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려와 멸시 (잠 11:12-13)

의인은 환난에서 구원을 받는다 (잠 11:4-11) +++ 지략이 없으면 (잠 11:14-15)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우리들의 이웃들에 대해서 어떻게 대하는 것이 지혜로운 것인가 하는 것을 가르쳐주시는 말씀입니다. 지혜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의 태도가 완전히 다르다고 할 수 있을 것인데요. 어리석은 자는 다른 사람들을 멸시하고 비난하는 반면에, 지혜로운 자는 다른 사람들의 허물과 잘못을 보더라도 비난하거나 멸시하는 것이 아니라, 잠잠하며 또한 그것을 드러내고 까발리고 욕하는 것이 아니라, 덮어두며 숨겨주는 그런 자가 지혜로운 자요. 신실한 자라 성경은 가르쳐주고 있고요. 그렇지 않고 조금만 잘못이 있어도 그 잘못들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돌아다니며 잘못을 또 이야기하고, 또 비난하고 이야깃거리 삼고 가십거리로 삼는 그런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런 것은 어리석은 자라고 하는 사실을 오늘 본문의 말씀 가운데서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아주 간단한 말씀이니까, 본문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실 분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 모두는 사실 허물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그 어느 누구도 완벽한 사람이 없습니다. 다 허물이 많고 실수 투성이고, 뿐만 아니라 모순 투성이인 것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입으로는 거룩한 것을 말하고, 입으로는 정의를 말하지만, 실제 우리들의 삶은 이율배반적이고, 그리고 뒤로는 여러 가지 악하고 잘못된 일들을 많이 저지르는, 허물많은 그런 죄인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다 그렇게 연약한 자요 우리 모두가 다 그렇게 허물이 많은 자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갈 수 있는 자격이 되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고, 우리들의 죄와 허물을 지고 십자가를 지셨으며, 그 예수님의 은혜 때문에 우리가 용서함을 받게 되었고,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놀라운 특권을 얻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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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가 다 허물이 많은 사람들이고, 실수가 많은 사람들이고, 악한 일들을 많이 하는 사람들인데, 문제는 다른 사람들을 보면서는 그러한 허물들을 쉽게 알아채지만, 내 자신의 허물에 대해서는 별로 보지 못하면서, 그래서 다른 사람의 허물에 대해서만 분개하고, 다른 사람들의 허물은 너무나도 크게 보이고, 다른 사람의 실수는 너무나 심각한 실수인 것처럼 보면서, 정작 자기 자신의 허물이나 실수들에 대해서는 눈감아 버리는, 정말 이기적이고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보여줄 때가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을 향해서 이렇게 권면하여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7장 3절 말씀에 “어찌하여 형제의 눈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네 형제의 눈 속에 들어 있는 아주 작은 잘못, 우리 이웃에게 있는 너무나도 작은 실수, 허물들에 대해서는 아주 심각한 것처럼, 지구가 멸망할 것처럼, 그렇게 화를 내고 분노하면서, 그렇게 아주 심각하게 생각하는 반면에, 정작 내 자신에게 있는 들보와 같은 커다란 허물들, 너무나도 큰 악이 우리 자신에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보지 못한 채, 다른 사람들의 허물에 대해서만 집중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주님께서 지적해 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허물이 우리들의 눈에 들어오게 된다면, 어떠한 태도를 가져야 할 것인가? 내 사랑하는 남편이나 아내가, 우리의 부모님이나 우리들의 자녀들이, 우리 성도들의 모습 가운데 나타나는 허물과 실수들이, 그리고 우리가 직장에서 만나고 또 여러 사회 관계 속에서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의 잘못과 허물들을 바라보게 될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하고, 그러한 잘못된 모습에 대해서 우리는 어떠한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 오늘 잠언서의 말씀은 이렇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렇게 허물이 있는 사람을 바라보면서, 경멸하고 멸시하는 태도를 가지며, 그리고 그 잘못을 자꾸만 드러내고 말하고 다니고, 그 사람을 모욕 주려고 하는 그런 태도는 아주 어리석은 자의 태도라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볼 때 그렇게 할 것이 아니라, 잠잠해야 하는 것이고, 덮어두어야 하는 것이고, 그런 모습을 보여야, 그게 지혜로운 사람인 것이지, 그렇지 아니하고 비난하고 멸시하고, 그리고 떠들고 다니는 것은 어리석은 태도라고 우리를 향해서 가르쳐주고 있는 줄로 믿습니다. 믿으십니까? 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들에게 교훈이 되는 아주 중요한 교훈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잘못하는 모습을 본다면, 그러면 우리는 그 다른 사람들이 잘못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우리 자신을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잘못하는 모습, 다른 사람들이 악을 행하는 모습, 다른 사람들이 실수하는 모습을 보면, 그 사람이 그런 실수를 하고 잘못하고 있는 그 모습을 볼 때, 우리는 무엇을 보아야 하냐면, 그 사람이라고 하는 거울에 비친 나의 모습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죠. 우리 옆사람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무엇인가? 나의 영적인 거울입니다.

한번 옆사람을 한번 바라보세요. 거울처럼 보입니까? 거울처럼 안 보입니까? 거울이에요. 거울 한번 보세요. 내 얼굴이 보이나. 사람들을 바라볼 때, 우리는 거울로 봐야 하는 겁니다. 저 악한 사람들은 누군가? 바로 내 더러운 모습을 그냥 드러내주는, 나의 영적인 더러운 모습을 보여주는 영적인 거울이라고 하는 사실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죠. 수많은 허물과 단점들로 가득 차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게 될 때, 그 사람을 향해서 욕하고 비난하고 멸시하고 그 사람의 죄악을 떠들고 다닐 게 아니라, 내가, 나도 그러한 상황에 들어간다고 한다면, 나도 저 사람의 형편에 있을 수 있다고 한다면, 똑같은 실수와 똑같은 잘못과 악을 행할 수 있는 내 모습이 거기에 도사리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발견해야 되는 줄로 믿습니다. 아니, 더 더 심각한 모습이 우리에게 있다고 하는 것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죠.

따라서 다른 사람들이 실수를 하고 잘못을 하는 모습을 본다면, 우리들의 남편과 우리들의 아내와 우리 부모님과 자녀들이 그리고 우리 주변에 상사와 직원들이 우리가 관계하는 그 모든 사람들이 잘못하는 모습을 보면 분노하고 화를 낼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멸시할 것이 아니라, 그게 바로 내 모습이라고 하는 사실을 보면서, 측은한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이죠. 내게도 그러한 모습이 있지는 않은지 나도 그 사람과 똑같이 분노하는 모습이 없는지 나도 그 사람과 똑같이 실수하는 면이 없는지, 나도 그 사람과 똑같이 무책임한 면이 없는지, 나도 그 사람과 똑같이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모습이 내게는 없는지, 내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아, 내가 그런 모습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엎드려 회개하며 나아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하지만 어리석은 자는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볼 때 어떠한 모습을 보이냐면, 그런 사람을 비판하고 비난하고 멸시하는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어리석은 자는 왜 멸시합니까? 왜냐하면 그렇게 비난하고 비판하고 멸시하게 되면 멸시하는 그 순간, 그 사람을 욕하고 비난하는 그 순간, 나는 그런 죄에서부터 자유롭다고 스스로 자기 자신을 속이는 마취 효과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우리의 모습을 꿰뚫어보고 계셔요. “너도 똑같은 죄인이로구나” 하는 사실을 우리 주님께서 바라보고 계시기 때문에, 오늘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는 다시 한 번 경고하십니다. 마태복음 7장 1절 2절 말씀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옆 사람의 실수를 바라보게 될 때, 우리 이웃의 잘못을 바라보게 될 때, 비판하거나 비난하거나 멸시할 것이 아니라, 그 앞에서 잠잠해야 하는 것이고, 그리고 나의 죄악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고, 그 잘못한 사람을 보면서 숨겨주고 사랑으로 덮어주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경을 다른 곳을 살펴보면 다른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시편 15편 4절 말씀에는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데요. “그의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존대하며, 그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하지 아니하며”라고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시편 15편 4절의 말씀은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가 누구며, 주의 성산에 살 수 있는 자가 누구냐?”라고 하는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의 일부분으로 나온 구절이 바로 1편 15편 4절의 말씀인데요. 누가 여호와의 장막에 거할 수 있겠는가? 누가 하나님의 존전 앞에 나아갈 수 있겠는가라고 하는 그 자격을 이야기하면서, 의로운 사람, 경건한 사람, 이런 자격과 이런 조건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고 하는 그 항목 가운데 하나가 어떤 항목이 있냐면, “망령된 자를 멸시하는 자가 하나님 앞에 갈 수 있다”라고 시편 15편 4절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우리가 읽은 잠언서 11장의 말씀과 시편 15편의 말씀은 상반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잠언서의 말씀에서는 누가 지혜로운 자인가? 멸시하지 않는 자가 지혜로운 자요. 멸시하지 않는 자가 신실한 자라고 잠언서에서는 가르쳐주고 있는데, 시편에서는 말하기를 “누가 의로운 사람인가?” “누가 경건한 사람인가?” 망령된 자를 멸시해야, 그 사람이 의로운 사람이라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도대체 어느 장단에 맞추어 춤을 춰야 합니까? 시편을 썼던 다윗의 말에 장단을 맞추어야 됩니까? 잠언을 쓴 솔로몬의 말에 맞추어 춤을 추어야 됩니까? 누구 말을 따르는 것이 맞습니까? 어느 게 맞죠? 시편을 따라야 한다? 잠언을 따라야 한다? 다윗을 따라야 한다? 솔로몬을 따라야 된다? 애라, 모르겠다?

성경이 모순되는 표현을 하고 있을 때에는, 왜 이런 말씀을 하고 계시는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잠언에서 멸시하지 말라고 가르쳐주실 때는 어떤 의미에서 멸시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인지, 그리고 시편에서는 망령된 자를 멸시해야 한다고 말했을 때는 도대체 어떤 의미에서 멸시해야 된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살펴보아야 하는 것이죠. 묵상해 보아야 하는 것이죠.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하는 것이죠.

시편 15편에서 의로운 자 경건한 자 하나님의 성산에 올라갈 수 있는 자는 망령된 자를 멸시하는 자라고 표현하고 있는데요. 그러니까 이 말은 누군가 잘못을 하면 그 사람을 미워하면서, “저런 나쁜 놈” “저런 악한 사람” “저런 정말 의롭지 못한 사람” 하면서 비난하고 욕해도 괜찮다고 하는 의미에서 멸시하는 자가 의롭고 경건한 자 하나님의 성산에 올라가는 자라고 말씀하는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시편에서 망령된 자를 멸시해야 한다고 하는 그 말은 “부러워하지 말라”는 의미에서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망령된 자들이 잘 나가는 것을 볼 때가 많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신실하게 살려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고, 어려움을 당하고 정말 힘들게 힘들게 살아가는데, 거짓말을 슬쩍슬쩍 하면서, 남의 것을 훔쳐가면서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압제해가면서, 이기적이고 탐욕적으로 사는 사람들 그리고 악을 행하는 사람들은 부를 축적하기도 하고, 성공하기도 하고, 잘 나가는 그런 모순된 모습을 바라보면서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어떤 생각이 드냐면, “의롭게 사는 게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나?” “하나님을 믿고 사는 게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나님을 믿어봤자, 성공하는 것도 없고, 하나님을 믿어봤자, 아무런 이 세상에서 낙이 없고, 오히려 악한 자들은 아무런 문제 없이 떵떵거리며 잘 사는데, 이 하나님의 믿음의 길을 가는 것보다, 믿음을 저버리고 저렇게 저 악한 사람들처럼, 저 사람들처럼 그냥 마음대로 살면서, 떵떵거리면서 살고 싶다”고 하는 그런 부러운 마음이 우리들 마음 가운데 문득 문득 들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그런 마음이 듭니까? 안 듭니까? 그런 마음이 들 수가 있어요.

이게 뭐지? 도대체 우리의 신앙생활이 이게 뭐지? 이렇게 우리는 고통 가운데 살아야 된단 말인가? 그런데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그냥 떵떵거리면서 잘 사는 모습을 바라보게 될 때, 우리들은 그런 사람들을 부러워하는 마음이 우리 마음 가운데 문득 문득 솟아오르게 된다는 말입니다. 시편 15편에서 권면하고 있는 말씀은 무엇이냐면, 그런 망령된 자들을 절대로 부러워하지 마라. 그들이 이름을 날리고 있고, 그들이 성공하고 있고, 모든 사람들이 그들을 향해서 박수를 치고 있고, 모든 사람들이 그들을 부러워하고 있어도, 그런 사람들을 부러워하지 마라. 시편 15편에서 말씀해 주시는 그들의 성공을 멸시해야 되는 것이지, 그들의 성공을 부러워하면서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 하는 의미에서 그들을 망령된 자를 멸시하는 자가 의로운 자요. 경건한 자요. 주의 성산에 올라갈 수 있는 자라고 가르쳐주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15편의 말씀은, 그러니까 그렇게 죄악을 저지르는 사람들을 향해서 우리가 비판하고 욕하고 정죄하고 멸시하는 말들을 막 내 뱉어도, 그래도 괜찮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은 아닙니다.

우리는 잠언서의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악한 자들을 바라보면서, 그들을 부러워하지 않으면서, 그렇다고 해서 그런 사람들을 향해서 비난하고 욕하고 멸시하는 그런 모습을 보여줄 것이 아니라, 그냥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겸손하게 주의 길을 따라가야 한다는 그런 의미의 말씀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악을 행했을 때, 우리 가운데 누군가 잘못을 저지르고 죄악을 범하고 여러 가지 실수를 하게 되었을 때, 그러한 잘못들을 사람들에게 소문 내며 다니는 것은 옳지 않다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두루 다니며 한담하고, 두루 다니며 “너, 이런 얘기 들어봤어? 세상에! 이런 일이 있었어!” 하면서 가십거리를 삼는 것은 옳지 않으며, 그것은 아주 지혜롭지 못한 어리석은 일일 뿐만 아니라, 그것은 더 나아가서 성경에서는 죄라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이 흔히 죄책감을 안 느끼면서, 마음껏 죄를 짓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이렇게 남의 일을 험담하며 다니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아니요! 그거 죄가 아닌 것이 아니라, 정말 큰 죄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왜 죄가 됩니까? 그것은 사랑에서 나오는 행동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랑으로 하지 않는 모든 일들은 다 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실제적으로 우리 가운데 그 누구가 잘못을 저질렀으면 누군가 죄를 범했다고 한다면, 누가 누군가 큰 실수를 범했다고 한다면, 그러면 우리는 그런 사람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냥 잠잠하라고 했으니까, 멸시하지 말라고 했으니까, 한담하며 그러한 비밀들을 드러내지 말라고 했으니까, 그러니까 모른 척하고 그냥 아 덮어두고, 그냥 그런 일이 있었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그냥 모른 척 해야 한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일까요? 무조건 쉬쉬 하면서, 덮어두어야 한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일까요?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 성도님들은 대체로 그렇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교회의 중직자가 혹은 목사님이 혹은 우리 교회 성도들 가운데 어떤 분이 잘못을 하면, 그냥 쉬쉬하고 덮어두고,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그냥 모른 척 하는 것이 그게 은혜스러운 것이라고 굳건하게 믿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잠언서의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행동하라고 하는 말씀일까요?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13절 말씀에서 신실한 자는 그러한 것들을 숨긴다고 하는 말은, 그러니까 우리 가운데 악이 있어도, 우리 가운데 죄악이 있어도, 그냥 방관하며 방치해두고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 것이 최선의 길이라고 하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잠언서의 말씀은 적극적인 의미에서 비난하고 욕하고 멸시하는 것을 하지 말라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인 것이지, 그리고 숨겨두라고 하는 것, 잠잠하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적극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고 욕하고 그렇게 모욕을 주고 멸시하는 일들을 하지 말라고 하는 의미에서 그런 의미로 말씀해 주시는 것이지, 정말 그냥 방치해도 괜찮다고 하는 그런 의미에서의 말씀이 결단코 아닙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되는가? 우리 가운데 허물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 가운데 죄를 지은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주시는 권면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 가운데 누군가 잘못이 있다고 한다면, 그냥 방치해 두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으로 하여금 회개케 하여, 그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받게 만들고, 그래서 회복시켜서 그리스도의 온전한 몸으로 그렇게 영적으로 다시 회복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이죠. 그게 바로 우리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이것은 가족의 개념으로 생각해 보면 더 좋을 것 같은데요. 교회라고 하는 것은 영적인 가족입니다. 영적인 가족으로서 우리가 함께 영적인 가족으로 함께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서로를 향해서 “형제님” “자매님”으로 부르고 있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우리는 서로 영적인 가족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가족의 개념으로 바라본다고 한다면, 우리 집안에 우리 큰아들이 잘못을 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모른 척합니까? 모른 척하는 게 아니라, 그 잘못을 한 것을 다루어야 하는 것이죠. 다루어서 그 잘못을 교정하고, 회개하게 만들고, 그래서 다시는 그런 똑같은 죄를 범하지 않게 만들어서, 그래서 이제는 좀 더 영적으로 성숙해져 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가족의 의무요. 가족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일 것입니다.

역시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로 우리를 불러주신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우리 모두가 다 약점이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우리를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로 불러주셨습니다. 우리가 완벽하다고 한다면, 우리가 아무런 잘못이 없을 수 있다고 한다면, 굳이 가족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굳이 공동체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완벽하다고 한다면, 굳이 공동체가 있을 필요가 없는 것이죠. 하지만 우리가 다 연약한 자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쉽게 넘어지기도 하고, 쉽게 낙망하기도 하고, 쉽게 믿음이 떨어지기도 하고, 우리는 죄와 허물들이 많을 범하면서 살아가는 그런 사람들인데요. 그러한 우리들이 서로 모여 있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우리 가운데 누군가 잘못을 하게 되면, 그 잘못한 사람이 그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만들고, 그리고 회개해서 영적으로 한 단계 더 올라갈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해서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11절 12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교회 안에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교회 안에 목사님들이 계시고 장로님들이 계시고 권사님들이 계시고 우리 집사님들이 계시고, 또 교사들이 있고, 그렇게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서로가 서로에게 선한 영향을 끼쳐서, 그래서 우리가 함께 의의 길로 갈 수 있도록, 우리가 함께 거룩의 길을 갈 수 있도록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서인, 근데 우리 가운데 어떤 사람이 허물을 지었다고 한다면, “그건 내 일 아니야” “나와 상관없는 일이야”라고 할 것도 아니고, 잠언서의 말씀에, 멸시하지도 말라고 했고, 드러내지도 말라고 했고, 그냥 잠잠하라고 했으니까, 그냥 숨긴다고 했으니까, 모른 척하고 지나가는 것이 정답이 아니라, 성경 전체의 가르침이 무엇이냐면, 우리 가운데 아픔이 있으면, 잘못이 있으면, 그것이 새 살이 돋아나도록, 암이 있으면 잘라버리고, 상처가 있으면 잘 약을 발라서 온전한 새살이 도달하도록, 서로가 서로를 도와서 그래서 영적으로 함께 성숙해져 가도록 서로를 도와주어야 하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결혼이라고 하는 제도를 만든 것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결혼이라고 하는 제도를 만들어서,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서로 만나게 했는데, 왜 만났는가? 왜냐하면 다 완벽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서로 약점을 가지고 있고, 단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서로가 서로의 단점과 약점들을 보완해주고, 그리고 이제 더 영적으로 성숙해져 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해서, 부부가 만들어진 거죠. 그러므로 부부 사이에서 남편에게서 아내에게서 허점과 단점이 보인다고 한다면, 그것은 미워해야 할 이유가 아니라, 그 사람을 더욱더 사랑해야 할 이유인 것이죠.

우리 자녀들이 약한 모습이 있다고 한다면, 그 아이들을 내칠 이유가 아니라, 그 아이를 더욱더 품어주어야 할 이유인 것이죠. 우리 부모님이 더욱더 어떤 약점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 부모님을 미워할 이유가 아니라, 더욱더 품어주어야 할 이유가 있는 것처럼,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는 서로가 서로를 온전하게 도와주는 것입니다.

일방적으로 목회자가 성도들만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성도님들에 의해서 목회자도 우리가 영적인 가족으로 서로가 서로를 도와주는 관계가 되어서 그래서 서로가 함께 영적으로 성숙해져 나가도록 만들어야 하는 것이죠.

그러면 그 방법이 무엇인가? 마태복음 18장 15절에서부터 17절의 말씀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내가 내 형제를 얻은 것이오.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 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누군가 잘못하면, 잘못했다고 소문 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과만 만나서, 이런 잘못을 저지를 게 아니라, 믿음으로 살라고 권면해야 되는 것이죠.

조용히 권면해야 되는 것인데, 그런데 그 권면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한다면, 두세 증인을 데리고 가서 이야기해줘야 할 것이고, 그래도 듣지 않는다고 한다면, 교회의 말해서, 교회가 권고하게 만들어야 되는 것이고, 교회의 권고도 듣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영적인 가족으로 참여하는 것을 공식적으로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는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한 사람이 아니라, 가짜로 들어와 있는 외부인일 수밖에 없어서, 결국에는 출교시키는 조치를 취해야만 하는 것이죠.

그래서 누군가 잘못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에게 가서 영적으로 권면을 해 줘야 되는 것인데요.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러니까 가서, “너, 이런 잘못했지?” 하면서 그렇게 얘기하라는 게 아니고, 죄를 지적하라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는 복음의 원리를 가지고 접근해야 되는 것이죠. 우리 모두가 다 죄인이라고 하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그 죄는 당신만 짓는 것이 아니라, 나도 똑같은 상황에 있다고 한다면 똑같은 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는 연약한 죄인이라고 하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바로 그러한 사실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다고 하는 그 복음의 원리를 가지고, 우리의 그 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고, 우리의 그 완고함이 예수님을 그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하는 그 사실을 우리가 함께 바라보면서, 그래서 서로가 함께 회개의 길로 걸어가야 하는 것이죠.

바리새인들처럼 지적하고 비난하고 비판하는 방법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방법을 해야 되는가? 빌립보서 2장 1절에서부터 8절 말씀은 이렇게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무슨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 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안타깝게도 우리는 늘 바리새인이 됩니다. 다른 사람들의 허물과 잘못은 크게 보면서, 마치 나는 아무런 죄가 없는 사람인 양, 그리고 그들을 바라보면서 비난하고 정죄함으로, 그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회개의 기회를 갖게 만들기보다는, 오히려 반발하고 그리고 거부함으로 말미암아, 회개할 기회를 잃어버리게 만드는 일에 우리들이 얼마나 자꾸 바리새인처럼 행동하는지 몰라요.

안타까운 것은 우리 교회가 세상을 향해서도 바리새인처럼 접근을 해서, 세상으로 하여금 회개할 기회를 잃어버리게 만들고 있어요. “이 나쁜 놈들. 회개하라. 그런 사악한 나쁜 놈들.” 교회가 바리새인처럼 세상을 향해서 정죄하기 시작하면서, 세상은 교회의 말에 귀를 닫아버리고, “너나 잘하시오”라고 하는 반응만 일으키게 만들어, 이 세상에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리게 만드는 일들을 지금 하고 있어요. 성경은 그렇게 하지 말라고 가르쳐주고 있는데, 잠언서의 말씀은 그렇게 하지 말라고 가르쳐주고 있는데, 우리는 그런 바리새인적인 반응을 보임으로써, 우리의 이웃을 망하게 만들 것이 아니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다가가야 하는 것이죠.

나보다 남을 더 낫게 여기고, 나도 똑같이 죄를 지을 수 있는 죄인이라고 하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그러기에 우리 모두에게 예수님이 필요하다고 하는 사실을 똑같이 바라볼 수 있게 만들어, 죄악 가운데 있는 자들이 주님을 바라볼 수 있도록,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그들에게 접근해 나갈 때 사람들의 마음이 열리고 주님을 바라볼 수 있게 만들어줘야 하는 것이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바로 우리가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죄인이며 연약한 자들은 그들을 회복하게 만드는 것은 우리가 교만한 마음 가운데서 그들을 정죄하고 멸시하고 비난하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은혜를 깨달은 자로서, 나 같은 죄인도 주님께서 용서해 주셨으니, 주님 앞에 함께 나아간다고 한다면, 우리가 모두 다 용서받을 수 있다고 하는 그 사랑을 전해주어야 할 것입니다.

멸시와 비난의 길로 나갈 게 아니라, 사랑으로 허다한 허물을 덮어주며 바른 길을 가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바로 그것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늘 허물들과 실수들과 잘못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갑니다. 우리는 매일매일을 우리 옆에 있는 사람들의 실수들과 허물들과 잘못들을 보면서 살아갑니다. 그때 우리는 그들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아야 하고, 사랑으로 다가가야 하고 사랑으로 회복시켜주는 주님의 은혜를 함께 나누는 놀라운 은혜가 있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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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롬 5:6-8)

 환난 중에 소망을 (롬 5:1-5)

왜 우리는 기쁨이 없고, 감사가 없는가? 늘 불평만 하면서 사는가?

여러분들은 누구를 좋아하고, 누구를 사랑하십니까? 우리가 사랑하는 그 대상은 아주 뛰어난 사람들일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멋진 외모를 가지고 있고 꿀 떨어지는 것 같은 그런 참 멋진 목소리를 가진 그런 연예인들을 좋아하게 되는 것인데요. 그런 연예인이 누가 있죠? 아마 현빈을 떠올렸을 수 있겠습니다. <사랑의 불시착>이라고 하는 그 드라마를 하면서 정말 멋진 그 청년이 꿀 떨어지는 그런 목소리로 이야기를 할 때 참 우리들의 마음이 끌리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그에 대한 팬덤이 아주 대단했던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왜 그런 연예인들을 보면서 좋아할까요? 왜 사랑하게 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정말 멋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너무나도 뛰어난 모습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스포츠계에서 아주 뛰어난 기능 역량을 발휘하는 선수가 있다고 한다면 모두가 다 좋아할 것입니다. 우리나라 선수 가운데 손흥민 선수를 알고 계십니까? 잘 알고 계시죠. 지난 Aston Villa 전에서 해트트릭을 달성하면서, 엄청난 기량을 보이는 모습을 보이고, 정말 우리나라 선수가, 아시아 선수가 저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에서 최고의 기량을 발휘하는 모습을 보면서, 모두가 다 열광하고, 모두가 다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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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에 그렇게 해트트릭을 달성하면서 엄청난 그런 성과를 보여주었을 때, 미국의 nbc 스포츠라고 하는 곳에서 손흥민 선수를 데려다 놓고 인터뷰를 하는 장면이 화제가 되었습니다. 이런 저런 인터뷰를 많이 하는 가운데 레베카 로우 하는 로우라고 하는 그런 여자 아나운서가 있었는데요. 그 아나운서가 이 선흥민 선수를 바라보는 눈빛이 예사롭지가 않은 겁니다. 아주 그윽한 눈으로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또 대화를 하면서 그래서 손흥민 선수와 대화를 마치고 손흥민 선수가 이제 퇴장할 때, 그 여기자가 다른 동료 기자들에게 무슨 얘기를 했냐 하면, 사진 한번 보여줬으면 좋겠어요. “나, 저 선수 너무 좋아. 나, 사랑해”라고 이야기를 했는데요. 이것이 정말 화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유튜브를 한번 찾아봐서 어떻게 했나 하고 보려고 했더니, 아 그 장면은 무음으로 처리했더라고요. 아마도 결혼한 여성이었기 때문에, 불필요한 오해를 살까 봐, 무음 처리를 했었던 것이라고 생각이 되는데요. 사랑한다는 얘기는 정말 좋아한다는 얘기죠. 정말 그 선수가 너무나도 뛰어나고 너무나 좋다고 하는 그런 의미에서 이야기를 했던 것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이렇게 스포츠 선수나 연예인이나 아주 뛰어난 기량을 보이는 사람들을 좋아하다가도, 그런 선수들이 갑자기 실력이 없어지거나, 제대로 기량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면, 한때 열광했던 그런 팬들이 돌변해 버리는 경우들도 생깁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라고 하는 축구팀에 해리 머과이어라고 하는 선수가 있습니다. 혹시 아십니까? 몰라도 됩니다. 근데 그 선수는 어떤 선수냐면, 엄청난 돈을 받고서 이적해 온 선수입니다. 정말로 실력이 뛰어난 선수이고, 그래서 그 선수가 엄청난 기량을 발휘해 놓았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열광하고 환호했습니다. 하지만 최근에 엄청난 부진입니다.

지난 리버풀과의 경기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4대 0으로 지게 되었는데, 그때 부진한 활약을 보였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실책으로 인해서 골을 먹게 되는 그런 일들이 벌어지자, 그 해리 머과이어라고 하는 그 선수의 집에 폭탄을 설치해 죽여버리겠다고 하는 그런 위협이 있었다고 해서 신문의 뉴스가 나게 되었습니다. 그 선수가 생긴 모습이 좀 나이가 들어 보이길래, 그래도 좀 꽤 나이가 있는 선수인가 했더니, 알고 봤더니 1993년생이더라고요. 제 둘째 딸보다 한 살 많은 그런 어린 선수인데, 참 팬들로부터 그런 협박에 시달리게 되었을 때, 그 스트레스가 얼마나 컸을까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이게 우리 사람들이 하는 이 세상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는 사랑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를 사랑합니까? 그것은 뛰어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죠. 뛰어나기 때문에 사랑하고, 좋아하는 겁니다. 그 선수가 나를 즐겁게 해주고, 나를 만족시켜주고, 나를 행복하게 해주기 때문에 좋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 유용하기 때문에 좋아하는 것, 그것이 이 세상의 사랑의 방식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폴 트립이라고 하는 분이 계시는데요. 그분이 쓴 <복음 위에 세운 결혼>이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한번 그 책을 보여주고 싶은데요. 이 책은 정말 우리 결혼 생활에 있어서 “성경적인 결혼이 무엇인가? 부부 관계가 무엇인가?”라고 하는 것을 정말 잘 써놓은 책이기 때문에, 한번 한 번쯤 구입하셔서 읽어본다고 하면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그런 책입니다. 그런데 이 책에 이 폴트립이라고 하는 사람이 무슨 말을 썼냐면, 이런 말을 했어요. 남녀가 서로 사랑한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서로 상당하는 것이 진정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한다고 느끼는 것이라기보다는, 상대가 나에게 유익이 되고, 내 계획에 내가 생각한 방식에 맞아떨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랑하게 되는 것일 수가 있다고 진단하는 겁니다.

지금 내가 세운 그 계획에 가장 잘 들어맞는 배우자처럼 보이기 때문에 그 사람을 좋아하고, 그 사람을 사랑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인데, 만일 그 사람이 더 이상 나의 계획에 맞지 않게 되고, 내 계획에 들어맞지 않게 된다고 한다면, 사람들은 돌변할 수 있게 된다고 지적하면서, 그래서 우리의 사랑이 정말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진짜 사랑인지, 아니면 이기적인 마음에서 나를 향한 이기심 때문에 상대를 좋아하고 있는 것인지 판단해 보아야 한다고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 세상의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 대부분 그런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데요. 한 번은 좋아하고 있지만, 그 사람이 내게 즐거움을 주고 나를 만족시켜주고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한 에 있어서는 좋아하고 열광하게 되는 것이지만, 어느 순간에 그 사람이 나를 만족시켜주지 못하고, 나를 행복하게 해주지 못하게 된다면, 사람들은 돌변해버리고 마는 겁니다.

사랑과 폭탄 위협 사이는 종이 한 장 차이가 있는 것이 이 세상의 사랑의 방식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아니하신 분이 계십니다.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누구를 사랑하셨는가?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사랑하셨는데요. 하나님께서 왜 우리들을 사랑하셨는가? 우리들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우리들이 하나님을 만족시켜주고, 우리들이 하나님을 행복하게 해주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로마서 5장 6절에서부터 8절까지의 말씀을 읽었는데요. 이 말씀에 보면,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신 이유가 무엇인가? 5장 6절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어주셨는데, 목숨을 내어주셨는데, 우리를 사랑해 주셨는데, 왜 우리를 사랑했는가? 우리가 뛰어나고, 우리가 정말 멋지고, 그래서 우리가 주님께 무엇을 해줄 수 있기 때문에,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언제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내어주셨다고요? 우리가 연약할 때, 우리가 튼튼하고 건장할 때가 아니라, 연약해서 병들고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것 같고, 아무 소용도 없는 것 같은 우리를 하나님께서 사랑해 주셨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연약할 때라고 했을 때 번역된 헬라어 원문은 “아스테네스”라고 하는 단어인데, 이 단어는 연약하다라고 하는 것을 나타내는 단어이기는 하지만, 성경에서는 다양하게 이 단어를 번역했습니다. 연약할 때, 혹은 아플 때, 병들었을 때를 의미하는 단어인 것입니다. 우리가 손흥민 선수처럼, 그리고 현빈이라고 하는 그런 연예인처럼, 최고의 기량을 보여주고 있을 때,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해 주신 것이 아니라, 병들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할 때, 아무런 능력이 없고 아무런 소용이 없는 그런 우리들을 하나님께서 사랑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러니까 우리가 뛰어나서는 안 된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은 아닙니다. 하지만 주님의 사랑은 조건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가 연약하고, 별 볼 일 없고, 나약하고, 심지어 병들어서 아무것도 못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연약한 자는 누구입니까? 연약한 자는 주님께 나아가고 싶어도 나아갈 수 없는 자에요. 우리는 마치 중풍병자와 같습니다. 중풍병자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중풍병이라고 하는 병에 걸려 있어요. 그래서 이 병을 낫고 싶어서, 치유자 되시는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하는데, 주님 앞에 나아가기만 하면 나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주님 앞에 나아갈 능력이 없어요. 걸어갈 수가 없는 거예요. 움직일 수가 없는 거에요. 우리는 어떤 사람들인가? 우리는 마치 38년 된 병자와 같아서, 내 몸이 낫기 위해서는 물이 동하는 순간에 제일 먼저 뛰어가고 싶은데, 그런데 뛰어가기는커녕 움직일 수조차 없는 그런 상태에 있는 것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인 겁니다.

그게 바로 우리들의 문제인 것이죠. 우리들의 문제는, 우리가 무엇인가를 해보고 싶지만 그러나 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 우리의 문제인 것이고, 연약한 상태에 있다고 하는 것이 우리들의 문제인데, 그렇게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연약한 상태에 있을 때, 우리의 주님께서는 “탈락입니다”라고 선언해 버리신 것이 아니라, 상한 갈대도 꺾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아니하시는 그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십자가에 달려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고 하는 사실을 믿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모습이 연약한 것만이 아니라, 성경에서는 다른 방식으로 또 표현하고 있는데요. 로마서 5장 6절에서, 또 어떤 식으로 우리를 표현하고 있느냐 하면, 우리를 “경건하지 않은 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연약할 때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의롭고 경건한 자들만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을 것입니다. 주의 성산에 올라갈 자격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 자였는가? 경건하지 못한 자였다는 것입니다.

시편 15편에 보면 이런 시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까?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하며, 그의 마음의 진실을 말하며, 그의 혀로 남을 허물하지 아니하고, 그의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웃을 비방하지 아니하며, 그의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존대하며, 그의 마음에 선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치 변하지 아니하며, 이자를 받으려고 돈을 꾸어주지 아니하며,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하지 아니하는 자이니,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주의 장막, 주의 성산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천국을 가리키는 것이죠. 누가 천국에 갈 수 있습니까? 누가 하나님에게 당당하게 나갈 수 있습니까? 그것은 의로운 자죠. 거룩한 자죠. 의롭고 경건한 자만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것이죠.

그런데 오늘 읽은 로마서 5장에서는 아주 놀라운 이야기를 해주는 겁니다. 우리가 연약한 자였을 뿐만 아니라, 경건하지 못한 자들이었는데, 우리 경건하지 못한 자들을 위해서 우리 주님께서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셨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상태를 어떻게 표현하고 있냐면, 죄인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5장 8절의 말씀에 보면 이렇게 표현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리는 단순히 연약한 정도가 아니라, 단순히 경건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더 심각하게 말하면 죄인이라는 거예요. 죄를 지었다고 한다면 그 대가가 무엇입니까? 사망이죠. 로마서 6장 23절의 말씀에 기록한 것처럼,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으니까, 죄를 지었으면 당연히 사망을 당해야 될 것인데, 심판을 당해야 될 것인데, 죄인인 우리를 주님께서 사랑하셔서 건져주심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참사랑, 그 사랑을 확정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지는 않았지만, 또한 우리를 무엇이라고 표현하고 있냐면 원수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5장 10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표현합니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이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음이라. 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하나님의 사랑은 어떠한 사랑입니까? 연약한 자를 향한 사랑이고, 경건하지 못한 자들을 향한 사랑이고, 죄인을 향한 사랑이고, 심지어 하나님과 원수된 자를 향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죠.

그런데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언제 사랑해 주셨는가요? 로마서 5장 6절에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로마서 5장 6절에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여기서 “기약대로”라고 표현하고 있는데요. 이 “기약대로”라고 하는 말은 기약대로라고 번역하는 것보다는 “바로 그때”라고 번역하는 것이 훨씬 더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영어로는 그렇게 번역해 놓았는데요. 헬라어로 보면 “카타 카이론”이라고 하는 말입니다. “카타”라고 하는 말은 “무엇 무엇에 따라서” “뭐 뭐 할 때”라고 하는 말이고요. “카이론”이라고 하는 말은 “카이로스” “시간”이라고 하는 말의 목적격인데, 시간이라고 하는 말입니다. “시간에”라고 하는 말이죠. 그러니까 직역하면, 그때 우리가 연약한 그때, 주님께서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고 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언제 사랑해 주셨는가? 그때 사랑해 주셨다고 하는 말이에요. 그 말이 무슨 의미입니까? 차일피일 미루면서, 그냥 시간 끌다가 마지못해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그 순식간에 나갔다는 겁니다. 그 바로 생명을 살릴 수 있는 황금 시간이 있잖아요? 어떤 사람이 심장마비가 와서 쓰러지게 된다고 한다면, cpr을 하게 됩니다. cpr을 해서, 그 순간에 cpr을 하게 되면 살려낼 수 있을 것인데, 그런데 cpr을 하는 것이 늦어지게 되면 살려낼 수 없잖아요? 바로 그때, CPR을 해서 살려내야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주님께서는 어떻게 우리를 살려내셨는가? 우리가 연약한 그때 그냥 방관해 두고 모른 척하고 나와 상관없다 하시면서 외면하신 것이 아니라, “바로 그때” 오셔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셨다고 하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 하면, 그 하나님의 은혜는 죄인들을 향한, 더 나아가서 원수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은 조금만 상대가 실력이 떨어지거나, 나를 즐겁게 해주지 않거나, 나를 만족시켜주지 않거나, 나를 행복하게 해주지 않는다면, 마음이 돌변해버리는 것이 우리들의 마음입니다. 하지만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 하나님을 모른다고 방황하며 떠나갔을 때, 우리를 그냥 내 팽개쳐버린 것이 아니라, 죄인들을 위하여 원수들을 위하여 희생해 주신 놀라운 사랑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라고 한다면 목숨을 버릴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들의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희생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되어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저도 제 가족을 위해서라고 한다면 희생할 마음이 있어요. “패트릭 몰리”라고 하는 사람이 쓴 <거울 속의 남자>라고 하는 책을 보면 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필 리틀포드”라고 하는 어떤 분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는데요. 어떤 그 필 리틀 포드라고 하는 사람이 자신의 아들 21살짜리 마크라고 하는 아들과 그리고 친구들과 함께 알래스카로 연어 낚시를 하기 위해서 여행을 갔습니다. 수상 비행기를 빌려서 그 비행기를 타고, 알래스카라고 하는 추운 지방에 가서 연어를 낚기 위해서 잡기 위해서 놀러 간 거죠. 연어가 바다로 나갔다가 다시 산란하기 위해서 돌아오면 그때 잡는 거잖아요? 수상 비행기를 타고 알래스카까지 날아가서 비행기를 세우고 바다 위에 세우고, 그리고 그 바다에서 그 비행기에서 내려서 연어를 잘 잡을 수 있는 상류 지역으로 걸어가 거기서 고기를 낚고 돌아오게 됐습니다. 한참 고기를 낳고 돌아오니까 바닷물이 쭉 빠진 겁니다. 썰물이 되어서 그 수상 비행기가 모래톱에 얹혀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집에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물이 차야 그 바다 위에서 달려서 비행기가 뜨게 되어 있는 것인데요. 모래톱 위에 가라앉아 있는 그 비행기를 운전할 수가 없기 때문에, 이 사람들은 그날 밤은 비행기 안에서 자기로 결정하고 잠을 청했습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보니까 물이 들어왔어요. 비행기가 바닷물 위에 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시동을 걸고, 이제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시동을 걸고 해서, 쫙 달려서 이륙하려고 했는데, 아뿔사 큰 일이 난 겁니다. 그 물 위에 떠 있게 만든 부력을 할 수 있는 그 플로트에 거기에 공기가 들어가 있어야 되는데, 바닷물이 빠지면서 비행기가 내려가다가 부딪혔는지 돌에 부딪혔는지 깨어졌고, 그 깨진 사이로 바닷물이 다 들어차 버려서 한쪽에 물이 가득 차 버린 겁니다. 다행히 그래서 그 비행기가 제대로 날지 못하고, 얼마 못 가서 바다에 꺾여 침몰하고 말았습니다. 살려면 어떻게 해야 되죠? 헤엄쳐야 되는 거죠. 같이 갔던 일행들은 열심히 헤엄쳐가지고 나와서 밖에 나와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필 리틀 포드 박사가 못 나오는 거예요. 필리트포드 박사도 수영을 아주 잘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충분히 나올 수 있는데, 못 나오는 겁니다. 가만히 보니까 그 필 리틀포드 박사가 아들을 붙잡고 아들을 꺼내기 위해서 허둥버둥거리면서, 거기서 그렇게 노력하고, 자기 혼자 산다고 하면 그냥 헤엄쳐서 나와서 살 수 있는 거에요. 그런데 혼자 나와서 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들이 나오지 못하는 그 모습을 보고, 아들을 붙잡고 그 아들을 끌어내려고 하다가, 이안류가 쳐서 그 리틀포드 박사는 그냥 아들과 함께 바닷물에 빠져 죽는 모습을 안타깝게 멀리서 보아야만 했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쓰여져 있습니다. 어쩌면 그게 우리 부모님들의 마음일 것 같아요. 자녀들을 위해서라고 한다면, 내 목숨이 끊어져도, 그 아이를 위해서라고 한다면, 모든 것을 다 해주고 싶은 것이 우리 부모들의 마음일 겁니다.

그런데 자녀가 아닌 사람들을 위해서는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쉽지 않은 것이죠. 2011년 2월에 나온 기사가 하나 있는데요. 어떤 캐빈 조던이라고 하는 그런 운동 선수가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의 야구 선수인데요. 아주 뛰어난 기량을 발휘해서 고등학교 때 아주 최고의 기량을 발휘했기 때문에 메이저리그 뉴욕 양키스에서 입단 제의를 할 정도로 이렇게 엄청난 실력을 가지고 있었던 선수가 케빈 조단이라고 하는 선수였습니다. 하지만 이 선수는 프로야구 구단으로 바로 직행하기보다는 나는 공부를 더 하고 싶다 해서 노스캐롤라이나 주의 웨이크 포레스트 대학에 입학을 해서 야구부에서 활동을 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이 대학에 입학했는데 신장에 문제가 생긴 겁니다. 신장에 문제가 생겨서 신장이 망가져 버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투석을 해야만 하는 그런 아주 어려운 상황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휴대용 투석기를 차고 있어야만 하는 그런 상황이 되어 버렸는데, 야구 선수가 그걸 자고서 운동을 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누가 신장을 기증해 줄 수 있을까? 아무리 기다려도 맞는 신장을 발견할 수가 없는 겁니다. 가족들에게서도 맞는 사람도 없고 아무도 맞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자원을 했습니다. 내가 신장을 주겠다고 해서, 자원을 했는데 신장을 줄 수 있도록 딱 맞는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그 사람이 누구냐 하면 그 대학의 야구 코치였습니다. 톰 월터라고 하는 사람인데요. 사진을 한번 잠깐 보면 좋을 것 같아요. 톰 월터라고 하는 야구 코치가 신입생 야구 선수를 위해서 자신에게 있는 신장 하나를 떼어서 기증한 거죠. 그래서 이 이야기가 널리 알려지고 여러 신문에 보도되고 언론에 보도되었습니다. 신장이 아무리 두 개라고 하지만 젊은 사람이 나중에 어떻게 될지도 모르고, 자기 가족에게 필요할지도 모르는데 전혀 모르는 생면부지의 어떤 사람을 위해서 줄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 사람의 이야기가 뉴스에 난 거죠. 뉴스에 난 이유가 무엇일까요? 쉽게 일어나지 않는 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런 결정을 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뉴스에 난 거죠.

가족 간에는 줄 수 있어요. 제가 예전에 섬기던 교회의 어떤 성도님은 신장이 망가졌는데 언니로부터 신장 이식을 받았어요. 그런데 뉴스에 안 나더라고요. 왜 안 나죠? 가족이니까요. 가족이니까. 그건 줄 수 있는 거예요. 서로 사랑하는 관계니까, 줄 수 있는 거예요. 부모가 자식에게 줄 수 있고, 자녀가 부모에게 줄 수 있어요. 그런데 코치가 선수에게 주는 것은 쉽지 않은 거예요. 그래서 뉴스에 난 거예요. 정말 찾아보기 힘든 일이니까, 뉴스에 난 거죠.

그런데 이런 뉴스를 보신 적 있습니까? 어떤 사람이 전과 18범이고 살인범인데, 그 살인범에 의해서 자신의 아들을 잃어버린 그 피해자가 그 전과자를 위하여 신장을 떼주었다고 하는 뉴스는 들어본 적이 있으십니까? 아무리 찾아봐도 나올까요? 안 나올까요? 안 나와요. 쫓아가서 죽이고 싶은 것이지, 그 사람 만나면 쫓아가서 죽여버리고 싶은 게 부모의 마음이지, 그 사람을 위해서 신장을 줄 수는 없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서 우리를 향해서 말씀해 주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수된 우리를 위하여 하나밖에 없는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강한 자가 아니라 연약한 자였고, 경건한 자가 아니라 경건하지 않은 자였고, 우리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이었으며, 우리는 하나님의 친구가 아니라 하나님과 원수 된 자로서 하나님을 거부했던 자들인데, 하나님께서 왜 저와 여러분들을 사랑해 주셨습니까? 사랑해 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쓸모 있어서, 우리가 뭔가 하나님께 즐거움을 주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께 유용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그 이유를 알 수가 없도다. “아, 하나님의 은혜로 있을 데 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왜 구원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 왜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해 주셨는지 알 수 없다고 하는 것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찬송가를 부르면서도, 속으로는 딴 생각을 해요. 하나님의 은혜로 부르면서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것 같기도 한데.” 내가 이래봬도 봉사 많이 하니까, 당연히 날 사랑해줘야 되는 거 아니야? 내가 여전도 회장도 하고, 주방에서 봉사도 많이 하고, 성가대에서 수고도 많이 하고, 나는 전도도 많이 하고, 헌금도 많이 하고, 내가 이 정도면 인텔리이고, 이 정도면 하나님께서 나를 다른 사람이 아니라 이 정도는 사랑해줘야 되는 거 아니야? 우리의 마음 가운데, 내가 목사요, 장르니까, 내가 권사니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해줘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갈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신앙생활 가운데서 감사가 사라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들의 신앙생활 가운데 기쁨이 사라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조그만 일에도 마음의 상처를 받고,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 때문에 괴로워하고, 시험에 빠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이며,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만한 아무런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는데, 하나님께서 놀라운 사랑을 베풀어주셨다고 하는 사실을 망각해 버릴 때,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가를 망각해 버릴 때, 우리는 기쁨이 사라지고 감사가 사라지게 되고 시험에 빠진다고 믿습니다.

워낙 이런 저와 여러분들의 마음 가운데, 매일 매 순간마다 오늘 내가 이렇게 살아있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살아가는 것이, 왜 나를 이렇게 사랑해 주시는지, 난 알 수 없도다. 이 쓸데없는 자 왜 구원해 주시는지 난 알 수 없도다. 날마다 날마다 고백하며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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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부활이 있는가? (고전 15:12-19)

고린도전서 15장의 말씀을 읽었는데요. 고린도전서 15장의 말씀은 소위 부활장이라고 알려져 있는 말씀입니다. 오늘 전체 다 읽지 않고, 그중에 일부를 읽었는데 15장의 말씀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1절에서부터 11절 말씀까지는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부활하셨다고 하는 것, 그리고 거기에 수많은 증인들이 있다고 하는 것을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나오는 이야기가 무엇이냐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부활할 것이다라고 이야기해 주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죽음이라고 하는 것을 잠자는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요. 우리가 잠을 자게 되면 그다음 날 일어나게 되는 것처럼 죽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살아나게 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이 부활에 대한 설명을 하면서 이것은 마치 씨앗을 심는 것과 같다. 씨앗이 땅에 떨어져서 썩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한 번 땅에 떨어져 그리고 그 씨앗이 썩어지는 것 같은데, 알고 보면 그래서 싹이 나고 그리고 잘하고 열매가 맺히는 것처럼 우리의 인생도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부활이 있을 거라고 하는 사실을 알려주면서, 결론이 무엇이냐면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말고 견고하게 서서 항상 주의 일을 힘쓸 것을 권면하고 있는 말씀이 고린도전서 15장의 말씀입니다.

바울 사도가 지금 이 편지를 고린도 교회에 보내면서 이 15장의 말씀을 쓰고 있는데요. 이렇게 쓰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냐면, 왜 이 말을 고린도 교회에 전해 주었다고 생각하시겠습니까?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것처럼 당시 고린도 교회 성도들 사이에 부활에 대한 믿음이 희미해져 가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부활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부활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살았던 사람들인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 부활에 대한 소망들이 점점 희미해지는 겁니다. 부활이 없지 않은가? 부활이 없을 수 있지 않겠는가? “이러다가 끝나는 거 아니겠는가?”라고 하는 그런 생각들이 고린도 교회의 마음 가운데 성도들의 마음 가운데 조금씩 조금씩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에, 부활에 대해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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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마음 가운데 부활에 대한 의심이 들기 시작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기대하기는 곧 죽은 자가 살아날 거라고 하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고 우리도 부활할 거라고 하는 그런 믿음을 가지고 살던 이분들이 신앙생활을 하는 가운데 한 명씩 두 명씩 죽어가는 겁니다. 특별히 초대교회의 박해로 인해서 죽은 사람들 그것이 아니더라도 자연으로 죽게 된 사람 등등 사랑하는 아버지를 잃게 되고 어머니를 잃게 되고, 때로는 배우자나 또는 자녀들을 잃게 되는 그런 슬픈 일들을 당하는 경우가 있었는데요. 그럴 때 이 성도들의 마음 가운데, 그러나 부활이 있지 않은가? 그러나 “다시 산다고 하지 않았는가?”라고 하는 그런 소망을 가지면서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부활이 있겠지 다시 살아나겠지 하면서 기다리고 있는데 안 살아나는 겁니다. 우리 어머니가 살아났으면 좋겠는데, 안 살아나는 겁니다. 사랑하는 자가 죽었는데, 그 사람이 다시 살아날 날을 고대하고 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살아나는 경우가 단 한 번도 없는 겁니다. 그럴 때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 절망감이 스며들기 시작했습니다. 부활이 없는 거 아닐까? 아무리 기다려봤자, 다시 살아난다고 하는 이야기는 “허망한 이야기가 아니겠는가?”라고 하는 그런 마음이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 스며들기 시작할 때, 바울 사도는 이 편지를 써서 그래서 부활이 확실하고 부활에 대한 소망을 가질 것을 권면하고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편지를 썼습니다. 12절 말씀에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라고 질문하였습니다. 지금까지 복음을 전했을 때 우리가 전한 복음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바울 사도를 비롯해서 복음을 전할 때마다 나왔던 이야기가 무엇이냐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으나, 3일 만에 다시 살아났다고 하는 부활의 소식을 전해 주었는데, 그 부활에 대한 소식을 들었던 그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 왜 우리들의 부활에 대해서 의심하느냐라고 하는 그런 책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예수님께서 실제로 살아나셨는지 살아나지 않았는지 우리가 직접 목격한 사람은 없습니다. 혹시 목격한 사람 계신가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2천년 전 일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태어나지도 않았을 때 2천년 전에 예수님께서 돌아가셨고, 그리고 2천 년 전에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났다고 하는 이야기를 우리가 들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가운데는 목격자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하지만 바울 당시에는 지금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살고 있던 이 당시에는,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이 여러 명 있었습니다. 우리가 역사적으로 좀 정확하게 이해하고 지나갈 필요가 있겠는데요. 지금 고린도 전사가 쓰여진 이 시기가 언제냐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나서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쓰여진 책이 쓰여진 편지가 바로 고린도 전서 고린도후서입니다. 시간적으로 따지면 한 15년 길게 잡아봤자 20년 이후에 쓰여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목격한 사람들이 아직도 태반이나 살아 있을 때, 지금 이 고린도 전서에 쓰여진 말씀들, 그리고 성경에 쓰여진 이 말씀들이 진짜냐 가짜냐를 확인할 수 있는 그 시점에 쓰여진 책들이 쓰여진 편지들이 바로 우리가 읽고 있는 이 편지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기독교와 다른 종교와의 엄청난 차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어요. 대부분의 다른 모든 종교는 교주에 관한 이야기들이 쓰여진 책이 언제 나오냐면 300년 400년 500년 혹은 심지어 1천 년 뒤에 쓴 책들을 보고서 신앙생활을 하는 겁니다. 불교의 경우에 석가모니가 활동한 것은 주전 600년 경이라고 알고 있는데요. 그때 쓰여진 책에 의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300년 400년 500년 뒤에 쓰여진 책에 의해서 이랬다더라 저랬다더라 그것을 이야기를 듣고서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고, 마흐메트가 죽은 지 몇백 년 뒤에 쓰여진 책에 의해서 이슬람교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겁니다.

하지만 복음서의 글들과 선지서의 글들이 언제 나왔냐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나서 불과 얼마 되지 않을 때, 쓰여진 편지들이 바로 이것이고, 아직도 예수님의 부활이 진짜인지 가짜인지에 대해서 증명해 줄 수 있는 목격자들이 아직도 살아 있어서, 찾아가서 만나서 물어보면 알 수 있는 그 사람들이 여전히 살아 있는 가운데서 쓰여진 책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살아나셨다고 하는 사실을 수많은 사람들이 말하고 다녔습니다. 증거하고 다녔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의 말을 믿는 게 맞은가요? 의심하는 것이 맞는 것일까요? 좀 질문이 애매합니까? 만일 누군가 말하면서, 나는 죽었었는데, 죽어서 내가 천국도 보았고 지옥도 보았고 그런데 내가 다시 살아나게 되었다라고 누군가 이야기하면, 그 사람의 말을 믿어주는 것이 맞습니까? 의심하는 것이 맞습니까? 의심하는 게 맞아요. 누가 우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죽었다 살아났다고 말하면, “아, 죽었다 살았났나 보다”라고 믿어주는 게 맞습니까? “에이, 그럴 리가?” 의심하는 게 맞습니까? 의심하는 게 맞아요. 왜 그렇죠? 우리의 상식에 반하는 주장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과학적인 진리와 반대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에 의심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 말을 하는 사람이 목사님이 말하면 무조건 믿어줘야 합니까? 아니요. 그것을 말하는 사람이 거짓말을 잘 할 줄 모르는 순수한 어린아이가 말을 하면 믿어줘야 합니까? 아니요. 누가 말해도, 누가 말해도 그것이 과연 믿을 만한 것인지, 믿지 못할 것인지 우리가 생각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겁니다. 누가 말했느냐에 따라서 진리가 되는 것이 아니고, 아무리 선한 사람이 이야기해도 가짜 뉴스는 가짜 뉴스일 수밖에 없는 것이고, 아무리 나쁜 사람이 도둑놈이 이야기를 해도 그 사람이 진리를 말하고 있다고 한다면 진리는 진리인 것이지, 누가 말했느냐에 따라서 가짜 뉴스가 진실이 될 수가 없고, 진실이 가짜 뉴스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 가운데 누군가가 나타나서 하는 말이 내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는데, 그래서 내가 죽었을 때 천국도 보았고 지옥도 보았다고 말하면, 일단은 의심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상식과는 어긋나는 말을 하고 있기 때문이고, 과학적인 진리와는 정반대되는 말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한 번 죽으면 다시 살아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과학적 진리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미개한 시대에 살았던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죽으면 슬퍼요. 죽으면 절망적이에요. 죽으면 더 이상 아무런 소망을 가질 수 없는 것이에요. 왜? 죽으면 다시 살아날 수 없다고 하는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을 때 의심 많았던 도마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습니다. 내가 그의 몸에 옆구리에 나 있는 그 상처에 손을 넣어보고 예수님의 손에 나 있는 그 못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보지 않고는 내가 믿지 못하겠다고 말을 했는데, 그 말은 도마가 아주 의심이 많은 아주 믿음이 연약한 정말 별 볼 일 없는 그런 하찮은 존재였다고 말해 주는 것이 아니라 그게 정상적인 반응이라는 겁니다. 우리 누구든지 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 사람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확인하려면, 단순히 그 사람의 주장만을 들을 것이 아니라 그 사람 그런 주장을 하고 있는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하고 있는지를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연예인이 cf 광고를 찍으면서 라면을 맛있게 먹습니다. 라면을 맛있게 먹으면서, 이 라면이야말로 정말 맛있다고 후룩후룩 마시면서, 그 라면 광고를 하게 되면 우리가 그 cf 광고를 보면서 “이야, 라면 먹고 싶다. 저 연예인이 선전하는 저 라면을 먹고 싶다”고 하는 간절한 마음이 생깁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까, 그 연예인이 그 라면을 먹는 것이 아니라, 정말 배고플 때는 타사 제품을 애용하고 있다면, 그 광고를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못 믿는 거죠. 말이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이 증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이비 종파의 교주가 어느 달, 며칠 날, 이 세상에 종말이 온다라고 주장하면서 이제 곧 세상이 망하게 된다고 이야기하면 그냥 믿어야 됩니까? 아니요. 과연 그 사이비 종파가 종파의 교주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봐야 하는 것이죠. 내일 모레 이제 세상에 종말이 왔다고 열심히 말하고 있는 그 사이비 종파의 교주가, 알고 보면 성도들로부터 많은 헌금을 거두어서 땅을 사 모으고 있다고 한다면 믿어야 돼요? 안 믿어야 돼요? 안 믿어야 되죠.

그런데 예수님께서 죽었으나 부활했다고 증언한 사람들이 있었는데요. 그 사람들은 말로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살아났다고 이야기한 것만이 아니라, 그들의 삶은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 그 제자들은 모든 소망을 내려놓고 뿔뿔이 흩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모두가 다 도망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도망갔던 제자들이 며칠 뒤에 다시 돌아와서 하는 말이 예수님께서 살아나셨다라고 말했을 뿐만 아니라, 그리고 그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하는 사실을 말함으로 말미암아 목숨을 내놓았어요. 사람들이 칼을 들이밀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전하지 말라고 이야기했을 때, 그 목숨 앞에서 그 위험 앞에서 자신의 주장을 철회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살아나셨다고 하는 그 사실을 전파하다가 기꺼이 죽임을 당하고, 기꺼이 모든 것을 다 포기하는 그런 제자들로 완전히 변화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가장 강력한 부활에 대한 증거가 바울 사도입니다. 바울 사도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원래 교회를 핍박하던 자였습니다. 핍박할 수밖에 없었죠. 왜냐하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제자들이 하고 다니니까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교회가 주장하고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이 바울 사도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각 교회를 돌아다니면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랬던 그 바울 사도가 하루아침에 변화가 되어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증거하고 다니고, 그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내가 보았다고 말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모든 것들을 다 배설물로 여겼던 것이죠.

바울 사도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당시 유대 사회에서 엘리트 코스를 밟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잘 나가던 사람이었습니다. 가만히만 있어도 권력을 잡을 수 있고, 가만히 있어도 부를 유지 할 수 있었고, 가만히 있어도 명성을 얻을 수 있는 어마어마한 위치에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해서, 모든 것들을 다 배설물로 여기고, 로마 시민권까지 가지고 있었던 그가 모든 것들을 다 내어버리고, 예수님이 나의 구주시라고 증거하면서, 그러면서 그가 얻은 것이 있다고 한다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자신의 그 기득권을 다 내려놓았고, 부와 명예를 내려놓고 그리고 모든 것들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심지어 결혼도 할 수 없었습니다. 온 세상을 다니면서 예수님을 전하기 위해서 그는 가정을 꾸릴 수가 없었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혼자 살면서 복음을 전하고 다녔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성공할 수 있는 모든 길들을 다 내어버리고, 그리고 오로지 예수님을 위해서 복음을 전하다가, 그가 얻은 것은 병을 얻었고, 고통과 아픔을 겪게 되었습니다. 바울 사도가 당한 고난에 대해서 고린도후서 11장 23절에서부터 27절의 말씀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그걸 어떻게 다 일일이 세었는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이 바울 사도가 얻은 것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은 것은, 다 고난을 당하는 것밖에 없었고, 죽임을 당할 그 위협 가운데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잘 나가던 이 사람이 하루아침에 변화되어서, 예수님을 위해서 고난을 당하고 결국 순교하기까지 나아갈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둘 중에 하나예요. 둘 중에 하난데, 하나는 정말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것이고, 또 하나의 가능성은 무엇입니까? 미친 거죠.

그래서 바울을 알고 있던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니가 미쳤다. 공부를 너무 열심히 하더니 니가 미쳤다”라고 이야기했어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누군가 우리에게 100만 달러를 준다고 한들, 우리의 목숨을 내놓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 바울 사도는 어떻게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으면서까지 예수님의 부활을 증명하고 다녔습니까? 왜냐하면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일어날 수 없는 그 기적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확실한 사건에 근거하여, 오늘 우리들도 부활이 있을 것이라고 하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20절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어느 한 나무가 있어서 그 나무에 무슨 열매가 맺힐까 궁금했는데, 그 나무에서 사과가 열리기 시작하면 앞으로 계속해서 어떤 열매가 맺히게 될까요? 사과가 열릴 것이 분명한 것처럼, 예수님의 부활은 저와 여러분들이 다시 부활할 것을 약속해 주고 확신하게 해주는 첫 열매가 되는 사건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이 세상에서 우리는 다르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가운데,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는 마지막에 부활이 있는가 없는가에 따라서 완전히 달라지게 될 것입니다. 만일 부활도 없고 천국도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 삶은 둘 중에 하나로 빠지게 될 겁니다. 마음껏 먹고 마시고 흥청거리며 살다가 죽자고 하는 쾌락주의나, 미래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면서 절망하며 비관하는 비관주의로 빠지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고 우리에게 부활의 소망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안다면, 오늘 우리는 이 순간을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누군가는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고 할지라도 나는 내일 사과 나무를 심겠다고 말을 했는데요. 만일 우리의 죽음으로써 모든 것이 끝난다면 사과나무를 심을 수 있을까요? 못 심는 거죠. 하지만 정말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부활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안다면 마지막 순간까지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을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15장을 마무리하면서 58절 말씀에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믿습니까?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가 흘린 눈물 한 방울이 허무한 것이 아니에요. 지금 우리가 하나님 앞에 엎드리고 있는 그것이 허무한 것이 아니에요. 우리가 살아가는 그 모든 것들이 어느 순간에 거품에 휘말려버리고 완전히 사라져버리는 것처럼, 그렇게 허무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고 계시고 하나님께서 사랑의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그리고 언젠가 우리가 주님 앞에 믿음으로 담대하게 설 그 날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믿으면서 오늘 하루 주님과 함께 믿음으로 걸어가는 귀하고 복된 하나님의 백성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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