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평한 추는 모두가 기뻐합니다 (잠 11:1)

회오리 바람 (잠 10:22-32) +++ 교만은 욕을 부릅니다 (잠 11:2)

오늘은 잠언서의 말씀 가운데서 한 절만 읽었습니다. “속이는 저울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 공평한 주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이 표현은 우리가 시편을 살펴보든지, 잠언서를 살펴보든지, 아니면 욥기나 전도서나 아가서나 이런 시가서들을 보게 되면, 이렇게 같은 의미의 표현이 두 번씩 반복되어서 나오는 히브리 평행법적인 표현들이 자주 사용되고 있는데요. 오늘 이 11장 1절의 말씀도 역시 히브리 병행법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같은 내용을 전달하고는 있는데 상반된 예를 대비해서, 그리고 그래서 같은, 그러나 결국에는 같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결국에는 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히브리 평행법적인 표현이 잠언서 11장 1절의 말씀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의 의미는 어려운 본문이 아니고 아주 쉬운 본문입니다. 본문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시는 분 계십니까? 다 아실 거라고 생각이 됩니다. 굳이 설명이 필요 없는 본문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무슨 이야기냐면, 장사를 할 때 정직하게 장사를 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손님에게 물건을 내어줄 때, 속이는 저울을 가지고, 잘못된 저울을 가지고, 응당 주어야 할 만큼의 분량을 주지 않고 적게 준다거나, 내가 받아야 마땅한 그 금액보다도 많은 돈을, 그렇게 속여서 편취하는 것은 그것은 옳지 않은 것이며, 우리 하나님께서 미워하는 것인 반면에, 그러나 정직하게 한다면, 공평한 추를 사용해서, 정말 공정한 추를 사용해서 장사를 한다고 하면,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기뻐하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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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이 말씀을 보면서 한 가지 먼저 짚고 넘어가야 될 것이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은 무엇을 기뻐하시는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엇을 기뻐하시나요? 우리의 생각에 하나님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을 기뻐하고, 하나님께 나와 예배하며 찬송하며 기도하는 그런 종교적인 삶을 살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만,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일상의 삶을 사는 것은 하나님께서 별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가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께 봉사를 하고, 교회를 위해서 열심히 수고하고 애쓰는 그런 신앙적인 일을 하면,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시지만, 그러나 내가 직업을 가지고 회사에서 일을 하거나, 아니면 식당에서 돈을 벌기 위해서 일을 하거나, 아니면 돈을 벌기 위해서 은행에서든, 아니면 회사에서든, 아니면 사업터에서든, 건축 현장에서든, 아니면 보험회사에서 일을 하든, 아니면 어떤 일을 하든지, 내가 세속적인 직업을 가지고 일하는 것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그것은 별로 가치 있게 생각하지 않는, 별 볼 일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는 경향들이 우리들에게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님들의 마음 가운데 어떤 생각이 있냐면, 내가 사는 게 바빠서, 주의 일에 힘쓰지 못하고, 정말 내가 일하는 것에 이 세상의 일에 너무 바빠서 주를 위하여 헌신하지 못하고 하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일을 하기보다는, 우리가 예배에 참여하고 하나님께 영광 올려드리고 선교를 하고 이렇게 영적인 일을 하게 되면 정말 하나님께서는 정말 좋아할 것이지만, 그러나 우리가 이 세상에 일을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별로 그렇게 좋은 점수를 주는 게 아닐 거라고 생각하는 경향들이 우리들에게 많이 있습니다.

특별히 언제 그런 생각들을 많이 했냐면, 중세 종교 개혁이 일어나기 전에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아주 놀라운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지금 이 잠언서 11장 1절의 말씀은 어느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냐면, 예배의 현장을 이야기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예배를 어떻게 드려야 한다고 하는 그 이야기를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냐면, 예배의 현장이 아닌 우리들의 삶의 현장 가운데서 우리가 장사를 하고, 우리가 비즈니스를 하고, 때로는 식당을 하고, 때로는 화원을 하고, 어떤 일을 하든지, 이 세상에서 내가 직업을 가지고 하는 그 일들 가운데서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기도 하고 미워하시기도 한다고 하는 점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성경은 가르쳐주시기를, 우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가르쳐주고 있는데요. 우리가 정말 이 세상에서 가지고 있는 직업을 가지고 그 일을 하는 것도, 사실은 그것이 경건한 일이 될 수가 있고, 동시에 경건하지 못한 일이 될 수도 있다고 하는 점을 눈여겨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직업, 이 세상에서의 일, 내가 돈을 벌기 위해서 하는 그 모든 일들이 다 세속적이고 별로 가치 없는 일이 아니라, 똑같은 직업이지만 어떤 직업은 경건한 일이 될 것이고, 어떤 일은 경건하지 못한 일이 될 것인데, 무엇이 경건한 일이며, 무엇이 경건하지 못한 일인가? 만일 그 일을 함에 있어서, 속이는 저울을 사용한다고 한다면, 경건하지 못한 일이 될 것이고, 그러나 우리가 이 일을 하면서도 공평하게 공정한 추를 사용해서 정직해서 정직한 마음으로 이 세상에서 일을 한다고 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그런 경건한 일이 될 것이라고, 오늘 성경 말씀은 가르쳐주고 있다고 하는 것을 눈여겨볼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말씀을 드리면, 어떤 사람들은 그래요. 그러면 내가 예배 안 드리고, 그냥 이 세상 일만 해도, 하나님께 기뻐하시는 거겠네요라고, 그렇게 극단적으로 생각하시는 분이 있을 수 있겠는데, 여기에는 그러신 분은 없을 일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물론 우리가 시간을 내어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의 일상을 잠시 중단하고, 성경적인 원칙이 무엇이냐면, 6일 동안 이 세상에서 일을 했다고 한다면, 하루는 그 일을 잠시 접어두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시간이 필요한 것이 성경적인 원칙인 것이고,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경건한 일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직접 나와 예배하고 찬송하며 이렇게 예배의 시간을 갖는 것이야말로 아주 중요한 영적인 행동이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주일날 혹은 수요 예배 때, 우리가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면, 이 세상에서는 마음대로 살아도 괜찮은 것이 아니라, 사실은 이 세상에서 사는 것도 우리가 경건한 직업 경건한 일, 경건한 비즈니스가 되어야 한다고 하는 것이 오늘 본문의 가르침이라고 하는 것을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기서 공평한 주를 주는 주님께서 기뻐하신다고 했는데요. 여기서 공평이라고 하는 단어에 주목을 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공평함의 반대말은 무슨 말일까요? 무엇일까요? 그것은 속임수입니다. 우리는 흔히 생각하기를 공평의 반대말은 차별 대우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공평하게 대하는 것에 반대 말은 차별하여 대우하는 것이 공평의 반댓말이라고 생각하기가 쉬운데요.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공평하신 하나님이라고 말할 때, 하나님은 공평하신 하나님이야! 하나님은 편파적이지 않고, 공평하신 하나님이라고 했을 때, 우리가 이해하는 것은 어떻게 이해를 하냐면, 하나님은 그러니까 모든 사람을 다 똑같이 대우해 주실 거야라고 그렇게 생각하는 경향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지난 주일날 우리가 설교를 들으면서 우리가 같이 생각해 보았듯이, 하나님은 그런 의미에서의 공평함을 가지신 분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을 천편일률적으로 똑같이 대우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사실은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다 다르게 만드셨어요. 이 세상에 그 어느 한 사람도 똑같은 사람이 없이 정말 놀라운 일이죠. 이 세상에 60억 명의 인구가 있다고 한다면, 그리고 이 60억 명의 인구가 지금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수천 년 수만 년 동안 그 엄청난 인구들이 죽고 태어나고, 죽고 태어나고 하면서 지금까지 살아온 그 숫자들을 다 세어본다고 한다면, 그 지구상에 존재했던 지금까지의 모든 인구의 숫자가 몇 명이 되겠습니까 수천억 명 될 거 아닙니까? 아니면 수조억 명이 될 건가요? 엄청난 숫자에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놀라운 것은 단 한 사람도 똑같은 사람이 없다는 거에요. 틀린데, 어떻게 틀려요? 생김새도 틀리고, 목소리도 틀리고, 지문도 틀리고, 성격도 틀리고, 똑같은 게 아무것도 없다는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기계 찍어내듯이 똑같이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이 찍어내서 똑같은 사람들을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완전히 다르게 창조하셨고 각각 다르게 대우하고 계시다고 하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베풀어 주시는 은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마다 각각 은사가 다르죠. 어떤 사람에게는 가르치는 은사를, 어떤 사람에게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섬기는 그런 은사를, 여러 가지 다양한 은사를 하나님께서 주셔서, 모든 사람이 다 똑같은 것이 아니라, 각각 다르게 만들어 놓으셨고, 하나님께서 그 다른 사람들이 함께 협력해서 함께 좋은 공동체를 만들어 갈 수 있도록 하셨어요. 남편과 아내가 성격이 같아요? 틀려요. 틀려요. 같을 수가 없어요. 똑같은 한 배에서 난 아이들도 그렇게 다를 수가 없어요. 어쩜 그렇게 다른지 모든 사람들을 다 다르게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겁니다. 하나님이 공평한 하나님이라고 하는 이야기는 모든 사람들을 다 똑같이 대우한다고 하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공평의 반대는 차별하여 대우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잠언서 11장 1절에서 보여주고 있는 공평의 반대는 무엇입니까? 속임수죠.

공평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공평하시다고 하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선을 행하는 자에게는 상을 베푸시고, 악을 행하는 자에게는 벌을 내리시는 것이 공평함이죠. 이와 마찬가지로 그 하나님께서는 공평하신 하나님이기 때문에, 우리에게도 공평하게 행동할 것을 요구하고 계시는데, 장사를 할 때 저울을 사용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공평한 저울을 사용할 때 그 공평함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1만 원어치 주세요 하면 만 원어치를 주는 게 공평함이죠. 정확한 저울줄을 사용해서, 정확하게 그 요구대로 주는 것이 그것이 공평함인 것이고요. 그런데 1만 원어치 달라고 했는데, 그래서 그 만 원어치 약속한 것을 주지 않고 그것보다 적게 준다고 한다면 속여서 적게 준다고 한다면, 그것은 공평한 것이 아니고 속이는 것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엇을 기뻐하시는가? 우리가 정직하게 공평한 추를 가지고 장사하는 것을 기뻐하신다. 오늘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장사에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닙니다. 장사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이 말씀이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 다 해당이 되는 말씀입니다. 만일 내가 직장에서 일하고 있다고 한다면, 공평함이란 무엇일까요? 직장에서 일하고 있다면, 그러면 상급자가 혹은 사장님이 나를 지켜보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내가 일하기로 되어 있는 그 시간에 성실하게 일해야 그게 공평한 거예요. 이만큼 일하도록 기대하고 그 사람을 뽑아주었는데, 그 사람이 보지 않는다고 해서 사장님이 보지 않는다고 해서 그 시간을 내가 내 마음대로 사용해버리고,성실하지 못하게 일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공평한 추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속이는 저울을 사용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맡았던 종이 주인이 보지 않는 상황 가운데서도 열심히 수고하고 애쓰고 신실하게 자신에게 주어진 그 사명을 잘 감당함으로 말미암아, 결국 주인이 돌아왔을 때 자신의 결과물을 내놓을 수가 있었는데요. 그 결과물이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라, 그동안 주인이 없는 동안에 얼마나 실실하게 살아왔는가를 보여주는 것으로서의 결과물을 내어 놓은 것이죠. 그래야 그런 사람들은 공평한 줄을 사용한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하지만 한 달란트 맡았던 종처럼, 주인이 보지 않는다고 해서 술을 먹고 놀고 친구들과 어울리며 그 자신이 맡은 것을 전혀 돌보지 않고, 그래서 게으르게 일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공평한 줄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속이는 추를 사용한 것이고, 그것은 악한 일이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신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재판관이라고 한다면, 만일 우리가 심판관이라고 한다면, 만일 우리가 교사로서 학생들을 가르친다고 한다면, 만일 내가 경찰로서 법을 집행하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만일 우리가 판검사로서 판결을 해야 한다면, 공평한 판결을 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죠. 공평한 법 집행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죠. 그런데 내가 가지고 있는 그 권한을 가지고, 편파적인 판결을 하거나, 죄 없는 자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거나, 없는 증거를 조작해서 죄가 있다고 유죄 평결을 내리거나, 죄가 있는 자들도 아무 죄가 없는 것처럼 그냥 넘어가게 만들어 버린다고 한다면, 그것은 속이는 저울을 사용하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얼마 전에 뉴스를 보니까, 우리나라 판 검사들의 재산이 수백억 원씩 이른다고 하는 그런 통계를 보고서 참 마음이 안타까웠습니다. 아무리 판검사들에게 월급을 많이 준다한들 몇십 년 일해서 모은다고 해서 저 돈을 모을 수 있었을까? 어떻게 저 수많은 돈을 모을 수가 있었을까? 판결을 굽게 하고, 공평한 줄을 사용하지 않고, 잘못된 판결을 하지 않고서는, 어떻게 많은 돈을 모을 수 있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은 금액이었습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그런 자리에 있다고 한다면, 그렇게 우리들의 유혹에 따라서 우리가 잘못된 저울을 사용할 것이 아니라, 속이는 저울을 사용할 것이 아니라, 공평함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크리스찬들은 우리가 서 있는 그곳에서, 내가 어디에 서 있든지 간에, 우리가 우리의 일하는 현장이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의 현장들이 어디 있든지 간에,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이 공평한 추를 사용하고 있는지, 혹은 속이는 저울을 사용하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이고, 늘 우리는 속이는 저울을 사용하게 하는 그런 유혹에 넘어가기가 너무 너무나도 쉬워요. 왜냐하면 거기에는 당장의 보상이 따라오는 것처럼, 내가 누릴 수 없는 어마어마한 그런 이득이 보장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그러한 유혹에 넘어가기가 쉬울 텐데, 만일 그런 잘못들을 해왔다고 한다면 이제는 돌이켜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하나님께서 기뻐 하시는 것이고, 속이는 저울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질문을 한번 던져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왜 우리는 속이는 저울을 사용하게 되는 것일까요? 왜 우리는 속이는 저울을 사용하게 될까요? 그 이유는 재물이 우리의 우상이 되어 버렸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재물이 우상이 되면,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아니라, 재물이 하나님이기 때문에 재물을 섬기게 되면, 결국 우리가 공평한 추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속이는 저울을 쓸 수밖에 없어요.

재물은 무엇인가? 재물은 수단입니다. 재물의 정당한 자리는 수단이라고 하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그 재물이라고 하는 수단이 너무나도 좋아 보여서, 그리고 그 재물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들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전능자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우리가 유혹을 받게 되는 것이죠. 하나님은 전능자처럼 안 느껴져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나에게 관심이 없는 것 같고, 하나님은 내 기도에 응답하지 않는 것 같고, 하나님은 나에게 아무런 관심을 보여주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이 있어요. 그런데 재물은 전능자처럼 보여요. 재물만 있으면 다 해결되는 것 같아요. 돈만 있으면 모든 문제들이 다 해결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이 재물에는 전능성이라고 하는 것이 있는 것이죠. 재물의 전능성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이 재물이 하나님처럼 보이는 겁니다. 재물이야말로 정말 능력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처럼 보이게 되는 것이고, 그래서 그 재물이라고 하는 수단이 그 재물이라고 하는 수단의 위치에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재물을 더 높여서 전능하신 자리에 올려놓고, 그 재물을 우상처럼 섬기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그 재물이 우상이 되면 어떤 현상들이 나타납니까? 그러면 하나님의 법칙을 무시하게 되는 것이죠. 하나님의 법을 외면하게 되는 거에요. 우리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들이 우상이 되었는가, 우상이 아직 되지 않았는가를 판단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이것 때문에 내가 하나님의 법을 따르는가 따르지 않는가를 보시면 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은 다 우상이 될 수 있는 가능성들이 있는 겁니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들이 다 우상이 될 가능성이 있는 거에요. 예를 들자면 누가 무엇이 우상이 될 수가 있습니까? 우리들의 자식이 우상이 될 수가 있어요. 남편이 우상이 될 수가 있고, 아내가 우상이 될 수가 있고, 부모님이 우상이 될 수가 있겠고, 돈이 우상이 될 수가 있겠고, 명예나 권력이 우상이 될 수가 있겠고, 어떤 사람들이 박수 쳐주는 것이 우상이 될 수가 있겠고, 모든 좋은 것들이 다 우상이 될 수가 있습니다. 학력이 우상이 될 수가 있겠고, 어떤 경력이 우상이 될 수가 있겠고, 감투가 우상이 될 수가 있겠고,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좋은 것들이 다 우상이 될 수 있는 가능성들이 있습니다.

심지어 팀 켈러 목사님은 말하기를 무슨 이야기를 하냐면, 심지어 교회에서 사역을 하는 것도 우상이 될 수가 있다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어떠한 것이 우상이 되느냐? 우상이 이냐 아니냐를 알 수 있는 리트머스 시험지가 있는데, 그게 무엇이냐면 과연 이것 때문에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가 순종하지 않는가로 그 우상이 되었는가 안 되었는가를 판단할 수가 있는 것이죠.

요즘은 선거철이기 때문에, 이제는 선거 운동들을 많이들 하고 계시는데, 정치도 우리들에게 좋은 것입니다. 정치는 우리가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것이고, 반드시 관여하게 되어 있는 것이고, 우리의 삶은 반드시 정치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그리고 그 정치가 우리들의 삶을 아주 윤택하게 만들어주는 좋은 긍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그 정치도 역시 우리들에게 우상의 자리로 올라갈 수가 있는 것이죠. 그런데 그 어떻게 우리들에게 우상으로 되었느냐 되지 않았느냐를 판단할 수 있는 그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것 때문에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있는가? 거부하고 있는가로 판단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식이 너무나도 소중하기 때문에, 이웃을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는 마음이 우리들에게 들었다고 한다면 자식이 우상이 된 거예요. 자식이 너무나도 좋아서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고 다른 사람들에게 양보하고 배려를 해야 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오로지 내 자식을 위해서만 모든 것을 쏟아붓는다고 한다면 자식이 우상이 된 거죠. 자기 자식을 위해서라고 한다면, 남의 것을 빼앗아라도 그 자식에게 주려고 한다고 한다면 그 자식이 우상이 된 겁니다. 정치도 역시 마찬가지인데요. 정치라고 하는 것도 아주 좋은 것이지만, 정치가 우상이 되게 되면 어떤 현상이 발생이 됩니까? 가짜 뉴스도 상관하지 않아요. 진리를 외면하고, 눈을 감아버리고, 진리를 제대로 파악하려고 하는 마음이 아니라, 그저 내 편은 무조건 옳고, 상대편은 무조건 나쁘고 하는 그런 마음을 가지게 된다고 한다면, 그것은 이미 정치가 우상이 되어버린 결과이기 때문에 그럴 겁니다.

재물도 역시 우상이 될 수가 있는데요. 재물이 우상이 되면 어떤 현상이 발생하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게 되는 거죠. 돈이 너무 좋아서, 하나님께서는 정직하게 장사하라고 하는데, 우상이기 때문에 그 재물을 얻기 위해서라면 속이는 저울을 사용하기도 하고, 공평하지 못한 저울추를 사용하면서, 악한 방법으로 돈을 버는 모습이 나타난다고 한다면, 그건 이미 재물이 나에게 우상이 되어 버렸다고 하는 그런 증거입니다.

성경은 그렇게 재물을 우상으로 섬기지 말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마태복음 6장 24절 말씀에,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 말씀은 기독교 역사상 많은 오해를 불러 일으킨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가졌냐 하면, 예수님을 따르려면 재물을 버려야 한다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돈이 있으면, 부자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거니까, 부자는 결코 천국에 못 가니까, 돈을 다 버려야만 하는 것이고, 청빈의 삶을 살아야 하고, 무소유의 삶을 살아야만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이고, 부자는, 결코 낙타가 바늘귀로 통과할 수 없듯이, 부자는 결코 천국에 못 가니까, 재물을 다 내버리고 가난하게 살아야만,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고 했으니까, 가난해야만 천국에 가는 거라고 그런 식으로 이해하에 한 경우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그런 주장을 하고 있는 신앙 서적들이 베스트셀러로 자주 등극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하지만 이 예수님의 이 말씀은,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려면 돈 다 갖다 내버려야 된다라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 표현을 세밀하게 보십시오. 뭐라고 되어 있냐면,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거라고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재물을 섬기면, 하나님을 섬길 수 없고, 하나님을 섬기면 재물을 섬길 수 없다고 이야기한 겁니다. 그러니까 재물을 어느 위치에다 놓지 말라는 거예요? 하나님을 대신하는 그 우상의 위치로 놓지 말라고 하는 의미인 것입니다.

재물 자체가 어디에 가 있으면 돼요? 신의 위치가 아니라, 제자리를 찾아가면 되는 겁니다. 제자리가 어디로? 그냥 수단으로! 나의 구세주가 아니라, 그냥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주신 그런 달란트로,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 청지기인 내게 맡겨주신 물건 정도로만 그 위치를 가지고 있으면 되는 거예요. 재물이 문제가 아니라, 재물을 사랑하고, 그리고 그 재물을 섬기는, 재물을 왕으로 모시는 그 마음이 문제인 것인 것이죠.

디모데전서 6장 10절의 말씀에 뭐라고 말씀합니까? “돈을 사랑함이 일만 하게 뿌리가 되나니” 돈이 일만 악의 뿌리가 아니라,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하게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재물은, 재물 자체가 악한 게 아니고, 재물은 그 재물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겁니다. 재물이 하나님의 위치에 가 있으면, 그건 망하는 거고요. 근데 재물이 어디 가 있어야 돼요? 하나님과 우리와 제물이라고 한다면, 재물은 우리와 동격이 돼서도 안 되고, 하나님의 위치에 올라가서도 안 되고, 우리 밑에 있는, 하나님, 우리, 우리 밑에 최하위의 재물이 있고, 그것을 우리가 사용하면 되는 것이죠.

선악과라고 하는 나무가 나빠요? 뭐가 나빠요? 선악과가 나빠요? 선악과를 따먹으려는 게 나빠요? 예. 하나님이 만드신 그 에덴 동산에는 선악과 나무도 있었어요. 어떻게 있었어요. 그냥 관상용으로 있어요. 보고 즐길 수 있는 그 선악가로 그냥 거기 있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은 거예요. 그런데 아담과 하와의 마음 가운데, 그 선악과가, 그 재물이 아니라, 물건이 아니라,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이 아니라, 하와의 마음 가운데 이 선악가가 어떤 위치로 올라갔어요? 갈망의 대상이 된 거예요. 하나님을 능가하는, 하나님께서는 먹지 말라고 했으니까, 안 먹고 보기만 하면 되는 것인데,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케 만들고, 그 선악과를 먹어야만 하는 그런 경배의 대상으로 바뀌어 버리게 되었을 때, 결국 그것은 이 아담과 하와를 파멸로 이끄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재물도 마찬가지인데요. 재물이 재물의 자리에 있어야 하는 것이죠.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겁니다. 주의 일을 하는 데도 필요하고 여러 가지로 필요한 겁니다. 그런데 그 재물이 전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착각을 해서, 그 전능성을 가진 재물이 결국 신이 되어서, 하나님 그 신이 명령하는 대로 제물이 우리에게 명령하는 대로, 하나님의 말씀은 다 내 팽개쳐 버리고. 우리가 일만 할 것이 아니라, 중간에 하루 쉬고 하나님께 예배해라. 그런데, 다 그것도 무시해버리고, 돈을 벌기 위해서라고 한다면 그냥 다 하나님의 말씀 다 무시해버려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가 돈을 벌었다고 한다면,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하기도 하고, 하나님께 바치려야 될 것은 바치고 가야 되는데, 돈이 우상이 되다 보니까, 바치지도 못하는 거예요. 하나님께 감사하지도 못하는, 그냥 그것이 많으면 좋겠다고 하는 생각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안타깝게도 수많은 사람들이 이 재물을 우상의 위치로 올려 버리고 마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공평한 추구가 아닌 속이는 저울을 불사하면서, 돈을 더 많이 벌려고 하는 것이지요. 근데 그것은 어떤 것인가?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이다. 전능하신 하나님, 우리의 인생의 생사 화복을 주장하시는 그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돈 버는 것 자체를 미워하시는 것이 아니라, 부당한 방법을 사용하는 것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미워하는 그 일을 우리가 하게 되면, 지금 당장에는 아무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패망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는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나아만으로부터 많은 재물을 얻으려고 했지만, 결국 나아만의 나병까지도 얻게 되는 그런 안타까운 결과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아간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여리고 성의 전리품들을 탐내고 욕심을 냈다가, 죽임을 당하는 불상사를 겪게 되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은 삼십일이 탐이 나서 예수님을 배반했다가, 결국 파멸의 길로 가게 되었습니다.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의 재물을 폄훼하고 모욕하고,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 취하다가 결국 망하는 길로 가게 됐습니다. 초대교회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자신의 물건에 대해서, 욕심을 내다가 결국 망하는 길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왜 망합니까? 재물은 우리를 구원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전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말 아무런 능력이 없는 것이 재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선택은 하나님이 되어야 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선택한다고 한다면, 우리들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 정직하게 살아야 될 줄로 믿습니다. 부르신 부름의 자리가 어딥니까? 오늘 잠언서 11장 1절은 장사의 세팅에서 이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공무원이면 공무원의 자리에서, 직장인이면 직장인의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신 그 부름의 자리에서 신실하게 사역해 나가는 것이 그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이라고 하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늘 넘어져요. 늘 미혹을 받고 늘 유혹을 당해서 늘 실패합니다. 이대로 살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를 위해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피 흘려주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 놀라운 은총을 받은 우리가 이제는 감사하면서 이제는 주님의 뜻대로 더욱더 살기를 원합니다. 기도하면서, 늘 넘어질 때마다, 다시 일어나서 하나님 이제 다시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원합니다. 또 회개하고 또 결단하고 또 결단하고 우리는 늘 넘어지지만 늘 쓰러지지만, 그때 그때마다. 아 모르겠다고 그냥 계속해서 죄악의 길로 가면 구제불능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내가 속인 그 죄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바라봐야 돼요. 내가 했던 그 말 한마디 때문에, 예수님께서 나 대신 죽으셨다고 하는 것을 바라봐야 돼요. 그래서 지금 당장은 실망하고, 지금 당장은 내가 실패하고 넘어졌어도, 다시 일어나서 주님의 십자가 바라보면서, 다시 용기를 내야 되고, 다시 일어서야 되고, 십자가를 날마다 날마다 바라보면서 다시 힘과 용기를, 다시 회복의 역사가 우리들의 삶 가운데 넘쳐나야 될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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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오리 바람 (잠 10:22-32)

말이 많으면 (잠 10:13-21) +++ 공평한 추는 모두가 기뻐합니다 (잠 11:1)

오늘 본문의 말씀도 한 가지 주제가 아니라, 여러 가지의 주제들이 섞여져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의 말씀을 한 주제씩 한 주제씩 분석해 가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먼저 22절의 말씀을 살펴보려고 하는데요. “여호와께서 주시는 복은 사람을 부하게 하고, 근심을 겸하여 주지 아니하시느니라”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아주 매혹적인 말씀입니다. 부하게 되는 것만 해도 매혹적인 말씀인데, 부하게 되는 것이, 부가 따라오는 것이 아무런 근심이 없는, 그런 부가 오게 되는 것이다라고 하는 것이니까, 정말 매력적인 것이죠.

항상 좋은 게 있으면, 나쁜 것도 같이 따라오게 되고, 항상 모든 게 다 완벽하게 100% 다 좋은 게 아니라, 어느 정도 좋고 또 그 가운데는 나쁜 것까지 같이 따라오는 그런 일들을 우리가 경험을 많이 하게 되는데, 오늘 22절 말씀에서 하시는 말씀이 무슨 말씀을 하시냐 하면, 여호와께서 주시는 복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을 부하게 하기는 하지만, 그러나 근심이 겸하여 오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어떤 복입니까? 완벽한 복이죠. 80점짜리 복이 아니라, 100점짜리 복이다. 이 말입니다. 그런 것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가졌으면 좋을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온전히 좋을 수만 있다고 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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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렇게 100점짜리 복, 80점은 좋지만 20점이 안 좋은, 70점은 좋지만 30점이 안 좋은, 그런 불완전한 복이 아니라, 그런 나쁜 것이 하나도 없는 그야말로 완전 무결한, 정말 아무런 흠도 없는, 그런 완벽한 복이 우리들에게 주어진다고 한다면, 너무나도 좋을 것인데, 오늘 22절 말씀에서 해 주시는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그런 복은 어떻게 받을 수 있겠는가? 그 복은 누가 주신다고요? 여호와께서 주시는 복은 그런 복이다라고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자, 그러면, 여호와께서 주시는 복이라고 하는 게, 도대체 어떤 복을 가리켜서 여호와께서 주시는 복이라고 말하는 것일까요? 도대체 여호와께서 주시는 복이라고 하는 게, 도대체 무슨 복을 가리켜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만일 여호와께서 주시는 복이 있다고 한다면, 여호와께서 주시지 않는 그런 복도 있습니까? 여호와께서 주시지 않는 그런 복도 있다는 말입니까? 여호와께서 주시는 복은 완전한데, 여호와께서 주시지 않는 다른 복들은 불완전하다고 하는 그런 말이라고 한다면, 그러면 우리가 받는 복이 하나님에게서 받는 복도 있는 반면에, 하나님이 아닌 다른 존재로부터 받는 그런 복, 예를 들면 사탄에게서 받는 그런 복도 있다고 하는 말입니까? 도대체 여호와께 받는 복이 무엇이고, 여호와께로부터 받지 않는 복이라고 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그냥 지나치고 넘어갈 게 아니고, 도대체 이 말씀이 무엇을 가르키고 있는지, 도대체 어떤 의미인지 질문을 한번 던져보아야 하는 것이죠. 도대체 여호와께서 주시는 복이라고 하는 게, 도대체 어떤 복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여호와께서 주시는 복이 무엇입니까? 사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받는 모든 것이 그냥 저절로 우리들에게 굴러 들어오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뜻과 섭리 가운데서 우리들에게 오는 것입니까? 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통해서 본다고 한다면, 어느 것이 우리에게 오든, 그 무엇이 우리에게 오든 그 모든 것들이 다 누구로부터 온다고 고백할 수가 있나요? 하나님께로부터 올 수 있다고, 온다고 그렇게 고백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야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하나님께서 허용하시고 하나님께서 인도하셔야, 그래야 우리들의 이 삶 가운데서 모든 것들이 일어난다고 한다면, 사실은 우리가 가지는 그 모든 것들이 다 누가 주신 거예요? 하나님이 주신 거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우리들에게서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이 다 누가 주신 거예요? 다 하나님께서 주신 거예요. 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고,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하는 말씀이 무슨 말씀을 하냐면, 여호와께서 주시는 복음 부를 주시고, 부하게 하시고, 그리고 근심을 겸하여 주시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니까, 이 말씀이 조금 어려운 것입니다.

이 세상에 좋아 보이는 것이든, 나빠 보이는 것이든,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의 뜻과 섭리 가운데, 우리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도대체 여기서 그렇다고 한다면 왜 여호와께서 주시는 복이라고 하는 이런 표현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도대체 여기서 말하는 여호와께서 주시는 복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여호와께서 주시는 복이라고 하는 이 표현이 단순히 출처를 의미하는 표현이 아닐 수 있겠구나 라고 하는 사실을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은, 그 출처가 다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허용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얻게 된다고 하는 점에 있어서, 우리가 가지는 모든 것들은 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에, 여기서 말하는 여호와께로 여호와께서 주시는 복이라고 하는 이 표현이 복의 출처를 의미하는 표현이라기보다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면서 얻게 되는 복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습니다. 한 가지 방법은 의로운 방법이고, 또 하나의 방법은 악한 방법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의로운 방법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가운데 얻게 되는 것, 그러한 것을 가리켜서 여호와께서 주시는 복이라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이죠. 우리가 지금 복을 구하는데, 우리가 정말 좋은 것을 구하고 있는데, 우리가 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대로 따라가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 삶을 살면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구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이라고 표현할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방법이 아니라, 의롭지 않은 악한 방법을 통해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악한 방법을 쓰는 것이죠. 예를 들자면 도둑질하거나 속여 빼앗거나 여러 가지 악한 방법으로, 그래서 그것을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의지하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복을 베풀어주실 것을 의지하면서 얻는 복이 아니라, 하나님과는 상관없이 내가 내 힘으로 내 악날한 방법을 통해서 나의 사악한 방법을 통해서 내가 원하고자 하는 그것을 얻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여호와께서 오시는 복 여호와께서 주시는 복이 아니라, 내가 내 마음대로 얻는 복, 내가 악한 방법으로 얻는 복이라고 표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말하는 여호와께서 주시는 복이라고 하는 것은 출처를 의미한다기보다는, 무슨 방법을 사용해서 복을 얻느냐의 차이점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악한 방법으로 얻는 복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가? 어떤 결과를 가져오겠습니까? 지금 당장은 좋아 보이지만 결국은 파멸로 결국은 근심으로 갈 수밖에 없는 소득이 되는 것이죠. 의로운 방법, 하나님께서 정하신 법칙대로 순종하며 땀을 흘리며 노력하고 신실한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규정하신 대로 열심히 노력해서 우리가 부를 얻는다고 한다면, 그 부는 여호와께서 주시는 복이고, 그 여호와께서 주시는 부에는, 근심과 걱정이 따라오지 않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방법으로 속이고 빼고 악한 방법을 통해서 내가 하나님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법칙과는 정반대의 길을 걸어가면서, 내가 내 능력으로, 내가 마음대로 갈취하는 그런 사악한 재물들은 지금 당장은 힘이 있어 보이고, 지금 당장은 좋아 보이게 되겠지만, 결국에는 그 물질로 인해서 우리가 파멸로 나아갈 수밖에 없고, 결국 그 물질 때문에 우리가 더욱더 근심하는 결과로 갈 수밖에 없다고 하는 점을, 오늘 이 22절의 말씀 가운데서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론은 무엇입니까? 버킹검이죠. 결론이 뭐예요?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면서 부를 축적하라라고 하는 것이, 결론의 말씀인 거죠. 정직하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가운데, 신실한 방법으로 얻을 모든 부를 축적해 나가고 재물을 축적해 나갈 수 있다고 한다면, 근심이 없을 것이지만 정직하지 못한 방법, 불의한 방법으로 많은 것을 얻게 된다고 한다면, 그것이 결국은 근심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 성도들이 깊이 기 기억하고, 매 순간순간마다 우리들에게 결단의 순간들이 오게 될 텐데, 그 결단의 순간에서 믿음의 결단들을 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22절의 말씀이, 오늘 읽은 성경 다른 구절들과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구절의 말씀들과 연결되어 있다고 하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23절부터 계속해서 의인과 악인의 이야기를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는데요. 23절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미련한 자는 행악으로 낙을 삼는 것 같이, 명철한 자는 지혜로 낙을 삶느니라.” 24절의 말씀에, “악인에게는 그의 두려워하는 것이 임하거니와, 의인은 그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느니라.” 25절의 말씀에, “회오리 바람이 지나가면 악인은 없어져도 의인은 영원한 기초 같으니라.” 28절의 말씀에, “의인의 소망은 즐거움을 이루어도, 악인의 소망은 끊어지느니라.” 29절의 말씀에, “여호와의 도가 정직한 자에게는 산성이요. 행악자 행악하는 자에게는 멸망이니라.” 30절 말씀에, “의인은 영영히 이동되지 아니하여도, 악인은 땅에 거하지 못하게 되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가 지혜로운 자입니까? 지혜로운 자는, 어떤 기발한 아이디어를 생각해낼 수 있는 사람이 지혜로운 자가 아니고, 지혜로운 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가 지혜로운 자인 겁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사는 것이고,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자는, 의로운 사람이고, 의롭게 행하는 자인 것이고, 그렇게 의롭게 행동한다고 하면, 그런 사람에게는 두려울 일이 없을 것이고, 그 의로운 자에게는 자신들이 원하는 것들이 이루어지게 될 것이고 소망이 이루어진다라고 하는 것이 금방 읽은 말씀의 그런 의미입니다.

반대로 누가 어리석은 자인가? 누가 미련한 자인가? 그런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미련한 자요. 어리석은 자이고, 따라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악을 행하는 것이며, 악을 따라 행하다 보면,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두려워하는 그것이 임하게 될 것이고, 결국은 멸망의 길로 가게 될 것이다.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이 있는데, 그 길이 완전히 다르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고, 지금은 의인의 길이나, 지금은 악인의 길이나, 별반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여요. 이것이 우리들을 늘 유혹하는 것이죠. 의롭게 살아보았자 별거 없네. 악하게 살아도 괜찮네. 라고 하는 것이 우리들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겁니다. 의롭게 살아도 별 볼 일 없는 것 같이 보이고, 악하게 살아도 괜찮은 것처럼 보이는, 이 세상 가운데서, 우리는 의의 길로 가는 것이 아니라, 악인의 길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길로 미련한 길로 가게 될 터인데,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말씀해 주신 말씀이 무엇이냐면, 지금 당장 괜찮아 보인다고 해서 괜찮은 게 아니라, 결국 무엇이 다가올 수 있습니까? 회오리 바람이 다가오면, 어떻게 돼요? 악인은 어떻게 된다? 없어져 버린다 이거예요.

회오리 바람이 불지 않으니까, 괜찮은 것 같은데, 회오리 바람이 불어닥치면, 결국 산성이 아닌, 그 산성이 아닌 그 집은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는 거예요. 기초가 튼실하지 못하면, 결국 무너져 버릴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인데, 바로 이 잠언서의 말씀을 읽다 보니까, 예수님께서 해 주신 말씀이 기억이 납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7장 24절에서부터 27절의 말씀에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주를 반석 위에 지어놓은 까닭이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리라.” 예수님께서도 지혜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겁니다. 지혜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이 집을 지었는데, 그 두 집이 똑같아요. 겉으로 보기에는 괜찮아요. 지혜로운 사람이 지은 집이나, 어리석은 사람이 지은 집이나 괜찮아요. 때로는 때로는 이 어리석은 사람이 지은 집이 훨씬 더 크고 훨씬 더 아름답고 훨씬 더 매력적으로 보일 수가 있어요.

그런데 언제 문제가 되는 겁니까? 우기가 되어 창수가 나기 시작하면, 비가 내려서 물길이 쫙 다가오게 되면, 모래 위에 세운 집은 무너져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악인의 길은 곧 쓰러질 수밖에 없으니까, 결론은 뭡니까? 결론은 악인의 길을 걸어갈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의의 길로 걸어가야 한다는 것이 결론이라고 하는 것을 기억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믿습니까?

오늘 이 말씀들을 살펴보는 가운데 우리가 하나 좀 깊이 생각해 보아야 될 말씀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27절의 말씀입니다. 27절의 말씀에 뭐라고 표현하고 있냐면 여호와를 경외하면 어떻게 된다고요? 장수하느니라. 그러나 악인의 수명은 어떻게 된다고요? 짧아지느니라. 정말 그렇습니까?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은 정말 오랫동안 장수하는 것 맞습니까? 악인의 수명이 짧은 것 맞습니까? 정말 그래요? 안 그래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시는데, 안 그런 것 같아요. 우리 주변에 보면, 정말 믿음의 사람인데, 하나님이 일찍 데려가시는 그런 안타까운 그런 경우를 보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 보면 어떤 사람도 있어요? 귀신은 저 사람 안 잡아가고 뭐 하나 싶을 정도의 사람이 있단 말이에요. 성경 말씀이 틀린 겁니까? 어떻게 된 겁니까 ?성경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장수할 것이다. 이야기하고 있고, 악인은 단명할 것이라고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는데, 우리가 만나는 현실에서는 그런 것 같이 보이지 않아 보이는 일들이 너무나도 많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제가 물어보니까, 고개를 다들 절레절레 흔드셨는데, 성경이 틀렸습니까? 우리가 잘못 보고 있는 건가요? 악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생명과의 관계가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 건가요? 아예 없는 것인가요? 도대체 무엇일까요? 아무리 생각을 해보아도 장수하는 것이 의인이냐 여부와는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어 보인다고 하는 것이 오늘 우리의 문제입니다.

정말 단명한 사람들은 악인들이어서 단명했을까요? 정말 지금도 오래 살고 있는 사람들은 선한 사람이기 때문에 오래 살고 있는 것일까요?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런 것 같지 않고, 그렇다고 한다면 성경 말씀이 잘못된 것일까요? 성경이 오류가 있는 것일까요? 왜 성경은 이런 별로 납득이 안 되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 것일까요? 그런데 이 말씀에만 여기에 이렇게 써 있는 것이 아니라, 십계명 가운데 제5계명에도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데요. 부모를 공경하면 하나님께서 주신 이 땅에서 너희의 생명이 길리라라고 말씀해 주셨고, 그 말씀을 신약 성경인 에베소서 6장에서도 반복해서 이렇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부모를 공경하면 장수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 외갓집 식구들은 다 90세, 100세 막 이렇게 사시는데, 부모를 공경해서 그런 건가요? 왜 그렇죠? 실제로 우리가 느끼는 것은 부모를 공경하는 것과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과 생명의 길이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경이 틀렸나요? 그럼 어떻게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저는 이 말씀이 저는 담배와 같다고 생각이 듭니다. 담배가 뭐냐? 담배라고 하는 것은 건강에 좋지 않은 겁니다. 그래서 담배를 피면 건강이 나빠지게 돼 있고, 담배를 피면 암을 비롯해서 여러 가지 심각한 질병을 걸릴 수가 있겠고, 더 나아가서 수명이 단축될 수 있습니다. 담배가 그런 좋지 않은 역할을 한다는 것 다 동의하십니까? 동의하지 않습니까? 다 동의할 거라고 생각이 들어요. 과학적인 사실이니까요. 그런데 우리가 실제적으로 우리 주변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보면, 예외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예외가 많아요. 골초들이 장수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골초들이 건강한 사람들이 많아요. 희한하단 말이에요. 담배 하나도 안 피운 사람들이 암에 걸리고, 질병에 걸리고 그러는데, 담배 핀 사람들은 건강한 사람들이 주변에 많이 있어요. 그런 예외들이 엄청나게 많아요. 그런데 그러니까 담배와 건강은 상관이 없다라고 결론을 내리는 것이 옳을까요? 옳지 않을까요? 옳지 않은 겁니다. 그래서 정부에서는 담배곽에다가 심각한 경고 문구를 적어놓는 겁니다. 흡연을 하게 되면 이런 이런 질병에 걸릴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경고 문구를 적어놓기도 하고, 환자의 그 아주 끔찍한 사진을 그 담배곽에다가 사진을 붙여놓기도 하고, 그래서 피우지 말라고 경고를 하는 겁니다. 담배 피우지 않는 게 좋으니까요. 담배 피우는 분 계시면 끊으십시오.

하지만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내 주변에 장수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내 주변에 담배 피워도 괜찮은 사람들이 있으니까, 괜찮겠지 괜찮겠지 하면서 피우는 겁니다. 천편일률적으로 담배와 담배를 피우느냐 피우지 않느냐가 사람의 수명을 완벽하게 결정하는 요인일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담배는 건강에 좋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피우지 않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옳은 것인 것처럼, 오늘 성경 말씀은 어쩌면 우리들에게 실감이 되지 않는 말씀처럼 느껴질 거예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과 장수하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으며, 부모를 공경하는 것과 장수와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우리 주변에 보면 반대되는 얘를 얼마든지 만나볼 수 있습니다. 이건 아무 상관이 없는 거라고 그렇게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그렇게 설득시키면서 하나님 안 믿어도 괜찮아, 의롭게 살지 않아도 괜찮아, 부모를 공경하지 않아도 괜찮아, 아무 문제가 없어. 괜찮아, 오래 살 수 있어. 그렇게 해봤자 소용 없어라고 우리 자신을 설득시키려고 하는 그런 악한 마음들이 우리들에게 있지만,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실제적으로 개인의 생명이 길고 짧은 것은 개인의 여러 가지 복잡한 요인에 따라서 달라질 겁니다. 사람의 생명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단순히 이 사람이 부모를 공격했느냐의 한 요인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이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느냐, 이 한 요인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의 생명에 미치는 그 영향이라고 하는 것은 다양한, 정말 천차만별의 이유에 따라서, 어떤 사람은 단명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장수할 수도 있고, 다양하게 나타나고, 아무튼 그 요인들이 많기 때문에 무엇이 이것이 정답이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겠지만, 그러나 이 하나님의 말씀, 우리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경외하지 않는 것보다, 그것이 훨씬 더 바른 길이고, 생명의 길이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건강하게 살 수 있는 그런 길이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믿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담배가 우리의 건강을 해치는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 말씀이 우리의 인생 가운데 이렇게 나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고 할지라도,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야 되겠구나. 뿐만 아니라 우리가 부모를 공경하며 사는 것이 옳은 것이고, 그것이 장수의 그런 약속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믿으며 믿음으로 살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잠언서 10장 31절과 32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의인의 입은 지혜를 내어도, 패역한 혀는 배임을 당할 것이니라. 의인의 입술은 기쁘게 할 것을 알거늘, 악인의 입은 배역을 말하느니라.” 의인의 입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지혜 있는 자인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자는 그 입술도 정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말들을 하게 될 것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지혜가 없는 자들은, 패역한 말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결국은 패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입술에도 주님께서 파수꾼을 세워주셔서, 정말 지혜로운 말을 할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스스로 제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의인의 혀를 가지고 있는 것이 생명의 길이고, 또한 악인의 혀를 가지고 함부로 말하는 것이 그것이 망하는 길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믿음으로 우리들의 입술 가운데서 선하고 의로운 말들이 나올 수 있도록, 우리가 주님께 기도하며 나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인생 가운데 늘 넘어지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대로만 살 수 있다고 한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러나 이런 말씀대로 살지 못하고, 늘 넘어지고 또 넘어지기 때문에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넘어질 때마다, 주님 앞에 다시 회개하고 나아가야 될 것이고, 또한 주님의 성령을 의지하고 간구하면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믿음의 길을 걸어가게 해달라고 날마다 날마다 기도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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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많으면 (잠 10:13-21)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느니라 (잠 10:6-12) +++ 회오리 바람 (잠 10:22-32)

오늘 우리가 잠언서의 말씀을 읽었는데, 오늘 읽은 잠언서의 말씀은 주제가 하나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두 마디로 오늘 본문의 말씀을 요약하기는 좀 어려울 것 같아요.

어떤 주제들이 있는가 하는 것을 한번 살펴본다고 한다면, 우선은 “지혜롭게 말하는 것”에 대해서 먼저 언급하고 있습니다. 13, 14절 그리고 18, 19, 20, 21절에서, 지혜롭게 말하는 것과 지혜롭지 못한 방법으로 말하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요. 두 번째 주제는 무엇이냐면, 15절에 나오는 “재물과 궁핍”에 관한 주제입니다. 세 번째 주제는 “의인과 악인”을 대비시킨 이야기가 16절과 17절의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 가지 주제들이 하나로 일관적으로 쭉 흐름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이 세 가지 주제들이, 좀 더 나눈다고 한다면 더 많은 주제들을 말할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이 세 가지 주제들이 여기저기 섞여서, 오늘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세 가지 주제들을 중심으로 해서 하나씩 하나씩 살펴보면서 오늘 본문의 말씀을 이해해 보려고 합니다. 먼저 “악인과 의인”에 대한 대비의 말씀을 살펴보고 싶은데요. 16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의인의 수고는 생명에 이르고, 악인의 소득은 죄 이르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악인의 소득이 죄에 이른다고 하는 그 말씀은 의인의 수고가 생명에 이른다는 것에 반대의 말씀이니까, 죄에 이른다고 하는 말의 의미는 곧 죽음에 이른다고 하는 의미로 이해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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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한다면 의인의 수고가 생명에 이른다고 했는데, 그러면 의인의 수고라고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반대로 악인의 소득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우리는 종종 생각할 때, 늘 이분법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의인이 따로 있고, 악인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의인이 따로 있고 악인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은, 우리가 동화를 많이 읽었기 때문이고, 소설이나 영화나 드라마들을 많이 보아 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런 동화책이나 소설이나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악인이 있고 의인이 있습니다. 주인공은 대체로 의인이고, 그리고 그 의인에 반대되는 역할을 하는 악인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마음이 편하죠. 왜냐하면, 누구를 미워해야 하고, 누구를 사랑해야 될 것인가가 분명하게 나타나기 때문에 마음이 편한 겁니다.

콩쥐 팥쥐의 이야기에서 누가 착한 사람이죠? 콩쥐가 착한가요? 팥쥐가 착한가요? 콩쥐입니까? 아무튼 둘 중에 하나가 착하고, 둘 중에 하나는 나쁜 겁니다. 신데렐라와 그의 다른 배다른 언니들이 있다고 한다면, 신데렐라는 착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악한 겁니다. 드라마를 보거나, 영화를 보거나, 우리가 늘 보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주인공이 있고, 그 악역이 있고, 의인이 있고, 그리고 나쁜 사람이 등장하는 그런 이분법적인 사고에 우리가 너무나도 많이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늘 생각하기를 의인이 따로 있고 악인이 따로 있다라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예를 들어서 성경에 나오는 인물 가운데, 다윗은 의인이고, 사울은 악인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의인의 수고는 생명에 이르고, 악인의 소득은 주에 이르느니라. 즉 멸망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는 이 말씀을 읽을 때, 우리의 생각에 어떤 생각을 하게 되냐면, 어떤 의인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결국 그 의인은 생명의 길로 가게 될 것이지만, 어떤 악인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 악인은 결국 망하게 될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늘 우리가 이렇게 이분법적으로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정치인들을 바라볼 때도, 내가 지지하는 정치인들은 좋은 정치인이지만, 내가 지지하지 않는 정치인에 대해서는 아주 나쁜 정치인이라고, 아주 사악한 사람이라고 그렇게 이분법적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우리가 같이 좋게 지나다가도, 그 사람이 정말 괜찮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어느 순간에 잘못하게 되면, 저 사람이 의인이 아니라 악인이구나라고, 낙인 찍어버리고, 더 이상 그 사람은 의인이 될 수가 없는, 나쁜 사람의 범죄 속으로 집어넣어 버리면, 그 사람이 무슨 짓을 해도, 그 사람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그런 이분법적인 경향들이 우리들에게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읽으면서, 의인의 수고는 생명에 이른다. 악인의 소득은 죄에 이른다라고 하는 말을 할 때, 그것은 이 사람이 의인이냐? 악인이냐?를 생각하고, 그렇다고 한다면, 이 사람은 좋은 결과를 맺게 될 것이지만, 저 사람은 나쁜 결과를 얻게 될 것이라고 하는 식으로 이해하게 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이런 이분법적인 관점은 정당한 관점이 아닙니다.

다윗이라고 하는 사람을 우리가 성경에서 보게 되면, 다윗이 항상 의로웠느냐 하면 그렇지 않아요. 한때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지만, 그러나 다윗이 사울보다도 더 사악하게 행동한 적도 있는 것이죠. 사울왕도 나쁜 왕이지만, 그 사울이 항상 나빴던 것만은 아닌 것이죠. 사람은 누군가? 사람은 우리가 쉽게 이 사람은 의인이라고 말할 수 있고, 저 사람은 나쁜 사람이라고 쉽게 레이블을 붙여서, 색깔을 칠해서, 이 사람은 좋은 사람, 이 사람은 나쁜 사람, 저 사람은 아주 더러운 사람, 이 사람은 아주 거룩한 사람, 그렇게 레이블링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죠.

우리가 정말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 중에 하나가 무엇이냐면, 쉽게 어떤 한 사람을 색깔을 칠해버리는 것이죠. 저 사람은 빨간색, 저 사람은 파란색이 돼버리고, 그래서 그 사람을 그렇게 판단해 버리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도 없을 겁니다. 그건 아주 유치한 일이 되고야 말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고 있는 의인의 수고라고 하는 것은, 그런대로 괜찮은 사람들의 수고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법대로 따라서 얻는 수고를 의미하는 것이고요. 악인의 소득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어떤 사람들, 나쁜 사람들의 소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법을 어기면서 악한 방법으로 무엇인가를 얻는다고 한다면, 그것이 악한 소득이 된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오늘 이 16절의 말씀을 이해할 때, 그 의미가 무엇이냐면, 믿음의 길을 걸어가며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한다면, 그것이 곧 생명의 길이겠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리고 악한 길로 간다면, 그 길은 망하는 길이라고 하는 것을 가르쳐주시는 말씀으로 이해하고,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교훈을 얻어야 할 것은, 그러니까 어떻게 해야 된다는 말씀입니까? 매 순간순간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분별하면서 수고해야 된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7절의 말씀도 역시 같은 의미의 말씀입니다. “훈계를 지키는 자는 생명길로 행하여도, 징계를 버리는 자는 그릇 가느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훈계를 잘 듣고, 지키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로 걸어가는 자가 생명의 길로 가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채찍질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끝끝내 저버리고 악한 길로 간다면, 그 길은 망하는 길이라고 하는 사실을 오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두 번째 주제는 15절 말씀 가운데 있습니다. 15절 말씀에서는 “재물과 궁핍”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요. “부자의 재물은 그의 견고한 성이요. 가난한 자의 궁핍은 그의 멸망이니라”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잠언서 10장 15절의 말씀을 읽으면서, 이 잠언서 10장 15절의 말씀이 재물에 대해서, 아주 긍정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좀 잠깐 당혹스러움을 느끼신 분들이 계십니까? 어떤 분들은 이 말씀을 읽으면서, 아마 불편하게 느꼈을 분들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성경에서 읽는 재물에 관련된 성경의 말씀에서 우리가 주로 듣는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를 듣냐면, 재물에 대해서 긍정적인 이야기를 합니까? 부정적인 이야기를 합니까? 성경에서 성경에서 우리가 종종 듣는 메시지가 무엇이냐면, 재물에 대한 부정적인 이야기를 굉장히 많이 듣습니다.

재물을 의지하지 말라. 너의 소유를 의지하지 말라. 등등 재물에 대해서 아주 부정적인 표현들이 성경에 많이 나와 있는데, 오늘 잠언서의 말씀은 재물에 대해서 어떤 종류의 메시지를 전해 주냐면, 부정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긍정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하는 점에 있어서, 아마 예상치 못했을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부자의 재물이 무엇이냐? 견고한 성과 같다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그런데 가난한 자가 궁핍한 것은 무엇인가? 멸망을 당하는 것과 같다. 그러니까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재물이 좋다는 얘기입니까? 나쁘다는 얘기입니까? 좋다는 얘기예요.

좋다고 하는 이야기를 잠언서에서 읽게 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당혹스러워 할 수가 있을 겁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재물에 대한 부정적인 이야기들이 많이 등장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를 들자면, 예수님을 찾아왔던 젊은 관원에게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19장 21절의 말씀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온전하고자 할진데 가서 내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그렇게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셨어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그 젊은 관원을 향해서, 그 정도 신앙생활 가지고는 안 되니까, 어떻게 하라는 얘기예요? 가지고 있는 재물들 다 갖다 내버리라고 말씀해 주신 겁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해주셨는데요. 마태복음 6장 24절의 말씀을 보면,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기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섬기려고 한다면, 무엇을 버려야 한다는 말씀입니까? 재물은 버려라. 하나님과 재물을 둘 다 다 잡을 수 없고, 하나님과 재물을 둘 다 다 섬길 수 없고, 하나님을 선택하려면 재물을 버려야, 하나님이 선택이 되는 것이지, 재물을 가진 채로 하나님을 선택할 수 없는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신 겁니다.

그러니까 이런 말씀들을 읽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게 되냐면, 재물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신앙의 거추장스러운 것이고, 신앙인들이라고 한다면,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고 했던 최영 장군의 그 말씀처럼, 우리가 물질에 대해서는 마음을 내려놓아야 재물은 내가 그냥 내버리고 오로지 주님만을 선택해야, 불교에서 말하는 식으로 무소유의 삶을 목표로 하는 것이 우리 기독교인들의 목표가 아니겠는가? 정말 가난한 삶, 정말 지족하는 삶, 정말 내가 이 세상에 물질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가난하게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가장 고상한 삶의 방식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말씀들입니다.

실제로 우리 기독교 역사를 보면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고, 그래서 모든 재물들을 다 내버리고, 그저 청빈의 삶을 사는 것이 가장 고상한 것이라고 생각한 경우도 많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불교처럼 무소유의 삶을 살아야 그게 진짜 신앙이라고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도 무소유의 삶을 살아야만 한다고 가르치는 분들도 있기는 있으나, 사실 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본다고 한다면 그런 의미의 가르침이 성경적인 가르침이 아닙니다. 성경 전체의 교훈을 보자고 한다면, 성경 전체에서 가르쳐주시는 재물에 대한 관점이 있다고 한다면,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으로, 이 세상의 것들을 우리가 누리면서 하나님을 만끽하는 것이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을 즐기는 방법이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풍성하심을 깨닫게 되는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허락해 주신 것을 마음껏 누리면서, 이 세상에 그 아름다움과 그 위대한 것들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그 삶이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방편이 되는 것이라고 성경은 가르쳐주고 있는 겁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수고하고 노력해서 그래서 선한 열매들을 많이 거두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성경은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가운데, 내 힘과 능력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하고 섬기는 가운데 열심히 수고하며 애쓴 자에게는 재물이 따르게 되는 것이고, 그것을 통해서 삶을 윤택하게 하며 그렇게 살아가는 것은 견고한 성처럼 우리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 된다는 게 성경에서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고요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반역하며 살아가고 게으르게 살게 된다고 한다면 결국 가난이 따르게 되고, 결국은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는 것이 성경에서 가르쳐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재물에 대해서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한편에서는 재물에 대해서 잠언서 10장 15절의 말씀처럼 재물에 대해서 긍정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 반면에, 또 한편에서는 재물에 대해서 부정적인 이야기를 동시에 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이 재물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들에게 견고한 성이 되기 때문에, 이 견고한 성이 되는 이 제물을, 그것으로 그냥 재물의 위치를 그대로 두는 것이 아니라, 그 재물을 그 재물의 위치에서부터 높여서, 우상의 위치로 올려버릴 때 문제가 되는 것이죠. 재물이 견고한 성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면서 부지런히 일하면서, 그런 견고한 성과 같은 재물을 얻기 위해서 노력해야 되는데, 그런데 그렇게 못하는 겁니다. 제대로 열심히 노력하지도 않고, 수고하지도 않고, 내가 정말 하나님께서 주신 방법대로 열심히 일할 수 없으니까, 일하지 못하니까, 결국은 궁핍이 오게 되어 있는데, 그런데 제물은 갖고 싶으니까, 어떠한 방법을 쓰는 겁니까? 잘못된 방법을 쓰는 것이죠. 사기와 도둑질과 빼앗는 것과 또는 우상숭배와 요행 등을 통해서, 그러한 재물들을 얻으려고 하는 시도를 하게 되는데, 그것은 왜 그런 잘못된 방법을 통해서 시도하게 됩니까? 재물이 나에게 우상이 되어 버리면, 그런 잘못된 방법을 시도하게 되는 것 뿐만 아니라, 재물이 나에게 우상이 되어 버리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그 재물들을 가지고 사랑을 베풀며 살아야 하는데, 사랑을 베풀지 못하며 사는 겁니다.

주를 위하여 헌신하며 살아야 되는데, 주를 위해서 사용할 수 없는 겁니다. 오히려 이 물질을 더 많이 얻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착취하고, 다른 사람들을 향해서 갑질을 해대며 악한 모습을 보여주고, 이기적으로 탐욕적으로 그래서 더 많은 재물을 얻고자 하는 잘못된 방법을 쓰게 되는 것인데요. 그것이 바로 재물이 우리들의 우상으로 변해버리는 잘못된 모습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한다면, 과연 너의 하나님이 누구인가를 다시 한 번 질문해보라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이냐? 아니면 재물이 하나님이냐? 너의 신이 누구냐를 물어보는 것인데요.

오늘 15절의 말씀에서는 그런 잘못된 방식의 재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와 축복 가운데 내가 성실하게 일하고 성실하게 노력하고 바른 방법을 통해서 재물을 얻고 부자가 된다고 한다면, 그것이 곧 견고한 성과 같은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부자의 재물은 그의 견고한 성이요. 가난한 자의 궁핍은 그의 멸망이니라”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어떻게 결론을 내려야 됩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부지런히 일하면서 최선을 다해서 노력해서, 이러한 견고한 성을 얻기 위한 정당한 노력을 해야 되겠다고 하는 결심을 해야 되는 거에요. 그런데 악한 사람은 어떤 결론을 내립니까? 견고한 성이 되니까, 재물이 견고한 성이 되니까, 속여서라도 내가 더 많이 가져야 되겠다. 공금을 내가 횡령해서라도, 내가 이 재물을 가져야 되겠다. 남의 것을 빼앗아서라도 내가 이것을 가져야 되겠다. 당연히 사랑해야 될 이웃을 향해서 베풀고 하나님을 위해서 사용해야 될 것까지도 내가 내 것으로 쓰면서, 나의 욕심을 채워야 되겠다고 하는 잘못된 결론으로 이끌어져서는 안 된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주제는 지혜롭게 말하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13, 14절과 18절에서 21절까지의 말씀입니다. 13절 14절의 말씀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명철한 자의 입술에는 지혜가 있어도, 지혜 없는 자의 등을 위하여는 채찍이 있느니라. 지혜로운 자는 지식을 간직하거니와 미련한 자의 입은 멸망에 가까우니라.” 13절 14절의 말씀을 요약한다고 하면, 우리가 말할 때 어떻게 말해야 된다는 건가요? 지혜롭게 말해야 된다는 겁니다. 어리석게 말하고 미련하게 말하면, 결국 고통스러울 것이고 멸망을 맛보게 될 것이니까, 지혜롭게 말해야 된다고 하는 것이 13절 14절의 말씀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말하는 것이 지혜로운 것일까요? 18절에서 그 대답을 해주고 있습니다. “미움을 감추는 자는 거짓된 입술을 가진 자요. 중상하는 자는 미련한 자이니라”라고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자, 미움을 말하지 않고, 그 미움을 감추고 있으면, 그 입이 어떤 입술이라고요? 거짓된 입술이다라고 말씀해 주면서, 그런데 미워하고 중상 모략하고 비난하고 하는 그런 말을 하는 자는 어떤 사람이다? 미련한 자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말을 하라는 얘기입니까? 하지 말라는 얘기입니까? 말을 안 하면 거짓된 입술을 가지는 자가 되는 것이고, 말을 하면 미련한 자가 되는 것인데, 말을 해야 됩니까? 말을 하지 말아야 됩니까? 무슨 얘기냐 하면, 아예 미움을 품지 말라는 얘기입니다. 아예 나쁜 마음을 품지 말라는 것이죠.

문제는 우리가 말을 어떻게 하느냐가 아니라, 지금 지혜롭게 말하는 것에 대해서 오늘 잠언서에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지혜롭게 말을 하려고 해야 되기 때문에, 내가 미워하는 말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가 중요할 거라고 생각하는 우리들을 향해서 18절에서 해 주는 말씀이 뭐냐면, 미워하는 말을 감추고 있으면, 거짓 입술이 된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고, 그렇다고 미워하는 말 중상하는 말을 해버리면 그 사람은 미련한 자다라고 말씀해 주시는 것은 무엇이냐면, 그러니까 사실은 말보다도 더 중요한 게 무엇이라고 하는 의미입니까? 우리들의 마음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고 있는 거죠.

미워하는 말을 안 하면 좋겠지만, 안 하면 좋겠지만, 그러나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이 있는데 무엇입니까? 아예 미워하는 마음을 갖지 않는 것이죠. 지혜롭게 말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마음을 갖는가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쌓은 선에서부터 선한 말을 하게 되고, 우리가 쌓은 악에서부터 악한 말을 하게 되어 있는데(마 12:35), 만일 우리가 악한 것을 마음속에 쌓은 상태에서 그 악한 것을 쌓았기 때문에 결국은 그 악한 미움의 말이 입으로 나올 수도 있고 안 나올 수도 있는데, 말을 한다면 미련한 자가 되는 것이고, 말을 하지 않고 입을 다물고 있는다고 한다면 그 입술은 거짓된 입술이 되는 것이니까, 사실은 18절에서 우리들에게 권면해 주시고 있는 말씀이 무엇이냐 하면, 말을 나쁜 말을 하느냐? 안 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이전에 나쁜 마음을 갖지 않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19절의 말씀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하기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 그러니까 말을 많이 하라는 얘기입니까? 말을 하지 말라는 이야기입니까? 말을 하지 말라는 얘깁니까? 침묵이 금입니까? 아니요.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하기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가 지에 있다고 이야기했는데, 이 19절의 말씀은 그러니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있어라가 아니에요. 말하지 않는 게 최고다가 아니에요. 침묵이 금이다가 아니에요. 여기서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하기 어렵다고 하는 이야기는 무슨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하기 어렵다는 이야기입니까? 나쁜 말이죠. 미움의 말이죠. 사람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말이고, 사람들을 괴롭히는 말이고, 중상 모략 불평하는 말, 지적하는 말, 상대방의 약점을 드러내는 말, 상대방을 쓰러뜨리는 말, 그런 말들을 많이 하면 어떻게 된다? 허물을 면하기가 어렵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말을 안 해야 된다고 결론을 내리시면 성경을 잘못 읽으신 겁니다. 말을 안 하는 게 좋은가요? 아니요. 입은 말하라고 있어요. 하나님께서 입을 만들어주신 이유는 말하라고 입을 만들어 주신 거예요. 그런데 어떤 말을 해야 되는 겁니까? 무슨 말? 사랑의 말을 해야죠! 사랑의 말을 침묵하고 있는 게 금이 아니라, 사랑의 말을 하는 게 금이에요. 침묵이 금이 아니라, 사랑의 말을 하는 것이 그것이 바람직한 것인 것이죠. 여기서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하기 어렵다고 하는 얘기는, 나쁜 말, 불평하는 말, 비난하는 말, 상처 주는 말, 그런 말을 하면, 허물을 면하기 어렵다는 말이지, 좋은 말도 안 하는 것도 좋다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좋은 말은 어떻게 해야 돼요? 해야 돼요! 해야 돼!

좋은 말이 없어서 사람들이 쓸쓸하게 있는 겁니다. 좋은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 아이들이 기운이 축 쳐져 있는 겁니다. 칭찬하는 말이 사라졌기 때문에 사람들이 괴로워하는 겁니다. 무슨 말을 해야 돼요? 좋은 말을 해야 되는 거에요. 좋은 말을, 칭찬하며 격려하고 감사하는 말, 사랑한다는 말, 고맙다는 말 해야 되는 거예요. 말을 많이 해야 되는 거예요. 말을 안 하는 게 대수가 아니라, 나쁜 말은 하지 않아야 되지만, 좋은 말은 자꾸 자꾸 이야기를 해줘야 된다. 왜? 잠언서 25장 11절의 말씀에,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 쟁반에 금 사과니라.” 믿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사과와 같은 말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말을 할 때 돌아봐야 되죠. 과연 이 말이 칭찬과 격려와 감사와 기쁨의 말인가? 아니면 좌절하게 만들고, 우울하게 만들고, 용기를 잃어버리게 만들고, 분노하게 만드는 그런 사람들을 쓰러뜨리는 그런 말인가 생각해 보세요. 내가 이 말을 하면 우리 며느리의 마음에 못을 칠 말인가? 생각해보세요. 생각해봐요. 이 말을 하면 우리 아이가 좋아할 말인가 생각해 보세요. 생각해 봐요. 내 마음속에 있는 그 말을 그냥 내뱉어버리는 것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 말을 했을 때 이 말을 내 며느리가 듣는다면 이 말을 내 친구가 듣는다면 기분이 좋을 말인가? 기뻐서 행복해야 할 말인가? 힘이 날 말인가? 아니면 무너뜨리고 쓰러지게 만드는 말인가를 생각해 보란 말이에요.

안타깝게도 우리들의 말이 경우에 합당하지 않아서 썩은 사과와 같은 그런 말들을 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가장 사랑하고 돌보고 아껴줘야 될 우리 가족들을 향해서 왜 그런 나쁜 말을 해요?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하기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에게는 지혜가 있다고 했어요. 그래서 말하기 전에 직접 내 말을, 안 듣는다고 해서 내 말이 그 사람한테 안 들어갑니까? 반드시 들어가게 돼 있어요. 반드시. 반드시. 내가 이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이 사람의 귀에 대고 이야기 안 하고, 이 사람한테만 얘기하면 안 들어가는 게 아니고, 반드시 돌고 돌고 돌아서 들어가서 그 사람의 가슴에 상처를 꽉 내버리면, 비수를 꽂아버리는 그런 말들을 하고 있는데 그게 누구예요? 우리 권사님들이 그러면 안 된단 말이에요.

사랑의 말을 해야지, 사랑의 말을, 내 말을 듣고 행복해야 할 말, 정말 지쳤던 아이가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그런 말 용기를 줄 수 있는 말, 열심히 달리는 사람, 힘이 쫙 빠지게 하는 말이 아닌, 힘들어서 지친 자가 그래 다시 한 번 일어서서 “한번 해보자” 라고 하는 그런 결단을 내릴 수 있는 사랑의 말들을 해야 한다는 거예요.

침묵이 금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이 입술로 사람들을 세워내는 귀하고 복된 생명의 삶을 만들어내는 그런 입술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게 하시겠습니까? 말하기 전에 생각해봐요. 말하기 전에 생각해 봐요. 20절 말씀 “의인의 혀는 순은과 같거니와 악인의 마음은 가치가 적으니라.” 의인의 혀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의인의 혀는 좋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혀가 아니라, 감사의 말, 칭찬의 말, 격려의 말, 위로의 말, 사랑의 말이 의인의 혀인 것이고, 의인의 혀가 아닌 것은 중상과 비방과 모략과 불평과 비난의 말이에요. 그런 의인의 혀는 순은과 같은 것이지만, 그러나 악인의 말은 가치가 적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21절 말씀 “의인의 입술은 여러 사람을 교육하나 미련한 자는 지식이 없어 죽느니라.” 의인혜의 말은 많은 사람들을 살리는 겁니다. 지쳐 있는 자에게 용기를 북돋어주는 겁니다. 안타깝게도 수많은 가정에서 남편과 아내가 그리고 부모님과 자식들이 가장 사랑해야 될 그런 우리 대상들이 서로가 서로를 향해서 중상과 비방과 불평과 모략과 비난의 말들을 해대다가 결국 가정이 깨어지고 맙니다. 되돌릴 수 없는 그런 엄청난 상처들을 주고 맙니다.

그런 지혜롭지 못한 인생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나가야 할 겁니다. 주님 제 입술에 파수꾼을 세워 주옵소서. 그래서 사람들의 마음을 찢어놓는 말이 아니라, 정말 살릴 수 있는 회복시켜줄 수 있는 내 말을 듣고, 기뻐할 수 있고 용기를 얻을 수 있는 말을 하게 해 주옵소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왜 우리가 그렇게 해야 됩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보시고도, 우리를 끝까지 사랑해 주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경 66권을 통해서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말씀해 주셨어요.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면서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말씀해 주셨어요. 사랑의 말을 하시고, 믿음의 말을 해주시고, 그래서 주님께서 나를 사랑해 주셔서 죽을 수밖에 없는 나를 살리신 그 주님의 은혜를 우리가 받았다고 한다면, 우리들의 입술도 주님을 닮아가서, 우리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의 말을 할 수 있게 해 주옵소서 기도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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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느니라 (잠 10:6-12)

가난과 부 (잠 10:1-5) +++ 말이 많으면 (잠 10:13-21)

오늘 말씀 6절에서부터 11절 말씀에 보면 의인과 악인을 대비시켜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의인은 어떤 사람이고, 악인은 어떠한 사람인가라고 하는 것을 매절 매절 대비시켜서, 악인의 모습과 의인의 모습이 어떻게 다른지, 그 둘을 극명하게 대조하는 말씀이 쭉 연달아서 나오고 있습니다. 한 절씩 한 절씩 살펴봤으면 좋겠는데요.

6절 말씀을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의인의 머리에는 복이 임하나 악인의 입은 독을 머금었느니라.” 의인의 경우에는 머리를 예로 들면서, 의인의 머리에는 복이 임한다고 그랬는데, 악인의 경우에는 머리가 아니라 입을 언급하면서, 그 입은 독을 머금은 것과 같다. 다시 말하자면 독을 먹으면, 머금으면 어떻게 되죠? 죽는 거죠. 사망에 이르는 것이죠. 그러니까 의인의 경우는 그 머리에 복이 임하지만, 악인의 경우에는 그 입에 독을 머금었기 때문에 결국 사망에 이를 수밖에 없다라고 하는 것을 극명하게 대조하고 있는데요. 의인의 경우에는 머리를 이야기하는 반면에, 악인의 경우에는 입을 이야기하는 이유가 무엇이 있을까요? 그것은 그냥 수사적인 표현법이 그렇습니다. 우리나라 말은 같은 말을 계속해서 반복하는 어법을 주로 사용하고 있지만, 서양의 어법 같은 경우는 같은 말을 사용하기보다는 다른 말을, 다른 단어를 써서 다르게 표현하기를 잘 합니다. 따라서 한 번은 머리를 이야기했다고 한다면, 이번에는 입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인데요. 그러나 그 의미는 똑같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의인의 경우에는 머리도 복이 있을 뿐만 아니라 입도 복이 있는 것이고, 생명을 머금는 것이고, 악인의 경우에는 입에만 독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머리에는 화가 임하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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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표현은 의인의 경우에는 머리만 이야기하고, 악인의 경우에는 입만 이야기하고 있지만, 사실은 이 표현을 보면서, “아, 그러니까, 의인에게는 머리에만 복이 임하고, 악인에게는 입에만 독이 임하는가?” 그렇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의인의 경우는 그 머리에도 복이 임하고 입에도 생명이 있는 것이고, 악인의 경우에는 그 입에만 독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머리에도 화가 있다고 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7절 말씀을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의인을 기념할 때에는 칭찬하거니와 악인의 이름은 썩게 되느니라.” 의인을 이야기할 때는 칭찬한다는 것이죠.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의인의 경우에는 칭찬하게 되겠지만, 그러나 악인의 경우에는 그 악인의 이름은 썩게 된다라고 표현하고 있는데요. 이름이 썩는다는 게 도대체 무슨 말일까요? 음식이 아닌데, 그냥 물질이 아닌데, 왜 이름이 썩는다고 하는 그런 표현을 했을까요? 그리고 도대체 이름이 썩는다고 하는 그 의미가 무엇일까요? 조금 이해하기가 어렵겠지만, 그러나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바로 앞에 있는 말을 보면, 썩는다고 하는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악인의 이름이 썩게 된다고 하는 이야기는 의인의 이름이 칭찬을 받는다고 하는 그 말과 대조되고 있는, 대비되고 있는 말입니다. 따라서 악인의 이름이 썩을 썩게 된다고 하는 이야기는 칭찬을 받게 되는 것이 아니라, 비난을 당하게 되고, 의인의 이름의 경우에는 칭찬을 받게 되겠지만, 악인의 이름의 경우는 비난을 당하게 되는 것이고, 사람들이 미워하게 되는 것이고, 싫어하게 될 거라고 하는 그런 의미에서, 악인의 이름은 썩게 되는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의인과 악인을 대조시키고 있는데요. 8절 말씀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지혜로운 자는 계명을 받거니와 입이 미련한 자는 멸망하리라.” 계명을 받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의인이죠. 계명을 받는 사람은 의인이고, 그 계명을 받는 자가 곧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하는 말이고요. 그런데 정반대로 악인의 경우는 어떤 경우입니까? 악인은 입이 미련하게 되고, 곧 멸망할 거라고 했는데, 그 악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의인과는 반대로 계명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자는 그 마음이 지혜롭고, 그 마음에서 계명을 받게 되지만, 미련한 자는, 악한 자는 그 입이 미련해서 멸망할 거라고 하는데, 역시 의인의 경우는 머리만 이야기하고, 악인의 경우에는 입만 이야기하고 있지만, 사실은 입과 마음 전부를 다 이야기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을 제대로 잘 이해하는 방법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계속해서 9절 말씀에서도 대조를 하고 있습니다. 9절에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바른 길로 행하는 자는 걸음이 평안하려니와 굽은 길로 행하는 자는 드러나리라.” 바른 길로 행하는 자는 누구를 의미합니까? 의인을 이야기하는 거죠. 의인은 계명을 받아들이고, 그 계명의 말씀에 따라 바른 길로 걸어가게 될 텐데, 바른 길로 걸어가게 될 때 어떠한 결과가 나타나는가? 평안함이 있을 것이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죠.

그렇지만 악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악인은 계명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고, 악인은 계명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옳은 길 바른 길로 가는 것이 아니라, 편법의 길로 가는 것이죠.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이죠. 굽은 길로 가는 것이죠. 바르지 못한 길로 가게 되는데, 그렇게 굽은 길로 가는 사람은 어떻게 될 것인가? “드러나리라”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드러난다고 하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드러난다고 하는 것은 그 악행이 발각되고, 그 악행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결국 발가 벗겨져서, 드러나게 될 것이라고 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악을 행하면서 그런 대로 나는 잘 사람들의 비난을 피하면서 발각되지 않으면서 그래서 많은 이득을 얻는 것처럼 생각이 되겠지만, 그래서 괜찮은 줄 알지만, 그러나 잠깐의 성공처럼 보이는 것도 금방이고, 얼마 뒤에 가면 결국 그 악행들이 하나씩 둘씩 다 드러날 수밖에 없는 것이고, 숨기운 것이 감추운 것이 나타나지 아니할 것이 없다고 하는 이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뿐만 아니라 10절 말씀에서도 이렇게 표현합니다. “눈짓하는 자는 근심을 끼치고 입이 미련한 자는 멸망하느니라.” 여기서 눈치 탄다고 하는 말은 어떤 의미일까요? 눈짓 하는 얘기는 속임수를 쓴다고 하는 그런 의미일 겁니다. 눈짓을 하면서 모략을 저지르고, 여러 가지 잘못된 방법으로, 그래서 악한 일을 하려고 눈짓을 하고 있는 속임수를 쓰는 것을 말하는데요. 그렇게 속임수를 쓰게 되면 잘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근심을 끼치게 될 것인 반면에, 또 근심을 끼치게 되고 입이 미련한 자는 결국 멸망하게 될 것이다. 말씀하고 있습니다.

11절의 말씀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의인의 입은 생명의 샘이라도 악인의 입은 독을 머금었느니라.” 의는 결국 그 입이 생명의 샘이라. 살아나는 것이지만,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자는, 결국 독을 머금고 죽을 수밖에 없는 파멸의 길을 갈 수밖에 없다고 하는 그 말씀을 해주고 있는데요.

그러니까 오늘 읽은 6절에서부터 11절의 말씀에까지 의인과 악인이 어떠한 모습으로 어떠한 결과를 얻게 될 것인가에 대해서 또 강조하고 이렇게 강조하고 이렇게 표현하고 하면서 표현하고 있는데, 한마디로 말하자면 의인은 지혜로운 사람이고, 의인은 계명을 지키는 사람인데, 그런 사람에게는 형통함이, 복이, 생명이, 칭찬이, 평안함이 따라올 것이지만, 그러나 악인은 어떠한 사람입니까? 계명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오 미련한 사람인데, 그 사람에게는 멸망을 자초하게 될 것이고, 화가 있을 것이고, 근심이 있을 것이고, 비난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하는 이 극명한 차이를 강조하고 있는 것을 오늘 저녁 시간에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누가 지혜로운 사람입니까? 지혜로운 사람은 결국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며 사는 것이 지혜로운 자라고 하는 사실을 그게 복된 것이고, 그게 생명의 길이라고 하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잠언서를 살펴보면서 뭔가 기발한 지혜가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것입니다. 잠언서에서 일관적으로 계속해서 반복하고 반복하면서 말하고 있는 지혜라고 하는 것은 다른 게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지혜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알고, 그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하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사는 것이 지혜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사는 게 그게 지혜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인데요. 오늘 우리가 이 말씀을 보면서 다시 한 번 이 말씀을 또 귀 기울이고 또 귀를 기울여야 하고 다시 또 듣고 또 들어야 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이 세상에는 이 말씀과는 정반대의 메시지가 너무나도 많이 들려주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배당 안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만, 우리가 성경 말씀을 읽으면 하나님의 메시지를 듣지만, 우리가 한 걸음만 밖으로 나가면, 우리들의 집 안에서 우리들의 사회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그 현장 속에서 성경 말씀과는 정반대의 이야기들을 얼마나 많이 듣는지 모릅니다.

이 세상이 우리들에게 들려주는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이런 메시지를 우리들에게 전해주는 것이죠. 의인의 머리에는 화가 있을 뿐이고, 이 세상에서 재주껏 악을 행해야 성공할 수 있다고 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의인의 이름은 무시당하고 아무도 기억하지 않을 것이지만, 무슨 수를 쓰더라도 성공하기만 하면 모두가 칭찬하고 박수를 보내게 되느니라가 이 세상의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의 계명대로 행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며, 그때그때 순발력을 발휘해서 이득을 취하는 게 그게 가장 현명하니라 라고 하는 메시지가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들리는 것이죠. 바른 길로 가면은 멸망할 뿐이고, 이리저리 묘수를 찾아 다녀야 결국 성공하느니라라고 하는 메시지를 듣는 것입니다. 눈치껏 해야 근심이 없이 사는 것이지, 눈치 없이 직진만 하고 성경 말씀대로만 살다가는 멸망하느니라라고 하는 메시지가 들리는 것입니다. 의롭게 살면 압수수색 당하기도 하고, 패가망신 당하기도 하겠지만, 악인들과 함께가 되면 무슨 짓을 해도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하는 메시지가 우리들의 귀에 들리게 되는 것이죠.

그 옛날 아담과 하와를 향해서 선악과를 먹으면 눈이 밝아지고 하나님과 똑같이 들 것이라고 유혹했던 그 사탄의 유혹이 그때로만 끝난 것이 아니라, 그 이후에 계속해서 내용을 바꿔가면서 끊임없이 끊임없이 우리들을 유혹하고, 또한 우리를 타락하게 만들려고 하는 그런 유혹이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이 하나님의 말씀 지혜의 말씀을 다시 한 번 분명하게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늘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늘 넘어질 수밖에 없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보다는 이 세상에 잘못된 길로 미혹을 받아 넘어갈 때가 너무나도 많기 때문에 “주님 저희들에게 믿음을 주옵소서”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시고, 주님의 말씀에 따라 순종하며 살게 해 주옵소서” 매일 아침마다 저녁마다 매 순간순간마다 주님을 의지하며 기도하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 12절의 말씀을 보면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느니라.” 우리 한번 같이 읽어봅시다. 시작.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느니라.” 미움이 있어서 다툼이 일으켜지는 그런 상황과 사랑이 있어서 모든 허물을 가리는 그 상황, 이 두 가지 상황 가운데 공통점이 있다고 한다면 무엇이겠습니까? 미움을 통해서 다툼이 나타나는 그 상황과 사랑이 있어서 모든 허물이 가려지는 이 두 극단적인 상황이 있다고 한다면, 이 두 가지 극단적인 상황 완전히 다른 상황인데, 다른 것처럼 보이는데, 이 다른 것처럼 보이는 이 두 가지의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 공통점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 앞에 허물이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허물이 있는 사람이 있는데, 똑같이 허물이 있는 사람을 만났을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할 수 있을 것인가? 두 가지 반응이 가능하다는 겁니다. 미움을 가지고 다툼을 일으키는 상황을 만들 수도 있고, 사랑을 가지고 모든 허물을 가릴 수 있는 그런 상황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고 하는 것이죠. 우리가 허물이 있는 사람을 볼 때는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 이 두 가지 반응 가운데서,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데, 우리는 미움을 미움의 반응을 보일 수도 있고, 사랑의 반응을 보일 수도 있다고 하는 것이 이 두 상황 가운데 공통점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허물이 없는 경우는 어떻게 될까요? 안타깝게도 그런 경우는 없습니다. 이 세상에 허물이 없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가 다 허물 투성이의 인간들입니다. 허물투성이의 인간과 허물 투성이의 인간이 만나 함께 살아가고 있는 것인데요. 이 허물 투성이에 인간들이 서로 만나 살아가는 가운데, 그 허물을 맞닥뜨리게 될 때 우리는 어떠한 반응을 보일 수 있는가? 하나는 미움으로 반응할 수 있고, 하나는 사랑으로 반응할 수 있다는 것이죠.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하냐면, 미움으로 반응합니다. 가장 자연스러운 반응이고, 늘 우리가 쉽게 나타낼 수 있는 반응이 미움의 반응입니다. 그런 반응을 보인 사람들의 예가 성경에는 대표적으로 바리세인들의 경우를 볼 수가 있겠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어떻게 했는가? 허물이 많은 사람들을 보고 잘못을 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정죄하고 비난하였습니다. 세리를 보면서 세리들의 잘못을 지적했고,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제자들을 보면서 그들을 비난했고, 여러 가지 잘못하는 것이 눈에 들어올 때마다 계속해서 지적하면서 그들의 허물을 지적한 것이죠.

왜 바리새인들은 그 허물 많은 사람들을 만났을 때, 그 잘못들을 지적하고 비난하고 그렇게 다툼을 일으키는 반응을 보였던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우리들이 착각하고 있기 때문인데요. 우리가 잘못을 비난하면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비난하면, 적어도 내가 비난하고 그 있는 그 순간만큼은 내가 정직한 사람이라고 사람들에게 나타나게 될 거라고 하는 착각을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고 정죄하면, 나는 공정과 상식의 사람이 되는 줄로 착각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죠. 그런데 그것은 착각이에요. 남을 비난하면 나는 그 비난에서부터 면제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것은 자기 자신만의 착각일 뿐, 그렇게 된다고 해서 자기가 자동으로 의롭게 되는 것은 아닌 것이죠.

예전에 우리 딸아이를 데리고 학교를 데려다 줄 때였습니다. 매일 아침마다 우리 아이를 고등학교에 데려다 주고 둘째 아이를 중학교에 데려다 주고, 그리고 교회로 출근을 하고 이렇게 매일매일 했었는데요. 하루는 고등학교에 가게 됐는데, 학생들이 건물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 건물 밖에 줄을 쫙 서 있는 거에요. 이상하다. 왜 학생들이 건물 안으로 안 들어가고, 이렇게 학교 건물 안으로 안 들어가고, 밖에 저렇게 서 있나? 이상하다. 생각하면서 그날 그냥 아무튼 돌아갔습니다. 근데 아이가 학교에 갔다가 와서 해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요. 무슨 얘기를 하냐면, 그 전날 어느 학생이 학교 화장실에 낙서를 했다는 거예요. 뭐라고 낙서를 했냐면, “나는 내일 총을 가지고 와서 누구를 쏠 것이다”라고 하는 그런 낙서를 화장실 벽면에 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저녁 때 청소부들이 학교 건물들을 청소를 쭉 하는 가운데, 그 화장실에 있는 그 낙서를 보고, 교장 선생님에게 보고를 했고, 학교가 발칵 뒤집혀진 거에요. 그래서 어떻게 했는가? 학교 문 앞에 메탈 디텍터(metal detector)를 설치해 놨습니다. 마치 공항의 검색대와 같이, 어디서 가져왔는지는 몰라도, 아무튼 메탈 디텍터를 학교 문 이곳저곳에 세워놓고, 학생들 한 명씩 한 명씩 그 메탈 디텍터를 통과하게 만들면서, 가방을 조사하고 한 명씩 한 명씩 혹시 총 가져왔는지, 다 검사하고, 그리고 그 학교로 모든 학생들이 들어가게 됐는데, 입장하는 데만 한 2시간 3시간 걸려서 그 학교 안으로 들어가게 됐습니다.

그런데 교장선생님이 모든 학생들을 다 불러놓고, 왜 오늘 아침에 이렇게 학교 들어올 때 이렇게 검사를 했었어야만 했는지에 대해서 설명을 하면서, 낙서가 있었고 그것 때문에 우리가 보완 조치로 인해서 이렇게 하게 됐다라고 학생들한테 설명을 쫙 했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학생이, “세상에 어떤 그런 나쁜 놈이 그런 낙서를 한 거야?” 하면서 막 막 소리를 지르더래요 그런데 나중에 교장 선생님이 그 학생 들어 오라고 할 때, 알고 보니 그 학생이 낙서를 한 거예요. 도둑이 제발 저린 거죠. 다른 사람을 비난하면, 나는 그 혐의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 하는 어리석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거예요. 남을 비난하면서 나는 공정하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다른 사람들을 욕하고 정죄하면, 그러면 나는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되게끔 착각하게 만들고, 스스로도 속는 그런 반응들을 보이고 있는 것이 우리들의 그런 생각입니다. 결국 그 학교는 그 학생은 학교에서 퇴학을 당하고, 그 학생은 영국 학생이었는데 미국에서 추방돼서 영국으로 돌아가야만 했습니다.

아무튼 우리는 왜 허물이 있는 모습을 보면, 왜 비난하는가? 비난하면서 나는 그런 비난을 받을 사람은 아니라고 하는 그런 자기 착각을 하면서 자꾸만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죠. 하지만 9절 말씀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구원길로 행하는 자는 드러나리라라고 하는 말씀처럼, 한 두 사람은 오랫동안 속일 수는 있겠지만, 그리고 여러 사람들을 잠깐 동안 속일 수 있겠지만, 모든 사람을 영원히 속일 수는 없는 것이고, 더더욱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우리의 모습을 속일 수는 없는 것이죠.

더 나아가서 이렇게 미움은 다툼을 일으킨다고 했는데요. 결국 그 허물이 있는 사람들을 지적하고 비난하는 것으로서, 그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느냐? 변화시킬 수 없고, 바로잡을 수가 없는 겁니다. 우리는 그저 잘못한 것을 책망하고 지적하면, 그러면 그것을 고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고쳐지지가 않습니다. 우리는 잘못한 것을 지적하면, 우리가 할 일을 다 했다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그 사람을 바른 길로 돌아오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냥 다툼만 일으킬 뿐이고 미움만 발생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오늘 성경 말씀은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느니라.” 사랑이 무엇입니까?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린다고 했는데, 그 이야기는 잘못하는 것이 있어도 모른 척하라고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냥 방치해 두라고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의 남편이나 아내나 혹은 우리들의 자녀들이나 우리 성도들이나 무엇인가 잘못하고 있다고 한다면, 그것을 모른 척 해야 된다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사랑으로 접근해야 된다고 하는 것이죠. 그냥 옳은 말을 해버리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회복시켜주고, 돌이키게 만들기 위해서 정말 어떻게 하면 이 사람을 사랑으로 회복시킬 수 있을지를 고민하면서 접근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우리 예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어느 날,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예수님에게 한 여인을 끌고 오는 장면이 기록돼 있습니다. 사람들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데리고 와서 돌 하나씩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거룩한 민족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이런 악행을 저지르는 여인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성경에 보면 저런 죄악을 저지른 사람은 돌로 쳐 죽이라고 되어 있는데, 저 여인을 향해서 돌로 치려고 하는 사람들이 모두가 몰려 있었는데요. 사람들이 그렇게 돌을 들어서 치려고 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저 돌을 들어야 내가 자신들의 죄가 감추어지기 때문인 것이죠.

그들을 향해서 돌을 그를 향해서 돌을 던지려고 하는 그 순간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향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그 예수님의 말씀이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습니다. 저 여인만 죄인인 줄 알았는데, 나도 죄인이구나! 나도 허물이 많은 죄인이라고 하는 사실을 알게 된 그 사람들, 한 줄기 예수님의 말씀의 빛의 줄기가 그들의 양심에 전달되게 될 때, 그들의 양심에 자신들의 죄를 바라보게 하게 될 때, 결국 그 사람들이 돌을 내려놓고 한 사람씩 한 사람씩 다 몰려가고 말았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 여인을 향해서 물었습니다. “여자여, 너를 치려는 사람들이 있느냐?” 물으시고,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인의 허물을 몰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정죄만 해서는 그 여인을 살릴 수가 없고, 사랑으로 그 여인을 회복시켜주시고 살리기 위해서, 그 여인에게 그렇게 접근해 주신 것입니다.

예전에 봤던 만화 중에 하나가 있었는데요. <목회와 신학>이라고 하는 잡지에 간단하게 성경을 소재로 한 만화가 네 컷짜리 만화가 수록돼 있는 것을 지금으로부터 한 한 30년 전에, 아마 그때 나왔던 만화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나는데, 바로 이 간음하다가 현장에 잡혀온 여인의 이야기를 소재로 만화를 그린 내용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그랬어요. 그러니까 그 다음 컷에서 돌이 하나 날아갔습니다. 돌이 날아왔는데 어디서 날아왔을까요? 하늘 위에서 날아, 하늘 위에서 날아와서 그 여인의 머리를 탁 때리고 돌이 떨어지니까, 그 다음 장면에 그 여인의 머리에 혹이 이만하게 나고, 그다음에 그 여인이 눈물을 흘리는 그런 장면이 나왔습니다. 그 다음 장면에 예수님께서 하늘을 보시면서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하나님, 제발 제가 하는 일에 방해 좀 하지 마세요.” 요한복음 8장의 이야기를 가지고, 재밌게 웃는 그런 이야기를 만들어내려고 만든 만화였습니다.

그걸 보면서 재밌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화가 나기도 했습니다. 어떻게 성경을 이렇게 왜곡할 수가 있을까? 마치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에 의견에 통일이 되지 않는 것처럼, 이런 신성 모독적인 만화를 그릴 수가 있을까? 이거 항의해야 되지 않겠는가 하면서, 그 만화를 생각하고 있는데, 근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그게 맞는 만화예요. 그게 맞는 만화에요. 우리들은 그 여인을 향해서 돌을 던질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돌을 그 여인에게 던질 수 있는 유일한 분이 하나님이신 거예요. 그런데 그 하나님께서 그 돌을 던지지 않으셨어요. 그 돌을 그 여인에게 던지지 않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여인을 살리신 거에요. 그리고 우리가 살아난 거예요. 우리가 허물이 있을 때, 우리의 허물을 보고, 하나님께서 심판해버리고 끝내버리신 것이 아니라, 너희들이 잘못됐다고 심판해버리고 죽여버리고 끝내버리신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우리의 허물을 감싸기 위하여 하나밖에 없는 그 아들을 십자가의 매닮으로 말미암아, 저와 여러분들을 구원해 주시는 놀라운 은혜의 사랑을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의 허물을 용서하시고, 사랑해 주셨다고 한다면,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 볼 때마다, 그들을 향해서 정죄하고 비난하고 욕하면서, 미움이 다툼을 일으키는 그런 결과를 나타낼 게 아니라, 우리의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과 같이, 그 사랑을 받은 우리가 사랑으로 모든 허물들을 덮으며, 또한 회복시켜 나가는 그런 믿음의 귀한 결단들이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들의 인생 가운데 늘 넘어질 때마다, 주님 도와주시옵소서. 주님의 뜻대로 순종하며 살게 해 주옵소서. 믿음의 길을 걸어가게 해주옵소서. 사랑으로 허물을 덮을 수 있고, 그리고 따뜻하게 반창고처럼 붙여서 회복시키는, 그런 평화의 도구로 사랑의 도구가 되게 해주옵소서. 기도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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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과 부 (잠 10:1-5)


달고 맛있는 떡 (잠 9:13-18) +++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느니라 (잠 10:6-12)

성경에 나오는 자주 등장하는 또 하나의 문학적인 기법이 하나 있는데요. 그것을 가리켜서 <교차 대칭 구조>라고 하는, 그런 문학적인 기법이 있습니다. 그동안에 이 기법이 한 번도 나오지 않은 것이 아니라 자주 등장하고 여러 번 등장했지만 그것을 설명할 기회가 마땅치 않아서, 설명하지 않고 그냥 지나쳐 왔었는데요. 오늘은 교차 대칭 구조에 대해서 한번 살펴보면서, 오늘 잠언서의 말씀을 묵상해 보려고 합니다. 도표를 한번 먼저 보여줬으면 좋겠는데요.

교차 대칭 구조라고 하는 것은 영어로는 카이어즘(chiasm), 독일어는 키아스무스(chiasmus)라고 하는 것입니다. 키(chi)라고 하는 것이, 키(chi)라고 하는 것이 헬라어 알파벳으로 x자와 같은 것이죠. 그런데 문장을 배열하는 것이 마치 x자를 배열하는 것처럼, 문장을 배열한다고 해서 “카이어즘” 또는 독일어로는 “키아스무스”라고 하는 말로 표현하는데, 그것을 우리나라 말로는 “교차 대칭 구조”라고 하는 말로 번역할 수가 있겠습니다.

지금 보여주고 있는 구절이 몇 절이냐면, 오늘 읽은 말씀 잠언서 10장 2절과 3절의 말씀입니다. 먼저 이렇게 이야기를 하죠. “불의의 재물은 무익하여도” 이것이 주제 하나의 주제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죠. 두 번째 주제를 이야기합니다. “공의는 죽음에서 건지느니라” 두 번째 주제를 이야기한 다음에, 다시 첫 번째 주제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조금 전에 금방 말했던 두 번째 주제를 약간 변형해서 다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요. “여호와께서 의인의 영혼은 주리지 않게 하시나니” 한 다음에, 다시 첫 번째 주제로 되돌아가는 겁니다. “악인의 소득은 물리치시느니라.” 그러니까 이 제가 x자를 쳐서 표기를 해놓았습니다마는, 그 구조가 a b b’ a’라고 하는 그런 구조로, 이렇게 이루어져 있는 문장을 가리켜서, “교차 대칭 구조”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치워줘도 좋을 것 같습니다.

성경에 있는 기법만이 아니라, 서양의 언어에서는 아주 자주 등장하는 기법이고요. 히브리어를 비롯한 이스라엘 주변의 중동 지역의 언어들에서 자주 사용하는, 그런 표현법이 바로 교차 대칭 구조의 구조 기법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예전에 제가 설명드렸던 것처럼, 히브리 평행법이 여기에도 그대로 드러나 있는 것을 알 수가 있겠는데요. 그러니까 지금 표현하고 있는 겁니다. 불의의 재물이 무익하다. 불의의 재물, 다시 말하자면 불의로 얻은 재물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결코 유익한 게 아니다고 말한 다음에, 그것에 반대되는 말인 악인의 소욕은 하나님께서 물리치신다고 이야기하고, 다시 악인의 소유에 관해서 다시 또 반복해서 설명하는 것이, 공의는 죽음에서 건지지만, 그러나 그러나 “여호와께서 의인의 영혼은 주리지 않게 하시나, 악인의 소욕은 물리치시느니”라고 해서 이 표현이 나오고 반복되는 모습을 볼 수가 있겠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보면 2절 말씀에, “불의의 재물은 무익하여도 공의는 죽음에서 건져내느니라”라고 말하고 있는데, 공의가 죽음에서 건져낸다고 하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그냥 생각하기로는, “아, 이것은 그냥 공의롭게 행하면, 의롭게 행하면, 우리를 죽음에서 건져내는 것이다”라고 생각하기가 쉽지만, 오늘 이 교차 대칭 구조로 해서 이해를 한다고 한다면, 이것은 “공의롭게 얻은 재물”을 의미하는 겁니다. 불의로 얻은 재물은 무익하게 될 것이지만, 그러나 공의롭게 정의롭게, 다른 방법을 사용해서 얻은 그런 재물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다라고, 죽음에서 건지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재물을 얻는 과정 가운데서 의롭게 의로운 방법을 사용해서 얻어야, 그것이 우리가 사는 길이다라고 하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재물을 얻는 방법은 두 가지 방법이 있을 것입니다. 첫 번째는 우리가 옳은 길을 통해서 바른 길을 통해서 재물을 얻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우리가 수고하고 애쓰고 노력해서 최선을 다해서 일을 함으로 말미암아, 그런 땀의 수고로서 얻는 재물이라고 하는 것은 의로운 방법으로 재물을 얻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하지만 옳지 않은 방법을 통해서도 우리가 재물을 얻을 수가 있겠는데요. 그것은 불의의 재물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불의의 방법으로 재물을 얻는 것은 무엇이 있겠습니까? 예를 들자면 도둑질을 한다거나 사기를 친다거나 속임수를 쓴다거나 여러 가지 잘못된 방법으로 사악한 방법으로 재물을 얻는다고 한다면, 그것은 결국 무익하게 될 뿐이라고 오늘 성경 말씀 가운데서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저 재물만 획득하기만 하면, 그러면 된다고 하는 생각이 지배적입니다. 우리 속담 가운데 “모로 가도 한양만 가면 된다”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한양으로 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지, 이 길로 가든 저 길로 가든 어느 길로 가든 그 아무 상관이 없다. 결국 도착하는 지점이 한양이기만 하다고 한다면, 모로 간다고 해도 괜찮은 것이다. 라고 하는 그런 생각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가득 지배하고 있는데요. 그래서 우리가 재물을 얻을 수만 있다고 한다면, 그 방법이 공의로운 방법이든, 공의롭지 못한 방법이든, 어떠한 방법이든 그냥 재물만 얻을 수 있다면 좋다고 하는 그런 생각들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많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 가운데 하나가 무엇이 있냐 하면, “꿩 잡는 것이 매다”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꿩만 잡을 수 있다고 한다면, 그거면 된다는 것이죠. 꿩을 잡을 수만 있으면, 그게 매인 것이지, 꿩을 잡지 못한다고 한다면 그건 아무 소용이 없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들의 일반적인 생각이고, 결과가 좋다고 한다면 그 과정이야 어땠든지, 결과가 이야기해 주는 것이지, 결과가 좋지 못하다고 한다면, 아무 의미가 없다고 하는, 그런 결과 중심적인 생각들이 우리들에게 많이 팽배해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러한 생각을 철저하게 반대하고 있고 배제하고 있습니다. 결과만 좋으면 좋은 것이 아니라, 성경적인 관점은 과정이 훨씬 더 중요한 겁니다. 재물을 무슨 방법으로 얻었느냐가, 재물을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느냐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고, 성경은 이야기해주고 있는 것인데, 바로 그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오늘 잠언서 10장 2절 3절의 말씀인 것입니다. 재물을 얻으면서 우리가 공의로운 방법으로, 의로운 방법을 통해서 재물을 얻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불의의 방법으로 얻게 된다고 한다면 그것은 옳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우리 이렇게 하는 것이 쉽냐면 그렇게 쉽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불의의 방법으로 방법을 사용하면 돈을 버는 것이 쉬워요. 남을 속이고 눈 속임을 하고 하면은 정말 많은 돈을 벌 수 있을 것 같아요. 동영상 같은 데 보면 동남아시아나 이런 데 가서 물건을 살려고 하면 좋은 이런 과일 같은 것이 막 쌓여져 있습니다. 그러면 그거 얼마 달라고 그러면 열심히 담아서 저울 위에 딱 올려놓고, “여기 맞죠?” 하면서 더 줍니다 하면서 더 담는데, 그렇게 봉지를 담아가지고 그 봉지를 주느냐 하면, 살짝 숨겨버리고 다른 봉투를 꺼내 가지고 그 다른 봉투를 준단 말이에요. 그런 눈속임을 통해서 소비자들을 우롱하는 그런 방법들을 통해서 돈을 번다고 한다면, 다른 사람보다도 훨씬 더 많은 돈을 빠른 시간 안에 벌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공의로운 방법을 사용한다고 한다면, 정의로운 방법 정직한 방법을 쓴다고 한다면 돈을 버는 것이 재물을 버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곡차곡 차곡차곡 돈을 벌어야 되니까, 그것처럼 어려운 것이 없는 것이죠. 따라서 우리가 의로운 방법을 써서 돈을 벌려고 한다면, 재물을 얻으려고 한다면, 어느 세월에 우리가 이 많은 재물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라고 하는 두려운 마음이 들게 되는 것이고, 이렇게 내가 정직하게 행하다가는, 의로운 길로만 가다가는 결국은 아무런 돈도 벌지 못하고, 결국은 망하면 어떻게 되나라고 하는 그런 불안한 마음이 우리들 가운데 생기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의로운 길로 가는 것이 아니라 불의한 길로 가게 되는 것이죠.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바로 이스라엘 민족의 생각이었습니다. 광야에서 생활하는 동안에 하늘에서 만나가 내립니다. 만나가 내릴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해주셨던 명령이 무엇이냐면, “너희는 이 만나를 하루에 그날 먹을 분량만 거둬라”라고 말씀해 주셨어요. 내일은 하나님께서 다시 내려주실 것이고, 또 또 그다음 날은 또다시 내려줄 테니까, 많이 거두지 말고 오늘 먹을 양식만 구하라고, 그렇게 거두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민족은 그 말씀을 들었을 때, 모세를 통해서 들었을 때, 마음속에서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는 거예요. 지금 이 만나가 우리들의 눈앞에 있는데, 내가 많이 거두면 많이 거둘 수 있는 그런 만나가 지금 널려져 있는데, 내일을 위해서 내가 예비해 놓지 말라고, 그랬다가 내일 만나가 안 내리면 어떡하나라고 하는 그런 걱정스러운 마음에, 사람들은 만나를 이틀 치 3일 치 많이 거두어서 쟁여놓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과 정면으로 대치되는 일들을 하면서, 그래서 미래를 준비해 놓는 거죠. 왜 그렇습니까? 불안하기 때문에 그런 거죠. 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만 순종하면 내 일은 굶을지도 모르겠다고 하는 그런 불안한 생각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면서 이틀 치 3일 치 만날을 거두게 된 겁니다.

하지만 그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훈련시키시기 위해서, 남도록 거둔 모든 만나가 썩어서 냄새 나게 만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것이, 사람이 떡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순종하며 사는 것이 그게 바른 길이라고 하는 사실을 40년 동안 배우며 훈련해야 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도 역시 마찬가지인데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의로운 방법으로 옳은 길을 통해서 재물을 얻게 된다고 한다면, 빨리 벌리는 것 같지 않기 때문에, 너무나도 더딘 것 같기 때문에, 불안한 마음이 들어서 그래서 불의한 방법을 사용하고 싶은 마음이 문득문득 들 때가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때 재물과 관련한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들이 믿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10장 3절 말씀 “여호와께서 의인의 영혼은 주리지 않게 하시나, 악인의 소욕은 물리치시느니라.” 이 말씀을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깊게 간직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의는 바로 의로운 방법으로 재물을 얻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순종하며 재물을 얻는 자는 망할 것처럼 보여도 주리지 않게 하실 거라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절 5절 말씀도 교차 대칭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도표를 한번 보면 좋겠는데요. 4절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구하게 되느니라. 여름에 거두는 자는 지혜로운 아들이나, 추수 때까지 자는 자는 부끄러움을 끼치는 아들이니라.” 여름에 거두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요? 부지런한 사람인 것이죠. 추수 때까지 자는 사람은 누구인가요?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인 것이죠. 그러니까 이렇게 교차 구조로, 교차 대칭 구조로 4절과 5절 말씀에서도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아주 간단한 원리고,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원리를 말씀해 주고 계시는 겁니다. 게으른 자는 어떻게 되는가? 가난하게 된다는 겁니다. (치워져도 됩니다.) 부지런한 자는 어떻게 되는가? 부자가 부하게 될 것이다라고 가르쳐주고 있는 겁니다. 여름에 거두는 자, 열심히 일을 해서 땀을 흘려가면서, 여름이라고 하는 그런 계절은 어떤 계절입니까? 너무나도 더운 날이고 힘든 날입니다. 그런데 게으르지 아니하고 열심히 일을 하면서 거두는 자는 결국 부하게 될 것이지만, 추수 때까지 기다리면서 차일피 미루고 게으르게 자는 자는 결국 가난하게 될 것이라고 하는 어쩌면 보편적인 진리의 말씀을 여기서 해주고 있습니다. 우리 누구나 다 공감할 수 있는 원리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론은 무엇이죠? 열심히 일해야 된다. 열심히 일해야 되고, 부지런하게 살아야 된다라고 하는 것이 오늘 교훈이 교훈에서 해 주신 말씀입니다.

물론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요. 그러니까 우리가 쉬거나, 혹은 잠을 자거나, 혹은 휴가를 가거나 하는 것이 나쁘거나 무의미하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균형을 맞추어야 하는데요. 성경적인 원리는 무엇이냐면, 무조건 일만 많이 하는 것이 성경적으로 볼 때 가장 바람직한 모습의 상이 아닙니다. 성경적인 원리는 무엇이냐 하면, 일하고 또 적당할 때 쉬고, 또 일하고 또 쉬고 하는, 이 일과 쉼이 균형 있게 맞추어져야 그게 성경적으로 옳은 모습이죠. 6일간 일을 했다고 한다면 하루는 쉬어야 하는 것이고, 하루 종일 낮에 일했다고 한다면, 저녁 때는 잠을 자면서 휴식을 취해야 하는 것이고, 우리가 마치 워크홀릭(workaholic)처럼 하루 종일 일하고 쉬지 않고 일하고 365일 쉬는 날 없이 계속 일만 해서 열심히 노력해가지고, 돈을 많이 버는 게 그게 가장 바람직한 것이냐? 절대 그렇지 않아요.

하루 종일 일을 하면서, 잠도 안 자고 자신의 육체를 혹사해 가면서 그렇게 열심히 부지런히 일해서 그렇게 돈을 많이 벌기만 하면 되느냐? 그게 절대 꼭 아니라는 거죠. 우리는 성경적인 교훈을 살펴볼 때, 이 두 가지를 잘 살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잠언서에서 부지런하게 살아야 된다고 하는 것은 그만큼 우리가 일해야 되는 그 시간만큼은 아주 부지런하게 일을 해야 된다고 하는 그런 의미이지, 절대 쉬어서는 안 된다, 쉼이 없어야 된다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이 아닙니다.

성경에서는 오히려 쉬라고 말씀해 주고 있고, 특별히 십계명 가운데서 제4계명은 너희가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고 쉬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쉼이 없이 일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재물이 우상이 되어 버렸을 때 사람들은 쉼을 중단해 버립니다. 열심히 일을 하니까 돈이 많이 벌리거든요. 일한 만큼 결과가 나오니까, 일을 많이 하면 더 많은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것이고, 그러니까 돈이 우상이 되고 재물이 우상이 되면, 일을 많이 하고 쉬지 않으면서 그래서 많은 돈을 얻으려고 하는 그런 모습을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벌써 우리가 우리에게 재물이 우상이 되었다고 하는 증거인 것이죠. 따라서 성경은 일하면서도 동시에 쉬라고 말씀해주고 있는 것이고, 그렇게 균형을 잡힌 사람이어야 그게 성경적으로 바른 삶을 살 수 있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것도 역시 잘못된 것이죠. 어떤 사람들은 일을 너무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쉬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일하기를 싫어하고 그저 쉬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특별히 크리스천들 가운데서 그렇게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나타날 때도 있는데요. 성경을 오용하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먹이고 입히시고 다 하는 것이니까, 굳이 내가 이렇게 열심히 일할 필요 없다. 내일 일은 내일 걱정하고 하나님께서 다 먹이시고 입히시고 하는데, 내가 뭐 일할 필요 있겠는가? 하나님은 까마귀를 통해서 보내주시는 거 아니겠는가? 그저 나는 하나님을 철저히 신뢰하면서 기도하기만 하면 된다라고 생각하는 그런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건전한 신앙이라고 할 수가 없는 것이죠.

하나님의 도우심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손을 놓은 상태에서 그저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우리를 도와주시는 것만이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무엇을 주셨습니까? 손을 주셨어요. 발도 주셨어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손도 주고 발도 주고 생각할 수 있는 머리도 주고, 이미 우리가 일을 해서 우리가 다 먹고 모든 것을 재물을 얻을 수 있는 그런 재능들을 하나님께서 다 주셨는데, 이미 그러한 은사를 우리들에게 다 주셨는데, 그것을 전혀 활용하지 않으면서, 저 감나무에서 감히 내 입에 떨어지기를 바라듯이 입만 벌리고 있는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손과 발을 주시고 머리를 주시고 모든 것을 주신 것을 망각한 행위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초대교회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는데요. 초대교회 안에 들어온 사람들 가운데는 그저 일하지 않으면서, 하나님께서 먹여주실 것을 기대했고, 또 교회가 자기를 도와줄 것을 기대하면서 교회의 도움만을 바라는 사람들이 초대교회 안에 있었습니다. 그럴 때 데살로니가 후서 3장 10절에서부터 12절의 말씀을 통해서 이렇게 교훈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우리가 들은 즉 너희 가운데 게으르게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이를 만들기만 하는 자들이 있다 하니, 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조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하노라.” 초대교회 안에 들어와 있던 사람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그저 교회가 사랑으로 돌보아 줄 것만을 기대하면서, 전혀 일하지 않고 그저 내가 기도만 하기만 하면 그리고 형제들이 나를 도와주면 내가 먹고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의존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아, 그거 괜찮다”라고 말씀한 것이 아니라, 그런 사람들에게 주 안에서 권하기를 일하라. 수고해서 일해서 자기 손으로 흘린 노력과 땀을 통해서 먹을 것을 얻으라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종종 우리 어떤 신앙인들 가운데는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가 어떤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그때 우리가 해야 될 일이 무슨 일입니까? 경제적으로 어려운 일이 당했다고 한다면,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일을 해야 하는 것이죠. 일을 하고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서 내가 땀을 흘려서 수고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을 얻어야 하는데, 종종 크리스천들 가운데는 어떤 사람들이 있냐면, 나는 오로지 하나님만 의지하겠다고 하면서 내가 기도원에 가서 기도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시겠지 하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주님 돈을 주세요. “주님, 재정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세요”라고 기도원에 가서 막 기도하고 그래서, 어쩌다 보면 또 누가 또 도와주는 사람도 있으니까,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다고 이렇게 말하는 경우도 종종 있는데, 그것이 바른 자세가 아니라 오늘 잠언서 10장에서 교훈하고 있는 것처럼 부지런하게 일해야 하는 것이고, 우리가 건전한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수고하고 애쓰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는 것을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지혜롭지 못해서 오늘 말씀에 따라 순종하기보다는 의로운 방법을 통해서 소득을 얻기보다는 불의한 방법을 통해서 소득을 얻게 되는 방법으로 나갈 때가 많습니다. 또한 어떤 때는 우리가 게으른 모습으로 변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게 우리들의 문제인 것이죠. 그래서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주님의 십자가 앞에 나가서 주님 앞에 회개하고 또한 도와달라고 기도하면서, “주님, 하나님께서 주신 그 삶을 잘 살아갈 수 있도록 지혜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부지런할 수 있게 해주옵소서. 주님의 뜻에 따라 건강하게, 또한 주님의 뜻에 따라 옳은 방법으로 재물들을 얻을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고, 내 마음이 불안해서 이렇게 살다가는 내가 망할지도 모르겠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다가는, 어 혹시 내가 굶을지도 모르겠다고 하는 그런 위험한 생각이 들 때, 그러나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의로운 자를 의롭게 일하는 자를 줄이게 하지 않는다고 하는 이 말씀을 믿을 수 있게 하여 주옵소서.” 기도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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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고 맛있는 떡 (잠 9:13-18)

교훈과 책망 (잠 9:1-12) +++ 가난과 부 (잠 10:1-5)

오늘 본문의 말씀에는 미련한 여인이 등장을 합니다. 미련한 여인이 있는데, 그 미련한 여인이 크게 떠들어댑니다. 알고서 떠들어대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사람들에게 떠들면서 사람들을 부추기고 있는 모습이, 오늘 본문의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미련한 여인이 떠드는 그 말의 내용이 무엇일까요? 17절의 말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도둑질한 물이 달고 몰래 먹는 떡이 맛이 있다 하는도다.” 이 미련한 여인이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수많은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무슨 물이 맛있는가? 몰래 도둑질한 물이 맛있는 것이고, 어떤 떡이 맛있는가? 훔쳐 먹은 몰래 먹은 떡이 맛이 있다고 그렇게 자꾸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도둑질한 물이 달고 몰래 먹는 떡이 맛있다고 표현하고 있는데, 여기서 몰래 먹는 떡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몰래 먹는 떡 과연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가? 1번. 나에게 어쩌다가 떡이 하나 생겼는데, 여러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 떡을 먹게 되면 사람들에게 나누어 줘야 되니까, 나 혼자 다 먹고 싶어서, 그래서 숨어서 혼자 먹는 떡이 몰래 먹는 떡입니까? 2번. 다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그 떡을 훔쳐서, 그래서 그 훔친 떡을 몰래 가지고 와서 먹는 떡을 가리켜서, 몰래 먹는 떡이라고 할까요? 1번이겠습니까? 2번이겠습니까? 1번처럼 느껴지죠? 정답은 2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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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몇 번에 걸쳐서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마는, 히브리 평행법이라고 하는 그 관점으로 본문의 말씀을 읽으면, 도둑질한 물, 몰래 먹는 떡이 각각 다른 두 개의 대상이 아니라,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이야기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도둑질해서 먹는 물, 몰래 먹는 떡, 크게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도둑질에서 몰래 먹는 물과 떡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 미련한 여인이 막 소리를 지르면서 사람들을 설득하고 사람들에게 부추기면서 하는 말이, “훔쳐 먹어라” “다른 사람 것을 뺏어 먹어라” “도둑질해서 가져가라. 그러면 그게 얼마나 기분 좋은지 모른다.” 남의 것을 훔쳐 먹으면, 그것이 훨씬 더 맛있고, 남의 것을 훔쳐서, 나 혼자 몰래 먹으면, 그게 훨씬 더 짜릿하다고,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서는 성실하게 일을 해야 합니다. 땀을 흘리고 노력을 하고 성실하게 일을 해야, 그래야 결과를 얻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그렇게 수고하고 애써서 결과를 얻게 된다고 하면, 기쁨이 정말 많이 생기게 됩니다. 농부가 1년 내내 뜨거운 뙤약볕 밑에서 땀을 흘리면서, 농사를 짓고 정말 고생을 많이 했는데, 추수할 때가 되어서 수많은 열매들을 맺는 그것을 보게 된다고 한다면, 그동안 했던 모든 고생들, 모든 수고들 다 보상을 받는 것이죠. “아, 내가 수고했는데, 그 수고가 헛되지 않았구나” 하면서 즐거움과 기쁨을 얻게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장사를 한다고 한다면, 내가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또한 이런 궁리를 하고 저런 궁리를 하면서 열심히 장사를 했는데, 그래서 좋은 결과를 얻게 된다고 한다면, 수고한 그 수고에 대해서 보상을 받는 것 같아서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결과를 얻기 위해서 수고하는 것이 쉽습니까? 쉽지 않습니까? 쉽지 않아요. 쉽지 않아요. 제가 금년 여름에 이 우리 교회 옥상에 그 조그만 텃밭에서 무엇인가를 한번 길러 보려고, 거기다가 주일학교 학생들의 심은 방울토마토도 한번 길러보려고 했고, 오이도 한번 길러보려고 했는데요. 잘 되지를 않아요. 잘 되지를 않아요. 왜냐하면 농사에 대한 지식이 없단 말이죠. 농사에 대한 지식도 없을 뿐만 아니라, 언제 어떻게 잘 대응해서 그것을 잘 기를 수 있는지에 대한 아무런 지식도 없기 때문에, 제대로 잘 관리를 못하니까, 만족스러운 결과가 나오지 못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금년 여름 그렇게 길러보고 제 마음속에 든 생각이 무엇이냐면, “그냥 사 먹자”라고 하는 결론을 내리게 됐습니다. 농사짓는 건 그게 쉬운 일이 아니더라고요.

이와 마찬가지로 좋은 결과를 얻는 것은 누가 얻게 되는가? 아무나 얻는 게 아니에요. 누구나 다 열심히 일해서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런데 누구나 다 그렇게 열심히 일할 수 있는 게 아닌 거죠. 공부를 다 열심히 잘해가지고, 다 좋은 성적 받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렇게 공부를 못하는 겁니다. 어느 한순간에는, 연초에는 내가 공부를 열심히 해보겠다고 결심을 하지만, 작심 3일이 돼서 그렇게 하지 못하는 거예요. 그렇게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못합니다. 그러니까 좋은 성적이 나올 수가 없는 것이죠. 장사를 하는데, 모든 사람들이 장사를 제대로 잘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못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좋은 결과가 안 나오는 것이죠. 모든 사람이 좋은 열매를 다 얻는 것이 아니라, 수고한 사람들은 좋은 열매를 얻게 되겠지만, 수고를 많이 하지 못한 사람들은 열매를 잘 얻지 못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고를 잘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좋은 결과는 아무나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인데, 그런데 그 좋은 결과를 얻고 싶은 그 욕심, 그 마음 때문에 사람들이 선택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내가 수고하지 않고 얻는 것입니다. 도둑질하는 것이죠. 훔치는 것이죠. 그것처럼 간단한 방법이 없습니다. 학생이 공부를 열심히 해서 좋은 성적을 받았으면 좋겠는데, 공부를 열심히 할 수가 없는 겁니다. 놀아야 되고, 또 딴짓해야 되고 그래서 열심히 공부를 못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성적을 갖고 싶고, 좋은 대학을 가고 싶고, 그리고 좋은 직장을 가고 싶은 겁니다. 그러니까 하는 방법이 무엇이냐 하면, 커닝을 하는 것이죠. 자신의 실력이 아닌 커닝으로 좋은 점수를 얻으려고 하는 것이고, 그리고 가짜 경력을 내세워서 좋은 대학에 가려고 하고, 가짜 경력을 내세워서 어떤 강사 자리라도 얻으려고 하는 것이 이 세상 사람들이 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돈을 버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인데요. 돈을 버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성실하게 일하고 최선을 다해서 해야 하는데, 그게 안 되기 때문에 결국 사람들이 선택하는 방법은 속임수와 거짓으로 도둑질로 재물을 얻는 것인데, 그것이 좋아 보인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 미련한 여인이 하고 있는 말이 무엇이냐면, 열심히 수고할 수 없는 사람들을 향해서, 그렇게 고생하지 말고, 훔쳐 먹으면 그 물이 달고 몰래 먹으면 그 떡이 맛있다 하면서, 그러니까 쉬운 방법을 쓰라고 이야기하고 있다는 그런 말씀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한번 질문을 던져보고 싶습니다. 도대체 이렇게 도둑질한 물이 달고 몰래 먹는 떡이 맛있다고 말하는 이 여인, 이 미련한 여인이 도대체 누구일까요? 왜 미련한 “여인” 이 잠언서에서, 하필이면 왜 미련한 여인이 그런 말을 한다고 표현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이 “미련함”이라고 하는 말 자체가 문법적으로 여성 명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나라 말에는 남녀가 인격체에게만 남자 여자가 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 아들 딸, 이렇게 인격체에만 성을 부여하는 것이 우리나라 말입니다. 하지만 서양 말들, 특별히 독일어나 헬라어나 히브리어 같은 경우에는 문법적인 성이 있습니다. 문법적인 성이 있습니다. 독일어에는 어떤 성이 있습니까? 남성 여성 중성이라고 하는 문법적인 성이 있습니다. der, des, dem, den, die, der, der, die 그런 거 있잖아요? 헬라어도 히브리어도 문법적인 성이 있는데, 그러니까 이 “어리석음이”라고 하는 명사, 어리석음이라고 하는 이 명사가 문법적으로 여성명사입니다. “지혜”라고 하는 말도 역시 마찬가지인데요. 한번 지혜라고 하는 말과 어리석음이라고 하는 말을 히브리어로 한번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지혜라고 하는 말은 “하크마”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위에 있는 단어인데, 위에 있는 네모나게 생긴 단어가 히브리어 단어인데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어나가는 그런 언어입니다. 그래서 “하크마”하게 되면 지혜라고 하는 의미의 단어이고, “카슬로트” 하면은 어리석음이라고 하는 단어인데, “아”하고 끝나는 단어나 “오트”라고 끝나는 단어들은, 다 문법적으로 여성형 명사입니다. 그러니까 추상명사인데 이 추상명사인 지혜, 추상명사인 어리석음을 문법적 성으로 보면, 여성 명사이기 때문에, 잠언서에서 지혜를 말할 때 혹은 어리석음을 말할 때 여인인 것처럼 의인화해서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치워도 괜찮겠습니다.

그러니까 “어리석음”이, 어리석음이 우리들을 향해서 말하고 있다는 겁니다. 어리석음이 우리를 향해서 말하고 있는데, 어리석음이라고 하는 히브리어 명사가 추상명사가 여성형이기 때문에, 잠언서에서는 어리석은 “여인”이 말을 하고 있다라고 의인화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종종 성경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성경을 억지로 해석해서 문제가 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요. 잠언서 9장 13절의 말씀에 보면, 어리석은 여인이라고 하는 표현이 나오는 그것을 보면서, 여인이라고 하는 것은 미련한 것이고, 그런 미련한 여인들이 떠든다고 한다면 망할 징조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유교적인 그런 영향을 많이 받아서, 그런 유교적이고 남존여비적인 생각을 가지고 성경을 읽다 보니까, 여기에 등장하는 표현이 미련한 여인이 이런 말을 한다라고 하는 그런 표현을 보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런 잘못된 관점을 가지고 성경을 읽으면서, 여인이라고 하는 것은 미련한 것이다. 그러니까 여인들은 잠잠해야 된다라고 말하는 그런 순 엉터리 해석을 하는 경우들이 있는데, 그런 것이 아닙니다. 여인으로 표현한 것은 이 어리석음이라고 하는 단어가 히브리어에서 여성형 명사이기 때문에, 의인화해서 어리석은 여인이 말하는 것처럼 표현하고 있습니다.

지금 그 어리석은 여인이 무슨 말을 합니까? 소리를 지르면서 우리를 유혹한다는 겁니다. 어리석음이 우리를 유혹하고 있는데, 그런데 어 어리석은 석은 어리석음이 우리를 향해서 계속해서 소리를 지르고 떠들면서 사람을 유혹하고 있다라고있다고 표현하고 있는데, 어디서 그렇게 우리를 유혹하고 있느냐면, “자기 집 문 앞”에서, “성읍 높은 곳”에서, 이곳저곳에서 우리를 향해서 그렇게 유혹하고 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어리석음이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다. 이곳저곳에서 유혹하고 있다고 하는 이 표현을 보면서, 여러분들 뭐가 생각나는 게 혹시 없으십니까? 생각이 좀 났으면 좋겠는데요. 뭐가 생각나는 게 없습니까? 뭐가 있냐면, 이와 비슷한 설명이 잠언서 8장에 또 있었다고 하는 것이 아마 생각이 날 겁니다. 잠언서 8장에 보면 무슨 내용이 있냐 하면 지혜가 떠든다고 하는 표현이 있습니다. 잠언서 8장 1절에서부터 3절까지 말씀입니다. “지혜가 부르지 아니하느냐? 명철이 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느냐? 그가 길 가의 높은 곳과 네거리에 서며, 성문 곁과 문 어귀와 여러 출입하는 문에서 불러 이르되” 잠언서 8장에서 무슨 이야기를 했냐면, 지혜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 지혜라고 하는 것이 계속 우리를 향해서 소리 지르고 있다. 그 지혜가 우리를 향해서 계속 소리 지르고 있다고 하는 표현이 잠언서 8장에 있었는데, 오늘 9장 13절 14절 15절 말씀에서도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냐면, 이제는 어리석음이 소리 지르고 있다는 겁니다. 어리석음이 외치고 있다는 겁니다. 어리석음이 우리들을 향해서 소리를 지르면서, 우리를 유혹하고 있다고 그렇게 표현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 인간들을 향해서 지금 외치고 있는 것이 지혜만 외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리석음도 같이 외치고 있는 겁니다. 우리를 향해서 지금 두 가지 소리가 들리는 겁니다. 하나는 지혜의 소리가 들리는 것이고, 하나는 어리석음의 소리가 들리는 것이 신약의 표현으로 보자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두 가지 법이 싸운다. 하나는 주의 양심의 선한 법이 우리를 향해서 선한 일을 하라고 우리를 향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반대편으로 악한 법이 우리를 하여금 나쁜 짓을 하도록 그렇게 부추기고 있는, 그 두 가지 법 사이에서 우리들의 마음이 싸우고 있다고 하는 그런 표현을 하고 있는데, 이 잠언서의 표현이 바로 그런 표현의 의미입니다.

한편으로는 지혜가 우리를 향해서 말을 하고 있는 반면에, 오늘 9장 13, 14, 15절의 말씀에서는, 어리석음이 우리를 향해서 계속 유혹하고 말을 하고 있다라고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지혜만 외치는 것이 아니라, 어리석음도 우리를 향해서 계속해서 유혹하고 외치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디서 외치고 있습니까? 잠언서 9장 14절 15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표현합니다. “자기 집 문에 앉으며 성읍 높은 곳에 있는 자리에 앉아서, 자기 길을 바로 가는 행인들을 불러 이르되” 어리석은 어리석음이 자기 집 문에 앉으며, 성읍 높은 곳에 있는 자리에 앉아서 자기 길을 바로 가는 행인들을 불러 이르되, 어리석음이 어디서 부르고 있냐면, 자기 집 문 앞에서 부른다는 겁니다. 또 하나는 성읍 높은 곳에서 부른다는 얘기입니다. 이 표현을 볼 때 우리는 어떤 결론을 내려야 됩니까? “아, 그러니까, 자기 집 문 앞과 성읍 높은 곳만 조심하면 되겠구나”라고 결론을 내리시면 되겠습니까? 안 됩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사용한 “자기 집 문”과 “성읍 높은 곳”이라고 하는 것은 제유법적 표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유법이라고 하는 것은요, 대유법의 일종인데 영어로는 synecdoche라고 합니다. synecdoche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일부를 사용하여 전체를 표현하는 방법이죠. 예를 들자면 요람에서 무덤까지라고 하는 말이 있는데, 요람이라고 하는 것은 탄생과 관련된 여러 부품 중에서, 물품 중에서 하나를 사용해서, 탄생이라고 하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고, 무덤이라고 하는 죽음과 관련된 어떤 한 부분을 사용해서, 죽음 전체를 나타내는 그런 표현법을 가리켜서 제유법이라고 말할 수 있겠고요. 펜이 “칼보다 강하다”라고 하는 말은 펜이라고 하는 그 작은 물건을 사용해서, 문학 혹은 언론이라고 하는 그 전체를 표현하고, 칼이라고 하는 작은 도구를 이용해서 무력 혹은 전쟁이라고 하는 그런 큰 개념을 설명하는 그런 표현법을 가리켜서 제유법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오늘 이 잠언서 9장 14절 15절 말씀에 어리석음이 자기 집 문 앞에 앉아 있다. 그리고 성음 높은 곳에 앉아 있다라고 표현한 것은 그 두 곳만 조심하면 된다라고 하는 의미에서 이런 말씀을 해 주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제유법적인 표현인 거예요. 그러니까 이 두 개를 표현하면서, 뭘 얘기하고 있습니까? 이 어리석음이 어디에 있다? 온 세상천지에 다 깔려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집에 가면, 집에도 어리석음이 있고, 직장에 가면, 직장에도 어리석음이 있고, 시장에 가면, 시장에도 어리석음이 있고, 심지어 교회에 와도, 교회 안에도 어리석음이 있고, 우리가 가는 그 모든 곳에 다 어리석음이 있어서,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계속해서 유혹하고 있다고 하는 것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번에 우리는 지혜에 대해서 배우면서, 지혜가 소리를 지른다고 하는 것을 살펴본 적이 있습니다. 지혜가 우리를 향해서 교훈하고 있고, 지혜가 우리를 향해서 그 교훈을 받으라고 그렇게 계속해서 소리를 지르고 있는데, 지혜가 어디 있다고 그랬습니까? 지혜가 길가에 있다. 높은 곳에 있다. 네 거리에 있다. 성문 곁에 있다. 문 어귀에 있다. 출입하는 문에 있다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그러니까 그런 곳을 찾아가야만 지혜를 얻을 수 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것도 역시 제유법적인 표현으로서, 지혜가 어디에 있는가? 지혜는 우리가 정말 삼고초려해가면서 그래서 모시고 와야만 하는, 그런 정말 알기 어려운 것이 지혜가 아니라, 우리가 어디에 가든지 지혜가 널려져 있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 살펴본 적이 있는데, 지혜만 널려 있는 것이 아니라, 어리석음도 곳곳에 우리가 가는 곳에는 지혜도 있고, 어리석음도 있고 지혜와 어리석음이 항상 우리 주변에 맴돌고 있고, 우리가 늘 지혜도 만나고 어리석음도 만나게 된다. 그렇게 오늘 성경은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말씀이 전해주는 말씀이 무엇이냐면, 그러니까 우리는 그렇게 쉽게 어리석음에 빠지기 쉽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무균실에 들어와 있어서, 바이러스가 우리를 터치할 수 없는 정말 안전한 곳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그곳은 어리석음으로 가득 차 있는 세상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세상 종교는 말하기를 그러한 어리석음으로부터, 그러한 고통으로부터 피하려면 어디로 가라? 속세를 버리고, 산속에 들어가라라고 이야기를 하는 거죠. 하지만 산속에 들어가면 어리석음이 없느냐? 아니요. 거기도 어리석음이 있는, 성경 말씀 오늘 성경 말씀이 그 말씀이에요. 어리석음이 없는 것이 이 세상에 없다. 어딜 가든지 어리석음이 항상 존재한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는데요.

이렇게 말씀해 주시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니까 그러한 어리석음의 유혹에 이끌려 타락하지 말고, 그 어리석은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우리를 조심해서 경계해서 늘 조심하면서 잘 지내야 된다라고 하는 것을 가르쳐주기 위해서, 오늘 이 말씀을 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코로나 시대를 살면서, 코로나라고 하는 것이 참 쉽게 그런 바이러스에 걸릴 수 있다고 하는 것을 실감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편지를 하나 받았는데요. 안타깝게도 우리 노회에 속한 어떤 젊은 목사님이 코로나로 인해서 이송 도중에 소천했다고 하는 그런 안타까운 소식을 알려주는 그 편지를 받고 깜짝 놀랐습니다. 코로나가 지금 우리 교회에서는 잘 발생이 안 됐기 때문에, 2년 동안 그래도 안전하게 지금 지내오고 있는데, 그러니까 그냥 무시해도 될 만한 것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 발생할지 모르는 것이 코로나구나. 그래서 늘 마스크도 써야 되고, 늘 조심해야만 하고, 정말 우리가 경계하면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언제 어디서 코로나에 감염될지 모르는 그런 아주 힘든 세상에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데요. 그런데 바로 이게, 우리가 어리석음에 전염될 수 있는 가능성이 바로 이 코로나와 같습니다.

오늘 잠언서 9장에서 말씀해 주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 어리석음이 어디에 있는가? 마치 코로나처럼 우리 주변에 전부 깔려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잠시 잠깐만 정신을 차리지 아니하면, 이런 어리석음에 전염될 수 있기 때문에, 지혜와 어리석은 모두가 다 우리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주 가까이 있고, 매 순간순간 우리가 그 지혜를 선택할 수도 있고, 어리석음을 선택할 수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 순간순간마다 아주 조심을 하면서 선택을 잘해야 된다라고 하는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의 말씀이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민족 누구에게나 결단할 때가 있는데, 참과 진리가 서로 부딪힐 때에, 우리는 진리를 선택하는 그런 지혜로운 선택을 해야 되는 것이고, 어리석은 선택을 해서는 안 된다 하는 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 특별히 오늘 본문의 말씀은, 어리석음 중에서 어떤 어리석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도둑질에 관한 교훈입니다. 17절 말씀이죠. “도둑질한 물이 달고, 몰래 먹는 떡이 맛이 있다 하는도다.” 하는 데, 여기서 말하는 “물,” 여기서 말하는 “떡”은 제유법적인 표현으로서, 훔친 것 전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떡과 물뿐만이 아니라, 모든 훔칠 수 있는 것을 다 말하는 것이죠. 그런데 그것을 우리가 훔치게 되면 좋은 것 같아요. 정말 괜찮은 것 같아요. 그래서 그 어리석음에 속아 넘어갈 때가 많습니다.

우리의 일상 속에서 남의 것을 내 것으로 부당하게 취득하고, 우리가 일하는 직장 속에서, 심지어 교회에서 사역을 하면서조차도, 내 것이 아닌 것을 부당하게 내 것으로 가져가 버리는 일들이 너무나도 서슴없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게 견물생심이라고, 사람이 괜찮아 보이는 사람인데도, 그런데 정작 내 눈앞에 어떠한 탐스러운 것이 놓이게 되면, 그리고 아무도 보지 않는다고 생각이 들고, 그리고 이것을 내가 가져가도 탄로가 날 것 같지 않다고 생각이 들면, 그걸 훔쳐가고 내 것으로 만드는 일을 얼마나 자연스럽게, 얼마나 자주, 우리들의 삶 가운데서 나타나는지 모릅니다.

그러면서도 양심에 가책이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들의 마음을 정당화하려는 마음을 가집니다. 나는 이것을 가져갈 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기도 하죠. 내가 회사에서 정당한 대우를 잘 받지 못하기 때문에, 이 정도는 내가 가져가도 정당할 것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하기도 하고 정당화시키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다 가져가는데, 나만 안 가져갈 수가 없다고 하면서 내가 하는 것은 특별한 죄가 아니라 모두가 다 하는 죄라고 하면서, 나 자신을 정당화합니다. 우리가 없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어리석음에 속아서, 지혜롭지 못하게, 그런 일들을 너무나도 자주 행하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그렇게 가져오면 좋아 보여요. 획득하면 기쁜 것 같아요. 이 어리석음이 우리들에게 말한 것처럼, 하지만 오늘 성경의 가르침은 무엇입니까? 18절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18절의 말씀에 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오직 그 어리석은 자는 죽은 자들이 거기 있는 것과 그의 객들이 스올 깊은 곳에 있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무슨 뜻이죠? 결국 그 길이 사망의 길이라는 겁니다. 몰래몰래 먹는 떡 훔쳐 먹은 물 그 맛이 꿀물 같고, 그 맛이 정말 좋은 것 같고, 이득을 가졌기 때문에 만족스러울 수 있겠지만, 잠시 잠깐 좋아 보일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결국은 망하는 길이라고, 성경 말씀이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리석음이 외치는 이 소리에 귀를 기울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기울여야 되는 것이고,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지혜로운 길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만일 우리들 가운데 그런 습성이 있는 분이 계시다고 한다면, 있어요. 없는 게 아니고 있어요. 발각이 되지 않는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척, 모른다고 생각되는 것 같아서, 안심하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아무도 몰라도 안심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불꽃 같은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계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런 잘못을 행해왔다고 한다면, 오늘 우리는 주님 앞에 나와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해야만 합니다. 마음속에 우리가 탐심을 모셔놓고 있는 한,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탐욕이라고 하는 우상을 섬기고 있는 한, 주님이 우리의 마음 가운데 들어올 수가 없고, 주님을 영접할 수가 없습니다.

만일 계속해서 남의 것 내 것이 아닌 것을 내가 취하는 죄악을 저지르고 있다고 한다면, 나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고 있지만, 사실은 예수님을 마음속에 모시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이스라엘 민족들이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입으로 이야기했고, 하나님을 섬긴다고 그들은 종교 생활을 한 것 같았지만, 사실은 실제로는 하나님을 믿지 아니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런 죄악들을 계속해서 저지르고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영접한 것이 아니라, 탐심을 우상으로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망하는 길입니다. 지금 이 세상에서는 잘 살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선택적으로 어떤 사람들은 기소하고, 선택적으로 어떤 사람들에 대해서는 눈감아 버리기 때문에, 우리들이 눈감아 버리는 그 대상에 들어가서, 우리가 걸리지 않고 발각되지 않았다고 하는 사실 때문에, 그래서 아무 문제없이 잘 살고 있다고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그것은 망하는 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가 주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며 엎드려야 합니다. “주님, 제 마음을 바꾸어 주옵소서.”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지혜가 우리를 향해서 소리 지르고, “그렇게 하면 안 돼.” “그렇게 잘못된 생각을 하면 안 돼,” “하나님의 말씀대로 거룩하게 살아야지”라고 우리를 향해서 말씀해 주시는 말씀이 있고, 또 한 편의 말씀은 어리석음은 우리를 향해서 “괜찮아. 이거 가져가면 좋을 거야.” “정말 기분 째질 거야.” “행복할 거야.” “이것이 없는 것보다 있으면 얼마나 좋겠어.” 우리를 향해서 유혹하는 두 가지 소리가 우리들에게 계속해서 들려옵니다. 계속해서 들려오는데, 우리가 자꾸만 듣는 쪽에, 더 잘 들리게 돼 있어요. 우리가 지혜를 들으면 지혜가 더 잘 들릴 겁니다. 그런데 어리석음을 듣기 시작하면, 어리석음을 듣는데 잘 들리기 시작하면서 지혜의 말씀은 들리지 않을 겁니다.

지혜는 아주 현명하고 약삭 빠르게 모든 일을 아주 완벽하고 쌈빡하게 잘 해내는 게 지혜가 아니고,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한 일들을 해내는 게 지혜가 아니고, 지혜는 그 어떤 비상한 머리를 가진 것이 지혜가 아니고, 지혜는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게 지혜고,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게 지혜입니다. 어리석음은 어떤 것이 어리석음인가? 하나님의 그 음성에 대해서 그것을 막아버리는 것이 어리석음이고, 그 어리석음은 결국 망하는 길이에요. 지금 괜찮은 것처럼 보이고 있지만, 바리새인들처럼 나는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러나 망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처럼, 우리가 잘못된 길로 가고 있었다고 한다면, 하나님 앞에 엎드려 회개하며 나와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 기도하고 도움을 요청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 저의 죄를 씻어주시고, 그리고 이제 그런 더러운 것에서부터 떠날 수 있게, 저희들의 마음을 씻겨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비로 깨끗이 씻어주시고, 새롭게 변화시켜 주옵소서.” 기도하며 주님 앞에 나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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