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트민스터 성경연구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WebServant 2011.04.07 00:48 조회 수 : 1073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이 세상의 삶에 대해서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권고하신다.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지 말고,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오직 염려할 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염려하고 그것을 추구하는 삶을 살라고 권고하신다. 이런 교훈을 위하여 예수님은 들에 피는 백합화와 공중에서 날아다니는 새에 빗대어 설명하셨다. 하나님께서 이것들을 입히시고 먹이신다면, 이것들보다 훨씬 더 소중한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당연히 먹이시고 입히시지 않겠느냐고 하셨다. 그러니 이 세상의 염려는 붙들어 매어두고,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위해 간구하라는 것이 예수님의 메시지이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하지만 정말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사는 자들은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해결되는가? 바울 사도의 예를 보면, 결코 그렇지 않은 것 같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일 것이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 후서 11:23-26에서, 자신이 복음을 전하는 가운데 당했던 수많은 시련과 고통들을 설명한다. 그 가운데 이런 표현이 있다.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 11:27). 예수님의 말씀과는 달리,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일하는 바울 사도가 먹을 것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입을 것을 제대로 입지 못했음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인가? 정말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일한다면, 하나님이 먹이시고 입히신다는 말이 맞는 것인가?


우선 예수님의 이 말씀은 이 세상에서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주는 비법(秘法)으로 주신 말씀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만일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한다면, 결국 삶의 궁극적인 관심사가 먹고사는 것이 될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삶의 목표가 단지 먹고 마시는 것(즉 일차적이고 육체적인 욕구의 충족)에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계신 것이다. 이러한 목표는 이방인들(즉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아닌 사람들)의 관심사일 뿐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만드신 이유는 그 이상의 고결한 목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먹고 사는 것이 최대의 관심사이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특별하신 목적이 있고, 우리는 그 목적을 위해서 살아야 함을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것이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義)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는 말씀은 강조점이 앞부분에 있다. 후반부인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는 말씀이 목적이 되고 전반부가 그것을 위한 수단이 되는 것이 아니다. 전반부에 강조점이 있기 때문에, 후반부는 전반부를 위한 보조의 말씀이다. 즉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전적으로 추구하는 삶을 살 경우, 먹고 마시고 입는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수 있겠는가는 질문에 대하여, 그런 염려는 할 필요가 없음을 강조하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나를 굶어 죽이시겠는가?”에 해당하는 말씀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아시며, 우리에게 공급해 주신다(마 6:32). 그렇다면 먹고 사는 문제에 매달려서 살 것이 아니고,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의 목적을 생각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이지, 하나님의 일을 하면 모두가 부자가 되고 편안한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말씀은 결코 아니다.


지난 주에 내가 아는 어떤 목사님은 미국에서의 기나 긴 유학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들어갔다. 이곳에서 박사 학위를 마쳤지만, 한국에 들어간다고 해서 교수가 된다는 보장은 전혀 없다. 70년대에는 공부를 제대로 한 사람들이 없어서 외국에서 조금이라도 공부한 사람이라면 학교에서 가르칠 수 있었지만, 요즘에는 외국에서 학위를 받은 사람들이 한 해에도 십여명 씩 쏟아져  들어오기 때문에, 한국에서 교수가 될 수 있는 보장은 아무것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아무런 약속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그 목사님은 한국으로 들어갔다. 그 목사님의 자녀가 이곳에서 공부하던 것도 중단하고 교육에 있어서 열악한 환경인 한국으로 들어갔는데, 도대체 어떤 계산을 하고 들어간 것일까? 모두들 그 정도 또래의 아이를 가진 자녀를 둔 부모들이 미국으로 나오기를 소망하는데…


나는 그 분과 마지막으로 인사를 나눌 기회를 갖지 못했고 그분의 계획에 대해 구체적으로 대화를 나눌 수 없었기에 그분의 속내를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그분에 대한 바람은 이것이다. 한국으로 들어가는 결단이 “먹고 입는 것”을 해결하기 위한 목적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한 결단에서 나온 것이기를 기대한다. 그래서 비록 바울처럼 고난을 당할 수도 있고, 고통을 당할 수도 있고, 심지어 주리고 헐벗기까지 할지라도,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서 일하는 일이 계속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더하신다는 말은 만사형통하게 해주시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나를 나보다 더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이 가장 필요한 지를 아시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하나님의 오묘하신 섭리 속에서 하나님의 방법으로 공급해주실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와 주권을 의지할 수 있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일하는 것이 제한받을 이유는 없다. 그곳이 한국이든, 미국 필라델피아이든, 아니면 그곳이 중국이든 아프리카이든…

Copyright (c) 웨스트민스터 성경연구소 All Right Reserved. Powered by XE
Designed by Elkha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