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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옳은가? (행 4:13-22)

나의 믿음을 지킨다는 열정만 있으면 되는가? 그런데 만일 그렇게 지키고자 하는 믿음이 잘못되었다면? 열정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믿음이 제대로된 믿음인가 아닐까?

다른 이름은 없다(행 4:5-12) +++ 한 마음으로 소리를 높여 (행 4:23-31)

우리 인간은 이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그런 판단을 하고 결정을 하는 것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기보다는, 우리들의 감정에 이끌려가는 모습이 훨씬 더 많습니다.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기보다는, 주어진 증거가 있고, 그리고 여러 가지 상황과 모든 것들을 판단해서, 바른 판단을 하기보다는, 우리 인간들은 내가 믿고 싶은 것만 믿고, 내가 받아들이고 싶은 것만 받아들이는, 그런 존재일 가능성이 더 많습니다.

따라서 정치적인 입장이 서로 다르면 대화가 통하지 않아요. 그 어떤 증거를 들이밀고, 그 어떤 사례를 들이밀어도, 이미 한 사람의 정치적인 성향이 결정되어 있으면, 도무지 그 마음을 바꾸지 않는 것을, 우리 주변에서 아주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내년이면 새로운 대통령을 뽑게 되기 때문에, 지금 한창 대통령 선거를 위한 일들이 진행되고 있는데, 상대 후보를 향해서 네거티브 공세를 하는데, 그것이 많은 사실을 포함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거의 효과를 보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이미 사람들이 그 후보를 좋아하기로 마음 먹은 이상, 그 어떤 네거티브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믿고 싶은 것만 믿고,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이, 우리 인간들의 어쩔 수 없는 한계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조금 있으면 추석이 다가오는데요. 추석이 되어서 오랜만에 온 가족이 함께 모인다고 한다면, 괜히 쓸데없는 논쟁적인 이야기를 꺼내기보다는, 서로 격려하고 그리고 우리의 가족이 되었다고 하는 그 사실에 감사하고, 그리고 너무 고맙다고, 그런 표현들을 하면서 행복한 시간을 갖는 것이 훨씬 더 현명한 일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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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정치 문제뿐만이 아니라, 신앙의 문제에 있어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믿고 싶은 것만을 믿고,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을 보기 때문에, 아무리 확실한 증거를 내놓는다고 할지라도, 그런 증거들이 아무런 효력이 없습니다. 도무지 믿으려 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 읽은 말씀은 초대교회 시절에 있었던 한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는데요.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이후에, 초대교회 성도들 사이에서는 어마어마한 기적들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정말 활발하게 일어났던 것을, 우리는 사도행전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가운데 엄청난 기적들이 일어나게 되었는데요. 그 가운데 하나가 무엇이냐 하면, 단 한 번도 걸어보지 못했던 사람이, 베드로가 말하기를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명하노니,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라.’라고 선포할 때에, 그 사람이 일어나게 되고, 걷게 되고, 뛰게 되었다고 하는 놀라운 기적입니다.

그 순간에 수많은 사람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그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정말 이게 무슨 일인가?’ 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그런데 그렇게 뛰어나서 걷고 뛰는 그 사람이, 지금까지 평생 그 성전 앞에서 구걸하던 그 사람이었다고 하는 사실을 알게 되고, 모든 사람들이 깜짝 놀라게 되었고, 베드로가 전하는 그 메시지에 모든 사람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소리를 듣게 되었고, 예수님이 어떠한 분이시고,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으나 부활하셨다고 하는 그 엄청난 놀라운 이야기를 받아들이며,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그런 놀라운 기적이 사도행전의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엄청난 기적을 친히 보았으면서도, 전혀 꿈쩍도 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바로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관리들이고, 장로들이고, 또한 서기관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눈 앞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지 않은 게 아닙니다. 한 번도 보지도 못한 상태에서, ‘나 그것을 못 믿겠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눈으로 기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직접 확인했습니다. 특별히 예수님의 제자들이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는데요. 이들이 학문이 없는 범인인 줄 알았다가, 이들이 담대하게 아주 powerful하게, 아주 기탄없이 말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아주 깜짝 놀라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학문이 없는 범인’이라고 하는 이 표현을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요. 이 말은 베드로와 요한이 정말 일자무식장이였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표현은 아닙니다. 우리는 흔히 생각하기를, 베드로나 요한 이런 사람들이 어부 출신이기 때문에, ‘무슨 공부를 했겠나?’ 그저 고기를 잡느라고 잔뼈가 굵은 사람들이었을 뿐, 학문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일자무식쟁이였을 거라고, 그렇게 쉽게 선입견을 가지는 경향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어부라고 하는 사실만으로는 그들이 학문이 없는 일자무식장이라고 하는 것을 증명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의 문헌들을 살펴보면 당시 랍비들이 가지고 있던 여러 직업들 가운데 어부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당시 랍비들은 다양한 직업을 가지고 있었는데요. 그 직업들 가운데는 목수라고 하는 직업을 가지고 있던 랍비도 있었고, 천막을 만드는 직업을 가지는 랍비도 있었고, 어부로서 일을 하던 랍비들도 있었으니까, 베드로나 요한이 어부 출신이었다고 하는 것이, 그러니까 이 사람들이 일자무식이었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고, 베드로와 요한이 학문이 없는 범인인 줄 알았다고 하는 것은 유대 지도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선입견일 뿐입니다. ‘저 갈릴리 출신 놈들이 무슨 배움이나 있었겠나?’ ‘저 갈릴리, 저 촌사람들이 무슨 배운 게 있을까?’라고 얕잡아 보았던 유대 지도자들의 생각을 나타낸 것이지, 실제로 베드로가 그렇게 무식장이었던 것은 아닐 거라고 볼 수가 있겠습니다.

아무튼 예수님의 제자들이 복음을 담대하게 전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유대 지도자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담대하게 복음을 전한다고 하는 것은, 그냥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담대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언제 담대하게 말할 수 있죠? 진리가 있을 때는 담대하게 말할 수 있는 겁니다. 확실할 때, 담대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죠. 물론 우리 가운데는 사기꾼이 있어서, 거짓말도 가짜도 담대하게 말할 수 있는 특별한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있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언제 확실하게, 언제 담대하게 말할 수 있는가? 정말 내가 목격하고 정말 그것이 참되고 정말 진리일 때 담대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죠.

저는 종종 말을 하다가, 제 아내가 한 번 질문을 던지면 꼬리를 살짝 내립니다. 어떤 경우에 꼬리를 내리냐면, 제가 확실하지 않을 때는 꼬리를 내리는 거죠. 제가 이야기를 하게 되면, 제 아내가 묻습니다. ‘그거 확실한 거야?’라고 딱 물으면, 제가 생각하기에 확실하지 않거든요. 제가 어디서 들었던 이야기거든요. 확실하지 않으니까, 그 순간에, ‘아니, 이건 확실한 건 아닌데..’ 하면서 말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는 거죠. 하지만 정말 확실한 거라고 한다면, 담대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죠.

지금 베드로와 요한은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시퍼런 그 서슬퍼런 눈을 가지고 바라보고 있는 그 관리들 앞에서, 여차하면 죽여버릴 수 있는, 여차하면 그들의 목숨을 끊어버릴 수 있는, 그런 위협적인 존재들 앞에서, 예수님을 소개하고,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를 목격했고, 그리고 승천하는 것을 목격했을 뿐만 아니라, 이렇게 걷지도 못했던 사람들이 일어나게 되고 걷게 되는 그런 엄청난 기적을 실제로 보았기 때문에, 담대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이고, 그것을 바라보면서 유대 지도자들은 깜짝 놀라게 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유대 지도자들 앞에는 베드로와 요한을 증거해 줄 수 있는 그 걷게 된 사람이 같이 서 있는 겁니다. 자기들도 잘 알아요. 저 사람이 성전문 밖에서 구걸하던 사람이었고, 한 번도 걸을 수 없었던 사람이었다고 하는 것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데, 그 사람이 걸어서 다니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고, 서 있는 그 모습을 보면서, 이 사람들도 말하기를 ‘이것을 우리가 부인할 수 없는지라.’ 이들 가운데서 기적이 일어난 사실을 우리가 부인할 수 없다고 하는 그 사실을, 자기 자신들도 너무나도 확실하게 알았습니다.

만일 이렇게 확실하게 증거가 있다고 한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바른 반응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마음을 돌이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귀를 기울이는 것이 정상인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사람들은 이상한 결론을 내렸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으로 하여금 더 이상 민간에 이 사실이 퍼지지 못하도록 압력을 넣는 겁니다. 위협을 하는 거에요. 다시는 예수의 이름으로 전하지 말라고 금지시키고, 다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고 금지시켜서, 그렇게 그들을 협박하게 되었는데요. 이 유대의 지도자들은 증거를 보지 못한 것도 아니고, 모든 사람들이 똑같이 증거를 보고,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상황을 보았지만, 일단 마음을 닫아버리게 된 그 순간, 그 어떠한 증거를 내밀어도, 그 어떠한 진리를 가져다 주어도, 받아들이지 앉게 되었던 것이 너무나도 안타까운 일인 줄로 믿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기도해야 될 기도의 제목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간절하게 기도해야 할 겁니다. ‘주님, 저희들의 마음을 만져주셔서, 진리를 대할 때, 그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 ‘이 말씀이 진리의 말씀이구나,’ 우리가 하나님의 그 진리의, 그 사건들을 볼 때, ‘이것이 참된 말씀이구나’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는, 그런 마음이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겸손하게 진리 앞에 서야 하는데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들은 마음이 굳어져 있을 가능성이 굉장히 많습니다. 특별히 신앙생활을 오래 해오면 오래 할수록, 우리들이 옹고집이 되는 경우가 많이 있게 되는데요. 신앙생활을 해오면서 ‘아, 이것이 옳구나.’ ‘이것이 맞구나.’ 내가 결론을 내리고, 그래서 그 결론이 내 마음속에 착착 쌓이면서, 그게 굳어지게 되면, 더 이상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이나, 성경 말씀에 그 가르침이나 진리에 대해서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고, 더 이상 듣지 않으려고 하는, 그런 닫혀버린 마음이 될 가능성이 굉장히 많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가지게 되는 그런 아주 큰 위험 가운데 하나인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우리의 마음에 이미 결론이 나 있어요. 우리의 마음 가운데 내가 믿고 싶은 것이 벌써 결론이 나 있어요. 그래서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잘 설명하고, 풀어서 가르쳐줘도, 그 말씀을 거부해버리는 겁니다. ‘이것이 그 말씀이 아니라, 이런 말씀입니다’라고 아무리 설명해 주어도, 이미 내가 알고 있었던 것, 지금까지 내가 생각한 것이 최고이기 때문에, 그 새로운 설명과 해석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이게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라고 할 수가 있겠는데요. 우리는 종종 옹고집이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신앙생활을 해오면서 그게 제일 좋은 것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인데요.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이 있다고 한다면, 내가 과연 진리 가운데 있는지, 정말 지금까지 내가 생각해 왔던 것이 제대로 된 하나님의 말씀인지, 늘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서 자기 자신을 또 점검해 보고, 또 살펴보고, 또 체크해 봐서,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 자신을 자꾸만 변화시켜가고, 우리의 생각을 변화시켜가는, 그런 믿음의 결단들이 있어야 될 것이라고 라고 믿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나아가야 될 방향 가운데 하나로 ‘수용과 변혁을 추구하는 교회’라고 하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비전교회’ 할 때 그 ‘수’를 ‘수용과 변혁을 추구하는 교회’라고 말씀을 드렸는데, 종종 믿음을 지킨다고 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을 지킨다고 하는 것이, 진리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바로 서 있는 것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한’ 그것을, 그대로 지키는 게 신앙을 제대로 잘 지키는 거라고 오해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시면 안 돼요. 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아서, 우리가 잘못된 것은 없는지, 우리가 잘못 해석한 것은 없는지, 우리 자신을 늘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서, 또 변경시키고, 또 변화시키고, 또 변화시켜서, 하나님의 말씀에 점점 가까이 가야 하는 과제가 우리 가운데 놓여져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서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오랫동안 해왔는데요. 이 사람들은 자신들이 생각한 그 개념으로 예수님을 거부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자신들이 생각한, 장로들의 유전, 장로들의 전통을 가지고, 그렇게 신앙생활하는 것이 제대로 된 신앙생활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그것이 율법주의로 흘러버린 것이고, 제대로 된 성경 해석이 아닌데, 그것이 최고인 줄 알고, 그것을 밀고 나가다가, 결국 예수님께서, ‘그것이 아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장로들의 전통으로, 장로들의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느냐?’라고 하는 그런 말씀을 듣게 된 것입니다.

10월 마지막 주면 종교개혁 주일인데요. 종교 개혁을 했던 종교 개혁의 선조들이 던졌던 그 모토가 하나 있습니다. 그 모토가 무엇이냐 하면, ‘개혁교회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개혁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제 방 ‘공감홀’에 가면 영어 비슷하게 알파벳이 제 벽면 뒤에 써 있는데, 영어는 아니고, ‘저게 뭔가?’ 하시는 분들이 계실 텐데요. 라틴어입니다. 라틴어를 제가 제방 뒤에다 썼는데, 그 말이 뭐냐 하면 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 est secundum verbum dei라고 하는 말이에요. ‘개혁교회는, 다시 말하자면, 종교 개혁에 의해서 만들어진 교회는,’ 왜, 빨리 없앴어요?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개혁되고 또 개혁되고 또 개혁되어야 한다.’ 그게 종교개혁자들이 가지고 있던 모토였어요. 왜냐하면 우리 인간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머리보다도 훨씬 더 크시고, 우리의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너무나도 큰 것이 진리이기 때문에, 이 진리의 말씀을 우리들의 머리로 완벽하게 이해한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죠.

우리는 이 성경을 읽을 때, 어떻게 읽느냐? 우리들의 문화 속에서 성경 말씀을 읽고, 내가 살아왔던 경험을 가지고 성경을 읽고, 우리의 전통 속에서 성경을 읽기 때문에, 우리의 한계를 가지고 우리의 편향된 시각을 가지고 성경을 해석해서, 우리가 성경을 잘못 오해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진리인 줄 알고 생각했다가, 그런데 진리가 아닐 가능성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종교개혁자들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또 연구하고 또 연구해서, ‘그 말씀에 따라 개혁 교회가 또 변화돼야 되고 또 변화되고 또 변화되어야 된다’고 말씀해 주었는데, 우리가 그렇게 우리의 마음을 겸손하게, 내가 이해하고 있는 것이 완벽한 진리가 아니라, 우리가 부족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더 깨달아야 되고, 진리를 더 깨달아야 된다고 하는, 그런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모습을 돌이켜 보아야 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진리를 거부하게 되면, 그것은 우리가 스스로 동굴이라고 하는 감옥 속에 들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플라톤이라고 하는 헬라의 철학자는 동굴의 비유라고 하는 것을 말한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동굴 속에 들어가서 그 동굴 속에 비쳐지는 그림자를 보고 그게 전부인 줄 안다는 것이죠. 사실 동굴 밖에 실제가 있는데, 그 실제를 보지 않고 그저 그림자만 보면서, 이게 전부인 줄 착각하고 동굴 속에서 동굴의 우상을 가지고 살아간다고 말을 하고 있는데요. 어쩌면 우리가 내가 마음을 정해버리고 ‘아, 이것이 전부이구나’고 생각하고 우리의 마음을 닫아버리면,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우리가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이고요. 우리는 진리 알아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진리는 전부 하나님의 진리인 것이고, 그 진리를 알게 될 때, 그 진리가 우리를 동굴에서부터 자유롭게 만들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요한복음 8장 32절 말씀에 보면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런데 지금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관리들은 지금 진리가 자신들의 눈 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선입견으로, 자기들이 가지고 왔던 전통으로, 그 모든 것들이 증거가 보여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했다고 하는 것이 너무나도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유대 관리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향해서 위협을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더 이상 전하지 말라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전하지 말라고, 협박하게 될 때, 베드로와 요한이 뭐라고 대답을 했습니까? 19절 20절의 말씀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아주 담대한 용기를 가지고 하는 말인데요. 지금 이 사람들의 명령 한마디면, 베드로와 요한을 죽일 수도 있었습니다. 죽일 수도 있는 그 권한을 가지고 있는 그 관리들 앞에서 쫄지 않고, 담대하게 말한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첫 번째는 이들이 직접 진리를 경험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일 겁니다. 사기꾼이라고 한다면, 거짓말이라고 한다면, 목숨의 위협 앞에서는 이렇게 담대할 수가 없는 것이죠. 더 나가서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했기 때문일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0장 28절의 말씀에서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 하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지금 관리들이 엄청난 권한을 가지고 죽일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지만,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영혼까지는 어떻게 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믿음을 지킨 겁니다.

위대한 믿음의 선조들은 이러한 사실을 너무나도 분명히 알았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왕의 신상 앞에 절하지 아니하면 풀무 볼 속에 던져넣겠다고 하는 그런 위협을 당했습니다. 풀무불이 타오르는 그 모습을 보면서, 그 앞에서 쫄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 순간에 다니엘의 세 친구는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다니엘서 3장 17절 18절의 말씀입니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서도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하나님 능력이 없어서 안 건져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힘이 없어서 안 건져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어떠한 이유에서든,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도 절하지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이들은 목숨을 앗아갈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영혼까지 멸할 수 없다고 하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담대하게 나아가게 된 줄로 믿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이 순간에 선택을 해야만 했을 겁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전하지 말라고 하는 이런 위협 앞에서, 그들의 말을 듣고 목숨을 건질 것인가? 아니면 진리를 전하기 위해서 목 목숨을 그냥 내놓을 것인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했을 때, 이들은 담대하게 진리를 선택한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면 이렇게 담대하게 믿음을 가졌던 사람들이, 베드로와 요한만이 아니었다고 하는 것이에요. 사실 지금 누구도? 이렇게 강하고 담대한 입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누굽니까? 관리들도 마찬가지에요. 모든 사람들이 다 담대해요. 관리들도 자신들의 입장에서 확실하게 서서 강하게 밀어붙이고 있고, 베드로와 요한도 자신들이 믿는 바에 따라서 강하게 달려가고 있는데, 그런데,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면, 과연 그렇게 우리가 목숨을 걸 정도로 믿고 있는 것이 ‘확실한가?’ 하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수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것을 위해서 목숨을 내놓습니다. ‘아, 이게 진리구나.’ 생각하고 달려가고 있는데, 진리가 아닌 것을 위해서 달려가고 있는 것이죠. 예를 들자면, 사도 바울이 회심하기 이전에 그는 교회를 핍박하러 다녔습니다. 도시락을 싸들고 다니면서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하러 다녔는데, 그 사람이 그렇게 열정을 보인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자기 자신이 생각하기에, 저 그리스도인들은 나쁜 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게 열정을 가지고 죽이러 다닌 것입니다. 그 열정이나 그리고 바울 사도가 회심해서 나중에 복음을 전하러 다닌 그 열정이나 똑같습니다. 그런데 그 차이점이 어디에 있습니까?

예전에 회심하기 이전 바울의 열정은 잘못된 확신 가운데서 열정을 보였던 것, 회심한 이후에 바울은 이제는 진리를 깨닫게 되고 예수님을 깨달은 다음에 열정을 가지고 달려갔던 것이죠. 어쩌면 우리들에게 있어서 문제는 열정이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다 열정들이 있습니다. 어쩌면 자신의 모든 것을 걸 만한 그런 열정들이 있는데, 그런데 문제는 정말 진리를 위해서 열정을 내고 있는가? 아니면 우리들의 마음을 닫아버린 채, 진리를 거부하고, 그리고 그 옳지 않은 잘못된 사상을 위해서, 잘못된 것들을 위해서 달려가고 있느냐? 하는 차이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에게도 똑같은 위협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예전과 같은 위협은 아닙니다. 지금은 종교의 자유가 있고 신앙의 자유가 있기 때문에, 지금은 신앙 생활하는 것을 누가 협박할 수는 없는 세상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런 협박이 없는 상황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는 거 아니에요. 우리는 매 순간 순간마다 결단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옳은 길인가? 아닌가?’를 선택해야 되는 것이고, 정말 편하고 좋은 길을 선택하게 되면, 사실은 우리의 믿음을 타협해야만 하는 그런 결과가 나타나게 될 텐데, 예수비전교회 모든 성도님들은 옳은 길을 따르기 때문에, 조금 힘들더라도, 광야로 내어쫓긴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른 길을 걸어갈 수 있는, 그런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길이 주님께서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가신 길이었습니다.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라고 한다면, 주님께서는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주님께서 가시는 그 길에 사탄이 나타나서 ‘내게 경배하기만 하면, 온 세상을 주겠다’고 말하기도 했고, 사람들은 예수님 주변에 몰려들어서, 이 헤롯 왕국을, 로마 정부를 뒤엎기만 하면, 우리가 함께하겠다고 하는 그런 열정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거기 순응하고 달려 나간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을 위해서 힘든 길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을 지셨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설립 8주년을 맞이하는 우리 교회가 앞으로의 모든 여정 가운데서도 믿음의 길을 온전히 결단해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