람만 만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거라고 하는 잘못된 망상 속에 살아갑니다. 우리의 생각이 뭐예요?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이 뭡니까? 좋은 사람만 있으면 해결될 거 아닙니까? 좋은 사람만 있으면 되겠다고 하는 거짓된 망상 속에서, 우리가 살아갑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는 결혼만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 결혼을 한다는 것은 아주 인생의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신중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신중하다고 하는 것은 정말로 중요한 것이고, 아주 바람직한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런데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잘못된 망상이 들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면 좋은 신랑감만 찾으면, 결혼 생활은 행복할 거라고 하는 착각이죠. 좋은 아내만 만나면 행복할 거라고 하는 착각입니다. 좋은 남편이 있던가요? 좋은 아내가 있던가요? 좋은 남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좋은 신랑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아직 미완성이고 연약하고 모든 것이 부족한 한 남자와 모든 것이 부족하고 연약하고 아직 미숙한 한 여성이 만나서 결혼을 하는 게 그게 결혼이에요.

완벽한 배우자를 찾지 마세요. 완벽한 배우자를 찾기 때문에 결혼을 못하는 거예요. 옛날에 어떤 노처녀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그래요. 자기가 결혼하고 싶었는데 자기가 결혼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그 사람들이 항상 유부남이었기 때문에 결혼을 못 했다는 겁니다. 저 남자 참 좋네 하면, 유부남. 저 남자 참 좋네 하면, 유부남. 그래서 결혼을 못 했다는 거에요. 그런데 나중에 그 노처녀가 나중에 고백하는 말이 뭐라고 고백하냐면, 나는 왜 그렇게 유부남만 좋아했었나 했더니, 알고 보니까 그 사람은 결혼을 했기 때문에 부족한 남자가 결혼을 해서 그래서 인격적으로 점점 성숙해지고 해서, 그래서 좋은 사람이 된 거지. 결혼하기 전에는 연약하고 부족한 사람이었다고 하는 사실을 몰랐다는 거에요. 결혼은 좋은 사람을 만나서 결혼하는 게 좋은 결혼이 아니라, 아직도 연약하고 부족하고 모든 게 미숙한 한 남자와 아직도 부족하고 연약하고 모든 것이 어설픈 한 여자가 만나서 두 사람이 서로 아웅다웅하면서 싸우면서 성격 차이 때문에 서로 조율해 가면서 다투면서 그러면서 점점점점 인격이 성숙해져 나가는 게, 그게 인생이고 그게 결혼 아닙니까? 아이를 낳아서 기르는데 완벽한 부모이기 때문에, 그 아이를 기르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모르고 젖을 어떻게 먹여야 되는지, 이 아이에게 어떻게 교육을 시켜야 되는지, 아무것도 모르는 철 모르는 부모가 아이들을 기르면서, 그 아이를 기르는 과정 가운데서, 내 인격이 성숙하고 인내심이 생기고 신앙이 더 커가는 그런 성숙의 과정을 걸어가는 것이 그것이 인생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가 있는데, 안타깝게도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은 완벽한 100퍼센트 흠도 없는 배우자를 찾다가 결국 찾지 못하는 경우가 교회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는 완벽한 교회를 찾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완벽한 교회를 간다고 한다면, 그래서 그 교회에 가면 내가 신앙생활 잘할 것만 같아요. 지금 내가 다니고 있는 교회에는 꼴 같지 않은 그런 사람들도 있고, 결국 여러 가지 불합리한 모습 이기적인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되면서, 교회에서 함께 신앙생활하면서 상처를 받고 고통을 당하면서, 이 교회는 정말 안 된 교회다. 이 교회는 정말 내가 다닐 수 없다라고 포기하면서, 더 나은 교회를 찾으려고 하는 그런 마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완벽한 교회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전에 스펄전 목사님이 한 번은 어떤 청년과 이야기를 했는데, 그 청년이 스펄전 목사님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그래요. 목사님, 지금 내가 다니는 교회에서 내가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 교회 성도님들 내가 다니는 이 교회 성도님들은 너무나도 이기적이고 사람들에게 상처를 너무나 많이 주고, 그래서 내가 이 교회를 도무지 다닐 수가 없습니다. 목사님 좀 사랑이 넘치고 그리고 따뜻하고 정말 아름다운 교회 어디 없을까요? 목사님은 그래도 유명한 부흥사니까, 영국 여기저기를 다니면서 수많은 교회를 보시지 않았습니까? 그 교회 중에서 제일 좋은 교회, 추천할 만한 교회, 사랑이 넘치는 교회, 정말 멋있는 교회, 아름다운 교회 소개해 주시면, 제가 그 교회 다니겠습니다. 제발 그 교회 좀 하나 소개시켜 주십시오. 그랬더니 스펄전 목사님이 그 청년 앞에서 고민고민하면서 머뭇거리다가 입을 뗐습니다.

“여보게. 청년. 내가 지금까지 부흥회를 하고, 집회를 다니면서 영국에 있는 모든 교회를 대부분 다 다녀보고, 그 교회를 다 살펴봤는데, 유감스럽게도 아직까지 내가 볼 때 아무 문제없고 사랑이 넘치고 따뜻한 교회는 단 한 교회도 발견하지 못했다네. 내가 간 교회마다 다 문제 투성이고, 거기에 문제의 교인들이 있고, 여러 가지 시기와 질투와 그리고 갈등들이 있는 교회들 뿐이었지, 그렇게 좋은 교회 찾지 못했다네. 미안하네. 내가 좋은 교회 추천해줄 수가 없어서 정말 미안하네.” 이 청년이 대단히 실망을 했습니다.

그러자 스펄전 목사님이 이야기를 합니다. “여보게. 청년. 자네가 한번 찾아보게나. 자네가 여기저기 다니면서, 정말 좋은 교회 있으면 한번 찾아보게. 그리고 그 교회가 어디인지 발견하게 되면 나에게 알려주게.” 그러자 그 청년이 목사님에게 이야기합니다. “목사님, 알겠습니다. 스펄전 목사님. 제가 한번 이 교회 저 교회 다니면서 정말 좋은 교회를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그러면 제가 스펄전 목사님에게 와서 이야기하겠습니다.”

그러면서 그 청년이 떠나려고 하는 그 찰나에, 목사님이 그 청년에게 이야기하기 다시 말을 걸었습니다. “여보게. 청년. 잠깐만. 그런데 한가지 부탁이 있네.” “무슨 부탁입니까?” “만일 자네가 영국을 돌아다니면서, 정말 사랑이 넘치고 따뜻하고, 정말 좋은 교회를 발견하거들랑, 제발 그 교회에는 절대로 가지 말게.” 깜짝 놀라서 그 청년이 물었습니다. “아니, 목사님. 제가 그런 교회를 찾고 있는데, 그런 교회에 가지 말라요. 무슨 말입니까? 저는 그런 교회를 다니고 싶습니다.” “여보게. 만일 그렇게 좋은 교회에 자네가 들어가는 그 순간, 나쁜 교회가 되는 거야. 절대 가지 마.”

예수비전교회는 이제 새로운 담임 목사님을 모시려고 하는 단계에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마음속에는 새로운 목사님 오실 때, 가장 좋은 목사님 가장 훌륭한 목사님만 오신다면 괜찮아지겠지, 기대하고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미리 말씀드리는데요. 이 세상에 좋은 목사님은 없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목사님들은 모두가 다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가 없으면, 멸망당할 죄인들 뿐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에 은혜가 없다고 한다면, 다 멸망의 자식일 수밖에 없는 연약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바라보고 사람을 의지하고 사람을 믿는 그 순간 우리는 100퍼센트 실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 혼란은 한국사회의 이런 현상은 바로 그러한 사실을 분명하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성경의 가르침은 무엇입니까? 성경의 가르침은 우리의 소망을 어디에 두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 시편 146편 5절 말씀에 “여호와 자기 하나님을, 하나님을,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믿습니까? 우리의 소망은 사람에 대한 소망이 아니고, 건물에 대한 소망이 아니고,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실력과 능력에 대한 소망이 아니고, 오로지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하나님에게만 우리의 소망을 두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하는 것은 그러니까 모든 걸 다 내버려야 된다고 하는 말씀은 아닙니다. 모든 것을 다 배격하라고 하는 말씀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면서도. 병을 낳기 위해서 의사와 병원을 이용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철저히 신뢰하면서도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밥을 먹어야 하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면서도 무슨 일을 이루기 위해서 사람들과 협력하고 무엇인가를 협력하면서 일을 이루어야 하는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하는 것은 모든 것을 다 버려야 한다고 하는 말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기 때문에 내가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서 공부 하나도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열심히 공부해야 되는 것이고,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기 때문에 일을 안 해도 먹고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열심히 일을 해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하는 것은 모든 것을 배격하라고 하는 그런 말씀은 아닙니다.

좋은 목사님도 찾아야 할 것이고, 좋은 신랑감도 찾아야 할 것이고, 여러 가지 좋은 것들을 찾는 것 당연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소망이 하나님에게 있는가? 사람에게 있는가? 우리의 의지가 하나님에게 있는가? 사람에게 있는가는 완전히 다를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왕의 제도를 설명하면서, 왕을 세우면 이런 단점 이런 부작용이 있을 거라고 말씀하시면서 경고하시면서도, 하나님께서 왕을 세우는 것을 금한 것이 아니라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걸 보면서 사람들은 질문을 던질 겁니다. 아니, 왕의 제도의 나쁜 점들을 이야기하면서, 왜 하나님께서는 왕을 세우도록 허락하십니까? 나쁜 거라고 한다면 세우지 못하게 만들어야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는 허락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과 왕을 세우는 것이 상반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왕을 세우기는 하지만, 이스라엘 민족의 왕을 세우기는 하지만, 우리가 왕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볼 수만 있다면, 왕을 세우지만 그 왕이 우리를 먹여 살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 애를 먹여 살리는 것이라고 하는 사람, 그런 믿음의 고백을 할 수만 있다고 한다면, 그 왕은 축복의 도구가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어느 순간에, 하나님은 온전히 잊어버리고, 왕을 우리의 소망으로 삼거나, 물질이나 내 능력을 우리의 소망으로 삼는 그 순간에, 우리의 문제가 완전히 잘못되어 가게 될 수만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우리 인류는 언제나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는 하나님이 아닌 것들을 우리들의 우상으로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가를 의지했고,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 대신에 우상을 섬겼고, 하나님 대신에 물질을 섬겼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보다는 애굽을 의지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을 선택하기보다는 인간 왕을 선택한 이스라엘 민족의 결과는 아주 비참했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소망이 있다고 한다면, 사람에게 소망을 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참되신 왕이신 하나님 앞에 우리가 소망을 두는 것 밖에는 우리에게 다른 소망이 없다고 하는 사실을 믿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2월은 성탄의 계절입니다. 성탄은 만왕의 왕되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아기의 모습으로 오신 것을 기념하는 것이 성탄절입니다. 기독교 전통은 오래된 기독교의 전통은 성탄절을 앞둔 한 달 동안 정도의 기간을 가리켜서 대강절이라고 합니다. 대강절은 대강대강 지내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강림을 기대하면서 기다리라고 하는 것이 바로 대강절인데, 저는 지난주에 미국에 갔을 때 미국 교회에 참석했는데, 미국 교회에서 대강절 첫 번째 주일을 지내면서 나뭇잎으로 만든 동그란 원에 촛대가 꽂혀져 있는 여러 개의 촛대가 꽂혀져 있는 그 촛대에, 첫 번째 촛대에 촛불을 켜는 것으로 대강절 그런 세레모니를 하는 모습을 봤습니다. 그 의미가 무엇이냐면 초록색 나뭇잎으로 엮은 동그란 원인은 하나님의 변함없는 끊임없는 인류에 대한 사랑을 나타내고, 끊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고, 그리고 그 촛대들은 어둠 가운데 오신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상징하는 것인데, 한 주 한 주 지나면서 촛대에 불을 켜면서, 예수님이 오신 성탄절을 기념하는 그 모습 가운데 첫 번째 촛대를 켜는 것을 봤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누구로 오셨는가? 만왕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이사야서 9장 6절 말씀에 보면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이니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만왕의 왕으로 오셨는데, 이 세상의 왕, 이 세상의 권력자는 우리들에게 실망을 주지만, 참된 왕이신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오셔서 참된 평화와 위로를 주시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 위해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 위에서 피 흘려 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저는 지난주에 미국에 있는 두 딸 아이를 만나러 갔다 왔는데, 큰 딸 아이는 27, 28 나이가 되고, 두 번째 아이는 23살 정도 되는데, 미국 나이랑 한국 나이랑 좀 헷갈려서 그래요. 그 아이가 있는 사는 곳에 가보니, 한숨이 나오는 거에요. 우리 둘째 아이는 지금 어느 한 집에 자취생 한 대여섯명이 함께 살고 있는 거예요. 방 하나하나에 대학생들 자취생들이 모여 살아서, 함께 살고 있는데, 화장실을 하나 공룡으로 쓰고 있는 그런 상태인데, 방 안에 갔더니, 고양이 털이 날리고, 화장실은 먼지로 가득 떼가 가득 차 있고, 엉망 신청. 그 딸아이를 방문하러 이번에 처음, 사는 곳을 이사 간 이후로 처음 가봤는데, 대학생 아이들이니 청소를 제대로 할 수 있습니까? 미국 아이들은 공부하면서 평생 학교 청소를 하지 않습니다. 우리 한국과는 달리. 그러니까 청소를 배워보지 못한 이 아이들이 엉망 칭찬으로 살고 있는 그 모습을 본 제 아내가 도착하자마자 허리를 졸라매고 청소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청소를 하면서 그 화장실을 깨끗이 닦아내는데, 우리 아이가 말하면 엄마 이거 여러 명이 쓰는 건데 우리가 청소할 필요 없다고 하는데, 엄마의 마음은 그게 아닌 것 같아요. 반짝반짝반짝 윤기가 나게, 허리가 아픈데도 힘들어 하면서도, 그렇게 막 하고 그리고 방도 막 고양이들 다 털어내고 하면서 가서 쉬고 온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치우고 청소하느라고 막 너무나도 힘들었는데, 그때 제 아내가 “내가 이러려고, 배 아프고 딸 나서 엄마가 되었나 자괴감이 들고 괴롭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몸은 힘든데 행복한 거에요.

그게 엄마의 마음 같아요. 그런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엉망진창인 우리들의 모습을 보시고, 만왕의 왕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죄악 가운데 온갖 더러운 모습을 가지고 사는 우리.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아서 깨어진 가정 갈등이 있고, 재정적 문제가 있고, 건강에 문제가 있고, 소외의 문제가 있고, 여러 가지 문제들이 가득한 우리들의 모습. 그 모든 문제가 바로 우리들이 지은 죄의 문제 때문에 이 모든 것들이 비롯될 수밖에 없었는데, 우리 주님께서 그 모습을 보시고 그냥 외면한 것이 아니라, 저 높고 높은 그 보좌를 버리시고, 영화롭고 아름다운 하나님의 우편의 자리에서 이 땅 위에 내려오셔서,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엉망진창된 우리들의 모습을 고치시고 구원해 주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소망을 주님에게 두어야 되는 이유는 예수님은 이 세상의 왕들과 같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를 착취하고 재벌들의 돈을 뜯어가는 권력자가 아니라, 애국애국 입을 이야기하면서 자기 뱃속만 채우는 권력자들이 아니라, 우리들을 사랑하시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평화의 왕으로 오신 것이 바로 성탄절 크리스마스입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12월 성탄절을 앞에 두고, 어떤 성탄절을 기다리고 계십니까? 이 성탄의 계절에 우리의 소망을 더더욱 하나님에게만 두고 만왕의 왕 되신 주님 앞에만 두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문제가 있다고 한다면 주님 앞에 나아가시고 엉망이 되어버린 우리들의 모습을 괜찮다 하시고 우리들의 모습에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십자가 위에서 모든 것을 내어주신 주님 앞에 나아가서 우리의 소망을 두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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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왕이 될 상인가? (왕하 8:7-15)

이제 한 달 정도 뒤가 되면 대통령 선거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대통령을 어떤 사람으로 세울 것인가, 대한민국의 지도자를 어떤 사람으로 세울 것인가 하는 것은 아주 지대한 국민적 관심사일 것입니다. 어떤 지도자가 선택되는가에 따라서 국가의 운명이 바뀌고, 더 나아가 우리 개인들의 삶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관심을 가지지 않으려야 가지지 않을 수 없는 아주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여러분들은 여러 후보들 가운데서 어떤 후보를 지지하십니까? 이재명, 윤석열, 안철수, 심상정, 김동연, 허경영을 비롯해서 여러 후보들이 이번에도 대통령 후보로 나서게 될 것인데, 도대체 어떤 후보가 다음 대통령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하고 계십니까? 저는 누구를 지지할까요? 그것은 비밀입니다. 저 나름대로 더 지지하는 후보가 있고, 지지하지 않는 후보가 있기는 하지만, 비밀로 붙이는 것은 선거법상 금하고 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제 사명이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 제 사명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어떤 정치인들을 열광적으로 지지하지는 않습니다. 더 나아가서 어떤 사람이, 만일 어떤 특정 정치인에 대해서 열광적으로 지지한다고 하면, 제 사명은 그 정치인이 우리의 구세주가 아니라, 오직 우리의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정치인의 앞잡이나 노예가 되기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기로 헌신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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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에게 어떤 지도자가 선출되는가 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인 것입니다. 한 나라의 지도자는 어떻게 탄생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아주 간단합니다. 투표를 통해서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대 민주주의에서는 선거가 아주 중요한데요. 민주적인 절차에 따라서 투표를 하게 되고, 그리고 그 결과가 우리의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그 결과에 승복하는 것이 현대 민주주의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하지만 민주적인 절차가 발달되지 않았던 과거에는 힘으로 권력을 차지하곤 했습니다. 쿠데타를 일으켜서 정권을 잡든지, 아니면 왕권을 계속 강화해서 자기의 아들에게 물려주든지, 아니면 전쟁을 통해서 정권을 잡든지 해서, 힘이 있는 사람이 정권을 잡게 되었는데요. 그게 우리들이 눈으로 보게 되는 모습일 것입니다.

하지만 영적인 차원에서 바라보게 된다고 한다면, 선거를 통해서 지도자를 세우든, 힘에 의해서 정권을 잡게 되든, 그것이 우리들의 눈앞에 나타난 현상이겠지만, 그러나 영적인 차원에서 바라보게 된다고 한다면, 지도자는 누가 세우는가? 하나님께서 세우시고, 하나님께서 폐하신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받아들여야 될 줄로 믿습니다.

다니엘서 2장 20절에서부터 21절의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니엘이 말하여 이르되, 영원부터 영원까지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할 것은 지혜와 능력이 그에게 있음이로다. 그는 (=여호와는) 때와 계절을 바꾸시며, 왕들을 폐하시고 왕들을 세우시며 지혜자에게 지혜를 주시고, 총명한 자에게 지식을 주시는 도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적인 관점이 무엇이냐면, 그것은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도 하나님의 주권 하에 있는 것이고, 한 나라의 왕이 세워지고, 한 나라의 왕이 무너지는 것도, 한 나라의 지도자가 세워지고, 한 나라의 지도자가 몰락하는 것도, 하나님의 뜻과 주권 아래 있다고 하는 것이 성경적인 관점이고, 영적인 관점입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우연이라고 하는 것이 없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허락하심 가운데서 일어난다고 하는 것이 성경적인 관점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러니까 우리가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인다고 하는 것은, 그러니까 우리 인간들이라고 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고, 그저 하나님이 움직이는 대로 우리 인간이라고 하는 것이 꼭두각시 인형처럼 하나님에 의해서 그렇게 수동적으로 움직인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번 도표를 보았으면 좋겠는데요. 네 가지 견해가 있을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주권적인 선택과 결정을 함으로 인해서, 이 세상이 움직여 나가는가? 아니면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에 의해서, 이 세상이 움직여 나가는가에 대한 관점을 네 가지로 볼 수가 있겠는데요. 첫 번째 견해는 어떤 견해입니까?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다스리시고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주권적으로 결정하시고 선택하시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아무런 선택과 결정권이 없다고 하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 달렸다고 하는 것이 첫 번째 견해인데요. 만일 이렇게 바라본다고 한다면 모든 책임이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고, 그리고 우리 인간은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꼭두각시 인형처럼 움직이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하는 견해가 첫 번째 견해일 것입니다. 이 견해는 결코 옳은 관점이 아닙니다. 실제적으로 우리는 꼭두각시 인형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의지를 가지고, 우리의 선택과 우리의 결정으로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견해는 옳지 않은 견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두 번째 견해는 정반대의 견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그것은 우리 인간이 모든 것을 다 결정하는 것이고, 인간이 다 선택해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결정과 선택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고, 모든 책임이 우리 인간에게 있는 것이고, 하나님은 개입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손 놓고 있거나, 아니면 하나님이 없다고 보는 관점이 세속적인 관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인데, 이건 역시 잘못된 관점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래서 이 첫 번째 견해와 두 번째 견해를 섞어놓은 신인 협력론적인 견해가 세 번째 견해입니다. 하나님께서 주권적인 선택과 결정을 하는 것이 반절, 그리고 인간이 자유로운 선택과 결정을 하는 것이 반절이라고 하는 신과 인간이 반반씩 협력해서 모든 것이 일어난다고 보는 것이 세 번째 견해일 텐데요. 역시 이것도 바른 관점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가장 성경적인 견해가 무엇이냐면 마지막 네 번째 견해입니다. 인간적인 면에서 본다고 한다면 100%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과 결정에 의해서 모든 것이 이루어집니다. 인간의 자율적인 선택과 결정에 따라서, 모든 것이 발생하는 것이고, 그에 따른 책임도 우리 인간에게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 인간적인 면에서 바라본다고 한다면 100퍼센트 모든 것이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과 결정에 따라 움직이게 되는 것이죠.

하지만 영적인 측면에서 본다고 한다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과 결정에 따라서, 하나님이 온 세상의 모든 것들을 다 주관하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다스린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쪽에서 바라보느냐? 저쪽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인간적인 측면에서 본다고 한다면, 전적으로 인간의 선택과 결정에 따라 자유로운 선택과 결정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그러나 동시에 영적으로 바라본다고 한다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다고 하는 것이, 어쩌면 성경에서 가르쳐주고 있는 관점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성경적인 관점은 한편으로는, 사람들의 자율적이고 자유로운 선택과 결정에 따라 모든 것들이 발생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그것이 하나님과 상관없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움직인다고 하는 것이 성경적인 관점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말씀은 엘리사 시대에 있었던 한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엘리사 선지자가 다메색이라고 하는 동네를 방문하게 되었을 때, 아람왕 벤하닷이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에게, 자신이 병에서부터 나을 수 있을 것인지를 물어보게 되었습니다. 병에 걸렸던 이 벤하닷 왕이 하나님의 사람이 왔다고 하는 이야기를 듣자, 자신이 이 병에서 나을 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서 궁금해서, 하사엘이라고 하는 신하를 보내서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 물어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이 하사엘은 낙타 40마리를 끌고 갑니다. 그 위에 예물들을 가득가득 실어 가지고, 엘리사 선지자에게 예물을 드리고, 이 벤하닷 왕이 병에서부터 낳을 수 있는지 물어보게 되었습니다.

그때 엘리사 선지자가 대답을 해 주었습니다. “왕이 반드시 나을 겁니다”라고 말하십시오. 하지만 왕이 낫는 것이 아니라 죽게 될 거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벤하닷 왕이 죽게 되는 이유는 병에 의해서 죽는 것이 아니라, 바로 사신으로 왔던 그 하사엘이 그 벤하닷을 죽이고 왕이 될 거라고 하는 것을 알려주었고, 그리고 이 하사엘이 왕이 된 다음에는 이스라엘 민족을 괴롭히고, 아주 정말 박해하게 되는, 전쟁을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엄청난 위협이 될 사람이라고 하는 사실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결국 하사엘이라고 하는 이 사람은 돌아가서, 벤하닷에게 이야기해서, 병에서부터 나을 것이라고 이야기했지만, 그다음 날 이 하사엘은 왕의 얼굴에 이불을 덮어서, 물을 적신 이불을 덮어서 살해해버리고, 자신이 왕이 되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오늘 본문의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려주고 있는 이 이야기는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에 대해서 아주 간단하지만, 오늘 조금 전에 제가 설명드린 그것을 묘사해주는 이야기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섭리와 뜻에 따라서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다 발생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동시에 인간의 선택과 결정에 따라서 그것이 어떻게 서로 맞물리면서 돌아가고 있는가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는 사람의 생명이,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이, 한 나라의 왕이 세워지고 한 나라의 왕이 없어지는, 그 모든 것들이 이 세상 모든 만사가 하나님에게 달려 있다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엘리사 선지자는 벤하닷 왕이 죽기 전에, 하사엘이 그 벤하닷 왕을 죽이기 전에, 이미 그렇게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해 주었습니다. 이 세상이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우연의 연속에 의해서 굴러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 아래서 하나님의 주권 아래 모든 것이 움직이고 있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누구에게 주권이 있다고요? 하나님에게 있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섭리 하에서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일어난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말씀이 바로 오늘 본문에 말씀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결론은 무엇입니까? 첫 번째 결론은 우리는 참되신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하는 것이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나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하나님의 주권에 따라서 움직인다고 한다면,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모든 것을 다 해결할 수 있다고 하는 그런 교만한 마음을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나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사람이 아무리 애를 쓴다고 할지라도 소용이 없다고 하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해야 되는 것이고,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엎드려야 될 줄로 믿습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생각해야 될 것은 우리는 헛된 우상 앞에 엎드리지 않아야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이 아닌 이 세상의 우상이나, 무속을 의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게 모든 것이 달려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참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참되신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나아가야지, 참되신 하나님이 아닌 우상에게 엎드리거나 참되신 하나님이 아닌 무속에 의존하는, 그런 어리석은 모습을 보여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사주나 팔자, 혹은 관상, 무속, 부적을, 부적 같은 것을 통해서, 우리들의 미래를 바꾸어 보려고도 하고, 우리의 미래를 알고 싶어 하려고 하는, 그런 경향들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많이 있습니다.

대체로 도덕적인 결함이 있는 사람들이 이런 무속에 의존하는 경향들이 많이 있는데요. 자격이 되지 않는 사람들은 무속이나 관상이나 사주나 팔자를 의존해서, “내가 왕이 될 수 있는 상인가”를 묻는 것이고, 아무런 능력도 없는 헛된 우상과 무속 앞에 현혹되는 그런 어리석은 모습을 보여줄 때가 많이 있는데, 오늘 이 말씀을 보면서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참되신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께 모든 것이 달려 있다고 하는 사실을 인정하고, 잘못된 헛된 우상 앞에 잘못된 무속 앞에 우리가 머리를 숙이는 어리석은 선택을 하지 않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우리가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에게 의존하는 그런 불완전한 신앙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종종 우리 크리스찬들 가운데는, 소위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 행세를 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기도의 은사를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어서, 마치 점쟁이가 앞날을 알려주듯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서 당신은 목사가 되어야 될 사람이다. 당신은 무엇을 해야 될 사람이라. 당신은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다라고 하면서 미래에 어떤 일들이 일어날지를 알려주는, 그런 사람들이 우리 크리스찬들 가운데도 있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앞으로 무슨 일을 해야 되고, 이런 일을 해야 된다고 말해 주면서, 예언을 해주는 사람들이 종종 우리 크리스천들 가운데도 있는데요. 그런 사람들이 어떤 경우는 목사일 수도 있고, 권사일 수도 있고, 장로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행위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한다고 할지라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한다고 할지라도, 성령님을 빌어서 그런 이야기를 한다고 할지라도, 이것은 정당한 건전한 신앙생활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물론 구약시대 때는 그런 일들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보여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서, 선지자들이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예언해준 이야기가 구약 성경 가운데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도 엘리사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계시해 주신 것에 따라서, 벤하닷 왕이 어떻게 될 것인지, 하사엘이 무슨 일을 할 것인지에 대해서 예언해준 이야기들이 구약 성경 가운데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일들은 성경이 완성되기 전에 있었던 일시적이고, 부분적인 일이었고, 그것도 아주 예외적으로 일어난 일들이었지, 지금은 성경이 완성된 시대를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제는 완전히 계시가 되어서, 더 이상의 추가적인 계시가 있을 수 없는 이 시대를 우리가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 신약시대를 사는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이미 말씀해 주신 성경 66권을 묵상하고, 또 이 말씀에 따라서 의지하면서, 신앙생활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지, 그래서 우리가 이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내 길을 어떤 길로 인도해 주시는지, 어떤 길을 가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지 분별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옳은 것이지, 어떤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나, 기도의 은사를 받은 사람에게 찾아가서 내 앞일이 어떻게 될 것인지, 무엇을 해야 될 것인지를 구하는 것은 그것은 건전한 신앙이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날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발걸음을 인도하지 않는다고 하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그 어떤 것도 오늘날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발걸음을 인도하시기는 하지만, 우리가 구약시대 때 그랬던 것처럼, 이것은 100% 하나님의 뜻이라고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누군가 그런 이야기를 한다고 해도, 그게 정말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 우리가 확인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예언의 은사를 받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현혹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또 무엇이냐면,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주관하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역시 우리의 인간적인 선택에 의해서 인간의 결정에 의해서, 이 세상의 역사가 흘러가게 되는 것이고,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고 하는 사실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을 하는 그런 결단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사엘이라고 하는 사람이 오늘 등장하는데요. 자신이 섬기던 왕이었던 벤하닷을 암살하고 쿠데타를 일으켜서 왕이 되었습니다. 이 하사엘이라고 하는 사람이 아무 일도 하지 않았는데, 그냥 하나님께서 예정해 놓으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계획해 놓으셨기 때문에, 그냥 자동적으로 왕이 된 것이 아니라, 나쁜 방법이긴 하지만, 자기가 왕의 자리를 쟁취해서 왕의 자리로 올라가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서 우리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이 온 세상을 다스린다고 하는 사실을 믿고 신뢰하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동시에 어떻게 해야 되는가? 우리는 해야 될 일들을 해야 하는 것이죠. 지난 시간에 우리는 수넴 여인이라고 하는 이 여인이 자신의 땅을 되찾기 위해서 왕 앞에 나아갔던 이야기를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하사엘이라고 하는 사람이 쿠데타를 일으켜서 왕이 되는 이야기를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그것이 선한 일이든 악한 일이든, 그 어떤 것들이든, 다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과 통치 가운데서 일어나는 것이지만, 동시에 그 일이 선한 일이든 악한 일이든 우리들이 행하는 것들을 통해서 일어나게 된다고 하는 것을 바라봐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의 선택은 무엇입니까? 선한 선택을 해야 하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택을 해야 하는 겁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 보면, 악한 사람이 승리하는 것 같은 상황을 자주 만나게 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좌절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결국은 공의롭게 심판하실 거라고 하는 사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결국에는 모든 것을 바로 잡을 거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면서, 우리들은 선한 선택을 하면서 나아가야 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악한 일을 선택한다고 한다면 심판을 받게 될 것이고, 만일 우리가 선한 선택을 하게 된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면서, 선한 일을 선택하며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말씀을 보면서 우리가 깨달아야 될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과 섭리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어쩌면 이 세상은 뒤죽박죽으로 흘러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세상은 마치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처럼, 공의로우신 하나님, 선하신 하나님이 계시지 않고 전혀 간섭하지 않는 것처럼, 이 세상은 엉망징창으로 돌아갈 때가 많이 있습니다. 기도 했는데도 응답이 안 되는 것 같아요.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이 세상을 움직인다고 한다면,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의 선하신 손길에 따라서 변화가 돼야 될 텐데, 정반대로 흘러가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이 있어요. 그런 일을 만나게 될 때마다 우리는 당황스럽습니다. 왜 기도한 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정반대로만 흘러가고 있는 것인가 당황스러운 것이죠. 뿐만 아니라 우리가 이 사회를 바라볼 때는, 정말 절망적일 때가 많이 있습니다. 정의로운 판결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정의와는 정반대의 판결들이 이루어지는 것이고, 의로운 자는 고난을 당하고, 악한 자들은 계속해서 승승장구하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정말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럴 때 우리들의 생각에, 하나님이 안 계신가? 하나님이, 선하신 하나님이 계시다고 한다면, 왜 이런 일들이 발생하는가? 라고 질문을 던지게 되고, 하나님은 혹시 졸고 계신 것이 아닌가?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일에 전혀 참견하지 못하고 있는 것인가? 라고 생각이 되는 것 같아요. 하나님 도대체 이 세상이 왜 이렇게 엉망진창입니까? 테스 형, 세상이 왜 이래? 하면서 사람들이 외치게 되는 것이지요.

어쩌면 한 달 정도 남은 대통령 선거에서 대통령 선거의 결과는 우리들이 기대하고 소망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결과가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소위 내가 싫어하는 사람들, 내가 악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성공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상황들이 펼쳐진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믿음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심지어 최악의 상황이 일어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과 섭리 가운데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사엘이나 벤하닷이나 피장파장 다 나쁜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는 아람 나라가 적군이거든요. 이스라엘 민족을 침공하려고 하는 그 아람 나라의 왕들입니다. 따라서 벤하닷도 이스라엘을 침공하는 그런 나쁜 왕이고, 하사엘도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그런 나쁜 왕이 될 때, 피장파장 나쁜 사람들인데, 그런데 사실 자신의 군주를 죽인 이 하사엘 쿠데타를 일으킨 하사엘이 훨씬 더 나쁜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도덕적인 관점으로 본다고 한다면, 나쁜 왕을, 더 나쁜 사람이 물리치고, 그 왕이 등극하게 되는 어쩌면 정말 악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여주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겁니다. 그 더 나쁜 사람이 승리하는 모습을 보게 되면서도, 우리가 이 성경 말씀을 통해서 발견할 수 있는 진리가 무엇이냐 하면, 그 나쁜 사람이 왕이 되는 그 모습도, 그냥 어쩌다 보니까 그렇게 나쁜 사람이 왕이 된 것이 아니라, 그냥 이러다 저러다 보니까 우연에 의해서 하사엘이 왕이 된 것이 아니라, 오늘 본문의 말씀의 가르침이 무엇이냐면, 그것마저도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 가운데서 나타나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이, 그냥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악한 자가 권력을 잡은 것이라고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죠.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는 어떤 마음의 태도를 가져야 되는가? 절망할 것이 아니라, 이런 상황 가운데서도 범사에 감사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나중에 이 아람 나라는 이스라엘을 침공해서 이스라엘을 멸망시켜버립니다. 나중에 바벨론이라고 하는 나라가 일어나게 되는데요. 느브갓네살 왕이 다스리는 그 바벨론이라고 하는 나라에 의해서 남쪽 유다가 멸망을 당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이스라엘 민족이 멸망하게 된 것이 우연하게 된 것인가? 성경 전체의 가르침이 그게 아니라는 거예요. 누구의 뜻과 계획 가운데 있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 가운데 있었다고 가르쳐주는 거에요. 심지어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시냐면, 바벨론의 왕인 느브갓네살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종이라고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종이라고 하는 말은 하나님의 에이전트(agent)라고 하는 말이에요. 하나님의 대리자라고 하는 것이죠. 예레미야서 25장 9절 말씀입니다. “보라. 내가 북쪽 모든 종족과 내 종, 내종,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을 불러다가 이 땅과 그 주민과 사방 모든 나라를 쳐서 진멸하여, 그들을 놀램과 비웃음거리가 되게 하며 땅으로 영원한 폐허가 되게 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나님께서 바벨론 나라를 일으키시고, 느브갓네살 왕을 일으켰는데 ,그 느브갓네살 왕에 의해서 유다 나라가 패망하게 될 텐데, 그 느브갓네살을 하나님께서 뭐라고 부르냐면, 그는 나의 에이전트(agent)다. 내 대리인이다. 내 심부름꾼이다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악한 일이 일어난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믿음을 잃지 말아야 되는 이유가, 심지어 그런 악한 일조차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기 때문이고, 그래서 그런 일을 만난다고 할지라도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고, 쉬지 말고 기도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일을 통해서 결과적으로 어떤 일을 이루실지를 바라보면서, 기대하면서 하나님께서 지금 이 일을 이루시고 있는데, 우리가 보기에는 마음에 안 들지만, 그러나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어떤 일을 이루실지를 바라보면서 기대해야 하는 것입니다. 누구처럼? 애기처럼.

여러분들 아기 길러보셨잖아요? 아기들한테 부모님이 데리고 장난을 치는데요. 놀아주는데요. 무슨 놀이를 하면서 아기들이랑 놉니까? 까꿍 놀이를 해요. 까꿍 그러면 아이들이 웃습니다. 부모가 어떻게 하냐면 숨어요. 엄마의 얼굴이 보이지 않아요. 아빠의 얼굴이 보이지 않아요. 그러면 이 아이가 도대체 엄마가 어디 갔을까? 아빠가 어디 갔을까? 호기심으로 눈을 휘둥거리면서 바라보는데, 그런데 엄마가 짠하고 나타나서, 까꿍 그러는 거에요. 그러면 이 아이가 아빠의 얼굴을 보고 엄마의 얼굴을 보고 웃습니다. 그 엄마가 다시 몸을 숨기면서, 숨으면 그 아이가 호기심으로 바라보는 거예요. 엄마가 어디 갔을까? 아빠가 어디 갔을까? 하는데 불안한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조금 있으면 까꿍하고 나타나겠지. 그리고 조금만 정말 기다리고 보면 엄마가 까꿍 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이 아이가 너무나도 행복하게 웃습니다. 엄마가 사라질 때, 두려워하고 울고 불고 하는 것이 아니라, 엄마가 언제 까꿍할까를 기대하면서, 눈을 불쑥 뜨고 그 엄마를 기다리고 있는 그 어린아이처럼,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가운데 힘들고 어려운 일을 만나고, 우리의 마음에 들지 않는 일들을 만나고, 때로는 악한 자들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이고, 정말 사악한 일들이 이 세상에서 판치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언제 까꿍하실지를 기대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아마 어떤 사람은 저한테 이럴 거예요. “목사님, 하나님이 제발 까꿍 좀 안 했으면 좋겠어요.” 그럴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아예 절망적으로 끝나지 않고,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손길에서부터 벗어나 있기 때문에 악한 일이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심지어 악한 일조차도 하나님께서 다스리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대하면서, 기억하면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기대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나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못 박혀 피를 흘리시고 돌아가셨을 때, 하나님은 마치 실패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아버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울부짖을 때 하나님은 마치 없는 것처럼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바리새인들과 대제사장들과 헤롯 당원을 비롯한 당대의 사악한 권력자들이 통쾌한 승리를 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기억하고 계십니까? 우리 주님께서는 다시 살아나셔서 실패가 아니라 궁극적인 승리를 하셨고, 사탄의 가장 강력한 무기라고 할 수 있는 죽음을 물리치시고 승리하심으로 말미암아, 저와 여러분들을 위한 영원한 구원자가 되신 줄로 믿습니다.

그 부활의 믿음으로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가운데, 우리들의 눈앞에 보이는 것들에 따라서 울고 있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그 신실하신 손길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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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으면

크든 작든 사람들은 죄를 짓습니다.
그래도 죽기 전에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는 자에겐
소망이 있습니다 .
죽으면 회개할 기회도 없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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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이 떠난 후에

롯이 떠나간 후에 홀로 남은 아브람에게 하나님은 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고 하셨을까?

눈 뜬 장님이란 말이 있다. 눈을 뜨고 있으면서도 보지 못하는 경우를 가리키는 말이다. 우리는 종종 안경을 착용하고 있으면서도 안경을 찾기도 하고, 핸드폰을 손에 들고 있으면서도 핸드폰을 찾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영적인 면에서도 그럴 때가 종종 있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널려 있는데도 불구하고, 잘 깨닫지 못하고 두려워하는 경우를 가리킬 것이다.

롯과 헤어진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는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보라”고 말씀하셨다. 타향살이를 하면서 그래도 의지가 되었던 유일한 친척이었는데, 데리고 있던 목자들 사이에 싸움이 일어나서 헤어져야만 하는 아픔을 겪었던 아브라함에게 주신 말씀이었다. 롯을 떠났고, 자신이 선택해야만 했던 땅은 황량한 벌판이었다. 어쩌면 한숨이 나올 수 있는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동서남북을 바라보라고 하신 것이다. 이 말씀은 단순히 눈으로 보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 땅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약속을 상기하라는 말씀이다. 또한 아브라함에게 그 땅을 다녀보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아주 중요하다. 우리는 방안에만 틀어박혀 있으면 안 된다. 걸어다녀 보아야 한다. 걸어다니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약속을 기억해야한다. 시편 34:8에서는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라고 말씀하셨다. 생생하게 느껴보라는 뜻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일 것이다. 떠나간 롯을 생각하고 나는 외롭구나 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 돌아다녀 보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해야 한다. 이 명령을 들은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였고, 하나님께 제단을 쌓았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 답답할 때가 많다. 어려운 일을 당할 때가 있다. 그럴 때 실망하고 주저 앉아 있을 게 아니다. 눈을 들어 하나님께서 주시는 소망과 미래를 바라보아야 한다. 지금 당장은 황량해 보이는 벌판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로 변화될 것을 기대하며 바라보아야 한다. 그 옛날 언더우드 선교사가 조선 땅에 도착해서, 소망을 품고 미래를 바라보았던 것처럼 말이다. 부모라면 아기의 현재의 모습만 보고 실망하지 않는다. 그 아이가 자라서 앞으로 어떤 인물이 될지를 기대하게 되어 있다. 교사라면 그 학생의 현재의 모습만 바라보는 게 아니다. 그 학생이 자라서 위대한 인물로 성장할 것을 바라보며 가르쳐야 한다. 우리의 삶이 당장 힘들고 어렵더라도 고통스러워만 할 게 아니라,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훈련을 해야 한다.

그런데 사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실 때에도, 우리의 현재 모습만 바라보지 않으셨다. 우리의 모습은 연약한 것 밖에 없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고 하나님의 영화로운 잔치로 불러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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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과 정말 중에도(삼상 15:32-16:1)

32 사무엘이 이르되 너희는 아말렉 사람의 왕 아각을 내게로 끌어 오라 하였더니 아각이 즐거이 오며 이르되 진실로 사망의 괴로움이 지났도다 하니라 33 사무엘이 이르되 네 칼이 여인들에게 자식이 없게 한 것 같이 여인 중 네 어미에게 자식이 없으리라 하고 그가 길갈에서 여호와 앞에서 아각을 찍어 쪼개니라 34 이에 사무엘은 라마로 가고 사울은 사울 기브아 자기의 집으로 올라가니라 35 사무엘이 죽는 날까지 사울을 다시 가서 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사울을 위하여 슬퍼함이었고 여호와께서는 사울을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더라 1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미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거늘 네가 그를 위하여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 너는 뿔에 기름을 채워 가지고 가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보내리니 이는 내가 그의 아들 중에서 한 왕을 보았느니라 하시는지라

사무엘은 아말렉 왕 아각을 끌어오라 해서 찍어 쪼개 죽였습니다. 현대인들이 이런 구절을 읽는 것은 아주 불편합니다. 너무나도 끔찍한 장면이 연상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말렉 왕을 처형하는 것은 그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어떤 한 민족을 다른 한 민족보다 더 편애하여서 차별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죄악을 참고 또 참고 인내하다가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아각을 끔찍하게 죽이는 장면을 보면서 “하나님이 왜 이러시나?” 하고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죄악이 가져올 비참한 결과를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범하는 죄악은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무 의미 없이 던진 돌에 개구리는 목숨의 위협을 당하는 것처럼, 우리는 의식하지 못하지만, 우리가 행하는 잘못들이 가져오는 아주 끔찍한 결과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의식하지 못했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무런 생각 없이 달았던 비난의 댓글들이 연예인을 죽음의 나락으로 몰아넣기도 하고, 학교에서 아무런 생각 없이 왕따를 시킨 것이, 결국 같은 학교의 학생으로 하여금 비참한 선택을 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했다는 것이 죄가 없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아말렉 왕 아각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수많은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러면서 스스로는 잘못을 한 기억을 하지도 못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바로 그의 죄를 심판하셨습니다. 이것을 보면서 사실은 그 아각의 자리에 우리가 있을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께서 비참하게 죽임을 당하셔야 했던 것은 바로 우리들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들이 그 심각성을 알지 못한 채 저지른 죄의 대가가 얼마나 큰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구원을 받은 것을 기억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사무엘이 직접 아각을 처형한 것은 사울 왕의 왕권이 무너졌음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사울의 사형 집행권이 중지되었고, 그 일을 사무엘이 직접 집행했습니다. 너무나도 안타까운 일이고 슬픈 일입니다. 사울 왕을 세운 것은 백성의 소망 때문이었습니다. 왕이 세워지면 그들에게 행복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왕이 있어야 그들을 적군으로부터 구원해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사울 왕은 그런 기대를 충족시켜주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태는 진보하지 못하고 오히려 후퇴하게 되었습니다. 사무엘은 죽는 날까지 사울을 다시 보지 않았습니다(35절).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왕으로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서 떠날 때, 아무렇지도 않으시는 무감정 상태가 아닙니다. 애통해하십니다. 근심하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엡 4:30).

슬퍼하는 사무엘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미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거늘 네가 그를 위하여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 너는 뿔에 기름을 채워 가지고 가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보내리니 이는 내가 그의 아들 중에서 한 왕을 보았느니라”(16:1). 사울에게 모든 기대와 희망을 걸었던 사무엘의 충격은 컸을 것입니다. 사무엘은 직접 사울에게 기름을 부었던 사람입니다. 그렇게 기름을 부으면서 감격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비참한 결과가 빚어졌기 때문에 그 누구보다도 슬픈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 머릿속에 혼란스러움이 가득했을 것입니다. 사울은 하나님께서 세우지 않았던가? 그런데 하나님이 세우신 사울이 하나님의 뜻에 합하지 않는다니? 이런 생각들로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무엘아, 이미 희망이 사라져버린 사울 때문에 힘들어하지 말고 좌절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사울의 실패가 정말 괴로운 것이고 가슴 아픈 일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깊으신 뜻과 계획이 있으며, 이 모든 것들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실 하나님의 손길 아래 있기에 사울의 실패 때문에 하나님의 계획이 망가지지 않을 것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실 사울을 왕으로 세웠지만, 하나님께서는 사울이 소망이라고 말씀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사울을 세우시면서 사울이 답이 아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믿어야 할 대상은 왕이 아니라, 하나님뿐이라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소망은 사람에게 둘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만 두어야 합니다.

우리가 종종 착각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용하는 도구나 사람을 과도하게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기 위하여 사람들을 사용하시기도 하고 도구를 사용하시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런 도구들과 사람들을 통하여 엄청난 기적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도구들과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바라보기를 원하십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사람만 보거나 도구만 봅니다. 결국, 그런 관점은 실망을 가져올 수밖에 없습니다. 사울이 실패하는 것을 보는 것처럼, 하나님이 한때 사용했던 사람들이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이내 실망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울을 들어 쓰셔서 이스라엘 민족을 블레셋으로부터 구원하시기도 하셨습니다. 길르앗 야베스를 암몬 사람 나하스의 손에서 건져내기도 하셨습니다. 아말렉을 물리치기도 하셨습니다. 사울이 왕이 된 후에 이스라엘은 군사적으로 강대한 민족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은 왕을 잘 세웠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사울 왕이 구세주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아니다.”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일하시는데,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나타나는데, 사람이 구세주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언제까지 사울 왕을 위하여 슬퍼하겠느냐?” 사무엘이 낙망하고 슬퍼하고 좌절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인간 사울에게 소망을 걸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선택한 왕이었고,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셨지만, 사무엘은 사람에게 소망을 두었던 것이고, 그것 때문에 낙망하는 것입니다.

사람 하나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수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실패하고 넘어지고 망가져도,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저 베들레헴 이새의 아들을 통해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그 베들레헴 이새의 아들은 다윗이 아닙니다. 다윗도 또 실패합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십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절대로 실패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좋은 담임목사가 아닙니다. 우리의 소망은 좋은 교인들이 아닙니다. 우리의 소망은 뛰어난 정치 지도자가 아닙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정치 이데올로기가 우리를 구원해줄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그리고 정치인들의 선동에 흔들리며 그들의 노예가 되어버립니다. 정치가 우리를 구원해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해답은 오직 주님에게만 있습니다.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만이 소망입니다. 사울을 사용하시기도 하셨고, 사울이 실패했을 때에는 다시 다윗을 준비하시는 하나님이 소망입니다. 인류의 역사를 이끌고 가시고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까지도 주관하시는 하나님만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실패한 인류를 위해 십자가의 길을 가신 예수님만이 참된 소망입니다.

이전 글 읽기 – 사울의 회개(삼상 15:2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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