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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의 뒤틀린 영성(삼상 18:10-16)

10 그 이튿날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사울에게 힘 있게 내리매 그가 집 안에서 정신 없이 떠들어대므로 다윗이 평일과 같이 손으로 수금을 타는데 그 때에 사울의 손에 창이 있는지라 11 그가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다윗을 벽에 박으리라 하고 사울이 그 창을 던졌으나 다윗이 그의 앞에서 두 번 피하였더라 12 여호와께서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계시므로 사울이 그를 두려워한지라 13 그러므로 사울이 그를 자기 곁에서 떠나게 하고 그를 천부장으로 삼으매 그가 백성 앞에 출입하며 14 다윗이 그의 모든 일을 지혜롭게 행하니라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니라 15 사울은 다윗이 크게 지혜롭게 행함을 보고 그를 두려워하였으나 16 온 이스라엘과 유다는 다윗을 사랑하였으니 그가 자기들 앞에 출입하기 때문이었더라

사울 왕은 다윗을 죽이려 했습니다. 사울은 다윗을 친구로 생각하지 않고, 적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친구로 생각하면 결국 자신에게 유익이 되지만, 적으로 생각하면 결국 자신이 죽습니다. 다윗을 죽이려고 시도하는데, 결국 죽는 것은 사울 자신입니다. 사울의 인생은 다윗을 죽이는 것에 바쳤지만, 결국 죽은 것은 다윗이 아니라 사울 자신입니다. 사울의 죽음은 아주 비참합니다. 그런 비참한 결과의 첫 단계가 여기서 시작됩니다.

사울은 손에 들고 있던 창을 던져 다윗을 벽에 박으려고 했습니다. 두 번씩이나 시도했지만, 다윗은 그 창을 피했습니다. 이렇게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사울의 첫 번째 기도는 즉흥적이었습니다. 다윗이 수금을 타고 있을 때, 악령에 사로잡힌 사울이 창을 던진 것입니다. 예전에는 다윗이 수금을 탈 때, 사울에게 내렸던 악령이 물러간 적이 있었습니다. 다윗의 음악은 사울의 악령을 쫓고 마음을 누그러뜨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윗의 음악도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다윗에 대한 악한 감정이 없었을 때는, 다윗의 음악은 사울의 악령을 쫓아내고 마음의 평온을 찾게 해주었습니다. 하지만 다윗에 대한 악한 감정이 생긴 이래로 다윗의 수금 소리가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문제는 다윗의 수금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사울의 마음에 있었던 것입니다. 같은 씨앗이라도 그 씨가 떨어지는 밭이 어디냐에 따라 열매를 맺기도 하고 맺지 못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분명한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오셨을 때 그 놀라운 은혜의 혜택을 입은 자들도 있었지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그런 혜택을 전혀 누릴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에게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들에게 문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의 제목은 들을 수 있는 귀를 달라는 것이어야 합니다. 사실 하나님의 은혜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까이에 있습니다. 다윗의 수금 소리보다도 몇천 배, 아니 몇만 배 뛰어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마음을 닫아버리면 우리에게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는 들을 수 있는 영적인 귀를 달라는 것이어야 하고, 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을 달라는 것이어야 합니다.

사울은 다윗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는 왕이었지만, 자신의 신하였던 자를 두려워한 것입니다. 사울의 영성이 뒤틀려 있다는 증거입니다. 다윗의 잠재적 위협을 느끼며 그를 시기하고 질투하는 것은 그의 영성이 온전하지 못하고 뒤틀려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사울의 안중에는 하나님이 없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죽이고 일을 지혜롭게 처리하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사울은 일련의 사건들 속에서 다윗만 보았습니다. 사실 다윗이 훌륭해서 능력을 발휘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승리하게 해주셨기 때문에 승리한 것입니다. 다윗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삼상 18:12, 15)을 보아야 했습니다. 성경은 다윗 뒤에 있는 하나님을 부각하고 있는데, 사울은 다윗만을 보고 다윗 뒤에 있는 하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질투와 시기심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다윗이 뛰어난 모습을 보일 때 사울이 보여야 할 정당한 반응은 다윗을 죽이려는 시도가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 자신을 돌아보면서, 왜 하나님께서 자신을 떠났는지 묵상해야 합니다. 그리고 어디에서 잘못되었는지 살펴보고 회개해야 합니다. 그게 제대로 된 영성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사울은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뒤틀린 영성을 가졌던 것입니다.

다윗의 장점은 하나님께서 함께하셨다는 것입니다. 사울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실 때는 뛰어난 모습을 보여주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사울에게서 하나님이 떠났습니다. 하나님이 떠난 사울은 왕이라는 신분을 가지고는 있지만, 초라해졌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는 다윗은 비록 왕 앞에서 수금을 타는 자였지만, 위대하여졌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가입니다.

미국 필라델피아에 가면 커티스 음악학교가 있습니다. 음악을 전공하는 한국 학생들은 이곳에 오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그들을 데리고 가면 건물을 보고 실망하곤 합니다. 아주 오래된 건물이기 때문입니다. 건물로 치면 한국에 있는 학교들이 훨씬 더 세련되고 멋있습니다. 그런데 그 학교가 명성이 있는 것은 건물 때문이 아닙니다. 그 안에 뛰어난 교수들이 있고, 뛰어난 학생들이 몰려들기 때문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화려한 건물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지 않는다면 의미 없습니다. 사울 왕처럼 말입니다. 왕권은 정말 대단한 것입니다. 군사들을 이끌고 호령합니다. 그의 말 한마디면 나는 새도 떨어트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함께하지 않으셔서, 초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윗은 사울 왕이 죽이려고 했지만, 천부장으로 임명하니까 사울의 종이 되어 그를 섬겼습니다(삼상 18:13).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자신을 죽이려 들면 원수를 갚으려고 할 것입니다. 백성들의 인기를 배경으로 쿠데타를 일으킬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맡은 일을 지혜롭게 했고, 백성을 위해서 최선의 봉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바로 예수님의 모습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마치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했던 것과 같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향해서 침을 뱉고 조롱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배반했습니다. 그럴 때, 우리 같으면 십자가를 포기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묵묵히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바로 그 예수님 때문에 우리에게 소망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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