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정의로운 게 아니라

사람은 정의로운 게 아니라 철저하게 이기적이어서
내가 손해볼 게 없는 은행강도보다는
내 앞을 새치기한 사람에게 더 분노합니다.

+

+

 51 total views

건강한 믿음이란?

적을 상정하고 그 적에 대한 증오와 분노를 유발시키는 것은 강한 신념과 열정을 이끌어내는 효과적인 수단이다. 이는 독재자나 사이비 종교 지도자들이 주로 사용하는 것으로 내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것을 반증한다.

외부의 적에 대한 증오심은 내적인 비건강성에 대하여 눈감게 하는 효과가 있다. 참된 신앙이나 건전한 사상은 외부의 적에 대한 증오보다는 그 자체의 건강성으로 증명되어야 한다.

적을 공격하는 것이 우리 자신의 현실에 눈을 감게 할 수는 있지만 우리의 현실을 나아지게 만들지는 못한다. 참된 믿음은 주로 이웃에 대한 사랑과 배려로 나타난다. 사랑과 배려의 대상이 되어야 할 이웃은 적을 포함한다. (feat.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

+

 17 total views

사울의 분노(삼상 22:6-10)

6 사울이 다윗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함을 들으니라 그 때에 사울이 기브아 높은 곳에서 손에 단창을 들고 에셀 나무 아래에 앉았고 모든 신하들은 그의 곁에 섰더니 7 사울이 곁에 선 신하들에게 이르되 너희 베냐민 사람들아 들으라 이새의 아들이 너희에게 각기 밭과 포도원을 주며 너희를 천부장, 백부장을 삼겠느냐 8 너희가 다 공모하여 나를 대적하며 내 아들이 이새의 아들과 맹약하였으되 내게 고발하는 자가 하나도 없고 나를 위하여 슬퍼하거나 내 아들이 내 신하를 선동하여 오늘이라도 매복하였다가 나를 치려 하는 것을 내게 알리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 하니 9 그 때에 에돔 사람 도엑이 사울의 신하 중에 섰더니 대답하여 이르되 이새의 아들이 놉에 와서 아히둡의 아들 아히멜렉에게 이른 것을 내가 보았는데 10 아히멜렉이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묻고 그에게 음식도 주고 블레셋 사람 골리앗의 칼도 주더이다

다윗이 나타났다는 소식을 사울 왕이 듣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혼자 나타난 것이 아니라 400명의 추종자들과 함께 나타났다는 소식입니다. 아마 이때 즈음이면 이들도 전투를 할 수 있는 용사들로 훈련이 되어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 혈혈단신으로 도망하던 모습이 아닌, 일단의 무리들을 이끌고 상당한 위협으로 등장한 다윗의 소식을 듣게 되었을 때 사울의 분노는 끝까지 치밀었습니다. 그동안 자신의 부하들이 아무 손도 쓰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 다윗이 세력을 규합해서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다고 생각하니 더욱 화가 났을 것입니다.

사울이 분노를 터트릴 때 기회를 놓치지 않고 사울 왕에게 나타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에돔 사람 도엑이었습니다. 사무엘상 21:7에서는 그가 사울의 목자장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다윗이 놉에 있는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가서 성스러운 빵을 받아먹고 또한 골리앗의 칼을 들고 사라지는 것을 목격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놉에서 있었던 일을 사울에게 말했습니다. 도엑은 사울의 분노를 표출할 희생양을 만들어준 것입니다. 아 다르고 어 다른 것인데, 도엑은 마치 아히멜렉을 다윗의 협력자로 몰아버렸습니다.

도엑은 왜 성전에 있었을까요? 그는 왜 그 순간에 성전에 있었을까요? 성전이란 하나님을 만나는 곳입니다. 성전은 지은 죄를 씻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며 영적인 필요를 채우며, 영적인 능력을 받아가지고 나오는 곳입니다. 그런데 도엑은 그 성전에 갔지만, 죄를 씻은 것도 아니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난 것도 아니고, 영적인 필요를 채우거나 영적인 능력을 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무엘상 21:7에서 그가 여호와 앞에 머물러 있었다고 표현하는데, 아마도 속죄의식이나 정결의식을 위해 그곳에 있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죄를 씻고 하나님을 만난 것이 아니라, 단순히 이스라엘 사회 속에서 살아가기 위한 방편으로서만 종교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성경에 규정된 율법을 준수해버리고, 해치움으로써, 다시 세상에 나가 마음대로 살 수 있는 면죄부만을 목적으로 하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면죄부는 중세 시대에 처음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사실 타락한 인간의 본성 깊은 곳에 태초부터 존재했던 것입니다. 도엑에게 있어서 성전은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도 아니었고, 죄를 씻는 곳도 아니었고, 거룩한 모습을 회복하는 장소가 되지도 못했습니디. 자신의 약함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은혜로 채움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저 자신의 더러움을 은폐하는 수단에 불과했습니다.

가인의 제사가 그랬습니다. 가인도 아벨처럼 제사를 드렸지만, 믿음으로 드린 제사는 아벨 뿐이었습니다. 가인의 마음은 하나님께 가 있었던 것이 아니었음을 제사 이후의 행적에서 볼 수 있습니다. 가인은 제사를 통해 인정받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건 제사가 아니라고 거부하였습니다. 예배자로 섰던 가인이 동생을 죽이는 인류 최초의 살인자가 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여기서 잘못된 동기와 잘못된 생각으로 접근하는 예배의 가공할만한 위험을 볼 수 있습니다. 만일 예배를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으로 사용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고 세상 속에서 잘 살기 위해 통과의례 정도로 생각한다면 결국 도엑이나 가인과 같은 길을 가게 될 것입니다.

이전 글 읽기 – 하나님 앞에서의 기다림(삼상 22:3-5)

다음 글 읽기 – 아히멜렉의 처형(삼상 22:11-19)

 13 total views

마음에 분노가 치솟아 오를 때

분노는 내가 영적으로 건강하지 않음을 보여 주는 가장 분명한 표지이다. 그 분노가 의로운 분노라고 해도 말이다. 사실 모든 분노는 내가 의롭다고 생각될 때에 솟아오르는 감정이다. 따라서 자신의 분노를 의로운 분노라고 하면서 애써 자기 자신을 설득시키는 것은 스스로를 속이는 짓이다.

사람이 분노함으로써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없다고 성경은 선언하고 있는데도(약 1:20), 사람들은 자기 분노를 의로운 분노로 항상 위장하곤 한다. 그래야 자기 양심을 누그러뜨릴 수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의로운 분노라는 말 자체가 형용모순(oxymoron)이다.

우리 중 누군가가 잘못된 일을 했을 때, 우리가 보여야 할 정당한 반응은 분노가 아니다. 분노는 영적으로 건강하지 않은 사람들이 보이는 가장 쉽고 편한 반응일 뿐이다. 영적으로 건강한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영적으로 회복될 수 있도록 어떻게 도와야 할까를 고민한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권고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 2:1-5)

다윗은 자신이 사울 왕을 피하여 도망해야 할 것인지, 도망하지 않아도 되는지 알기 위하여 왕의 잔치에 가지 않았다. 사울 왕은 다윗이 잔치에 오지 않은 이유를 물었다. 그때 요나단이 대답했다. 가족의 제사 문제로 베들레헴에 가야 한다고 해서 보내었다고 했다. 그러자 그 소리를 들은 사울 왕은 분노하기 시작하였다. 사울 왕이 영적으로 건강하지 못하고, 다윗을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만일 영적으로 건강한 사람이라면 이 순간에 어떻게 반응했을까? 부하 다윗의 처지를 이해하고 그를 위하여 선물이라도 보내라고 하지 않았을까? 사울의 분노는 다윗이 나쁜 사람임을 드러낸 것이 아니라, 사실 사울 왕이 악한 왕이었음을 드러내었을 뿐이다. 어머니는 자녀에게 분노로 반응하지 않는다. 항상 어떻게 하면 자녀들을 도와줄 것인가를 먼저 생각한다.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창녀나 세리를 바라보면서 비난하고 무시했던 바리새인들은 결코 영적으로 건강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끌고 와서 돌로 치려고 했던 사람들도 역시 영적으로 건강했던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처럼 보였고, 거룩함으로 옷을 입은 것 같았지만, 사실은 결코 거룩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이 죄를 짓는 모습을 보면서 분노하는 것은 바른 반응이 아니다. 바른 반응은 그들을 어떻게 하면 도울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것이다. 빌립보서 2장의 말씀처럼, 예수님처럼 겸손한 마음으로 스스로를 낮추면서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 바른 방법이다.

나는 지금 분노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왜 나는 나의 죄악에 대해서는 무감각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죄에 대해서만 그렇게 분노하고 있지는 않은가? 의로운 분노는 사실 나 자신의 더러움을 감추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다. 다른 사람들 잘못에 대해 크게 외치는 한 나의 잘못을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가장 어리석은 방법이다. 분노로는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분노는 자기 죄를 바라보지 못하게 양심을 마비시키기 때문이다. 분노는 다른 사람 영혼을 파괴할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나 자신을 파멸시킨다. 나는 지금 분노하고 있는가? 아니면 애통함으로 회복을 도모하고 있는가?

지난 5월 4일 부산 기장군에 있는 달산 초등학교 운동회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한다. 달리기 시합에 6학년 학생 5명이 뛰는 도중에, 1,2위를 다투던 한 학생이 다른 학생의 발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이 때 1등으로 달리던 김도현 군은 달리다 말고 넘어진 친구에게 달려가 일으켜 세웠다. 그러자 다른 아이들도 모두 그 아이를 부축하면서 5명의 아이들이 모두 함께 결승선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그러자 그 모습에 감동한 학부모 도우미들이 이 아이들 모두에게 1등 도장을 찍어주었다고 한다. 참 감동적인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사람들은 남의 불행은 곧 나의 행복이라고 생각하고, 누군가 넘어지면 그 넘어진 사람을 밟고 달려가서 1등을 차지하려고 한다. 그런데 그 아이들은 넘어진 친구에게 달려가 일으켜 세우고 함께 뛰었던 것이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는 가운데 넘어지지 않을 사람이 없다. 도덕적으로 넘어지기도 하고, 경제적으로 쓰러지기도 하고, 건강이 좋지 않아 넘어지기도 하고, 인간관계 면에서 혹은 신앙적으로 쓰러질 때가 있다. 사람들 중에 단 한 번도 넘어지지 않고 완벽하게 인생의 길을 마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예수님이 필요한 것이 아닌가?

누군가 넘어진다면, 우리는 다가가서 일어설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율법을 지키지 못하고 죄악의 길을 걸었던 세리와 창기들을 바라보면서 비난을 퍼부어댔던 바리새인들처럼, 자신의 의를 드러내고 다른 사람들을 향해서 의로운 분노를 발산할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보면서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은 의분을 느꼈을 것이다.어떻게 거룩한 이스라엘 민족 안에서 이런 죄악을 저지를 수 있단 말인가? 의로운 분노로 무장한 사람들은 돌을 들고 예수님에게 와서 이 여인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물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여인의 회복에 관심이 있었다. 아니 예수님은 우리 모두의 회복에 관심이 있었다, 사실 우리들은 중간에 넘어져서 결승선에 도달할 수 없게 된 달리기 선수처럼 실격 처리될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이끄시고 천국의 결승선으로 이끄셨다.  

원글링크: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204128

 12 total views

의로운 분노를 내도 좋다?

– 이국진

잘못된 분노는 안 되지만, 의로운 분노는 내야 한다고들 생각한다. 1 하지만 모든 사람은 자신이 생각하기에 의로운 일 때문에 분노하는 것이지, 그 누구도 의롭지 않은 일에 분노하는 경우란 없다. 의로운 분노를 내야 한다면, 이 세상은 분노로 가득할 것이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동시에 “사랑은 성내지(분노하지) 않으며”라고 한 사랑의 8번째 정의를 기억하여야 한다. 또한 “사랑은 오래참고”라고 했던 사랑의 첫 번째 정의를 기억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불의를 기뻐하지 않되, 동시에 분노하지 않으며, 동시에 오래 참아야 한다.

댄 알랜더는 이렇게 말했다. “분노- 그것이 의로운 분노이든 불의한 분노이든-는 결코 빨리 행동에 옮겨서는 안 된다.” 2 분노하면서도 사랑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은 예수님 밖에 없다. 주님은 불의에 대하여 의분을 일으키면서도, 그 사랑의 방식이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분이다. 그 외의 모든 사람들은 아무리 자신의 분노가 의로운 분노라고 위장하고, 불의를 기뻐하지 않기 때문에 분노하는 것이라고 위장한다 하더라도, 자신의 마음속에 들어 있는 죄성 때문에 분노하는 것이다.

불의를 보면, 분노하라고 성경에 표현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불의를 보면, 기뻐하지 않는다고 표현되어 있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자녀가 불의를 행하는 모습에, 사람들이 불의를 행하는 모습에 기뻐하지 않는 것이 사랑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슬퍼하는 것이다. 불의를 행하는 모습을 보면서 슬퍼하는 것이다. 애통해 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잘못된 길로 나갈 때, 마음이 안타까워 속상한 것이다.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잘못하는 것을 볼 때 마음이 아프지 않을 수 없다.

미국에 있는 흑인 지도자들이 동료 흑인들의 삶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을 표현한 것을 본 적이 있다. 감옥에 가면, 대부분 미국의 흑인들이 들어가 있는 모습을 보면서, 마약에 빠진 흑인들을 보면서, 가난과 절망의 악순환 속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는 흑인들을 보면서, 처절하게 안타까워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는 자신과 같은 인종을 너무도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들이 죄를 짓는 모습을 보고 애통해 했다.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출애굽기 32:31). 모세는 자신의 목숨을 바쳐 구원해낸 이스라엘 민족들이 죄악을 짓고 하나님에게서 멀어져 가는 그 모습을 담담하게 지켜볼 수만은 없었다. 사랑하는 자가 죄악의 길을 향해 걸어갈 때, 그들이 불의를 행하는 모습을 볼 때, 안타깝고 슬픈 것이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잘못된 길로 갈 때에, 가슴아파했다. 바울 사도는 복음을 전하다가 많은 고생을 했다. 옥에 갇히기도 하고, 매도 많이 맞고,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겼다(고린도 후서 11:23-27). 하지만 바울 사도는 그러한 고생보다도 교회를 향한 염려가 더 컸다(고린도 후서 11:28). 누군가 잘못된 길로 가게 될 때, 바울 사도는 속이 타는 것 같은 경험을 했다(고린도 후서 11:29). 사랑은 상대방이 잘못을 할 때에 무덤덤할 수 없다. 얼마 전에 아주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TV 드라마 [다모]에서 주인공은 이렇게 말했다. “아프냐? 나도 아프다.” 이 말 한마디가 시청자들을 울렸다. 그렇다. 이것이 사랑이다. 잘못된 길로 나가는 그 모습 앞에서 슬퍼하는 것이 사랑이다.

하지만 자녀들의 불의를 보고서도 무덤덤했던 사람이 있었다. 사무엘서에 기록된 엘리 제사장이다. 그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온갖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속상한 기색이 없었다. 별로 심각하게 생각한 것 같지 않다. 이미 클 대로 다 큰 아들을 이제 자신의 힘으로 어찌 할 수 없다던 어떤 한국 대형 교회의 목사처럼, 엘리 제사장은 그저 형식적인 충고만을 하고 만다. 하나님은 나중에 엘리 제사장의 가문을 향한 심판을 행하며, 엘리 제사장의 죄를 지적한다. 사무엘상 3:13은 이렇게 기록한다. “자기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진정한 사랑은 불의를 볼 때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분노하는 것도 아니고, 동참하는 것도 아니다. 진정한 사랑은 애통해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불의 가운데 있을 때 슬퍼하며 애통해 하신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고 권고하신다(에베소서 4:30). 창세기에 보면, 인류가 죄악을 행할 때, 하나님은 한탄하고 근심하셨다. 종종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한 것을 후회하셨다는 표현은 마치 하나님은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일을 벌여놓았다가 일이 그르쳐질 때 후회하는 신뢰가 가지 않는 신처럼 오해될 수 있다. 하지만 이 표현은 인간의 죄악이 너무나 크고 그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한 것을 보시며 애통해 하신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기에, 우리가 잘못된 길로 가는 모습에 애통해 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대제사장의 관저에서 심문을 받을 때, 베드로는 몰래 뒤따라갔다. 하지만 자신의 신분이 들통 날 순간, 그는 예수님을 부인하게 된다. 누가복음에서는 그 순간 예수님이 베드로를 돌이켜 보았다고 기록한다(22:61). 그때 베드로를 바라보는 예수님의 눈빛은 어떤 눈빛이었을까? 아마 베드로의 부인을 보면서, 슬픔과 애통하는 마음으로 바라보지 않았을까?

* 목차로 돌아가기

* 다음 글 읽기 – 이웃이 불의한 일을 당할 때

* 이전 글 읽기 – 사랑은 다른 사람이 불의를 행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는 것

 61 total views

--[註]---------------------------
  1. Cf. 김남준, [고린도 전서 13장 묵상 사랑] (생명의 말씀사, 2004), 150.[]
  2. 댄 알랜더, “분노할 때 이렇게 대처하라” [목회와 신학 1999년 11월호][]

성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

– 이국진

사랑은 성내지 않는 것이라는 점에서, 하나님은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는가?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 바로 분노하며 심판하지 않으시고 길이 참으셨다. 우리가 지금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길이 참으심 때문이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베드로 후서 3:8-9)

지금 우리가 숨 쉬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이 성내지 않는 사랑을 보이시는 것임을 아는가? 하나님이 우리의 죄악대로 치셨다면, 우리는 지금 살아 있을 수 없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드시는 채찍은 솜방망이에 불과하다.

우리 두 딸아이들이 어렸을 때의 일이다. 큰 아이가 작은 아이를 못살게 군다고 작은 아이가 나에게 달려왔다. 언니를 혼내달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큰 딸을 데리고 방안으로 들어가면서 큰 소리로 혼냈다. “왜 동생을 못살게 구니?” 그러면서 큰 소리 나게 얼굴을 향해 내 손을 들어 때리는 척 했다. 하지만 내 손이 친 것은 나의 다른 손바닥이었다. 그러면 큰 딸은 나를 꼭 껴안고 헤헤 웃으면서, 아픈 척 연기를 했다. “아야. 아야!”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심판하셔야 하는데, 하나님은 그 채찍을 들어 예수님을 치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신 것이고, 우리는 살았다. 하나님의 그런 성내지 않은 사랑을 우리가 받았다. 그런 사랑을 받은 우리가 남편을 향해 분노할 수 있을까? 그런 사랑을 받은 우리가 자녀를 향해 분노할 수 있을까? 그런 사랑을 받은 우리가 성도들끼리 분노할 수 있을까? 나를 핍박한다고, 같이 대들 수 있을까? 손해 보는 일이 있다고, 사회 법정으로 문제를 가지고 갈 수 있을까?

생각해볼 문제 / 토론 문제

1. 분노는 한번 쏟아놓으면 활시위를 당긴 화살처럼 과녁을 향해 날아가 상처를 주게 되어 있다. 어떻게 하면 분노를 다스릴 수 있을까?

2. 불의를 보고 정의감에 불탈 때, 어떻게 표현하는 것이 옳은가? 동기만 옳다면, 분노를 내는 것이 옳은가?

3. 유순한 대답을 하지 못하게 막는 것은 무엇인가? 어떻게 하면 상대방을 배려하면서 말을 할 수 있을까?

4. 화가 치밀어 오를 때 분노로 표출하지 않으면서도, 화병에 걸리지 않을 수 있는 분노의 해결방법은 무엇인가?

* 목차로 돌아가기

* 다음 글 읽기 – 9.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 이전 글 읽기 – 왜 우리는 분노하는가?

[저작권 안내: copyright information] 이곳에 수록된 내용은 이국진 목사의 저작물입니다. 이 내용을 책으로 출간하여 판매할 수도 있지만, 이 시대의 상황을 고민하며 심사숙고한 후에 온라인으로 공개하여 일반인들이 마음껏 사용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이곳에 있는 내용물을 비영리적인 목적으로 마음껏 사용하도록 허용합니다. 이 글을 통해 유익을 얻었다면, 웨스트민스터 사역에 적은 금액이라도 구독료 개념으로든 선한 사역 후원의 개념으로든 후원을 해주신다면 감사할 뿐입니다. 기업은행 304-082989-01-013 (웨스트민스터)

 15 total view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