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여성의 가르침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의 금지(딤전 2:11-15)

그런데 디모데전서 2:11-15은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표현하고 있다. 이 구절은 여성에게 안수하지 말아야 한다는 가장 강력한 구절로 사용되고 있다. 1 종교 개혁가 칼뱅도 이 구절을 주해하면서 남성들에게만 공적으로 가르치는 직분이 주어졌으며 여성들은 제외되어야 한다고 해설하였다. 2

물론 이 구절은 여성이 아예 가르치지 못한다고 규정한 것이 아니라, 남성들을 주관하여 가르치는 것을 금하는 것이다. 3 즉 여성과 아이들을 가르칠 수는 있겠지만(딛 2:3-4; 딤후 1:5), 또한 공적인 자리에서가 아닌 사적인 관계에서는 가르칠 수 있겠지만(행 18:24-26), 예배의 자리에서 남성을 가르치는 것은 불가하다고 본다. 4 더 나아가 디모데전서에서는 여성이 남성을 주관하여 가르칠 수 없는 이유로 단순히 문화적인 근거를 제시하지 않고, 오히려 창조질서를 언급하는 것 같다. 즉 아담이 먼저 창조되었다는 사실과 여자가 속임을 당하여 죄에 빠졌다는 사실에 호소한다(딤전 2:13-14). 이 구절을 문자적으로 해석한다면, 여성이 교회 내에서 가르치는 역할은 할 수 없고, 남자를 주관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로, 또는 남자를 주관하는 방식으로 가르쳐서는 안 된다는 의미로 5 받아들일 수 있다. Douglas Moo는 이 부분을 주석하면서, 교회와 신학교에서 성경과 교리를 가르치는 것은 여성에게 허락되지 않는 것이지만, 전도하는 것이나 상담하는 것은 금지된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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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러한 문자적인 해석은 당장 다음과 같은 문제를 야기한다. 즉, 여성이 가르치기도 하고 교회 안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처럼 보여주는 부분(로마서, 사도행전, 고전 11:5)과 여성이 잠잠하고 가르치지 말라고 금지하는 부분(딤전 2:11-15; 고전 14:34-35)은 어떻게 조화될 수 있을까? 고전 11장에서는 여성이 머리에 쓰고 예언하라고 가르치고 있다(고전 11:5). 여기서 예언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으로, 가르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고전 11장에서 바울 사도는 여성이 예언을 하지 말라고 아예 금지한 것이 아니라, 바른 방법으로 하라고 하였다.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는 여성이 예언을 하는 것을 금하지 않았는데, 에베소 교회의 경우에는 여성이 가르치는 것을 금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러한 문제는 이 구절이 모든 시대에 모든 교회에 적용되어야 할 말씀이라기보다는, 당시의 상황에서 특별하게 주어진 메시지였다고 해석하면, 해결될 수 있다. 7 당시 에베소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깨닫지 못한 채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는 혼란스러움이 있었다(딤전 1:6-7; 4:1-3). 특히 여자 성도들의 문제는 디모데전후서에 기록되어 있다. 예를 들어, 딤전 5:13에서는 몇몇 여성들이 집집마다 다니며 쓸데없는 말(φλύαροι)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는(λαλοῦσαι τὰ μὴ δέοντα) 문제를 지적한 바 있다. 딤후 3:6-7에서도, 일부 여성들이 어리석어서 쉽게 미혹에 빠지고 배우기는 하지만 진리에 도달하지 못하는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여성들에게 토라(율법)를 가르치는 것을 금하였던 당시의 상황에서, 여성들은 대체로 배움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에베소에 있는 여성 성도들이 가르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기는커녕 제대로 배우지도 못한 채 교회 내에서 잘못된 가르침으로 문제를 야기하고 있는 그런 상황에서 바울 사도는 여자가 가르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이다. 바울 사도는 그렇게 쉽게 유혹에 넘어가는 일이 태초에 하와가 먼저 사단에게 유혹을 받아서 죄를 지었던 것을 상기시켰다. 최초에 하와가 속아서 죄에 빠졌는데, 지금 에베소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발생하고 있는 것을 지적한다. 그래서 잘못된 가르침을 하지 말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주었던 상황적인 메시지라고 간주할 수 있다. 8 디모데전서는 이단적인 가르침 때문에 교회가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주어진 편지로 본다면, 이런 상황을 어떻게 정리하고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의 차원에서 교훈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디모데에게 맡기면서(딤후 1:13-14), 디모데로 하여금 그 말씀을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해서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도록 권면하였다(딤후 2:2).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전수받은 충성스럽고 신실한 사람들에 의해서 잘 전달된다면 교회가 평안할 것이다. 하지만 교회 안에 거짓 가르침이 파고들었다. 이러한 거짓 가르침에 쉽게 넘어갔던 사람들 중에 여성들이 많았다. 이단들은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서 어리석은 여자들에게 잘못된 가르침을 주었고, 이러한 가르침에 여자들이 쉽게 속아 넘어갔었다(딤후 3:6-7). 그런 상황에서 바울 사도는 여성들에게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외친 것이다. 그 옛날 하와가 사탄에게 속아 넘어가서 인류가 타락하게 된 일이 있었는데, 지금도 여성들이 많이 속아 넘어가는 상황이 되어버렸다(딤전 2:14). 그러니까 함부로 거짓된 가르침을 전파할 것이 아니라, 잠잠해야 할 것을 명한 것이다.

딤전 2:13-14에서 바울 사도는 여자가 가르치고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금하는 이유로 두 가지를 언급한다. 첫째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았다는 사실이고, 둘째는 여자가 속아 죄에 빠졌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언급은 여성들의 사역을 제한하는 것이 당시의 시대적인 상황에 따른 것이라기보다는 영원한 창조의 질서처럼 느끼게 한다. 9 그래서 여자가 가르치거나 남자를 주관하는 것은 창조의 원리를 무효화하는 것이라고 Douglas Moo는 주장한다. 10 하지만 과연 이 부분을 창조 질서로 보아야 하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왜냐하면, 만일 여성이 남성을 주관하거나 가르치는 것이 창조의 질서를 깨트리는 것이라고 한다면, 왜 구약에서는 하나님께서 드보라와 같은 여자 사사(재판관, 지도자)를 세우셨고, 훌다와 같은 여자 선지자를 세웠는지를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왜 하나님께서는 창조의 질서와 원칙을 스스로 깨셨는지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그리고 구약에서 그렇게 창조의 질서를 깨트리는 것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면, 왜 지금은 그렇게 깨트리면 안 되는지에 대한 설득력 있는 설명이 필요하다. 그래서 이 부분을 창조의 질서를 제시한 것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설명(예시)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즉 바울 사도는 에베소 교회에서 일어나는 현재의 상황이 태초의 상황과 유사하다는 것에 비추어 염려하는 부분으로 이해할 수 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지으시고 그 후에 하와를 돕는 배필로 창조하셨는데, 그런 역할을 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 하와가 사탄에게 속임을 당하여 아담도 죄에 빠지게 되는 단초를 제공한 것처럼, 현재 에베소 교회의 상황은 여성들이 미혹을 당하여 교회 전체가 어려움에 빠지는 단계로 들어서게 되었다는 점을 우려하는 내용으로 이해할 수 있다. 11 그 옛날 돕는 배필로 창조된 하와가 오히려 타락하게 만들어 돕는 배필의 역할을 하지 못했던 것처럼, 지금도 그런 비슷한 상황이 일어나고 있음을 지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니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여성들에게 남자를 주관하면서 가르치는 일을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태초에 일어났던 불행이 다시 반복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다. 1세기 상황과는 달리, 여성도 남성과 똑같이 배우고 있고, 배움에 있어서 남성들보다 더 뛰어난 경우도 많다. 가르치는 능력에 있어서도 여성이 남성에게 뒤지지 않으며 더 뛰어난 경우도 많다. 1세기 에베소에서의 상황과는 완전히 다른 상황이 우리 앞에 펼쳐지고 있다. 1세기 상황에서도 이미 브리스길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가르칠 수 있었기에 아볼로를 가르쳤다(행 18:26). 바울 사도는 충성되고 신실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도록 부탁하라고 했는데(딤후 2:2), 이 구절에서 강조점은 “신실한”(πιστοῖς)에 있다. 12 사람들(ἀνθρώποις)는 남성형으로 되어 있지만, 헬라어의 특성상 남녀를 대표하는 의미에서 사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우리 말로 표현된 “조용히 배우라”(ἐν ἡσυχίᾳ μανθανέτω)는 매우 수동적인 뉘앙스를 전달한다. 즉 잘난 체하거나 우쭐거리지 말고 까불지 말고 얌전한 복종적인 태도를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ἐν ἡσυχίᾳ는 절대로 말하면 안 된다는 의미의 “침묵 가운데”(in silence)라는 뜻이라기 보다는, “차분하게”, “평정심을 가지고”(in tranquility)라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13 고요함(ἡσυχία)은 여성에게만 요구된 것이 아니라, 남자든 여자든 모든 크리스천에게 요구되는 성품이다(cf. 행 22:2; 살전 4:11; 살후 3:12; 벧전 3:4; 딤전 2:2; 딛 2:2). 14 더 나아가 고요함(ἡσυχία)은 1 클레멘트서 44.3에서 고린도 교회의 리더들이 예배를 인도할 때 보여준 태도를 지칭하는 표현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15 또한 “일체 순종함으로”(ἐν πάσῃ ὑποταγῇ) 배우라는 것은 남편에게 순종하라는 의미라기보다는 16 가르침에 순종하라는 뜻으로 혹은 하나님께 순종하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14 왜냐하면, 성경은 특히 신앙적인 가르침과 관련해서는 사람에게의 무조건적 복종을 말하지 않고 분별하라고 권고하기 때문이다(마 7:15; 눅 6:39; 요일 4:1). 일반적으로 위에 있는 권세에게 복종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이지만(롬 13:1-2; 엡 5:22-24; 6:1, 5; 골 3:18; 딛 2:5, 9; 3:1; 벧전 3:1, 5), 영적인 진리와 관련해서는 사람에게 무조건적인 복종을 말하지 않고 분별할 것을 요구한다. 따라서 순종함으로 배우라는 것은 남편에게라기보다는 진리에 순종하라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

여성에게 조용히 배우라고 명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매우 부정적인 뉘앙스로 들린다. 하지만 예수님 당시의 유대 사회에서는 여성이 배우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17 오히려 이 구절은 긍정적인 메시지이다. 1세기 상황에서 여성의 위치는 지극히 비참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드리는 기도문 가운데, 여성으로 태어나지 않은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했다. 바울 사도는 어려서부터 “주께서 저를 노예로, 여자로, 또는 이방인으로 창조하지 않은 것에 대하여 주님께 감사하나이다”라는 기도문을 외우면서 자랐을 것이다. 18 심지어 곱틱 도마복음서 114에 막달라 마리아가 아무런 생명의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 시몬 베드로의 말에, 예수께서 “보라. 내가 그를 이끌어서 남자를 만들 것이다. 그러면 그도 생령(a living spirit)이 될 수 있다. 남자로 자신을 바꾸는 모든 여성은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라고 대답하는 표현이 등장할 정도이다. 19 그런 상황에서 마리아가 마르다를 돕지 않고 예수님 앞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아주 불쾌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여성인 마리아가 가르침을 배우는 것을 허용하셨다(눅 10:38-42). 여성이 조용히(ἐν ἡσυχίᾳ) 순종함으로(ἐν πάσῃ ὑποταγῇ) 배우라는 권면(딤전 2:11)은 그런 점에서 여성의 역할을 무시하는 발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여성에게 배움의 길이 열린 표현으로 보인다. 이것은 1세기의 상황에서 상당히 진전된 모습이었다. 20

디모데전서 2:12에서는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여자가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것은 명령문(imperative)이 아니라 평서문(indicative)이다. 즉 바울 사도는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현재 허락하고 있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술하고 있다. 21 “바울은 행동을 기술(describing)하고 있는 것이지, 규정(prescribing)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22 하지만 권성수 교수는 롬 12:1에 있는 “내가 권한다”는 표현이 현재형이라고 해서 일시적인 것이 아닌 것처럼, 이 구절도 현재형으로 사용되었다고 해서 일시적인 명령으로 보아야 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한다. 23

그런데 모세는 사람들의 마음이 완악하기 때문에 이혼을 허락했다(ἐπέτρεψεν, 마 19:8). 이러한 허락은 영원한 법칙으로서의 허락은 아니었다. 하나님의 법칙은 이혼이 불가하다는 것이다(마 19:6). 하지만 완악한 사람들의 형편 때문에 모세는 하나님의 영원한 법칙과는 반하는 허락을 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여성이 가르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여성도 남자와 똑같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고(창 1:27), 드보라와 훌다와 같이 하나님께서 여성 지도자와 선지자를 충분히 세울 수 있었다. 그런데, 현재 에베소 교회의 상황은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교회의 문제를 야기하는 여성들로 인하여 교회가 혼란스러워지는 상황에서는, 모세가 그랬던 것처럼 바울 사도도 하나님의 영원한 법칙과는 달리 여성이 가르치는 것을 금해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다. 신약에서 허락하는 것(ἐπιτρέπω)은 대부분 상황적 대처로서의 허락이다(마 8:21: 막 5:13; 요 19:38; 행 21:39-40; 26:1; 27:3; 28:16; 고전 16:7; 히 6:3).

당시 에베소는 아데미 신전이 있었고, 그곳에서는 여성 사제들이 제의 의식을 주도하면서 남성들을 지배하였다. 24 이러한 관습들이 교회 안에도 들어와 교회를 어지럽히곤 했다. 25 그렇게 주관하는 모습은 성경적인 가치와는 반대되는 것이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비워 종의 형체를 가졌던 것처럼, 성도들은 서로가 자신을 낮게 여기고 섬기는 종의 모습을 가져야 했다(빌 2:5-8). 성도들은 피차 복종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했다(엡 5:21). 그래서 바울 사도는 주관하는 자세를 갖지 말라고 권고하고 있는 것이고, 특히 아데미 신전의 여자 사제들처럼 남자들을 주관하는 식으로 이방의 관습을 가지고 교회 안으로 들어오지 말라고 권고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권고는 지금 에베소 교회의 상황에서 주어진 것임을 기술하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지금 에베소 교회 안에서 아데미 신전에서처럼 여자들이 주도하면서 남자를 주관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하지 말라고 하였음을 기술하고 있다. 26 남자를 주관하지 말라는 말은 여자가 남자로부터 주관을 받아야 한다는 의미에서라기보다는, 크리스천이 가져야 할 덕목으로서 낮아짐의 영성 또는 낮아짐의 리더십을 표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눅 22:25-26). 만일 이 구절이 에베소 교회의 특수한 상황에 주어진 한시적인 명령이었다고 해석한다면, 이러한 권고가 여성들은 아예 교회 내에서 직분을 맡을 수 없다는 영구불변의 명령으로 이해될 필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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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 Geroge W. Knight III, The New Testament Teaching on the Role Relationship of Men and Women (Grand Rapids: Baker, 1976), 67-68.[]
  2. John Calvin, Calvin’s New Testament Commentary vol 21. (Grand Rapids, Eerdmans, 1964), 217.[]
  3. 손석태, “여성 안수 성경적인가?” <개신논집> 9 (2009), 252; 권성수, “딤전 2:11-15에 관한 주석적 고찰” <신학지남> 63(3) (1996.9), 81.[]
  4. Montague, First and Second Timothy, Titus, 65.[]
  5. 권성수, “딤전 2:11-15에 관한 주석적 고찰,” 75.[]
  6. Douglas Moo, “What Does It Mean Not to Teach or Have Authority over Men? 1 Timothy 2:11-15” in John Piper & Wayne Grudem, Recovering Biblical Manhood and Womanhood (Wheaton: Crossway Books, 1991), 186.[]
  7. W. Hulitt Gloer, 1 & 2 Timothy-Titus (Macon: Smyth & Helwys, 2010), 145.[]
  8. Talbert, Romans, 341; 최종호, “여성들의 목회 참여를 위한 성경적-신학적 고찰” <인문학논총> 15(1) (2010), 183-184.[]
  9. 권성수, “딤전 2:11-15에 관한 주석적 고찰,” 92-118; Moo, “What Does It Mean Not to Teach or Have Authority over Men? 1 Timothy 2:11-15,” 183-186.[]
  10. ibid., 191.[]
  11. D. M. Scholer, “Exegesis: 1 Timothy 2:8-15” Daughters of Sarah 1:4 (1975), 7-8.[]
  12. Talbert, Romans, 342.[]
  13. Witherington, Letter and Homilies for Hellenized Christians, 222; 권성수, “딤전 2:11-15에 관한 주석적 고찰,” 77-78.[]
  14. Gloer, 1 & 2 Timothy-Titus, 143.[][]
  15. Quinn & Wacker, The First and Second Letter to Timothy, 222.[]
  16. contra 권성수, “딤전 2:11-15에 관한 주석적 고찰,” 79.[]
  17. Joachim Jeremias, Jerusalem in the Time of Jesus (Philadelphia: Fortress, 1969), 373; Joel B. Green,The Gospel of Luke (Grand Rapids/ Cambridge: Eerdmans, 1997), 435; Ben Witherington III, Women in the Ministry of Jesus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4), 101.[]
  18. Catherine Clark Kroeger & Mary J. Evans, ed. The IVP Women’s Bible Commentary (Downers Grove: IVP, 2002), 621.[]
  19. Gloer, 1 & 2 Timothy-Titus, 142에서 재인용.[]
  20. Sharon Hodgin Gritz, Paul, Women Teachers, and the Mother Goddess at Ephesus: A Study of 1 Timothy 2:9-15 in Light of the Religious and Cultural Milieu of the First Century (Lanham: University Press of America, 1991), 128.[]
  21. Aida B. Spencer, Beyond the Curse (Nashville/ Camden/ New York: Thomas Nelson Publishers, 1985), 85.[]
  22. ibid., 143; 이와 비슷하게 Witherington, Letter and Homilies for Hellenized Christians, 222-223; 최갑종, “최갑종 총장, 여성안수 반대할 성경적 근거 없다” <코람데오닷컴> (2017.7.20.). http://www.kscoramdeo.com/news/articleView.html?idxno=11682.[]
  23. 권성수, “딤전 2:11-15에 관한 주석적 고찰”, 80-81.[]
  24. Richard Clark Kroeger & Catherine Clark Kroeger, I Suffer Not a Woman (Grand Rapids: Baker, 1992), 88-89; Gritz, Paul, Women Teachers, and the Mother Goddess at Ephesus, 133.[]
  25. Witherington, Letter and Homilies for Hellenized Christians, 218-221.[]
  26. Aida B. Spencer, Beyond the Curse, 84-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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