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훈과 책망 (잠 9:1-12)

지혜를 얻는 자 (잠 8:32-36) +++ 달고 맛있는 떡 (잠 9:13-18)

오늘 본문의 말씀 1절에서부터 6절까지의 말씀을 보면 이렇게 표현이 되어 있습니다. 지혜가 집을 지었다. 그 집을 짓는데 일곱 기둥을 세우고, 짐승을 잡고 포도주를 혼합하고 잔칫상을 차린 후에 사람들을 초대해서 그 잔치에 참여하라고 부르고 있다고 하는 그런 묘사를 1절에서부터 6절 말씀까지 해주고 있습니다. 마치 지혜가 어떤 사람인 것인 양, 마치 지혜가 어떤 집의 집주인인 양 의인화해서, 그래서 그 지혜가 사람들을 초청해서 지혜가 베풀어주는 그 잔치 자리, 고기도 먹고 포도주도 마시며, 즐거움을 얻으라고 하는, 그렇게 의인화해서 표현을 하고 있는데요. 이렇게 사람이 아닌 것을 사람이 아닌 것을 사람인 것처럼 이렇게 표현하는 법을 가리켜서 의인화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마치 사람인 것처럼 표현하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이것을 가리켜서 우화라고도 할 수가 있겠습니다. 이솝 우화 같은 경우를 보면, 짐승들이 말을 하고 그렇게 대화를 하는 것이 나오지 않습니까? 실제로 그러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것들을 가정해서, 우화처럼 우리들에게 가르쳐주는 방식이라고 해서, 이런 식의 표현을 우화라고 하기도 하고, 또한 비유라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지혜를 어디에다 비유하냐면, 마치 잔치에 초대하는 집주인에 비유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아무튼 1절에서부터 6절 말씀은 지혜를 의인화해서 집주인이 되어, 그가 집을 짓기도 하고 일곱 기둥도 세우고, 짐승을 잡고 포도주를 타고 상을 차려서 사람들을 초대해서 그 사람들로 하여금 즐기도록 초대한다고 하는 그런 이야기를 그려주고 있는데요. 이 우화를 통해서, 이런 식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들에게 전해주려고 하는 그 메시지, 우리들에게 주려고 하는 그 교훈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가 지혜를 얻는다고 한다면, 우리가 만일 지혜의 삶을 산다고 한다면, 그 삶이 복된 삶이다. 풍족한 삶이다. 만족스러운 삶이 될 거다라고 하는 것을 교훈해주기 위해서, 이런 우화, 비유, 이런 의인화의 이야기를 만들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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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성한 음식이 차려진 그 잔칫집에 가게 된다고 하면, 그러면 누구든지 그 집 안에 들어가게 되면, 마음껏 먹고, 마음껏 마시고, 그리고 정말 즐거움을 얻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제가 어렸을 때는 동네 잔치가 열리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누구든지 그 집 안에 들어와서 점심을 얻어먹기도 하고, 저녁을 얻어먹기도 하고, 막걸리를 마시기도 하면서 동네잔치가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집에 좋은 경사가 있으면, 혼인식이 있어서 잔치를 벌이거나 여러 가지 좋은 일들이 있어서 잔치를 벌이게 되면, 지나가는 동네 사람들이 아무나 다 들어가서, 그 집에서 맛있게 먹으면서 배부르면서, 흥겹게 아주 즐거운 잔치를 벌이는, 그런 경험이 있는데요. 이것과 비슷하게, 지금 지혜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지혜가 지금 우리들을 향해서 잔치를 베푼 것과 같으니까, 만일 누구든지 그 지혜에게로 가서 배운다고 한다면, 지혜에게 귀를 기울이고, 지혜가 하는 말을 듣고, 지혜가 베푼 그 잔치의 자리에 참여하게 된다고 한다면, 우리가 먹을 것을 먹을 때 우리의 육신이 배부른 것처럼, 지혜를 얻게 된다고 한다면, 우리가 영육 간에 배부름을 얻게 될 것이다. 우리가 지혜를 얻는다고 한다면, 영육 간에 만족함을 얻게 될 것이다라고 하는 그런 의미에서, 이 우화 같은 이야기를, 오늘 1절에서부터 6절까지 해주고 있는 겁니다.

본문의 말씀을 읽으면서 그 본문에 묘사하고 있는 세부적인 내용 때문에 너무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예를 들자면, 지혜가 집을 짓는데 기둥을 세울 때, 왜 하필이면 일곱 기둥을 세웠을까? 일곱 기둥이라고 하는, 그 일곱이라고 하는 말에는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왜 하필이면 짐승을 잡았을까? 왜 하필이면 포도주를 혼합한다고 했을까? 왜 보낼 때는 남종을 안 보내고 여종을 보낸다고 했을까? 그런 디테일한 것 때문에, 그것이 무슨 의미일까? 너무나도 고민하신다고 한다면, 그러면 성경이 말하고 있는 큰 그림을 잃어버릴 가능성이 많습니다. 이 본문의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는 이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들에게 전해주고자 하는 그 메시지가 무엇인지 큰 그림을 보아야 하는 것인데, 우리가 종종 어떤 사람들은 성경에 자꾸 하나하나 표현 하나하나에 너무 민감하게 반응한 나머지, 숲이 어떻게 생겼는가를 다 잃어버리고, 헤매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요. 오늘 이 본문의 메시지는 큰 그림을 봐야 합니다. 구체적인 것 일곱 개가 무엇을 의미한다라고 하는 식으로 해석의 수렁 속으로 빠져들 것이 아니라, 이것은 마치 어느 잔칫집에 가게 되면 배부른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지혜가 베풀어주시는 그 향연에 참여하게 된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지혜에 우리가 참여하게 된다고 한다면, 영적인 만족감을 누릴 수 있고, 영육 간의 강건함을 누릴 수 있다고 하는, 그 메시지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만일 우리가 지혜를 얻게 된다고 한다면, 만족함이 있을 거라고 오늘 본문에서 말씀해 주고 있는데, 도대체 어떤 종류의 만족 어떤 종류의 유익이 있다고 하는 말일까요? 그것은 6절 말씀에서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잠언서 9장 6절 말씀 이렇게 표현합니다. “어리석음을 버리고 생명을 얻으라. 명철의 길을 행하라 하느니라.” 다시 말하자면, 이 지혜가 주는 잔치, 지혜가 주는 그 풍성한 식탁에 가게 되면, 무엇을 얻을 수 있다는 겁니까?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라고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죠. 우리가 음식을 먹어야 육신의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지혜를 얻어야 우리가 지혜롭게 살아야, 영적인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게, 바로 오늘 잠언서 9장 6절에서 가르쳐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7절에서부터 9절까지는 이제 주제가 약간 바뀌어서 다른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는데요. 7절에서 9절까지의 말씀은, 우리가 책망해야 될 사람이 누구고, 책망하지 말아야 될 사람이 누구인가에 대해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어떻게 누구를 책망할까요? 누구에게 징계를 내려야 될까요? 그것을 7절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데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거만한 자를 징계하는 자는 도리어 능욕을 받고, 악인을 책망하는 자는 도리어 흠이 잡히느니라.” 잠언서 9장 7절의 말씀을 보시면, 제가 지금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서, 여러 번에 걸쳐서 설명을 해드렸기 때문에 지금쯤이면 히브리 평행법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익숙해졌을 거라고 생각이 드는데요. 그러니까 9장 7절에서 보면, 이 거만한 자가 누구라는 겁니까? 한번 9장 7절을 한번 다시 한번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거만한 자를 징계하는 자는 도리어 능욕을 받고, 악인을 책망하는 자는 도리어 흠이 잡히느니라” 그랬으니까, 거만한 자가 누구라는 얘기예요? “악인”이라고 하는 얘기입니다. 거만한 자가 곧 악인이고, 악인이고 거만한 자라고 하는 그 표현, 히브리 병행법적인 표현입니다. 징계한다고 하는 것은 곧 책망하는 것이고, 책망하는 것이고 징계하는 것입니다. 능욕을 받는다고 하는 얘기는, 곧 우리가 흠이 잡히고, 우리가 상처를 입게 된다고 하는 말과 똑같은 말입니다. 그러니까 같은 표현을 반복해서, 다르게 표현하는 방법이 히브리 평행법이라고 했으니까, 거만한 자를 잠언서 9장 7절에서는 뭐라고 표현하냐면, 그런 사람들이 바로 악인이다라고 표현하고 있는 겁니다. 거만한 자가 바로 악인이고, 악인이 바로 거만한 자라고 표현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거만한 자라고 표현한 히브리어 단어가 있습니다. 그 히브리어 단어가 “레츠”라고 하는 단어인데요. 이 단어가 성경에서 어떻게 번역이 되었는가 하고 제가 살펴보니까, 우리 한국말 성경에서는 대부분 “거만한 자”라고 번역을 해 놓았습니다. 근데 영어 번역을 살펴보니까, 영어 번역에서는 주로 scoffers 라고 번역해 놓았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비웃는 자”라고 번역을 해 놓았습니다. 사실 비웃는 자나 거만한 자나 사 실은 같은 거죠. 거만하니까 다른 사람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면 듣지 않고, 비웃어 버리는 것이죠. 그래서 아마 그 의미의 뉘앙스가 조금은 다르지만, 아무튼 그 히브리어 단어 “레츠”를 우리 한국말에서는 “거만한 자”라고 주로 번역을 했는데, 영어 번역에서는 주로 “비웃는 자”라고 주로 번역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거만한 자, 악인, 비웃는 자에게 내가 책망을 하거나, 내가 좀 조언을 하거나, 내가 무슨 비판을 하거나, 내가 어떤 징계를 하거나 하게 되면, 그 거만한 자가 그 악인이 그 비웃는 자가 내 징계나 조언이나 내가 충고를 하면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어떻게 한다는 얘기입니까? 오히려 반발한다는 것이죠. 나는 이 사람이 좀 잘 되기 원하는 마음으로 조언을 해주고, 나는 이 사람이 정말 제대로 바른 길로 가게 하기 위해서 충언을 해주고, 때로는 징계를 하기도 하고, 때로는 책망을 하기도 하고, 무엇인가 그 사람을 교정하기 위해서 가르치기도 했는데, 그런데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만일 악인이라고 한다면,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거만한 자라고 하면,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한다고요? 반발하는 거죠. 오히려 어떻게 한다고요? 충고해주는 사람에게 화를 내는 것이죠. 조언을 하는 사람을 향해서, 오히려 발톱을 드러내는 것이죠. 징계나 책망도 역시 왜 하는 겁니까? 그 사람이 바른 길로 가게 하기 위해서 하는 것인데, 오히려 더 반발하게 되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잠언서의 말씀에서는, 그런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해야 된다고 하냐면, 그런 사람들은 “징계하지 마라.” 그런 악인들은 그런 거만한 사람들, 귀가 닫혀버린 사람들에게는 “책망하지 마라”라고 교훈해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비판하거나, 우리가 충고를 하거나, 건의를 하거나, 혹은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려고 하거나, 뭔가 어드바이스를 주려고 한다고 하면, 그렇게 하려고 하는 그 의도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그 사람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하는 말이죠. 하지만 거만한 사람은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 그것을 순순히 잘 받아들이고, 양약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발톱을 드러내면서 공격해 오고, 오히려 그 도움을 주려고 하는 사람을 향해서 발톱을 드러내는 그런 결과가 빚어지게 되기 때문에, 그 거만한 사람에 의해서 능욕을 당하고, 그 거만한 사람에 의해서 수치를 당하게 되고, 상해를 입게 될 뿐만 아니라, 8절 말씀에서는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미움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면서, 그래서 그런 사람들에게는 징계나 책망이나 조언을 하지 말라고 오늘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그러면 우리가 충고를 하거나, 조언을 하거나 징계하거나 책망하는 일은, 그럼 누구에게 해야 되는가요? 거만한 자에게 할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 해야 되는가? 지혜 있는 자에게 하라는 거에요. 9절 말씀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9절 말씀을 한번 봅시다 한번 같이 한번 읽어볼까요? 시작! “지혜 있는 자에게 교훈을 더하라. 그가 더욱 지혜로워질 것이요. 의로운 사람을 가르치라. 그의 학식이 더하리라.” 여기도 역시 “히브리 평행법”으로 지혜 있는 자를 뭘로 표현하고 있습니까? 의로운 사람으로 표현하고 있는 겁니다. 거만한 사람은 악한 사람인데, 지혜로운 사람은 의로운 사람이라는데, 우리가 충고를 한다면, 징계를 한다면, 책망을 한다면 누구에게 해야 되는가? 악한 사람, 거만한 사람에게 하지 마라. 그 사람에게 하면 오히려 손해 본다. 오히려 큰 수치를 당하게 될 거야. 능욕을 당하게 될 거니까, 누구에게 해라? 지혜 있는 사람에게 교훈을 더해주고, 의로운 사람을 가르쳐라라고 표현하고 있는 겁니다.

지금, 아까 한 그 표현과는 정반대의 표현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지혜 있는 사람은 바로 의로운 사람이고, 지혜로운 사람은 거만하지 않은 사람이고, 또한 그런 사람들은 가르칠 수 있고 교훈을 다 할 수 있고, 책망할 수도 있고 징계할 수도 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의 말씀을 우리가 살펴보면서, 이거 하나 마음속에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무슨 좋은 조언을 한다거나, 혹은 건의를 한다거나, 우리가 무슨 좋은 말을 해준다거나, 혹은 그렇게 하지 말라고 충고를 해야 되는 것, 누구한테 하라고요? 받아들일 만한 지혜로운 사람에게 해야지, 그걸 받아들일 마음이 전혀 없는, 거만한 자, 어리석은 자에게는 해서는 안 된다고 오늘 성경 말씀은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생각하게 될 때, 신약 성경에서 기록되어 있는 말씀이 생각나시는 분이 혹시 계실 겁니다. 신약 성경에도 이와 비슷한 말씀이 있습니다. 어디에 있는가요? 마태복음 7장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거룩한 것을” 누구에게 주지 말며?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누구 앞에 던지지 말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왜냐하면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

마태복음 7장 6절에서, 갑자기 개와 돼지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건 바로 우리는 비판할 때 우리는 충고할 때, 어떤 마음에서 충고를 합니까? 이 사람이 잘 됐으면 좋겠다고 하는 마음으로 충고를 하는 거죠. 이 사람이 좀 선한 길로 갔으면 좋겠다고 하는 마음으로 비판을 하는 겁니다. 조언을 해주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을 알아들을 수 없는 거만한 자, 그것을 알아들을 수 없는 어리석은 자, 그래서 곧 악한 자는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 그런 사람들은 마치 개와 돼지와 같은 반응을 보인다는 거예요. 나에게 들려주는 그 진주와 같은 비판의 소리, 나에게 들려주는 그 거룩한 비판의 소리를 우리가 만일 받아들인다고 한다면, 우리가 발전할 수가 있고 우리가 더 나은 사람이 될 수가 있는데, 오히려 그것을 듣게 될 때에, 나에게 진주를 주는 그 상대방을 향해서 오히려 공격하고 화를 내고 그래서 그 사람을 공격하는 개, 돼지와 같은 반응을 보이는 어리석은 사람이 있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시는데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잠언서 9장의 말씀처럼, 그렇게 걔에게 그런 것을 주지 말라고 교훈을 주지 말라고 말씀해주고 계십니다.

우리가 이 교훈의 말씀을 잘 새겨 듣고, 우리가 늘 마음속에 간직했으면 좋겠는데요. 안타깝게도 우리 크리스천들은 이런 성경적인 가르침을 분명히 읽었을 텐데 이 말씀대로 살지 않습니다. 분명히 잠언서의 말씀을 읽었을 것이고 분명히 마태복음의 예수님의 말씀을 읽었을 텐데 안타깝게도 수많은 크리스천들이 이 주님의 말씀에 따라 지혜의 말씀에 따라, 자신의 삶을 잘 컨트롤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막무가내로 막 이야기를 합니다. 들을 귀가 없는 사람들을 향해서, 진리를 자꾸만 선포합니다. 왜? 진리는 진리니까 말해야 되는 거예요. 옳은 말은 옳은 것이니까, 말해야 되는 거예요. 왜? 옳은 것이니까요. 틀린 말한 게 아니거든요. 내가 잘못된 말 한 게 아니거든요. 정답을 이야기하고 있거든요. 그러니까 정답은 언제든지 말해도 괜찮다고 하는 “어리석은” 생각에 빠져 있는 것이죠.

그래서 어떻게 하는가? 어떤 열정적인 사람이, 소위 믿음이 있다고 하는 사람이 법당에 가서, 사찰에 가서 예수님 믿으라고 외치는 겁니다. 저기 지금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불자들이 있는데, 그들이 그 어리석은 길을 버리고, 예수님에게로 돌아오라고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들이 분명히 잘못된 길로 가고 있는 것이고, 그 잘못된 사람이 예수님 믿는 길로 돌아오는 것이 옳은 것이니까, 옳은 말을 하는 겁니다. 그러고서 나는 복음을 잘 전했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복음은 언제 어디서나 전해야 한다고 하는 그런 사명 때문에 그러는 것인데요.

그런데 그러한 행동은 성경을 하나는 알고, 둘을 모르는 어리석은 처사가 아닐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듣든지 안 듣든지 막무가내로 가서 전하기만 하면 된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비둘기같이 순전해야 하기도 하겠지만 뱀같이 지혜로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만일 우리가 지혜롭다고 한다면, 내가 이 예수님을 믿으라고 하는 이 진리의 말씀을 전했을 때, 저 사람이 내 말을 들을 수 있는 그런 지혜로운 겸손한 그런 상태에 있는 사람인지, 아니면 거룩한 것, 진주를 받았을 때, 돌이켜 우리를 공격하는 개 돼지와 같은 상태에 있는 것인지를 분별해서, 거만한 자들에게는, 악한 자에게는 가르칠 것이 아니고, 교훈할 것이 아니고, 그런 사람들에게는 이야기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고, 오히려 우리만 다치게 될 것이라고 하는 잠언서의 말씀과 마태복음 7장의 말씀을 분명하게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수많은 크리스천들이, 복음의 열정이 있다고 하는 사람들이 성경에 대해서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그런 어리석은 사람들이 불당에 가서 예수님 믿으라고 소리친 후에, 그래서 자신이 고난을 당하게 되면, 내가 복음을 전하다가 고난을 당하게 되었다고 하면서, 이것도 영광이라고 착각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 아주 큰 문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혜롭게 잘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죠.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러니까, 악한 자들, 거만한 자들이 있다고 한다면, 될대로 돼라. 저 사람들은 들을 귀가 없으니, 나는 복음 못 전한다. 가르칠 필요도 없다. 성경에 가르치지 말라고 했으니까, 그런 사람들은 포기해도 된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결단코 아닙니다. 결단코 아니에요. 복음은 모든 사람이 들어야 한다고 하는 그 점에 있어서는 사실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지금 마음을 악하게 하고, 그리고 그 마음을 거만하게 해서 내가 진리를 이야기하고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줄 때, 그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런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면, 그냥 포기해버리고, 그런 사람들에게는, 복음 안 전한다. 그런 사람들은, 나 신경 안 쓴다라고 하고, 손 털어버리라고 하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라고 하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그런 경우에는 막무가내로 전하는 것이 아니라, 지혜롭게 접근해야 돼요, 지혜롭게! 마음의 문이 열리도록, 먼저 마음을 열게 만들어야 되는 거예요, 들을 수 있게 만들어 놓고, 전해줘야 되는 거예요. 이 사람의 마음이 꼭 닫혀 있다고 한다면, 닫혀 있는 그 사람에게 그냥 말만 해버리면 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말해버리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마음이 조금씩 조금씩 열리도록, 그 거만한 마음이 조금씩 조금씩 열려서, 귀를 조금, 귀를 기울일 그런 상태가 되도록, 기다리고, 기다리고, 그 마음을 풀어주고, 풀어주고 해서, 결국 그 사람이 마음이 거만한 상태에서 귀를 기울이는 상태로 변화되는 그 모습을 본 다음에, 그 사람에게 진리를 이야기해 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팀 켈러 목사님이라고 하시는 분이 있는데요. 이분은 아주 유명한 목사님이시죠. 그분이 쓴 <센터처치>라고 하는 책 가운데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문화 속에서 균형 있게 상황화를 하고, 사람들에게 성공적으로 전도하기 위해서는 성공적으로 전도하기 위해서는 문화를 존중하고, 상대방의 문화를 존중하고 공감하면서, 우리가 그 문화 속으로 들어가야만 합니다. 마치 그 문화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비유한다면, 마치 드릴로 바위를 뚫는 것과 비슷하다고 말을 합니다. 그리고 그런데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 그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 그들이 가지고 있는 관점들이 성경적 진리와 어긋난다고 한다면, 충돌한다고 하는 곳에서는 그들이 잘못되었다고 하는 것을 드러내 주어야 되는데, 문화에 맞서야 되는데, 그건 어떤 어디에 비유할 수 있냐면, 마치 드릴로 바위를 뚫어서 그 안 깊숙한 곳에 폭약을 설치해서 폭약을 터뜨리는 것과 비슷해서, 그렇게 터뜨릴 때에야 바위가 폭파될 수 있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 모두가 다 복음을 전하는 데 필요하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단지 터뜨리기만 한다면, 그러니까 바위에 구멍을 뚫어서 그 바위의 그 심장부에 폭약을 집어넣을 수 있도록 다이너마이트를 집어넣을 수 있도록, 드릴로 뚫지 않은 채, 문화 속으로 들어가지 않은 채, 그냥 밖에서 폭탄을 터뜨리면서, 너희들 나쁜 놈들이다라고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고 욕하기만 하고, “이 나쁜 놈들”하고 기독교적인 관점으로 그들을 비난하고, 문화의 악한 요소들을 비난하기만 한다면, 그러면 그 바위가 폭발되는 것이 아니라, 거슬리기만 할 건데, 전도하려는 사람들로 하여금, 귀를 기울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귀를 열게 듣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니까 복음을 제대로 전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마음의 문을 아직 열기도 전에 그냥 진리를 쏟아내 버리면 되는 게 아니라, 그러면 바위를 거슬리기만 하지 전혀 바위를 폭발시킬 수 없다는 거예요. 바위를 폭파시키려고 한다면, 그들의 마음의 문을 열게 만들어서 그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 다이너마이트를 집어넣어서, 거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폭파시켜야, 그래야 그들이 폭파가 될 수 있다고 하는 이야기를 하는 거죠. 그래서 우리의 메시지는 그들에게서 그 어떤 것도 끌어내지 못한 채, 묵살되고 지워질 거다. 아무리 전도해도 귀를 닫을 거다. 이 말이에요. 담대하게 말하는 것을 미덕으로 생각할지 모르지만, 우리 한국 대부분의 사람들이 많이 그렇게 생각하죠. 사실은 복음을 영화롭게 하는 데 실패하는 것이다. 오늘날 조롱을 당하고 있잖아요? 가장 강력한 형태로 복음을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팀 켈러 목사님이라고 하시는 분이 있는데요. 이분은 아주 유명한 목사님이시죠. 그분이 쓴 <센터처치>라고 하는 책 가운데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문화 속에서 균형 있게 상황화를 하고, 사람들에게 성공적으로 전도하기 위해서는 성공적으로 전도하기 위해서는 문화를 존중하고, 상대방의 문화를 존중하고 공감하면서, 우리가 그 문화 속으로 들어가야만 합니다. 마치 그 문화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비유한다면, 마치 드릴로 바위를 뚫는 것과 비슷하다고 말을 합니다. 그리고 그런데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 그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 그들이 가지고 있는 관점들이 성경적 진리와 어긋난다고 한다면, 충돌한다고 하는 곳에서는 그들이 잘못되었다고 하는 것을 드러내 주어야 되는데, 문화에 맞서야 되는데, 그건 어떤 어디에 비유할 수 있냐면, 마치 드릴로 바위를 뚫어서 그 안 깊숙한 곳에 폭약을 설치해서 폭약을 터뜨리는 것과 비슷해서, 그렇게 터뜨릴 때에야 바위가 폭파될 수 있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 모두가 다 복음을 전하는 데 필요하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단지 터뜨리기만 한다면, 그러니까 바위에 구멍을 뚫어서 그 바위의 그 심장부에 폭약을 집어넣을 수 있도록 다이너마이트를 집어넣을 수 있도록, 드릴로 뚫지 않은 채, 문화 속으로 들어가지 않은 채, 그냥 밖에서 폭탄을 터뜨리면서, 너희들 나쁜 놈들이다라고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고 욕하기만 하고, “이 나쁜 놈들”하고 기독교적인 관점으로 그들을 비난하고, 문화의 악한 요소들을 비난하기만 한다면, 그러면 그 바위가 폭발되는 것이 아니라, 거슬리기만 할 건데, 전도하려는 사람들로 하여금, 귀를 기울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귀를 열게 듣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니까 복음을 제대로 전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마음의 문을 아직 열기도 전에 그냥 진리를 쏟아내 버리면 되는 게 아니라, 그러면 바위를 거슬리기만 하지 전혀 바위를 폭발시킬 수 없다는 거예요. 바위를 폭파시키려고 한다면, 그들의 마음의 문을 열게 만들어서 그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 다이너마이트를 집어넣어서, 거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폭파시켜야, 그래야 그들이 폭파가 될 수 있다고 하는 이야기를 하는 거죠. 그래서 우리의 메시지는 그들에게서 그 어떤 것도 끌어내지 못한 채, 묵살되고 지워질 거다. 아무리 전도해도 귀를 닫을 거다. 이 말이에요. 담대하게 말하는 것을 미덕으로 생각할지 모르지만, 우리 한국 대부분의 사람들이 많이 그렇게 생각하죠. 사실은 복음을 영화롭게 하는 데 실패하는 것이다. 오늘날 조롱을 당하고 있잖아요? 가장 강력한 형태로 복음을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지금 마음이 닫혀버려 있는 사람들, 거만해서 우리가 무슨 말을 하면 반발하는 사람들, 아무리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는, 그런 정말 완고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 앞에서 진리가 무엇이다라고 백날 소리쳐봤자 듣지 않는다는 얘기입니다. 그렇게 그런 사람들에게 가르치지 말라고, 잠언서에서 말하고 있고, 마태복음 7장에서도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그 얘기는 그런 사람들을 아예 포기하라는 얘기가 아니라, 그런 거만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그 거만함을 내려놓도록, 우리들의 말에 귀를 기울일 수 있도록, 그들의 마음의 문을 열 때까지, 그 여는 사전 작업들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아마 자녀들이 믿음의 길에서 떠나버린 자녀들이 많을 겁니다. 그래서 그 자녀들을 교회로 인도하고 싶은 부모님들의 그 열정들, 그 안타까움들 많을 겁니다. 우리 자녀들이 정말 이상한 생각에 빠져서, 잘못된 생각으로 막 달려가고 있는, 그 모습이 너무나도 안타까워서, 그걸 어떻게 해야 되나? 걱정하시는 분들 부모님들 가운데 많을 겁니다. 왜 이 아이가 이런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을까? 왜 이렇게 이 아이가 나쁜 생각을 하고 있을까? 괴로워하는 부모님들 많을 겁니다. 그런데 그때, 우리 부모님들이 주로 하는 것이 무엇이냐면, 옳은 것을 윽박지르고 맙니다. “너, 교회 가!” “주일이면, 교회 가야지!” 외치고 끝나는데 아이들의 마음이 거만해서 들리지가 않아요. 오히려 반발해요. 말하면 말할수록, 오히려 더 반발하는 모습을 우리가 경험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그 거만한 자들의 마음을 어떻게 할 것인가? 거만하지 않도록, 마음의 문을 열게 만들어야 되는 거죠. 커다란 바위에 구멍을 뚫어서, 그 안에 다이나마이트를 집어넣어야 되듯이, 그들의 마음에 어느 한 부분에 무엇인가를 뚫을 수 있는, 그 마음의 그 조그마한 부분을 열게 만들어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린 너무나도 급해요. 급해. 우물에서 숭늉을 찾으려고 해요. 우물에서 자꾸 왜 숭늉이 안 나오나? 왜 숭늉이 안 나오나? 하고 금새 좌절하고, 금세 절망하고 안 된다고 하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죠.

예전에 제가 사역하던 교회에 어떤 장로님의 따님이 신X지에 빠진 그런 따님이 있었습니다. 서울에 보내 놓았더니, 신X지라고 하는 집단에 빠져버린 겁니다. 모든 것을 다 내 팽개쳐 버리고, 신X지 집단에 열정적으로 가서, 이단에 빠져 있는 그런 모습을 본 부모님 장로님 권사님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이 어느 날 저를 찾아왔어요. 그리고 저한테 고민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목사님, 어떡하면 좋습니까? 우리 딸이 신X지에 빠져버렸는데, 어떻게 하면 이 아이를 돌아오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어떤 방법이 있을까요?” 그때 제가 그 장로님과 권사님 앞에, 절망적으로 눈물짓고 있는 그 두 분에게 해준 말이 하나 있습니다. “장로님, 권사님, 따님을 한없이 사랑해 주세요.” “따님을 한없이 사랑해 주세요.” 저는 진리를 가지고, 그 딸아이와 “이X희가 뭐가 잘못됐다” 싸우라고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신X지의 잘못이 무엇이고, 이것이 무엇이 잘못이다라고 하는 것을 가르쳐주라고, 무엇이 틀렸다고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내린 조언은 무엇이냐면, “좀, 사랑 좀 해주세요.” “사랑 좀 해주세요.” 이 아이가, 우리 아빠 우리 엄마에게 있어서는, 내가 가장 소중하다고 하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도록, 그렇게 실감 나게 사랑을 표현해 주세요. 그래서 이 아이가 이 세상에 그 누구보다도, 내가 무슨 나쁜 짓을 하고, 내가 어떠한 상황에 들어가고, 내가 아주 심각한 문제에 빠지더라도, 내가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곳, 나를 전혀 무시하지 않고, 언제나 언제 어느 상황에서나, 나를 한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그 무한한 품이 엄마의 품이고 아빠의 품이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세요”라고 이야기를 했어요. 돌아왔어요.

우리 자녀들의 문제가 신X지에 빠지는 것에만 문제가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 자녀들은 무신론에 빠져듭니다. 우리 자녀들은 포악한 성격으로 변해갑니다. 우리 자녀들이 우울증에 빠지기도 합니다. 다양한 문제 가운데 빠져들어갑니다. 그런데 그 아이들 앞에서 정답을 이야기하고 바리새인처럼 책망하고, 이미 그들의 마음은 닫혀 있는데, 그 어떤 징계를 하고, 책망을 한다고 한들, 오히려 그들의 마음은 더 닫혀버릴 수밖에 없는 것이죠.

이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는 기독교에 대해서 한국 사회의 마음이 닫혀버려 있는 상태입니다. 여러분 그걸 느끼십니까? 한국 기독교에 대해서 크리스천들이 아닌 사람들은 이미 마음의 문을 닫아버렸습니다. 이미 닫아버린 이 상황 가운데서, 어떻게 그들이 당신들이 잘못된 길로 가고 있으니, 제대로 된 길로 돌아오라고, 어떻게 진리를 전해줄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정답을 반복해서 계속해서 알려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야기하면 할수록 더 반발을 당하게 될 겁니다. 우리는 정답을 이야기했으니까, 나는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하면서, 그리고 고난을 당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오늘 성경 말씀에 보면 어리석은 일일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 지혜를 주시옵소서.” 어떻게 하면 닫혀버린 우리 남편의 마음을 열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닫혀버린 우리 아이들의 마음을 열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닫혀버려 있는 이 사회의 마음을 열 수 있을까요? 지금은 우리가 가면, 오히려 반발하고, 우리를 공격하고, 오히려 진리를 이야기하면 이야기할수록, 오히려 더 크게 반발하고 비난하고 욕하는, 저 마음이 다친 세대에게, 어떻게 우리가 다가갈 수 있나요? 주님, 지혜를 주시옵소서. 기도하며 나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인내를 배우게 하여 주옵소서. 기도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바꿔서 생각을 해보면 좋겠어요. 우리는 남을 가르쳐야만 하는 입장만이 아니라, 정반대로 우리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 배워야 하는 입장에 서기도 합니다. 만일 누군가가 나에게 책망한다면, 만일 누군가가 나에게 교훈한다고 하면, 우리는 어떻게 반응을 하는 것이 옳겠습니까? 누군가 나에게 징계한다면, 누군가 나에게 조언을 주고, 누군가 나에게 좋은 어드바이스를 준다고 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까요?

우리들에게 어드바이스를 해주는, 책망을 주고, 교훈을 주는 사람은 내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입니다. 때로는 남편이 나에게 조언을 해줄 수도 있겠고, 아내가 나에게 조언을 해줄 수도 있겠고, 부모님이 나에게 조언을 해줄 수도 있겠고, 자식이 우리들에게 옳은 말을 가르쳐줄 수도 있을 것이고, 직장의 상사가 나에게 좋은 이야기를 해줄 수 있고, 직장의 동료가, 혹은 부하 직원이 나에게 좋은 길을 가르쳐 줄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그 가르쳐주는 사람이 어른일 수도 있고, 때로는 꼬마 아이의 입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교훈을 줄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나를 전혀 모르는 지나가는 사람이 나에게 내가 깨달을 만한 지혜를 이야기해 줄 수도 있겠고, 심지어 불신자의 입에서도 하나님의 거룩한 교훈이 우리들에게 전해질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친구의 입을 통해서, 때로는 적의 입을 통해서, 원수의 입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들려오게 될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누가 말했는가를 가릴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진리라고 하는 것은 누가 말을 해도 진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불신자가 말을 한다고 해서 그 말은 진리가 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이기 때문에 누가 이야기를 하든 진리는 진리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합니까?

만일 우리도 거만하게 비아냥거리며 비웃으며 그 조언을 물리치고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악한 사람이오. 그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요. 지혜가 없는 사람일 겁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누군가 말을 한다면 우리들의 마음의 문을 열고 들어야 합니다. 그것을 누가 이야기하든 나보다 한참 밑에 있는 저 가지 않는 사람이 나에게 이야기를 하더라도 우리는 마음의 문을 열고 들어야 합니다. 우리의 원수가 우리를 향해서 외치는 그 소리에도 마음의 문을 열고 들어야 합니다.

12절 말씀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네가 만일 지혜로우면 그 지혜가 네게 유익할 것이나, 네가 만일 거만하면 너 홀로 해를 당하리라.” 지혜는 무엇입니까? 겸손하게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로 불러주신 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배워야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 같은 성도님들을 바라보면서 배워야 합니다. 장로님이라도 평신도에게 배워야 합니다. 목사라고 할지라도 평신도에게 배워야 합니다. 만일 그게 배워야 할 진리라고 한다면, 그 누가 이야기를 해도 다 배워야 해요. 다 배워요.

그런데 우리들에게 어떻게 가르치느냐? 어떻게 가르치는가? 말로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도 가르쳐주고 있어요. 누군가 정말 신실하게 사는 그 모습을 본다면, 그건 우리들을 향해서 가르쳐주고 있는 겁니다. 아, 내가 이렇게 신실하게 살지 못했던 것을 회개하고, 뉘우치고 그 신실한 삶을 배워야 하는 겁니다. 누군가 정말 열정적으로 신앙으로 열심히 살려고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고 한다면, 그 모습을 보고 “나도 저렇게 살아야 되겠구나”라고 배워야 됩니다. 정말 주를 위해서 헌신하는 그 모습을 본다면 그 모습을 보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마음의 문을 닫아버릴 것이 아니라, 그 모습을 보면서 “나도 배워야 되겠구나!” 마음의 문을 열어야 되는 거예요. 마음의 문을 열고, 우리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를 하나님께서 주신 것은 서로가 서로를 보면서, 이 사람의 말을 통해서 행동을 통해서, 어떤 때는 좋은 모습으로, 어떤 때는 나쁜 모습으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든지,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나도 배워서 지혜가 우리들에게 늘 가까이 있는데, 그 하나님의 그 지혜로운 그 교훈들이 우리 옆에 널려져 있는데, 12절 말씀에 내가 만일 지혜로우면, 그 지혜로 내가 유익할 것이다라고 하신 이 말씀을 기억하면서, 우리가 항상 배워나갈 수 있는 영적인 겸손함이 우리 모두에게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그게 어렵죠. 우리는 겸손하기보다는 거만해지고, 교훈의 귀를 열기보다는 마음을 열기보다는 귀를 닫아버리고,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려고 하는 악한 마음들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더러운 모습들을 지고 십자가를 지신 그 주님 앞에 나아가 우리의 죄를 자복하고, 넘어질 수 있으나, 다시 한번 회개하고 일어서며, 주님의 은혜를 받으며 승리해 나가는 귀하고 복된 하나님의 백성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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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를 얻는 자 (잠 8:32-36)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잠 8:1-21) +++ 교훈과 책망 (잠 9:1-12) 

오늘 말씀을 보면 지혜를 얻는 자가 생명을 얻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지혜를 얻는 자가 여호와의 은총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디서 그렇게 표현하고 있죠? 35절의 말씀 가운데서 그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한 번 같이 읽어볼까요. “대저 나를 얻는 자는 생명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얻을 것임이니라.”

여기서 말하는 “나”가 무엇입니까? 지혜죠. 지혜를 얻는 자는 무엇을 얻을 것이다? “생명”을 얻을 것이다. 지혜를 얻는 자가 무엇을 얻을 것이다? “여호와의 은총”을 얻을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지혜를 얻지 못하고, 지혜를 잃어버리면 어떻게 될까요? 정반대의 결과가 나오게 되는 것이겠죠. 36절의 말씀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또 한번 같이 읽어보십시다. “그러나 나를 잃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해하는 자라. 나를 미워하는 자는 사망을 사랑하느니라.” 여기서도 “나”가 누구 무엇입니까? 지혜죠. 지혜를 잃어버리면 어떻게 될 것이다? 영혼을 해하게 될 것이다. 근데 이 지혜를 잃어버린다고 하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지혜를 잃어버리는 것은 어떻게 잃어버리는 것일까요? 지혜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죠. 지혜를 들려줘도, 그 말에 따라, 지혜에 따라 행하는 것이 아니라, 지혜와는 반대의 길로 가는 것이고, 지혜를 잃어버린다고 하는 것, 물건처럼 잃어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도대체 지혜를 잃어버린다고 하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지혜를 잃어버린다고 하는 것은, 지혜의 말씀이 있는데, 그 지혜의 말씀대로 따라 살지 않고 정반대의 길로 가는 것이죠. 사랑하지 않는 것이죠. 지혜의 말씀을 들려주면 싫어하는 것이죠. 지혜에 따라 살지 않게 되면, 영원히 해함을 입을 것이고, 결국에는 사망의 길로 가게 되는 것이라고 오늘 잠언서 8장의 말씀 가운데서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문자 그대로입니다. 지혜가 정말 중요하다고 하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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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가 무엇입니까? 지혜가 다른 것이 지혜가 아니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무서워하는 것이 지혜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사는 것이 지혜고,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시는 대로 따라 살고, 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는다고 한다면, 내게 큰 화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것이 지혜라고 말씀을 드렸는데요. 그렇게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살아야, 생명을 얻는다. 오늘 본문의 말씀 가운데서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지혜를 얻어야 생명을 얻는다고 표현하고 있는 이 말씀은, 그 말씀을 다른 표현으로 변경해서 다른 표현으로 표현하자고 한다면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지혜를 통해서 생명을 얻는다고 하는 이야기는 지혜가 아닌 다른 것들로서는 생명을 얻을 수 없다고 하는 말입니다. 예를 들자면, 어떤 것을 통해서는 생명을 얻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일까요? 이 세상의 모든 것이죠. 우리가 생각하기에 이것은 우리를 살릴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우리들에게 힘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우리들의 소망일 것이다라고 생각되는 그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생각하기를, 돈이 우리에게 생명을 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돈이 많이 있으면 좋겠다. 돈만 있으면 문제가 해결되겠다고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의 말씀 가운데서, 지혜를 얻는 자가 생명을 얻는다고 하는 얘기가 무슨 얘기입니까? 돈으로써는 생명을 얻을 수 없다는 얘기예요. 뿐만 아니라, 우리는 생각하기를, 좋은 대학에 들어가야 행복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대학에 들어가야, 그래야 내가 복을 얻는 것이고, 좋은 대학에 들어가야, 내가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는데, 그게 아니라는 말이에요. 이 세상에서 인기를 얻는 것이 그것이 좋은 것이고, 사람들의 박수를 얻는 것이 그게 좋은 것이라고 우리들은 생각하고 있는데, 오늘 성경 말씀은 그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들이 우리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돈이 우리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그 어떤 것이 우리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지혜가 우리를 살리는 것이다. 지혜를 얻는 자가 생명을 얻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고 하는 이 사실을 분명하게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광야 40년 동안 훈련을 받는 기간이 있었습니다. 애굽 땅에서부터 해방되어 홍해 바다를 건너고, 그리고 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까지, 40년이라고 하는 그 기간을 광야에서 지내야만 했었는데요. 이 광야 40년의 기간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훈련시키고, 또 훈련시키고, 또 훈련시키는 훈련의 장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광야 40년 동안에 이스라엘 민족을 훈련시킬 때 꼭 알려주고 싶은 그 훈련의 목표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면 사람이 사는 것은 떡으로 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이다. 떡이 우리를 먹여 살리는 것 같고, 떡이 있어야 우리가 살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이스라엘 민족을 향해서, “떡이 아니다.” “떡이 아니다.” “떡이 살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살리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광야 40년 동안 또 훈련시키고, 또 훈련시켰습니다.

특별히 무엇을 가지고 훈련을 시켰냐면, 만나라고 하는 것으로 훈련을 시켜주셨습니다. 광야라고 하는 곳은 어떤 곳인가? 광야라고 하는 것은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우리가 수고하고 애써서 무엇인가 소득을 얻을 수 있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그곳에서는 먹을 것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이 거의 없는 곳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이 40년 동안 광야에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결국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인가?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망할 것인가? 생각되는 그 순간에 하나님께서 만나를 내려주신 것이죠. 그 광야에서 전후 좌우를 살펴보면 아무것도 없고, 모래밖에 없는데, 황량한 들판만 보이는데, 그곳에서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그때 하나님을 바라보게 만드신 것이 만나입니다.

만나가 내리면 그 만나를 거두어서 먹으면서, 오늘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만나를 주셨구나!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그 하루를 보내는 겁니다. 근데 우리 마음 가운데는 “그럼, 내일은 어떡하지?” “내일 또 만나가 내릴까?” “내일 만나가 없으면, 어떡하지?” “내일은 아무것도 없으면, 무엇을 먹고사나?” 싶은 그 생각이 들어서, 사람들은 만나를 거둘 때 하루치만 거두는 것이 아니고, 며칠 분을 거두어서 미래를 준비하고, 대비하기 위해서 수많은 만나를 거두어 드리고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거둬들이지 말라” “그냥 오늘 먹을 거, 오늘 준비하고, 내 이름, 하나님을 믿고 기다리라”라고 “내일은 하나님께서 만나를 내려주실 테니까, 그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어라” 말씀하시고, 그냥 내버려두라는 것이죠.

그런데 어리석은 인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지 못하고, 염려가 되고, 걱정도 되고,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해서, 만나를 며칠 분을 거두어 두는 겁니다. 하지만 다 썩어버리고, 냄새 나고, 그다음 날 먹을 수 없는 상태가 되었는데, 하나님께서 아니나 다를까, 그다음 날에 또 만나를 내려주신 거예요. 그것이 반복되고, 또 반복되면서 우리가 사는 건 떡 때문에 사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먹여주시니까, 사는구나! 하나님이 살려주시니까, 사는 거구나라고 하는 사실을 사십 년 동안 훈련하고, 훈련하면서, 그래서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것이 그 참된 길이라고 하는 사실, 복된 길이라고 하는 사실을 훈련했던 것이 바로 이스라엘 민족의 훈련 과정이었습니다.

신명기 8장 2절에서 3절 말씀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으로 하여금, 떡을 먹으니까 배가 부르고, 떡을 먹으니까 힘이 솟아오르고, 떡을 먹으니까 목숨이 붙어 있는 것 같은 그런 현상만을 보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그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 떡이 하나님에게서부터 온 것이라고 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하는 그 교훈을 내려주신 것입니다.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고 하는 것은 성경 전체를 통해서 우리들에게 강조해주고 있는 일관적인 말씀입니다. 우리는 떡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산다. 내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은총 때문에 산다고 하는 게 성경 전체에서 가르쳐주는 것인데요. 그런데 우리는 늘 속아 넘어갑니다. “아니야, 그래도 돈이 최고야.” “돈이 있으면, 떵떵거리며 살 수 있잖아” “한번 기마이도 쓸 수 있고.” 돈이 있으면 그냥 마음대로, 내가 무엇인가 할 수 있는, 그것이 너무나도 갈망이 되어서, 그래도 돈이 최고라고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겁니다. “아니야, 물질이 많아야 돼”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죠.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직장에 가야, 그래야 내가 길을 펴고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런 모습이 안타깝게도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서 늘 반복되고 또 반복되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보통 일반 성도님들만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목사님들 중에서도 이런 생각들을 여지없이 드러내는 것 같아서, 정말 안타깝게 생각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종종 제가 카톡 메시지를 받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요. 요즘에는 특별히 더 많은 카톡 메시지들이 들어오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목사님들이 보낸 메시지 가운데 어떤 메시지가 있냐면 이런 메시지가 있어요. “우리나라가 잘 사는 것은 박정희 대통령 때문이다. 박정희 대통령 없었으면 우리나라 망했을 것이다”라고 하는 그런 메시지를 저한테 보내줘요. 이런 메시지를 받으면서 굉장히 혼란스럽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저에게 메시지를 보여주는데, 또 무슨 메시지를 보내주냐면, “우리나라에 이승만 없었으면, 우리나라가 어떻게 세워질 수 있겠느냐”라고 하는 그런 메시지를 보내주기도 합니다. 물론 나름대로의 어느 정도 공이 있을 것이고, 그분들을 추종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분들의 공로가 어느 정도 있는 것이 사실일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조롱할 것도 아니고 존중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돈이 우리를 살리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를 살린다고 말해야 될 목사님들에게서,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이 우리를 살린다, 사람이 우리 나라를 살린다고 하는 그런 고백을 듣는 때마다 당혹스럽고 정말 어떻게 해야 될지를 잘 모르겠어요. 모든 사람들이 돈이 최고라고 외칠 때, 돈을 벌어야 하고, 성공해야 하고 이 세상에서 잘 나가야 된다고 그렇게 외칠 때,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외쳐야 될 말씀이 있다고 한다면, “아니다. 돈이 우리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살리는 것이고, 이 세상에 그 어느 것이 우리를 구원해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소망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다”라고 하는 사실을 전해야 될 때인데, 안타깝게도 그렇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이 있고, 우리 성도들의 마음 가운데서도, 우리가 예배드릴 때는 하나님의 은혜를 이야기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하지만 , 뒤돌아서면 “그래도 돈이 최고야” 뒤돌아서면 “그래도 힘 있는 사람이 좋아” 자꾸 이 세상의 것들을 바라보려고 하는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요. 원하기는 우리가 이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한번 분명하게 우리들의 마음속에 또 새기고 또 새길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를 살리는 것은 떡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우리는 돈 때문에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산다고 하는 그런 믿음의 고백들이 우리들 가운데 넘쳐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들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현실에 우리가 발을 디디고 사는 이 세상에서는 정말 현실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는 정말 돈이 최고인 것처럼 보이게 되는 것이고, 힘 있는 사람이 도움이 되는 것 같고, 그리고 권력이 최고인 같은 그런 느낌을 받을 때가 많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늘 우리는 그런 환경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데요. 그때도 이 세상 전부가 돈이 최고라고 말하고 있는 그 순간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앞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지혜를 얻는 자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가 생명을 얻을 것이다. 이게 안 믿겨지시면, 이걸 좀 믿을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이 말이 참말이라고 하는 그 사실을 우리들이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합니다. 방백들을 의지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해야 할 것입니다. 아무리 사람들이 수고하고 애쓴다고 할지라도, 집을 세운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지으시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 돕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다고 하는 그 사실을 분명하게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이사야서 55장 1절 2절 말씀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이 세상에 썩어질 것들, 먹어도 조금 있으면 다 뒤로 나가버리고, 다시 허기질 수밖에 없고, 마셔도 조금 있으면 또다시 갈증이 있을 수밖에 없는, 헛된 것들에 우리가 목숨을 걸며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지혜를 얻기 위하여,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기 위하여, 우리 모두가 기도하며 나아가고 이 지혜를 얻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지혜를 얻을 수 있을까요? 지혜를 얻는 방법에 대해서 32절 말씀, 잠언서 8장 32절 말씀에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아들들아, 이제 내게 들으라. 내 도를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32절 말씀 가운데서, 이제 내게 “들으라”라고 하는 말씀에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말하는 “내”가 누구죠? 지혜입니다. “지혜를 귀 기울여 들으라”라고 32절 말씀에서 기록하고 있는데요. 여기서 들으라고 말씀하신 그 표현을 주목해 보면 좋겠는데요.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져 있는데, 그 말씀을 우리가 들어야 한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데, 들어야 지혜를 얻는 것이고, 자꾸 자꾸 듣고 듣고 또 듣고 또 들어야 지혜가 우리에게 생겨진다는 것이죠.

들어야 지혜가 생기고, 지혜가 있어야, 생명을 얻는다고 하는 것인데요. 왜 우리는 들어야 합니까? 지혜를 얻기 위해서, 들어야 할 필요가 왜 있을까요? 왜 우리는 지혜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서 꼭 들어야만 할까요? 그것은 지금 우리들의 귀에 지혜가 아닌 소리들이 너무나도 많이 계속해서 하루 24시간 내내 일주일 7일 동안 1년 365일 계속해서, 지혜가 아닌 소리들이 우리들의 귀에 계속 들려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가만히 있으면,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만히 있으면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는 이 세상의 가치관에 노출되어 있는 겁니다. 그래서 자꾸만 듣는 겁니다. 자꾸만 들어요. 우리가 매일매일 보는 텔레비전이나 영화나 드라마나 우리들의 대화 가운데서 우리들의 이야기 속에서, 걸어가면서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우리를 향해서 계속해서 들려주는 이야기가 있는데, 그 이야기는 지혜의 말씀이 아니라, 지혜와 반대되는 그 말들이 우리들의 귀에 계속해서 들려오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다음에, 그렇게 광야 40년 동안 훈련을 받았던 이스라엘 민족이었는데,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타락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우상숭배하는 길로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했습니다. 도대체 왜 이스라엘 민족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하나님만 잘 믿고 섬기는 그런 삶을 살지 않고 이스라엘 민족이 그 가나안 땅에서 타락해버리고, 또 그렇게 우상 숭배의 길로 가버리고, 그렇게 돼버린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이 가나안 땅에 있는 이방인들의 가치관에 노출되어 버렸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문 열고 나가면 이방인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 이방인들이 하는 모습이 보이는 겁니다. 매일 보는 거예요. 저 이방인들이 비가 안 오면, 바알 신에게 가서 제사드리는 그 모습을 보는 겁니다. 자꾸 보니까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그것이 우리들에게 세뇌가 되어서 “아, 이런 경우에는 우리가 우상에게 저래야 되나?” 그러면서 가버리는 거예요.

제가 미국에 있을 때, 담배 광고하는 것을 봤는데요. 담배 광고를 하기 위해서 담배 포스터를 가게마다 붙여 놓습니다. 붙여놓는데 그 담배 포스터를 어디다 붙여놓냐면, 예를 들어서 뭐 세븐일레븐이라든가 이런 편의점 있지 않아요? 그런 편의점에 들어가려고 하면, 담배 광고들이 꼭 여러 개 붙어 있는데, 어디에 붙어 있냐면 허리 아래 부분 높이에 붙어 있습니다. “말보로” 해가지고, 빨간 자극적으로 눈에 확 들어오는 디자인에 담배 광고가 붙여져 있는데, 어디에 붙여져 있냐면, 제 눈높이에 붙여져 있는 것이 아니라, 허리 아래 정도에 붙여져 있어요. 왜 거기다 붙여놨을까요? 아이들의 손을 잡고, 편의점에 들어가면 아이들이 편의점 문에서 말보로 담배 광고를 먼저 보는 겁니다. 어른들이 피는 저 담배 “말보로”라는 게 있구나! 매일매일 편의점을 들락날락거리면서, 매일매일 그 담배 광고를 보면서 들어가는 그러니까 그렇게 1년 365일 광고하고 있는, 그 광고의 힘 앞에 학교에서 한 학기에 겨우 몇 시간 너희들 담배 피우면 안 된다라고 가르치는 게 힘을 잃어버리는, 그런 그러니까 결국 아이들이 커서 그쪽으로 빠져가는 거예요. 빠져요.

근데 그게 담배 광고만이 아니에요. 담배 광고만이 아니고, 지금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이 삶에서 계속해서 끊임없이 끊임없이 광고가 되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마음을 세뇌시키고 있습니다. 돈을 벌어야 된다 이 세상의 것들을 추구해야 된다. 이 세상의 방식대로 살아야 된다라고 하는 광고들을 계속해서 끊임없이 주입받고 있고, 우리 아이들이 학교에 가면 학교에서 친구들에 의해서 계속해서 세뇌당하고 있고, 엄청난 세뇌가 계속해서 되고 있는, 그 상황 가운데서 결국 우리가 어떻게 믿음을 가질 수 있고 지혜를 얻을 수 있는가? 오늘 성경 말씀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들으라.” “지혜를 들어라.”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 것이죠.

32절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아들들아, 이제 내게 들으라.” 33절에서 말합니다. “훈계를 들어서” “들어서 지혜를 얻어라.” 34절에서 말합니다. “누구든지 내게 들으며” 듣고 듣고 들어야, 그래야, 이 악의 세뇌에서부터 벗어날 수가 있는 것이죠.

그런데 문제는 물리적으로 많이 듣는 것만으로는 부족할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많이 들으면 일단은 좋기는 좋습니다. 하지만 많이 듣는 것보다도 더 중요한 게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묵상하는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무엇을 원하시고 계시는지,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묵상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읽는 거 많이 읽어서, 일독을 하고, 몇십 독을 하고, 어떤 사람은 쓰기도 해서, 성경을 전체를 다 쓰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이걸 암송하기도 하고, 정말 우리가 성경을 사랑하는 방법이 다양한 방법이 있는데요. 많이 읽든, 많이 쓰든, 아니면 많이 암송을 하든 어떤 방법을 하든지 많이 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인데요. 그런데 그렇게 많이 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게 무엇이냐면, 묵상하는 것이죠.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난독증이 있어서, 난독증이 있어서 많이 읽기는 읽는데, 무슨 뜻인지 모르는 경우가 굉장히 많더라고요. 예전에 제가 어떤 한 학생을 봤는데요. 그 학생의 어머니가 그 학생한테 가서 책 읽으라고 숙제를 내줬습니다. 그러니까 집에, 방 안에 들어가서 엄마가 읽으라고 하는 책을 다 읽었어요. 다 읽고, “엄마, 나 엄마가 읽으라는 대로 나 책 다 읽었어요.”하고 나오는 거예요. “그래, 네가 책을 벌써 다 읽었구나” “그래, 그러면 그 책이 도대체 무슨 얘기하고 있던?” 물어보니까 몰라요. 이렇게 읽었는데, 몰라. 거기서 무슨 얘기 했는지, 거기에 나오는 사람이 누구니? 몰라. 거기에 무슨 무슨 주인공이 나왔는지 아무것도 모르는, 그런데 읽기는 읽었어요. 안 읽은 게, 아니에요. 읽었어요. 읽었는데 그냥 소리 내서 읽긴 읽었는데, 마음에까지 오지 않은 거죠. 내용 파악을 잘못하는 어떤 문제가 있는 학생 같았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 크리스천들 중에는, 많은 분들이 말씀을 읽기도 많이 하고, 쓰기도 많이 하고, 암송을 많이 하기도 하고 듣기도 많이 하곤 하는데, 정작 하나님이 무슨 말씀하시는지 모르는 분들이 많아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 분명하게 이 성경에서 말씀해 주고 계셨는데, 그 말씀과는 전혀 딴판의 삶을 사는 거예요.

적어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었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지를 알아야 될 거 아니에요? 미워하면, 안 되잖아요? 용서해야만 하잖아요? 사랑하며 살아야 되잖아요? 양보하며 살아야 되잖아요?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며 살아야죠! 겸손해져야죠! 그런데 그거 하고 아무 관계없이 삶을 살아요. 그냥 종교적인 행동을 많이 했다고 하는 그런 교만한 마음으로 바리새인처럼 살아가요. 그러면 그게 읽는 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도대체 무슨? 아무런 의미가 없이 읽는 것밖에 되지 않아요. 그래서 오늘 우리들의 기도의 제목은, 들어야 되는 것인데, 여기서 들으라고 하는 이야기는, 그냥 들으라는 얘기가 아니에요. 말은, 표현이 들으라고 하는 말이지만, 들으라고 하는 이 말의 표현이 무슨 표현이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깨닫고, 이해하고, 그 하나님의 말씀대로 따라 살 것을 말하는 표현으로서 “들으라.”

“여보, 아기 좀 봐” 그러면 아기만 보고 있는 거예요. 다른 사람 얘기가 아니고, 저의 얘기예요. 그게 아니잖아요? 아기만 보고 있는 게, 보는 게 아니잖아요. 아기를 본다는 얘기는 뭐예요? 울면 달래주고, 배고프면 먹여주고, 아이가 기저귀를 갈아줘야 될 필요가 있으면 갈아줘야 되고, 그게 아기를 보는 거잖아요?

들으라고 하는 얘기는 하나님의 말씀 틀어놓고 들으면서 딴짓하라는 얘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고 하는 얘기는, 그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 하나님께서 내가 어떻게 살기를 원하시는지,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가라.” 그래서 묵상해야 되는 거지, 들으라고 하는 얘기는 곧 묵상하라는 이야기고, 그래서 하나님을 더욱더 조금씩 조금씩 더 알아가라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엎드렸습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 할 수만 있으면 이 십자가의 잔을 내가 마시지 않을 수 있다고 한다면, 마시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예수님께서는 기도하는 것 이상으로,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기를 원하시는지를 더 민감하게 귀를 기울였고, 하나님께서는 “네가 십자가를 지라”고하시는 그 말씀, 그것이 주님을 버리시는 말씀이 아니라, 사실은 사랑하시는 말씀이었고, 그래서 그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하게 순종하며 믿음의 길을 나아간 줄로 믿습니다.

원하기는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지혜가 그게 생명의 길이라고 하는 것을 확실하게 다시 한번 되새길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밖으로 나가면 정반대의 이야기들을 더 많이 들을 겁니다. 그러나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서,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살린다 하나님이 우리의 소망이다. 우리를 사랑하사,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주님이 살 길이다라고 하는 믿음의 그 확신들이 마음속에서 넘쳐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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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잠 8:1-21)

도수장으로 가는 소 (잠 7:1-27) +++ 지혜를 얻는 자 (잠 8:32-36)

지혜가 무엇일까? 잠언서에서는 어떤 기발한 꾀를 알려주고 있는 것일까?

1절에서부터 3절 말씀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혜가 부르지 아니하느냐? 명철이 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느냐? 그가 길 가의 높은 곳과 네거리에 서며, 성문 곁과 문 어귀와 여러 출입하는 문에서 불러 이르되”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혜가 마치 사람인 것처럼 소리를 질러서 외치고 있고 부르고 있는데, 지혜가 지금 자꾸만 떠들고 있는데, 어디서 그렇게 외치고 있느냐? 길가 높은 곳에서도 지혜가 외치고 있고, 네거리에서도 지혜가 외치고 있고, 성문 곁에서도 외치고 있고, 문 어귀에서도 외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여러 출입하는 문에서 지혜가 외치고 있다고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그러니까 “안방에서는”이라고 기록? 안방이라고 하는 말은 안 나왔으니까, 안방에는 지혜가 없는 것일까요? 학교 건물에는? 학교 건물이라고 하는 말을 표현하지 않았으니까, 학교 건물 속에 들어가면 지혜를 발견할 수 없는 것일까요? 들을 수 없는 것일까요? 시장에 가면, 여기 시장이라고 하는 말을 표현하지 않았으니까, 시장에 가면 그런 지혜의 말을 들을 수 없고, 지혜를 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길가로 가야만 하고, 네거리를 가야만 하고, 성문으로 가야만 하고, 꼭 여기서 언급한 바로 그 장소로 가야만, 그래야 우리가 지혜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하는 그런 뜻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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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을 가리켜서, 몇몇 대표적인 것을 예로 들어서 지금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대표적인 장소들, 몇몇 곳을 들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렇게 몇몇 장소를 언급하고 있는 것은, 지혜라고 하는 것이 꼭꼭 숨겨져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우리가 소풍에 가서 보물찾기 하듯이, 그 보물을 찾으려면 조그마한 이곳저곳 뒤져가면서, 그 보물을 숨겨놓았는데, 그 숨겨놓은 것을 찾아내기 위해서, 눈을 부릅뜨고 찾아야만, 그래야만 겨우 운이 좋은 사람이 찾을 수 있듯이, 지혜라고 하는 것도, 지혜를 얻기 위해서, 지혜를 듣기 위해서, 우리가 바로 이곳에 가서 지혜를 들어야 하고, 지금 여기 열거된 바로 그 장소에 가서, 우리가 지혜를 들어야만, 겨우 지혜를 발견할 수 있다고 하는, 그런 의미에서 이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이렇게 말씀한 것은, 바로 이곳에서만 지혜를 찾을 수 있다고 말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소풍을 가면, 보물을 숨겨놓고, 보물을 숨겨놓은 선생님이 아이들을 향해서 말합니다. “보물을 찾으려면, 저 밖으로는 가지 말고, 나무 주변이나 돌 주변이나 아니면 의자 주변이나 이런 데서 찾아봐라”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왜냐하면 선생님이 거기에다만 보물을 숨겨놨기 때문에, 아이들로 하여금 거기서만 찾으라. 괜히 저 멀리 가지 말고, 여기서 내가 숨겨놓은 바로 그곳에서만 보물을 찾으라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이 말씀은 지혜라고 하는 곳이 어디에 있느냐? 바로 여기에만 있으니까, 여기서 지혜를 들으라고 하는 의미에서 이 말씀을 한 것이 아니고, 이것은 어디에서나 지혜를 들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대표적으로 우리가 늘 만나는 장소를 열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식의 수사법을 가리켜서 대유법이라고도 하고 제유법이라고도 하는데요. 대표적인 거 몇 개만을 선정해서 전체를 나타내는 방법이죠. 그러니까, 길가에서, 길가라고 하는 곳이 어느 곳입니까? 누구나 갈 수 있는 곳이 길가예요. 성문이 어디입니까? 누구나 다 갈 수 있는 곳이 성문이에요. 네거리가 어딥니까? 아무나 갈 수 있는 곳이 바로 그 네거리입니다. 저 궁중에 지혜가 숨겨져 있는 것이 아니고, 저 고대광실에 지혜가 숨겨져 있는 것이 아니고, 누구나 다 갈 수 있는 그 길가에서, 성문에서, 그리고 네거리에서 이 지혜의 소리를 들을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있는 바로 이곳에, 우리는 그 지혜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하는 그런 의미에서 이 말씀을 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지혜가 어디에 있는가? 교회당 안에 들어와야만 지혜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이 살고 있는 가정에서도 지혜를 발견할 수 있고, 여러분들이 일하고 있는 직장에서도 지혜를 발견할 수 있고, 우리가 지금 거래하는 거래처 속에서도 지혜를 발견할 수가 있고, 우리가 사는 삶 일상 가운데서 하나님의 지혜를 들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오늘 1, 2, 3절에서 그렇게 표현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신명기 30장 11절에서부터 14절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이 아니요. 이것이 바다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도 아니라. 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신 그 말씀이 어디에 있는가? 아주 명백하게 드러나 있다는 거예요. 누구나 다 알 수 있게 완벽하게 다 공개되어 있다고 하는 겁니다. 어느 유명한 선생님에게 찾아가야만, 그 선생님에게서 겨우 그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정말 위대한 스승에게 찾아가야만 그 위대한 스승으로부터 겨우 하나님의 오묘한 말씀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든지 그냥 보통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알 수 있고, 깨달을 수 있고 능히 행할 수 있게 아주 가까이 있는 말씀으로, 어려운 말씀이 아니라 아주 쉬운 말씀으로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다고 신명기 30장에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문제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의 문제는, 모르는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지혜가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사실 우리에게 지혜가 다 주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문제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우리들에게 분명히 알려주고, 분명하게 알게 해 주고, 쉽게 깨닫게 해 주셨는데, 그래서 누구나 다 알고 있는데,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그 말씀을 우리가 마음속에서부터 억압에 짓눌러 버리고 있다고 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는 말이 “나는 그 말씀 몰랐는데요. 나 그런 소리 못 들었는데요.” 마치 처음 듣는 것처럼,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것처럼, 그렇게 행동하고 있다고 하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죠.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이 복이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는 것이 화라고 하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무엇을 기뻐하시는지, 그리고 하나님께서 무엇을 싫어하시는지에 대해서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자꾸만 우리들의 마음을 짓눌러버려서 마치 하나님의 법을 모르는 양 그렇게 위선적으로 우리들의 마음을 짓눌러 버리고 있는 겁니다.

대표적인 예가 무엇이냐면, 바로 선악과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향해서 말씀해 주셨어요. 뭐라고 말씀해 주셨습니까?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가 있는데, 에덴동산에 있는 그 나무의 모든 실과들은 너희들이 다 먹을 수 있지만, 딱 하나, 다 못 먹게 하고 딱 하나만 먹으라고 한 것이 아니라, 다 먹어도 되고 아무거나 다 먹어도 되는데 딱 하나만 먹지 말라고 우리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선악 지식의 나무 선악 지식의 나무의 열매라고 하는 것, 그게 과연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아무튼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가 있는데 그 나무에서 열리는 그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마라 그랬어요. 이 말씀이 어렵습니까? 이해하지 못할 말입니까? 깨닫기 어려운 말이에요? 아기들도 알 수 있는 너무나도 평범한 말이에요. 그냥 먹지 마라 그랬으면 안 먹으면 돼요. 안 먹으면 돼.

그런데 사탄이 하와를 유혹합니다. 하나님께서 정말로 이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고 하더냐? 그러면서 꼬시기 시작합니다. 네가 만일 이것을 먹는다고 한다면, 네가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다.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다라고 유혹할 때, 이 하와가 그 사탄의 말에 속아 넘어가요. 몰라서 넘어간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 몰라서 넘어간 것이 아니라, 마치 하나님의 말씀을 한 번도 듣지 못한 것인 양, 전혀 하나님의 말씀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것인 양, 그냥 먹고 잘못된 길로 빠져가는 것이죠.

우리의 문제가 어디에 있는가? 지혜의 말씀을 모른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 알고 있어요. 다 알고 있어요. 왜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들의 양심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새겨 놓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경을 읽지 않는 사람들에게조차도, 성경에 대해서 전혀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에게조차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법을 모든 사람들의 양심 가운데 새겨 놓았기 때문에, 그래서 자기가 잘못하면 아 이것이 잘못이구나 이것이 나쁜 짓이구나 하는 것을 분명하게 깨닫고, 그래서 마음에 두려운 마음이 드는 거예요. 벌벌 떨 수밖에 없는 그런 마음이 드는 겁니다. 그런 양심을 하나님께서 주셨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억압해버리면서, 그러면서 죄악을 저지르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말씀은 우리를 향해서 권고하기를, 그 지혜의 말씀, 어디서든지 늘 우리를 향해서 우리의 마음의 문을 노크하고 있는 그 지혜의 말씀이 있는데, 그 지혜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 지혜의 말씀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라, 이 세상에 그 어느 것보다도 지혜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하게 여기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0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은을 받지 말고 나의 훈계를 받으며 정금보다 지식을 얻으라”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은을 받지 말고, 나의 훈계를 받으라. 정금보다 지식을 얻어라라고 하는 잠언 1장 10절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수사법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히브리 평행법”이라고 하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림을 보시면 알겠지만 히브리 병행법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면, 두 가지로 표현하고 있지만 사실 한 가지 사상을 전달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은보다는 훈계를, 금보다는 지식을”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은금보다 훈계 지식을 취하라라고 하는 한 가지 내용을 전하는 겁니다. 은을 취하느니 차라리 훈계를 취하고, 금을 취하느니 차라리 지식을 취하라고 하는 두 가지 제한 방법을 제안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말을 반복해서 이야기하는 것이죠. 너희가 은금을 취하는 것보다 훈계 지식을 취하는 것이 훨씬 더 좋다라고 말하는 이런 히브리 평행법적 표현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깨달아야 될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과장법적 대조”라고 하는 표현 방식입니다. 여기서 그림에서 보면 알겠지만, 은금을 취하지 말고, 그리고 훈계나 지식을 취하라고 하는 말이 무엇이냐 하면, 그러니까 은금을 절대로 가지지 말라고 하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과장법적 대조라고 하는 표현법이 무엇이냐면, 정말 중요한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비교하기 위해서, 그냥 “금은보다는 훈계와 지식을 취하라” 이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하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금을 취하느니 차라리 지식을! 은을 취하느니 차라리 훈계를! 이라고 하는 말로 표현하고 있지만, 그러나 사실은 그러니까 금은이 절대 필요한 것이 아니고, 그냥 그것은 갖다 버려라 그런 의미의 말씀은 아닙니다. 물론 우리가 어떤 상황 가운데서는 지혜를 얻기 위해서 은금을 버려야만 하는 결단도 필요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정작 이 말은, 우리가, 그러니까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이 세상의 물질적인 것은 다 버려야만 한다 그런 의미의 말씀은 아닌 것이죠.

그러면 우리가 은금보다도 지혜를 얻어라, 명철를 얻어라, 훈계를 얻어라, 지식을 얻어라,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데, 지금 우리가 잠언서의 말씀을 살펴보고 있는데, 도대체 지혜라고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지혜가 무엇이죠?

지금까지 우리가 잠언서를 1장에서부터 7장까지 살펴봤습니다마는, 우리가 쭉 살펴보면서, 지혜가 무엇이라고 이야기했죠? 기억이 하나도 안 나십니까? 지혜가 뭐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다” 그랬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하는 말이 무슨 말이죠? 무서워하는 게 그게 지혜다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8장 13절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느니라.” 그러니까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에 대해서, 또 다른 정의를 해주고 있는데, 그게 뭐냐 하면, “악을 미워하는 것이 지혜”라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근데 사실 이 악을 미워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죠?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무서워하는 것이 무엇이냐면, 그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달리 표현하면,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잠언서를 보면서,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될 것이 있다고 한다면, 지혜는 무슨 기발한 아이디어, 기발한 꾀, 정말 신박한 그런 생각, 이런 것이 지혜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혜라고 하는 말을 들을 때에는, 그리고 우리가 잠언서를 공부할 때는, 우리가 잠언서를 공부하면서 여러분들의 마음 가운데 어떤 생각으로 잠언서를 공부하겠다고 하는 그런 생각을 하셨습니까? 잠언서를 한다니까 아마 흥분하셨을 거예요. 잠언서를 다룬다고 좋다 하면서 기뻐했을 텐데, 그때 우리가 잠언서 지혜를 다룬다고 했을 때, 우리의 마음 가운데 어떤 기대감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이 드냐면, 우리가 잠언을 잘 배우면, 우리가 이 세상에 어려운 난제들이 있을 때, 그것을 아주 지혜롭게, 아주 슬기롭게, 아주 기발하게,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아주 정말 대단한 그런 지혜가 있지 않을까라고 하는 그런 기대감을 가지고, 아마 잠언 강의한다고 하니까, 그런 기대들을 많이 품었을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마치 솔로몬의 지혜 같은 것을 얻을 수 있겠다고 생각을 했을지 모르겠습니다. 솔로몬의 지혜가 무엇이죠? 어떤 두 여인이 와서 솔로몬에게 재판을 요청하는 겁니다. 두 아기가 있었는데 한 아기는 죽었고 한 아기가 살았는데, 그 아기가 서로 이 두 여인이 자기 아기라고 우기는 겁니다. 당시에는 dna 검사도 할 수 없었던 그런 시절이었고, 뿐만 아니라 너무나도 아기는 다 똑같으니까, 생김새로 판단하기도 어려운 그런 상태에서, 어떻게 진짜 엄마를 찾아줄 수 있을까? 그때 솔로몬은 아주 놀라운 지혜를 가지고서 문제를 해결하죠. 그 아기를 둘로 짜개서 반반씩 주라고 했을 때, 진짜 엄마는 포기해 버리는 겁니다. 내가 안 가져도 되니까 주라고, 진짜 엄마의 사랑을 보는 그 솔로몬이 그 여인의 진짜 엄마라고 판결해 주어서, 그래서 그 솔로몬이 정말 뛰어난 정말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하는 것을 칭송을 듣게 되었는데, 우리가 잠언서를 공부할 때, 우리가 잠언서를 공부하겠다고 했을 때, 여러분들이 가지는 그 기대감이 무엇이냐면, 나도 잠언서를 좀 잘 공부해가지고 나도 정말 어려운 문제들 정말 복잡하게 꼬여 있는 문제들이 있을 때, 그것을 솔로몬처럼 명쾌하게 아주 신박하게 정말 모든 사람들이 감탄할 정도로 정말 뛰어난 지혜를 가지고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그런 지혜의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성경 말씀을 잘 배우면, 그런 놀라운 신비한 능력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라고 하는 그런 기대감으로 아마 이 잠언서의 강의를 기대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잠언서에서 말하고 있는 지혜를 지금 계속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데, 지금까지 그런 아주 신박한 지혜가 나왔습니까? 안 나왔습니까? 별로 신박한 지혜가 안 나와요. 1장에서부터 지금 7장까지 살폈고, 지금 8장까지 오고 있는데, “아, 정말 기발한 생각이구나! 정말 높은 지혜구나!”라고 말할 만한 내용이 이 잠언서 지금 우리가 8장까지 오는 과정 가운데 단 한 절도 나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지혜가 뭐냐? 하나님을 무서워하는 게 지혜라는 거예요. 그리고 오늘 8장 13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면, 악을 미워하는 게 지혜라는 거예요. 지혜가 정말 소수의 아주 뛰어난 몇몇 사람들이 겨우 얻을 수 있는 그게 지혜가 아니라, 모두가 다 가질 수 있는 지혜, 무슨 지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게 지혜고, 악을 미워하는 게, 그런데 그게 진짜 지혜예요. 지혜가 무엇인가? 정직하게 행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진실하게 말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겸손하게 행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기대하는 지혜는 다른 사람들을 속이고 그래서 다른 사람의 것을 어떻게 하면 탈취하고,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들 것인가? 어떻게 들키지 않고 잘 속여서 내가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를 지혜라고 생각을 해요. 마치 오징어 게임 속에서 상대방의 구슬을 빼앗기 위해서, 그 상대방을 위하는 척, 그를 아끼는 척하면서 그 구슬을 담은 가방 속 구슬 주머니 속에 자갈을 집어넣어서 주고, 그것을 네다바이, 바꿔치기해서 그 사람 상대방의 구슬을 빼앗아 버리고, 그래서 내가 승리했다고 말하는 게, “아 내가 그 내가 구슬을 다 뺏길 수 있는 그 순간에 이런 지혜를 써서 내가 이겼다!”가 지혜인 줄 알아요. 줄다리기를 하는데 내가 지금 힘이 약하지만, 우리가 꾀를 써서, 지는 척 풀어줬다가 다시 당겨서 상대방을 쓰러뜨리는 , 그래서 내가 승리하는 게 지혜일 거라고 생각을 해요.

그렇지만 오늘 잠언에서 말하고 있는 지혜는 뭐냐면, 꾀가 지혜가 아니고, 어떤 우리가 상대방을 제압하고 눌러서 그래서 우리가 성공하는 게 지혜가 아니라, 손해가 나더라도 정직하게 행하는 게 지혜다! 진실하게 말하는 것이 지혜이고, 겸손한 것이 지혜이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 가운데 순종하는 것이 지혜이고, 하나님이 두려운 줄 알고 그래서 속이지 않고 악을 미워하는 그것이, 그것이 지혜인 것이고, 지혜롭지 못한 것 어리석은 것이 무엇입니까? 어리석은 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는 것이 어리석은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과는 반대로 음녀에게로 빠지는 것이 어리석은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과는 반대로 욕심을 부리는 것이 어리석은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과는 반대로 포악하게 행동하는 것이 어리석은 것이고, 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건 다 어리석은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 지혜다라고 하는 사실을 발견해야 합니다.

어떻게 우리를 우리는 지혜를 얻어야 합니까? 우리가 지혜를 찾아야 합니다. 잠언서 8장 17절 말씀에 보면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선한 길로 가는 것을 우리가 간절히 구해야 합니다. 주님 선한 길로 가고 싶습니다. 그 간절한 마음으로 그 간절함을 가지고 나아갈 때, 지혜가 있는 거예요. 정직한 길로 가고 싶습니다. 순종의 길로 가고 싶습니다. 겸손한 길로 가고 싶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길로 가고 싶습니다. 그렇게 결단하며 그 사모하며 나아갈 때, 그 삶이 지혜로운 삶이 되는 것이죠.

만일 우리가 지혜를 추구하게 되면 어떤 결과가 있을 것인가? 18절 말씀부터 21절 말씀 가운데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부귀가 내게 있고 장구한 재물과 공의도 그러하니라. 내 열매는 금이나 정금보다 나으며 내 소득은 순은보다 나으니라. 나는 정의로운 길로 행하며 공의로운 길 가운데로 다니나니, 이는 나를 사랑하는 자가 재물을 얻어서 그 곳간에 채우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지혜롭게 행하면 결과적으로 어떤 결과가 나타날 것인가? 부귀가 따르고, 영화가 따르고, 복된 삶이 될 거라고 표현하고 있는데요. 왜 이렇게 표현하고 있을까요?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이유는 그렇게 안 될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실제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면, 부귀영화를 누리기보다는 오히려 고난을 당하게 될 가능성들도 많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하다 보면 손해 보는 일들도 생길 수가 있는 그런 상황들을 우리가 만날 수 있기 때문에, 오늘 이 말씀을 우리들에게 들려주는 겁니다. 우리 지금 당장은 당장은 그렇게 손해 보는 것처럼 나타날 수도 있어요.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는 것이 완전히 손해 보고 망하는 길처럼 생각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정말 망하느냐? 그게 아니라는 거예요. 악을 행하는 자가 성공하는 것처럼 보여요. 그런데 그게 정말 성공하는 것이냐 아니라는 거예요.

지금 당장에는, 지금 이 세상에서는, 악한 자가 성공하는 것 같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자가 망하는 것 같고, 악한 꾀를 부리는 자가, 그리고 내가 마음대로 하고 싶은 자가, 그런 사람들이 정말 잘 나가는 것 같지만, 그래서 우리가 늘 미혹을 당하는 겁니다. 우리가 주님의 길로 가는 것은 어리석은 길이고, 이것은 힘들고 고난의 길이기 때문에 좁은 길이어서 찾는 이가 적은, 그러나 넓은 문 넓은 길에는 성공하는 것 같고 잘 되는 것 같으니까, 지혜가 없는 그 길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따라가게 되는 거예요. 괜찮아 보이고, 성공하는 것 같고, 모든 것들이 다 괜찮아 보여요. 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이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은 “그게 아니다”라고 말씀해 주시고, 지금 당장 성공하는 것처럼 보여도, 이 어리석은 자더러, 만일 하나님께서 오늘 밤에 내 목숨을 부르시면 네가 준비한 그 모든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는 것이 주님의 말씀이고,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주시고, “수고했다. 잘하였도다. 충성된 종아” 칭찬하실 것이고, 결국에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지금 당장 또는 때때로 마치 하나님의 손에 이끌려 가는 그 길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가는 것처럼 보인다고 할지라도, 사실은 그 길이 쉴 만한 물가로 그리고 우리들에게 양식을 주시는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는 길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어야 되고, 마지막 날에 우리 주님께서 원수의 목적에서 상을 베풀어 주시는 그 엄청난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게 지혜입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늘 넘어집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따라 살기보다는 지혜를 추구하며 살기보다는, 지혜가 아닌 것을 따라가다가, 마치 미끼를 문 물고기처럼 패망의 길로 걸어갈 때가 많습니다. 우리 모두가 다 그렇게 쉽게 넘어지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넘어지고 실수하고 잘못했던 바로 그 죄를 위하여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의 죄와 허물을 다 지시고 십자가를 져주셨기에 우리의 죄를 용서받는 것이고, 또한 앞으로 우리의 믿음의 길을 가는 동안에 주님 함께하여 주옵소서. 주님께서 가신 그 길 십자가의 그 길을 따라서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기를 원합니다. 담대하게 믿음의 고백을 하면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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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수장으로 가는 소 (잠 7:1-27)

불을 품으면 (잠 6:20-35) +++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잠 8:1-21)

잠언서 7장의 말씀을 읽었는데요. 우리가 읽으면서 깨닫게 되셨겠지만, 이 말씀은 음행을 경고하는 말씀입니다. 음행의 죄를 짓지 말라고 권고하는 말씀이 오늘 잠언서 7장 말씀에 쭉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잠언서를 살펴보는 가운데, 이 잠언서에서 다루는 여러 주제들이 있는데, 그 여러 주제들 가운데서 참 많이 등장하는 주제가 무엇이냐 하면 바로 이 음행에 관한 교훈입니다. 지금까지 벌써 우리가 1장에서부터 쭉 살펴오는 가운데 음행을 경고하는 그런 메시지를 여러 번 살펴본 바가 있는데, 오늘 읽게 된 잠언서 7장에서도 다시 한번 음행의 길로 가는 것에 대한 경고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잠언서에서 음행에 대한 경고의 말씀을 반복하고 또 반복하고 또 반복하고 있는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가 망각의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자꾸만 잊어버립니다. 한 번 말하면, 그 말을 하기만 하면, 그것을 항상 기억하고 그 말씀대로 따라 순종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그 들었던 말을 잊어버립니다. 정작 유혹의 순간이 다가오면, 언제 내가 그런 영적인 교훈을 들었는가 잊어버릴 정도로 모든 영적인 교훈을 다 잊어버리고, 그리고 죄악의 길로 달려가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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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우리 인간은 망각의 존재이기 때문에 결국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반복해서 말해줘야 됩니다. 또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해 줘야 되는 것입니다. 교육이라고 하는 것은 반복하는 것입니다. 한 번 정답이 무엇인가를 알려주면, 그러면 정답을 알려줬으니까 그 정답을 잘 알고 있겠지라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아무리 정답을 알려준다고 하더라도 아무리 옳은 씀을 가르쳐준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은 금방 잊어버리고, 망각해 버리고, 정말 중요한 바로 그 순간에 하나도 생각이 나지 않아서, 그래서 결국은 죄악의 길로 가기가 쉬운 것이 우리 인생의 모습입니다.

따라서 교육은 어떻게 하는 것이 교육인가? 새로운 것을 자꾸만 알려주는 것이 교육이 아니라, 이미 들었던 말씀, 이미 알고 있는 말씀, 이미 여러 번 반복해서 들었던 그 말씀을 또 듣고 또 듣고 또 반복하고 또 반복해서 완전히 숙달될 때까지 귀에 딱정이가 지도록 여러 번 들어서, 그것을 완전하게 숙지할 정도로, 그렇게 반복해서 교육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죠.

제가 군대에 갔더니, 군대에서 훈련을 하는데, 이 군대의 훈련이라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무한 반복의 훈련입니다. 제가 훈련소에서 총검술을 배우고, 또 여러 가지 제식 훈련을 배우고, 여러 가지 군대의 여러 가지 교육들을 받게 되는데, 조교가 앞에서 시범을 보여줍니다. “조교 앞으로.” 그래서 조교가 나와서 어떻게 해야 되는지에 대해서 제식 훈련에 모범을 보이고, 시범을 보입니다. 총을 분해하고, 조립하고, 또 청소하는 그 과정을 보여줍니다. 내무반을 어떻게 정돈하고, 어떻게 정리해야 될 것인가를 시범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그 조교가 그렇게 시범을 보여준 다음에, 우리 훈련생들을 향해서 그대로 하라고 하면 그대로 할까요? 못 할까요? 못 해요! 조금 전에 바로 조교가 완벽하게 시범을 보여주었는데, 그 시범을 보여줄 때는 아 저렇게 하는 것이구나라고 생각을 했어요. 한데 막상 내가 해보려고 하면 안 되는 겁니다. 총을 분해하고 청소하고 기름칠하고, 그리고 다시 조립해야 되는데, 어떻게 조립해야 될지를 모르겠고, 어떻게 분해해야 될지 모르는 겁니다 그래서 훈련을 또 하고 또 하고 반복하고 반복해서, 그래서 여러 번 반복하게 되면 그것이 익숙해져서 나중에는 아주 능숙하게 그 모든 일들을 잘해 나갈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육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교육이라고 하는 것은 한 번 이야기하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한 번 했던 그 이야기를 또 이야기해 주고, 또다시 반복하고 또다시 반복해서 완전히 숙지하고 내 것이 될 수 있도록 반복하는 것이 교육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제가 군에서 훈련받을 때 영천의 3사관학교에서 훈련을 받았습니다. 우리 3사관 학교에서는 의사들도 군의관들도 훈련을 받았고, 그리고 법무관들도 훈련을 받았고, 또 군종 장교들도 훈련을 받았는데, 우리 군종 훈육 대에는 목사님들 그리고 신부님들과 법사님들이 함께 내무반 안에서 생활을 하면서 훈련을 받는, 아주 특이한 훈련대가 우리 군종 훈육대였습니다. 그런데 그 훈육을 받는 가운데 우리 목사님들은 대부분 다 군대를 갔다 오지 아니한, 그래서 전혀 군대를 경험해보지 못한, 이제 막 입소한 훈련병들이었지만 그러나 신부님들이나 법사님들 중에는 이미 군대를 한 번 다녀온 예비역인데 다시 입대를 해서 장교 훈련을 받는 그런 분들이 몇 명 있었습니다. 법사님들 중에 몇 명이 있었고, 신부님들은 전부 다 예비역 병장 출신들인데, 다시 군대로 들어와 장교 훈련을 받는 그런 분들이었습니다. 조교가 나와서 여러 가지 교육을 시킵니다. 훈련을 시킬 때 우리 목사님들은 조교가 어떻게 가르쳐주는가를 주시하면서 그것을 어떻게 하면 제대로 잘 따라 할 수 있을까 정말 정신을 바짝 차리고 긴장을 해가면서 그것을 잘 따라 하기 위해서 온갖 정신을 기울이면서 그 교육을 잘 들으려고 애썼습니다. 하지만 신부님들은 교육을 제대로 안 듣는 겁니다. 조교가 앞에서 뭐라고 하면 “아, 거참, 좀 슬슬합시다” 그러면서, “그렇게 빡세게 하지 맙시다” 그러면서 이 신부님들은 예비역 병장을 이미 다 하신 분들이기 때문에, 그 조교들을 아주 깔보면서 “그렇게 좀 너무 빡세게 하지 맙시다” 하면서, 그렇게 하면서 훈련에 협조를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빙빙 놀기만 하는 것 같았는데, 그런데 우리는 아무리 접어도 침낭이 비틀비틀비틀하고, 제대로 안 잡히는 겁니다. 총기 수리를 하는데 저는 이것을 뺄까 저것을 뺄까 어떻게 해야 되는지 몰라서 당황스러워하고 있는데, 우리 신부님들은 이미 예비역 병장 출신들이기 때문에 그냥 슬슬 놀고 있다가 가만히 있다가 쑥쑥쑥 빼가지고 싹 해가지고 쫙 몇 분 만에 끝내버리는 거예요. 어떻게 이렇게 잘하는가? 병으로 있을 때 무한 반복하면서 얻어터지면서 배웠던, 그때의 그 교육의 효과가 이미 지금 몇 년이 지난 후지만 여전히 몸에 붙어 있어서, 교육을 잘 받았기 때문에, 그것을 잘할 수가 있었던 것을 보았습니다.

따라서 교육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렇게 하면 됩니다” 하고, 한 번 말해버리는 것이 아니라, 했던 이야기 또 하고, 또 들려주고 또 들려주고, 반복하고 반복해야 되는 거에요.

특별히 이 음행의 문제에 대해서, 성경에서 또 이야기하고, 잠언서에서 또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하고 있는 이유는 우리가 아무리 들어도 또 넘어지기 쉬운, 우리가 너무나도 쉽게 넘어질 수 있는 그런 잘못이기 때문에, 다시 한번 이야기하면서, 절대로 이런 음행의 길로 가지 말라고, 또 반복하고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설교를 할 때 거의 반복을 하지 않은 채, 지금까지 설교를 해 왔습니다. 예수비전교회에 부임한 이래로 제가 매월 며칟날 무슨 본문으로 설교를 했는지, 다 기록을 해 가면서, 예전에 했던 본문이 아닌 본문만을 골라가면서 그래서 설교를 해 오고 있는데요. 지금까지 그러면서 같은 본분으로 두 번 반복해서 설교한 경우가 몇 번 되지 않습니다. 대부분 다 새로운 본문으로 내용으로 설교를 하고 있지만, 그러나 그 내용은, 전달해야 되는 그 내용은 반복해야 될 것들은 또 반복하고, 또 반복하는 겁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제 설교를 들으면서 “예전에 했던 말씀, 또 하시는구나” “예전에 저 이야기했었는데, 또 하시는구나”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있을 것 같은데요. 그것은 필요한 것이에요. 옛날에 한 번 들려줬으면, 이제는 더 이상 안 들어도 되는 것이 아니라, 또 들어야 되는, 또 한 번 듣고, 또 들었고, 또 들어야 되는, 사실 복음의 메시지는 매 주일마다 “영생의 말씀, 또 들려주시오. 또 들려주시오”라고 하는 그 찬송가의 가사처럼,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들을 또 듣고 또 듣고 해서, 이것이 나에게 완전히 숙지될 수 있도록 반복해야 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잠언서 7장 3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내 손가락에 매며 이것을 내 마음판에 새겨라.” 이것은 두 가지 명령이 아닙니다. “손가락에 매라 그리고 내 마음판에 새겨라”라고 하는 두 가지 명령이 아니라, 이것은 히브리 평행법식 그런 표현으로서, 하나의 명령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데요. 손가락에 매는 것으로 충분한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마음판의 새기라는 겁니다. 언제 어디서든지 생각이 날 수 있도록, 하나님의 말씀이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또 생각이 나고 또 생각이 날 수 있도록, 우리들의 마음판에 새길 정도로 계속해서 반복하고 또 반복해서, 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생각하고, 이러한 상황이 되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음행의 죄에서부터 벗어날 것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6절에서부터 23절의 말씀은 음행의 길로 가게 되면, 어떻게 망하게 되고, 어떻게 그 음행의 길로 빠져들게 되는가에 대한 하나의 예를 들고 있습니다. 어떤 어리석은 젊은이가 유혹을 당하여, 그래서 음행의 길로 가는 그 과정을 6절에서부터 23절까지 묘사하고 있는데요. 먼저 우리가 살펴보고 싶은 것이 있다고 한다면, 이 음녀가 이 어리석은 사람을 유혹할 때 언제 유혹하고, 어디서 유혹하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과연 이 사람은 언제 이런 유혹이 있습니까? 9절 말씀에 보면, 잠언서 7장 9절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저물 때, 황혼 때, 깊은 밤, 흑암 중이라.” 지금 음녀가 한 남자를 유혹하는데 그 유혹하는 시간이 언제라고 하는 겁니까? 저물 때, 황혼 때, 깊은 밤, 흑암 중에 유혹한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낮에는 유혹 안 하는 것이죠? 밤에만 유혹하는 건가요? 낮에만 유혹하는 건가요? 밤에만 유혹한다는 얘기인가요? 이 말씀을 보면, 마치 저녁때에만, 어두울 때에만, 깊은 밤에만 유혹할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기가 쉬운데, 사실은 그것이 아니라, 매 순간순간마다 유혹이 있게 되는 겁니다.

12절의 말씀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12절 말씀에 보면, “어떤 때에는 거리 어떤 때에는 광장, 또 모퉁이마다 서서 사람을 기다리는 자라”라고 표현하고 있는데요. 음녀가 어떤 한 사람을 유혹할 때, 그 유혹하는 장소가 어디라고 표현하고 있습니까? 어떤 거리 광장 모퉁이에서 유혹한다. 서서 유혹한다라고 표현하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이 말씀은 이런 장소를 피하라는 얘기입니까? 무슨 얘기입니까? 이 장소는 피하고 다른 곳에 가 있어라라고 하는 말입니까? 무슨 뜻입니까?

그런 말이 아니라, 유혹은 어디서든지 나타나는 것입니다. 유혹은 언제 나타나는가? 언제든지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종종 오해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오해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무엇이냐 하면, 어떤 시간은 어떤 시간보다 더 거룩하고, 어떤 시간은 어떤 시간보다 더 위험하다고 하는 그런 생각입니다. 또한 우리가 착각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어떤 장소는 어떤 장소보다 더 거룩할 것이라고 하는 착각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가 거룩해지기 위해서는, 그 더러운 장소 유혹의 장소를 떠나서, 그런 유혹이 없는 장소, 거룩한 장소 거룩한 조용한 장소로 들어가야, 그래야 우리가 영적으로 보호받을 수 있을 거라고 하는 그런 생각을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한편으로는 말이면서 또 한편으로 생각해 본다고 하면 잘못된 생각입니다. 어떤 점에서는 옳은 생각입니까? 우리가 가능하면 유혹이 없는 자리를 향해서 나아가야 한다고 하는 점에 있어서는 맞는 말입니다. 우리가 음행의 유혹이 있는 득실거리는 장소로 들어갈 것이 아니라, 그런 유혹이 득실거리는 장소를 가능하면 피해야 된다고 하는 점에서, 유혹의 길에서부터 벗어나 좀 더 안전한 곳으로 피해야 한다고 하는 점에 있어서는 맞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어떤 점에서는 잘못되었는가? 그렇게 장소를 피하기만 하면, 그러면 안전한 지대가 있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생각은 철저하게 잘못된 생각입니다. 이 세상에 안전한 곳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유혹이 없는 곳, 더 이상 나를 죄짓지 않게 유혹하지 않는 정말 멋진 장소, 정말 완벽한 장소가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없어요! 정말 우리가 유혹을 받지 않을 그런 시간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없어요! 일 년 삼백육십오일, 일주일에 7일 내내, 하루 24시간 내내, 그 어떤 시간도 유혹에서부터 자유롭고, 유혹에서부터 아무런 터치를 받지 않는, 그런 안전한 시간대라고 하는 것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장소도 마찬가지인데요. 이 세상에서 정말 우리가 죄의 유혹, 음행의 유혹을 받지 않을 수 있는, 정말 안전하고도 보호받을 수 있는, 그런 완전한 무균실과 같은 음압병실과 같은 무균실과 같은 그런 곳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런 곳이라는 곳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식 해법이 통하지 않는 겁니다. 불교식 해법은 무엇입니까? 속세에서 그렇게 살면 더러워질 수밖에 없으니까, 속세를 떠나버려라. 가정을 떠나버려라. 이 세상에서의 삶을 포기해버리고, 산속에 들어가서 거기서 참선하고, 거기서 묵상하면서, 거기서 돌을 닦으면서 있으라고 하는 것이 불교식 해법입니다. 산속에 들어가라. 이곳에 있지 말고 출가해라. 출가라고 하는 것은 거룩한 결단이다. 출가를 해야 한다라고 하는 것이 불교식 해법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출가해서 저 산속에 절간 안에 들어가게 되면, 더 이상 아무런 유혹이 없느냐? 그렇지 않아요. 거기도 유혹이 있어요. 거기도, 거기도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게 만드는 그런 요소들이 도처에 깔려 있는 거예요.

천주교식 해법이 통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천주교식 해법 가운데는 수도원에 들어가라는 겁니다. 독신으로 살면서, 정절을 지켜가면서 수녀로 살고, 수사로 살면서, 저 수도원에서 물질을 다 내어버리고, 그곳에서 오로지 기도를 하고 묵상을 하고, 노동을 하면서 거룩한 그런 훈련을 하게 되면 된다고 하는 것이 천주교식 해법인데, 그런 천주교식 해법이 통하느냐면 통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그 수도원에 들어가면 거기서 완전하게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는 무균실이 수도원이 아니라, 거기서도 엄청난 유혹들이 넘쳐나는 겁니다. 중세 시대 때 타락의 현장이 어디였는가? 바로 수도원이 타락의 현장이었어요. 그곳에서 고아들이 만들어졌고, 그곳에서 고아원이 생기게 되었던 것인데요. 다 겉으로는 거룩한 것 같았지만, 사실은 그렇지 못한 그런 신부들이 거기에서 나타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교회라고 하는 곳도 어떠한 곳인가? 교회라고 하는 곳도 안전지대는 아닙니다. 안타깝게도 교회라고 하는 곳에서도 수많은 일들이 벌어집니다. 교회는 드러나 있기 때문에, 더 많이 발각이 되고 더 많이 알려져 있는데요. 사실은 교회뿐만이 아니라, 모든 곳에서 똑같은 유혹들이 일어나는 겁니다. 성당에서든 법당에서든, 그리고 군대에서든, 회사에서든, 민주적인 정당에서든, 그리고 보수적인 정당에서든, 학교에서든 고아원에서든 병원에서든 그 어느 곳에서든 안전지대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곳이 다 죄악의 유혹이 유혹에 노출되어 있는 전염의 가능성이 있는 곳이 바로 이 세상 모든 곳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도 그런 유혹들이 벌어질 수밖에 없는데요. 목사와 장로라고 하는 직분을 가지고 있으면, 그러한 유혹이 전혀 접근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역시 목사와 장로들에게서도 나타날 수 있는 현상인 것이고, 심지어 선교 여행을 가는 과정 속에서도 나타날 수 있는 현상이며, 구제를 하고 이웃을 돕고 심방을 하는 중에서도 나타날 수 있는 현상이고, 이 세상의 그 어느 곳도 안전한 곳이 하나도 없다고 하는 것이 성경적인 가르침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에게는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이 세상에 그 어느 곳에도 안전지대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이 필요한 거예요. 만일 이 세상에 안전지대가 있으면, 그 안에 들어가 버리면 간단하죠. 그런데 안전지대가 없어요. 모든 곳이 다 지뢰밭이에요. 거기서 다 감염이 되는 겁니다. 마치 코로나 바이러스가 언제 어디서든 감염이 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살아가는 그 모든 삶의 현장 모두가 다 영적인 지뢰밭이고, 영적인 바이러스 감염 지역이기 때문에, 우리는 거기서 완벽하게 피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우리를 죄악 가운데서 건져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아니면, 우리에게는 아무런 소망이 없는 것이고,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우리는 살아갈 수 없다고 하는 사실을 믿음으로 고백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아무튼 온 세상이 지뢰밭이고 유혹의 가능성들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매 순간순간마다 이런 음행의 길로 가지 않기 위해서 부단한 노력을 해야 되고 조심을 해야 합니다.

우리를 유혹하는 사탄의 방법은 무엇입니까? 사탄이 우리를 유혹할 때 그 유혹의 방법은 우리가 음행의 길로 가게 되었을 경우에 결과적으로 나타나게 될 처참한 결과에 대해서 말해주지 않습니다. 그것을 보지 않게 만듭니다. 그리고 우리들에게 무엇을 보여주냐면, 그저 좋은 면만을 보여주는 겁니다. 나와 함께 사랑을 나누자. 쾌락을 즐기자. 외로움을 달래 보자라고 하는 그 쾌락의 몇만을 보여주고, 좋을 것 같은 면만을 보여줌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이끌어 드리는 것이죠. 마치. 고기를 낚을 때 낚시 바늘에 미끼를 끼는데 그 낚시 바늘은 미끼가 속에 숨겨져 있는, 물고기가 그 미끼를 보면서 저걸 보면 먹으면 배부를 것 같고 저걸 먹고 싶도록 그렇게 냄새도 나고 맛있어 보이고 보암직도 하고 너무나도 탐스러운 먹이가 내 눈앞에 보이는데, 그 먹이 속에는 낚시 바늘이 들어 있어서 내가 저걸 무는 그 순간에, 내가 잡아당겨져서 나는 육지로 끌려가 죽임을 당하게 되고 회쳐질 수밖에 없다고 하는 사실은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판단할 때는 항상 객관적인 판단을 해야 됩니다. 장단점을 다 파악해야 되는 겁니다. 이것의 장점은 무엇이고, 좋은 점은 무엇이고, 단점이 무엇인가를 제대로 알고 장단점을 알 때 우리가 정상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겠는데, 유혹은 어떻게 되는가? 단점에 대해서는 숨겨져 버리는 것이죠. 그래서 판단을 흐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오늘 잠언서에서는 무슨 이야기를 합니까? 그런데 우리를 향해서 음행의 길로 가게 되었을 경우에 어떤 처참한 결과가 나타나는가에 대해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잠언서 7장 22절의 말씀에 “젊은이가 곧 그를 따랐으니 소가 도수장으로 가는 것 같고 미련한 자가 벌을 받으려고 쇠사슬에 메이러 가는 것과 같도다.” 도살장에 끌려가면 어떻게 되죠? 죽는 겁니다. 유혹을 따라 음행의 길로 가면 죽을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죠.

23절에서는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필경은 화살이 그 간을 뚫게 되리라. 새가 빨리 그물로 들어가되 그의 생명을 잃어버릴 줄을 알지 못함과 같으니라”라고 음행의 길로 가는 것은 우리가 행복해지는 길이 결코 아니며, 그것은 참된 사랑도 아니고, 그것은 기쁨도 아니고 결국 우리를 파멸로 이끄는 길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고, 철저하게 조심해야 되고, 부단히 그 음행의 길로 빠지지 않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유혹이 없지 않습니다.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정신을 차려야 되고, 주님의 도우심을 간구해야 합니다. 그것이 복된 길입니다.

성경에서는 음란의 죄를 육체적인 죄이기 때문에 금하기도 하지만, 영적인 음란을 이야기할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만을 섬겨야 하는데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우상을 섬기는 것은 영적으로 음행을 저지르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고, 또 그러한 영적인 음행의 결과가 똑같이 비참하다고 하는 것도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닌 것들을 따라가는 것은 영적인 음행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데요. 우리가 영적인 음행이든 육체적인 음행이든 이 모든 것들이 우리를 파멸로 이끄는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주님 앞에 매 순간순간마다 우리 자신이 잘 설 수 있도록 기도해야 될 것이고, 또 우리 자녀들이 이런 잘못된 길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고, 또 가르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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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을 품으면 (잠 6:20-35)

어떻게 하면 음행의 죄를 피할 수 있을까?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 (잠 6:12-19) +++ 도수장으로 가는 소 (잠 7:1-27)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음행에 대해서 경고하는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잠언서를 살펴보고 있는 가운데 있는데, 특별히 음행에 대해서 경고하는 말씀이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는 것을 느끼실 것입니다. 잠언서의 여러 교훈들 교훈해야 될 여러 주제들이 많이 있는데, 그 가운데서도 특별하게 음행에 대해서 또 말하고 또 반복하고 또 강조해서 교훈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만큼 이 음행의 죄라고 하는 것은 언제 누구에게나 발생할 수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쉽게 빠지는 죄에 해당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는 이 문제에 있어서 아무런 걱정이 없다” 할 사람이 없는 겁니다. 여건이 주어지게 되면, 조금만 상황이 바뀌게 되면, 이러한 죄로 빠질 수 있는 가능성들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 때문에, 특별히 우리가 조심하고 또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될 문제가 바로 이 음행의 문제이기 때문에, 이 잠언서의 말씀 가운데서는 특별히 이 말씀을 계속해서 반복해서 가르쳐주고 있다고 하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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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은 말씀 20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내 아들아, 내 아비의 명령을 지키며, 내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고” 제가 예전에 설명을 드린 것처럼, 이 표현법은 히브리 평행법이라고 하는 방식으로 표현되어 있는 표현입니다. 히브리 평행법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같은 내용 말을 반복하는 방식의 표현법을 히브리 평행법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데요. 20절의 말씀 가운데서 보면, 아버지의 명령을 지킬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어머니의 법에 대해서는 떠나지 말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버지의 법이 있고, 어머니의 법이 있는데, 아버지의 법은 지키면 되는 것이고, 어머니의 법은 떠나지 말아야 되는 것인가라고 생각하시면 큰 오해입니다. 이것은 히브리 평행법적인 표현으로서 아버지의 명령, 어머니의 법을 지키며 떠나지 말라. 다시 말하자면, 우리 부모님께서 우리들을 향해서 들려주신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법을 떠나지 말고 꼭 지켜야 된다고 하는 그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아버지의 법을 지키며, 어머니의 법을 떠나지 말라라고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21절 말씀에서는 그 아버지의 법, 어머니의 법을 철저하게 지켜야 된다고 하는 말씀을 21절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항상 네 마음에 새기며 네 목에 메라” 이것도 역시 히브리 평행법적 방법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는데요. 네 마음에 새기고 네 목에 매라고 하는 것은 두 가지 다른 종류의 행동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똑같은 의미를 다른 방식으로, 이중적으로 표현하는 그런 표현법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내용이 좀 특이합니다. 내 마음에 새겨라. 마음의 새겨라고 하는 겁니다. 마치 돌에다가 이름을 새기듯이, 나무에다가 이름을 새기듯이, 그리고 어떤 곳에 하나의 이름을 새기듯이, 아버지의 명령, 어머니의 법을 마음속에 새겨서 지워지지 않도록 새겨서, 그것이 끝까지 남아 있도록 하라고 명령하고 있고 뿐만 아니라, 목에 걸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쉽게 잃어버리는 것들은 어떻게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노력을 하죠? 목걸이를 합니다. 요즘 목걸이를 하는데, 무엇을 목걸이로 하죠? 입마개를 마스크를 목걸이를 겁니다. 왜냐하면, 이 마스크를 벗었다 썼다 벗었다 썼다 해야 되는데, 벗어놓으면 어디로 도망갔는지 찾을 수가 없으니까, 이 벗어놓은 마스크를 다시 한 번한번 그냥 쉽게 찾아서 쓸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목걸이를 만들어서 목걸이에 걸면, 언제든지 쓰고 싶을 때, 다시 쓸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목걸이라고 하는 것은 잊어버리지 않고 다시 한번, 언제든지 생각날 때마다 사용할 수 있게 만드는 방법이 목걸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안경도 우리가 목걸이를 달아가지고 보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는 늘 안경을 쓰기 때문에 목걸이를 사용하지 않지만, 제 아내는 평상시에는 안경을 쓰지 않다가, 그런데 글을 읽을 때만 안경을 쓰는 스타일이기 때문에 안경을 어디다 뒀는지 늘 찾습니다. 저는 늘 쓰고 있으니까, 찾을 일이 없지만, 제 아내는 안경을 늘 벗고 있다가 책을 읽을 때 전화기를 볼 때, 그때 안경을 써야 되기 때문에, 그때 안경을 찾게 되는데 안경이 도대체 어디다 놔뒀는지 화장대 위에다 놔뒀는지, 화장실에 놔뒀는지, 냉장고 속에 나뒀는지 모르니까, 편리하게 하기 위해서, 요즘은 목걸이를 달아가지고 목걸이에다 차고 다니면서 필요할 때 갖다 쓰는 것이죠.

그런 것을 설명하면서, 오늘 말씀은 무슨 말씀을 하냐면, 아버지의 명령, 어머니의 법,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판에 새기고, 또 우리들의 목걸이에 걸어두라라고 이렇게 교훈해주고 있습니다. 연인들이 먼 곳에 여행을 가게 되면 그곳에 있는 나무나 바위에다가 이름을 새깁니다. 철수 영희 그리고 하트 모양을 그리면 너와 나의 사랑이 영원히 변치 않았으면 좋겠다고 하는 의미에서 바위에다가 그 이름을 새기고, 사랑을 새기면서, 영원히 변치 말 것을 그렇게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도 절대 잊어버리지 말라고 하는 그런 의미에서 마음판의 세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명령, 어머니의 법을 마음판에 새기고 그리고 목에 걸라고 하는데, 이것을 어떻게 우리가 목에 걸 수가 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의 말씀인데, 그것을 어떻게 우리들의 마음속에 새길 수 있고, 어떻게 우리들의 목에 걸 수가 있겠습니까? 예를 들어서 안경이나 마스크 같은 거 경우야, 우리가 보이는 물질이기 때문에, 그냥 목걸이를 만들어서 걸면 되는 것이고, 그렇게 하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어떻게 우리들의 목에 걸 수가 있겠습니까?

유대인들은 그 이 말씀을 이해할 때, 아 하나님의 말씀을 적어서 그 적은 말씀을 머리 이마에 달고 다니고 혹은 그렇게 적은 그 말씀을 옷 소매에 달고 다니면,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라고 생각을 했는데요. 그런데 그렇게 달고 다닌다고 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냥 어디다 잘 적어놔라. 어디다 적어서 가지고 다녀라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이 아니라, 우리가 그 말씀을 항상 마음속에 기억하고 언제 어디서든지 이 말씀을 생각하면서 이 말씀에 따라서 행동하라고 하는 그 말씀이 오늘 본문의 말씀의 의미인 줄로 믿습니다.

요셉이라고 하는 젊은 청년이 보디발의 집에서 노예로서 살아가고 있는 가운데,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미혹하는 그런 장면이 나옵니다. 그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하고 있을 때 요셉은 어떻게 했습니까? 자신의 이마에다가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해 놓고, 그리고 옷에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 기록해 놓았기 때문에 거부한 것이 아니라, 그 마음 가운데 하나님을 늘 생각하고 있는 것이죠. 하나님이 나를 바라보고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늘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든지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해내고,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것을 생각해서 범죄의 길로 가지 아니하고, 그 음란한 여인에게서부터 도망쳐 나올 수 있는 용기와 능력을 얻을 수 있었던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그리고 목에 걸라고 하는 얘기는 우리가 써갖고 다니라고 하는 얘기가 아니에요. 써가지고 어디다 붙여가지고 다니라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깊이 늘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라고 하는 그런 말씀인 줄로 믿습니다.

22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것이 네가 다닐 때에 너를 인도하며, 네가 잘 때에 너를 보호하며, 네가 깰 때에 너와 더불어 말하리니”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목에 걸게 됐을 때, 유익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역시 히브리 평행법적인 표현으로, 세 번에 걸쳐서 나누어서 이야기합니다. 네가 다닐 때에, 너를 인도할 것이다. 네가 잘 때, 너를 보호해 줄 것이다. 네가 깰 때에, 너와 더불어 말할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있는데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새기게 되면 그 유익이 무엇인가? 그것은 그 말씀이 우리를 어떻게 해 준다고요? 보호해 준다라고 오늘 22절 가운데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보호해 준다고 하는 말을 생각하게 되면 우리가 무엇을 떠올릴 수 있을까요? 우리 한국 사람들은 부적을 아마 떠올릴 수 있을 겁니다. 부적이라고 하는 게 뭐죠? 부적이라고 하는 것은 무당이 써준 어떤 글씨를 가지고 다닌다고 한다면, 그 부적이 나를 재앙으로부터 보호해 준다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겁니다. 뿐만 아니라 그 부적을 내가 가지고 다니게 되면, 내가 이루고 싶은 것을 이루게 해 준다라고 생각하면서 다니는 거죠. 요즘 보니까 뭐 부적 같은 걸 손에 써가지고 다닌 사람이 있어서 난리가 나던데요. 우리 한국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는 부적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을 내가 써가지고 가지고 다니면, 그것이 나를 보호해 줄 거다. 이것을 내가 들고 다니면, 하나님께서 나를 보호해 주실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을 가리켜서, 부적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하지만 오늘 이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너희가 만일 그 하나님의 말씀을, 아버지의 명령, 어머니의 법을 마음속에 새기게 되면, 그것이 너를 보호해 준다고 하는 이야기는 그런 부적과 같은 의미로 우리를 보호해 준다고 하는 그런 의미가 결코 아닙니다.

부적과 이 말씀과의 큰 차이점이 있다고 하면 무엇일까요? 그것은 부적은 귀신의 힘이 나를 보호해 준다고 하는 그런 개념입니다. 하지만 잠언에서 말씀하고 있는 그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보호해 준다고 하는 의미는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들고 다니기 때문에 그것이 나를 보호해 준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기 때문에, 그렇게 의의 길로 걸어가 하게 될 때, 우리가 해를 당하지 않는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부적과 하나님의 말씀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는데요. 부적이라고 하는 것은 도덕적이지가 못한 거예요. 악한 사람도 부적을 들고 다니면, 보호를 받는다는 그런 개념이 이 세상 부적의 개념 가운데 있는 겁니다. 하지만 오늘 이 잠언서의 말씀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속에 새기고 하나님의 말씀을 목에 건다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그것을 부적처럼 내가 이용할 수 있다고 하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내가 그 말씀대로 도덕적으로 행할 때,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나아갈 때, 그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결국은 복된 길이고, 결국은 그것이 우리가 해를 입지 않는 그런 보호받는 길이라고 하는, 사실 도덕적인 차원을 성경에서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 말씀을 기억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속에 깊이 생각하고 새기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갈 때, 하나님의 은혜가 넘친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순종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4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오. 훈계와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또 세 번에 걸쳐서 반복적으로 표현하고 있는데요. 하나님의 법칙은 무엇인가? 우리로 하여금 생명의 길을 걷게 하는 것이고, 우리가 그 빛에 걸어가게 만드는 것이고, 안전하게 걷게 만드는 것이고, 우리로 하여금 악한 여인에게 빠지지 않게 하는 것이라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 전체적으로 보면 무슨 교훈을 하고 있냐면, 악한 여인에게 빠지지 말라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음행의 죄를 저지르지 말라고 교훈하고 있는 것이고요. 성적인 범죄를 결코 범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을 해주고 계십니다. 성이라고 하는 하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요, 선물인데, 그것이 정당한 울타리 안에서 사용될 때는 축복이며, 하나님의 선물이 되겠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정하신 울타리 밖에서 행사하게 된다고 한다면, 그것이 축복이 아니라 저주거리가 되는 것이고, 결국 우리가 악한 여인에게, 음행한 길로 따라가게 된다고 한다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가?

26절에서는 뭐라고 이야기하냐면, 너에게 딱 떡 한 조각만 남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음행의 결과로 어떤 결과가 나타날 것인가? 완전히 가산을 탕진하게 되고 폐가 망신당하게 될 거다라고 말씀해 주고 계실 뿐만 아니라, 음행을 저지르면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그 음란한 여인이 나의 생명을 사냥할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음행의 죄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이 아니라, 처음에는 쾌락을 위해서 혹은 여러 가지 이유로 그 음행의 죄에 빠지게 되겠지만, 그 결과가 정말 비참한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우리 자신을 잘 절제하고, 이러한 잘못된 길로 가지 않기 위해서 부단한 노력을 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오늘 27절과 28절의 말씀을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사람이 불을 품에 품고서야, 어찌 그의 옷이 타지 아니하겠으며, 사람이 숯불을 밟고서야, 어찌 그의 발이 데이지 아니하겠느냐?‘ 여러분 불을 품으면 어떻게 되죠? 불을 품으면 다 타버립니다. 혹시 화재를 일으켜 본 분 계십니까? 불을 내 본 적 계십니까? 불이 나는 것을 보신 적 있습니까? 저는 불이 나는 걸, 불이 나는 현장에서 있어봤습니다. 제가 몇 살 때였냐면, 아마 세 살, 세 살 정도 됐을 때, 어린아이 때였던 것 같아요. 형이랑 동네 형들이랑 어른들이 없을 때, 우리 형들이랑 같이 동네 꼬마 아이들이 모여 앉아서, 저 고산읍교회 바로 옆에 있는 집이었는데요. 그 초가집으로 된 그 집에서, 타이어, 이렇게 고무 타이어, 이렇게 줄이 있는 그것을 가지고 형들이 거기다 불을 붙이더라고, 3살짜리 정도 됐으니까, 그냥 꼬마 아이로서 신기해서 다 쳐다보고 있는데 형들이 그 고무 타이어에다가 딱 붙이니까, 그 불똥이 툭툭 툭툭 툭툭 떨어지면서, 아, 신기해요. 신기한데, 신기한 건, 단 몇 초. 조금 있다가, 조금 있다가, 그 불똥들이 튀기 시작하는데, 화장실에 지푸라기로 된 문에 옮겨 붙기 시작해서, 불이 나기 시작하더니, 그 집 전체를 불을 완전히 태워버리는 그 엄청난 화재 현장 가운데, 제가 꼬마 아이였을 때 있었습니다. 그때의 충격이 굉장히 컸었는데요.

그 불이 있으니까, 집 전체를 완전히 살라버리는 그런 어마어마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죠. 잠언서에서 말하기를,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불을 품게 되면 어떻게 된다? 다 타버린다. 숯불을 밟고 서 있으면 어떻게 된다? 발이 데인다. 그러니까 어떻게 하라는 이야기입니까? 불을 절대로 품으면 안 된다. 숯불 위에 서 있으면, 안 된다.

우리 모두는 다 연약한 사람들입니다. 어느 누구도 이런 음행의 죄로부터 면역된 사람이 없습니다. 심지어 목회자라든지, 교회 지도자들도, 조금만 틈이 보이게 된다고 한다면 결국 무너질 수 있는 너무나도 쉬운 것이 이런 음행의 문제이기 때문에, 모두가 다 조심해야 되는 건데요. 조심하는 방법은 무엇이겠습니까? 조심하는 방법 불을 안 만지는 거예요. 불을 만지면 타니까, 숯불 위에 서면, 데이니까, 숯불 위에 올라가지 않아야 되고, 불을 품지 않아야 문제가 생기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결혼 관계 속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이성과 둘만의 시간을 갖는다든지, 또한 깊은 상담을 주고받는다든지 하는 일들은 우리가 피하여야만 할 것입니다. 우리가 의도적으로 잘못된 길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처음에는 조그마한 문을 여는 것이죠. 남편과 아내나 사이에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 있을 때, 그 남편으로부터 받지 못한 그런 관심, 아내로부터 얻지 못한 그 사랑, 그것이 너무나도 힘들고 괴로워서, 주변에 이성들에게 내 가정의 문제를 이야기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점점 그 불이 내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것을 느끼게 될 겁니다. 그런 관계 속에 들어가지 않아야 돼요. 결코 결혼의 관계를 떠난 사람과 이성 간의 그런 관계를 조금이라도 틈을 보이기 시작하면, 쉽게 모든 사람들이 넘어갈 수밖에 없는 죄가 음행의 죄이기 때문에, 우리 모두가 다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만 합니다.

특별히 남편과 아내 사이에 속상한 일이 있다고 한다면, 다른 곳에서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마음을 알아줄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을 찾아다닐 것이 아니라, 당사자들끼리 해결을 해야 됩니다. 말하기만 하면 늘 싸우고, 말해서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해서,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고, 사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이 있는데, 그렇게 지낼 것이 아니라, 사실은 여러분의 남편은 여러분을 사랑하고 있고, 여러분의 아내는 여러분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사랑하고 있는데 그 사랑하는 것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서툴고, 그리고 자신의 사랑을 표현해서 전달하는 그런 방법들이 서툴러서, 그래서 오히려 역효과를 내기도 하고, 잘못된 길로 갈 때가 너무나도 많지만, 그래서 마음의 문을 닫아버릴 때가 너무나도 많거든요. 그럴 때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고, 다른 곳에 가서 다른 이성과 함께 이야기하고, 그 문제를 고민할 것이 아니라, 결혼의 테두리 안에서 이야기하면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부단한 노력을 해야 되는 거예요. 내가 기분이 나쁘면, 왜 기분이 나쁜지, 내가 마음에 상처를 입었으면, 왜 상처를 받았는지, 어떻게 나에게 말을 해줬으면 좋겠는지, 서로 이야기하면서 같이 남편과 아내가 서로 마음의 문을 조금씩 조금씩 열면서, 깊은 사랑의 대화를 해 나가기 시작하면, 지금까지 닫혔던 그 모든 것들이 사르르 녹기 시작하면서, 관계가 회복되는 일들이 있게 될 것인데, 그러한 일을 시도하지 않고, 결혼의 울타리 바깥에 나가서, 어떤 해결을 보려고 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결과만을 가져옵니다. 불속에 들어가는 것이고, 다 태워먹게 되는 일들이 발생한다고 하는 것을 기억하면서, 분명하게 조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음행의 문제 외에도, 또 하나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요. 이건 도둑질의 문제입니다. 30절에서부터 31절의 말씀을 보면, 만일 누군가가 훔치게 된다고 한다면, 힘들어서 훔쳤겠지만,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7배나 갚아줘야 되고, 패가망신하게 될 거라고 하는 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음행의 이야기를 하다가 왜 갑자기 도둑질의 이야기를 할까요? 두 개가 서로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한 마음에서부터 똑같은 일들이 나타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상을 섬기는 일입니다. 돈을 우상으로 섬기게 되면, 정당한 내 바운더리 속에 있는 정당한 내 울타리 속에 있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울타리 밖에 있는 다른 사람이 그것을 가져와서 만족하려고 하는 그런 마음이 재물을 우상으로 섬길 때 나타나는 현상이고, 그게 도둑질입니다.

그런데 이성에 관한 문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쾌락을 우상으로 섬기게 되면, 어떤 성적인 만족을 우상으로 섬기게 되고, 그리고 어떤 자기 만족을 우상으로 섬기게 되면,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 울타리 안에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울타리 밖으로 나가서, 그것을 취하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도둑질이나 음행이나 사실은 같은 성격의 것이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넘어지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주님 앞에 기도하고 엎드려야 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서, 하나님 저희들의 마음을 고쳐주시옵소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로 가게 해 주옵소서. 그리고 넘어졌다고 한다면 빨리 회복할 수 있도록 회개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훌륭한 분들이 음행의 죄에 걸려 넘어지는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성경에서만 보더라도 다윗이라고 하는 그런 엄청난 인물도 음행의 죄에 넘어져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다윗이 넘어질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들은 얼마나 다 더 잘 넘어지겠습니까? 쉽게 넘어질 수 있는 것이죠. 그렇게 넘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발견해야 할 것이 있다고 한다면, 아, 그렇구나! 훌륭한 사람도 넘어질 수 있구나라고 하는 것을 보면서 그러기에 우리 자신에게는 소망이 없다고 하는 것을 보면서,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가야 됩니다.

우리가 완벽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완벽하지 못하지만 그러나 완벽하지 못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 주님께서 오셨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주님 앞에 나아가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하나님의 법이 새겨져서, 하나님의 말씀이 늘 마음속에 기억이 나서, 우리가 발걸음을 걸을 때, 혹시라도 불 속에 들어가지 않는지, 잘못된 길로 가지 않는지, 우리 자신들을 잘 살펴보는 믿음의 결단들이 있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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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 (잠 6:12-19)

게으름의 죄 (잠 6:6-11) +++ 불을 품으면 (잠 6:20-35)

잠언서 6장 12절부터 14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불량하고 악한 자는 구부러진 말을 하고 다니며, 눈짓을 하며 발로 뜻을 보이며, 손가락질하며, 그의 마음에 패역을 품으며, 항상 악을 꾀하며 다툼을 일으키는 자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 악한 자는, 누가 악한 자인가? 구부러진 말을 하는 사람입니다. 구부러진 말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말을 가리켜서 구부러진 말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왜곡하는 것이죠. 진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참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거짓을 말하는 것이고, 잘못된 것을 퍼뜨리고 다니면서,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고, 그리고 사람들 사이를 이간하고, 그리고 악을 꾀하면서 사람들 사이에서 다툼이 일어나도록 만드는 그런 사람이 바로 악한 자요. 불량한 자라고 하겠습니다.

그렇게 불량한 자, 악한 자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15절 말씀에 보면 아주 간단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재앙이 갑자기 내려, 당장에 멸망하여, 살릴 길이 없으리라.” 무슨 이야기입니까? 악을 행하는 자, 불량한 자, 구부러진 말을 하는 자, 즉 왜곡하는 말을 하면서 다툼을 일으키고, 여러 가지 악을 도모하는 그런 사람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그에게 재앙이 닥치게 될 것이고, 결국은 파멸의 길로 들어가게 될 텐데, 그러한 사람을 살릴 수 있는 길이 없을 것이라고 오늘 성경 말씀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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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우리가 실제로 살아가면서는 정반대의 현상을 볼 때가 많이 있습니다. 착하고 선한 사람들은 고통을 당하며 힘들고 어렵게 사는 반면에, 포악하고 악을 행하고 술수를 부리는 자들은 오히려 잘 나가고 아무 문제없이 행복하게 살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비칠 때가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느끼지 않으십니까? 그런 느낌을 받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성도들은 분명하게 기억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결국에 모든 것을 심판하셔서 바로 잡으실 것이라고 하는 그 점을 우리가 분명하게 믿고 우리가 확신할 수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고 하는 것,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선한 자에게는 상을 주시고 악을 행하는 자는 재앙을 내리실 거라고 하는 그 사실을 분명하게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인데요.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고, 공의대로 판단하실 것이라고 하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악을 행할 수가 없는 것이죠. 그 마음의 양심에,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두드리시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나쁜 짓을 하다가는, 내가 이렇게 악한 일을 하다가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하는 두려움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더 이상 악한 일을 하지 아니하고 중단하게 될 것입니다.

지혜가 무엇인가? 지혜는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그것이 바로 지혜라고 했는데, 하나님께서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알고 그 하나님께서 죄와 악을 범하는 자들을 심판하실 거라고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안다고 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악을 행하는 길을 멈출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 수많은 사람들이 악을 행합니다. 나쁜 짓을 하고, 또 잘못된 말을 하고, 거짓을 말하면서 사람들을 대적하고 악을 꾀하면서 이간질하고 다툼을 일으키는 그런 일들을 많이 하게 되는데,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렇게 하는 이유는 그들의 마음 가운데 하나님이 없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안 계셔! 그런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아! 왜? 내가 볼 수 없기 때문에.’ 내가 눈으로 하나님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알 수가 없기 때문에 보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고, 그리고 내가 죄를 지어도 결코 하나님께서 나를 처벌하지 않을 거라고 하는 그러한 생각 때문에, 악을 행하게 되는 것이죠.

안타깝게도 우리 크리스찬들도 입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고, 우리가 매 주일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도 하고,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실제 행동에 있어서는 마치 하나님이 없다고 확신하는 것처럼 행동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확신하게 된다면, 우리들의 삶이 완전히 달라질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들의 삶이 정말 힘들어지는 것이죠. 우리가 힘들고 어려운 일들을 만났을 때, 과도하게 절망하거나, 고통스러운 일을 만나게 되었을 때 과도하게 슬퍼하거나, 모든 일들이 다 막혀버렸을 때 정말 절망하게 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내가 하나님을 확실하게 믿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실 뿐만 아니라,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하신 그 하나님께서 지금도 나를 사랑하고 계시고, 지금도 나와 함께하신다고 하는 그 사실을 믿지 못한다고 한다면, 우리는 조그마한 어려움을 만난다고 할지라도 좌절하고 쓰러질 수밖에 없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살아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고 한다면, 원수가 있으면 그 원수를 용서하지 못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 원수를 갚아주실 것이니, 그 원수를 갚는 것이 하나님에게 있다고 하는 그 사실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내가 용서하지 못하고 내 손으로 원수를 갚아버리려고 하는 그런 모습이 나오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죠.

뿐만 아니라 우리들이 악을 행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이 보지 않는다고 해서 은밀하게 계속해서 죄를 짓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안 계시고, 하나님이 내가 이렇게 은밀한 가운데서 죄를 한다고 한다면 나쁜 짓을 한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결코 보지 않을 거라고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런 나쁜 짓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분명히 안다고 한다면, 그러면 우리는 더 이상 악한 일을 할 수가 없는 것이죠. 하나님이 두렵기 때문에, 악한 일을 할 수가 없는 겁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알면, 내 손으로 원수를 갚지 않아도 되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살아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알게 된다고 하면, 그러면 더 이상 우리는 괴로워하거나 좌절하거나 절망하거나 과도하게 슬퍼할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손길을 바라보며, 일어설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라고 하는 종교 개혁을 일으킨 분이 계신데요. 이 마틴 루터라고 하는 사람이 종교 개혁의 운동을 하는데, 카톨릭의 박해가 너무나도 심해서, 그래서 그 카톨릭의 박해를 견디기가 너무나도 힘들고 어려운 겁니다. 정말 참된 교회를 만들어보고자 정말 하나님의 말씀에 바로 된 교회를 만들어보고자 정말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데, 그런데 카톨릭의 세력이 너무나도 큰 거예요. 그 교황을 비롯한 추기경이나 그런 종교 권력들이 너무나도 강하게 버티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 종교 권력과 결탁하고 있는 세속 정부의 그 강력한 그 권세 밑에서, 너무나도 힘들고 두려워서 종교 개혁을 일으키기가 너무 힘들어서 좌절하고 슬퍼하고 있을 때, 그의 아내가 하루는 그 마틴 루터를 일깨우기 위해서, 이런 퍼포먼스를 했다고 합니다. 하루는 상복을 입고 앉아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마틴 루터가 깜짝 놀라서 묻습니다. ‘여보, 누가 죽었어?’ 왜 상복을 입고 앉아 있느냐고 그렇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랬더니 그 마틴 루터의 아내가 대답을 했습니다. ‘돌아가셨습니다.’ 누가 돌아가셨습니까? ‘하나님이 돌아가셨습니다. 하나님이 죽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마틴 루터가 깜짝 놀라서, ‘아니, 이게 무슨 소리오? 하나님이 돌아가시다니? 그게 무슨 소리요?’ 하고 이야기를 하니까, 이 마틴 루터의 아내가 마틴 루터를 향해서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이 죽었다고 생각하니까, 당신이 그렇게 절망하는 것이지. 왜, 그렇게 절망하는 겁니까? 하나님이 살아계신다고 한다면, 무엇이 두려우며, 무엇이 겁나며, 무엇이 슬픈 일이 있겠느냐?’고 해서 그래서 이 마틴 루타가 그때 큰 충격을 받고, 다시 종교개혁을 끝까지 밀어붙였다고 하는 그런 일화가 있습니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우리가 만일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고 하는 사실을 믿는다고 한다면, 우리들의 행동이 완전히 바뀌게 될 것입니다. 불의한 자, 불량한 자, 악한 자들이 왜곡된 말을 하며, 또한 여러 가지 잘못을 끝까지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면,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믿지 못하고, 그러한 사실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계속해서 악을 행하게 되는데요. 안타깝게도 우리 크리스천들도 하나님을 예배하고, 매번 주님을 찬양하고 기도하고 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우리들의 삶 속에서 마치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행동할 때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불신자들은 우리들의 말을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행동을 보는 것이죠. 우리들의 말로서는 예수님 믿으라고 말하고 하나님이 계시다고 이야기를 하는데, 크리스찬의 행동을 보니까, 마치 하나님이 안 계시다고 확신하고 행동하는 것처럼 행동하는 모습을 보여줄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고 말을 하는데, 행동으로는 하나님이 안 계시다고 외치면서 행동하는 사람들 때문에 전도가 어려운 것이죠. 만일 하나님이 계시다고 한다면 그렇게 악을 행하면서 뻔뻔할 수가 없는 거잖아요? 하나님이 계시다고 한다면 그렇게 잘못을 범하면서도, 그렇게 후안무치의 삶을 살 수가 없는 거잖아요? 그런데 크리스천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마치 하나님이 아무것도 보시지 않는 것인 양, 죄를 지으면서도 전혀 회개할 줄 모르고, 뻔뻔하게 악을 행하면서 사는 그런 모습들을 보여주게 될 때, 세상 사람들은 비웃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성도들이 서로 용서하지 못하고, 하나 되지 못하고, 마치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그렇게 서로 싸우는 그런 모습들을 보면서, 하나님이 안 계시다라고 하는 그런 확신을 갖게 되는 것인데, 오늘 저와 여러분들은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확실하게 믿는 가운데, 악한 길에서부터 떠나고 왜곡된 말을 하고 잘못된 일을 행하는 길에서부터 떠나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선하고 좋은 일들을 감당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6절부터 19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것, 곧 그의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여닐곱 가지니, 곧 교만한 눈과 거짓된 혀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과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과,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과,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과 및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니라.”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들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7가지를 열거하면서, 하나님께서 정말 미워하시는 것이 이러한 것들이라고 설명해 주고 있는데요. 첫 번째는 교만한 눈입니다. 교만한 눈.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이 바로 교만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베풀어주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교만이라고 하는 죄가 어쩌면 가장 큰 죄라고 할 수가 있겠는데요. 마치 하나님이 안 계신 것인 양, 교만하게 행동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가장 미워하시는 것이라고 성경은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살아가면서 내가 열심히 수고하고 애쓴 것에 대한 자부심을 갖거나 그리고 내가 수고하고 애쓴 것의 그 결과를 보면서 기쁨을 누리는 것 자체를 정죄하는 것은 아닙니다. 교만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을 넘어서서, 마치 그것이 내 힘과 능력으로 된 것인 양, 하나님을 염두에 두지 않고 오로지 나 자신이 뛰어나고 내 모든 수고와 내 모든 노력으로 다 된 것인 양 그렇게 마음을 품는 교만한 마음이 바로 교만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이러한 교만이 문제가 되는 것은, 자신이 그렇게 높은 성과를 이루고 많은 것들을 이루어내는 것에 대한 자부심이나 기쁨이 넘치는 것까지는 괜찮을지라도, 그것을 넘어서서 자신에 대한 교만한 마음으로 바뀌게 될 뿐만 아니라, 그리고 나와 같은 성과를 내지 못한 다른 사람들을 보면서 무시하고 경멸의 태도를 가지게 될 때가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다른 이웃들을 본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큰 것을 허락해 주셨다고 한다면, 그것이 왜 내게 그러한 것을 하나님께서 주셨겠습니까? 그것은 사명으로 주신 것이거든요. 하나님께서 내게 무엇인가 더 많은 것을 주시고 더 잘하는 것을 주시고, 하나님께서 내게 어떤 특별한 재능과 많은 것들을 내게 허락해 주셨다고 한다면, 그것은 내가 똑똑하고 내가 열심히 하고 내가 무엇인가를 잘해서 그렇게 얻었다기보다는, 물론 그렇게 해야 되겠지만,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내게 주어진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바로 그것들을 가지고 연약한 자들을 섬기고 도와주고 사랑하라고 하는 그런 사명으로 우리에게 주었다고 하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해 주셨는데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해 주셨다고 하는 그 이유와 목적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스라엘 민족으로 하여금 교만하라고 선택해 준 게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한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이스라엘 민족이 제사장 나라가 되어서 모든 열방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예배하는 민족이 되게 만들도록 자신들을 통해서 모든 온 세상 열방이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가 될 수 있도록 그 사명을 감당하라고 하나님께서 선민으로 선택해 주셨는데, 이스라엘 민족은 그것이 교만함이 되어서 다른 이방 민족에 대한 멸시와 차별로 행동했고, 감사의 마음보다는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비난과 멸시로 나아갔던 것이 바로 교만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데요.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수고하고 노력한 것에 대한 결과가 너무나도 좋아서 기쁨이 생기는 것 그건 자연스러운 것이죠. 그러한 내가 열심히 수고한 것에 대해서 그래서 좋은 결과를 얻게 된 것, 거기에 대한 자부심이 생기는 것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넘어서서 이것이 다른 사람들을 향한 경멸의 태도로 바뀌고, 나 자신에 대한 교만의 태도로 바뀌어 버리게 된 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바른 신앙의 태도가 아닐 겁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셨다고 하는 점도 기억해야 될 것인데요. 우리가 아무리 수고하고 애쓴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시지 않는다고 한다면 성을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될 뿐만 아니라, 성을 지키는 자의 수고가 다 헛될 수밖에 없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하는 겸손한 마음과 감사의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서야 하는 것인데, 교만한 눈으로 교만한 눈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더욱더 겸손하게 주님 앞에 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거짓된 혀를 주님께서 미워하신다고 했습니다. 거짓된 혀라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거짓말을 하는 것이죠. 거짓말을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거짓말을 하는 이유는 우리가 진실을 말하게 될 경우에 내게 손해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거짓을 말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거짓말을 하는 그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결국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물질이라든가 이 세상에서의 성공이라든가 이 모든 것들이 나의 우상이 되어 버렸기 때문에, 그러한 것들을 내가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그러한 것들을 내가 계속 지키기 위해서, 그러한 것들을 내가 얻기 위해서, 그래서 거짓말을 이야기하는 것이죠. 진실을 말하게 되면 손해가 생기기 때문에 거짓을 말해서라도 그 모든 것들을 지켜내려고 하는 그러한 탐욕의 마음에서부터 거짓말이 나오는 겁니다.

물론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러니까 우리가 적군에 잡혀가서 그래서 적군으로부터 취조를 당하는데, 그 순간에 우리 아군의 모든 정보를 다 상대방에게 다 말해야만 한다 그런 의미의 말씀은 아닙니다. 종종 그런 정도까지 정직해야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기는 합니다마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정상적인 상황 가운데서 우리가 거짓을 통해서 우리가 이익을 추구하고, 하나의 이득을 얻으려고 하는 그러한 모든 잘못된 말이 그것이 거짓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고,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이 거짓을 말하는 자를 미워하시며, 진짜 진실을 말하는 자를 사랑한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오늘 우리들의 말이 “예”면 “예”고, “아니면” “아니라”고 하는 그런 진실한 마음, 말들이 우리들의 말 가운데서 넘쳐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 맹세를 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있는데요. 그것은 맹세를 하는 경우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실은 진실을 말하기 위해서 맹세를 하는 것이 아니라 거짓 모면, 거짓을 추궁당하는 상황 가운데서 자신이 모면하기 위해서 맹세를 하는 경우가 많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들의 말은 진실을 말해야 된다고 하는 점을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세 번째로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을 주님께서 미워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것을 하나님께서 미워하신다고 하는데, 그렇다고 한다면 죄 있는 자의 피를 흘리는 것은 괜찮은 것일까요? 우리가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잠언서의 말씀이 그 당시의 문화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주어졌다고 하는 사실을 이해해야 하는 겁니다. 당시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어떤 법이 있냐면 복수의 법이라고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복수의 법. 라틴어로 lex talionis라고 하는 그런 법이 있었는데, 그 법은 만일 누군가 우리 친족을 죽인다고 한다면, 친족 중에서 그 살인자를 찾아내어 죽여도 괜찮다고 하는 그런 법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가족의 누군가를 죽인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끝까지 찾아가서 그 사람에게 원수를 갚는 것은 그 당시에 법으로 보장이 되어 있는 상황인 겁니다. 그러니까 죄 살인자를 찾아가서 그 살인자를 죽이는 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 시대에 이 말씀이 주어진 것인데요. 그런데 그렇게 죄 있는 사람들을 찾아가 피를 흘리는 것이 아니라 아무 죄가 없는 사람에게 찾아가서 피를 흘리는 것은 안 된다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오늘날에도 그런 방법을 그대로 하라는 얘기는 아니죠. 오늘날에는 살인자든 살인자가 아니든 우리의 손으로 원수를 사적인 복수를 하면 되지 않는 시대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이냐면, 이웃을 행해야 하는 것은 아무런 죄가 없는 이웃에게 상해를 가하고 해를 가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말씀해 주는 것이고, 오히려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되는가? 다른 사람들에게 상해를 입힐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비를 베풀고 배려를 하고 사람들에게 너그럽게 대하는 것이 우리 성도들의 가장 회복해야 될 그런 태도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특별히 우리 한국 사람들이 늘 실수하는 것이 무엇이냐하면, 갑질이라고 하는 실수를 많이 합니다. 갑질이라고 하는 실수를 언제 하죠? 내가 정당한 대접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될 경우에, 그리고 내가 어떤 권리가 있다고 생각될 경우에, 그 사람을 향해서 화를 내기도 하고 여러 가지 잘못, 폭력을 쓰기도 하고, 폭언을 하면서 갑질을 하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성도들은 절대 그래서는 안 됩니다. 믿습니까? 누군가 잘못하는 사람이 있으면, 관공서에서 나온 사람이든 아니면 시장에서 만난 사람이든, 어디 거래처에서 만난 사람이든, 내가 식사를 하는 가운데 식당 주인 주인이 나에게 뭐 잘못을 한 것이든, 뭐 잘못한 사람이 있으면, 화를 내면서 분노하고 이렇게 내 화를 막 내버리는 그런 일들을 하지 않으시기를 제발 부탁드립니다.

안타까운 것은 종종 우리 교회 교회에 찾아와서 요즘 코로나 상황이니까 코로나 상황이 돼서 코로나 확진을 방지 해보겠다고 공무원들이 나와서 교회를 점검하고 돌아가는 케이스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못마땅한 우리 교인들이 그렇게 나온 공무원들을 향해서 소리를 지르며, 삿대질을 하고 욕을 해대면서, 신앙의 자유를 지킨다고 그렇게 하면서 그렇게 하는 경우가 종종 있고, 전화를 걸어서 욕을 해대고 화를 내고 하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 그러한 모습을 보면서, ‘야, 저 사람은 신앙의 자유를 위해서 저렇게 열정을 가지고 있구나’ 하고 이렇게 통쾌하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절대 그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과 배려를 해야 돼요. 정말 연약한 사람 나보다 힘이 없는 사람에게도 배려해서 그들을 위하고 이해하고 따뜻한 사랑으로 대해줘야지, 우리가 갑질을 하고 소리를 지르고 악을 행하면서, 그래서 그래서 복음이 전파되는 것은 아닐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전에 제가 미국에 있을 때 우리 교회의 재정을 맡으신 어떤 분이 있었습니다. 연세가 좀 많이 드신 분인데 은행에 가서 우리가 매주 돈을 현금을 저축하고 저축하고 이렇게 예금하고 예금하고 하는 그 일을 계속하셨는데, 그러니까 은행에 은행으로 보면 우리가 큰 고객이겠습니까?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헌금을 많이 예치하는 것도 아니니까, 큰 고객도 아닌데 아무튼 예치하는 그런 손님은 왕이다라고 하는 생각 때문에, 뭔가 가서 좀 갑질을 하고 싶은 마음이 좀 있었던 것 같아요. 뭐 하나 서비스를 요청했습니다. 우리 한국식으로 하자면 돈, 돈을 묶는 띠를 좀 달라고 얘기를 한 겁니다. 근데 그 띠를, ‘이것은 우리가 제공하는 게 아닌데요’ 하면서 안 주는 거예요. 또 달라고 하니까, 겨우 몇 개 주니까, 기분이 나빠가지고, 그러면서 막 화를 내고 나와버린 거예요. 한국식으로 생각한 거죠. 미국에는 공짜가 없습니다. 다 돈 주고 사야 되는 건데, 그런데 한국식으로 생각해가지고 그래 가지고 화를 내면서 그렇게 온 뒤로 제가 은행에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어떤 교회 목사님 담임 목사님이시죠?’ 이런 일이 있었는데 이런 일들이 계속된다고 한다면 우리와 거래를 끊어주시기 바랍니다. 그 은행장으로부터 전화를 받았어요. 안타까운 일이었었는데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나라는 그런 식으로 반응 안 할 겁니다. 아마 우리나라는 ‘너 손님한테 왜 그렇게 친절하지 못하게 했냐?’ 하면서, 아마 직원이 우리나라는 혼날 것 같은데, 그 미국에서는 오히려 그 직원을 두둔하면서 그런 손님은 우리에게 필요 없다고 이야기하는 그 이야기를 들을 때 좀 창피하기도 했었고 했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어디서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가 좀 나타났으면 좋겠어요. 갑질의 향기가 나타나는 게 아니라 화내고 성질 부리고 욕하고 하는 그런 포악한 모습의 그런 모습들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사랑의 모습들이 연약한 자들을 안아주고 배려해주고 사랑해 주는 그런 모습들이 나타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네 번째 다섯 번째 말씀 보면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과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을 하나님께서는 싫어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선을 행하는 일에는 왜 그렇게 사람들이 미적미적거리는지 몰라요. 누가 이걸 좀 할 수 있겠습니까 하면 누가 좀 선한 일 좀 하게 할 수 있나요? 누가 좀 이 좋은 일에 참여할 수 있나요? 하면 왜 그렇게 미적미적거리는데, 악을 행하는 일에는 왜 그렇게 열정적인지 몰라요. 다른 사람들을 죽이고 파멸시키는 데에는 자기 돈 써가면서 열정적으로 나서서 정말 그 열정이 식어지지도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을 파멸시키고 끌어내리고 그 사람을 죽이는 일에는 열정을 다해가면서 열심히 하는데, 선한 일을 할 때에는 좀 일해달라고 하면 아무도 나서지 않는 그런 모습을 보일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들이 하는 일이 과연 어떤 일인가를 질문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일인가? 죽이는 일인가? 사람을 돕는 일인가? 사람을 해하는 일인가? 이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인가?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일인가? 질문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향한 악한 일이 아니라, 선한 일에 앞장서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또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언을 주님께서는 싫어하신다고 했는데, 재판에서 거짓 증언을 해서 무죄한 자를 죄로 만들거나, 악한 자를 아무런 죄가 없는 것으로 거짓된 증언을 하는 것을 싫어하는 것이고, 마지막으로 7번째,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싫어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일, 장점을 말하고, 그래서 서로 함께 할 수 있는 일에 도움이 돼야 되는데, 그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단점들을 이야기하면서, 그래서 분열을 일으키고 이간질을 시키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이웃들을 볼 때 우리 교우들을 바라볼 때 단점을 보지 마시고 칭찬할 점이 무엇인가를 보시고 그 칭찬할 점들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다 하나가 되고 한 마음을 가지고 믿음으로 한 공동체가 될 수 있도록 우리가 함께 일하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일까 하나님께서 미워하실 일일까를 질문, 과연 이것은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일인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인가? 질문하면서 우리들의 삶의 방향이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일에서부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로 바뀌어 나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나도 연약해서 그렇게 하기가 어려워요. 늘 넘어집니다. 늘 쓰러집니다. 그 누가 완벽하게 인생을 살아갈 수가 있겠습니까? 열심히 해보려고 하지만 또 쓰러지고 또 넘어지기 때문에,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죄인일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래서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 위에서 피 흘려주셨습니다. 넘어질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다시 한번 또 나가고 또 나가서, 하나님 실수했던 모든 죄악들 다시 한번 회계케 하시고 씻어내게 하시고,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삶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믿음의 길을 걸어갈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면서,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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