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소망은 어디에? (삼상 8:1-22)

몇 주 전에 이어서 두 번째 여러분들을 뵙고, 하나님의 말씀 함께 나누게 돼 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영광 올려드립니다. 옆 사람하고 한번 인사를 했으면 좋겠는데, 따뜻하게 환영해주면서 인사 한번 합시다. 잘 오셨습니다. 은혜 많이 받읍시다 손도 잡아주시고, 네 감사합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굉장한 혼란 가운데 있는 것 같습니다. 매주 토요일마다 대통령이 하야해야 된다. 혹은 탄핵시켜야 한다고 하는 그런 뜨거운 주장들이 전국 여기저기에서 그리고 숫자를 갱신해가면서, 많은 사람들의 분노가 지금 들끓고 있는 그런 시기입니다. 지난 몇 년간 어떤 일이 있어도, 그 지지층이 30%가 넘는 그런 콘크리트 지지층을 자랑했던 박근혜 대통령의 인기가 하루아침에 5%도 채 안 되는 그런 인기 없는 대통령이 되었다고 하는 것이 너무나도 놀랍게 느껴집니다.

저는 지난 4년간 대구에서 목회를 했었는데요. 거기에 살면서 대구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사랑의 열기가 얼마나 뜨거운지 제가 몸소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많이 냉담해졌고, 심지어 분노하는 사람들까지 있다고 하는 그 사실이 참 격세지감을 느끼게 합니다. 아마 여러분들은 지금 이 현 시국에 어떠한 생각들을 가지고 있고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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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 시간에 정치적인 이야기를 하려고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모든 문제가 좀 잘 해결되고 순리대로 진행이 돼서 이 땅에 정의가 짓밟히고 있다고 하는 그런 느낌을 받기보다는, 그래도 정의가 살아있구나 라고 하는 그런 느낌을 받을 수 있겠다고 하는 그런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가 무엇이냐면, 오늘 본문의 이야기가 어쩌면 현재의 시국을 그대로 드러내주는 것만 같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읽은 사무엘상 8장의 말씀을 보면 사무엘의 뒤를 이어서 사사가 되었던 사무엘의 두 아들 요엘과 아비야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 사람들이 사무엘과는 달리, 자신의 이익을 따라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하는 그런 상황에 이르르자,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들을 탄핵하고, 그리고 새로운 왕을 뽑아달라고 하는 요구가 빗발치는 그런 상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이제 지금까지는 사사들이 다스리는 시대를 살고 있었는데, 이제는 우리도 다른 나라들처럼 왕이 있어야 되겠다고 요구하기 시작한 겁니다. 우리 민족도 왕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사사가 아니라. 사사는 당시에 그저 평상시에는 그냥 생활하다가 전쟁이 일어나면 이스라엘 민족을 데리고 나가서 싸우기도 하고. 아니면 때에 따라서 재판도 하는 그런 일들을 했는데, 그런 좀 시시한 사사 말고, 번듯한 왕이 있고, 총리가 있고 군대가 있고 제대로 된 국가 시스템으로 움직이는, 저 선진국 주변의 강대국들처럼, 우리나라도 왕이 다스리는 그런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뜨거운 분출이 지금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서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사실 이스라엘 민족들에게는 주변의 민족들을 바라보면서 부러웠을 겁니다. 왜냐하면 주변 민족들은 강대국으로서 전쟁이 일어나면 왕의 명령에 따라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전쟁을 이겨나가는 그런 모습들을 보면서, 이스라엘 민족들은 내심 부러웠을 것 같아요. 우리는 왕이 없는데 저들은 왕이 있고, 우리는 군대가 없이 그냥 우왕좌왕하다가, 남의 지배를 받다가 나중에 군인들을 모으니라고 힘이 드는데, 저 민족들은 왕 밑에 군대 장관이 있고, 그리고 군대가 있어서 강력한 파워를 자랑하는 주변 민족들을 바라보면서, 이스라엘 민족들은 그 민족들이 너무나도 부러웠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 민족들은 애굽 땅에서 바로 왕의 그 압제 아래서 종살이 하다가, 이제는 해방되어서 하나님이 왕이 되는 그런 나라가 되었고,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는 신정 국가로서 살아왔는데, 신정국가 왕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는 그 나라는 왕이 없었고, 때에 따라서 사사나 선지자나 제사장을 통해서 다스림을 받는 그런 삶을 살았는데, 그게 싫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들은 왕을 요구하게 됐는데,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왕을 세우게 되면 어떤 문제가 있을 것인지 왕의 제도에 대해서 자세하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왕의 제도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무엘 상 오늘 읽은 말씀 8장 11절부터 18절 말씀까지 보면, 왕을 세울 때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가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내용을 요약하면 어떤 내용이 나오냐면, 왕이 그렇게 좋은 게 아니라는 겁니다. 왕을 세우면 나라가 좀 튼튼해지고 군대도 제대로 잘 갖추고 있어서 그래서 좀 체계적인 나라가 되기를 원하고, 그래서 우리도 강대국에 진입하고 싶다고 하는 그런 소망이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해주시는 말씀은 무엇이냐면, 왕이 되면 그런 장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부작용도 있다는 거예요. 단점도 있다는 겁니다.

어떤 단점입니까? 왕은 너희의 아들 딸들을 데려다가 시녀 시종으로 삼을 거다. 너희들의 물건들을 빼앗아 나가 10분의 1씩 빼앗아서 세금으로 빼앗아가게 될 것이다. 왕이 되면 다 좋은 것이 아니라, 왕이 자기의 밭을 갈게 하는데, 너희들의 아들 딸들을 데려갈 것이고, 왕의 그 궁정을 유지하기 위해서 당신들의 재산을 가져가게 될 것이라고 하는 그 경고의 말씀을 하나님께서 해주고 계시는 모습이 오늘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을 읽다 보면 어쩌면 오늘날 우리들이 맞닥뜨리고 있는 현실을 바라보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대통령을 뽑을 때면 언제나 커다란 소망을 가지고 뽑습니다. 몇 년 전에 대통령 선거가 있었는데요. 그때 대통령 선거에 나선 후보들은 각각 자신들만의 공약을 내세웠습니다. 내가 대통령이 되면 이렇게 하겠습니다. 내가 대통령이 되면 저렇게 하겠습니다. 그 공약들을 보면 얼마나 멋있는지 몰라요. 공약들만 보면 정말 좋은 공약들이 정말 많이 들어있었어서, 그래서 그 공약들만 보고 저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기만 하면 우리나라가 다 잘 될 것 같고, 우리나라가 곧 선진국으로 들어가게 될 것 같고, 곧 복지국가가 되게 될 것이고, 어린아이들 교육하는 데 아무런 문제도 없을 것 같고, 내가 늙어도 전혀 진료 때문에 의료 때문에 문제 겪고 있지 않는, 그런 선진국에 살게 될 것이라고 하는 그런 장밋빛 소망을 갖게 만들었던 것이 그때 대통령 선거를 하면서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었던 생각이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그 당시에 대구에 있으면서 한 번은 택시를 탔는데 택시 운전사가 뭐라고 이야기를 하냐면, 자연스럽게 대통령 선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택시 운전사가 했던 말이 기억이 아주 생생하고 재미있게 기억이 납니다. 경상도 그 택시 운전사가 하는 말씀이 뭐라고 얘기하냐면, 다 대통령 시켰으면 좋겠대요. 박근혜 문재인 이정희 할 것 없이 세 명 다 대통령 시켰으면 좋겠다. 공약들을 보니까 너무나 다 좋기 때문에 다 시켰으면 좋겠다. 누가 나와도 우리나라는 잘 살 것 같다고 하는 그런 이야기를 하는데, 그 말속에 뼈가 들어 있었어요. 아니나 다를까, 몇 년이 지난 지금 놀랍게도 우리 대한민국 대부분의 사람들이 실망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려오라고 아우성을 지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게 오늘날의 문제만이 아니라, 지금까지 우리가 겪어온 지금까지 우리의 경험이 그게 아닌가 싶습니다. 저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우리를 잘 살게 해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면 4대강이니 자원외교니 하면서 나라를 망쳐 먹고, 국고를 고갈시켜 버리고, 박근혜 대통령이 되면 무엇인가 좋을 줄 알았는데, 결국은 모든 사람들이 실망에 빠져버리는 그런 현재의 모습을 보면서, 이것이 바로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가 아닌가? 이스라엘 민족은 지금 왕을 세워달라고 요구하면서, 왕만 세워주면 우리나라도 다른 민족처럼 그렇게 강대국이 될 수 있는, 있을 것이고, 우리나라도 좀 괜찮아질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제발 왕을 좀 우리에게 세워달라고 요구하고 있는데, 그럼 왕을 세워달라고 하는 이스라엘 민족을 향해서 하나님께서 해 주시는 말씀이 무엇이냐면, 왕을 세우게 되면 좋은 결과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 왕이 너희들의 아들 딸들을 종으로 삼을 그 왕이 너희들의 물건을 10분의 1씩 세금으로 걷어갈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죠.

어쩌면 이게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라고 말할 수 있겠는데요. 우리가 이 세상에 소망을 두면, 그 소망이 우리를 만족시켜주는 것이 아니라, 항상 우리로 하여금 절망하게 만듭니다.

아담과 하와가 그랬잖아요. 하와는 선악과를 바라보면서 사탄의 유혹을 받습니다. 사탄의 유혹이 무엇입니까? 네가 만일 저 선악과를 먹으면 그러면 내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처럼 될 것이다. 그 이야기에 솔깃해 선악과를 먹으면 정말 좋을 것 같다. 저것만 먹으면 내 문제가 다 해결이 되고, 저 선악과만 먹으면 내가 하나님과 같은 높은 위치로 올라갈 거라고 생각을 했어요. 근데 선악과를 먹고 나니 결국 하나님과 같이 된 것이 아니라, 그 결과는 비참해졌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의 단절 죽음 에덴동산으로부터 축출당하는 그런 비참한 결과, 장미빛 선악과(공약)를 바라보면서 그걸 먹으면 살 줄 알았는데, 결국에는 멸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 우리 조상들이 선택했던 그 문제였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오늘날 우리들의 문제는 돈에 소망을 겁니다. 돈이라고 하는 것이 너무나도 좋아요. 돈이 있으면 문제들이 해결될 것 같고, 돈이 있으면 떵떵거리며 살 수 있을 것이고, 돈만 내 손에 집어넣으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돈만 있으면 좋겠다고 소망을 그 돈에 두는데, 그런데 그 돈을 얻기 위해서 결국 우리가 지불했던 대가가 무엇입니까? 돈을 얻기 위해서 결국 비참한 삶을 살게 된 것이고, 내 건강 다 잃어버리게 된 것이고, 돈을 얻기 위해서 가정이 깨어지고, 가족이 해체되고,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멸망의 길로 가고 있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왕이 없었던 민족인데, 그 왕만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정말로 좋았는가 하나님께서는 미리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날에 너희는 너희가 택한 왕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되, 그날에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응답하지 아니하리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소망을 어디에 둘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이 세상의 것들에 우리의 소망을 둘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 소망을 두어야 합니까?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시편 146편 3절 말씀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인생을 의지하지 말지니.” 사람을 믿으면 어떻게 될 것인가? 100프로 실망할 것이에요. 사람을 믿으면, 저 사람이 나의 구세준가? 저 사람이 나에게 희망을 줄 것인가? 하고 그 사람을 믿으면, 괜찮을 줄 알았는데, 성경의 가르침은 무엇이냐면,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이것은 단순히 대통령에 대한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에 대한 이야기이고, 그래서 우리 교인들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목사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는 항상 좋은 사람만 만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거라고 하는 잘못된 망상 속에 살아갑니다. 우리의 생각이 뭐예요?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이 뭡니까? 좋은 사람만 있으면 해결될 거 아닙니까? 좋은 사람만 있으면 되겠다고 하는 거짓된 망상 속에서, 우리가 살아갑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는 결혼만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 결혼을 한다는 것은 아주 인생의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신중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신중하다고 하는 것은 정말로 중요한 것이고, 아주 바람직한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런데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잘못된 망상이 들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면 좋은 신랑감만 찾으면, 결혼 생활은 행복할 거라고 하는 착각이죠. 좋은 아내만 만나면 행복할 거라고 하는 착각입니다. 좋은 남편이 있던가요? 좋은 아내가 있던가요? 좋은 남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좋은 신랑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아직 미완성이고 연약하고 모든 것이 부족한 한 남자와 모든 것이 부족하고 연약하고 아직 미숙한 한 여성이 만나서 결혼을 하는 게 그게 결혼이에요.

완벽한 배우자를 찾지 마세요. 완벽한 배우자를 찾기 때문에 결혼을 못하는 거예요. 옛날에 어떤 노처녀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그래요. 자기가 결혼하고 싶었는데 자기가 결혼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그 사람들이 항상 유부남이었기 때문에 결혼을 못 했다는 겁니다. 저 남자 참 좋네 하면, 유부남. 저 남자 참 좋네 하면, 유부남. 그래서 결혼을 못 했다는 거에요. 그런데 나중에 그 노처녀가 나중에 고백하는 말이 뭐라고 고백하냐면, 나는 왜 그렇게 유부남만 좋아했었나 했더니, 알고 보니까 그 사람은 결혼을 했기 때문에 부족한 남자가 결혼을 해서 그래서 인격적으로 점점 성숙해지고 해서, 그래서 좋은 사람이 된 거지. 결혼하기 전에는 연약하고 부족한 사람이었다고 하는 사실을 몰랐다는 거에요. 결혼은 좋은 사람을 만나서 결혼하는 게 좋은 결혼이 아니라, 아직도 연약하고 부족하고 모든 게 미숙한 한 남자와 아직도 부족하고 연약하고 모든 것이 어설픈 한 여자가 만나서 두 사람이 서로 아웅다웅하면서 싸우면서 성격 차이 때문에 서로 조율해 가면서 다투면서 그러면서 점점점점 인격이 성숙해져 나가는 게, 그게 인생이고 그게 결혼 아닙니까? 아이를 낳아서 기르는데 완벽한 부모이기 때문에, 그 아이를 기르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모르고 젖을 어떻게 먹여야 되는지, 이 아이에게 어떻게 교육을 시켜야 되는지, 아무것도 모르는 철 모르는 부모가 아이들을 기르면서, 그 아이를 기르는 과정 가운데서, 내 인격이 성숙하고 인내심이 생기고 신앙이 더 커가는 그런 성숙의 과정을 걸어가는 것이 그것이 인생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가 있는데, 안타깝게도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은 완벽한 100퍼센트 흠도 없는 배우자를 찾다가 결국 찾지 못하는 경우가 교회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는 완벽한 교회를 찾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완벽한 교회를 간다고 한다면, 그래서 그 교회에 가면 내가 신앙생활 잘할 것만 같아요. 지금 내가 다니고 있는 교회에는 꼴 같지 않은 그런 사람들도 있고, 결국 여러 가지 불합리한 모습 이기적인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되면서, 교회에서 함께 신앙생활하면서 상처를 받고 고통을 당하면서, 이 교회는 정말 안 된 교회다. 이 교회는 정말 내가 다닐 수 없다라고 포기하면서, 더 나은 교회를 찾으려고 하는 그런 마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완벽한 교회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전에 스펄전 목사님이 한 번은 어떤 청년과 이야기를 했는데, 그 청년이 스펄전 목사님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그래요. 목사님, 지금 내가 다니는 교회에서 내가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 교회 성도님들 내가 다니는 이 교회 성도님들은 너무나도 이기적이고 사람들에게 상처를 너무나 많이 주고, 그래서 내가 이 교회를 도무지 다닐 수가 없습니다. 목사님 좀 사랑이 넘치고 그리고 따뜻하고 정말 아름다운 교회 어디 없을까요? 목사님은 그래도 유명한 부흥사니까, 영국 여기저기를 다니면서 수많은 교회를 보시지 않았습니까? 그 교회 중에서 제일 좋은 교회, 추천할 만한 교회, 사랑이 넘치는 교회, 정말 멋있는 교회, 아름다운 교회 소개해 주시면, 제가 그 교회 다니겠습니다. 제발 그 교회 좀 하나 소개시켜 주십시오. 그랬더니 스펄전 목사님이 그 청년 앞에서 고민고민하면서 머뭇거리다가 입을 뗐습니다.

“여보게. 청년. 내가 지금까지 부흥회를 하고, 집회를 다니면서 영국에 있는 모든 교회를 대부분 다 다녀보고, 그 교회를 다 살펴봤는데, 유감스럽게도 아직까지 내가 볼 때 아무 문제없고 사랑이 넘치고 따뜻한 교회는 단 한 교회도 발견하지 못했다네. 내가 간 교회마다 다 문제 투성이고, 거기에 문제의 교인들이 있고, 여러 가지 시기와 질투와 그리고 갈등들이 있는 교회들 뿐이었지, 그렇게 좋은 교회 찾지 못했다네. 미안하네. 내가 좋은 교회 추천해줄 수가 없어서 정말 미안하네.” 이 청년이 대단히 실망을 했습니다.

그러자 스펄전 목사님이 이야기를 합니다. “여보게. 청년. 자네가 한번 찾아보게나. 자네가 여기저기 다니면서, 정말 좋은 교회 있으면 한번 찾아보게. 그리고 그 교회가 어디인지 발견하게 되면 나에게 알려주게.” 그러자 그 청년이 목사님에게 이야기합니다. “목사님, 알겠습니다. 스펄전 목사님. 제가 한번 이 교회 저 교회 다니면서 정말 좋은 교회를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그러면 제가 스펄전 목사님에게 와서 이야기하겠습니다.”

그러면서 그 청년이 떠나려고 하는 그 찰나에, 목사님이 그 청년에게 이야기하기 다시 말을 걸었습니다. “여보게. 청년. 잠깐만. 그런데 한가지 부탁이 있네.” “무슨 부탁입니까?” “만일 자네가 영국을 돌아다니면서, 정말 사랑이 넘치고 따뜻하고, 정말 좋은 교회를 발견하거들랑, 제발 그 교회에는 절대로 가지 말게.” 깜짝 놀라서 그 청년이 물었습니다. “아니, 목사님. 제가 그런 교회를 찾고 있는데, 그런 교회에 가지 말라요. 무슨 말입니까? 저는 그런 교회를 다니고 싶습니다.” “여보게. 만일 그렇게 좋은 교회에 자네가 들어가는 그 순간, 나쁜 교회가 되는 거야. 절대 가지 마.”

예수비전교회는 이제 새로운 담임 목사님을 모시려고 하는 단계에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마음속에는 새로운 목사님 오실 때, 가장 좋은 목사님 가장 훌륭한 목사님만 오신다면 괜찮아지겠지, 기대하고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미리 말씀드리는데요. 이 세상에 좋은 목사님은 없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목사님들은 모두가 다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가 없으면, 멸망당할 죄인들 뿐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에 은혜가 없다고 한다면, 다 멸망의 자식일 수밖에 없는 연약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바라보고 사람을 의지하고 사람을 믿는 그 순간 우리는 100퍼센트 실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 혼란은 한국사회의 이런 현상은 바로 그러한 사실을 분명하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성경의 가르침은 무엇입니까? 성경의 가르침은 우리의 소망을 어디에 두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 시편 146편 5절 말씀에 “여호와 자기 하나님을, 하나님을,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믿습니까? 우리의 소망은 사람에 대한 소망이 아니고, 건물에 대한 소망이 아니고,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실력과 능력에 대한 소망이 아니고, 오로지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하나님에게만 우리의 소망을 두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하는 것은 그러니까 모든 걸 다 내버려야 된다고 하는 말씀은 아닙니다. 모든 것을 다 배격하라고 하는 말씀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면서도. 병을 낳기 위해서 의사와 병원을 이용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철저히 신뢰하면서도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밥을 먹어야 하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면서도 무슨 일을 이루기 위해서 사람들과 협력하고 무엇인가를 협력하면서 일을 이루어야 하는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하는 것은 모든 것을 다 버려야 한다고 하는 말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기 때문에 내가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서 공부 하나도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열심히 공부해야 되는 것이고,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기 때문에 일을 안 해도 먹고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열심히 일을 해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하는 것은 모든 것을 배격하라고 하는 그런 말씀은 아닙니다.

좋은 목사님도 찾아야 할 것이고, 좋은 신랑감도 찾아야 할 것이고, 여러 가지 좋은 것들을 찾는 것 당연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소망이 하나님에게 있는가? 사람에게 있는가? 우리의 의지가 하나님에게 있는가? 사람에게 있는가는 완전히 다를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왕의 제도를 설명하면서, 왕을 세우면 이런 단점 이런 부작용이 있을 거라고 말씀하시면서 경고하시면서도, 하나님께서 왕을 세우는 것을 금한 것이 아니라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걸 보면서 사람들은 질문을 던질 겁니다. 아니, 왕의 제도의 나쁜 점들을 이야기하면서, 왜 하나님께서는 왕을 세우도록 허락하십니까? 나쁜 거라고 한다면 세우지 못하게 만들어야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는 허락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과 왕을 세우는 것이 상반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왕을 세우기는 하지만, 이스라엘 민족의 왕을 세우기는 하지만, 우리가 왕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볼 수만 있다면, 왕을 세우지만 그 왕이 우리를 먹여 살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 애를 먹여 살리는 것이라고 하는 사람, 그런 믿음의 고백을 할 수만 있다고 한다면, 그 왕은 축복의 도구가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어느 순간에, 하나님은 온전히 잊어버리고, 왕을 우리의 소망으로 삼거나, 물질이나 내 능력을 우리의 소망으로 삼는 그 순간에, 우리의 문제가 완전히 잘못되어 가게 될 수만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우리 인류는 언제나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는 하나님이 아닌 것들을 우리들의 우상으로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가를 의지했고,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 대신에 우상을 섬겼고, 하나님 대신에 물질을 섬겼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보다는 애굽을 의지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을 선택하기보다는 인간 왕을 선택한 이스라엘 민족의 결과는 아주 비참했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소망이 있다고 한다면, 사람에게 소망을 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참되신 왕이신 하나님 앞에 우리가 소망을 두는 것 밖에는 우리에게 다른 소망이 없다고 하는 사실을 믿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2월은 성탄의 계절입니다. 성탄은 만왕의 왕되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아기의 모습으로 오신 것을 기념하는 것이 성탄절입니다. 기독교 전통은 오래된 기독교의 전통은 성탄절을 앞둔 한 달 동안 정도의 기간을 가리켜서 대강절이라고 합니다. 대강절은 대강대강 지내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강림을 기대하면서 기다리라고 하는 것이 바로 대강절인데, 저는 지난주에 미국에 갔을 때 미국 교회에 참석했는데, 미국 교회에서 대강절 첫 번째 주일을 지내면서 나뭇잎으로 만든 동그란 원에 촛대가 꽂혀져 있는 여러 개의 촛대가 꽂혀져 있는 그 촛대에, 첫 번째 촛대에 촛불을 켜는 것으로 대강절 그런 세레모니를 하는 모습을 봤습니다. 그 의미가 무엇이냐면 초록색 나뭇잎으로 엮은 동그란 원인은 하나님의 변함없는 끊임없는 인류에 대한 사랑을 나타내고, 끊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고, 그리고 그 촛대들은 어둠 가운데 오신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상징하는 것인데, 한 주 한 주 지나면서 촛대에 불을 켜면서, 예수님이 오신 성탄절을 기념하는 그 모습 가운데 첫 번째 촛대를 켜는 것을 봤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누구로 오셨는가? 만왕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이사야서 9장 6절 말씀에 보면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이니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만왕의 왕으로 오셨는데, 이 세상의 왕, 이 세상의 권력자는 우리들에게 실망을 주지만, 참된 왕이신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오셔서 참된 평화와 위로를 주시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 위해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 위에서 피 흘려 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저는 지난주에 미국에 있는 두 딸 아이를 만나러 갔다 왔는데, 큰 딸 아이는 27, 28 나이가 되고, 두 번째 아이는 23살 정도 되는데, 미국 나이랑 한국 나이랑 좀 헷갈려서 그래요. 그 아이가 있는 사는 곳에 가보니, 한숨이 나오는 거에요. 우리 둘째 아이는 지금 어느 한 집에 자취생 한 대여섯명이 함께 살고 있는 거예요. 방 하나하나에 대학생들 자취생들이 모여 살아서, 함께 살고 있는데, 화장실을 하나 공룡으로 쓰고 있는 그런 상태인데, 방 안에 갔더니, 고양이 털이 날리고, 화장실은 먼지로 가득 떼가 가득 차 있고, 엉망 신청. 그 딸아이를 방문하러 이번에 처음, 사는 곳을 이사 간 이후로 처음 가봤는데, 대학생 아이들이니 청소를 제대로 할 수 있습니까? 미국 아이들은 공부하면서 평생 학교 청소를 하지 않습니다. 우리 한국과는 달리. 그러니까 청소를 배워보지 못한 이 아이들이 엉망 칭찬으로 살고 있는 그 모습을 본 제 아내가 도착하자마자 허리를 졸라매고 청소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청소를 하면서 그 화장실을 깨끗이 닦아내는데, 우리 아이가 말하면 엄마 이거 여러 명이 쓰는 건데 우리가 청소할 필요 없다고 하는데, 엄마의 마음은 그게 아닌 것 같아요. 반짝반짝반짝 윤기가 나게, 허리가 아픈데도 힘들어 하면서도, 그렇게 막 하고 그리고 방도 막 고양이들 다 털어내고 하면서 가서 쉬고 온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치우고 청소하느라고 막 너무나도 힘들었는데, 그때 제 아내가 “내가 이러려고, 배 아프고 딸 나서 엄마가 되었나 자괴감이 들고 괴롭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몸은 힘든데 행복한 거에요.

그게 엄마의 마음 같아요. 그런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엉망진창인 우리들의 모습을 보시고, 만왕의 왕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죄악 가운데 온갖 더러운 모습을 가지고 사는 우리.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아서 깨어진 가정 갈등이 있고, 재정적 문제가 있고, 건강에 문제가 있고, 소외의 문제가 있고, 여러 가지 문제들이 가득한 우리들의 모습. 그 모든 문제가 바로 우리들이 지은 죄의 문제 때문에 이 모든 것들이 비롯될 수밖에 없었는데, 우리 주님께서 그 모습을 보시고 그냥 외면한 것이 아니라, 저 높고 높은 그 보좌를 버리시고, 영화롭고 아름다운 하나님의 우편의 자리에서 이 땅 위에 내려오셔서,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엉망진창된 우리들의 모습을 고치시고 구원해 주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소망을 주님에게 두어야 되는 이유는 예수님은 이 세상의 왕들과 같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를 착취하고 재벌들의 돈을 뜯어가는 권력자가 아니라, 애국애국 입을 이야기하면서 자기 뱃속만 채우는 권력자들이 아니라, 우리들을 사랑하시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평화의 왕으로 오신 것이 바로 성탄절 크리스마스입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12월 성탄절을 앞에 두고, 어떤 성탄절을 기다리고 계십니까? 이 성탄의 계절에 우리의 소망을 더더욱 하나님에게만 두고 만왕의 왕 되신 주님 앞에만 두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문제가 있다고 한다면 주님 앞에 나아가시고 엉망이 되어버린 우리들의 모습을 괜찮다 하시고 우리들의 모습에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십자가 위에서 모든 것을 내어주신 주님 앞에 나아가서 우리의 소망을 두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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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의 기도와 믿음 (삼상 1:9-18)

잘 아는 것처럼 한나라고 하는 여인에게는 자식이 없었습니다. 그로 인하여 엄청난 고난을 당했고 정말 슬픔과 고통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한나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한나가 마음이 괴로웠을 때에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고 통곡하였다고 하는 점을 주목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한나는 이전에 누구를 향해서 원망을 했습니까? 자신의 남편을 향해서 원망을 했습니다. 내게도 아들을 달라고 이야기했고, 사람을 향해서 원망했지만, 사람을 향해서 했던 그 모든 불평과 원망은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죠.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여러 가지 힘들고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해결할 수 없는 허망한 것들을 향해서 원망하기도 하고 불평하기도 하고 또 소망을 말해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할 것이 있다고 한다면, 이 세상에 그 어느 것도 우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으며, 우리가 나아갈 대상은 오직 하나님께만 나아가는 것밖에는 우리에게 다른 소망이 없다고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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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 시간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러 나왔는데, 우리가 기도할 때 이 자리에 나와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무엇보다도 하나님 앞에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사람들을 바라보고서가 아니라, 사람들의 시선이 의식되어서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 앞에 토로하고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놀라운 은혜를 우리 가운데 허락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한나는 하나님 앞에 슬픔 가운데서 하나님 앞에 서원하기도 하고 간절하게 기도하며 엎드렸는데요. 그때 엘리 제사장은 이 한나의 모습을 보면서 마치 취한 여자처럼 생각이 되어서 그를 꾸중하였지만, 그러나 이 여인이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한다고 하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엘리 제사장은 평안을 빌며 축복하고 돌아가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하나가 엘리 제사장의 이야기를 들은 다음에 이렇게 반응했습니다. 18절 말씀에 보니까, “이르되 당신의 여종이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이다 하고,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근신 빛이 없더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엘리 제사장이 했던 이 말은 하나님의 응답이었을까요? 우리는 사무엘상을 읽으면서 정말 이 한나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셨고, 그래서 이 한나가 사무엘을 낳게 되는 엄청난 기적을 체험했다고 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엘리 제사장의 이 말이 한나의 마음에 기쁨과 평안함과 안식을 주었던 것일까요? 기도할 때 이 한나는 정말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아들을 주신다고 하는 사실을 기도하면서 확신하고 전혀 의심하지 않고 믿고 기도했던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인가요?

성경 말씀 야고보서 1장 6절에서부터 8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을 우리가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실 거라고 하는 사실을 확실하게 믿어야 된다고 하는 그런 의미일까요? 기도하다가 조금이라도 의심이 들거나 조금이라도 불안한 마음이 들면 안 된다고 하는 그런 말씀일까요?

사실 그렇게 하기는 너무나도 어렵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다 보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서 현실이 보이면서, 이러다가 망하는 것 아닐까? 이러다가 아무런 해결책이 없게 되는 것이 아닐까? 이러다가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을 만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엎드리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고 우리의 생각과는 정반대의 길로 인도하실 수도 있을 거라고 하는 불안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찌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한나는 얼마나 마음을 잘 먹었기 때문에 그런 불안한 마음이 하나도 없었던 것일까요? 그렇다기보다는 이 한나가 가서 근심하지 않고 편안한 가운데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아들을 주신다고 하는 그런 믿음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아버지 되신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에 대한 믿음에서 이런 반응이 나왔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기도에 응답을 해주실 때 우리가 원하는 방식대로 그대로 다 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구하라. 그러면 주실 것이오.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오.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문을 열릴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지만, 그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기도를 주저하지 말고 “내게 알려라.” “내가 응답하겠고, 내가 들어줄 마음이 있다”고 하는 것을 밝혀주시는 말씀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응답은 항상 우리가 원하는 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가장 선한 길로, 우리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완전히 달라서, 마치 하늘이 땅에서부터 멀고, 정말 이 세상의 끝 끝이 서로 먼 것처럼,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들의 생각보다 훨씬 더 커서, 우리의 알량한 머리로 우리의 조그마한 생각으로는 이게 최선처럼 생각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보다 훨씬 더 우리를 더 잘 아시는 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좋은 길을 허락해 주시는 것이죠.

저도 여러 가지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 앞에 왔습니다마는 하나님께서 제가 원하는 방식대로 기도에 응답해 주시지 않은 적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꼭 이것은 합격했으면 좋겠는데, 합격이 안 되는 경우가 있었고요. 이것은 반드시 패스를 했으면 좋겠는데, 패스가 안 되는 경우가 있었고,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 경우가 있었고, 우리의 기도와는 정반대로 흘러가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돌아와서 생각해 보면, 그때 하나님께서 내 기도에 응답지 아니하시고 우리의 인생을 다른 방향으로 틀어주신 것이 그것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였고, 그것 때문에 내가 더 영적으로 성숙할 수 있게 되었고, 그것 때문에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갈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얻게 되었던, 그런 경험들을 우리가 생각해 볼 때에, 우리가 확실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께서는 선하신 하나님이시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패망시키려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방법으로 응답해 주시든지 간에 선하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거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믿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야고보서 1장의 말씀은 그러니까 우리가 기도한 대로 응답될 것을 믿으라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이 선하신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사실을 확신하는 가운데, 주님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리지 말고 기도해야 한다고 하는 그런 의미인 것이고, 오늘 한나는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나에게 가장 좋은 길로 어떠한 방법으로 응답해 주시든지 간에, 하나님은 나를 위하여서 엄청난 은혜의 길을 베풀어주실 거라고 하는 사실을 믿게 될 때에, 한나는 돌아가서 기쁨과 감사로 지낼 수가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물론 이 한나에게는 하나님께서 한나가 원하는 대로 응답해 주시고 기도해 주심으로 말미암아, 정말 하나님을 향해서 찬양하고 기뻐하고 감사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오늘 이 저녁 시간에 우리도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나아갈 때,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면서 주님 앞에 엎드릴 수 있는 귀하고 복된 시간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 우리가 원하는 것을 아르고 토로하면서 기도하는 가운데, 그러나 우리의 생각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고,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그 놀라운 역사들을 우리가 기대하면서, 하나님께서 어떤 선하고 좋은 길로 인도해 주실지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는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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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의 뒤틀린 영성 (삼상 18:10-16)

천천과 만만 (삼상 18:6-9) +++ 치밀하게 계산된 음모 (삼상 18:17-30)

오늘 본문의 말씀에는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첫 번째 시도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사울의 그 영혼을 달래기 위해 하나님께서 부르신 악령이 사울을 지배하고 있을 때, 다윗은 악기를 연주하면서 그의 마음을 달래고 평화롭게 하기 위해서 그를 위해서 악기를 연주했지만, 그 순간에 사울 왕은 자신의 손에 들고 있던 창을 다윗에게 던져서 그래서 다윗을 벽에 박으려고 하는 그런 시도를 했는데, 두 번씩이나 창을 던졌지만 다윗은 그 창에 맞아 죽은 것이 아니라, 두 번씩이나 피하게 된 이야기가 오늘 본문의 말씀에 기록돼 있습니다.

앞으로 계속해서 이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시도가 여러 번 등장하게 될 텐데요. 그 가운데 오늘은 첫 번째 시도로서, 이 사울 왕이 어떤 계획과 어떤 모략을 세워가면서, 다윗을 죽이려고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눈앞에 보이는 그 다윗을 향해서 즉흥적으로 그 다윗을 향해서 창을 던진 모습이 기록돼 있는 겁니다.

다윗이 수금을 타고 있을 때 악령이 그 사울 왕의 마음을 충동질해서 광기가 일어나게 되었고,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 창을 던졌는데, 그 창에 다윗이 맞아 죽은 것이 아니라, 다행히도 피하게 되었다고 오늘 두 번씩이나 피하게 되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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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오늘 이 본문의 말씀을 읽어보면 아주 특이한 표현이 하나 등장합니다. 그 특이한 표현이 무엇이냐면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악령이라고 하는 표현이 아주 특이합니다. 악령이 있는데요. 그 악령이 어떻게 활동하는가? 악령이 어떻게 악한 일을 하는가 하는 그것을 묘사할 때 다시 말하자면 그 악령이 사울을 충동질해서 그래서 다윗을 죽이게 만들었는 죽이려고 시도하게 됐는데, 그 악령이 어떻게 움직이는가? 오늘 사무엘상에서는 뭐라고 표현하냐면,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악령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표현을 가만히 읽어보면 우리가 오해하기가 쉽습니다. 하나님께서 악령을 부리시다니, 하나님께서 선하고 좋으신 일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악령을 부리셔서 악한 일을 하게 하는, 그 악령을 하나님께서 지시하시고 통치하시고 다스리고, 하나님께서 그 악령을 사용하셔서 그 악령이 무엇인가 악한 일을 하게 한다고 하는 이 표현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혼란을 일으키기에 충분한 표현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이 세상에서 발생하는 모든 죄와 악에 대한 궁극적인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가?”라고 하는 그 질문 앞에서,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발생하고 있는 모든 악과 죄와 나쁜 모든 일에 대한 그 책임이 궁극적으로 그 책임을 지고 있는, 최고의 책임권자에게로 올라가고 올라가다 보면, 결국 하나님께서 그 일을 하게 했기 때문에, 악한 일이 발생하고, 나쁜 짓이 발생하는 것이고, 죄가 발생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고 한다면 이 모든 죄와 악에 대한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가? “하나님에게 있지 않겠느냐?”라고 하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한 표현이 바로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악령이라고 하는 표현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은 성경 전체의 가르침에서는 하나님은 어떤 분으로 묘사하고 있냐면, 하나님은 악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선하신 하나님이시오. 하나님은 의로우신 하나님이라고 성경 전체에서 가르치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좋으신 하나님, 선하신 하나님, 아무런 흠도 오점도 없으신 완벽하신 하나님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신데,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그 악령을 부리신다고 하는 오해할 만한 그런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그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그것은 심지어 악령이라고 할지라도, 그 악령이 하나님의 통제권 밖에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굴복을 해야 하고, 하나님께서 최고의 통치자이신데, 결국 사탄도 마음대로 하나님과 상관없이 마음껏 무한대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 사탄이 아니라, 사탄이 무한대의 권력을 가지고, 무한정 악한 일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사탄 또는 악령이 아니라, 결국은 하나님의 그 권위 아래서 하나님의 권세 아래에서 제한적으로만 움직이고 있는 그런 존재라고 하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성경에서는 종종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악령이라고 하는 표현을 쓰는 겁니다.

마치 이것은 의사가 환자들에게 사람들에게 백신이라고 하는 주사를 주는데, 의사가 우리 몸에 백신이라고 하는 주사를 줄 때, 이 백신이 무엇이냐면, 바로 바이러스입니다. 온갖 바이러스를 약하게 만들어서 우리들의 몸에 주사하게 되는데요. 독감 백신을 맞는다고 하는 것은 무슨 특별한 약을 맞는 것이 아니라, 독감 바이러스를 약하게 만들어서 우리들의 몸에 넣어주는 겁니다. 또 여러 가지 무슨 백신들이 있겠습니까? 여러 가지 심각한 병들에 대한 그 백신들을 의사들이 우리들의 몸속에 집어넣어 주는데, 왜 의사가 우리들의 몸에 이런 바이러스를 집어넣어 주는가? 그 의사가 바이러스를 우리들의 몸에 넣어주는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그 바이러스에 걸려서 우리로 하여금 죽게 만들려고 병에 걸리게 하려고 바이러스를 주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 바이러스를 약화시키고, 우리의 몸에 면역력이 생기게 만들고 우리의 백혈구가 싸워서 이기는 그런 훈련을 하게 함으로 말미암아 그런 질병에 걸리지 않도록 바이러스를 약화시켜서, 의사의 컨트롤 속에서 우리들의 몸에 바이러스를 집어넣는 것이 백신인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결국 이 악력마저도 사용하시는데, 하나님의 통치 안에서 사용하시는데, 어떻게 사용하시는가? 그 악령이 마음껏 모든 일을 다 할 수 있도록 방치해 두시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하나님께서 연단시키시고 우리를 훈련시키시고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게 만드시는 그 방법으로 악령을 제한적으로 사용하신다고 하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하여, 오늘 성경 말씀에서는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악령이라고 하는 표현을 쓰고 있는 줄로 믿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표현을 볼 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만나는 그 어떤 것들도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들이 우연히 어쩌다 보니까 재수 없어서 나에게 발생하는 것이 아니에요. 내가 만나는 그 고통과 아픔 내 인생의 길 가운데에서 다가오는 그 수많은 장애물들, 그리고 내 마음에는 이쪽으로 진행됐으면 좋겠지만 이 길이 막혀버리고 엉뚱한 곳이 열리게 되는 그런 수많은 일들을 만나게 될 때,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는 불안한 마음이 들 때가 많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내 인생을 돌아보지 아니하시고, 왜 내 기도에 응답해 주시지 아니하고, 왜 나로 하여금 이렇게 힘들고 어려운 길을 가게 하시는가? 왜 나로 하여금 이렇게 어려운 일들을 만나게 해 주시는가? 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있는데,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발견해야 될 진리가 있다고 한다면, 그 모든 것들을 두려워하거나 겁낼 것이 아니라, 사실은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통제 아래 있으며, 결국은 이 모든 걸 통해서 우리의 생명을 앗아가버리고 우리를 영원히 파멸로 이끌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것을 우리에게 허락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이 모든 것들을 통하여 모든 것들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저와 여러분들이 담대하게 믿음으로 승리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 옛날 요셉의 삶을 본다고 한다면, 요셉에게는 어마어마한 충격적인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형을 형들을 면회하러 갔다가 형들을 위문하러 갔다가 형들이 자신을 죽이려고 시도했고, 그리고 자신을 미대한 상인들에게 팔아버리는 그런 너무나도 끔찍한 일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노예로 살아가야만 했었고, 보디발의 집에서 노예로 살다가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되었는데, 주인 마님을 강간하려고 했다고 하는 강간 미수범이라고 하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힙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이 요셉을 완전히 박살내 버리고, 이 요셉을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도록 망하게 하기 위해서, 이 모든 일들을 일어나게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악인도 적당하게 적당하게 만드셨다고 하는 악한 날에 적당하게 만드셨다고 하는 그 말씀처럼,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재료들을 좋은 일들 뿐만 아니라, 악한 일 나쁜 일들도 사용하셔서, 우리들의 앞길을 인도하시고, 결국에는 모든 것이 합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계획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담대하게 믿음으로서는 우리 모두가 다 둘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그 고난의 한가운데 있을 때는 이해를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어쩌면 오늘 다윗이 갑자기 자신을 향해서 창을 던지는 그 사울왕의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을는지도 모릅니다. 자기는 지금 골리앗을 무찔렀고, 사울 왕의 명령에 따라 순종했고,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한 이스라엘 민족의 영웅인데, 그런데 자기가 칭찬을 받아야 하고, 그리고 정말 대접을 받아야 될 사람이라고 생각을 했었을 텐데, 어느 날 갑자기 사울이 자기를 향해서 창을 꽂아 놓는 그 어마어마한 충격적인 사건을 만났을 때, 그때 이 다윗의 마음에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그 순간에 좌절하고 충격을 받을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금 미래의 일은 알지 못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떨어질 수 없다고 하는 그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시는 것이라고 한다면 결국은 모든 것이 합하여 선을 이룰 것이라고 하는 그 담대한 믿음을 가지고 믿음으로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이미 앞에서 살펴보았지만 사무엘상 16장을 읽어보면 다윗은 수금을 탈 때 사울왕에게 있었던 그 악령이 떠나간 적이 있었습니다. 다윗이 수금을 타고 악기를 연주할 때, 사울의 그 악령에 사로잡혔던 그 사울의 마음이 누그러지고 마음의 평화가 찾아오고, 다윗의 그 음악을 들으면서 다시 제정신으로 돌아오게 되는 그런 일들이 예전에 있었습니다. 그게 사무엘상 16장의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사울왕이 악령이 들렸을 때 다윗이 가서 그 사울 앞에서 음악을 켜는 겁니다. 수금을 켜는 겁니다. 예전에 그 수금을 켜면서 사울에게서 그 악령이 떠나갔던 것처럼 이번에도 사울의 그 마음에 자리 잡고 있는 그 악령이 쫓아가기를 원하면서, 다윗이 그 음악을 연주를 했는데, 이번에는 그 음악을 듣고 사울의 정신이 되돌아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심해졌어요. 그 순간에 사울은 창을 빼들고, 다윗을 향해서 던져버렸는데, 이제는 다윗의 음악도 사울에게 아무런 소용이 없는 상태가 되어버린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도대체 어떤 일이 일어났기 때문에,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되었을까요?

예전에는 다윗이 연주를 하면, 다 사울 왕의 마음이 차분해지고 누그러뜨려 지고 악령이 떠나가는 그런 놀라운 기적이 있었는데, 왜 사무엘상 18장에서 다윗이 연주했을 때는 그 마음에서 악령이 떠나가는 일이 발생하지 않고, 오히려 더 다윗을 향해서 창을 던진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성경은 그 이후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우리가 추측한다고 하면 그것은 사울의 마음 가운데 다윗을 향한 시기와 질투 미움과 증오가 사울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예전에는 그런 사울의 마음 가운데 다윗을 향한 그런 시기와 증오 이러한 마음들이 없었을 거예요. 그냥 어떤 한 청년이 와서 연주를 해줄 때, 그가 그 다윗의 음악에 귀를 기울이고 그리고 그 음악에 따라서, 그래서 자신의 마음 가운데 악령이 떠나가는 신비한 기적들을 체험할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사울 왕의 마음이 시기와 질투와 미움과 증오가 가득, 다윗이 연주하는 그 모습을 보면서 다윗을 다윗으로 바라본 것이 아니라 저놈이 살아 있으면 내 왕위가 위태할 것이고, 결국은 내가 쫓겨나게 될 것이고, 저놈을 없애야 되겠다고 하는 그 증오의 마음이 사울의 마음 가운데 가득 차 있을 때, 결국 다윗이 수금을 탔지만, 그 수금의 소리가 아무런 도움도 혜택도 줄 수가 없었던 것, 아무런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러한 사울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예수님의 비유가 생각이 납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를 해 주실 때 밭의 비유를 해 주셨습니다. 농부가 나가서 씨를 뿌렸는데, 어떤 씨는 길가에 떨어지고 어떤 씨는 돌짝밭에 떨어지고, 어떤 씨는 가시덤불 사이에, 어떤 씨는 좋은 밭에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그 씨가 어디에 떨어졌느냐에 따라서 열매를 맺지 못할 수도 있고, 열매를 맺을 수도 있습니다. 문제가 무엇이었죠?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문제가 어디에 있었습니까? 그것은 씨에 있었던 것이 아니고, 사실은 그 마음의 밭에 문제가 있었던 것을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러 나옵니다. 하나님 앞에 나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우리가 성경 말씀을 읽습니다. 묵상을 합니다. 설교를 듣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들이 우리들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몸이 건조하고 아무런 열매를 맺히지 못한다고 한다면, 그 이유는 어디에 있겠습니까? 목사가 문제지요. 물론 목사가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목사가 문제일 수 있어요. 하지만 예수님께서 오셔서 말씀을 전해주셨을 때, 목사가 아니라 완벽하신 예수님께서 오셔서 그 생생한 말씀으로 산상수훈의 말씀으로 심령을 울리는 그 말씀으로 복음을 전했을 때, 모든 사람들이 다 듣고 은혜를 받고 다 많은 열매를 맺었는가 하면, 그렇지 않고 그 가운데 세리와 죄인들은 회개하고 주님 앞에 나왔지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제사장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오히려 그 마음이 완악해져서,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예수님을 죽이려고 달려들었던 모습을 우리가 복음서에서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들을 때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나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면, “하나님, 우리들에게 들을 수 있는 귀를 허락하여 주옵소서.” “말씀을 전할 때, 말씀을 우리가 들을 때, 그 말씀이 우리들의 심령에 뿌리가 내릴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그래서 우리가 이 한 시간, 와서 주 앞에 예배드리는데, 이 예배드리는 이 시간에 들리는 이 말씀이 나를 향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게 하셔서, 이 심령 가운데서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이 일어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며 나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설교를 들으면서, 나의 죄를 발견하고 나 회개할 것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향해서 비난할 거리를 찾고, 아무런 유익이 되지 않게 그냥 흘려버리고 있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근데 그 모든 것들이 사실은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지 모릅니다. 다윗이라고 하는 위대한 소년이 아름다운 악기로 연주를 했을 때, 그 연주는 악령을 쫓아낼 만한 파워풀한 연주였는데, 사울의 마음이 시기와 질투와 증오로 가득 차 있을 때, 그 놀라운 그 음악이 사울에게 아무런 소용이 없었고, 예수님께서 오셔서 생수의 말씀을 전해주셨는데, 그 주옥같은 말씀들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던 것처럼, 오늘 저와 여러분들의 삶 가운데서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다든지, 우리가 설교 말씀을 듣는다든지, 주님 앞에 나아갈 때, 그 모든 것들이 오늘 내 마음을 움직이고 내가 결단하고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있는 그런 반응이 나타나지 않고 내 심령 가운데 아무런 느낌이 없다고 한다면, 그냥 오늘 또 재미없는 예배 그냥 그냥 드리고 가는구나 하면서 그냥 갈 게 아니고, 그 순간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며 나아가야 돼요.

“하나님, 내게 은혜를 허락하여 주옵소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엎드려 울부짖으면서, 하나님, 하나님의 말씀이 이렇게 몸이 건조한 말씀이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있고 능력 있고 운동력이 있는데, 이 말씀을 들을 때 내 마음이 아무런 감동이 없고, 그저 다른 사람들을 향한 비난만 생겨나고 시기와 질투와 증오의 생각들로 내 마음이 가득 차 있다고 한다면, 오늘 우리들의 심령을 붙들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면서 주님 내 마음을 만져주시옵소서. 옥토와 같이 갈아주셔서, 말씀을 들을 때 내 심령에 콕콕 심기고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이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며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울은 다윗을 보면서 두려워했다고, 12절과 15절 말씀 가운데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울은 왕의 위치에 있었는데, 자신의 신하였던 다윗을 보면서 두려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다윗은 골리앗을 죽인 장수였을 뿐만 아니라, 온 백성들의 그 칭찬이 자자한 인기가 너무나도 높이 올라간 사람이었기 때문에, 결국 이 다윗이 언젠가는 자기보다 높은 위치에 올라갈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았기 때문에, 사울왕은 자기 신하로 있는 다윗을 보면서 두려워하였다고 오늘 12절과 15절 말씀 가운데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바로 사울 왕의 뒤틀린 영적인 상태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다윗을 보면서 잠재적인 위험을 느끼면서, 시기하고 질투하고 있는 이 사울의 모습이야말로 그가 얼마나 삐뚤어진 영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 바로 서 있지 못한가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사울은 지금 무엇을 보고 있냐면, 다윗만 보는 겁니다. 사실 이 순간에 보아야 할 것이 있다고 한다면, 다윗을 볼 것이 아니라 다윗 뒤에서 움직이고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죽였습니다. 다윗이 이를 지혜롭게 처리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 뒤에는 누가 있었냐면 바로 하나님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다윗을 볼뿐만 아니라, 그 다윗 뒤에서 역사하고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될 터인데, 사울은 다윗까지는 보았지만, 그 다윗 위에서 역사하고 있는 하나님은 결코 보지를 못했습니다.

다윗이 훌륭했던 이유는 다윗이 그 자체로 훌륭했기 때문이 아니라, 사실은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 하셨기 때문에 훌륭할 수가 있었습니다. 12절 말씀에서도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다윗을 묘사하면서, 다윗이 하나님과 함께했고,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했다고 하는 이야기를 성경 속에서 많이 기록해 놓고 있는데, 그런데 사울은 그 다윗을 보면서 그 다윗과 함께하신 하나님은 전혀 쳐다보지 않습니다. 그저 다윗을 보고 두려워하고 다윗을 보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증오하는 것입니다.

사실 제대로 된 영성이라고 한다면, 뒤틀려진 영성이 아니라, 바른 영성이라고 한다면, 다윗의 모습을 볼 때 어떻게 반응을 해야 정당한 반응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시도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에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돌아보아야 그게 제대로 된 영성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우리는 항상 우리 자신을 돌아봐야,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고, 그 사람을 보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배 아파할 것이 아니라, 사촌이 땅을 사면 배아파할 것이 아니라, 다윗이 승리하는 그 모습을 보면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그 순간에 나 자신을 되돌아봐야 됩니다.

하나님, 저 다윗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골리앗을 무찔러 쓰러뜨렸는데, 하나님 왜 나는 그렇게 못했습니까? 왜 나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했습니까? 자기 자신을 바라보면서, 자기가 어디에서 무엇이 잘못됐고, 왜 내가 이곳에 이 모양 이 꼴인지 자신의 모습을 살펴보면서, 하나님과의 관계 가운데서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를 파악하고 그리고 자기 자신을 회개하고 바꾸는 그런 모습을 보여야 그게 제대로 된 믿음의 사람의 모습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항상 기도할 제목이 있다고 한다면, 사람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뒤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믿음을 달라고 기도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만일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미움과 시기와 증후와 질투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영적으로 건강하지 못하다고 하는 표시입니다. 너무나도 안타까운 것은 우리 성도들의 마음 가운데 우리 성도들의 말 가운데, 시기와 질투와 미움과 증오들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막 나와요 창피한 줄 모르고, 미워하는 것을 정당한 줄 알아요. 사랑하지 못하고 있는 그 모습이 얼마나 더러운 모습인지 모르고, 그것을 그냥 정당한 것처럼 얘기하고 있는 모습이 우리들의 모습이에요.

하지만 만일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미움이 있다고 한다면, 시기가 있다고 한다면, 질투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건강한 것이 아니라, 아주 위험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를 모르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사울은 다윗을 보면서 그 뒤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왜 다윗을 이렇게 사용하고 계시는지에 대해서 믿고 신뢰하고, 그리고 자기 자신을 돌아보아야 되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다윗을 죽이려고만 달려드는 거에요.

다윗은 이 순간에 사울 왕이 자기를 향해서 창을 던졌지만, 이 순간에 다윗은 두려워했다고 하는 표현이 여기에는 없습니다. 어쩌면 시편 23편의 고백이 여기에 그대로 있는지 몰라요.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지금 하나님께서 목자가 되었어서 우리의 길을 인도하고 계시는데, 그 길이 때로는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인도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할지라도, 그러나 주께서 나와 함께하신다고 하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두려워할 것이 없어요.

다윗은 창을 던지는 그 순간에도,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 담대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역사하고 계시고, 하나님께서 심지어 악마마저도 제어하신다고 하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을 수가 있는 겁니다. 하지만 사울은 그 하나님께서 역사하신다고 하는 사실을 믿지 못했기 때문에 시기하고 증오하고 두려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윗의 장점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 사울 왕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을 때는 정말 멋진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사울을 떠난 그 이후에는, 사울 왕의 모습은 초라하기 그지 없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한 다윗은 그저 수금을 타는 종에 불과했고, 신하에 불과했고, 아직 높은 위치에 올라간 사람이 아니었지만, 그러나 다윗은 위대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울은 왕이었지만 화려한 모습을 가지고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함께하고 계시지 않았기 때문에 사울은 아주 초라한 인생이 되고야 만 것입니다. 누가 위대한 사람일까요?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는 것을 기대해야 될까요? 겉모습이 화려한 것을 꿈꾸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겉모습이 대단한 것 가지고 헛된 자부심을 갖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정말로 중요한 것은 겉모습이 아니라, 과연 그 안에 “하나님이 계시느냐? 안 계시냐?”가 훨씬 더 중요해요.

사울이라고 하는 그 인물은 어떤 인물입니까? 사울은 왕입니다. 사울이 그 차지하고 있는 자리는 온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왕이라고 하는 최고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아무나 그 위치에 올라갈 수가 없습니다. 모든 군사들을 향해서 명령을 할 수 있는 최고 통수권자의 자리입니다. 사울 왕의 명령 한 마리면, 나는 새도 떨어뜨릴 수 있는 어마어마한 권력을 가진 자리가 사울 왕입니다. 하지만 그 안에 하나님이 안 계시기 때문에, 사울 왕은 초라한 모습이었어요. 아무도 존경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지만 다윗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다윗은 일개 신하에 불과합니다. 나이도 어립니다. 아무런 경력도 없습니다. 이제 겨우 골리앗을 죽였을 뿐입니다.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 다윗 안에 하나님께서 함께 계셨기 때문에 사울은 그 다윗을 보면서, 두려워하고 있는 다윗이야말로 대단한 인간이 되어 버린 줄로 믿습니다.

종종 우리는 겉모습을 보고 평가하고, 겉모습을 보고 시험에 들고, 겉모습 때문에 우리는 주눅 들 때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무엇을 봅니까? 겉모습을 봐요. 아니 세상 사람들이 아니라, 심지어 성도라고 이름하고 있는 사람들도 무엇을 봅니까? 무엇을 보죠? 겉모습을 봐요. 무슨 겉모습을 보나요? 건물을 봐요. 건물을 보고, 그 건물이 화려하면, 그런데 화려한 모습이었고, 조그마한 곳에서 예배를 드리고, 상가에서 예배드리면, “애개…”?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우리 교회가 감사하게도 이번에 예배당을 가지게 됐습니다. 너무나도 기쁘고, 감격스럽고, 지난주에 우리가 착공 예배를 드리는데, 우리 성도님들의 마음 가운데 얼마나 기쁨이 넘치는지, 그 기쁨을 제가 그냥 그대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절대로 착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건물을 가진다고 하는 것이 자동적으로 우리가 위대한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좋은 교회당 건물을 가지면, 대단한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좋지 않다고 하는 얘기가 아니에요. 제 마음에 기뻐요. 왜냐하면 이곳에 있을 때보다 좀 더 사역을 더 잘할 수가 있을 것이고, 더 영향력을 이 지역사회 가운데서 더 많이 비출 수 있을 것이고, 전도를 할 때 복음의 사역을 할 때 정말 유용하게 사용될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고, 이것을 얻게 되기까지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지금까지 모든 것들을 인도해 주신 것들을 생각할 때,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하지만 우리가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화려한 건물, 전주 시내에서 제일 좋고, 시설이 가장 뛰어나고, 주차장 대수 몇백 대를 세울 수 있는 그런 주차장에, 모든 스포츠 시설까지 다 갖추고 모든 것들을 완벽하게 갖춘 그런 어마어마한 교회를 세우면, 그러면 자동적으로 우리 교회가 좋은 교회가 되는 것 절대로 아닙니다.

그릇은 무엇으로 만들어져 있는가 보다 그 안에 무엇을 담고 있느냐가 훨씬 더 중요합니다. 쓰레기를 담고 있으면, 그 무엇으로 만들었어도 쓰레기통이고, 그 안에 보석을 담으면 그것이 무엇이라고 할지라도, 보석통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고린도후서 4장 7절의 말씀에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예루살렘의 그 어마어마한 그 건물을 보신 주님께서, 아마 이 인류의 역사상 예루살렘 성전보다도 더 아름답고 더 화려하고 더 웅장한 성전은 아마도 없었을 거예요. 그런데 그 아름다운 성전을 보신 우리 주님께서,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돌 위에 돌 하나가 넘지 않고 무너질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고, 정말로 무너졌어요.

오늘 저와 여러분들은 허울뿐인 사울과 같은 사람들이 되지 않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것들, 이 세상 사람들이 불허하는 모든 것들을 다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내가 괜찮은 사람이라고 착각하지 않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무리 연약하고 부족해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속에 모시고, 우리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가지고 있을 때, 그 인생이 복된 인생이오. 그 인생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귀한 삶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다윗은 놀라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울은 그 다윗을 죽이려고 달려들고 있는데, 다윗은 그 사울을 위해서 섬기고 봉사하는 신하의 일을 계속하는 모습이 오늘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쩌면 다윗으로는 정말 억울할 것 같아요. 자기가 잘못한 것도 아무것도 없는데, 자기를 죽이려고 창을 던지는 그 서울을 보면서 배신감을 느꼈을 것이고. 사울을 향해서 이를 악물을 수도 있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 자리에 있었다고 한다면, 어쩌면 우리는 더 이상 사울과 상대하기를 싫어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다윗은 사울이 다윗을 천부장을 삼으니까, 천부장으로서의 일을 하는 것이고, 다윗이 사울의 종이 되어서, 사울을 섬기는 일을 꾸준히 지혜롭게 했다고, 13절의 말씀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할 수 있었던 방법은 사울이 창을 던졌을 때, 자기는 칼을 빼서 사울의 목을 칠 수도 있었습니다. 골리앗을 죽였는데, 사울 죽이는 거 쉬울까요? 어려울까요? 쉽습니다. 골리앗을 죽일 수 있었던 다윗이 사울을 죽이겠다고 마음먹으면 충분히 죽일 수도 있었습니다. 백성들은 말하기를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라고 했기 때문에, 백성들의 인기를 얻고, 쿠데타를 일으키려면 일으킬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빨 빠진 호랑이와 같은 그 사울이 무서울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다윗은 그때 쿠데타를 일으키고 사울 왕을 죽이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나를 왕으로 세우신다고 했으니까, 그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해서, 쿠데타 일으키고 왕위를 찬탈한 것이 아니라, 놀랍게도 백성들을 위하여서 일을 지혜롭게 성실하게 감당하고 있는 모습이 오늘 본문의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는 것이고, 그 모습을 볼 때 다윗의 모습이 정말로 존경스럽기 그지없습니다.

본문의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들은 이런 간절한 소망이 생깁니다. 이 시대에도 이런 다윗과 같은 사람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모두가 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혈안이 되어 있는, 정치꾼들이 판치는 이 시대에, 다윗과 같은 신실한 사람이 있을 수만 있다고 하면 얼마나 좋을까? 요즘과 같이 시기와 반목이 판을 치고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기 위해서 안달이 나 있는 이 시대에 조그마한 실수 하나도 용납지 않고, 서로 잡아먹으려고 하는 이 시대에, 그리고 모든 것을 다 빼앗아 가버려고 하는 이 삭막한 시대에, 다윗과 같이 신실한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고 하는 간절한 소망이 생깁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알고 계십니까? 그런 분이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윗과 같은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향해서 비난하고, 욕하고 조롱하고, 침 뱉었습니다. 창을 던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채찍을 내리치며 온갖 모욕을 다 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배반했고, 모든 사람들이 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가는 바로 그 시점에, 우리 같으면 “나는 더 이상 이 길 가지 못하겠다”라고 하고, 뒤돌아서 포기해야 할 것만 같은데, 예수님께서는 그 순간에도 묵묵히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시며, 십자가 위에서 우리 위에 피 흘려주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은 그래서 예수님을 바라보면 좋겠습니다. 이 세상에서 그 어떤 사람도 우리의 소망이 되지 못합니다. 늘 우리에게 힘이 되어 줄 것 같은 사람들도 그 호흡이 끊어지면 더 이상 우리를 도와줄 수 없고, 사람은 그 마음이 변해서 더 이상 우리를 도와줄 수도 없고, 자식들을 믿었지만 그 자식들은 영원히 우리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이 시대에, 돈을 의지하고 싶지만, 그 돈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 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착취하고, 우리를 더 힘들게 만들고, 고통을 주는 이 시대에, 우리가 진정으로 믿고 의지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밖에 없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그 주님을 바라보면서, 오늘도 우리의 연약한 것들을 다 내어놓고, “주님, 이 문제들을 해결해 주시고 은혜를 달라”라고 기도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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