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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대 재앙을 바라보는 신앙적 관점

WebServant 2011.03.22 09:14 조회 수 : 1201

세계 최강의 기술력을 자랑하는 일본이 너무나도 허무하게 무너졌다. 해일을 대비해 오랜 기간 동안 쌓아놓았던 10 미터 높이의 방파제도 순식간에 들이닥친 쓰나미의 위력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고갈되어갈 뿐만 아니라, 사용할수록 오염을 유발시키는 석유자원을 대치하는 꿈의 에너지로 여겨졌던 원자력은 거대한 대 재앙으로 다가왔다. 2만명이 넘는 사망자와 실종자를 만들어낸 이 재난은 지구가 결코 안전한 곳이 아니라는 점을 상기시켜주고 있다.

 

역사를 주관하시며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믿고 인정하는 신앙인은 대재앙이 일어났다는 것을 그냥 우연으로만 생각할 수 없게 된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불신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우연이겠지만, 신앙인에게 있어서 우연이란 없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일어나는 것임을 인정하는 것이 성경적 가르침이며, 신앙적 태도일 것이다.

 

하지만 모든 재난과 고통은 불신앙의 결과이며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우상을 섬긴 것의 결과라고 단순하게 생각하는 것은 결코 성경적인 관점이 아니다. 동방의 의인이었던 욥은 하루아침에 모든 자녀들을 잃고 전 재산을 잃었고 자신의 건강도 잃어버렸지만, 그의 고통은 그가 우상을 숭배했거나 죄악을 저지르며 산 결과가 결코 아니었다. 바울 사도는 복음을 전도하면서 온갖 고통과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으며(고후 11:23-27), 늘 병을 달고 살았는데, 역시 그가 다른 사람에 비하여 죄를 더 지었거나 우상을 숭배한 결과가 아니었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고백하였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하려 하심이니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고후 12:7-9).

 

반면 죄악을 저지르고 악을 행하는 자가 결코 고통을 당하지도 않고 죽을 때까지 편안하게 살다가 편안하게 세상을 떠나게 되는 경우를 우리는 수없이 많이 목격하게 된다. 시편의 기자는 이러한 사실 때문에 실족하여 넘어질뻔 하였다고 노래하였다.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나는 거의 실족할뻔 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뻔 하였으니,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 하였음이로다.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 타인과 같은 고난이 없고 타인과 같은 재앙도 없나니, 그러므로 교만이 저희 목걸이요 강포가 저희의 입는 옷이며, 살찜으로 저희 눈이 솟아나며 저희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지나며, 저희는 능욕하며 악하게 압제하여 말하며 거만히 말하며, 저희 입은 하늘에 두고 저희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 그러므로 그 백성이 이리로 돌아와서 잔에 가득한 물을 다 마시며, 말하기를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극히 높은 자에게 지식이 있으랴 하도다.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이라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 하도다. 내가 내 마음을 정히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시 73:1-13).

 

따라서 이러한 대 재앙이 하나님의 손길을 벗어나 그냥 우연히 발생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그 재앙을 허용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 누가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서 하나님의 마음이 그렇다고 함부로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욥이 고난을 당하는 이유가 욥이 죄를 지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하며 욥에게 회개하라고 권고했던 욥의 친구들의 말은 결코 지혜롭지 못한 말이었고, 형제의 고통을 가중하게 만든 악한 행위였다. 나면서부터 소경된 사람이 누구의 죄 때문에 그렇게 되었을까 질문을 던지는 것도 결코 현명한 질문이 될 수 없다. 솔직하게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고통을 허용하시는 이유를 우리가 알 수 없다고 고백해야 한다. 넓은 의미에서 이 세상의 고통은 죄의 결과이지만, 구체적으로 개개인이 어떤 죄 때문에 어떤 고통을 당하는지는 함부로 말할 수 없다. 오직 그것은 자기 자신에게만 적용해야 할 자기반성이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스스로는 고통 속에서 자신의 죄를 깨달을 수 있으며, 만일 고통이 회개로 연결될 수 있다면 그것은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반성적 차원에서 그렇다는 것이지 결코 다른 사람들의 죄를 지적해 내는 것은 무례한 것이다. 고통을 당하는 자들을 보면서, 그들의 죄를 지적해내는 것은 결코 신앙적 관점이 아니다.

 

고통을 당하는 자들과 함께 울고 그들의 아픔에 동참하는 것이 신앙적 관점이다. 고통을 당하는 자들이 무슨 죄를 지어 그런 고통을 당하는지 묻는 것은 무례한 것이며, 더 나아가 악한 것이며, 마치 자신은 죄를 짓지 않아서 무사한 것처럼 생각하는 불신앙 중의 불신앙이다. 예수님께서는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사람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을 때, 그렇게 재난을 당해 죽은 사람들이 죄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아서 그런 재난을 당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지적하시면서, 현재 고난을 당하고 있지 않는 자들의 회개를 촉구하신 바 있다(눅 13:1-5).

 

우리는 솔직히 하나님께서 왜 이러한 재앙을 왜 지금 그곳에 보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이런 재앙을 보면서 우리는 내 자신에게 적용해야할 것을 찾아보아야 한다.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판단의 재료가 아니라, 나 자신을 돌아보는 반성의 재료가 되어야 한다. 인간의 나약함을 다시한번 발견해야 하며, 우리의 소망이 결코 물질적인 안정과 이 세상적 소망에 있지 않음을 철저하게 자각하여야 한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군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시 1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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