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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문자주의 위험에 빠지지 않으려면

문자주의의 위험에 빠지지 않으려면, 종교개혁의 원리인 성경 전체로(tota scriptura)의 원칙을 기억해야 한다. 성경의 어느 한 표현이나 구절에 의존할 게 아니고, 성경 전체의 가르침이 무엇인지를 살펴야 한다. 이것이 칼뱅이 가졌던 해석학적 출발점이었다.1 특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이 성취되었다는 구속사적 관점을 고려하면서 성경을 해석해야 한다. 그러기에, 성경에 돼지고기를 먹지 말라는 규정이 있어도 우리는 그 율법에 종속되지 않는다. 자유롭게 먹을 수 있다. 할례를 시행하고 제사를 드리라는 규정이 분명하게 구약 성경에 있지만, 우리는 더 이상 이러한 규정을 문자적으로 지킬 필요가 없다. 더 나아가 안식일 법이 성경에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지만, 토요일을 지켜야 할 이유도 없다.2)

더 나아가 성경에 기록된 내용이 혹시 당시의 문화적인 맥락에서 또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주어진 것인지 아니면 보편적이고 영구한 법칙으로 주어진 것인지를 구분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기도할 때 머리에 두건을 쓸 필요가 없다(cf. 고전 11:5).3 성도가 서로 문안 인사를 할 때, 입을 맞추며 인사하라고 되어 있지만(고전 16:20; 살전 5:26; 벧전 5:14; 고후 13:11), 우리가 이 규정을 따라야 할 이유가 없다. 그건 당시에 평화를 표하는 인사법이었을 뿐이며,4 다른 믄화권에 있는 우리들에게도 적용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무엇이 더 중요한 가치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다윗이 배가 고파서 성전에 갔을 때였다. 제사장 아히멜렉은 제사장들만 먹을 수 있는 진설병을 다윗과 그 일행에게 제공하였다. 이것은 엄격하게 율법에서 금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이를 인정하셨다. 이러한 이야기는 문자주의 함정에 빠진 사람들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장면이다. 웃사의 경우에는 율법의 규정대로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해야 했다. 웃사는 아마도 하나님의 궤를 보호한다는 선한 동기가 그 밑에 있었을 것이다.5 하지만 그러한 동기에도 불구하고 율법에서 규정한 방식을 따르지 않았다. 그는 아론 계열의 제사장도 아니었고, 따라서 법궤를 만져서도 안 되었다.6 그 대가는 처참했다. 하지만 아히멜렉은 율법의 규정을 어겼는데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고, 오히려 주님께서 인정하셨다.7 이 사건을 보면서, 정말 중요한 것은 문자적 규정을 철저하게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말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읽어야 함을 알 수 있다. 문자주의의 함정을 뛰어넘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려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제사장이나 레위인처럼 강도 만난 사람이 옆에 있어서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다(눅 10:30-37). 그들이 지나친 이유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분명하게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아마도 율법의 규정이 그들로 하여금 선을 베푸는 것을 꺼리게 만들었을 가능성이 있다.8 문자주의의 함정에 빠지면, 고르반이라는 규정 때문에 부모님을 공경하지 않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막 7:9-13). 그런데 예수님은 손을 내밀어 나병환자에 대셨고(마 8:2-3), 안식일 규정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마 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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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Herman J. Selderhuis, ed. The Calvin Handbook (Grand Rapids: Eerdmans, 2009), 380.[]
  2. 자세한 논의를 보려면, D. A. Carson, ed. From Sabbath to Lord’s Day: A Biblical, Historical and Theological Investigation. (Eugene: Wipf and Stock Publishers, 1982[]
  3. 당시의 문화에서 두건을 쓰지 않으면 남편을 욕되게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두건을 써야 했었다. 문화적인 관습 때문에. Robert Scott Nash, 1 Corinthians. (Macon: Smyth & Helwys, 2009), 326-327.[]
  4. Robert Scott Nash, 1 Corinthians. (Macon: Smyth & Helwys, 2009), 447.[]
  5. Eugene H. Peterson, Leap Over a Wall. 이종태 역,『다윗: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서울: IVP, 1999), 177-179.[]
  6. Robert D. Bergen, 1, 2 Samuel (B&H Publishing. Kindle Edition), 329-330.[]
  7. R. T. France, The Gospel of Matthew. (Grand Rapids: Eerdmans, 2007), 458-459; Eugene H. Peterson, Leap Over a Wall. 이종태 역,『다윗: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서울: IVP, 1999), 80.[]
  8. 물론 제사장이나 레위인의 동기를 상상하는 것은 본문이 허용하는 범위를 넘어가는 것이다. Richard B. Vinson, Luke. (Macon: Smyth & Helwys, 2018), 339-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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