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이신 하나님 (마 6:5-13)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6장 9절 말씀에서,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그 당시에는 아주 획기적이고 혁명적인 가르침이었다고 합니다. 아주 유명한 독일의 신약 학자가 한 명 있었는데요. 요아킴 예레미아스(Joachim Jeremias)라고 하는 그런 학자가 있었는데, 이 학자는 1세기의 유대 문헌들을 깊이 연구하고 내린 결론이,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부를 때에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그러면 어떻게 불렀는가? 정말 가까이 하기엔 너무 존귀하신 하나님, 친근하게 다가가기에는 너무 무서운 하나님, 장엄하신 하나님, 그래서 하나님을 부를 때는 전능하시고, 거룩하시고, 존귀가 많으신 그 아버지 하나님, 그 하나님, 하늘의 하나님,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불렀지, 하나님에 대해서 “아빠, 아버지”라고 그렇게 부르지 못했다고 그렇게 연구해 놓았습니다.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예수님께서 유태인들을 향해서 기도를 가르칠 때, 너희는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빠”라고 불러서, 기도하라고 가르치신 이 가르침은 정말 놀라운 가르침이고 획기적인 가르침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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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그렇게 표현하고 있는데요. 여기서 말하는 “아바”라고 하는 이 아람어는 우리나라 말에 “아빠”와 같은 단어입니다. 마치 꼬마 아이가 자신의 아빠를 부르듯이, “아빠” 친밀하게 그렇게 부르듯이, 하나님을 어떻게 불러야 되는가? 두려워서 가까이 하기 뭐 하기에는 너무 먼 하나님이 아니라, 너무나도 장엄한, 그래서 우리가 가까이 하려면 무서운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 마치 우리들의 사랑이 많은 아빠처럼, 마치 사랑이 많은 우리 엄마들처럼, 그렇게 우리가 가까이 다가가서 부를 수 있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라고 예수님께서는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부를 때, 어떻게 불러야 하는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하늘에 계신 우리 아빠”라고 부르면서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하늘에 계시다고 하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요? 주기도문에서 맨 처음에 하나님을 부를 때 부르는 그 호칭을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그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는데, 하나님께서 하늘에 계시다고 하는 말의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사실 주기도문 번역에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번역하는 것은 우리가 오해하기 쉬운 번역입니다. 헬라어를 한번 보았으면 좋겠는데요. 지금 이렇게 쓰여진 것이 헬라어 단어들입니다. “파테르 해몬 호 엔 토이스라노이스”(πάτερ ἡμῶν ὁ ἐν τοῖς οὐρανοῖς)라고 하는 헬라어 표현인데요. “파테르”(πάτερ)라고 하는 말은 아버지라고 하는 말이고, “헤몬”(ἡμῶν)이라고 하는 말은 우리들의라고 하는 말이고, “호”(ὁ)라고 하는 것은 정관사인데, 마치 관계 대명사처럼 쓰이는 것이고, “엔”(ἐν)은 인(in), “안에”라고 하는 말이고, “토이스”(τοῖς)는 정관사이고, “우라노이스”(οὐρανοῖς)라고 하는 말은 하늘 들이라고 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걸 직역하면 “하늘에 있는 하늘의 우리 아버지”라고 하는 표현인데, 그것을 우리가 잘 이해하기 쉽도록 번역할 때 “계신”이라고 하는 말을 집어넣어서 번역한 겁니다.

그러니까 “계신”이라고 하는 말은 원문에는 없어요. 없는데 우리가 이해하기 좋도록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이렇게 번역을 하다 보니까, 우리들의 생각에 어떤 생각이 드냐면, 하나님의 “거주 장소”가 저 하늘이다. 하늘에 계신이라고 번역을 했으니까,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장소적인 의미에서 하늘에라고 하는 말로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장소적인 의미로 이해하는 것보다는 차원적인 의미에서 이해하는 것이 훨씬 더 낫습니다. 하늘이라고 하는 것은 영적인 것을 상징하는 의미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이 아니라, 저 하늘이라고 하는 곳에 계시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그런 의미에서 저 먼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의미는 우리들의 육적인 아버지 우리들의 혈통의 아버지, 이 땅에서 우리를 낳아주신 그런 아버지와는 차원이 다른 영적인 의미에서의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 영적인 의미에서 아버지라고 하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서 하나님은 땅의 아버지가 아니라 하늘의 아버지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할 때, 하나님의 거주 장소가 저 먼 하늘, 저 먼 천국의 하나님께서 계시기 때문에, 이 땅의 일은 관심도 가질 수 없거나, 이 땅의 일은 잘 참여하기 어렵거나, 우리가 가까이 할 수 없는 그런 하나님의 그런 의미가 아니라, 이 하늘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의미는 영적인 아버지라, 우리들의 육적인 아버지 이 세상의 아버지와는 다른 영적인 의미에서의 아버지라고 하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부를 때 하늘의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표현을 보면서 오해하지 말아야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이 땅이 아닌 저 먼 하늘에 계시다고 하는 식으로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 우리의 인간적인 아버지와는 달리, 이 땅의 아버지와는 달리,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죠. 이 땅의 아버지는 시간적인 제약과 공간적인 제약 때문에 우리들에게 빨리 다가올 수가 없어요. 우리들은 시간에 제한을 받고 공간의 제한을 받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는 아이들이 필요할 때 바로 달려가기가 어려운 것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영적인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언제든지 다가오실 수 있고, 우리들의 기도를 언제든지 들을 수 있고, 언제든지 우리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는 그런 하나님이시며, 아버지라고 하는 사실을 저와 여러분들이 분명하게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영적인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할 때 어떻게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을까요? 마태복음 6장 7절 말씀에서는 이렇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예수님께서는 가르쳐주시기를 너희가 기도할 때 중언부언하지 말라라고 말씀해 주셨는데, 도대체 중언부언하면서 기도하는 말의 의미가 무슨 뜻일까요? 중언부언하면서 기도하는 것은 무엇을 가리키는 말일까요? 그 단어의 의미를 좀 아시겠습니까? 중언부언하면서 기도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가 되십니까? 혹시 이해가 안 되신다고 하면 그 문장 전체를 천천히 문맥에 따라서 읽어보시면,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마태복음 6장 7절을 한번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6장 7절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니까 중언부언한다고 하는 말이 무슨 말이냐면, 말을 많이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중언부언하지 말라. 말을 많이 하지 말라. 이방인들처럼 그렇게 말을 많이 해야만,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실 거라고 생각하지 말라고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기도할 때 말을 많이 하지 말라고 하는 말이 무슨 의미일까요? 그것이 무슨 의미냐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하나님께 기도할 때, 어떻게 기도해야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실까? 기도를 많이 하면 하나님께서 들을 거라고 생각하는 게, 우리들의 일반적인 생각입니다. 기도를 우리가 한 번만 하는 것보다는, 작정하고 오랫동안 계속해서, 기도의 양을 많이 하면,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정성을 보시고, 우리들의 정성 때문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거라고 생각하는 그런 개념들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많이 들어가 있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그렇게 기도 많이 할 필요 없다. 기도를 많이 해야 하나님께서 들으실 거라고 생각하지 말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좀 깜짝 놀랄 만한 말씀인데요.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러니까 기도를 안 해도 된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이 아닙니다. 기도를 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기도할 때 우리가 기도를 잘 안 하다가, 정말 필요한 일이 있을 때 그때만 하나님 앞에 한 번씩, 필요할 때만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기도하는 것은 옳지 않을 겁니다.

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본다고 한다면, 성경에서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항상 하나님께 기도해야 하는 것이고,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 그게 성경적인 가르침입니다. 성경적인 가르침이 항상 기도해야 되는 것이고,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성경에서는 가르쳐주고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왜 “말을 많이 하지 말라. 기도를 많이 할 필요 없다”라고 말씀하시는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항상 기도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는 이야기는, 기도의 양을 많이 하라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언제 어떤 상황에서든지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고 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항상 기도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는 말은 우리가 필요할 때만 기도할 게 아니라, 언제든지 기도해야 된다는 것이고, 우리가 절망하고 낙망스러운 일이 있을 때는 포기해 버리고 기도하지 않을 게 아니라, 그런 상황에서도 기도해야 되는 것이고, 아무런 응답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그런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면서 기도하라는 이야기고, 그 어떠한 일들이 우리들 앞에 펼쳐 진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고 항상 하나님과 기도하는 것을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는 것을 멈추지 말아야 된다고 하는 의미에서 쉬지 말고 기도하고 항상 기도하라고 하는 그런 말씀인 것이지, 기도의 양이 응답을 결정한다는 식의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응답을 받기 위해서는 기도를 많이 해야만 정성을 아주 다해야만 그리고 하나님을 감동시킬 정도로 그렇게 우리가 정성을 들여야만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실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성경적인 관점이 아니라 미신적인 관점입니다. 우리 안에 많이 들어와 있는 미신적인 관점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많이 해야 되는 경우는 언제냐면, 하나님이 우리의 아빠가 아닐 경우에는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 우리들의 아버지세요. 우리들에게 귀를 기울이고 계시고,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이 바로 그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누가 아닌가? 사악한 재판관이 아니라는 겁니다. 사악한 재판관은 어떤 사람입니까? 가난한 과부가, 불쌍한 과부가 나아가서 그 재판관을 향해서 간청을 합니다. 내 어려운 사정이 있는데 내 어려운 사정 좀 해결해 주세요. 그랬을 때 이 사악한 재판관은 그 과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습니다. 아는 척하지 않습니다. 모르는 척 해버립니다. 그런 상황이 있을 때 이 과부는 포기하지 않고, 또 가서 조르고 또 가서 조르고 계속해서 간청을 합니다. 그러니까 하도 간청을 하니까, 이 사악한 재판관은 그때서야 관심을 두기 시작합니다. 이 여인이 자꾸만 와서 나를 괴롭히는데, 이 여인을 더 이상 오지 않게 만들 묘수는 없는가? 어떻게 하면 되겠는가? 생각하면서 이 재판관은 차라리 이 여자의 간청을 들어줘버리고 말겠다. 그러면 더 이상 이 여인이 나를 괴롭게 하지 않겠다고 하는 생각에서 그 여인의 간청을 들어주는 겁니다.

하나님이 만일 그런 사악한 재판관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계속해서 양을 많이 해서 괴롭게 해서.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인가를 응답받아야만 할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가르쳐주고 있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 하나님은 길 가다가 어쩌다가 만난 아저씨가 아니에요. 하나님은 그런 사악한 재판관이 아니에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심한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 마치 우리의 아버지와 같아서, 우리들의 사랑하는 그런 부모님과 같아서,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해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라고 가르쳐주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들은 부모로서 어떻게 아이들을 대하셨습니까? 우리 아이가 어느 날 우리에게 이야기를 합니다. “아빠, 나 저 장난감 갖고 싶어”라고 그 이야기를 하면, 그 말이 안 들리는 것이 아니라 그 아이의 말이 내 가슴 속에 박혀요. 이 아이에게 장난감 사줘야 되겠다고 하는 그 마음이 내 마음 가운데 콱 박혀서 돈을 버는 겁니다. 그래서 월급을 받으면 제일 먼저 하는 것이 이 아이에게 장난감을 사주고 싶어서 가게로 달려가는 거예요. 그래서 그 아이에게 그 장난감을 주고 싶은 것이 부모의 마음인 거죠.

우리 어머니는 어떤 생각을 합니까? 우리 아이가 말을 합니다. “엄마, 나 떡볶이 먹고 싶어. 나 치킨 먹고 싶어.” 그러면 그 말이 귓가에 맴돌아요. 일을 하면서도 내가 빨리 집에 가서 우리 아이에게 이 맛있는 거 만들어줘야 되겠다고 하는 그 생각이 마음속에 박혀 있어서, 그 아이에게 해주고 싶은 것이 바로 부모님들의 마음인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 우리가 기도하면, “기도, 그것밖에 안 한 것 가지고 내가 들어줄 리가 없다”라고 하면서, 외면해 버리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의 신음소리조차도, 우리의 울부짖음을 주님께서 보시며, 가장 좋은 것으로 주기 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라고 하는 사실을 믿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7장 11절의 말씀 가운데서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실 뿐만 아니라, 가장 좋은 것으로 주기 원하시는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 영적인 하나님이라고, 영적인 아버지라고 하는 사실을 믿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람 아버지는 한계가 있죠. 부모로서의 사람 부모는 한계가 있습니다. 좋은 것을 주고 싶은 것이 부모의 마음이지만, 그러나 우리들의 마음과는 달리 우리들이 어리석어서 좋은 것을 주기보다는 나쁜 것을 줄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이것이 아이에게 좋을 거라고 생각해서 주었는데, 아이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해가 되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아요. 이 아이에게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래서 주었는데, 그런데 알고 보니 이 아이에게 독이 되는 것 같은 것을 주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제가 그랬어요.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제 마음 가운데 있었고, 이 아이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은 마음이 제 마음 깊은 곳에 있었어요. 그런데 아빠로서 훈련받지 못하고, 서툴고 너무나도 어리석어서, 그리고 죄성으로 가득 차 있어서, 우리 아이에게 가장 좋은 걸 주고 싶은데 오히려 아이에게 좋지 못한 것을 주었어요. 우리 아이가 어렸을 때 이 아이가 너무나도 겁이 많은 겁니다. 용기가 없는 겁니다. 부모님과 분리 불안 증세가 있는 겁니다. 제 마음 가운데 우리 아이가 이렇게 크면 안 되는데, 이 아이가 좀 잘 자랐으면 좋겠는데, 용기가 있는 아이가 되었으면 좋겠고, 이 아이가 자신 있게 인생을 살았으면 좋겠고, 정말 인생을 멋지게 개척해 나가는 그런 위대한 아이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마음이 있는데, 이 아이는 불안 증세가 있고, 부모님과 떨어지기를 두려워했고, 용기가 없고 자신감이 없는 그 모습을 보는 것이 제 마음 가운데 너무나도 힘들었어요. 그래서 이 아이를 용기 있게 만들고 싶어서, 제가 했던 어리석은 행동이 무엇이냐 하면 아이를 다그친 거죠. 다그친다고 해서 해결될 수 있다고 하면 얼마나 좋겠어요?

아이가 아이스크림 먹고 싶다고 하면, “그래. 아이스크림 사줄 텐데, 네가 슈퍼마켓 들어가서 네가 사가지고 나와.” 얘기를 하니까 아이가 아이스크림 먹고 싶은데도, 두려워서 못 들어가는 거에요. “아빠가 좀 갖다 사다 줘. 아빠가 사다 줘. 아빠 손이 붙잡고 가고 싶어.” 이야기하는데 이 어리석은 아빠는 그렇게 하지 못하고, “네가 가서 못 사오면, 못 먹어.” 윽박지르고, 그러자 이 아이는 펑펑 울면서, 그렇게 하는데도 모질게 이 아이의 용기를 길러주고 싶은 마음에 그렇게 했는데, 오히려 그것은 그 아이에게 도움이 되었던 것이 아니라, 더 세상을 두려워하게 만들고, 더 용기가 없게 만들어버리고, 이 세상이 너무 무섭다고 생각하는 그런 마음을 갖게 되고, 아이를 정말 자신 없는 아이로 길러버리고 만 그 책임이 책에 있더라고요.

지금 같으면 그렇게 안 할 것 같아요. 울고 있는 아이가 있으면, 손 붙들고 “걱정 마. 아빠가 함께 갈 테니까, 같이 가보자. 뭐 먹고 싶니?” 골라보라고 말하고, 걱정하지 말라고 옆에서 다정하게 이야기하면서, 그래서 이 세상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충분히 살만한 곳이라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는 자세를 보여주었을 텐데, 그렇게 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우리 딸아이 결혼할 때, 제가 했던 말이 뭐냐면, “미안하다. 아빠가 바보 같아서 미안하다.” 얘기한 건데요.

우리 인간 부모는 어떤 부모인가? 가장 좋은 걸 주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어리석어서 오히려 정반대의 결과를 나오는 일들을 하는 게 우리 부모의 마음이에요. 하지만 우리들의 하늘의 하나님 우리들의 영적인 아버지는 어떤 하나님이신가? 그 하나님은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실수가 없으신 하나님이며,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그 한 치의 오차도 없는 그 하나님이 바로 우리들의 아버지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사실을 믿고 주님을 신뢰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람 부모님은 좋은 것을 주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능력이 없어서 주지 못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인간 자체가 부족하기 때문에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해주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다 해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나이가 점점 들어가면서 연로해지면서 이제는 자녀들에게 해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지만, 더 이상 해줄 것들이 줄어가고 있고, 그리고 우리들의 호흡이 끝나면 멈추면 더 이상 해줄 수 없게 되는 연약한 존재가 인간 부모님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하늘의 아버지 우리들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으신, 능력이 많으신 아버지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인간들은 아무것도 해 줄 수 없지만,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은혜는 저와 여러분들이 기대하면 기대할수록, 우리가 생각하는 것 그 이상으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시다. 하나님이 우리의 영적인 아버지시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며 담대하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질문을 던져보아야 할 게 있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고, 어떻게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아버지가 되시는 것일까요?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는 무엇으로 알 수 있습니까? 무엇이 필요하죠? 피를 물려받아야 자식이 되는 겁니다. DNA가 같아야 부모와 자식이라고 하는 사실이 확인이 될 수 있는 것이고요. 그러다 보니까 자식은 부모를 빼다 닮게 되어 있는 겁니다. 붕어빵 같은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들의 문제가 무엇이냐 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전혀 닮지 않았다고 하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들의 모습을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하나님을 닮았나? 하나님의 성품을 닮았는가?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닮았는가? 우리는 하나님을 닮기보다는 마귀를 더 많이 닮았습니다. 그래서 시기하고 질투하고 미워하고, 왕따 시키고, 아는 척하지 않고, 여러 가지 악한 모습들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서 자꾸만 솟아나고 있는데,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의 모습을 보여주기보다는 마치 마귀의 자녀와 같은 모습을 보여줄 때가 더 많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당시 사람들을 향해서 너희들의 아버지는 마귀라고 말씀하셨어요. 요한복음 8장 44절에 말씀해 보니까 이렇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말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생각하는 것이 악하고, 행동하는 것이 악한 그 모습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기보다는 마귀의 자녀인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왜 하나님이 없다고 할까요? 그것은 자기가 하나님을 닮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기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기 때문에 부정하고 싶은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전혀 닮지 못했기에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할 자격이 되지 않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가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기가 어려운 겁니다. 우리 자녀들이 학교에서 좋은 점수를 받으면 당당하게 부모님에게 나가지만, 그러나 문제아로 낙인 찍히고 여러 가지 힘든 일을 당하게 되면 아버지 앞에 부모님 앞에 감히 나아갈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죄를 지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악한 모습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감히 나아갈 수가 없는 사람이죠.

그래서 집을 나갔던 탕자는 아버지 앞에 돌아오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누가복음 15장 21절 말씀에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아들은 집에 돌아왔지만 아버지를 보면서 아버지라고 말할 용기가 나지 않는 거예요. 우리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우리가 늘 생각하는 것이 악하고 행동하는 것이 악한데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라고 말할 자격이 없는 것이죠.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어떻게 보고 계시는가? 자격이 없는 우리를 자녀로 삼아주시고, 내 백성이라고 칭해 주시는 겁니다. 그래서 호세아서 2장 23절의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내가 나를 위하여 그를 이 땅에 심고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 던 자를 긍휼히 여기며, 내 백성 아니었던 자를 향하여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리니, 그들은 이르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하시니라.” 하셨습니다.

1932년에 소설을 발표한 김동인이라고 하는 소설가가 있는데요. 일제시대 때 동광이라고 하는 문학잡지에 <발가락이 닮았다>라고 하는 소설을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이 <발가락이 닮았다>라고 하는 소설은 의사의 시점으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는 것인데요. 젊은 시절에 방탕한 생활을 하면서 이렇게 방탕한 생활을 했던 사람이기에, 성병에 걸려 생식 기능을 상실한 M이라고 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결혼을 하지 못하고, 노총각 신세로 있다가, 그래서 어쩌다 보니까 결국 결혼에 성공하게 되었는데요. 결혼을 했지만 아이를 가질 수 있는 능력은 없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자기 부인이 아기를 임신하게 된 겁니다. 자신은 아이를 가질 수 있는 기능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자신의 아내가 아기를 임신한 것이 기쁨이 되지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 M이라고 하는 사람이 의사를 찾아왔습니다. 의사를 찾아와서 자기 자신에게 생식 능력이 있는 것인지 검사를 맡고 싶다고 이야기를 했다가도, 그런 검사를 받지 않고 그냥 다시 돌아가버렸어요. 또 다시 돌아와서 그런 기능이 있는지 검사를 맡고 싶다고 얘기를 했지만, 다시 받지 않고 그냥 돌아가 버렸습니다. 나중에 이 의사는 자초지정을 듣고 나니까 충분히 이해가 될 만한 일이었습니다. 나중에 그 사람에게 아기가 태어났는데, 그 아이가 하루는 시름시름 아프게 되니까 그 아이를 그 M이라고 하는 사람이 안고 와서 그 의사에게 치료해달라고 하면서 아기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의사선생님, 이 아이가 우리 증조 할아버지를 닮았어요. 그리고 나도 닮았는데, 저 발가락 가운데 발가락이 좀 길어요. 그게 나를 닮았어요.”하면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그 M이라고 하는 청년을 의사가 바라보면서, 대답을 했습니다. “선생님, 이 아이가 선생님의 발가락만 닮은 게 아니라, 선생님의 얼굴도 닮았네요.” 그 이야기를 했지만 그 M이라고 하는 사람이 정말일까 하면서 의혹의 시선으로 또 희망이 섞인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볼까 봐 두려워서, 그 사람의 시선을 피했다고 하는 그런 소설입니다.

이 M이라고 하는 사람이 자신의 아들이 아닐 것 같은 그 아들을 보면서 내 아들이라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던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그렇게 믿고 싶은 거죠. 아니라고 하면 자신의 삶이 부정을 당하고, 정말 그 고통을 감내할 수 없어서, 그냥 이 아이가 내 아들이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그런 소망을 가지고 그렇게 이야기하는 그런 심리가 이 남자에게 있었던 것이죠.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우리가 전혀 하나님을 닮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너는 내 아들이라” “너는 내 딸이라”고 말씀해 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진정으로 사랑해 주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의 연약한 그 모습을 보면서 “너는 나와 상관이 없다. 나의 아들이 아니다. 내 자식이 아니다”라고 내 팽개쳐 버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셨기 때문에, 하나밖에 없는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면서 우리들의 죄를 다 씻기시고 거룩한 옷을 입혀서 저와 여러분들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신 줄로 믿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한 목사님이 계시는데요. 그 목사님은 사춘기 시절에 미국으로 이민을 갔던 사람입니다. 사춘기 시절에 미국으로 이민을 갔으니,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학생들 모두가 다 동양인이라고 중국 사람이라고 놀리면서 그렇게 학창시절을 보내는 것이 너무나도 힘들었었는데요. 그러니까 이 이 사춘기의 이 소년이 자꾸만 잘못된 길로 가는 겁니다. 학교에 가서 늘 싸우고 다투고 문제를 일으키고, 하루도 잠잠할 날이 없이 학교에서 문제만 일으키는 그런 학생이었습니다. 어느 날 교장선생님이 그 학생을 불러서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네가 아무래도 안 되겠다. 너 이런 식으로 하면? 넌 커서 뭐가 될래? 너는 커서 누가 되려고 이렇게 말썽을 비우느냐?” 그랬더니 이 학생이 대답하기를 “상관없어요. I don’t care. 내 미래에 뭐가 되든 무슨 상관이에요?” 그렇게 막 나가던 그런 학생이었는데, 그 학생을 향해서 교장 선생님이 얘기하는 거예요. “너 내일 어머니나 아버지 데리고 와라.” 그 이야기를 들은 이 학생이 집에 들어가서 부모님한테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데, 이야기하기가 너무나도 어려운 겁니다. 말도 못하고 전전긍긍하다가 자기 전에 엄마한테 이야기를 해요. “엄마, 내일 학교에서 오래요.”

다음 날이 돼서 그 어머니가 교장 선생님을 만나기 위해서 학교로 옵니다. 시카고 아주 추운 곳인데, 그 추운 겨울날 어머니가 버스에서 내려서 학교로 총총총총 걸어오고 있는데, 엄마를 마중하기 위해서 교문 밖에 서서 기다리고 있는 그 아이가 자기 엄마를 본 거예요. 잘못은 내가 했는데, 엄마가 나를 위해서 그 모습으로 달려오는 그 애처로운 모습을 보고, 그 아이는 그 순간에 마음을 고쳐먹고, 그 다음부터는 더 이상 문제 일으키지 않으면서 공부도 열심히 해서 나중에 목사님까지 되었다고 하는 그런 간증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모습은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늘 잘못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들의 어머니처럼 우리들의 아버지처럼 우리의 잘못을 다 우리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저 높고 높은 곳에서부터 이 추한 곳으로 오셔서, 저와 여러분들의 모든 죄악을 짊어지시고 해결해 주시고 은혜를 베풀어주신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들에게는 우리는 고아가 아닙니다. 영적인 아버지 하늘의 아버지가 우리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 혼자 고민할 것이 아니라 늘 넘어지고 쓰러질 때 혼자 당황해 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사 하나밖에 없는 그 아들까지 내어주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 믿음으로 다시 한 번 힘과 용기를 얻고, 다시 한 번 일어서고 또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주님 앞에 아버지 앞에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받아 누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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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략이 없으면 (잠 11:14-15)

배려와 멸시 (잠 11:12-13) +++ 사랑의 역설 (잠 11:16-31)

우리는 두절을 읽었는데요. 14절의 말씀 그리고 15절의 말씀이 각각 다른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15절의 말씀의 경우에는 보증을 서는 것에 관한 교훈을 해주고 있는 것인데요. 다른 사람을 위하여서 보증을 서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서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보증 서지 마라. 보증을 서게 된다면, 해를 당할 수 있을 것이다.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것이다라고 가르쳐 주시면서, 그러니까 함부로 보증을 서는 일을 하지 말라고 15절의 말씀 가운데서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보증 서는 문제에 대해서는 제가 이미 작년이었던가요? 작년이죠! 작년 9월에 잠언서 6장 1절에서부터 5절 말씀에 근거해서, <우매한 보증>이라고 하는 제목의 말씀을 통해서, 보증에 관한 성경적인 교훈을 아주 깊게 살펴본 적이 있습니다.

단순히 보증을 안 서버리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러면 어려움에 처한 우리 이웃들에게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힘들고 고통을 당하고 있는 그 이웃들을 못 본 척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 정말 그들을 도와주는 것이 보증을 서는 것이 아닌, 다른 방법은 무엇인가 등등. 보증과 관련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살펴본 적이 있는데, 벌써 시간이 꽤 오래 지나서 다 잊으셨다고 한다면, 예전에 제가 했던 그 <우매한 보증>이라고 하는 설교 영상을 다시 한번 찾아서 들어보시기를 권고드립니다. 이번 주 이 설교를 홈페이지에 올리게 될 텐데요. 이 설교 홈페이지에 링크를 걸어 놓을 테니까 , 예전에 우매한 보증에 대해서 설교했던 내용을 링크해 놓을 테니까, 보증에 관해서 다시 한번 듣기 원하시는 분이 있다고 한다면, 그 설교를 다시 들어보시기를 권하는 것으로 15절에 대한 설명은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매한 보증(잠 6:1-5) http://iwbs.org/?p=4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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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오늘 두 절을 읽었지만 한 절만 살펴보려고 합니다. 14절만 살펴보려고 합니다. 14절 한번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14절입니다. “지략이 없으면 백성이 망하여도, 지략이 많으면 평안을 누리느니라.” 지략이 없으면, 백성이 망한대요. 지략이 많으면, 평안을 누리게 된대요. 그러니까 지략이 있는 게 좋겠죠? 지략이 있어야 됩니다. 끝! 결론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질문이 생깁니다. 도대체 지략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고, 그 지략을 어떻게 얻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는 것을 질문을 던져보아야 하겠죠. 지략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 한국말 사전을 살펴보니까, “어떤 일이나 문제를 명철하게 포착하고 분석 및 평가하여 해결 대책을 능숙하게 세우는 뛰어난 슬기 그리고 계략”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문제, 어떤 사건, 어떠한 난처한 일들을 만나게 되었을 때, 그것을 빨리 분석 평가하고, 그 해결책을 빨리 해결해낼 수 있는, 그런 지혜로운 지혜, 슬기, 계책, 계략, 그런 것을 가리켜서 지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지략들이 많으면 평안하겠지만, 이런 지략이 없다고 한다면, 삶이 힘들어지는 것이고, 고통스러워지는 것이고, 정말 힘들게 된다고 하는 것인데요. 지략이 많아야 된다. 지략이 있어야 된다고 오늘 잠언서에서 말씀하고 있는데, 근데 지략이 많아야 된다고 하는 것을 알지만, 많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고 해서, 지략이 많아집니까? 아니잖아요.

지략이 있고 싶어요. 근데 지략이 없는 걸 어떻게 하겠어요? 생각이 안 나는 걸, 어떡하겠어요? 어떻게 하면 되죠? 어떤 문제를 만났습니다. 어떤 어려운 일을 만났습니다. 정말 도무지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은,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은, 그런 일들을 만나게 되었을 때, 이 문제를 아주 명쾌하게 해결할 수 있는 지혜가 있었으면 좋겠는데, 이것을 완전히 잘 깨끗하게 해결할 수 있는 그런 슬기로움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그게 뭐 노력한다고 됩니까? 어떻게 그런 지략을 얻을 수가 있겠습니까? 아무리 내가 머리를 굴린다고 해서, 지략이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정말 아무런 지략이 없는 지혜가 없는 사람을 향해서, 좀 머리 좀 써라. 좀 생각 좀 해봐라. 좀 지략을 세워서, 좀 대처를 해라. 백날 이야기한다고 해서 됩니까? 안돼요. 그렇게 태어났는데, 아무리 지략이 있으라고 이야기한다고 한들, 지략이 생겨나겠습니까? 생겨나지 않는 것이죠.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지략이 없으면 망하고, 지략이 많으면, 평안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하는 것인데, 그러면 어떻게 지략을 많게 할 수 있겠습니까? 단 하나의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의 지략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나에게는 그런 지혜가 없어도, 내게서는 그런 지혜가 생겨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내 머리로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해결책이 나오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보는 거예요. 당신 같으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당신 같으면 이 일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겠느냐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물어보는 겁니다. 나 혼자 생각하면 해결할 수 없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보기 시작하는 거예요. 노인들에게 가서 이런 일이 있을 때 어떻게 해결하셨습니까? 경험이 많은 사람들 앞에 가서 그런 일들을 경험했을 때 어떻게 문제를 해결하셨습니까? 어머니는 어떻게 해결하셨어요? 아버지는 어떻게 해결하셨어요? 경험이 많은 사람들에게 가서 물어보면 되는 것이죠. 전문가에게 찾아가면 되는 겁니다. 나는 의학 지식이 없어요. 나는 아무런 건강에 대한 상식이 없어요. 하지만 의사에게 가서 물어보는 겁니다. 이런 경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우리 아이들의 문제가 있다고 한다면, 그 아이들의 문제를 가지고 아이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전문가들에게 물어보는 겁니다. 오은영 선생님한테 가서 물어보는 것이고, 이런저런 전문가들에게, 아니면 똑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에게 가서 물어보게 된다고 한다면, 나는 비록 우둔해서, 나는 아직 경험이 부족해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지혜가 없지만, 지략이 부족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가서 귀를 기울이면 지략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머리로 생각해낼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지혜를 구해야만 하는 것이고요. 다른 사람들에게 의견을 물어보아서, 그들의 조언을 들으면, 그리고 그 조언을 듣다 보면, 좋은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냐면, “지략이 많으면 평안을 얻느니라.” 평안하다고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지략이 “뛰어나면” 평안해지는 것이 아니라, “많은” 지략을 얻게 된다고 한다면, 이 사람의 지략을 듣고, 저 사람의 지략을 듣고, 이 사람의 지략을 듣고,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그렇게 많은 지략을 우리가 듣게 된다고 한다면, 실수를 줄이게 되는 것이고, 잘못된 판단을 줄이게 되면서, 그래서 이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그런 능력이 생겨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왕의 경우에 한 나라를 다스리면서, 자기가 독단적으로 독불장군이 되어서, 그래서 그 나라를 다스리게 된다고 한다면, 백성들은 정말 고통스러운 일을 만나게 될 겁니다. 하지만 왕이 여러 사람들의 신하들의 이야기들과 백성들에게 귀를 기울이면서, 사람들이 무슨 불평이 있고, 어떠한 소리를 지르고 있는지 귀를 기울이면서,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고, 결정하게 된다면, 백성들이 평안하게 될 것이라고 하는 게 바로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인데요. 왕이 아닌 우리들이라고 할지라도, 우리도 사람들의 지혜를 들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혼자 생각해서 결정하는 것보다 다른 사람들의 관점이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한쪽 면만 바라보게 되어 있습니다. 한쪽 면만 바라보기 때문에 내가 보면, 이것은 네모나요. 이런 컵이 있으면, 이 컵을 이쪽에서 바라보면, 네모나게 생겼어요. 그래서 내가 이 컵을 바라보면서, “아, 이것은 네모나구나”라고 보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내가 네모나다고 보았기 때문에, 내 판단이 맞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하지만 이 컵을 위에서 보면 동그랗습니다. 한 사람은 네모나다고 보고 있고, 또 한 사람은 동그랗다고 보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내가 보고 있는 것만을 그것이 맞다고 생각해서,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지 아니하게 된다고 한다면, 이 컵이 무엇인가를 알 수 없게 되는 것이죠.

따라서 우리는 내 생각만 할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귀를 기울여야 하는 거예요. 다른 사람들의 말에, 다른 사람들의 지략에 귀를 열어야, 지략이 많아지는 것이고, 지략이 많아져야, 평안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오늘 성경에서 가르쳐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이야기 가운데, 소경들이 코끼리를 만지면서 코끼리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한 소경은 코끼리의 다리를 만지고서, 코끼리에 대해서 이야기를 합니다. 이 코끼리라고 하는 것은 마치 나무둥치와 같다. 나무둥치처럼, 커다란 둥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 코끼리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소경은 코끼리의 코를 만지면서, 코끼리는 뱀처럼 생겼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무슨 소리냐? 코끼리가 나무둥치 같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라. 코끼리는 뱀처럼 생겼다. 흐물흐물하고, 이렇게 길쭉하게 생겨서 움직이는데, 마치 뱀처럼 생긴 것을 가지고 있는 것이 코끼리라고 이야기를 한 겁니다. 그런데 또 다른 소경은 코끼리의 귀를 만지면서, 코끼리는 마치 나뭇잎과 같이 생겼다고, 그 넓은 나뭇잎과 같아서, 그래서 그 나뭇잎과 같은 것으로 내에게 부채질을 하면 시원할 수도 있다고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3명의 소경이 각각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다른 한 소경은 코끼리에 배를 만지면서, 이 코끼리는 마치 커다란 바위와 같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코끼리가 다른 것이 아니라 커다란 바위와 같은 것이라고, 이야기를 했고요. 또 다른 소경은 코끼리에 그 뿔을 만지면서, 이 코끼리는 어떤 창과 같은 것이라고 아주 뾰족한 창처럼 생겼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 소경들이 이 코끼리를 만지면서, 각각 조그마한 부분을 만져놓고, 자기가 아는 것이 전부인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자신의 주장이 옳다고 확신하고 있는 것이죠. 왜? 내가 만졌으니까, 내가 경험했으니까, 이것은 내가 확실히 느낀 것이니까, 그러니까 내가 맞다고 생각하는데, 이 세상에 코끼리에 대해서 딴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는 겁니다. 내가 경험한 것과는 정반대의 이야기를, 엉뚱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서로 싸우고 서로 다투는 겁니다. 그런데 코끼리가 그게 아니라, 우리는 코끼리의 일부분만을 만지고 있는 것이죠.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진리 앞에서 우리 인간은 너무나도 조그마한 인생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오묘하심을 깨달을 수 있으며, 우리가 어떻게 진리라고 하는 그 엄청나게 큰 진리를 우리들의 알량한 머릿속으로 다 집어넣을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진리의 일부분만 볼 수밖에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그 일부분만 보고 있는 우리가 내가 진리를 다 보았다고 그렇게 주장하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일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죠.

그래서 어떻게 해야 되는가? 내가 조금만 파악할 수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다른 사람의 지하에 귀를 기울여야 되는, 다른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나? 귀를 기울여야 되는, 그래서 그 다른 사람들이 하고 있는 이야기들을 종합하면서, 저 사람이 틀렸다가 아니라, 나랑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내가 본 부분과 저 사람이 본 부분이 다른 부분을 보고 있고, 내가 보지 못한 부분을 보고 있고, 그래서 그 다른 사람들의 나의 의견과 완전히 다르다고 할지라도, 그 의견을 그냥 내 팽개쳐 버릴 것이 아니라, 함께 마주 앉아서 나는 이것을 보았는데, 너는 무엇을 보았는지, 그래서 우리가 함께 맞추어 보면서, 코끼리 코끼리에 대한 더 나은 이해를 하게 되고, 더 나은 그런 파악을 하게 될 수 있는, 그런 기회가 가지게 되는 것이죠.

따라서 우리가 지략을 얻으려고 한다면, 우리가 평안하기를 원한다고 하면, 문제들에 대해서 바른 해결책을 얻기를 원한다고 한다면,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 100% 확실하다고 할지라도, 내가 정말 완벽하게 경험했다고 할지라도, 내가 경험하지 아니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나와의 정반대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할 때, 진리에 한 걸음 더 가까이 가게 되는 것입니다. 지략이 많아야 돼요! 지략을 하나만 가지고 있을 게 아니라, 다양한 지략을 같이 모아서, 들어야 진리에 한 걸음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것이고, 해결책에 한 걸음 더 가까이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 크리스천들은 종종 믿음이 확실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말에 대해서 귀를 닫아버리고, 내가 이해한 성경 말씀, 내가 알고 있는 신앙, 내가 알고 있는 그 교리, 내가 알고 있는 그것이 전부인 줄 알고, 나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적대적으로 생각하고, 그들을 공격하고, 그들을 죽여야 될 대상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래서 결국 진리에 다가가지 못하고, 내가 이 컵에 한쪽 면만 보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우둔한 상태에서 다른 사람들을 무시해 버리는데요.

그런 우리들을 온 세상 사람들이 바라보면서, 똑같이 무시해 버리고 마는 겁니다. 이거 원인데, 왜 네모라고만 이야기하느냐고 무시를 당하게 되는 것이죠. 우리 성도들이 교조주의에 빠져서, 도무지 들으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결국 어떻게 되는가? 망하게 될 것이다.

망하게 되는 길로 가는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우리가 눈을 닫아버리고, 귀를 닫아버려서, 내가 잘못 보고 있다고 하는 것, 내가 부분적으로 보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그리고 그 부분적인 진실 속에서 죽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진리를 많이 확보하기 위해서, 지략을 더 많이 얻기 위해서, 우리들의 마음을 겸손하게 내려놔야 해요. 우리들이 진리 앞에서 겸손해져야 되는 거예요. 내가 일부만 볼 수 있구나! 내가 전체를 깨닫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약간의 모습만을 보고 바라보고 있고 저 뒤의 모습은 보지 못하고 있구나! 내가 보지 못하는 그런 부분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내가 겸손하게 인정하고, 사람들 앞에서 내가 옳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생각하는 것이 극히 일부분이며, 다른 사람들이 진리를 보고 있을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인정하며 겸손하게 엎드리는 것이 지략이 많아지는 길이고, 그 지략이 많아져야 평안함을 얻을 수 있으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 모두가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 성도들을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로 불러주셨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할 때, 신앙생활의 핵심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 사람들 앞에서 신앙생활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리새인들은 사람들 앞에서 보이려고 신앙생활을 했기 때문에, 그들은 망할 수밖에 없었는데요. 그래서 신앙생활에 아주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면, 하나님 앞에서 내가 단독자로 서는 것이 그게 신앙생활의 핵심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보고, 다른 사람들의 이목이 두려워서, 체면 때문에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순 엉터리고요 하나님 앞에서 단독자로 서서, 하나님 앞에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그게 진짜 신앙생활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의 핵심이 바로 하나님 앞에 내가 단독자로 서는 것이 신앙생활인데, 우리 주님께서는 그런 우리들을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로 불러주셨습니다. 우리를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로 불러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모두 다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깨닫는 것이 얄팍하고, 부족하고, 제대로 깨닫는 것이 없기 때문에, 우리들의 이해는 우리들의 지략은 다른 사람들의 이해와 지략에 의해서 교정받아야 되고 수정받아야 되고 보완되어야만 하기 때문에, 우리가 함께 신앙의 공동체를 이루어서 함께 신앙생활해 나가는 가운데, 영적으로 같이 성숙해질 수 있기 때문에, 우리를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로 불러 주신 것입니다.

전도서 4장 9절에서부터 12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또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믿습니까? 한 사람이면 어떻게 된다고요? 패하는 거예요. 한 사람이면 어떻게 돼요? 망하는 거예요. 내가 독단적으로 독불장군처럼 행동하면, 내가 맞고, 내가 생각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면, 교만한 마음 가운데 있으면, 망하게 되는 겁니다.

하지만 두 사람이 되고, 세 사람이 되고, 신앙의 공동체를 이루어서,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가운데, 이렇게 깨달은 것이 내가 잘못 깨달을 수 있구나라고 하는 사실을 교정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아,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이것이 진리인 줄 알았는데, 하나님의 말씀에 다른 면을 내가 보지 못했었구나! 우리가 신앙의 공동체를 이루어서, 함께 신앙생활을 해가는 가운데, 서로가 서로에게 좋은 선한 영향력을 끼쳐서, 내가 보지 못한 것을 다른 사람들이 보고,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한 것을 내가 보아서, 서로 보완해 주고, 그리고 함께 진리를 향해서 나아가게 될 때 성공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교회로, 해석 공동체로 우리들을 불러주신 것이죠. 우리가 성경을 읽고 이해한 것이 잘못 이해했을 수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해석 공동체의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이죠. 다른 사람은 똑같은 본문을 읽고, 어떻게 이해했는지 겸손하게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이죠.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아무런 도움을 받지 않는다고 하면, 전혀 잘못된 길로 성경을 사용하고 있으면서도, 전혀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는 해석 공동체가 필요한 것이고, 우리 모두가 함께 같이 신앙생활을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결정을 할 때, 어떻게 결정해야 되는가? 나 혼자 생각하고, 나 혼자 고민하고, 혼자 나 홀로 있다가, 그렇게 해서 내가 결정해서 밀어붙이는 게 아니라, 혼자 결정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결정해야 됩니까? 같이 의논하고, 같이 대화하고, 그래서 내가 보지 못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물어봐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부로 만드셨어요. 태초에 하나님께서 세우신 규례 가운데 하나가, 세 가지 규례 가운데 하나가 결혼의 규례입니다. 하나는 노동의 규례이고, 또 하나는 안식의 규례이고, 또 하나가 이 결혼의 규례라고 하는 것인데, 태초에 만드신 이 세 가지 법칙이, 이 규례가 그중에 하나가 바로 인간을 이 부부로 짝 지어주신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데요. 왜 하나님께서는 그냥 남자 혼자 살아가게 만들지 않고, 여자 혼자 살아가게 만들지 않고, 이렇게 같이 살아가게 만들어 주셨습니까? 그것은 서로 보완하고 도우라고 하는 것이죠.

남편과 아내가 같던가요? 생각하는 것이 완전 정반대던가요? 완전 반대예요! 왜 그렇게 반대인지 모르겠어요. 꼭 반대로 생각해요. 왜 반대로 생각할까요? 그래야 온전하게 볼 수 있기 때문에, 똑같이 보면 망하는데, 다르게 보기 때문에, 보완하고 완충하고 모든 것들을 다 살펴보아서, 실수하지 아니하도록 만들어주는 방법인 것이죠. 그래서 아내의 말을 잘 들어야 됩니다. 믿습니까? 한번 따라서 해봅시다. “아내의 말을 잘 듣자!” 이런 얘기하면, “목사님, 왜 남편 말을 잘 듣자는 얘기는 안 합니까?” 물어보시는 분이 계세요. 보니까, 아내분들은 말 안 해도 잘 들어요. 남자들이 문제지! 자기들이 옳은 줄 알고, 그냥 자기 멋대로 하려고 하는 그런 게 문제란 말이에요.

서로 남편과 아내가 이야기하면서, 나는 이렇게 생각하는데,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야기하면서 같이 의논해야 되는 거예요. 뿐만 아니라 누구의 이야기도 들어야 돼요? 부부가 이야기할 뿐만 아니라, 누구의 이야기도 더 들으면 좋겠습니까? 우리 아이들의 이야기도, 그 아이가 3살짜리 꼬마 애든지, 다섯 살짜리 꼬마애든지, 아직 세상 물정 모르고,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라고 할지라도, 아빠 생각에는 이렇고, 엄마 생각에는 이런데, 너의 생각은 무엇이냐고 그 아이에게 물어야 해요. 왜냐하면 그 꼬마 아이는 어른들이 보지 못하는 또 다른 것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꼬마 아이들이 틀린 것이 아니라, 그 꼬마 아이들이 우리 어른들이 보지 못하는 새로운 그 측면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우리 가정으로 불러주신 하나님의 섭리를 기억하면서, 우리 꼬마 아이들에게 물어봐야 되고, 또한 우리 부모님들에게도 물어봐야 되고, 친구들에게도 물어봐야 되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더 많이 물어보면 물어볼수록 실수를 적게 하고, 우리가 평안의 길로 갈 수 있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미국에 가보니까요. 정말 그래요. 부모님들이 이야기를 하는 가운데, “애들은 가라”가 아니라, 아이들도 같이 앉혀놓고, 처음부터 아이들과 함께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아빠가 직장을 옮기고 싶은데, 내가 이 직장을 옮겼으면 좋겠니? 안 옮겼으면 좋겠니? 아내랑 이야기하는 가운데, 그런데 부부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꼬마 아이를 앉혀놓고 같이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 아이에게 아빠가 직장에서 이런 일 때문에 고생이 많고, 이런 일 때문에 스트레스도 많이 받고, 그래서 직장을 어떻게 옮기고 싶은데, 그런 이야기를 아이들과 공유하면서, 네 생각에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아이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거예요.

논어의 술이편에 보면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三人行 必有我師焉 擇其善者而從之 其不善者而改之” 무슨 뜻인지 다 아시죠? 세 사람이 길을 가면, 거기에는 반드시 내가 배울 선생님이 계시는데, 착한 사람이, 착한 점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따르면 되는 것이고, 착하지 않은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을 고쳐야 하는 것이다. 좋은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이든,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사람이든, 다 선생님이라는 거예요. 때로는 우리들의 긍정적인 선생님이 될 수도 있고, 때로는 어떤 사람은 반면교사가 될 수도 있다고 하는 것이죠.

우리의 눈을 겸손하게 열어서, 다른 사람들의 지략을 우리가 배워야 하는 것인데요.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무조건 다른 사람들의 말을 따라가라고 하는 그런 이야기는 아닙니다. 많은 지략을 듣되, 그 지략들을 겸손하게 들으면서, 그리고 무엇이 가장 바른 선택인지, 스스로 그리고 바르게 판단을 해야 하는 것이죠.

이솝 우화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주 유명한 이야기죠. 어떤 아버지와 아들이 나귀를, 당나귀를 끌고 시장에 가고 있었습니다. 그 당나귀를 끌고 가는 모습을 본 사람들이 옆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런, 바보 같은 사람들. 당나귀가 있는데, 왜 타고 가지 않고 걸어가는지 모르겠다”라고 옆에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맞는 말이에요. 그래서 아들을 태우고 걸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랬더니 옆에서 또 이야기를 합니다. “저런, 젊은이는 나귀를 타고 가고, 어른은, 노인은 걷게 하다니, 이런 경우가 있는가?” 하면서 한마디 했습니다. 그러자 그것도 맞는 말이다. 생각해서 서로 바꿨습니다. 이번에는 아버지가 타고, 아들은 내렸습니다. 그렇게 한참 가다 보니까, 또 옆에서 이야기를 합니다. “저런 나쁜 부모가 있나, 어른은 자기가 편하자고 나귀를 타고 가고, 아들은 저렇게 걸어가게 만들다니, 부모가 나쁘다”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자 그것도 맞는 말이다 생각해서, 이번에는 아버지와 아들이 나귀 위에 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가니까, 사람들이 비난하기 시작했습니다. “저 나귀가 얼마나 불쌍하냐? 저 나귀에게 두 사람이 타서, 저렇게 나귀를 힘들게 만들고 있다”라고 그렇게 비난을 했습니다. 그러자 그 말도 맞는 말이다. 생각해서 두 사람이 나귀를 매달고, 시장을 향해서 가는 겁니다. 아빠와 아들이 나를 막대기에 매달고 나귀를 끌고 가다가, 아, 다리를 건너다가, 나귀가 몸부림치는 바람에 강에 빠졌다고 하는 이솝우화가 있습니다.

수많은 지략들, 수많은 지혜들, 수많은 사람들의 말들이 다 천차만별인데, 그러면 누구의 말대로 따라 하는 것이 옳을까요? 수많은 이야기들을 듣게 된다고 하면, 그러면 누구의 말에 비중을 두어야 할까요? 내가 생각한 대로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아내가 말한 대로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부모님이 말한 대로 따르는 게 좋겠습니까? 자녀가 말한 것을 따라가는 것이 좋겠습니까? 목사님이 말한 걸 따라가는 것이 좋겠습니까? 누구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것이 제일 좋을까요? 다 의견이 다르면, 누구의 뜻을 따라가는 게 제일 현명한 일이죠? 그런 경우가 없습니까?

(정답은) 옳은 걸 따라가야 됩니다. 누가 이야기를 했든, 옳은 것을 따라가야 하는 겁니다. 그 옳은 것은 때때로 우리 꼬마 아이가 말할 수도 있고, 그 옳은 것을 때때로 나를 미워하는 그 사람이 말해줄 수도 있고, 그 옳은 것을 때때로 이웃집 사람이 말해줄 수도 있고, 때로는 부모님이 말해줄 수도 있고, 때로는 아내나 남편의 입을 통해서 말해줄 수도 있습니다. 고민을 해야 되는 것이죠. 지략을 다 듣고 함께 고민하는 가운데, 아, 그 수많은 이야기들 가운데, 어떠한 것을 따라가는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하면서, 그 가운데 가장 좋은 길을 따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수많은 이야기들을 들으셨습니다.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의 길을 가기 위해서 이 세상에서 사역을 하실 때, 사탄이 다가와서 떡을 만들어 먹어라.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라. 내게 경배하라고 하는 말을 했는데, 그러한 말을 단호하게 거절하셨습니다. 그것은 지략이 아니라, 잘못된 유혹이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베드로는 예수님을 향해서 이곳이 좋사오니, 이곳에 초막 셋을 지어, 여기 있자고 하는 그 말을 들었을 때, 그것이 좋은 생각이라고 따르지 아니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지면 안 된다고 말리는 베드로의 이야기를 듣고 그 말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지략을 듣는 것은 듣는 것이지만, 그러나 결정할 것은 누가 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가를 발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할 줄로 믿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들은 바른 길을 선택하기보다는 우리들의 욕심에 따른 선택을 할 때가 너무나도 많고, 우리들의 탐욕의 마음에 따라 결정할 때가 많고, 때로는 내 자존심 때문에 이것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밀어붙이려고 하는 그런 경우가 너무나도 많고, 다른 사람들에게 내 모습을 드러내기 위한 시의 판단을 할 때가 너무나도 많고,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해가면서, 그래서 그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온전히 순종하며 나갔던 것과는 달리, 우리들은 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보다는 이 세상의 잘못된 길을 따라가게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그러면서 그것을 신앙적으로 포장하는 것이죠. 신앙적으로 포장하고, 의로운 것이라고 포장하고, 정말 정당한 것이라고 포장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교만함에 근거해서 결정을 하고 있는 것이고, 담력의 마음 가운데 결정할 때가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그게 우리들의 어리석음이고, 지략을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지략을 없게 만드는 결정이어서, 결국은 우리가 망할 수밖에 없는 그런 결정을 내릴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게 우리들의 약점이고 그게 우리들의 허물이에요. 그래서 오늘 저와 여러분들에게 예수님이 필요한 겁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그 연약함, 우리들의 더러운 죄성을 지시고 십자가 위에서 피 흘려 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해 주셨기에, 우리가 다시 한번 주님 앞에 나아가 엎드려 기도하면서, 주님 저희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해 주시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발견하면서, 수많은 지략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온전히 분별하여 따라갈 수 있게 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는 가운데, 주님의 뜻에 맞는 바른 판단을 해나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매한 보증(잠 6:1-5) http://iwbs.org/?p=4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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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나타와 순교적 신앙

1. 종말을 사모하는 신앙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 계시록의 맨 마지막 장인 22장은 예수님께서 속히 오실 것이라는 약속에 대하여,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응답하는 것으로 마무리하고 있다. 더 이상 이 세상에 소망을 두지 않고, 어서 빨리 주님께서 오셔서 이 세상을 다스려 달라는 간청의 기도이다. 이러한 기도는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와 일맥상통하는 기도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시오며”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세가 많으신 성도들 중에는 이와 비슷한 기도를 하시는 분들이 계신다. 빨리 이 세상에서의 삶을 끝내고, 천국으로 가고 싶다고 기도하는 것이다. 천국은 정말 좋은 곳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과 비교할 수 없는, 너무나도 좋은 곳이 천국이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 21:3-4에 보면, 지금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겪고 있는 모든 고통스러운 문제들이 사라지고 우리 주님께서 우리들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주실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어서 속히 천국에 가고 싶은 마음이 든다.

우리가 예전에 즐겨 불렀던 복음성가가 있다. “죄 많은 이 세상은 내 집 아니네. 내 모든 보화는 저 천국에 있네. 저 천국 문을 열고 나를 부르네. 나는 이 세상에 정들 수 없도다.” 이 세상 살아가는 것은 너무나도 힘들고 고통스럽기에, 어서 빨리 내 본향인 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을 표현한 복음성가이다. 사랑의 원자탄이라고 잘 알려진 손양원 목사님께서 만든 복음성가도 있다. “낮에나 밤에나 눈물 머금고, 내 주님 오시기만 고대한다. 가실 때 다시 오마 하신 예수님.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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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 세상에서의 삶은 의미가 없는가?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한번 질문을 던져보아야 한다. 과연 저 천국을 소망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정말 바른 성도의 모습일까? “이 지긋지긋한 세상에서 더 이상 살기 싫다.” “어서 빨리 죽어서, 천국에 갔으면 좋겠다.” 이렇게 소망하며 사는 것이 과연 바른 믿음의 자세라고 할 수 있을까? 역사적으로 교회가 박해를 받을 때마다, 크리스천들은 천국에 대한 소망을 표현했다. 그래서 초대교회 성도들이 가지고 있었던 소망 중의 하나가 순교였다. 초대교회 교부 중에는 늘 “하나님, 나를 순교의 제물로 삼아주옵소서. 빨리 순교시켜주옵소서.” 기도하던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을 증오하면서, 빨리 죽어서 천국에 갔으면 좋겠다고 소망하는 것은 성경적으로 볼 때 건전한 믿음이 아니다. 성경은 이러한 종류의 생각이 결코 건전한 신앙의 관점이 아니라고 가르쳐주고 있다. 이것은 엘리야의 예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엘리야 선지자는 너무나도 힘들고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 앞에 부르짖었다. “하나님, 더 이상 견디기 어렵다. 더 이상 이 사명을 감당하기가 어렵다. 지금 당장 제 목숨을 거두어 주옵소서.” 이러한 엘리야에 대하여 하나님은 순교를 사모하는 좋은 믿음을 가졌다고 칭찬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 선지자를 위로하시고 다시 용기를 불어넣어 주셨다. 엘리야 선지자 혼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 7천 명의 의인이 있다고 알려주셨다. 그리고 다시 이 세상에서 사명을 감당하게 만드셨다.

또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다. 한 번은 예수님께서 세 명의 제자들을 데리고 산 위에 올라가셨다. 그 산 위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변화되는 놀라운 기적을 보여주셨다. 예수님의 옷과 얼굴이 환하게 빛나고,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세 분이 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셨다. 어쩌면 이 모습이야말로 천국의 모습을 맛보여주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베드로는 그 장면이 너무나도 좋았다. 그래서 베드로는 다시 저 산 밑으로 내려가지 말고, 그냥 이곳에서 계속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초막 셋을 지어 그냥 거기서 살고 싶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보시면서 이 세상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오직 천국에 대한 소망만 가지고 있다고 칭찬하시지 않았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데리고 다시 산 밑으로 내려가셨다. 문제들이 기다리고 있는 세상으로 돌아가셨다.

또한 주님께서 부활하셨을 때, 제자들은 “이스라엘을 회복하실 때가 바로 지금입니까?” 하고 물었다. 지긋지긋한 이 세상을 당장 끝장내버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할 때를 소망했던 것이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오.” 마지막 그 영광의 나라가 언제 올지는 생각하지 말라는 뜻이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이 결코 무의미한 곳이 아니며,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이 있다는 말씀이다.

종종 신앙이 있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 사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는 것이고, 빨리 천국에 가는 것이 최고로 좋다고 생각하곤 한다. 어차피 죽으면 다 놓고 가게 되는 것이니까, 사라져버릴 것에 소망을 두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의 삶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처럼 생각할 때가 많다. 특별히 장례식장에서 설교를 듣다 보면 더욱 그렇다. 죽음이 사실은 천국을 향하는 문이고 저 천국은 정말 좋은 곳이라는 설교를 듣다 보면, “왜 우리가 살아있지?”라고 하는 생각이 들기까지 한다.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이 거의 무의미한 것처럼 느껴지곤 한다.

하지만 이 세상에 대한 염세적인 관점은 성경적인 관점이 아니다. 그것은 피안의 세계를 갈망하는 불교적인 관점일 뿐이다. 사도 요한이 마라나타(주여 어서 오시옵소서)라고 한 것은 빨리 순교하여 저 천국에 가고 싶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친히 이 세상을 주님의 뜻대로 다스리는 일이 일어나게 해달라는 기도이다. 엘리야의 간구와 사도 요한의 간구 사이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엘리야는 자신의 생명을 거두어가 달라는 기도인 반면, 요한의 기도는 이 세상을 피하여 도망하고 싶다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기를 기도하는 것이었다.

3. 세속 세계에서 신실하게 살았던 사람들

다니엘서 3장은 바벨론에 포로로 와서 살아가던 다니엘의 세 친구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이들은 바벨론이란 나라에서 일하면서 느부갓네살 왕의 명령을 따라야만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목숨을 유지할 수 없었다. 아마도 그들은 느부갓네살 왕을 충실하게 섬겼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모든 성도에게 요구되는 삶의 자세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요셉은 보디발 장군의 집에 노예로 팔려 가게 되었을 때,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절망 가운데 있지 않았다. 이방 신을 섬기는 보디발의 집에서는 단 한 순간도 살 수 없다고 하면서 뛰쳐나가는 결정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최선을 다해 보디발을 섬겼다. 그래서 결국 보디발이 요셉을 신뢰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길 정도까지 되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라는 골로새서 3:22-24의 정신 때문이다. 에베소서 6:5-8에서도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인이나 주께로부터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최선을 다해 느부갓네살 왕을 섬길 수 있었는데, 이것은 단순히 살아남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신앙적인 모습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벨론이란 우상숭배의 왕국에서 살아갈 때, 신앙적인 갈등이 일어날 수밖에 없고 그로 인하여 양자택일을 해야 하는 상황을 반드시 만나게 되어 있다. 느부갓네살 왕이 금으로 신상을 만들고 그 금 신상 앞에서 엎드려 절하라는 명령을 발하였다. 만일 그 앞에 절하지 아니하면 맹렬히 타는 용광로의 풀무불에 던져넣겠다고 하였다. 하지만 이 순간에 다니엘의 세 친구는 그러한 왕의 명령을 거부하였다. 우상 앞에서 절하는 것은 왕보다 더 높으신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느부갓네살 왕은 분노하면서 좋은 말로 할 때 금 신상에 엎드려 절할 것을 강요하였다. 만일 이러한 명령을 어기면 풀무불에 던지겠다는 그 말이 말뿐인 엄포가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행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제는 사느냐 죽느냐 선택의 갈림길에 서게 되었다. 놀라운 것은 다니엘의 세 친구는 이 순간에 순교를 불사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마 10:28)라고 말씀하셨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느부갓네살 왕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래서 금 신상 앞에서 절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이들이 금 신상 앞에 절하는 것을 거부한 이유는 그저 순교를 막연히 동경하는 그런 잘못된 신앙의 소유자들이어서가 아니었다. 이 세상에서 사명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을 포기하고, 그저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을 소망하는 그런 도피주의자들이기 때문에 죽음을 불사한 것이 아니다. 더 나아가 이들이라고 해서 죽음이 두렵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죽음의 공포는 그 어떤 공포보다도 무서운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하나님을 더 두려워하였다. 느부갓네살은 몸밖에 멸하지 못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몸과 영혼을 멸하실 수 있는 분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지혜로운 것인데(잠 1:7), 그들은 진정으로 지혜로운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순교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4. 죽음에서 건져내지 않으신다 할지라도

다니엘의 세 친구는 왕에게 대답했다.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단 3:16-18)

다니엘의 세 친구는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왕의 손에서 건지실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들은 순교를 원했던 것이 아니다. 그들은 살려주실 것을 기대했다. 그들은 하나님께 간구하였을 것이다. 느부갓네살 왕의 손에서 건져주실 것을 간청했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주실 것을 믿었다. 왜냐하면 주님은 구하면 들으시겠다고 하셨기 때문이다(렘 33:3; 마 7:7-8). 더 나아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보호해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시 23:4).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는 천사들을 동원하여 붙들어주셔서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해주실 것이기 때문이다(시 91:11-12).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에 따라 건져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냥 죽게 내버려 두실 수도 있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의 주권이 하나님께 달려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의적인 뜻에 따라 어떤 방식으로든 응답하실 수 있다. 우리는 그러한 하나님의 오묘한 뜻을 충분히 이해하기는 어렵다. 어떤 때에는 기적적으로 건져주시기도 하시지만, 어떤 때에는 건져주지 않으실 수도 있다. 그 모든 선택권은 하나님께 달려있을 뿐이다. 따라서 다니엘의 세 친구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었지만, 자신들을 건져주실지 건져주지 않으실지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맡겼다. 그래서 설사 하나님께서 건져주지 않으실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건져주지 않으신다고 하더라도 금 신상에 절할 수는 없었다. 여기에서 순교자적 결단이 보이다. 우리의 목표는 목숨을 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목표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다. 사나 죽으나, 그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로지 중요한 것은 과연 이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인가이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하나님께서 건져주지 않으신다면, 기꺼이 순교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것이 모든 참된 성도에게서 나오는 반응이다. 바울 사도는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라고 하였다(롬 14:8).

죽어도 괜찮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죽음이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부터 끊을 수 없기 때문이다(롬 8:38-39). 하나님께서 우리를 죽음의 위험으로부터 건져주지 않으시는 것은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도 아니고, 하나님이 능력이 없기 때문도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도 아니다. 정반대이다.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시고, 전능하시며, 우리를 그 누구보다도 사랑하시는 분이다. 그러기에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하셨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살려주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순교를 각오하면서까지 믿음을 지키려고 하였다. 그런데 하나님은 다니엘의 세 친구를 풀부불 속에서 건져주셨다. 그들을 풀무불에 던졌던 사람들마저도 불에 타 죽을 정도로 맹렬한 불이었다. 그러니 그 풀무불은 순식간에 이들의 목숨을 앗아갈 강력한 불이었다. 하지만 맹렬히 타는 불 속에서도 전혀 상하지도 아니하였고 그을리지도 아니하였고 불에 탄 냄새조차도 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살려내신 것이다. 우리는 이와 비슷한 간증들을 종종 듣다. 엄청난 죽음의 위협 속에서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살려내신 이야기들은 지금까지 계속해서 반복되어 왔다.

5. 오늘날에도 순교적 신앙이 요구된다

하지만 정반대로 하나님께서 건져주지 않으시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순교의 피가 뿌려지기도 하였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주님의 길을 따라 십자가를 지고 순교의 길을 걸어갔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사자 밥이 되는 고통을 당해야 했다. 선교를 위해 길을 나섰던 선교사들은 선교의 현장에서 순교의 피를 수없이 많이 뿌려왔다. 우리나라에 왔던 토마스 선교사는 대동강 여울목에서 목을 베이고 말았다. 복음을 받아들였던 우리의 선조들은 박해를 받아 순교의 피를 흘려야 했고, 일제 시대에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순교하기도 했으며, 6·25 동란 중에는 믿음을 지키려다가 죽임을 당하는 일들이 벌어졌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상황에서 많은 사람이 믿음을 저버리기도 했고, 타협하기도 했다. 마치 돌밭에 떨어진 씨처럼 말씀을 듣고 기쁨으로 받아들인 것 같았지만,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 넘어져 결실하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끝까지 믿음을 지키다가 순교의 피를 흘려야만 했던 순교자들도 있었다.

죽음마저도 그들의 신앙을 무너뜨리지 못했던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순교를 불사했던 신앙의선조들을 기억해야 한다. 단순히 순교자들의 비석을 꾸미며 외식하자는 말이 아니다(마 23:29-30). 목에 칼이 들어온다고 할지라도 우리도 믿음을 끝까지 지키려는 다짐해야 한다. 끝까지 견디는 사람이 구원을 얻을 것이다(마 10:21-22; 24:13). 죽을 때까지 신실하게 믿음을 지켜야 생명의 관을 얻을 수 있다(계 2:10).

오늘날에는 순교자적인 신앙까지는 요구되지 않을까? 그렇게 목숨을 내놓고 믿어야 할 상황까지는 오지 않는 안전한 시기일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물론 지금은 신앙의 자유가 어느 정도 보장되어 있는 시기에 살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순교자적인 결단까지는 필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세상은 교묘하게 우리들의 목을 졸고 있다. 돈이라는 우상 앞에 절을 해야만 겨우 입에 풀칠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우리를 위협한다. 그래서 우리는 돈이라는 우상이 시키는 대로 굴복하곤 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옳지 않은 방법을 사용해서라도 돈을 벌어야겠다는 잘못된 생각 앞에 굴복한다면, 그것은 이미 돈이라는 금 신상 앞에 엎드린 것이다. 그 옛날 느부갓네살 왕이 금 신상에 절하지 않으면 죽여버릴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던 것처럼, 돈은 우리로 하여금 무슨 악한 짓을 해서라도 돈을 벌어야 한다는 식으로 돈의 우상 앞에 절하게 만든다. 그래서 우리는 그 돈의 우상 앞에 엎드려야만 살 수 있을 것처럼 느끼곤 한다. 그렇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방법대로 살면, 죽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위협을 느끼곤 한다.

그러할 때, 우리는 순교자적 마음으로 담대하게 대답해야 한다. “나는 돈이라는 우상 앞에 절하지도 않을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방법으로 살지는 않겠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따라가는 길을 따라가지 않고 주님의 방법을 따라갈 때 망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건져내실 것이다. 하지만 만일 그렇게 하여 망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나는 결코 악한 방법 앞에 굴복하지 않겠다.” 이 세상은 우리를 향해서 탐욕적으로 살면서 나 자신만을 위해 살아야 한다고 외치고 있다. 이 세상의 방법을 따르지 않으면 결국 망하게 될 것이라고 우리를 위협하기도 한다. 그러할 때 우리는 담대하게 이 세상의 방법이라는 느부갓네살 왕을 향해서 대답해야 한다. “하나님의 방법대로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것이며, 선을 베풀 것이고, 인자와 긍휼을 베풀며 살겠다. 그렇게 살아도 하나님께서 나를 살리실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나를 살리시지 않는다고 해도, 나는 결코 이 세상의 방법을 따르기보다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겠다.” 이렇게 대답해야 한다.

순교자적 신앙은 죽음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단순히 죽음을 목적으로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우리가 수행하라고 주신 사명을 망각해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한 달란트를 땅속 깊이 감추어두는 것과 같다. 순교자적 신앙의 핵심은 어떠한 위협 앞에서도 끝까지 믿음을 지키지 않겠다는 각오이다. 일사각오의 정신으로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끝까지 믿음을 지켰던 주기철 목사님의 신앙과 같은 것이다. 순교자적 믿음은 그러기에 지금 이 세상에서 어떻게 믿음을 지켜나가야 하는가와 관련이 있다.

6. 우리가 사는 세상

우리의 상황은 지금 마치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와 살아가는 다니엘과 세 친구의 상황과 비슷한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데(빌 3:20),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아야만 한다.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말이다. 이러한 이중국적의 상태는 많은 문제를 야기한다. 우리는 이 세상에(in the world) 살고 있으나, 이 세상에 속한 것은 아니다(not of the world). 우리의 모든 영역이 이 세상의 법칙에 매여 있으면서도, 동시에 더 높은 하나님 나라의 법에 순종하며 살아야 한다. 이러한 사실이 불편하여 그저 빨리 이 세상으로부터 떠나버리고 저 천국으로 가려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곳에 있게 하신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게 바로 사명이다.

하나님의 법칙을 무시하는 이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그들은 불신자이며 우상 숭배자들이고 악을 행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상종하지 말고 살아야 할까? 그렇지 않다. 그들 안에서 살아야 하고, 그들과 교류하면서 살아야 한다. 더 나아가 그들을 섬기며 살기도 해야 한다. 나아만 장군을 섬겼던 소녀처럼, 보디발을 섬겼고 애굽 왕을 섬겼던 요셉처럼, 느부갓네살 왕을 섬겼던 다니엘과 세 친구처럼 그들에게 최선의 봉사를 해야 한다. 마치 주님께 하듯이 해야 한다. 더 나아가 세속 정권이며 하나님의 뜻과 반하는 정권이라 할지라도, 그들을 하나님께서 세우셨다는 믿음으로 순복하여야 한다(롬 13:1). 이 세상의 사람들이 악한 일을 한다고 하더라도 친절하게 대하며 온유한 마음으로 대해야 한다. 형제에게만 문안하는 것은 온전한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마 5:46-47). 우리를 핍박하고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하고(마 5:44), 오히려 기뻐하고 감사해야 한다. 우리를 대적하는 자들에게 같이 칼을 빼 들고 덤비는 것은 주님의 방법이 아니기 때문이다(마 26:52). 우리는 그들과 함께 사귀어야 한다(고전 5:9-10).

종종 우리 가운데에는 이러한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일부러 이 세상 사람들의 분노를 자극하고, 그래서 어려움을 당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불신자들이나 악을 행하거나 우상숭배 하는 자들을 향해서 공격적인 발언을 하기도 한다. 때로는 전도한다는 미명 하에 그렇게 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그들이 공격해오면 순교자적인 태도를 드러내기도 한다. 그러면서 주님을 위해서 받는 박해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심지어 감옥에 가거나 순교하더라도 영광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태도는 성경을 제대로 잘 읽지 못한 것이다. 주님께서는 비둘기같이 순결해야 하지만, 동시에 뱀같이 지혜롭게 처신해야 한다고 가르쳐주셨다(마 10:16). 일부러 핍박과 박해를 당하면서 순교를 당할 일을 만들 필요는 없다. 그것은 어리석은 행동일 뿐이다. 주님께서 구원하시겠다는 약속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다가 어려움을 당할 때 구원하시겠다는 뜻이지, 일부터 우리가 위험의 상황 속으로 뛰어 들어가도 구해주시겠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일이다. 주님께서는 일부러 성전 위에서 뛰어내려 하나님께서 구원해주시는지를 테스트하지 않으셨다(마 4:6-7). 다니엘의 세 친구는 우상 앞에 절하라는 요구를 받았을 때 거부한 것이지, 일부러 왕을 대적하면서 위험을 자초한 것이 아니다. 만일 그렇게 해서 죽는다면 순교가 아니라 개죽음일 뿐이다.

성경은 거룩한 것을 존중하지 않는 개에게 마구 던져도 좋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진주를 알아보지 못하는 돼지 앞에 마구 던지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거룩한 것과 진주를 주었으니까 고마워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공격할 것이다. 발로 밟고 돌이켜 우리를 찢어 상하게 할 것이다. 그런 공격을 당할 때, 내가 주를 위해 공격을 받고 있다고 말할 게 아니다. 주를 위해 순교를 당하게 될 상황이라고 말할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어리석게 행동했던 결과일 뿐이다.

팀 켈러 목사는 <센터처치>라는 책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은 마치 바위를 폭파시키는 것과 같다고 비유한다. 그런데 우리는 마치 바위 주변에서 마구 다이너마이트를 터트리는 실수를 한다고 한다. 그래봤자 바위를 그슬리기만 할 뿐 바위를 쪼갤 수 없다. 바위를 폭파시키려면 바위를 드릴로 뚫어 구멍을 내고, 그 안에 다이너마이트를 설치하고 폭파시켜야 한다. 그런 지혜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바위 곁에서 폭파하면서 전혀 바위를 깨트리지 못한 채, 우리만 다치곤 한다. 그리고선 순교자적 신앙을 운운한다. 그것은 순교자적 신앙이 아니라 어리석은 것이다. 정말 참된 믿음을 지키다가 고난을 당하거나 순교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지만, 자신이 어리석게 행동하고 잘못된 행동을 해서 고난을 당하거나 순교를 당한다면, 그것은 칭찬을 받을 게 전혀 없다(벧전 2:19-20).

다니엘의 세 친구는 우상을 부서뜨리겠다고 달려들지 않았다.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인 이스라엘에서라면 우상을 부수는 것이 옳다. 하지만 바벨론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민족이 아니다. 물론 이들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옳고, 우상을 숭배하지 않는 것이 옳지만, 시민법으로서 우상을 제거하라는 법이 그들에게 주어진 것은 아니다. 그러기에 이들은 우상을 부서뜨리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그건 다니엘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이스라엘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바벨론이란 나라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과 함께 어울려 살았다. 바벨론이란 나라의 관리로서 바벨론이란 왕국에 충성하며 살았다. 여기서 순교자적 결기를 보여주지는 않았다. 이웃으로 함께 살았다. 바벨론 나라와 평화를 추구하면서 그 안에서 살았다.

하지만 결국은 선택할 때가 다가온다. 금 신상에 절해야 한다는 압박이 들어얼 것이다. 느부갓네살 왕이 아닌 다른 신에게 기도해서는 안 된다는 압박이 들어왔던 것처럼 말이다. 이때에 다니엘은 단호하게 믿음을 지켰다. 그래서 죽을 것 같았는데, 살았다. 이 이야기는 우리도 순교자적 결기를 보여주면, 반드시 살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순교를 당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니엘서의 메시지는 우리에게 믿음을 지키는 게 사는 길임을 보여준다. 만일 이때 순교자적 믿음을 보여주지 않았다면, 살았어도 죽은 셈이다. 목숨은 건질 수 있었겠지만, 결국 영혼을 잃어버린 셈이니까 말이다. 그러니까 죽으나 사나 우리는 주를 위해 살 때 사는 것이다. 죽으나 사나 주를 위해 살지 않으면 죽는 것이다.

왜 우리는 순교자적 신앙을 가져야 할까? 첫째, 그것은 먼저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목숨을 내어놓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죄인이 되어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게 되었을 때, 주님께서는 우리가 죽어가는 모습을 저 멀리서 방관만 하시지 않았다. 주님께서는 모른 척하지 않으셨다. 주님께선 우리를 위해서라면 십자가를 기꺼이 지셨다. 그래서 우리가 살게 되었다.

둘째, 그것은 죽기를 각오하고 믿음을 지키는 것이 우리에게 복된 길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라고 하셨다(요 12:25). 그 어느 때보다도 우리들의 신앙을 포기하라는 압력이 교묘해진 이 시대에, 일사각오의 신앙으로 끝까지 믿음을 지켜낼 수 있을까? 주여, 우리를 도우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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쉐마 (신 6:4-9)

교회 안에 아주 널리 알려진 것이지만, 사실은 잘못 알려졌거나, 과장됐거나, 혹은 잘못된 내용들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과연 이것이 맞는지, 잘못된 것인지, 늘 영적으로 분별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바람직할 거라고 생각이 드는데요. 오늘 어린이 주일을 맞이해서, 우리가 교회 안에서 아주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지만, 잘못된 정보를 한번 말씀을 드려보고 싶습니다.

그것은 바로 유대인들에 대한 과장된 평가입니다. 제가 얼마 전에 동영상을 하나 보았는데요. 이 동영상은 유태인들이 어떻게 신앙 교육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설명하는 동영상이었습니다. 그 동영상에서 하는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냐면, 유태인들은 세계적으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으며, 그들은 온 세상을 이 세상을 리드하고 있는 그런 민족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유태인들이 이렇게 두각을 나타내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유대인들의 신앙 교육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하는 내용의 동영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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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정말 사실이라고 한다면, 참 여러 가지로 우리들에게 많은 도전을 줄 수 있는 영상일 텐데요. 그런데 가만히 내용을 들어보니까, 사실과는 거리가 멀고, 조그마한 내용을 확대 과장했고, 그리고 부정확한 내용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는 동영상이었습니다. 그 동영상에서는 오늘 우리가 읽은 신명기 6장 4절에서부터 9절 말씀, 이것을 “쉐마”라고 부르는데, 유대인들은 이 쉐마라고 불리는 이 구절의 말씀들을 늘 암송하고 묵상할 뿐만 아니라, 어렸을 때부터 철저하게 신앙 교육을 잘 받고 있으며, 그래서 유태인들은 성인식을 치르기 전에, 12살이나 13살 정도의 성인식을 치르게 될 텐데요. 그렇게 성인식을 치르기 전에 유태인들 어린이들은 모세 오경을 다 암송하게 된다고 그렇게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의 내용을 다 암송할 뿐만 아니라, 철저하게 잘 지키고 있고, 유대인들은 아침 저녁으로 쉐마라고 하는 이 신명기의 말씀을 암송할 뿐만 아니라, 어머니의 뱃속에 있을 때부터 쉐마를 들으면서 태어나고, 그리고 죽을 때에도 이 구절을 암송하면서 죽는다고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은 이마에 성구함을 매달고 팔목에 성구함을 매달고, 집에는 “메주자”(mezuzah)를 붙이면서 정말 신앙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서, 이들이 전 세계를 지배하는, 세계에 우뚝 서 있는 그런 위대한 민족이 되었다고 하는 그런 영상이었습니다.

하지만 대체로 이런 내용은 거짓 정보이거나, 조그마한 것을 확대 과장한 내용이어서, 별로 믿을 만한 내용은 아닙니다. 먼저 유대인들이 세계적인 두각을 많이 나타내고 있는 것은 사실이고, 그런 사람들 가운데 유태인들이 많이 들어 있기는 하지만, 그 사람들이 모두가 다 신앙적인 교육을 잘 받아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유대인들이 무신론자들도 많이 있고, 신앙이 없는 사람들, 그리고 별 볼 일 없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이 있기 때문에, 신앙이 그들의 성공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 중에는 늘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 중에서도 극히 일부분 극히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그런 위치에 달성했을 뿐이고,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우리와 똑같이 평범하게 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리고 유대인들 중에서도 아주 힘들고 어려운 극빈자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아주 많이 있어서, 유태인들이나 우리나라 사람들이나 별반 다를 게 없는 것이 사실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세계적으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사람들은, 유태인들만 세계적인 두각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의 모든 민족들이 다 두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영국인들도 프랑스인들도 독일인들도 미국인들도 그리고 중국인들도 인도인들도 일본인들도 전 세계 방방 곡곡에서 여러 분야에서 엄청난 두각을 드러내고 있는 것인데, 마치 유대인들만 두각을 나타내는 것이냥 말하고, 그리고 그것이 신앙 교육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과도한 단순화(oversimplification)의 오류에 해당하는 것이고 뿐만 아니라, 일반화(generalization)의 오류에 빠지는 것이어서, 그렇게 말을 하는 것은 별로 우리가 믿을 만한 그런 정보가 될 수가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더 나아가서 유대인들의 신앙 교육이 있다고 하더라도, “유대인들의 신앙 교육이 제대로 된 신 교육인가?”라고 질문을 던진다면,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이 구약 성경을 가지고 있고, 구약성경을 배우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니까, 그래서 우리 크리스천들 사이에는 유태인들에 대한 막연한 호감, 막연한 같은 편 같은 의식들이 우리들 사이에 종종 일어나고 있지만, 그러나 유태인들의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제대로 된 신앙이 아니라, 순 엉터리 신앙입니다.

유대인들이 물론 종교적인 면에서, 열정적인 종교인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아주 극히 일부분의 열정적인 신앙인들이 있는 것이고요. 그리고 아주 철저한 신앙인들이 있기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열정적이고, 그리고 철저한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는 것이 그들이 제대로 된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바리새인들도 얼마나 열정적으로 신앙생활을 했는지 몰라요. 성경 말씀을 철저히 지키려고, 노력을 했지만, 그런 바리새인들의 신앙이 괜찮은 것이었느냐면, 하나님 앞에서 빵점짜리 신앙생활이었던 것뿐이고, 유대인들이 이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이 바른 신앙을 가지고 있느냐 하면 바른 신앙이 아니에요.

구약 성경을 가지고 있지만, 그들이 구약성경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고 있는 거에요. 구약 성경에서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는다고 한다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고, 피를 흘려주셨고, 우리의 소망이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고 하는 사실을 성경에서 발견하지 못한다고 한다면, 그런 구약 성경을 읽는 것은 엉터리일 뿐인 것이고, 이단들도 그런 식으로 열정적으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했던 그야말로 성경의 핵심을 놓쳐버린 그런 불쌍한 영혼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크리스찬들 가운데 종종 유태인들에 대해서 자꾸만 좋은 소리를 하는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들의 신앙을 정말 본받고 싶어서라기보다는, 사실 그 근저에 깔려 있는 동기가 “성공하고 싶다.” “우리도 좀 잘 살아보고 싶다.” “우리도 좀 부자가 되었으면 좋겠고 우리도 좀 재물을 많이 얻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이 세상적인 탐욕이 동기가 되어서, 그러한 유태인들을 바라보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들이 성공했는데, 왜 성공했는가? 신앙을 통해서 성공했다고 한다면, 우리도 한번 그런 식으로 신앙을 이용해서 성공해 볼 수 있지 않을까라고 하는, 그런 동기가 지극히 세속적이고, 지극히 탐욕적인,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닌, 돈을 우상으로 섬기고, 성공을 우상으로 섬기는, 그런 잘못된 동기에서 나온 것일 가능성이 많이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교육을 가리켜서 흔히 쉐마 교육이라고 말하고, 그래서 쉐마 교육을 본받아야 된다고 하는 그런 운동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 한국에서 쉐마 교육을 이야기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쉐마 교육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어요. 쉐마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자신들만의 교육 체계를 가지고서, 이것이 유태인들의 교육이고, 이것이 쉐마 교육이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사실 오늘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쉐마하고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다른 것을 내놓고, 쉐마 교육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을 뿐입니다.

물론 그러한 교육적인 방법들이 잘못됐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배울 점이 있고, 거기에는 우리가 받아들여야 될 수 있는 훌륭한 교육 철학 같은 것들도 들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성경적인 교육이다. 쉐마 교육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목적 자체가 성경적인 가르침과 멀 뿐만 아니라, 유태인들이 신앙 교육을 잘해서 성공한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확인되지 아니한 일반화의 오류, 단순하게 과도한 단순화의 오류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이 어떤 본문이냐면 쉐마라고 알려진 본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본문을 살펴볼 때, 그러한 우리들의 탐욕적인 관점에서 이 성경 말씀을 살펴볼 것이 아니라, 복음적인 관점에서 이 성경 말씀을 살펴보고 배워야 할 것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신명기 6장 4절 말씀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오른쪽에서부터 왼쪽으로 읽어 나가는 글이 히브리어인데요. “쉐마 이스라엘 아도나이 엘로헤이누 아도나이 에하드”라고 하는 말이 신명기 6장 4절입니다. 번역을 하자면, “들으라. 이스라엘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뿐인 하나님이시다.” “하나뿐인 여호와시다”라고 하는 말이 신명기 6장 4절의 말씀입니다.

이 신명기 6장 4절에서부터 9절까지의 말씀이 “들으라” “쉐마”라고 하는 히브리어로 시작한다고 해서, 이 구절을 “쉐마”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오늘 이 본문의 말씀을 우리가 한마디로 요약한다고 하면, 이 본문의 말씀에서 우리를 향해서 알려주시고 있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은 몇 분이시다? 한 분이시다.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다.”라고 하는 것이 쉐마 구절이 가지고 있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이 한 분밖에 없으니, 바로 그 한 분이신 하나님을 우리가 사랑하고, 그 한 분이신 하나님을 예배해야 된다고 하는 내용이 오늘 쉐마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이 세상에 그 어느 것도 우리의 하나님이 아니라고 하는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몇 분이라고요? 한 분이에요. 그렇다고 한다면, 여호와 하나님 외에 다른 그 모든 것들은 하나님입니까? 하나님이 아닙니까? 하나님이 아닌 거죠.

돈이 우리의 하나님이 아니에요. 우리의 자녀가 하나님이 아니에요. 우리들의 목회자가 하나님이 아니에요. 성공이 하나님이 아니고, 정치인이 하나님이 아니고, 사랑이 하나님이 아니고, 행복이 하나님이 아니고, 대학에 들어가는 것이 하나님이 아닌 거예요. 이 세상의 그 모든 것들 이 세상에 좋아 보이는, 그 모든 것들이 우리의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은 한 분뿐이신데, 누구시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우리의 진짜 하나님 참되신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오늘 우리가 반드시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배해야 하는데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한 분뿐이시니까, 그 하나님만을 예배하고 사랑해야 되는 것이고, 그 외의 모든 것들은 우리의 예배의 대상이 될 수가 없고, 우리의 진정한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하는 사실을 이 말씀을 보면서 깨달아야 합니다. 왜 우리는 하나님 한 분만을 예배해야 됩니까? 그것은 참되신 하나님을 예배할 때, 진짜 하나님을 예배할 때 우리의 삶이 복된 삶이 되기 때문입니다. 참되신 하나님이 아닌, 가짜 하나님을 따르게 되면, 결국 우리는 엄청난 피해를 입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러니까, 하나님을 섬기면 부자가 될 수 있고, 성공할 수 있고, 하나님을 섬기면 이 세상에서 떵떵거리며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라고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식으로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복되다고 하는 이야기는 관계적인 의미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우리가 거할 때 만족감을 누리고, 하나님 안에 거할 때 우리가 복된 삶이 될 수 있다고 하는 그런 의미인데요. 그걸 어디에 비유할 수 있냐면, 우리 부모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 자녀들이, 어린 아이들이 부모님의 사랑 안에 머물면 안전하고 행복하고 보호받고, 정말 행복할 수가 있는 거죠. 부모가 모든 것을 다 해주지는 못한다고 할지라도, 그 어느 곳에 있는 것보다 부모님과 함께 하는 것이 행복인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부모님이 아닌 유괴범을 따라가게 되면 어떤 일이 발생합니까? 엄청난 험한 꼴을 당하게 되는 것이죠. 부모님이 아닌 조폭을 따라가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가난한 부모님은 나에게 많은 것을 해줄 수 없지만, 조폭은 많은 것을 해줄 수 있는 것 같아서, 따라가면 괜찮은 것이 아니라, 정말 불행의 길로 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우리에게 엄청난 약속들을 합니다. 돈을 많이 모으면 행복할 것처럼 이야기하고, 성공하면 우리의 인생이 아무 문제가 없을 것처럼 이야기하고, 이 세상의 모든 좋은 것들을 우리가 획득하기만 하면, 그러면 괜찮을 것처럼 우리들을 유혹하면서, 그 탐욕의 길로 가라고 우리을 유혹하고 있는데, 결국은 그 길로 나아가는 것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결국 망하게 되고, 비패하게 되고, 우리가 완전히 털리게 되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고 하는 것이고요. 참된 하나님을 예배할 때, 우리를 정말로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사랑할 때, 그 인생이야말로 복된 인생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것이 신명기 6장 4절에서부터 9절까지 우리를 향해서 가르쳐주시는 말씀 첫 번째 말씀입니다. 참되신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니까, 하나뿐인 하나님이니까, 그 하나님만 사랑하라. 이게 첫 번째 메시지고요. 두 번째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 두 번째 메시지가 뭐냐면, 바로 그 메시지를 1번의 메시지를 자녀들에게 하는 것이 오늘 말씀의 두 번째 메시지입니다. “자녀들에게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라”라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인데요. 왜 우리들은 자녀들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야 할까요?

그것은 똑같은 의미죠. 우리 자녀들도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복된 인생이 될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 부모님은 자녀들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기를 원하는데요. 이 가운데 자녀들에게, 나쁜 거 주기 원하시는 부모님 계십니까? 없잖아요. 가장 좋은 걸 해주고 싶잖아요? 그런데 가장 좋은 게 뭐예요? 돈이 가장 좋은 게 아니고, 좋은 대학 가는 게 가장 좋은 게 아니고, 이 세상에 그 어떤 것을 취득하는 게 가장 좋은 게 아니고, 믿음을 심어주는 게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는 사실을 믿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그런 마음들이 있습니다. 제가 우리 교우들을 심방하면서 기도 제목을 물어보면, 꼭 빠지지 않고 나오는 기도의 제목이 있습니다. “목사님, 우리 자녀들이 예수님을 잘 믿었으면 좋겠어요.” “우리 자녀들이 신앙을 제대로 가졌으면 좋겠어요.”라고 하는 기도의 제목을 이야기하는 것을 보았는데요. 왜냐하면 가장 좋은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복된 것이기 때문에, 그 믿음을 우리 자녀들에게 주고 싶은 마음이 우리 부모님들에게 다 있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들은 자녀들에게 가르칠 수 있을까요? 오늘 성경 말씀은 몇 가지 지혜를 우리들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 방법, 어떻게 하면 우리 자녀들에게 신앙을 물려줄 수 있겠는가? 어떻게 하면 우리 자녀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들 수 있겠는가? 첫 번째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내 자신이 하나님을 믿어야. 신명기 6장 6절 말씀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오늘 내가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어디에 새기고? “마음에 새기고.”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먼저 가르쳐주는 게 뭐냐 하면, 너희 자녀들에게 가르치기 전에, 무엇을 먼저 하라고요? 우리들의 마음에 먼저 새겨라. 이렇게 가르쳐주고 있어요.

우리가 자녀들에게 신앙을 이야기하기 전에, 우리가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알려주기 전에, 우리가 먼저 해야 될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내 마음에 새겨야만 하는 것입니다. 부모가 먼저 하나님을 정말로 사랑하지 않으면서, 자녀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하면, 자녀들이 그 부모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우리 자녀들에게 믿음을 심어주는 것이 왜 실패하곤 합니까? 그것은 부모님들이 말로는 신앙생활을 잘 하라고 이야기를 해요. 하나님을 믿어야 된다고 이야기를 해요.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이야기를 해요. 그런데 그것이, 말로만 그래요. 우리들의 행동에서는 우리 자녀들을 향해서 “하나님이 아니라, 돈이 최고야” “좋은 대학 가는 게, 최고야.” “이 세상에서 다른 사람을 짓밟아버리고, 최고가 되는 게, 그게 너를 행복하게 만들 거야.” 우리의 모든 행동과 우리들의 모든 바디 랭기지(body language)를 통해서, 우리 자녀들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냐면, 하나님은 쓸 데가 없고,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건, “대학 가는 게 중요한 거야.”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돈이 최고야.”라고 하는 이야기들을 우리들의 행동으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우리 자녀들은 눈치가 아주 빨라요. 우리 부모가 무엇을 제일 좋아하는지, 우리 부모가 무엇을 제일 중요하게 여기는지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부모가 이야기를 하면, 부모가 말하기를 “너 교회 가야지.”라고 이야기를 하고, “신앙생활 해야지.”라고 이야기하면, 그것이 나를 향해서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귀한 말씀으로 정말 말해주는 거라고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행동을 유심히 바라보면서, 실제로는 그게 아닌데, “지금 입으로 딴 얘기하고 있구나.”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에요, “너, 교회 가야지.”라고 윽박지르면, 우리 자녀들이 그 부모를 보면서 교회를 가는 게 중요하다고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엄마 아빠에게 제일 소중한 것은, “체면이 제일 중요하구나.” 사람들로부터 창피 안 당하는 것을 제일 소중하게 여기는구나. 아빠가 목사인데, 그래서 목사 자녀가 안 나온다고 하면, 목사 체면이 말이 안 되니까, 그래서 나오라고 하는구나. 아이들이 그것을 보고 있는 거예요.

우리 부모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보고 있는 거에요. 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성공해야 인정받는구나.” “내가 돈을 많이 벌어야 인정받는구나.”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 부모님들이 자녀들에게 알려주고 있기 때문에, 늘 실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 말씀은 무슨 이야기를 하냐면, “너는 하나님의 말씀을 네 마음에 새겨라.” 하나님의 사랑하는 것을 먼저 “우리가 먼저 해라.”라고 말씀하고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들의 마음에 새겨야 되는데, 우리들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돌이 아니고 바위가 아니고 나무가 아니어서, 바위라고 한다면 정을 찍어서 새길 수 있을 것이고, 나무라고 한다면 목각을 해서 새길 수 있겠지만, 우리들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또 잊혀지고, 또 망각해 버리고, 망각의 병을 앓고 있는 것이 우리들의 마음이기 때문에, 어떻게 우리들의 마음에 새길 수가 있겠습니까?

그 순간순간마다 다시 한 번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회개하고, 또 묵상하고 또 묵상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 자신들이 매 순간순간마다 다시 한 번 확인하고, 또 한 번 확인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어떤 방법을 해야 됩니까? 우리 자녀들에게 부지런히 가르쳐야 합니다. 신명기 6장 7절에서부터 9절까지의 말씀에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메어, 기호를 삼으며, 내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내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 유대인들은 이 말씀을 읽으면서 이 말씀대로 하려고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물론 항상 그러는 것이 아니라, 예배드릴 때, 기도할 때 하는 것인데요.

한번 그림을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손목에 메어 기호를 삼고 내 미간에 붙여 표로 삼으라고 하는 그 말씀에 따라서, 유태인들은 테필린(tefillin)이라고 하는 성구함을, 우리 개정 개혁 성경에서는 “경문”이라고 번역을 했는데요. “경문”이라고 번역하면 무슨 뜻인지 아무도 모를 텐데, 아무튼 성구함을 가죽으로 만든, 네모난 성구함에 오늘 읽은 이 신명기의 말씀을 넣어두어서, 그래서 이마에 붙였습니다. 성경 말씀에 그렇게 하라고 하니까.

뿐만 아니라, 팔뚝에도 그렇게 테필린(tefillin)을 메어 달아서, 이 말씀대로 지키려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집 문설주에도 메주자(mezuzah)를 달았습니다. 그림 한번 다시 한 번 보여주면 좋겠는데요. 메주자(mezuzah)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하냐면, 히브리어로 “문설주”라고 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정확한 표현이 아닌데요. 메주자(mezuzah)라고 하는 저 조그마한 나무통 속에, 성경 구절을 적어서 그 안에 넣어놓고 그것을 문에 붙여둔 겁니다. 신명기 6장 9절의 말씀에서, 네 집 문설주에 기록하라고 했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붙여 놓은 것이죠.

제가 미국에 살 때 보면 유태인들이 많이 있었는데요. 그래서 유태인들의 집 앞에 가보면 문에 이런 메주자(mezuzah)들이 많이 붙여져 있는 것을 볼 수가 있고요. 이사 갈 때는 띠어가지 않고 그냥 놔두고 가기 때문에, 그런 것들이 많이 붙여져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유태인들은 이 신명기의 말씀을 아주 잘 지킨 것일까요? 어떤 것일까요? 잘 지켰나요? 잘 지켰다고 생각이 들어서, “유대인들은 이렇게 신앙생활을 잘한다”라고 설명하는 경우가 많이 있지만, 사실은 이거 잘 지킨 거 아닙니다. 성경을 이런 식으로 해석하면 안 되는 겁니다. 신명기 6장 7절에서부터 9절까지에서 우리를 향해서 들려주시는 메시지가 뭐예요? 너는 이마에, 그리고 손목에 문설주에 이런 걸 달고 매달으라고 했으면 그렇게 하면 되는 건가요? 그건 어리석은 성경 읽기죠. 바보 같은 성경 읽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 말씀을 하셨는가를 봐야죠. 무슨 의도로 이 말씀을 하셨는가를 우리가 읽어야죠.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언제 어디서든지, 어떤 상황에 있든지,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지키라고 하는 의미에서 이 말씀을 해주시는 겁니다. 문설주에 달으랬으니까, 문설주에 달면 되는 건가요? 아니요. 이마에 붙이라고 했으니까, 이마에 붙이기만 하면 되는 건가요? 아니요. 그런 식으로 성경을 읽으면 망해요. 엉터리예요.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거예요. 이것은, 유대인들의 행동 방식은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잘 지키는 예로 제시될 것이 아니라, 잘못 지키는 대표적인 방법, 바리새인들처럼 그렇게 엉터리로 신앙생활하는 대표적인 케이스로 제시돼야 될 모습인 것이죠. 마치 군대에서 병사들에게 “식판 가지고 집합”했더니, 식판만 가지고 왔어요. 숟가락은 안 가져오고. 왜 안 가져왔냐 하면 “식판 들고 집합이라고 하셨지 않습니까?” “식판하고 숟가락하고 가지고 집합”이라고 말하지 않았으니까, “식판만 가지고 왔습니다”라고 말하는, 그런 어리석은 모습이, 이런 식의 성경읽기에요.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해주시는 것은 무엇이냐면, 앉았을 때든지, 일어섰을 때든지, 그 어느 곳에든지, 어떠한 상황에 있든지, 모든 케이스에 다 하나님이 우리의 진짜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사실을 가르쳐야 되고, 그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을 우리 자녀들에게 매 순간순간마다 가르쳐야 된다고 하는 것을 가르쳐주시기 위해서 이 말씀을 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들의 삶의 영역 가운데 단 어느 한 점도 우리의 신앙과 연관이 없는 부분이 없습니다. 우리의 삶의 영역 가운데 반경 가운데 1제곱센티미터도 하나님과 관련이 없는 부분이 전혀 없습니다. 우리가 밥을 먹는 것, 잠을 자는 것, 학교를 가는 것, 직장생활을 하는 것, 우리가 친구 관계를 맺고, 부모와의 관계를 맺고, 이웃과의 관계를 맺고, 우리가 행동하는 그 모든 것들이 다 신앙과 관련이 있는 것이고, 그런 모든 분야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을 우리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되는 것이죠.

안타까운 것은 우리 부모님들이 자녀들을 교회 학교에 데려다 놓기만 하면, “전도사님이 알아서 신앙 교육을 해주겠지”라고 오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지 아니하면, 우리는 늘 반성경적이고, 반 신앙적인 세뇌에 시달리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아닌, 이 세상의 것을 사랑하며 살라.” “이 세상의 힘과 권력을 의지하며 살라.” “다른 사람을 짓밟아버리고, 눌러버리고, 내가 성공해야, 그래야 내가 성공할 수 있다.” “내가 행복할 수 있다.”라고 하는 이 세상의 거짓 가르침에 우리가 완전히 노출되어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매 순간순간마다 모든 경우에, 하나님이 사랑이라고 하는, 하나님을 사랑해야 된다고 하는 것을 가르쳐야 하는 것이죠.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잘 따랐느냐? 잘 믿었느냐? 아니오. 그들은 돈의 우상을 섬기고 있는 거에요. 자신들의 이득이라고 하는 탐욕의 우상을 섬기고 있는 거에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해야 되고, 너희들이 나그네 되었던 적을 기억하면서, 내 주변의 이방인들에게 사랑을 베풀라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있는 것이고, 성공과 그리고 이 세상에 그 파워(power)를 위해서, 그런 것들을 추구하며 살아가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그러나 그것은 참된 믿음의 길이 아닌, 죄악의 길을 따라가고 있는 것이고, 참되신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닌, 물질을 우상으로 섬기며, 이 세상의 탐욕을 우상으로 섬기고 있는 잘못된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은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그런 믿음의 결단들이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왜 하나님만을 사랑해야 됩니까? 왜 하나님만을 사랑해야 됩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참되신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그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들을 지극히 사랑하셔서 하나밖에 없는 아들까지도 우리 위해 내어주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하나님에게로 갈 때, 우리는 그 안에서 만족을 누리고 행복을 누리고 복된 인생이 될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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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의 기도와 믿음 (삼상 1:9-18)

잘 아는 것처럼 한나라고 하는 여인에게는 자식이 없었습니다. 그로 인하여 엄청난 고난을 당했고 정말 슬픔과 고통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한나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한나가 마음이 괴로웠을 때에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고 통곡하였다고 하는 점을 주목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한나는 이전에 누구를 향해서 원망을 했습니까? 자신의 남편을 향해서 원망을 했습니다. 내게도 아들을 달라고 이야기했고, 사람을 향해서 원망했지만, 사람을 향해서 했던 그 모든 불평과 원망은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죠.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여러 가지 힘들고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해결할 수 없는 허망한 것들을 향해서 원망하기도 하고 불평하기도 하고 또 소망을 말해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할 것이 있다고 한다면, 이 세상에 그 어느 것도 우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으며, 우리가 나아갈 대상은 오직 하나님께만 나아가는 것밖에는 우리에게 다른 소망이 없다고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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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 시간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러 나왔는데, 우리가 기도할 때 이 자리에 나와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무엇보다도 하나님 앞에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사람들을 바라보고서가 아니라, 사람들의 시선이 의식되어서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 앞에 토로하고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놀라운 은혜를 우리 가운데 허락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한나는 하나님 앞에 슬픔 가운데서 하나님 앞에 서원하기도 하고 간절하게 기도하며 엎드렸는데요. 그때 엘리 제사장은 이 한나의 모습을 보면서 마치 취한 여자처럼 생각이 되어서 그를 꾸중하였지만, 그러나 이 여인이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한다고 하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엘리 제사장은 평안을 빌며 축복하고 돌아가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하나가 엘리 제사장의 이야기를 들은 다음에 이렇게 반응했습니다. 18절 말씀에 보니까, “이르되 당신의 여종이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이다 하고,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근신 빛이 없더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엘리 제사장이 했던 이 말은 하나님의 응답이었을까요? 우리는 사무엘상을 읽으면서 정말 이 한나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셨고, 그래서 이 한나가 사무엘을 낳게 되는 엄청난 기적을 체험했다고 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엘리 제사장의 이 말이 한나의 마음에 기쁨과 평안함과 안식을 주었던 것일까요? 기도할 때 이 한나는 정말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아들을 주신다고 하는 사실을 기도하면서 확신하고 전혀 의심하지 않고 믿고 기도했던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인가요?

성경 말씀 야고보서 1장 6절에서부터 8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을 우리가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실 거라고 하는 사실을 확실하게 믿어야 된다고 하는 그런 의미일까요? 기도하다가 조금이라도 의심이 들거나 조금이라도 불안한 마음이 들면 안 된다고 하는 그런 말씀일까요?

사실 그렇게 하기는 너무나도 어렵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다 보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서 현실이 보이면서, 이러다가 망하는 것 아닐까? 이러다가 아무런 해결책이 없게 되는 것이 아닐까? 이러다가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을 만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엎드리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고 우리의 생각과는 정반대의 길로 인도하실 수도 있을 거라고 하는 불안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찌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한나는 얼마나 마음을 잘 먹었기 때문에 그런 불안한 마음이 하나도 없었던 것일까요? 그렇다기보다는 이 한나가 가서 근심하지 않고 편안한 가운데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아들을 주신다고 하는 그런 믿음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아버지 되신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에 대한 믿음에서 이런 반응이 나왔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기도에 응답을 해주실 때 우리가 원하는 방식대로 그대로 다 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구하라. 그러면 주실 것이오.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오.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문을 열릴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지만, 그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기도를 주저하지 말고 “내게 알려라.” “내가 응답하겠고, 내가 들어줄 마음이 있다”고 하는 것을 밝혀주시는 말씀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응답은 항상 우리가 원하는 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가장 선한 길로, 우리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완전히 달라서, 마치 하늘이 땅에서부터 멀고, 정말 이 세상의 끝 끝이 서로 먼 것처럼,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들의 생각보다 훨씬 더 커서, 우리의 알량한 머리로 우리의 조그마한 생각으로는 이게 최선처럼 생각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보다 훨씬 더 우리를 더 잘 아시는 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좋은 길을 허락해 주시는 것이죠.

저도 여러 가지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 앞에 왔습니다마는 하나님께서 제가 원하는 방식대로 기도에 응답해 주시지 않은 적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꼭 이것은 합격했으면 좋겠는데, 합격이 안 되는 경우가 있었고요. 이것은 반드시 패스를 했으면 좋겠는데, 패스가 안 되는 경우가 있었고,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 경우가 있었고, 우리의 기도와는 정반대로 흘러가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돌아와서 생각해 보면, 그때 하나님께서 내 기도에 응답지 아니하시고 우리의 인생을 다른 방향으로 틀어주신 것이 그것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였고, 그것 때문에 내가 더 영적으로 성숙할 수 있게 되었고, 그것 때문에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갈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얻게 되었던, 그런 경험들을 우리가 생각해 볼 때에, 우리가 확실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께서는 선하신 하나님이시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패망시키려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방법으로 응답해 주시든지 간에 선하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거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믿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야고보서 1장의 말씀은 그러니까 우리가 기도한 대로 응답될 것을 믿으라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이 선하신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사실을 확신하는 가운데, 주님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리지 말고 기도해야 한다고 하는 그런 의미인 것이고, 오늘 한나는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나에게 가장 좋은 길로 어떠한 방법으로 응답해 주시든지 간에, 하나님은 나를 위하여서 엄청난 은혜의 길을 베풀어주실 거라고 하는 사실을 믿게 될 때에, 한나는 돌아가서 기쁨과 감사로 지낼 수가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물론 이 한나에게는 하나님께서 한나가 원하는 대로 응답해 주시고 기도해 주심으로 말미암아, 정말 하나님을 향해서 찬양하고 기뻐하고 감사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오늘 이 저녁 시간에 우리도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나아갈 때,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면서 주님 앞에 엎드릴 수 있는 귀하고 복된 시간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 우리가 원하는 것을 아르고 토로하면서 기도하는 가운데, 그러나 우리의 생각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고,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그 놀라운 역사들을 우리가 기대하면서, 하나님께서 어떤 선하고 좋은 길로 인도해 주실지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는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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